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자기 돌봄 5
변택주 지음, 이승열 그림 / 원더박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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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숲노래 청소년책 2025.5.20.

푸른책시렁 186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변택주 글

 이승열 그림

 원더박스

 2025.4.3.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를 읽었습니다. 얼핏 여러 우리말을 보드라이 짚으려고 했구나 싶지만, 자꾸만 샛길로 빠지더군요. 왜 이렇게 샛길로 빠지는지 아리송하고 안타깝습니다. 다만, 하나는 아주 또렷합니다. 밑동과 뿌리를 짚지 않을 적에는 그만 겉모습에 사로잡힙니다. 속말과 속빛을 헤아리고 바라보려고 할 때라야 숨결과 숨빛을 품습니다.


  우리말을 우리말로 맞아들여서 배우고 익히려면 우리말을 살필 노릇입니다. 우리말을 우리말로 안 맞아들인다면, 엉뚱하게 여기저기 빠지거나 새면서 헤맵니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를 쓰신 분이 부디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을 장만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나 수수하게 쓰는 가장 쉬운 낱말이 어떻게 태어나고 만나고 얽혀서 뜻과 결을 지피는지 짚을 때라야, 비로소 열세 살하고든 서른세 살하고든 예순 살하고든 마음을 가꾸는 말빛을 나눌 수 있습니다.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에서 잘못 짚거나 샛길로 빠지거나 엉뚱하게 나아간 대목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데, 다 짚거나 다룰 수는 없기에, 몇 가지만 짚어 놓습니다.


+


나는 동무가 동그라미나 동아리처럼 동그랗게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받아들여. (40쪽)

→ 동그랗게 맺기에 ‘동그라미’에 ‘동아리’인데, 작을 적에 ‘동글다’이고, 클 적에 ‘둥글다’이다. ‘둥그러미’에 ‘둥지·둥우리’가 한동아리이다. 가볍게 돌고 또 돌아간다면, 넓게 펴듯 ‘둘러보’고 ‘두른’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동무’를 이루고, 너른 사이로 ‘둘레’를 아우르니, 너랑 내가 먼저 ‘둘’이서 ‘두레’를 편다. 둘러볼 줄 안다면, 둘러싼다. 두르면서 때때로 에두르는 먼길을 나서기도 한다. 빙그르르 두르거나 돌면서 ‘모’ 하나 없이 일어서고 피어나고 깨어난다. 뾰족하니 ‘모’이지만, 그래서 ‘모시’가 ‘못’처럼 솟는데, 벼포기를 하나하나 ‘모(볏모)’로 심고, 이러한 모을 하나로 두려고 하니 ‘모으다(모이다)’라 한다. 모으면 가까이 있다. 모으려는 마음을 따뜻하게 여미는 사이로 지내기에 ‘동무’이기도 하다.

서로 동글동글 어울리면서 ‘도르리’와 ‘도리기’를 한다면, 함께 둥글동글 모으거나 모여서 일하는 ‘두레’를 하면서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둔(두다)’다. 도르리도 두레도 ‘돕는’ 길이다. 서로 도우면서 돌아볼 수 있으니, 돌보는 길과 보살피는 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두런두런 수다를 한다. 돕는 손길과 돌보는 눈길은 천천히 돋는다. 잎이 돋듯 도드라진다. 즐겁게 주고받는 말이 돋보이듯 귀에 쏙쏙 들어온다. 모으고 무리지어 즐겁고 넉넉히 흐르는 결이기에 ‘물’이다. 동무란 그야말로 한마음에 한몸으로 함께 나아가려는 또래라고 여길 만하다.



‘반기다’의 말뿌리인 ‘반-’에는 밝다는 뜻이 담겨 있어. (64쪽)

→ ‘반기다’는 ‘반갑다·반하다·반색’하고 나란하다. ‘반’은 ‘반반하다·반듯하다·바르다’로 잇고, 이 말씨는 ‘반짝·번쩍’을 지나서 ‘밝다·밤’하고 맞물린다. ‘바’는 ‘바다’처럼 ‘바닥’을 이루어 뭇숨결이 깨어나고 태어나고 자라나는 ‘바탕’이면서 ‘밭’을 나타낼 뿐 아니라, 뭇숨결이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는 ‘밭은’ 빛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바·밧줄’로 굵고 단단하게 잇는다. ‘받치’는 구실이요, 우리 몸에서 ‘발’과 같다고 할 만하다. 바다와 바람이 늘 새롭게 흐르면서 말밝은 숨빛을 나누듯, 우리는 ‘발’로 땅을 ‘밟’으면서 새길을 나아가기에 새롭게 알아보고 찾아보면서 배우고 익힐 수 있다.

하늘을 이루는 바람을 ‘바라보’는 사이에 ‘바라다’라고 하는 마음을 알아챈다. 바랄 줄 알기에, 바라보고 살펴보고 들여다보고 물어본다. 밤이란, 별이 밝게 돋아서 반짝반짝하는 때이면서, 바로 별을 우리 숨바탕으로 받아들여서 꿈을 그리는 때이다. 바다는 뭇숨결을 낳기도 하지만 받기도 한다. 바람은 뭇숨결을 살리는 들숨날숨이기도 하면서 모두 받는다. 받아들일 줄 알기에 밝다. 바탕과 밭을 가꾸면서 키울 줄 알기에 밝다.

밝은 길은 ‘붉’은 길하고 잇는다. 별은 그저 그대로 밝은데, 밤에 더 둘레를 잘 보고 싶어서 ‘불’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뜻하거나 포근하게 누리려고 ‘불·붉다’를 일으킨다면, 이 살림살이를 우리가 손수 가꾼 뒤에 이야기를 남기려고 ‘붓’을 쥔다. 붕긋하게 부푸는 결로 여미는 붓이다. 두툼하니 붕긋이라면, 도톰하니 봉긋이다. 봉긋봉긋 봉오리를 맺고, 커다란 모습으로 봉우리가 선다. 말없이 봉긋붕긋 부푸는 꽃과 멧갓마냥, 곁에서 말없이 밝게 빛나는 별처럼 어울리는 마음을 나누는 사이인 ‘벙어리’이다.



