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가난한 책읽기

새벽일·새벽배송 (신문배달부도 노동자냐?)



  벌써 스물다섯 해가 흐른 지난일인데 ‘새벽일(새벽배송)’과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 떠오르는 한마디가 있다. ‘ㄱ노동자문학회’라는 자리에서 ‘ㅂ시인’이 나한테 뱉은 “뭐? 신문배달부도 노동자냐?”라는 한마디인데, ‘노동문학 = 공장문학’이라고만 여기는 마음에서 가볍게 터져나온 말이다. ㅂ시인이 그러더라. 신문배달부도 우유배달부도 가정주부도 ‘구멍가게 할매할배’도 노동자가 아니라고.


  요사이는 달라졌다고 할 테지만, ‘새벽일’을 하는 신문배달부나 우유배달부나 청소부를 ‘일꾼(노동자)’으로 안 치던 땀글(노동문학)이다. 나는 이 한마디를 듣고서 땀글에 등돌리지는 않았으나, 그 뒤로 만난 땀글꾼(노동문학가)은 하나같이 ‘공장노동자’였을 뿐, 온나라 작은일꾼은 없다시피 했다. 또한 ‘살림꾼(가사노동자·가정주부)’도 일꾼(노동자)으로 치지 않던 그들 목소리에 진저리가 나기도 했다. 다만, 요사이는 집안일도 ‘일(노동)’로 여기는 듯하지만, 정작 집안일을 하는 숱한 살림꾼한테 밑일삯(기본소득)을 베풀자고 외치는 목소리는 아직 들은 바 없다.


  시골에는 새벽길(새벽배송)이 없다. 시골은 낮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길이 훤하다. 읍내라면 아침저녁으로 ‘큰고장에서 시골로 오가는 쇳덩이(출퇴근 자가용)’가 살짝 붐빌 때가 있지만, 이즈음에 나름이(택배노동)로 뛰는 분은 드물다. 시골에서는 아침저녁 1시간만 비끼면 하루 내내 모든 길이 느긋하다.


  시골에는 새뜸(신문)을 새벽이 아닌 낮나절에 받게 마련이다. 서울과 큰고장은 새뜸을 이른새벽에 받는다. 일찍부터 신문배달부와 우유배달부는 ‘새벽일꾼’이다. 이른바 ‘농수산물 경매시장’이 열리기 앞서부터 새벽을 열면서 땀흘린 사람이 신문배달부와 우유배달부와 청소부이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새벽길(새벽배송)’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곰곰이 보면, 서울과 큰고장에서는 낮길(낮배송)보다 새벽길이 낫다고 느낀다. 서울과 큰고장은 낮에 얼마나 막히는가? 게다가 낮에는 웬만하면 바깥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지 않는가? 서울과 큰고장은 새벽길을 바탕으로 낮에도 따로 하면 될 노릇이라고 본다.


  나라에서 ‘새벽길 안 됨(새벽배송 금지)’이라고 못박는다면, 이미 01∼06시에 땀흘리는 신문배달부와 우유배달부는 어찌해야 할까? 설마 나름이(택배기사)만 새벽에 땀흘린다고 여기지는 않겠지? 어쩌면 아직도 민주노총 사람들 눈에는 오래도록 새벽일을 해온 숱한 사람이 아예 안 보일 수 있고, 새벽일을 하는 숱한 사람은 일꾼(노동자)이 아니라고 볼는지 모른다. (모르는 분이 많아서 덧붙이자면, ‘신문값’에는 ‘배달비’가 미리 붙는다)


  우리 몸은 02∼04시 사이에 가장 맑고 빛난다. 01시나 05시에도 맑고 빛난다. 다만 저녁 20∼21시에 일찍 자고서 01∼03시에 하루를 열어야 몸과 마음이 나란히 빛난다. 모든 불을 다 끄고서 저녁과 한밤(00시)을 지내며 새벽에 하루를 여는 사람은 스스로 튼튼하다. 이미 시골에서 논밭지기는 다들 03시면 하루를 연다. 시골에서 논밭일을 하면서 04시에 일어나면 게으르거나 철없다고 여긴다. 바지런한 시골 논밭지기는 02시부터 하루를 연다. 나는 글쓰는 사람이되, 어릴적부터 신문배달부로 일한 버릇이 들어서, 푸름이 무렵에는 04시 즈음에 일어났고, 스무 살 무렵부터는 02시에 하루를 열며 서른 해 넘게 지낸다. 아이를 둘 낳아서 돌보는 동안에도 언제나 아이랑 저녁에 일찍 눕고서 이른새벽에 일어나서 집안일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기에 몸이 망가질 까닭이 없다. 쉼날을 제대로 안 두고서 돌리니까 몸이 망가진다. 새벽일을 하는 사람한테 저녁일까지 시키니 몸이 망가진다. 새벽일을 하는 사람이 아침과 낮과 저녁에는 포근히 쉴 뿐 아니라, 쉼날을 제대로 세우는 틀을 짜야 ‘길(법·노동자보호법)’이다. 또한 ‘새벽길 안 됨’이라고 못박는다면, 시골 논밭에서 이미 02∼03시부터 논일과 밭일을 하는 일꾼은 어쩌려는 셈인가? ‘농사꾼’은 ‘노동자’가 아니니 안 쳐다봐도 되는가?


