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버스데이 우리 동네 창비청소년시선 38
신지영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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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2.3.

노래책시렁 524


《해피 버스데이 우리 동네》

 신지영

 창비

 2021.11.30.



  작은집이 다닥다닥 모인 골목마을을 스무 해 즈음 지켜본 바를 옮겼다고 하는 《해피 버스데이 우리 동네》입니다. 글쓴이 맺음말 그대로 이 꾸러미는 ‘지켜본’ 바를 그렸구나 싶습니다. 다만, 지켜보기보다는 ‘살아낸’ 바를 그리면 한결 나았을 텐데 싶어요. 지켜보기는 으레 ‘구경’에서 맴돌고, ‘스치기’와 ‘지나치기’로 고입니다. 살아낸 바가 아닌 지켜본 바를 글로 담을 적에는 ‘꾸밈없이’ 담기보다는 ‘꾸며서’ 담으려고 하더군요. 더 가난하고 더 아프고 더 힘들고 더 지치고 더 고되고 더 까마득하다고 자꾸 낮추고 내리고 떨구려는 글치레로 휩쓸리기 일쑤입니다. 가난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가난은 가난입니다. 돈있는 저 너머는 그저 돈있는 저 너머일 뿐입니다. 가난하면 그저 다 아파야 하지 않고, 가난하니 다 불쌍하지 않습니다. 돈있고, 장사를 안 하고, 가게에서 힘들어 꾸벅꾸벅 안 졸면, 안 불쌍하거나 마냥 기쁜 삶일는지 아리송합니다. 가난한 푸름이는 으레 이런 마음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으면서 쓰기보다는, 그저 글쓴이 마음과 삶을 담으면 됩니다. 가난하기에 더 높여야 하지 않고, 안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글감으로 안 삼아야 하지 않습니다.


ㅍㄹㄴ


쓸모가 없다니 정말 다행이다 / 쓸모가 많아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 / 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쓸모가 뭔지 잊어버릴 거다 / 발견되지 않은 나만의 쓸모는 그래서 안전하다 (무쓸모/12쪽)


이 작은 교실에서도 / 가끔 네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 / 그러면 나는 내가 만졌던 네 마음을 떠올려 / 조금은 못생겼지만 그게 또 사랑스러운 / 우리의 마음 (닮다/26쪽)


너무 피곤해 코를 골다 / 자기 코골이에 놀라서 깨기도 한다 / 엄마는 (어려운 질문/44쪽)


눅눅한 지하의 공기를 뚫고 / 낮은 천장을 뚫고 / 주인집 지붕을 뚫고 / 푸른 희망의 지느러미 쫓아 헤엄쳐 올라가다 / 도착한 옥탑방 / 아직은 괜찮다 (이사/49쪽)


+


《해피 버스데이 우리 동네》(신지영, 창비, 2021)


발견되지 않은 나만의 쓸모는 그래서 안전하다

→ 그래서 못 찾아낸 내 쓸모는 아늑하다

→ 그래서 못 본 내 쓸모는 고스란하다

12


누구의 마음도 다 따뜻하게 느껴지지

→ 누구나 마음이 다 따뜻하다 느끼지

→ 다 마음이 따뜻하다 느끼지

27


찢어질 것도 없이 가난한 게 우리 집이라는데 그것도 감상적인 거였구나

→ 찢어질 데도 없이 가난한 우리 집인데 눈물꽃이었구나

→ 찢어질 구석 없이 가난한 우리 집인데 눈물팔이였구나

34


전대에 손을 찔러 넣고

→ 쌈지에 손을 찔러 넣고

→ 돈자루에 손 찔러 넣고

36


한 번만이라도 잡아 보면 안다. 서러워서 자신을 지키는 것들은 얼마나 말랑거리는 슬픔을 가졌는지를

→ 슥 잡아 보면 안다. 서러워서 스스로 지키는 이는 얼마나 말랑거리듯 슬픈지를

→ 살짝 잡으면 안다. 서러워서 스스로 지키는 누구나 얼마나 말랑말랑 슬픈지를

78쪽


네가 하루분의 기다림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 네가 하루를 기다리며 꾸역꾸역 삼킨대서 무슨 자랑이라고