‘잘’은 10000이라기보다는 ‘온갖’이라는 뜻이어서, ‘잘몬’은 ‘온갖 것’을 일컫지. (52쪽)

→ 우리말 ‘온’은 ‘100’이고, 온을 곱으로 살피기에 ‘잘’이면서 ‘10000’이다. ‘온·100’은 한자로 ‘백(百)’일 텐데, ‘열’을 곱으로 살핀 값이자 길이면서, 드디어 이곳으로 ‘온(오다)’ 빛이고, 더도 덜도 없이 ‘오롯’이 이룬 결이다. 그래서 ‘온 = 다·모두·몽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가득’하게 있는 결인 ‘차다(참)’를 이룬 때가 ‘온’이다. ‘온갖 = 온 + 것(갖)’이다. ‘갖 = 것·가지’이고 ‘가지가지 = 것것’이다. 그래서 “온갖 = 온 것 + 모든 것(가지·갈래)”이다. 이러한 ‘온’이 깊고 넓게 잠들면서 새롭게 나아가려는 참빛으로 퍼지면서 ‘움·움트다’로 나아가고, 움이 트는 천천한 걸음이자 몸짓인 ‘움직이다’이다.

‘오·온·올’은 한묶음이다. 온을 이루어 참하고 가득하고 모두이기에 ‘옳다·올바르다·올곧다·올차다’이면서 하나씩 ‘올(오라기)’을 이루고, ‘알’이라는 모습으로 거듭나는 길목이기에 하나하나 다르게 참하고 가득하면서 모두인 숨결이다. ‘오·온·올’은 저절로 ‘우·움·울’로 이으면서 ‘우리·움·한울(한울타리)’로 뻗는다. 너랑 나를 어우르는 ‘우리’이기에 서로 참하면서 모든 숨빛인 사람으로 바라본다. 하늘(한울)이란 하나인 울타리이자, 서로 하나인 숨빛인 우리를 가리킨다.

셈으로 ‘10000’을 가리키는 ‘잘’은 한자로 ‘만(萬)’이다. ‘온’을 ‘온’으로 곱할 적에 태어나는 ‘잘’이니, 숱하게 많다는 결이다. ‘온’일 적에는 다 다른 알이 참을 이루는 결이라면, 온을 온으로 곱한 ‘잘’은 다 다른 알(씨알·씨앗)이 깨어나서 풀숲으로 우거져서 풀꽃나무를 비롯한 뭇숨결이 크게 어울리는 밑뜻을 나타낸다.

온은 오롯하면서 온통 온마음과 온몸으로 온숨을 이루는 결로 가면서 ‘옳다’나 ‘한울’로 잇는다면, ‘잘’은 숱하게 우거진 풀숲마냥 ‘잘하다’와 ‘잘못’으로 잇는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가없이, 그지없이, 스스로 제 숨빛을 드러낸다고 하는 ‘잘·잘하다’인데, 자칫 이러한 숨빛을 ‘자랑’하려고 들면 거꾸로 ‘자잘’하거나 ‘자그맣게(작게)’ 구른다. 숱하게 있는 빛이 너울너울 춤을 이룰 적에는 ‘잘하다’이지만, 숱하게 있는 빛을 앞세우거나 자랑하거나 뽐내려고 하니 ‘잘다·자잘하다·작다’로 여긴다. 자그맣게 길을 틀어도 ‘잔’으로 간다. ‘잔소리·잔챙이·잔말’이다. 풀숲을 이룬 ‘잘·잘하다’하고 등지거나 거꾸로 가려고 하니 ‘잘못(잘 + 못(모르다)’이다. 스스로 얼마나 깊고 너르면서 즐거운 숨빛인지 몰라보려고 하니 ‘잘못’을 일삼고 만다.

잘하는 길이란, 자랑이 아닌 물줄기처럼 흐르면서 ‘즐겁(즈믄·1000)’게 노래하는 길이다. 열·온을 거친 셈은 즈믄(1000)을 지나서 잘(10000)에 이른다. 너울너울 온누리 숨결이 하나로 새롭게 어울려서 피어나는 셈이다. 이러한 숨빛을 물줄기처럼 품어서 살찌운다고 여기니 ‘잣(잣나무)’이다. ‘잣 = 숲젖’이다. ‘잣다’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메마른 땅에 샘물을 길어올리는 몸짓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맨바닥에 새롭게 살림을 이루거나 일구는 몸짓을 나타낸다.



사랑은 아끼는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것이잖아. 그러니 설렐 때는 먼저 설레는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며 어디서 온 것인지 짚어 봐야 해. 이 설렘이 그저 새롭고 고와서 끌리는 것인지 아끼려는 마음인지 요모조모 따져야 하지. (74쪽)

→ ‘사랑’과 ‘아끼다’는 다르다. ‘아끼다’는 ‘에끼다’ 쪽으로 바라볼 낱말이고, ‘안쓰럽다·안타깝다’하고 맞물려서 살피기도 한다. ‘사랑’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살리는(살림하는)’ 길을, 나랑 너 ‘사이’에서 ‘새롭’게 일구면서, 하늘과 땅을 잇는 ‘새’를 ‘새삼’스레 알아보면서 곁에 둘 줄 아는 슬기롭고 철든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누구나 스스로 품는 빛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랑’은 ‘좋다’하고 아주 딴판일 뿐 아니라, ‘아끼다’하고 아주 다르다. 좋아하거나 아낄 적에는 ‘사랑’하고 그야말로 멀다. 좁히면서 조이다가 졸졸 좇으면서 조무래기로 뒹구느라 조바심을 내는 결이 ‘좋다’이다. 마음에 들려고 하는 길인 ‘좋다’는 그저 ‘좁’아서 ‘조인’다. 숨막히는 마음이 바로 ‘좋다·좋아하다’이다. ‘알다’로 가지 못 하는 채 자꾸자꾸 안쓰럽고 안타깝게 나아가려고 하니 ‘아끼’는 결로 맴돈다. 아끼기에 나쁘지 않다. 그러나 아끼다 보니 ‘앗긴’다. 오히려 ‘앗아’간다.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씨앗(씨알)’로 가거나 ‘앗다·앗기다·빼앗다·빼앗기다’로 간다. 자꾸 아끼려 하기에 그만 서로 앗기고 앗는다. 아끼려는 손길을 내려놓고서 사랑으로 나아갈 적에 비로소 ‘씨앗·씨알’을 이룬다.