  나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이름을 바꾸는 일도 못마땅하다. ‘노동자’라는 이름에는 ‘농사꾼’은 아예 안 들어가거든. 그렇다면 ‘농사절’이 있는가? 없다. 집살림을 맡는 살림꾼을 기리는 ‘가사절’이 있는가? 없다. 5월 1일을 제대로 기리려면 ‘노동’이 아니라 ‘일’이라는 우리말을 쓸 노릇이다. ‘일꽃날’이나 ‘일빛날’처럼 담아내면서 어린이와 푸름이 곁으로 다가서려는 마음을 틔워야 한다. 일을 하자. 일 좀 제대로 하자. 2025.11.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비문학



  이제 ‘비소설’이라는 일본말씨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비문학’이라는 일본말씨는 버젓하더라. 마치 ‘소설·문학’만 ‘글’이고, ‘소설·문학’이 아니라면 “글이 아니라”는 뜻으로 함부로 붙이는 ‘비(非-)’이다. 이 일본말씨는 일본이 총칼로 나라를 일으켜서 먼저 일본부터 윽박질러서 ‘전쟁 불참자’인 일본사람을 ‘비국민’으로 몰아세우면서 싹텄다. 일본 우두머리와 벼슬아치는 ‘전쟁 불참자’는 ‘비국민’이라며 괴롭혔고, ‘전쟁 반대자’는 ‘반국민’이라며 짓밟았다.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우리말’을 가르쳐야 할 텐데 아직 ‘국어’라는 허울에 얽매인 대목을 고치려면 조금 더 걸릴지라도, ‘비소설’과 ‘비문학’ 같은 슬픈 일본말씨는 배움터와 책마을부터 털어낼 줄 알아야 할 텐데 싶다. 우리는 우리말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글이 있다. 우리글이 처음에는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되 “누구나 누리는 글”은 아닌 채 얼추 500해가 흘렀다. 이러며 조선이란 나라가 무너졌고, 일본이 새삼스레 쳐들어오던 그무렵 홀로서기(독립운동)를 하던 작은 아저씨 주시경 님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어서 널리 알렸다.


  그런데 우리글 이름인 ‘한글’을 ‘주시경’이라는 작은 아저씨가 지은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마치 1400년대 무렵부터 ‘한글’이 있은 줄 잘못 아는 사람이 넘친다. 글바치를 비롯해서, 길잡이도, 나라일꾼도, 수수한 엄마아빠 모두 마찬가지이다. 모든 이름에는 다 다른 삶과 뜻과 살림과 숨결이 흐른다. 이 얼거리를 “안 살피”고 “안 생각”한다면 언제나 쳇바퀴에 스스로 가두는 늪이다.


  우리한테 ‘한글’이 있는 줄 안다면, 우리말을 ‘한말’로 가리켜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류(K-)’라 일컫는 이름은 ‘韓-’이라는 한자가 아닌, ‘한-’이라는 “그냥 우리말”이어야 맞다. ‘한겨레·한가람·한나라·한빛·한길·한새·한소’하고 한동아리인 ‘한글·한말’일 적에 ‘한살림·한사랑·한지붕·한노래·한춤·한밥·한옷·한집·한꿈·한별·한꽃’으로 깨어날 만하다.


  ‘학교·입시’에 몸담는 어린이와 푸름이로서는 “이 나라 어른들이 쓰는 ‘비소설·비문학’ 같은 얄궂은 말씨”를 그냥 외워야 할 테지만, 아이곁에 있는 어른부터 제대로 목소리를 내어야지 싶다. ‘비(非-)’나 ‘반(反-)’이나 ‘불(不-)’을 붙이는 모든 말씨는 바로 힘꾼(권력자·독재자)이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괴롭히려고 만든 죽음말씨일 뿐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치기를 하라면서 퍼뜨린 불씨이기도 하다. ‘비문학’ 같은 철없는 이름을 떨치면서 ‘비·반·불’이라는 철딱서니없는 일본죽음말씨도 털 노릇이다.


