지난 수요일인 5월 23일, 내가 새로 낸 잡지를 이야기하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다. 오늘 토요일, 〈국민일보〉에 기사 하나 더 실렸다. 인천에서 〈국민일보〉 사기 너무 어려워,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 기자인 ㄱ 아저씨(내가 서울에 가면 잠자리를 내어 주는 선배)한테 전화로 부탁을 한다. ㄱ 아저씨는 첫 마디로 대뜸, “아,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네? 인터뷰요? 하도 귀찮게 전화를 해서 대충 대답해 준 건데요?” “그게 뭐예요. 입으로 하는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고.” “어, 그거 내가 인터뷰 한 것도 아니고, 물어 보니까 전화로 대답해 준 것뿐인데. 하긴 뭐, 그것도 인터뷰라면 인터뷰일 수밖에 없으니.”

 저녁나절, 조금씩 차 오르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조선일보〉 기자는 나를 취재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보지 않았고(그러니 내 얼굴도 모른다), 출판사로 전화해서 내 연락처를 알아낸 뒤, 자기한테 도움되는 몇 가지 정보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알아냈다고 할까. 그리고 그 정보로 기사를 썼다. 이 자리니까 말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전화기를 붙들고 싸웠다고 할까? 그 기자가 쓴 글을 보니, 내가 ‘화를 냈다’고 적어 놓았더만.

 그런데 나를 만나본 기자들이 쓴 기사보다, 그저 몇 가지만 나한테 전화로 물어 본, 게다가 싸우기까지 했던 기자가 쓴 글이 훨씬 잘 썼다. 그 기자가 얼핏 하는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1998년에 한글학회 공로상 받으셨네요? 그때 사진을 보니 너무 젊어서 신문에 쓰기 어렵겠네요.”

 〈조선일보〉에 실린 내 사진은 내 것이 아닌, 자전거잡지 〈더 바이크〉 것이다. 그곳 사진을 얻어서 쓴 것인데, 그건 그거고, 1998년 내 사진이라 해도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게 아니라 다른 어느 매체에서 얻었던 것이다(아마 〈한겨레〉 기자가 찍은 사진이지 싶다). 그런데 그 사진자료가 지금도 있다니! 다른 신문사에는 자기들 자료가 남아 있을까? 아니,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기사를 실으며 사진 자료를 찾을 때 자기들 ‘데이타베이스’를 뒤져 보는가?

 속으로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기자얼이라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취재도 안 한 주제에 글만 훌륭하게(?) 썼으니, 소설가다운 솜씨가 많이 엿보여서, 기자보다는 소설가로 일하는 편이 낫다고 느껴지는 〈조선일보〉 기자’이지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만큼 기자로서 기본 소양이 되어 있다는 소리이다. 칭찬할 것, 아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진보와 혁명이 살아난다. 진보정당이든 진보매체이든, 수구꼴통이라고 하는 매체 사람들이 하는 만큼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한편, 독자들 마음을 움직이거나 울릴 수 없다. 기자들 글솜씨 하나만 놓고 보았을 때, ‘조선일보 기자 발가락만큼이라도 따라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현장취재를 ‘조선일보 기자 신발 밑창이 떨어지는 만큼 따라가려고’ 다리품 파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여태까지 겪어 보기로는 늘 ‘글쎄요’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이것은 받아들인다. 다만 한 가지, 헌책방 이야기와 책 이야기를 취재하고 글로 다루는 기자들 모습과 몸가짐과 글을 보면, 나라안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 들을 통틀어 ‘조선일보 기자 1/10만큼이라도 되는 기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진보매체든 진보가 아닌 매체이든 ‘조선일보 욕’은 신나게 해댄다. 자기들은 그만큼 애쓰지 않으면서.

 그래, 〈조선일보〉가 잘못하는 것, 이 가운데 가장 크게 잘못하는 정치와 사회와 교육 기사(다른 기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있다는 사실이 큰 재앙이자 슬픔이라고 본다)는 마땅히 비판하고도 남는다. 비판뿐 아니라 송곳으로 후벼파듯 갈기갈기 파헤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비판으로만 그치고, 우리 스스로는 한결 나은 모습으로 거듭나려 하지 않는다면?