태어난 몸으로만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몸빛이나 살빛이나 뼈로 가리키지 않는다. 삶과 살림과 사이와 새와 생각을 스스로 품어서 씨앗으로 심고 가꾸어서 싹을 틔우고 숲을 푸르게 이루는 길을 걸어갈 적에 바야흐로 ‘사람’이면서 ‘사랑’을 깨닫는다. 알을 깨서 달려가야 깨닫듯, 스스로 이 삶을 살림으로 일구어 내면서 서로서로 나눌 줄 아는 생각을 씨앗으로 일구면서 펼치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집을 짓는다고 하지 않고 ‘빚는다’, ‘다듬는다’라고 하던 건축가 김중업은 (98쪽)

→ ‘지’어서 이루고 누리는 곳이라서 ‘집’이다. ‘집’은 ‘짓다’로 나타낸다. ‘빚다’는 물(빗물)과 가루를 고르게 섞어서 손으로 비비면서 이룰 적에 쓰는 낱말이다. ‘다듬다’는 ‘가다듬다·쓰다듬다·비다듬다·보듬다’로 엿보듯, 이미 이룬 살림을 다시 만지면서 곱게 여미는 자리에 쓴다.

우리말이 태어난 뿌리를 살펴야 우리말을 제대로 쓰는 길을 읽고 펴지 않을까? 왜 뜬금없이 아무 낱말이나 아무 곳에 끼워맞추려고 할까? 오직 흙과 물로 반죽을 해서 올리는 집을 세우려 한다면, 그때에는 ‘빚다’를 써도 되겠지.



‘없다’는 어디서 왔을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있다’에서 왔어. (106쪽)

→ ‘없다’라는 낱말은 ‘어’를 바탕으로 ‘ㅄ’을 헤아려야 알 수 있다. ‘있다’라는 낱말은 ‘이’를 바탕으로 ‘ㅆ’를 살펴야 알 수 있다.

우리말 ‘있다’는 ‘이(니)·이다·잇다·일다·익다·임(님)·입·입다’ 같은 낱말하고 나란히 살핀다. 이곳이기에 ‘있’이고, 일어나거나 일으키기에 ‘있’고, 여기 있는 나(삶)라서 ‘이’요, 두 곳을 맞물리기에 ‘잇’이며, 있는 숨이기에 ‘임(님)’이고, 이곳에 있어서 몸을 ‘입’는다.

‘없다 = 어 + ㅄ’이라는 얼개요, ‘어’는 ‘얼·어리다·얼다·엎다·얼핏·엄(움)·어디·어느(언)’ 같은 낱말하고 나란히 살핀다. 넋도 얼도 맨눈으로는 못 본다다고 여긴다. 눈으로는 못 보기에 얼핏 없는 듯하지만, 참으로는 있다. 어느 곳에 얼핏 어리듯 있다고 여기지만, 정작 몸(모습)은 안 보이게 마련이다. 얼면(얼어붙으면) 예전 몸이나 모습이나 빛이 사라진다. 엎으니 이곳에서 사라지거나 떠난다. 우듬지마냥 높이(엄지) 있으면 우리가 못 본다고 여기는 곳이다. 움이 트기 앞서까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여겨서 ‘없’다고 본다. 콕 짚을 수 없기에 ‘어디·어느’이다.

‘어렴풋’하듯 ‘어스름’이 깔린다. 이제 ‘어둡’다. 어둠이라는 ‘밤’은 해가 물러나고서 별이 돋는 때인데, 하늘에 별빛이 있지만 ‘없다(어둠)’로 여긴다. 까맣게 덮는 빛살처럼 ‘어둡다’는 ‘모르다(앎이라는 빛이 없다)’를 나타낸다. 앎이라는 빛이 없는 ‘어둡다·모르다’이기에 ‘어리다’라고도 한다. 언뜻 얼핏 보일 듯하지만 없기에 ‘어리다 ㄱ’이라면, 아직 알지 않는 빛이라서 ‘어리다 ㄴ’이다. 우리 숨결을 이루는 빛살인 ‘얼’이란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막상 보아내지 못하는 결이다.



‘한’에는 ‘환하다’와 ‘크다’가 담겼어 (120쪽)

→ 하늘을 날려면 홀가분할 노릇이다. 홀로 가볍게 몸마음을 다스리기에 하늘을 난다. 내가 나로서 나답게 낳는 빛이 있기에 ‘날개(나래)’를 달 수 있으니, 이러한 날개를 크고 시원하게 열어젖힐 적에 ‘활개’라 한다. 활짝 펴는 날개인 ‘활개’이다. ‘환하다’는 ‘활개’를 치듯 ‘활짝’ 열어젖히거나 펼쳐놓으면서 시원하게 틔우고 품으려는 결이다.

하늘이란 ‘한울’이요, “하나인 울(우리·울타리)”이다. ‘울’은 ‘우리’를 줄인 낱말이면서, “너랑 나를 아우르는 빛”인 ‘울·우리 ㄱ’에다가, “모두 크게 덩이를 이루어 한 곳에 놓는 빛”인 ‘울·우리 ㄴ’으로 있다. 울타리는 덩이를 이루어 한 곳에 놓는 빛을 감싸는 결이라서, 비도 바람도 작은짐승도 벌레도 새도 가볍게(홀가분하게) 드나든다. 너랑 나를 아우르는 ‘우리’도 둘 사이가 넉넉하기에 서로 어떤 마음과 말이든 신나게(실컷) 드나든다.

“하나인 우리”인 ‘하늘’이니 그저 ‘하나(1·일·一)’이면서 “하나인 나”이기도 하다. 셈으로 가리키는 ‘하나’는 “하나·하늘인 나”를 줄인 얼거리이다. 곧, 하늘은 “또다른 나”이면서 “또다른 너”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면서 같은 하늘이면서 ‘나’라는 뜻을 품은 낱말인 ‘하늘·한울’이다. 가두려는(가두리) 굴레가 아니라, 틔우고 열면서 드나드는 바람빛과 파란하늘을 이루니 ‘크댜’고 할 테고, 덩치나 몸만 클 뿐 아니라, 마음과 숨도 나란히 ‘큰다(자란다)’.

예부터 ‘한길 = 큰길’이라 했고, ‘한껏 = 큰껏(크게)’을 가리킨다. 키우는(크게 하는) 결이고, ‘키우’는 길이란 ‘키(키잡이·뱃키)’를 잡으면서 ‘길’을 찾는 숨결이 자란다(큰다)는 뜻이자, 키워서 키잡이로 설 적에 우리 길이(몸길이)가 반듯하게 서는 ‘키’를 얻는다.