  글을 ‘글’이라 하지 않으면서 ‘입시 공부’를 시키는 자리에서 함부로 쓰는 일본말씨나 죽음말씨는 무척 많다. 그냥그냥 우리나라에 젖어들었거나 퍼졌다고 여기면 우리 스스로 죽음하루인 셈이다. 찌꺼기와 부스러기와 쓰레기를 품고서 살아야겠는가? 밥을 먹고 나서 몸에 똥오줌을 고스란히 모셔야겠는가? 쓸고닦으면서 치울 여러 가지는 말끔히 치울 때에 비로소 새롭고 정갈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2025.11.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료 이효정 런던베이글뮤지엄 생각없는생각



  못 알아듣더라도 말을 한다. 겉몸뚱이를 보며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즈음 “걸어다니며 담배 꼬나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거의 못 볼 텐데, 내가 사는 전라남도와 고흥군에서는 날마다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뻔질나게 볼 수 있고, 시골마을에서는 그냥 어디서나 본다. 일부러 우리집 앞에다가 꽁초를 버리는 분도 있다. 그분한테 으레 말을 하니까 일부러 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드럽게, 짧게, 굵게, “아무 데서나 피우지 말고,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다 피웠으면 꽁초는 주머니에 챙겨서 집에 있는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리셔요.” 하고 말한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고장을 보면 ‘흡연실’이 따로 있되, ‘금연구역’이 넓다. 그렇지만 ‘금연구역’을 비롯해서 ‘병원 앞’이나 ‘기차역·버스터미널 앞 금역구역’에 스물이나 쉰쯤 모여서 너구리굴을 일으키는 분이 수두룩하다.


  ‘노동법’이 있다. ‘산업재해’를 다스리는 틀이 있다. 우리한테 눈과 귀와 손과 머리가 있다면, 노동법과 산업재해는 밑바탕으로 익힐 노릇이다. 누가 가르쳐야 하지 않다. 누구나 스스로 찾아보고 알아보고 살펴볼 노릇이며, 일터를 세워서 일꾼을 거느리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창업계획’보다 먼저 ‘노동법·산업재해’를 살필 노릇이다.


  나는 ‘료’도 ‘이효정’도 ‘런던베이글뮤지엄’도 2025년 10월 31일까지 까맣게 몰랐다. 다만, 발길이 닿는 모든 마을책집에 마실하려는 삶이기에, 이래저래 온나라 마을책집을 마실하는 동안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이라는 책이 ‘지겹도록 곳곳에 꽂히거나 놓인’ 모습을 참말로 ‘지겹도록’ 보았다. 누리책집 〈알라딘〉에서도 하도 띄워 주고 신나게 팔아대기에, 누리책집에서 미리보기를 읽었고, 마을책집에서 가만히 서서읽기로 다 읽어내기도 했으나, 주머니를 털어서 사려는 마음은 여태 아예 든 적이 없다. ‘돈벌이·이름벌이·힘벌이를 하려는 장난질’이라고만 느꼈을 뿐, 이 책을 다루는 글을 쓰느라 살짝(10초) 틈을 내는 일마저 아깝다고 느꼈다.


  일터를 차려서 여러 일꾼을 거느리며 돈을 벌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는가? 바로 ‘노동법·산업재해’부터 익힐 일이라고 밝혔다. 일터지기부터 너무 오래 일하면 안 될 뿐 아니라, 일꾼도 너무 오래 일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별에 ‘돈벌이를 하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별에 ‘사람답게’ 살면서 사랑을 나누려고 태어난다. 사람답게 일하는 길이란 무엇이겠는가?


  책을 내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를 익혀야 할까? 아니다. 맞춤길과 띄어쓰기는 엉터리여도 된다. 글에 담을 말을 살필 일이요, 말에 담을 마음을 들여다볼 일이며, 마음에 담을 삶을 가꿀 일이고, 삶으로 짓는 살림을 헤아릴 일이며, 살림을 펴는 사랑부터 생각할 일이다.


  《료의 생각 없는 생각》이라는 책은 책이름부터 글러먹었다. 이제 와서 뒤늦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올해 한여름부터 이 책을 코앞에 두고서 여러 이웃님한테 이렇게 말을 했다. 둘레에서는 으레 “잘 팔리잖아요?”라든지 “좋은걸요?” 하고 대꾸하셔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이란 오직 빛이다. ‘생각없는’이란 이미 스스로 썩어문드러졌다는 뜻이다. ‘생각’은 대단하지도 놀랍지도 엄청나지 않은, 그저 씨앗 한 톨인 빛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하루이기에, 이 생각이라는 씨앗을 아침에 심어서 낮에 돌보고 저녁에 거두어 밤에 꿈으로 갈무리한다.