 진보를 외치고 싶은 사람들은 느껴야 한다. 느낀 대로 움직여야 한다. 진보든 무슨 운동이든 한삶을 바쳐서 두 눈을 감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한때라도 흐트러짐이란 있을 수 없다. 자, 보라. 〈조선일보〉 기자 가운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흐트러짐을 보이는 기자가 있는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 가운데 자기 나이 예순이 되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고이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아니, 있기나 한가? 술자리에서만 목소리 높이고, 정작 자기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조선일보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4340.5.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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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지 친구이야기
이와타 겐자부로 지음, 이언숙 옮김 / 호미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백 가지 친구 이야기
- 글ㆍ그림 : 이와타 켄자부로
- 옮긴이 : 이언숙
- 펴낸곳 : 호미(2002.5.25.)
- 책값 : 8700원


 그제 저녁, 모기가 하도 물어뜯어서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꾹 참고 잠을 잤습니다. 엊저녁, 하는 수 없이 모기향을 태웁니다. 모기는 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기향 내가 머리를 어질어질 만듭니다. 그리고 모기향 내에 어질어질해 하며 갈 곳 몰라 하는 바퀴벌레 두 마리 신문을 똘똘 말아 때려잡았습니다.


― 달님의 친구는, 그래,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 (10)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길이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제 살림집이 있는 4층 마당에도 물기가 배어 있습니다. 비가 쏟아붓지는 않고 땅을 살짝 적실 만큼 왔군요. 이슬비라고 해야 할까 가랑비라고 해야 할까, 하늘에 짙게 드리운 먼지띠를 조금 씻어낸 비입니다. 아니, 비님입니다. 우리들 사람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려 놓은 뿌연 하늘을 말끔하게 씻어 주려는 비님입니다. 다만, 비님 마음씀만으로는 하늘이 맑아질 수 없어요. 어젯밤 잠깐 먼지띠를 씻었다고 하나, 우리들 사람은 오늘 하루 또다시 엄청난 자동차 배기가스며 갖가지 화학물질 담긴 쓰레기물이며 공해덩어리를 잔뜩 쏟아낼 테니까요.


― 나뭇가지가 벌거벗었다고? 자세히 보면, 가지마다 작은 겨울눈이 촘촘해.
   나뭇가지의 친구는 작은 벌레들. 몸을 떨며 마음속 가득 눈을 틔우네. (28)


 어느 분이었던가, 환경운동이 가야 할 가장 마지막 길이라면, ‘쓰레기가 되는 물건을 쓰지 않고, 무슨 물건을 쓰든 버리지 말며 어디에든 쓸모가 있도록 찾아서 쓰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가.

 요사이 이 말을 곰곰히 되씹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길을 거닐며 골목 어귀에도 모퉁이에도 구석진 데에도 쓰레기가 버려져 있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이 골목길에 사는 분들은 자기한테 소중한 삶터이기 때문에 쓰레기를 안 버리는구나. 보여도 자기들이 먼저 집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골목길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무슨 물건이든 그에 걸맞는 쓰임새를 찾아서 알뜰히 쓰지 않겠느냐 싶은 생각.


― “정말 그래, 친구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 물쥐가 속삭인다.
   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 가득한 별님. (50)


 오늘 하루를 맑게 비추어 줄 해님은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마쯤 있으면, 또는 하루나 이틀이나 며칠쯤 있으면 다시 얼굴을 드러낼 해님이겠지요. 못난 사람한테도, 잘난 사람한테도, 몹쓸 사람한테도, 착한 사람한테도, 더러운 사람한테도, 깨끗한 사람한테도, 늙은 사람한테도, 어린 사람한테도, 누구한테도 고르게 따순 볕을 내려주는 해님입니다. (4340.5.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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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옆의 약자
이수현 지음 / 산지니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우리 옆의 약자
- 글쓴이 : 이수현
- 펴낸곳 : 산지니(2006.3.31.)
- 책값 : 12800원


 자전거를 타는 까닭이라면 ‘더 빨리 가고 싶기 때문’은 아닙니다. 때때로 빨리 갈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탈 때도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면 짐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가방을 메고 걸을 때보다는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면 힘이 한결 덜 들어요. 그렇지만 자전거 타는 까닭은 ‘짐을 나를 생각’ 때문만은 아니에요.