→ 네가 기다리는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서 무슨 자랑이라고

82


누군가 다듬어 준 생선만 먹고

→ 누가 다듬어 준 고기만 먹고

→ 누가 다듬은 물고기만 먹고

86


담임이 심각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 길님이 근심으로 따스하게 말한다

→ 샘님이 깊고도 너그럽게 말한다

90


다문화 친구랑 짝을 지어서 동네 지도를 그려 올 것

→ 다살림 동무랑 짝을 지어서 마을길을 그려 와라

→ 나란꽃 동무랑 짝을 지어서 마을그림을 해 와라

90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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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시인선 122
배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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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30.

노래책시렁 523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배영옥

 문학동네

 2019.6.11.



  아무리 고되거나 힘겹게 일을 하더라도 노래하던 겨레입니다. 한겨레뿐 아니라, 푸른별 온겨레는 저마다 살림을 지은 바탕으로 일노래와 살림노래와 놀이노래가 오래오래 흘렀어요. 글은 몰라도 입으로 노래했고, 노래를 종이에 적지 않았어도, 온삶으로 부르는 노래는 온마음으로 남아서 두고두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움터(학교·서당·서원)를 다닌 사람은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노래’란 스스로 우러나오는 빛살입니다. 남이 가르치거나 시킬 적에는 ‘노래’가 아닌 ‘늪’이자 ‘굴레’입니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시’입니다. 조금도 노래가 아닙니다. 노래로 다가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배움터나 글판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워서 틀에 맞추는 ‘시’에 머뭅니다. 글삯을 받고 책을 내려면 ‘시’를 써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시’에서도 삶은 묻어나거나 흐르지 않더군요. 삶을 슬쩍 내비치는 듯 꾸미고, 삶을 살짝 흉내내는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사그라들기에 ‘시’입니다. ‘시쓰기’는 안 나쁘되, 노래나 글이 아닌 ‘시’만 쓰려고 하면 자꾸자꾸 허울에 갇혀요. 허우대만 키우는 굴레인 ‘시문학’입니다. 이제는 모든 틀과 담과 힘에다가 붓까지 내려놓고서 맨몸으로 노래할 때이지 않을까요?


ㅍㄹㄴ


원하지 않아도 / 언제나 길들여 나오는 토마토케첩처럼 / 숱한 감정에 나를 살아보기도 했다 (그림자와 사귀다/16쪽)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더 슬픔을 가진 /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뼈대의 감정/23쪽)


어제 그제의 네 구두가 아니라, 어제 그제 그끄저께의 네 속옷들이 아니라, 젖내 풍기는 젖먹이의 배냇저고리가 아니라, 네가 태어나기 이전 너와집 아궁이의 다 타버린 재가 아니라, (재활용함/39쪽)


+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배영옥, 문학동네, 2019)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 글님은 없고 글씨만 남기리라

→ 글보는 없고 글월만 남으리라

→ 글꾼은 없고 글만 남으리라

12쪽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하리라

→ 먼저 다녀간 뒷자리가 궁금하리라

→ 누가 먼저 다녀간 뒷내가 궁금하리라

12쪽


내가 당신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 내가 너를 감싸 주었다면

→ 내가 너를 막아 주었다면

→ 내가 자네를 보듬었다면

→ 내가 그대를 돌봤다면

13


어느 날 과거와 미래의 다른 얼굴이 나를 찾아온다면

→ 어느 날 어제와 모레가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온다면

→ 어느 날 뒷날과 앞날이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온다면

17


신(神)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 하늘이 우리한테 물어볼 때부터

→ 님이 우리한테 물을 때부터

18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 걸상을 주검널처럼 떠받드는

→ 걸상을 널처럼 떠받드는

20


이곳은 흰 공간에 아무것이나 채워넣은 것처럼

→ 이곳은 흰데 아무렇게나 채워넣은 듯

→ 하얀 이곳에 아무렇게나 채워넣은 듯

21


비누는 비누의 이름보다 좀더 슬픔을 가진 뼈대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 비누는 비누란 이름보다 좀더 슬픈 뼈대라는 마음에 가깝고