셈을 보면 ‘하나·열·온·즈믄·골·잘·울’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셈에서 처음이 ‘한’이고 끝이 ‘울’이라서, 마침내 우리말에서 셈을 하나하나 짚을 적에는 ‘나(하나)’가 ‘나(한울)’로 돌아가는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넌지시 들려주고 품는다.


ㅍㄹㄴ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변택주, 원더박스, 2025)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 때와 배움이 달라져요

→ 푸름이가 되면 어린이 때와 다르게 배워요

→ 푸름이는 어린이하고 다르게 배워요

4


내가 쓰는 말이 내 삶을 빚어 나가눈구나 하고 알게 되어 참된 말을 가려 쓰려고 하게 될 거예요

→ 내가 쓰는 말대로 삶을 빚어 나가는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말을 참되게 가릴 수 있어요

5


높임말을 쓰면 거리감이 느껴지고 낮춤말은 가깝지만 거칠게 느껴져요

→ 높임말을 쓰면 멀다고 느끼고, 낮춤말은 가깝지만 거칠다고 느껴요

→ 높임말은 멀다고 느끼고, 낮춤말은 가깝지만 거칠다고 느껴요

6


겹겹이 정이 든 우리 삶결은

→ 겹겹이 빛이 든 우리 삶결은

→ 겹겹이 살가운 우리 삶결은

→ 겹겹이 따뜻한 우리 삶결은

14


축구장 크기 다섯 개만 한 솔숲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은 힘을 냈대

→ 공놀이터 다섯 곳만 한 솔숲을 가꾼 셈이었대

→ 너른터 다섯 곳만 한 솔숲을 일군 셈이래

16


곰곰이 오래 궁리한 끝에 네가 만나게 될 말이 궁금하다

→ 곰곰이 오래 헤아린 끝에 네가 만날 말이 궁금하다

→ 곰곰이 오래 짚은 끝에 네가 만날 말이 궁금하다

→ 곰곰이 오래 찾아본 끝에 네가 만날 말이 궁금하다

37


사전에 풀어져 있어

→ 낱말책에 풀었어

→ 낱말책에 풀이해

→ 말책에 풀이를 해

42


얇은 냄비보다는 두꺼운 무쇠솥이 되었으면 해

→ 얇은 솥보다는 두꺼운 무쇠솥이 되기를 바라

→ 얇은 솥보다는 두꺼운 무쇠솥이기를 바라

94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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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와 만도 씨 창비아동문고 290
안미란 지음, 정인하 그림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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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린이책 / 맑은책시렁 2025.5.16.



《뭉치와 만도 씨》

 안미란 글

 정인하 그림

 창비

 2017.12.8.



  서울비둘기하고 멧비둘기는 몸도 깃도 무늬도 다릅니다. 둘은 다른 터전에서 다르게 살기에 울음소리도 다릅니다. 날갯짓마저 달라요. 서울에서는 부딪힐 만한 곳이 많고 시끄럽고 어지럽고 빽빽하기에 비둘기도 크고작은 새도 제대로 날지 못 합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너른하늘을 마음껏 누비기에 날갯짓부터 확 다르면서 울음소리가 사뭇 다르지요.


  나무 한 그루가 우람하게 들어앉아서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 시골이라면, 나무 열 그루를 줄지어 심어도 제대로 못 자라고 가지치기에 시달리는 서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시골도 나무를 괴롭혀요. 멀쩡한 줄기에 가지를 뭉텅뭉텅 잘라내는 ‘서울스런 사람’이 모질게 늘었습니다.


  《뭉치와 만도 씨》는 ‘집개’하고 얽힌 줄거리를 부산을 터전으로 들려주는 듯하지만, 여러 글감이 뒤엉켰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곁짐승(반려동물)과 함께살기’라는 글감이라기보다 ‘오직 서울사람 눈금으로 재는 틀’이라는 글감에서 맴도는구나 싶어요.


  서울비둘기가 “그야말로 뻔뻔(24쪽)”할 수 있을까요? 벌레가 살아갈 틈이며 나무 한 그루가 설 짬마저 모두 잡아먹는 서울사람이야말로 뻔뻔하지 않나요? ‘새대가리’란 말은 누가 했고, 누가 그냥그냥 받아쓰기를 할까요? 스스로 사람다움을 잊고 잃은 사람이기에 ‘새대가리·소대가리·돼지대가리’ 같은 말을 함부로 씁니다.


  “국경선을 넘은 난민들처럼 완전 초라(94쪽)”하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있을까요? 아리송합니다. “생명을 돌보는 책임감(35쪽)”이란, 집에 가두어 똥을 치우고 먹이만 바치는 굴레하고 멉니다. ‘가두리’는 돌봄길이 아니에요. 잡아먹으려는 죽임길일 뿐입니다.


  새를 우리에 가두는 몸짓은 곁짐승을 돌보는 길하고 맞닿을 수 없지 않을까요? 하늘빛을 머금고 바람빛을 노래로 베푸는 새가 우리 곁에 깃들 수 있는 마당과 뜰과 밭과 숲정이를 건사하는 길이 비로소 ‘곁’에 두는 이웃일 테지요.


  《뭉치와 만도 씨》를 써낸 뜻은 깊다고 할 수 있겠지만, 딸바보라는 얼거리를 일부러 억지스레 맞춰야 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뱉는 아버지로 구태여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쪽까지 종잡기 어렵게 이리 튀고 저리 튀다가 어영부영 맺는다면, 이런 줄거리에서 어떤 마음을 읽거나 느낄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동물권’을 외치기보다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굴레에 갇히면서 뭇숨결도 나란히 굴레에 가두려 하는지 짚어야 할 텐데 싶습니다. 아이들이 마냥 “해 줘! 사 줘!” 하고 외치는 모습을 그냥그냥 담는다고 해서 ‘어린이 마음’에 다가설 수 있지 않기도 합니다.