― 사업주들은 일은 많이 시키면서 돈은 적게 주었다. (37쪽)


 내 두 다리로 움직이는 일, 내 몸뚱이를 쓰는 일이기에 자전거를 탑니다. 걷기가 두 다리를 쓰듯, 자전거 타기도 두 다리를 씁니다. 자가용은 두 다리를 안 씁니다. 버스와 전철이나 기차 또한 두 다리를 쓸 일이 없습니다. 자가용을 타면 책조차 못 읽습니다.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에서는 잠깐이나마 책을 쥘 수 있습니다. 다만,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에서는 책을 오래 못 읽어요. 꽉 막혀 있는 쇠붙이 통인 터라 숨이 막혀서 머리가 지끈거리니까요.

 자전거를 탈 때에도 책을 못 읽지만, 내 몸뚱이를 써서 움직이기 때문에 차츰차츰 몸이 튼튼해집니다. 몸이 차츰 튼튼해지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도 몸이나 마음이 한결 싱싱합니다. 집에서 씻고 치우고 아이 돌보고 한 뒤에도 책을 잠깐 펼칠 수 있는 기운이 남아요.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게 되고, 자기한테 주어진 한삶이라고 하는 시간을 한껏 알뜰히 즐길 수 있습니다. 자가용 몰며 보내는 시간과 자전거 타며 보내는 시간은 서로한테 얼마나 다르게 영향을 끼치는가요.


― 두발제한과 체벌 등이 아직도 횡행하는 이유를 학생들은 입시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했다. (160쪽)


 요사이 자전거 타는 분이 부쩍 늘었습니다. 찻길에서도 싱싱 달리는 분을 곧잘 만납니다. 하지만 홀가분하게 자전거를 즐길 줄 아는 분은 썩 안 늘었구나 싶어요. 자전거 타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몸을 가꾸는 일이요, 자기 둘레 사람들을 더 두루 헤아리는 일이며, 자기가 디디는 이 땅을 더욱 돌아보고 보듬는 일인데 말입니다.

 찻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자동차들이 얼마나 자전거꾼한테 폭력을 휘두르는지 느끼고, 거님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이곳에서는 자전거가 걷는 이한테 폭력을 휘두를 수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없다면, 자전거 타는 보람이란 어디에서 찾을까요.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 한갓진 취미생활이 자전거 타기일 수 없습니다. (4340.5.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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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4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전거 타는 거 참 좋아하는데 ㅎㅎ 오래타면 엉덩이가 좀 아프긴 하지만요
건강에도 좋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느낌이 뭐랄까, 좀 다른 느낌이죠.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도 그렇고.

참 항상 말미에 붙이시는 <ㅎㄲㅅㄱ>뭔지 궁금합니다. 평안한 빨강날 되세요 :)

파란놀 2007-05-2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 다른이름(호, 별칭)을 줄인 말입니다.
"함께살기"에서 닿소리를 딴 거예요~ ^^
 



 어제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았는데, 이 기사는 〈문화연대〉에서 낸 성명서 하나를 거의 고스란히 옮겨놓은 ‘퍼오기 기사’였다. 이 퍼오기 기사 원글을 인터넷에서 찾아서(http://www.culturalaction.org) 읽어 보았다. 〈시민의신문〉이 문을 닫게 되고 〈시민사회신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일을 ‘도저히 환영할 수 없다’고 밝히는 성명서.