  돈을 벌려고 꾀하는 길은 ‘생각’이 아니라 ‘꾀’이다. 새뜸(방송)에 나오거나 책을 내어서 더 얼굴과 이름을 팔아서 돈·이름·힘을 거머쥐려고 꾀하는 짓은 ‘생각’이 아닌 ‘짓’이다.


  생각이란 ‘샘물’과 같다. 샘물이 멧골에서 조금씩 꾸준히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한결같이 솟기에, 멧들숲과 바다가 나란히 싱그럽다. 샘물은 모두 살리는 물이고, 생각은 나를 비롯한 모두 살리는 빛씨앗이다. ‘생각없다’라 한다면, 나부터 미워하고 남도 미워한다는 뜻이기에, 다같이 죽음판으로 뛰어드는 셈이다. ‘꾀’란 ‘꾸미는 짓’이다. 겉으로 부풀리고 앞에서 내세우는 모든 짓이 꾀요 치레이며 허울이다. 어느 마을책집에서는 ‘료 책 박제’를 한다던데, ‘료 책 박제’가 아닌 ‘료 책을 팔아서 잘못했습니다’ 같은 뉘우침글(반성문)을 남겨야 맞지 않을까? ‘료·이효정·런던베이글뮤지엄·열림원’에 이르는 넷이 나란히 ‘생각없이’ 굴었어도 못 알아본 눈을 뉘우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안 뉘우친다. 앞서 다른 얼간이가 말밥에 올랐을 적에도 ‘누리책집 새책·헌책’을 모두 ‘품절’로 돌리면서 숨더라. 료 책도 똑같네. ‘품절’로 돌리거나, 찾기(검색)가 어렵도록 감추면 사람들이 ‘알아서 잊는다’고 여긴다. 우리는 그만큼 똑같이 얼간이라고 할 만하다. ‘얼간이 책을 낸 펴냄터’와 ‘얼간이 책을 쓴 글쓴이’와 ‘얼간이 책을 읽고서 와와와 손뼉치는 얼간이’와 ‘얼간이 책을 신나게 팔아치우며 목돈벌이를 꾀하는 책집’ 넷이 나란하기에, 이런 얼뜬 짓이 자꾸자꾸 일어난다.


  눈뜨지 않으니 얼뜨고 만다. 눈뜨며 책을 가려읽지 않으니, 언제나 얼뜬 채 우루루 휩쓸린다. ‘품절’이라는 담벼락을 치면서 숨으려는 그분은 가두리(감옥)로 보내야 맞지 않을까? 2025.10.3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종이를 보면



  종이를 보면 늘 멈춘다. 글종이도 빈종이도 쪽종이도 알림종이도, 내 손에 닿으면 어김없이 책 사이로 스윽, 책살피로 바뀐다. 어릴적에 딱지치기를 되게 즐기긴 했으나, 종이를 딱종이로 접으면 언제나 아까웠다. 그냥 깨끗하고 반듯하게 모으고 싶었다. 하루종이(일력)도 달종이(달력)도 버리기 싫었다. “어머니, 1984년으로 넘어가면 1983년 달력은 역사가 되잖아요. 나중에 1994년에 돌아보거나 2004년에 돌아보면 무척 재미있을 테니, 버리지 말고 하나 남기면 어때요?” “에그, 그러면 집이 쓰레기장 되게? 달력이 뭐가 된다고 모으게?” 어쩐지 ‘과자 담은 자루’도 버리기 싫었다. 구멍가게에서 하나에 80원에 팔던 초코파이를 담은 비닐자루를 깨끗하게 헹궈서 책으로 누르고 펴서 몰래 모았다. 어머니는 내가 모으는 종이에 과자자루를 낱낱이 찾아내어 말끔히 버렸고, 나는 다시 모으고 어머니는 또 샅샅이 찾아내어 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래된 칸(책장)을 그냥그냥 다 버리려고 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리려던 오래된 칸을 짐차를 불러서 모두 건사했다. “아니, 쓰레기를 왜 돈들여서 가져가려고 해?” “그래도 우리집에서 서른 해를 넘게 함께 지내던 살림이잖아요. 제가 시골로 가져가서 잘 쓸게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리려던 칸을 살피니, 나랑 언니가 어릴적(1980년대 첫무렵)에 자주 앓느라 뻔질나게 돌봄터를 드나들며 내밀던 ‘병원 진찰권’이 잔뜩 나왔다.


