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마을에서 열다 (2025.4.30.)
― 인천 〈열다책방〉
1991년 8월에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작은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만 “코딱지만 한 13평짜리”를 떠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하고 언니하고 저는 마을과 이웃과 동무를 하루아침에 몽땅 잃어버려야 해서 새터로 가지 말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3’이어도 아버지 마음대로 인천 연수구 연수동 허허벌판 잿집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푸른배움터를 마친 첫 해인 1994년에는 하루 여덟 시간을 길에 쏟으면서 인천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사이를 오갔는데, 날마다 불수레(지옥철)를 치러야 했되, 날마다 길에서 책을 너덧 자락씩 읽었습니다. 인천 가는 길이 일찍 끊기면 밤새 인천까지 하염없이 걸으며 동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1995년 4월 5일에 드디어 지긋지긋한 잿마을(아파트단지)에서 떠납니다. 어머니는 눈물로 말립니다. “꼭 집을 나가서 신문사지국에서 일해야 하니? 뭣 하러 힘들게 살려고 하니?” “날마다 여덟 시간을 길에서 보내면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몸이 지쳐요. 길에서 길삯을 너무 많이 써야 하니 살림에도 나쁘고요. 저는 힘들게 살 마음이 아니에요. 온하루를 배움길에 쏟으려고 할 뿐이에요.”
2025년 4월 30일에 연수동을 걷습니다. 서른 해 사이에 하루쯤 이곳을 슥 지나친 적이 있지만, 제대로 걷기란 서른 해 만인 듯싶습니다. 논밭과 동산이던 마을은 감쪽같이 사라진 줄 아는데, 서른 해 사이에 길나무가 그럭저럭 자라기는 했고, 조금 큰 나무에 새가 내려앉아 노래를 베풀기도 합니다만, 끝없이 부릉거리는 너른길이 시끄럽고, 무엇보다도 하늘빛을 느긋이 헤아리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걷고 헤매다가 〈열다책방〉을 찾아냅니다. 찾아내고 보면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있지만, 서울내기(도시인)라면 어렵잖이 찾을 텐데, 이제 시골내기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으로서는 모든 큰고장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떠돌기 일쑤입니다.
북새통인 길바닥이라면, 고즈넉한 책집입니다. 새터로 새길을 열면서 새빛을 들려주는 책집입니다. 책집으로 걸어오기까지 마주한 모든 복닥길은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고, 이곳에 깃든 푸른빛을 하나하나 짚습니다.
책으로 열고, 이웃으로 열고, 이야기로 열고, 눈길로 열고, 손길을 모아서 살림길과 마을길을 여는 자리에는, 어느새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지더니 열매를 맺는 여름이 오겠지요. 이곳에서 엽니다. 네가 열고 내가 엽니다. 우리가 나란히 열어요. 한 걸음씩 열고, 한 마디씩 열며, 한 줄씩 엽니다. 셈 ‘10’은 ‘열’이란 이름인데, 새자리로 열어가는 첫길이기 때문입니다.
ㅍㄹㄴ
《K-공대생 열다, 책방》(김은철, 오리너구리, 2024.4.24.)
《편지 쓰는 법》(문주희, 유유, 2022.10.4.)
《전쟁 이후의 목소리들》(손송이 엮음, 뜬구름, 2023.12.29.)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루이스 세풀베다/엄지영 옮김, 열린책들, 2025.1.10.)
#LuisSepulv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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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