 이 성명서를 읽으면, ‘그래, 그렇다면 잘못이 누구한테 있고, 이 잘못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알맹이를 잡을 수 없다. 〈시민의 신문〉이 문을 닫게 한 주범인 이형모 이사를 나무라는 건지, 이형모 이사를 감싸안은 ‘한국 사회 대표 시민사회단체’를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다. 또한, 애써 이런 답답이들과 싸우며 곧은 목소리를 내온 〈시민의 신문〉 기자들 외침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아 온,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와 주류 시민사회단체와 비주류 시민사회단체를 탓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누구 들으라고 쓴 글이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제대로 짚기나 하고 쓴 글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문득, 이 단체 〈문화연대〉라는 곳은 그동안 무엇을 해 왔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딱한 것은, 이런 〈문화연대〉 성명서를 거의 그대로 ‘퍼오기 기사’로 실은 〈오마이뉴스〉 기사.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그 기자는, 앞뒤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금이라도 살핀 뒤 그런 ‘퍼오기 기사’를 썼는가? ‘퍼오기 기사’이니 취재도 안 하고, 책상 앞에서 인터넷만 끄적거리다가 썼을는지 모른다. 둘레에서 몇 마디 나온 이야기를 어느 만큼 그러모아서 쓰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문화연대〉에서 성명서를 쓴 사람, 또 〈오마이뉴스〉에서 퍼오기 기사를 쓴 사람은 모르리라. 자기들이 얕은 생각으로 함부로 쓴 그런 글 하나 때문에 참과 거짓이 엉뚱하게 알려지게 되는 줄은. 그리고 그 엉뚱하게 알려지는 글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기가 쓰는 글에 ‘비판’이라는 꼬리말을 단다고 해서 그 글이 비판인가? 비판이란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다. 비판을 하려면, 누구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해야 하며,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판이 나올 수 없다. 깊이 파고들지 않은 채, 깊이 사랑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을 쏟지 않은 채 내뱉는 말은 ‘헐뜯기’일 뿐이다.

 내가 책소개 기사를 거의 안 읽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책소개 기사를 쓰는 기자나 학자들은 ‘자기가 소개하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며 읽지 않는다. 종이에 박힌 활자는 읽을 줄 알아도, 종이 활자에 담은 지은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책 하나 펴내는 사람은 ‘돈 되는 상품’으로 책을 펴내지 않는다. 뭐, 이런 상품으로 펴내는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 그리고 상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기자도 있을 테고. 다만, 나는 상품으로 책 만드는 사람과 상품으로 만들어진 책을 소개하는 기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책을 펴내려고 했던 사람이 내놓아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은 ‘한 권 책(이백 쪽이든 사백 쪽이든)’이지만, 이 한 권을 이루고자 기나긴 세월 땀-사랑-믿음-다리품 모두를 담았다. 서른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하고, 예순 해 한삶이 책 하나로 바쳐지기도 한다. 책 하나를 펴내고자, ‘다른 책’ 10만 권을 읽은 사람이 있고, 책 하나 펴내고자, 세상사람 1만 사람을 만나거나 부대낀 사람이 있다.

 책은 줄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책소개 기사는 줄거리 소개가 아니다. 줄거리 소개로 그치는 기사라면, 또는 지은이와 출판사 요새 형편을 알리는 기사라면, 그리하여 책 하나 펴내는 속뜻과 깊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기사라면, 모두 쓰레기라고 느낀다. 쓰레기일 수밖에 없지. 그 기사를 읽는 우리들 시간을 아깝게 내버리게 하는 쓰레기,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더럽히며 종이를 헤프게 버리게 하는 쓰레기.

