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료 이효정 런던베이글뮤지엄 생각없는생각
못 알아듣더라도 말을 한다. 겉몸뚱이를 보며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즈음 “걸어다니며 담배 꼬나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거의 못 볼 텐데, 내가 사는 전라남도와 고흥군에서는 날마다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뻔질나게 볼 수 있고, 시골마을에서는 그냥 어디서나 본다. 일부러 우리집 앞에다가 꽁초를 버리는 분도 있다. 그분한테 으레 말을 하니까 일부러 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드럽게, 짧게, 굵게, “아무 데서나 피우지 말고,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다 피웠으면 꽁초는 주머니에 챙겨서 집에 있는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리셔요.” 하고 말한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고장을 보면 ‘흡연실’이 따로 있되, ‘금연구역’이 넓다. 그렇지만 ‘금연구역’을 비롯해서 ‘병원 앞’이나 ‘기차역·버스터미널 앞 금역구역’에 스물이나 쉰쯤 모여서 너구리굴을 일으키는 분이 수두룩하다.
‘노동법’이 있다. ‘산업재해’를 다스리는 틀이 있다. 우리한테 눈과 귀와 손과 머리가 있다면, 노동법과 산업재해는 밑바탕으로 익힐 노릇이다. 누가 가르쳐야 하지 않다. 누구나 스스로 찾아보고 알아보고 살펴볼 노릇이며, 일터를 세워서 일꾼을 거느리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창업계획’보다 먼저 ‘노동법·산업재해’를 살필 노릇이다.
나는 ‘료’도 ‘이효정’도 ‘런던베이글뮤지엄’도 2025년 10월 31일까지 까맣게 몰랐다. 다만, 발길이 닿는 모든 마을책집에 마실하려는 삶이기에, 이래저래 온나라 마을책집을 마실하는 동안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이라는 책이 ‘지겹도록 곳곳에 꽂히거나 놓인’ 모습을 참말로 ‘지겹도록’ 보았다. 누리책집 〈알라딘〉에서도 하도 띄워 주고 신나게 팔아대기에, 누리책집에서 미리보기를 읽었고, 마을책집에서 가만히 서서읽기로 다 읽어내기도 했으나, 주머니를 털어서 사려는 마음은 여태 아예 든 적이 없다. ‘돈벌이·이름벌이·힘벌이를 하려는 장난질’이라고만 느꼈을 뿐, 이 책을 다루는 글을 쓰느라 살짝(10초) 틈을 내는 일마저 아깝다고 느꼈다.
일터를 차려서 여러 일꾼을 거느리며 돈을 벌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는가? 바로 ‘노동법·산업재해’부터 익힐 일이라고 밝혔다. 일터지기부터 너무 오래 일하면 안 될 뿐 아니라, 일꾼도 너무 오래 일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별에 ‘돈벌이를 하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별에 ‘사람답게’ 살면서 사랑을 나누려고 태어난다. 사람답게 일하는 길이란 무엇이겠는가?
책을 내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를 익혀야 할까? 아니다. 맞춤길과 띄어쓰기는 엉터리여도 된다. 글에 담을 말을 살필 일이요, 말에 담을 마음을 들여다볼 일이며, 마음에 담을 삶을 가꿀 일이고, 삶으로 짓는 살림을 헤아릴 일이며, 살림을 펴는 사랑부터 생각할 일이다.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이라는 책은 책이름부터 글러먹었다. 이제 와서 뒤늦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올해 한여름부터 이 책을 코앞에 두고서 여러 이웃님한테 이렇게 말을 했다. 둘레에서는 으레 “잘 팔리잖아요?”라든지 “좋은걸요?” 하고 대꾸하셔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이란 오직 빛이다. ‘생각없는’이란 이미 스스로 썩어문드러졌다는 뜻이다. ‘생각’은 대단하지도 놀랍지도 엄청나지 않은, 그저 씨앗 한 톨인 빛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하루이기에, 이 생각이라는 씨앗을 아침에 심어서 낮에 돌보고 저녁에 거두어 밤에 꿈으로 갈무리한다.
돈을 벌려고 꾀하는 길은 ‘생각’이 아니라 ‘꾀’이다. 새뜸(방송)에 나오거나 책을 내어서 더 얼굴과 이름을 팔아서 돈·이름·힘을 거머쥐려고 꾀하는 짓은 ‘생각’이 아닌 ‘짓’이다.
생각이란 ‘샘물’과 같다. 샘물이 멧골에서 조금씩 꾸준히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한결같이 솟기에, 멧들숲과 바다가 나란히 싱그럽다. 샘물은 모두 살리는 물이고, 생각은 나를 비롯한 모두 살리는 빛씨앗이다. ‘생각없다’라 한다면, 나부터 미워하고 남도 미워한다는 뜻이기에, 다같이 죽음판으로 뛰어드는 셈이다. ‘꾀’란 ‘꾸미는 짓’이다. 겉으로 부풀리고 앞에서 내세우는 모든 짓이 꾀요 치레이며 허울이다. 어느 마을책집에서는 ‘료 책 박제’를 한다던데, ‘료 책 박제’가 아닌 ‘료 책을 팔아서 잘못했습니다’ 같은 뉘우침글(반성문)을 남겨야 맞지 않을까? ‘료·이효정·런던베이글뮤지엄·열림원’에 이르는 넷이 나란히 ‘생각없이’ 굴었어도 못 알아본 눈을 뉘우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안 뉘우친다. 앞서 다른 얼간이가 말밥에 올랐을 적에도 ‘누리책집 새책·헌책’을 모두 ‘품절’로 돌리면서 숨더라. 료 책도 똑같네. ‘품절’로 돌리거나, 찾기(검색)가 어렵도록 감추면 사람들이 ‘알아서 잊는다’고 여긴다. 우리는 그만큼 똑같이 얼간이라고 할 만하다. ‘얼간이 책을 낸 펴냄터’와 ‘얼간이 책을 쓴 글쓴이’와 ‘얼간이 책을 읽고서 와와와 손뼉치는 얼간이’와 ‘얼간이 책을 신나게 팔아치우며 목돈벌이를 꾀하는 책집’ 넷이 나란하기에, 이런 얼뜬 짓이 자꾸자꾸 일어난다.
눈뜨지 않으니 얼뜨고 만다. 눈뜨며 책을 가려읽지 않으니, 언제나 얼뜬 채 우루루 휩쓸린다. ‘품절’이라는 담벼락을 치면서 숨으려는 그분은 가두리(감옥)로 보내야 맞지 않을까? 2025.10.3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