→ 비누는 비누란 이름보다 좀더 슬프게 뼈대 마음에 가깝고

23


짧은 주석 하나 없이 한 생애가 저리 일목요연할 수 있다니

→ 덧말 하나 없이 한살이가 저리 가지런할 수 있다니

→ 붙임말 짧게 없이 한삶이 저리 번듯할 수 있다니

28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 네 빛나는 손바닥을 만진 적이 있지

→ 그대 빛나는 손바닥을 쥔 적이 있지

33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 나는 네 손바닥에서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 난 그대 손바닥에서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33


정리되지 않은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 글월을 못 추스르고 헤맬 때도

→ 노래를 못 가다듬고 헤맬 때도

3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던진 돌멩이

→ 누가 나한테 던진 돌멩이

40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 햇볕에 포도나무 잎사귀만 푸르게 우거지고

→ 뙤약볕에 포도잎만 짙푸르고

→ 여름볕에 포도잎만 짙푸르고

44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 숨은 뒤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숨은 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60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 포시랍다는 따뜻한 말로 사랑으로 넉넉하여 나는 아직 철딱서니가 없고

67


내게 서너 개의 가면이 있습니다

→ 나는 탈이 서넛 있습니다

→ 난 서너 가지 탈이 있습니다

70


송홧가루 덮인 연못 아래

→ 솔꽃가루 덮인 못에

→ 솔꽃가루 덮인 물밑에

75


들판으로부터, 햇빛으로부터, 바람으로부터, 바다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 들판에서, 햇빛에서, 바람에서, 바다에서, 조금씩 멀어간다

→ 들판을, 햇빛을, 바람을, 바다를, 조금씩 멀리한다

87


어느 날 나는 신원 불명의 변사체로 발견될 것이다

→ 어느 날 나는 알 길 없는 주검으로 나온다

→ 어느 날 나는 수수께끼로 죽은 채 나타난다

90쪽


날로 새로워지는 혁명은 아직 한참 멀었고

→ 날로 새롭기는 아직 한참 멀고

→ 날로 갈아엎기는 아직 한참 멀고

→ 날로 거듭나기는 아직 한참 멀고

99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들어온 듯하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건너온 듯싶다

→ 아무래도 새나라에 내딛은 듯하다

102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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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기억력 산지니시인선 14
윤현주 지음 / 산지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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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26.

노래책시렁 522


《맨발의 기억력》

 윤현주

 산지니

 2017.7.28.



  저희는 설과 한가위에 아무 데나 안 가며 시골집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한 지 꽤 되어요. 할머니 할아버지야 서운하시겠지만, 얼굴을 보고 싶다면 어느 때이건 느긋할 때 보면 됩니다. 마음을 다독이는 말로 한집안을 가꾸려는 길에는 “마음을 함께 하는 배움하루”가 있을 노릇입니다. 낳고 돌보고 함께 지낸 나날이 있기에 한마음이지는 않아요. 이래라저래라 핀잔하거나 가르치려는 말이 아닌, 촛불 한 자루를 사이에 놓고서 응어리를 풀 만한 사이여야 비로소 ‘한집안’이라고 느낍니다. 《맨발의 기억력》을 돌아봅니다. 여러모로 어깨에 힘이 안 빠진 글자락인데, 글은 맨손에 맨발에 맨몸으로 쓸 일입니다. 말부터 오롯이 맨마음에 맨빛으로 펼 일이에요. 한 마디를 꾸미면 두 마디 석 마디를 꾸밉니다. 한 줄에 멋을 담으면 그만 온통 멋내는 말씨로 기울어요. “맨발로 떠올리는” 이야기를 적으면 투박하기에 빛납니다. “맨발로 돌아보는” 하루를 옮기면 수수하기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시’도 ‘문학’도 ‘창작’도 아닌, 그저 이 삶을 글로 그리면 됩니다. 언제나 오늘 이곳을 글로 노래하면 됩니다. 서로서로 어울리는 마음을 가만히 말하듯 글로 담으면 그만입니다.