 책을 읽을 때, 첫 쪽부터 맨 마지막 쪽까지 꼼꼼히 살펴야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줄거리를 다 외었다고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몇 쪽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 줄 달달 읊는다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지은이 해적이를 외우고 출판사 도서목록을 죽 적어내려간다고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참말로 책을 ‘읽었다’고 말하려면, 그래서 책을 ‘소개한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 하나에 담긴 온 우주를 말하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일이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몹쓸 짓인가? 책 하나에 담은 한 사람 온삶을 자기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책을 소개한다고 끄적거리는 일이란 얼마나 얼치기 노릇이란 말인가? 책 하나로 나누려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만한 크기이며 부피인지 껴안아 보지 않고서 섣불리 읊는 칭찬과 비판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말장난인가? 책을 펴내는 사람은 ‘사람들한테 제대로 읽히기’를 바란다. ‘많이 팔리기’가 아니라 ‘두루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책을 소개한다는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매무새로 글을 쓰는가? 지난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는 ‘사람들한테 더 많이 팔리고 읽힐 수 있던 길’을 깨끗이 접어두고, ‘사람들이 어느 때라도 알아보며 찾아 줄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걸어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기한테 돌아올 인세를 왜 자기 형제나 피붙이한테 건네지 않고, 북녘 어린이한테 주고 싶어했을까? 이 숙제를 스스로 풀어내지 않으려는 기자라면, 지금 곧바로 글쟁이 노릇을 집어치우고 다른 밥벌이를 알아볼 일이다. (4340.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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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하는데 어깨죽지며 팔뚝이며 근질거립니다. ‘씻은 지 좀 되었나?’ 싶어서 도서관 문을 닫고 4층 살림집으로 올라가 찬물로 몸을 씻습니다. 몸을 씻는 김에 수건 하나 빱니다. 다 빤 빨래는 집게옷걸이로 집어서 4층 마당 한켠에 넙니다. 오늘은 햇볕이 따뜻해 잘 마르겠네요. 이제 내려갈까 하다가, 올라온 김에 아침을 먹자고 생각합니다. 된장 풀고 감자와 양파 썰어 김치와 참치 조금 넣고 간을 맞춘 칼국수 한 그릇 끓입니다. 밥을 퍼 냄비에 담아 살살 섞으면 아침 준비 끝.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즐깁니다.
 밥을 다 먹은 뒤에는 냄비에 물을 붓습니다. 이 물로 냄비 구석구석에 붙은 찌끄레기를 떼어냅니다. 저녁을 먹을 때에는 이 냄비를 그대로 씁니다. 제가 먹은 냄비이니까, 이 그릇에 물을 더 붓고 된장 풀고 푸성귀 조금 넣으면 아침과 마찬가지로 쓸 수 있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햇볕바라기를 잠깐 하면서 동네를 죽 휘둘러봅니다. 맑은 햇볕은 지붕 낮은 집에도 높직한 아파트에도 골고루 내리쬡니다. 다만, 높직한 아파트는 그늘을 너무 많이 만드네요.


 달리는 전철에도 내리쬐고, 자동차와 찻길에도 내리쬐는 이 햇볕은, 저기 경상도 안동땅에도 내리쬐겠지요. 기지개를 켜고 담벽에 기댑니다. 지난 5월 17일, 일흔한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를 떠올려봅니다. 몸이 나빠서 젊은 날부터 병치레를 하셨고, 오줌을 눌 수 없어 배에 누런 고무호스를 끼우며 여태껏 살아온 그분. 아프게 살아왔기에 아픈 이웃을 온몸으로 느끼셨지 싶습니다. 세상에 쓸모없이 버려진 자기 자신을 알았기에 이웃한 모든 낮은자리 사람을 껴안을 수 있었지 싶습니다. 가진 것 없이 사셨기에 책 몇 권 내어 적잖은 인세를 벌게 되었을 때, 그 돈은 자기 아닌 이웃한테 쓰며 사셨지 싶고요.


 이제 권정생 할아버지는 세상 걱정과 시름을 모두 내려놓고, 고운 흙과 맑은 물과 향긋한 바람이 감도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어떤 이는 ‘혼인해서 아이 낳고 살아야’ 어른이라고 합니다만, 혼인 안 하고(또는 못하고) 아이 안 낳고(또는 못 낳고) 살아간 권정생 할아버지야말로 어른이지 싶어요. 참 어른 말입니다. 자기 살을 깎아서 어린이한테 내어주는 사람, 자기 몸을 바쳐서 어린이를 보살피는 사람, 자기 마음을 다해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셨으니까요.


 한 어른이 저세상으로 갔으니, 이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고 추슬러 ‘또다른 어른’이 되어 살아가야겠지요. 예전에 권정생 할아버지한테 들은 말을 곱씹습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4340.5.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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