ㅍㄹㄴ


비둘기는 도망가는가 싶더니 다시 내려앉아 기어이 콩 한 알을 더 쪼아먹고 갑니다. 그야말로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24쪽)


“오호, 이런 좋은 방법이 있군. 역시 새들은 머리가 나빠. 괜히 새대가리 같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거든.” (25쪽)


“꼬마 숙녀님들, 여기 새 모이 대령이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이 아버지가 다 구해 줄게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영이가 말했습니다. “나도 앵무새 사 줘요!” (28쪽)


아영이랑 함께 똥도 치우고 모이도 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딸이 생명을 돌보는 책임감을 키울 수 있겠군.’ (35쪽)


“우리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게요. 꼭 국경선을 넘은 난민들처럼 완전 초라한데요.” (94쪽)


“아니, 무슨 멧돼지가 산에 있지 않고 이제는 바다까지 넘나들어?” “쟤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거지? 멧돼지 맞기는 맞아요?” (108쪽)


아내는 모릅니다. 아침에 만들어 놓은 나물 반찬을 만도 씨가 점심에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를. 고춧가루와 설탕, 햄을 듬뿍 섞어서 만도 씨표 볶음밥이나 만도 씨표 섞어찌개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요. (134쪽)


응원석에 있던 만도 씨는 화가 나서 콧김을 쉭쉭 내뿜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놈이 대체! 왜 남의 귀한 딸 주위를 알짱거려? 당장 운동장 밖으로 끌어내야지.” (149쪽)


+


《뭉치와 만도 씨》(안미란, 창비, 2017)


개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 개라는 자리에서 보면

→ 개로서 보면

→ 개가 보면

7쪽


만도 씨의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 만도 씨 외동딸입니다

8쪽


만도 씨의 약을 살살 올려놓습니다

→ 만도 씨를 살살 약올립니다

14쪽


물기가 남김없이 흩뿌려집니다

→ 물을 남김없이 흩뿌립니다

18쪽


새가 집에서 키워지면 스트레스에 약한 건 당연해

→ 새를 집에 가두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어

→ 새를 가둬서 키우면 힘들 수밖에 없어

→ 새를 가둬서 키우면 골을 부릴 테지

36쪽


덥석 사 주는 건 결사반대

→ 덥석 사주지 마

→ 덥석 사주기 안 돼

38쪽


이 거친 삶의 전선에 나서는 거니까

→ 이 거친 삶에 나서니까

→ 이 거친 싸움터에 나서니까

51쪽


내 집에 들어와도 괜찮은 짐승이 있고

→ 이 집에 들어와도 되는 짐승이 있고

→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짐승이 있고

52쪽


시장 골목을 시찰하듯이 한 바퀴 돕니다

→ 저잣골목을 한 바퀴 돕니다

→ 저잣골목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59쪽


마당이 널찍한 촌집을

→ 마당 널찍한 시골집을

102쪽


희망퇴직 한 거 맞죠?

→ 그만두셨죠?

→ 옷벗으셨죠?

→ 물러나셨죠?

105쪽


사실은 만도 씨의 절대미각에 질투가 났습니다

→ 그런데 만도 씨 입맛이 부러웠습니다

→ 막상 만도 씨 혀끝을 시샘했습니다

123쪽


내가 마신 게 몇 포더라

→ 내가 몇 자루 마셨더라

→ 내가 몇이나 마셨더라

133쪽


나의 아이들이

→ 우리 아이들이

→ 우리집 아이가

162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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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의 용기 - 클로뎃 콜빈, 정의 없는 세상에 맞서다 생각하는 돌 1
필립 후즈 지음, 김민석 옮김, 엄기호 해제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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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숲노래 청소년책 2025.5.16.

푸른책시렁 185


《열다섯 살의 용기》

 필립 후즈

 김민석 옮김

 돌베개

 2011.11.21.



  ‘클로뎃 콜빈’이 어떤 어린날을 보내다가 어떻게 아이를 낳아서 할머니로 살았는가 하고 짚는 《열다섯 살의 용기》입니다. ‘클로뎃 콜빈’은 모든 사람을 섭섭하다고 여기면서 ‘왜 내 이름은 안 끼우느냐?’ 하는 마음으로 내내 살아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책만 읽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이라면, 자칫 ‘담허물기’가 왜 일어나고 어떻게 벌였으며 오늘날 어떻게 자리잡는지 지켜보고 살펴보는 길보다는, 한숨 섞인 푸념에 그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오늘날에는 검은살빛이든 흰살빛이든 흙살빛이든 어느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만, ‘어린 클로뎃 콜빈’이 배움터를 다닐 즈음에는 검은살빛인 사람이 흰살빛인 사람이 맡는 일을 거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검은살빛인 어린이 클로뎃 콜빈은 배움터를 다녔어요. 어떻게 이 아이는 배움터를 다녔을까요?


  바로 ‘로자 파크스’ 같은 앞선 어른이 목숨을 걸고 굶주리면서 싸우고 힘쓴 뿌리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로자 파크스는 어떻게 일찌감치 눈을 뜨거나 깨어났을까요? 로자 파크스를 낳고 돌본 어버이와 여러 이웃이 있었어요. 그리고 ‘모든 흰살빛’이 ‘모든 검은살빛’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모든 흰살빛이 모든 검은살빛을 괴롭혔다면 굴레를 내내 이었을 테지요.


  숱한 흰살빛은 ‘둘레 흰살빛’한테 따돌림을 받고 목숨까지 빼앗기면서 검은살빛하고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살의 용기》에도 여러모로 나옵니다만, 오히려 검은살빛끼리 스스로 깎아내리고 서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돈과 일자리와 집을 거머쥐려는 마음이 앞서면 어느 살빛이든 매한가지입니다.