ㅍㄹ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진 골목엔 / 배고픈 개와 고양이들이 / 혈전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산복도로 풍경-골목/52쪽)


골다공증 앓는 초가집, 밤은 / 깊어 찬바람 삼투처럼 새어드는데 / 집안의 온기 죄다 그러모은 // 큰방 아랫목 / 쌀밥 한 그릇 냄새가 (아랫목 쌀밥 한 그릇/128쪽)


+


《맨발의 기억력》(윤현주, 산지니, 2017)


이곳은 열 달 동안 발을 차며 놀았던 자궁처럼 둥글고 캄캄하고 편안해요

→ 이곳은 열 달 동안 발을 차며 놀던 아기집처럼 둥글고 캄캄하고 아늑해요

16


한바탕 잔치 파한 뒤끝이다

→ 한바탕 잔치 뒤끝이다

→ 한바탕 잔치 끝난 뒤이다

24


세풍世風의 향방을 바꿀 수도 있겠구나

→ 가시밭을 바꿀 수도 있구나

→ 된바람을 바꿀 수도 있구나

67


난해했던 아버지라는 암호를 해독하면서 나의 청춘은 조금씩 낡아 갔다

→ 나는 고약하던 아버지라는 수수께끼를 풀며 젊음이 조금씩 낡아갔다

→ 나는 까다롭던 아버지라는 변말을 풀며 젊은날이 조금씩 낡아갔다

124


골다공증 앓는 초가집, 밤은 깊어 찬바람 삼투처럼 새어드는데

→ 느물뼈 앓는 시골집, 밤은 깊어 찬바람 새어드는데

→ 엉성뼈 앓는 풀집, 밤은 깊어 찬바람 스며드는데

128


시골 누옥에 누워 즐겁게 외풍을 맞는다

→ 시골 오막에 누워 즐겁게 바람을 맞는다

136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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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시-LIM 시인선 1
고선경 지음 / 열림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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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18.

노래책시렁 518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고선경

 열림원

 2025.1.10.



  2022년에 〈조선일보〉에 글을 내어 뽑히고서 선보인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라고 합니다. ‘시-LIM 시인선’이라고 하면서 ‘젊은작가’라는 이름을 내세우는데, ‘젊다’란 “나이가 적다 + 부딪히고 넘어지며 절다”라는 두 가지 밑뜻이 흐르는 낱말인 줄 알까요? ‘젊은글’이란 온몸으로 ‘늙은담’에 달려들어 깨부수며 이 삶을 새롭게 가꾸면서 배우는 하루를 적는 글이라는 뜻이어야 어울립니다만, ‘부딪히는 삶’을 적는다기보다는 ‘낱말짜기’에 얽매인다고 느낍니다. 나이만 늘려서 낡기에 ‘늙다’라 합니다. 나이만 앞세우느라 어진빛이 안 보이기에 ‘늙은글(원로작가)’이라 합니다. 나이테가 굵어가는 나무는 둘레에 푸른바람을 일으키고 꽃내음이 더없이 향긋하듯, ‘어른글’이란 살림빛을 낳을 줄 아는 나이를 품을 노릇인데, 막상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어른글부터 드뭅니다. 숱한 늙은글부터 ‘낱말짜기’에 갇히니, 젊은글도 어느새 ‘부딪히는 삶’을 팽개친 채 이래저래 낱말만 신나게 짜는 늪에 스스로 잠겨든다고 느낍니다. 깎는말(욕)을 안 써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씨발’이라는 막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 이런 말씨를 버젓이 쓰려나요? 얼뜬 늙은글을 갈아엎는 길은 언제나 하나이니, 바로 ‘일’입니다. 스스로 바람과 바다를 일으키듯, 땀방울로 이 삶을 일구는 ‘일’을 할 적에는 더없이 젊어서 빛나는 이야기를 담아 노래할 수 있습니다.