  《결국 다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를 읽는다. 이레 앞서 부산에서 장만해서 고흥으로 데려왔고, 엊그제 고흥서 부산을 가는 길에 다시 시외버스에서 읽는데, 부산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마저 읽는다. 등짐에 깃든 책은 그야말로 나라 한 바퀴를 얼결에 같이 돈다.


  ‘승차권 집계봉투’를 본다. 이 종이를 놓칠 수 없다. “기사님, 이 귀여운 종이를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국어사전 쓰는 사람이라서 하나 얻어서, 자루에 적힌 글결을 살피고 싶어요.” “네? 이 봉투요? 이 봉투를 어데 쓰게요? 쓸데가 있답니까?” “그게, 이 종이에 적힌 말 때문에…….”


  아무튼 얻고야 만다. 온누리 모든 말과 글과 책을 이 손길에 담고픈, 책벌레에 글벌레에 말벌레이기까지 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낀다. 종이 한 자락을 얻으려고 말을 거는 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본다. 한때 쑥스럽거나 부끄러워도 된다. 종이를 얻고 싶고, 종이를 건사하고 싶고, 종이에 적힌 뭇말과 뭇글을 헤아리고 싶다.


  읽고 읽고 읽는다. 쓰고 쓰고 쓴다. 좋아서 하지는 않는다. 온말에 온씨를 담아서 온사람이 저마다 온꽃으로 피어나는 온길을 그리기에 온하루를 온글씨로 다독인다. 온글에 온숨을 담아서 온이웃이 서로서로 온숲으로 일렁이는 온나무를 그리기에 온곳에서 온노래로 품는다. 2025.10.2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아파트를 사다



  책벌레끼리 하던 말이 있다. “여, 자네는 몇 평짜리를 샀나?” “나? 이제 서른 평 되려나.” “서울 강남? 서울 강북?” “어, 서울은 안 되고 인천쯤 귀퉁이에서.” 얼핏 듣자면 ‘아파트’를 샀다는 말 같지만, 책벌레는 ‘아파트 값’에 빗대어 여태 책값을 얼마쯤 바쳤는지 가볍게 웃으며 주고받는다. “허허, 어느덧 서울 강남에 조고만 한 채를 샀네.” “서울 강서에 한 채 샀어도 잘 했지.”


  책벌레는 하루하루 값을 늘린다. 처음에는 “시골 멧밭 한 뙈기”만큼 돈을 들여서 책을 사읽었다면, 어느새 “시골논 한 마지기”만큼 돈을 들여서 책을 사읽고, 이윽고 광주나 대전 즈음으로 깃들고, 바야흐로 안산이나 구리 즈음 깃들더니, 인천이나 부천이나 의정부로 다가가고, 마침내(?) 서울로 들어서면 어쩐지 ‘어깨뿌듯’ 같으나, 삶자락은 참으로 조그마한 빌림집이기 일쑤이다.


  책벌레로서 서울에서 “내 집 장만”이란 엄두를 내기 버겁다. 책값에 들인 돈을 책에 안 들였다면 웬만한 책벌레는 “서울 강남 한 채쯤” 우습지(?) 않았을 만하다. 참말로 숱한 책벌레는 책이 아니라 잿더미(아파트)에 눈을 두었으면 “서울 강남 두 채”를 장만했을 만하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잿더미는 값이 껑충껑충 뛴다. 이제는 “서울 강남 작은 한 채”는커녕 “서울 강서와 강북 작은 한 채” 값에 댈 수 없는 판이다. 요즈음 잿값(아파트 가격)을 보노라면, “서울이건 인천이건 부산이건 아예 발을 못 들이”는구나 싶고, “전남 고흥 읍내 아파트 한 채”로 여겨야 할 듯싶다.


  책벌레가 우스갯소리로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사거니 말거니 하는 말을 더는 할 수 없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볼 만하다. 서울 냇밑마을(강남)에서 잿더미 한 채를 굴리는 사람은 집에 책을 몇이나 둘까? 10억도 20억도 아닌, 50억이니 100억이니 춤추는 잿값인데, 잿값을 굴려서 샛돈(시세차익)을 억억억 소리 나게 긁어모으는 분들은 “책을 읽기”나 할까? 아예 안 읽지는 않을 수 있지만, 억억억 소리를 내는 분들은 돈더미에 파묻히거나 깔려서 숨막히는 나날이지는 않을까? 2025.10.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