  말콤 엑스를 비롯한 검은살빛인 사람들은 한동안 부커 워싱턴이나 조지 워싱턴 카바를 손가락질하거나 비아냥댔습니다. ‘고작 학교와 직업 따위’로는 검은살빛이 일어설 수 없다고, 주먹(폭력)으로 흰살빛을 때려눕혀야 한다고 여긴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맞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할 뿐입니다. 게다가 검은살빛이건 흰살빛이건 ‘웃사내질(남성가부장권력)’이 버젓했는데, ‘검은흰’을 넘어서서 어깨동무를 바란 적잖은 사람들은 ‘어깨동무하는 검은흰’뿐 아니라 ‘어깨동무하는 순이돌이’를 바라보았어요. 로자라는 아주머니가 ‘로자 파크스’라는 이름을 쓰는 뜻도, 아주머니 곁님인 아저씨가 ‘어깨동무하는 순이돌이’라는 길에 눈을 뜨고서 함께 걸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모저모 짚어 본다면, ‘클로뎃 콜빈’ 씨하고 《열다섯 살의 용기》를 쓴 ‘필립 후즈’ 씨는 ‘검은뿌리’를 그다지 안 짚고 안 살핀 듯합니다. 1955년 그날 그 버스에서만 물결이 일지 않았습니다. 모든 곳에 걸쳐서 물결이 일었습니다. ‘검은빛’ 아이들이 배움터를 다니는 몫을 누릴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고, 배움터에서 ‘검은흰’이 나란히 배우도록 하려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어요. 이에 앞서 검은빛 아이들도 배움터를 다닐 수 있도록, 온힘을 다하면서 굶주리면서 배움터를 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굴레끝(노예해방)’이 있은 뒤로 살아남아야 하는 갈림길에서 헤매고 힘겹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검은빛은 일찌감치 쇠(자동차)를 얻어서 몰고 다녔으며, 적잖은 검은빛은 쇠를 몰면서 다른 검은빛하고 등졌습니다. 그리고 쇠를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살림에 집안을 돌보아야 하는 숱한 사람들은 걸어다니거나 버스를 탔습니다. 이른바 ‘흑인 변호사’라든지 ‘흑인 민권운동가’라든지 ‘흑인 목사’는 으레 쇠를 몰고 다녔기에 버스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로자 파크스 아줌마를 눈여겨본 바탕은 클로뎃 콜빈 푸름이하고 사뭇 다릅니다. 로자 파크스는 ‘웃사내질’이 판치는 한복판부터 ‘검은빛’뿐 아니라 ‘검은흰’을 넘어서는 새길과 새살림을 바라보는 작은걸음을 내딛었고, ‘버스 권리’를 얻어내는 일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곳에서도 꾸준하게 땀흘린 삶이었습니다.


  말콤 엑스도 목숨을 잃었고, 마틴 루터 킹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웬만하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검은빛을 헤아리는 물결에 나서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일자리를 쉽게 잃으며 굶었습니다. 클로뎃 콜빈만 일자리를 못 찾으면서 고단하지 않았습니다.


  로자 파크스는 ‘말보다 몸’으로 일했고,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도 늘그막에 이르러 겨우 남겼습니다. 《열다섯 살의 용기》라는 이름으로 옮긴 “Twice Towards Justice”는 뜻깊은 책일 테지만, 필립 후즈는 지나치게 ‘클로뎃 콜빈 영웅 만들기’를 하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말콤도 킹도 로자도 클로뎃도 다 다르게 꽃입니다. 글이나 책에 이름이 안 남은 숱한 검은흰 사람들도 꽃입니다. 무엇이 서로 가로막는지, 무엇 탓에 자꾸 스스로 눈을 감고서 갉아먹거나 할퀴는지 돌아볼 때라고 느낍니다.


  1955년에 버스에서 목소리를 낸 일은 뜻깊고 아름답습니다. 이 하나만 다룰 수 있어도 뜻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1955년에 앞서 1935년에도 1945년에도 목소리를 내며 땀흘린 사람들이 있고, 1925년에도 1915년에도 목소리를 내며 땀흘린 사람들이 있으며, 1965년에도 1975년에도 지치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내며 땀흘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1985년에도 1995년에도 꿋꿋하게 목소리를 내며 땀흘린 사람들이 있고요.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가로지르는 길에서 고루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눈과 손과 마음일 때라야, 비로소 검은·흰·흙빛이라는 겉살이 아닌, 모두 나란히 넋이라는 숨빛이라는 대목을 읽고서, 이제부터 새롭게 일굴 살림길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바라볼 수 있을 테지요.


ㅍㄹㄴ


특히 괴로웠던 건 친구들이 스스로를 깎아내린다는 사실이었어요.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멍청한 검둥이’라고 불렀어요. 멍청한 검둥이! 흑인 애들끼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을 쓰는 거죠 … 어떤 이유에선가 우리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 같았어요. 친구들은 늘 자기 머릿결과 피부색을 깎아내렸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머리카락은 정말 역겨워”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요? 아니면 “나는 흑인이어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요? (53쪽)


백인 남자가 흑은 여자애를 성폭행하는 사건은 늘 일어났어요. 하지만 남자가 잡아떼면 아무도 여자애 말을 믿지 않았어요. 백인 남자들은 늘 처벌을 받지 않았죠. (57쪽)


경찰관이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일어나!” 왈칵 울음이 터졌지만, 반항심은 점점 커졌어요. 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어요. “저 백인 아줌마처럼 나도 이 자리에 앉을 헌법상의 권리가 있어요. 나도 차비를 냈다고요. 이건 헌법상의 권리라고요!” (72쪽)


“네스빗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줬어요. ‘너는 정말 용감한 아이야’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죠.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달갑잖은 것 같았어요. 몇몇 부모들도 그렇게 보였고요. 나보다 훨씬 이전에 자신들이 나섰어야 했다는 걸 아는 거죠. 어른들은 십대인 내가 그 일을 했다는 사실에 당황했어요.” (84쪽)


학교로 돌아왔을 때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나한테 등을 돌렸어요. 어디를 가도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어요. 복도를 걸어가는 나를 보고 킬킬거리며 흉내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죠. “이건 헌법상의 권리예요! 이건 헌법으로 보장된 내 권리라고요!” 나는 흑인들을 위해 맞서 싸웠어요. 우리 권리를 위해 일어섰어요. 영웅이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런 반응은 생각도 못했어요. (95쪽)


몽고메리 흑인 지도자들은 클로뎃 사건을 상급 법원으로 가져가서 인종을 분리하는 버스 좌석 제도의 위헌성을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카터 판사가 약삭빠르게 해당 죄목을 무혐의 처리하는 바람에, 인종 분리법과 관련해서는 명확하게 상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01쪽)


#ClaudetteColvin #TwiceTowardsJustice #클로뎃콜빈


+


《열다섯 살의 용기》(필립 후즈/김민석 옮김, 돌베개, 2011)


내가 정말 영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기심이 많았던 건 분명해요. 나는 뭐든지 궁금해서 별걸 다 물어봤어요

→ 내가 참말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궁금했어요. 나는 뭐든지 다 물어봤어요

→ 내가 참말 똑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궁금했어요. 나는 뭐든지 물어봤어요

36쪽


보이콧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 널리 거스르도록 북돋았다

→ 거침없이 등지도록 일으켰다

132쪽


마지막으로 동네에서도 내침을 당했어요

→ 마지막으로 마을에서도 내쳤어요

→ 마지막으로 마을도 나를 내쳤어요

179쪽


우리는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어요

→ 우리는 이야기도 했어요

→ 우리는 묻고 알려줬어요

195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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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텅구리, 세상을 바꾸다
조르주 상드 지음, 와이 그림, 이인숙 옮김 / 계수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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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린이책 / 맑은책시렁 2025.5.13.