ㅍㄹㄴ


점심은 가볍게 먹자 / 그렇게 말하는 네가 좋다 (늪이라는 말보다는 높이라는 말이 좋아/19쪽)


내일도 놀이터에 하트가 남아 있을까? / 아이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 나는 제자리보다 테두리를 생각하네 (한양아파트/48쪽)


교수한테 내가 쓰다 만 시를 이어서 쓰라고 한다든지 / 집주인한테 이 집 내 거지? 문자를 보낸다든지 / 엄마한테는 친구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 이만 원 쥐여 주고 싶네 (디올 전속 디자이너가 내 옷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71쪽)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가 씨발! 하고 외쳤다 / 씨발…… 나직하게 읊조릴 수도 있었지만 /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소리를 질렀어 (검은 고양이와 자객/73쪽)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고선경, 열림원, 2025)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 내가 슬프면 넌 반드시 괴로워

→ 나를 울리면 넌 반드시 아파

12쪽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

→ 슬플수록 사납게 구는 내가 있고

→ 나는 슬플수록 사납고

12쪽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 떨어져야 맛있습니다

→ 워낙 곤두가 맛있습니다

16쪽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 이 모두가 씨앗에서 비롯했단 말이죠

→ 다 씨앗이 처음이란 말이죠

→ 다 씨앗부터 있단 말이죠

→ 다 씨앗에서 퍼졌단 말이죠

17쪽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다니

27쪽


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 나도 눈물 흘릴 짬을 바란다

→ 슬퍼할 틈이 있어야 한다

30쪽


실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 정작 나한테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 마치 내가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듯싶다

44쪽


내일도 놀이터에 하트가 남아 있을까

→ 이튿날 놀이터에 사랑이 있을까

→ 다음날 놀이터에 사랑이 남을까

48쪽


약속이나 마법처럼 석양이 폭신폭신 녹아내리고 있었다

→ 다짐이나 꽃힘처럼 놀이 폭신폭신 녹아내린다

→ 말씀이나 별빛처럼 노을이 폭신폭신 녹아내린다

49쪽


정중히 사과하면 아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 가만히 빌면 아이는 울려는 얼굴짓이다

→ 곱게 고개숙이면 아이는 울 듯한 얼굴이다

57쪽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계속해서 걸었다

→ 살짝 떨어져서 그대로 걷는다

→ 조금 틈을 두고서 걷는다

61쪽


내가 내 인생 잠깐 빌려주는 거니까 다들 부담은 안 가졌으면 좋겠네

→ 내가 내 삶 살짝 빌려주니까 다들 어려워하지 마

→ 내가 내 삶 슬쩍 빌려주니까 다들 꺼리지 마

72쪽


살아 있는 꽃의 냄새가 났다

→ 산꽃냄새가 난다

→ 꽃냄새가 싱그럽다

79쪽


뜨개질의 귀재여서

→ 뜨개질을 잘해서

→ 솜씨있게 떠서

→ 뜨개쟁이여서

→ 뜨개순이여서

95쪽


누군가가 나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었고

→ 누가 나한테 멀쩡하냐고 묻고

→ 누가 나더러 제넋이냐고 묻고

97쪽


마음속에 생겨난 높은 행거가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 마음속에 생겨난 높은 옷걸이는 내가 바라지 않았을 텐데

→ 마음속에 생겨난 높은 말코지는 내가 안 바랐을 텐데

→ 마음속에 생겨난 높은 횃대는 내가 바란 바 없을 텐데

130쪽


소파에 하트 모양 쿠션이 놓여 있기 마련이지

→ 폭신이에 사랑무늬 깔개를 놓게 마련이지

→ 걸상에 사랑그림 깔개를 놓게 마련이지

13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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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유고 시집 - 이 지구에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 지구가 될까? 이오덕 교육문고 5
이오덕 지음 / 고인돌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15.

노래책시렁 519


《이오덕 유고 시집》

 이오덕

 고인돌

 2011.7.10.



  1925년에 멧골마을에서 태어난 이오덕 님은 언제나 멧골자락 작은배움터에서 작은아이 곁에 서려고 했습니다. 2025년은 떠난 어른이 태어난 지 온돌(100돌)입니다. 나고, 자라고, 일하고, 걷고, 돌아보고, 쓰고, 읽고서, 마지막으로 숨을 마시고서 잠든 곳은 멧숲입니다. 언제나 멧새노래를 들었고, 멧새노래를 글결로 옮기면서 들려주었고, 스스로 멧새로 돌아가서 온누리 어린이하고 꿈을 그리겠다는 마음을 오래오래 남겼다고 할 만합니다. 《이오덕 유고 시집》을 펴낸 ‘고인돌’은 이오덕 님 책을 함부로·몰래 찍어서 여러모로 말밥에 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오덕 온돌’을 기린다며 서울 덕수궁에서 모이는 자리가 어제(11.14.) 있었다는데, 왜 굳이 서울 한복판을 고르는지 얄궂습니다. 멧새로 돌아가려 하던 멧사람을 그리려는 뜻이라면 ‘멧숲과 가장 먼 서울’이 아닌, 겨울에도 노래하는 작은새가 깃든 멧자락을 살펴야 맞을 테지요. 큰어른이 아닌 작은사람으로서 나즈막이 일하는 손끝을 헤아리는 작은이웃을 기다립니다. 모든 숲은 처음에 작은씨앗이었습니다. 모든 나라는 언제나 작은아이가 신나게 뛰놀고 자랄 적에 일어설 수 있습니다. 작은집과 작은책과 작은꿈을 품으려고 한다면 노래 한 줄 함께 읽을 테지요.


ㅍㄹㄴ


어둠이 쌓여 이렇듯 고요한 밤엔 / 먼 별나라로 날아가 버린 꾀꼬리와 산새들 / 다시 돌아올 것 같구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1958.5./87쪽)


물동이 이고 오는 어머니께 / 눈인사를 보내고 // 마을 앞을 나오면 / 나를 부르는 소리 // 저쪽 못자리 물속에 / 빨강  파랑 그림자가 달려간다 (학교 가는 길/241쪽)


거기 / 학교를 그만두고 식모살이 가던 / 순이의 인동꽃 같이 노오란 얼굴이 살아나고, / 짐을 진 채 벼랑에서 떨어져 병원에 갈 수도 없이 죽어간 / 석이 아버지의 상여가 넘어가던, / 진달래 피고 물들인 고갯길이 보이고, (산나물/323쪽)


대학생 언니가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답니다. / 대학생 누나가 불타 죽었답니다. / 선생님, 시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시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500쪽)


아, 우리가 어렸을 때 부르던 그 노래 / 그 노래를 부르지만 이 땅에ㅐ / 제비는 볼 수 없구나 / 제비가 왜 찾아오지 않나 // 제비가 찾아와도 집 지을 곳이 없고 / 집을 지어도 이 땅의 사람들 / 모조리 놀부가 되어 집을 뜯어버리고 / 제비집 더럽다 제비 똥 더럽다고 (제비/645쪽)


이 세상에서 모두가 쳐다보고 부러워하는 / 천국 중에서도 천국이 / 갑자기 끔찍하게 말도 할 수 없는 지옥으로 /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 그날 저녁 나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 밤을 까먹고 있었다. (천국의 끝장 1 2001.9.14./774쪽)


이제 나도 그 날이 왔구나. / 돌아갈 그곳을 나는 잘 알 수 없지만 / 다만 황홀한 빛 가득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 들리는 곳이라는 굳게 믿는다. / 그곳은 내 본향, / …… / 내 본향으로 /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산새같이 / 한 마리 새가 되어 두 날개 파닥거리며 / 빛과 노래가 가득한 그곳으로 간다. (이승은 하룻밤 2003.8.16./983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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