맑은책시렁 346


《멍텅구리, 세상을 바꾸다》

 조르주 상드 글

 와이 그림

 이인숙 옮김

 계수나무

 2005.4.5.



  프랑스말 ‘그리부이(gribouillis)’를 고스란히 이름으로 받은 아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낳은 두 어버이는 빼앗고 가로채고 훔치면서 웃는 나날이라지요. 두 어버이가 낳은 다른 아이들은 두 어버이하고 똑같은데 막내만 달랐다지요. 그래서 두 어버이는 아이더러 늘 ‘멍텅구리’라고, ‘바보’조차 아니라고, 얼뜨고 덜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때리고 괴롭힌다고 합니다.


  조르주 상드 님은 《멍텅구리, 세상을 바꾸다》를 이녁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로 썼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보면 ‘프랑스 물결’을 이룬 발걸음을 짚으면서, 이 물결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물려받아서 새터를 일굴 적에 아름답게 사랑인가 하고 속삭이려는 뜻이었다고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글을 어른으로서 쓸 수 있을는지 스스로 물어볼 노릇입니다. ‘문학·동화’라는 허울을 내세우지 말고, 어버이와 어른으로서 아이곁에 앉아서 조곤조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깜냥과 슬기와 눈썰미를 스스로 가꾸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남한테서 안 빼앗거나 못 빼앗으면 ‘바보조차 아닌 멍텅구리’라고 손가락질하며 때리는 어버이란, ‘서울에 있는 더 높은 대학교에 더 높은 값(점수)’을 받아내어 들어가지 못 하면 닦달하고 괴롭히는 우리 모습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굳이 ‘서울대학교’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나 ‘서울에 안 있어도 이름난 대학교’에 아이를 밀어넣어야 할까요? 우리는 아이가 아이답게 뛰놀고 자라면서 아름답게 사랑을 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함께 살피며 생각할 노릇이지 않나요?


  몹쓸 우두머리 몇몇을 끌어내리기에 나라가 바뀌지 않습니다. 얼뜬 우두머리와 벼슬아치와 먹물꾼을 걷어치우거나 사슬터에 가두었어도, 우리가 스스로 사랑으로 아름답게 살림을 가꾸지 않는다면 도루묵이에요. 얼치기가 벼슬이나 이름이나 돈을 거머쥐지 않을 만한 틀도 세울 일이되, 먼저 우리부터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어진 어버이와 어른으로 일어설 노릇입니다.


  이른바 ‘바보·멍텅구리(그리부이)’는 풀꽃나무와 벌나비와 들숲메한테서 삶을 배웁니다. 이윽고 스스로 살림을 일굽니다. 삶과 살림을 하나로 품는 동안 천천히 사랑에 눈을 뜹니다. ‘바보·멍텅구리(그리부이)’는 ‘숲엄마’한테 물어봐요. “어머니, 저는 온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삶만 배웠는걸요?” 하고요.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을 어떻게 하는가를 배운 ‘바보·멍텅구리(그리부이)’이기에, 온누리를 낱낱이 새롭게 바꾸는 씨앗 한 톨을 심을 수 있습니다.


ㅍㄹㄴ


그리부이는 난처했습니다. 부르동의 성에 있는 것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너무 화려하고 멋있어서, 감히 욕심을 내어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31쪽)


“네, 어머니. 어머니가 원하시는 일은 뭐든지 하겠어요. 그런데 누가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나요?” “여기에 있는 모두가 너를 가르치게 될 거야. 나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모두들 나와 똑같이 지혜롭단다.” (78쪽)


“그리부이야, 쓸데없이 스스로를 원망하지 마라. 네가 깨우친 것이 없다니! 그렇지 않아. 네 마음속을 한번 들여다보렴. 넌 보통 사람들은 결코 깨닫지 못한, 아주 중요하고 신비스러운 진리를 알고 있단다.” “슬프게도, 제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깨달은 것은 온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뿐인걸요?” (95쪽)


그러나 못된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돈을 무시하고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우기는 멍텅구리는 감옥에 갇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착한 사람들은 그리부이가 곁에 없는 것을 알게 되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온나라가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부르동 왕은 매일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도 화를 가라앉혀 줄 그리부이가 없기 때문에, 착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들을 잡으면 똑같이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리부이는 날마다 감옥 속에서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웠지요. (113쪽)


#GeorgeSand


+


《멍텅구리, 세상을 바꾸다》(조르주 상드/이인숙 옮김, 계수나무, 2005)


언제나 대환영이야

→ 언제나 반가워

→ 언제나 모실게

→ 언제나 기뻐

33쪽


영리한 아이로 만들어 주겠지

→ 밝은 아이로 가르쳐 주겠지

→ 똑똑하게 가르쳐 주겠지

45쪽


푸른 옷의 수호천사는 어디로

→ 푸른옷 꽃님은 어디로

→ 푸른옷 빛님은 어디로

68쪽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달콤한 잠에 빠졌답니다

→ 시원한 그늘에서 달콤하게 잤답니다

→ 그늘이 시원한 곳에서 달콤하게 잤답니다

73쪽


넌 나의 수양아들이란다

→ 넌 내가 받은 아이란다

→ 넌 내가 맞은 아이란다

→ 넌 우리 든아들이란다

74쪽


모두가 서로를 형제자매처럼 아끼고

→ 모두가 서로를 언니동생처럼 아끼고

→ 모두가 서로를 나란히 아끼고

→ 모두가 서로를 한배로 아끼고

77쪽


각 나라마다 하나의 부족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있단다

→ 나라마다 겨레 하나만 살아야 한단다

→ 나라 하나에 겨레 하나만 살아야 한단다

85쪽


어머니는 지금 너를 시험하시는 거야

→ 어머니는 바로 너를 알아보려 하셔

→ 어머니는 바로 너를 살펴보려 하셔

98쪽


그리부이의 나라 사람들은 식물의 여왕의 보살핌 아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그리부이 나라 사람들은 풀꽃님이 보살피면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 그리부이 나라 사람들은 풀꽃지기가 보살피며 기쁘게 살았습니다

126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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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 이호철의 교실 혁명 살아있는 교육 47
이호철 지음 / 보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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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숲노래 청소년책 2025.5.10.

푸른책시렁 182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

 이호철

 보리

 1994.6.15.



  모든 하루가 살림거리이고, 집살림이건 바깥살림이건 책살림이건 글살림이건, 또는 돈살림이나 밥살림이나 옷살림이건, 모두 우리가 손수 돌아보면서 보듬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누구는 누구보다 잘 한다고 여길 수 있고, 나는 누구보다 못 한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르게 태어나서 다르게 살아갈 뿐이라, 서로 다른 결로 모든 살림을 맞아들이지 싶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이 일도 제법 하고 저 일도 꽤 해낸다고 느낍니다. 마음을 덜 기울이거나 못 기울인 탓에 이 일도 엉성하고 저 일도 어줍짢지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잣대도 남이 재는 틀일 뿐, 우리 스스로 엉성하거나 어수룩하거나 어지럽더라도 웃고 노래하면서 누리면 모두 빛나는 살림이라고 느껴요.


  즐겁게 짓기에 즐겁게 나누고, 즐겁게 읽기에 즐겁게 쓴다고도 봅니다. 차근차근 읽는 손길은 언제나 찬찬히 돌아보는 손빛과 눈빛으로 이어갈 테고요.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은 1994년에 처음 나옵니다. 아직 배움터마다 ‘짐(숙제)’을 매우 무겁게 씌우는 나라이던 무렵에, ‘짐’이 아니라 ‘배움놀이’로 바꾸어 보자는 뜻을 편 길잡이 한 사람 이야기가 흐릅니다. 날마다 아이들한테 뭘 맡기거나 시켜야 한다면, 억지스런 짐이 아닌 재미난 놀이를 알려줄 노릇이라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 책을 1998년에 처음 만났고, 이 작은 꾸러미는 틀림없이 이 나라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겠거니 여겼습니다. 책이 처음 나오고서 서른 해가 지나는 동안 ‘매질(체벌)’은 사라지고, 어린빛(아동인권)을 헤아리는 목소리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아동학대’라는 이름으로 ‘교사학대’가 불거질 뿐 아니라, 짐(숙제)도 ‘배움놀이’도 사라진 자리에 모둠밥(급식)과 ‘캐릭터 교과서’가 판치면서 막상 어린배움터나 푸른배움터에서는 배움놀이뿐 아니라 배움길마저 사라지는 듯합니다.


  배움터란, 아이들을 지켜보고 기다리면서 아이 누구나 스스로 살림길을 열도록 싹을 틔우는 터전이어야 맞습니다. 배움터는 모둠밥터(급식실)가 아닌 부엌을 두고서 아이 누구나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을 살피는 밥을 지어서 먹도록 이끌어야 맞습니다. 그러니까 11시부터 12시 사이에는 아이들이 ‘밥짓는 배움길’을 누려야지요. 모든 아이가 왁자지껄 밥을 지으면 힘들 수 있으니, 달날부터 쇠날까지 갈라서 다섯 모둠이 갈마들면서 ‘밥짓는 배움길’을 누리면 되고, 이동안 다른 네 모둠 아이들은 배움터 곳곳을 손수 쓸고 치우고 닦으면서 돌보는 살림길을 익힐 수 있습니다. 또는 서로 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는 배움짬을 누릴 만합니다.


  2025년에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을 되읽자니, 이제 이 책은 쓰임새를 다한 듯싶습니다. 또는 이 책을 새롭게 되살려서 ‘어린이와 푸름이가 손수 살림배움길을 걷는 하루’로 나아가도록 얼거리를 다시 짜서 엮을 수 있을 테지요. ‘재미있는 숙제’가 아닌 ‘즐거운 살림배움’을 겪고 배울 노릇인 아이어른입니다. 길잡이도 아이곁에서 함께 낮밥을 지으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를 누릴 때라야 배움터가 배움터답게 일어서리라 봅니다. 순이돌이 누구나 집살림을 맡을 줄 알 때에 이 나라가 거듭납니다. 둘 다 어릴 적부터 집일과 집살림을 익히면서 ‘왜 배우는가?’를 스스로 묻고 찾아나설 노릇입니다. 나라지기도 새로 뽑을 일이되, 나라지기에 앞서 우리 아이들부터 제대로 바라보는 어른과 길잡이로 설 수 있기를 빕니다. 


ㅍㄹㄴ


그 본래의 귀함을 잊고 사는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때 부모님의 팔다리 30분쯤 주물러 드리기를 숙제로 내어 보자. (34쪽)


한 주 전에 숙제로 내어 주워 온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도록 하는 것이다. 까닭을 모르는 아이들은 투덜대기도 할 것이다. (61쪽)


노는 습관이 붙은 아이들에게 집 둘레 청소를 시킨다면 그렇게 반가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하기 싫어하는 습관이 하루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므로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다. (80쪽)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버릴까? 함부로 버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108쪽)


우리의 옷에 우리의 말이 얼마만큼 씌어 있나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그림이 얼마나 그려져 있는지도 찾아보도록 하면 좋겠다. (152쪽)


그러나 작은 도시 가까이에 있는 논밭이기 때문에 그곳에 버린 휴지나 깡통 같은 쓰레기가 논밭을 뒤덮고 있음을 아이들이 눈으로 보고 남다른 느낌을 가졌을 수도 있다. (226쪽)


+


《재미있는 숙제 신나는 아이들》(이호철, 보리, 1994)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서 삶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 사람으로 살며 배워야 한다고 본다

22


재미있는 숙제거리는 아이들의 생활에서 찾는 것이 좋다

→ 재미있는 배움거리는 아이들 삶에서 찾으면 된다

→ 재미있는 익힘거리는 아이들 삶자리에서 찾는다

26


하기 싫어하는 습관이 하루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므로

→ 하기 싫어하는 버릇이 하루이틀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 하기 싫어하는 매무새가 하루이틀에 나오지 않으므로

80


함부로 버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며

→ 함부로 버리는 일을 돌아볼 틈을 두며

→ 함부로 버리는 삶을 곰곰이 짚으며

→ 함부로 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살피며

108


우리의 옷에 우리의 말이 얼마만큼 씌어 있나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 우리 옷에 우리말이 얼마만큼 있나 찾아본다

→ 우리 옷에 적힌 우리말을 찾아본다

152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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