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임자도 압니다. 자기가 파는 책 가운데 그냥 ‘돈이 될 만한 책­’인지, 우리 ‘책 문화에서 더없이 소중한 책’인지. 그러나 책을 사고팔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책들을 팔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거든요. 이 책들을 팔아야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일 수 있고,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인 뒤 또 팔아야 또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일 수 있거든요.

 몇 해 앞서, 1910년대인가 1920년에 처음으로 나왔다고 하는 국어사전 이야기가 잠깐 신문에 오르내린 적 있습니다. 이 국어사전을 찾아낸 교수는 ‘어디에서 찾았는지’ 밝히지 않았고 ‘고서점’이라고만 했는데, 부산 보수동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서 찾았지 싶어요. 그래, 이런 책들을 헌책방 임자들이 모를 리 없겠지요. 더구나 100해 가까이 된 책이라면, 어떤 헌책방 임자도 그 책을 허투루 다루지 않으며 함부로 아무한테나 내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들이 그 책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 좋은 책이 나한테 있다’는 보람을 느낄 테고요. 그렇지만 헌책방 임자는 이 책을 가장 잘 알아볼 만한 사람한테 팝니다. 이 책을 가장 잘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그 책 값어치를 가장 잘 느끼며, (헌책방 임자한테) 가장 괜찮은 값을 쳐 줄 만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이 얼마나 왜 소중한가를 알고 있는 이라면, 자기가 끌어들일 수 있는 책값을 헤아리기 마련이고, 자기가 가진 돈 테두리에서 소중한 책 하나를 기꺼이 사곤 합니다.

 헌책방 임자한테는 책을 잘 알아보는 사람 못지않게 값을 제대로 쳐 줄 사람이 소중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또한, 헌책방 임자한테 책을 대주는 샛장수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이런 옛책 한두 권을 팔면서 팍팍하고 고달픈 요즘 살림형편에 기지개를 켤 수 있고요.

 우리들 책손은 헌책방에 ‘우리들이 반가이 여길 만한 책’이 있어야 즐겨찾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반갑게 여길 만한 책을 기꺼이 사들일 만한 돈이 주머니에 넉넉해야 헌책방을 즐겨찾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삐걱거리면 헌책방 나들이가 뜸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즐겨찾던 헌책방 임자가 애써 갈무리해 놓았던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았던 책’이 안 팔리거나 묵어 버리곤 합니다. 다른 책손이 알아보고 사들여 준다면 그 헌책방으로서는 ‘책돌이’가 잘되어 ‘다른 반갑거나 좋은 책’을 사들일 밑돈을 마련하는 한편 헌책방 살림을 꾸릴 테지만,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은 책’을 우리 스스로든 다른 사람이든 알아보지 않거나 못하며 팔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거나 대단한 책이라 해도 맞돈이 되지 못하고 말아요. 이리 되면 헌책방 일꾼도 힘듭니다. 가게세 내고 살림돈 얻어야 하는데, 책돌이가 안 되니, 책돌이가 될 만한 책에 자꾸 눈을 돌리게 됩니다.

 헌책방에 책이 안 나오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나날이 책읽는 사람이 줄고, 나올 만한 책은 웬만큼 나왔으며, 더 많은 이익을 바라며 책을 물건으로 다루는 사람이 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책눈길을 좀더 넓히지 않는 까닭이 있습니다. 좀더 부지런하게 책을 즐기지 못하는 까닭도 있고요.

 책이 돌고 돌려면, 자료로 둘 책이 아니고서는 다른 이한테 내어주거나 헌책방에 내놓아야 좋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한테 새로우며 반갑거나 좋은 책’을 꾸준하게 찾아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읽은 책은, 이 세상에 나온 책 가운데 아주 적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우리한테 반가울 책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 책들은 예나 이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줄 모르거나 못 느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 부피는 어느 금을 넘어갈 수 없으니,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을 모든 책을 죄 알아보며 읽어낼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만큼은 알아야 할 테며, 우리가 볼 수 있는 만큼은 찾아보려는 몸짓과 움직임을 잃어서는 아니될 일이라고 느낍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일도 잘못이라고 느껴요.

 헌책방 일꾼들은 말합니다. ‘당신들이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일하면서도 참 놀라운 대목이, 그렇게 많은 책을 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당신들이 처음 보는 책이 많다’고. 우리들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만나거나 손에 쥐어드는 책은, 헌책방 일꾼이 ‘만져 본’ 책 가짓수나 권수와 견주면 새발가락에 낀 먼지만큼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제법 안다고, 무슨 지식이 있다고, 어디 교수라고, 무슨 학자라고 이름쪽을 내밉니다. 뭐, 이름쪽 내미는 일이야 자기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이름쪽을 내밀려면, 자기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힘써야지요. 마음을 기울여야지요. 부지런히 자기 머리와 마음과 몸을 갈고닦거나 추슬러야지요. 여태껏 우리 삶터와 세상을 밝혀 온 훌륭한 이들 얼과 넋이 고이 담긴 소중한 책 하나가 끝없이 묻혀 있음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찾아나서기도 해야지요. 헌책방 일꾼들이 ‘우리들 책손한테 반가울 책’인 한편 ‘헌책방 일꾼한테는 밥벌이가 될 고마운 책’을 한결같은 매무새로 찾아나설 수 있어야지요.





 책이 살면 우리 삶도 삽니다. 우리 삶이 살면 우리가 즐기는 일이나 놀이도 삽니다. 우리가 즐기는 놀이와 일이 산다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회 얼거리나 문화 터전도 힘을 얻으며 살찔 수 있을 테지요. 우리 사회와 문화가 북돋운다면, 우리가 마음껏 즐기며 누릴 책도 한껏 나아질 테며 푸짐하게 펼쳐질 테고요.

 우리가 애쓰는 만큼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새책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베스트셀러에만 눈길을 맞춘다면 새책방 책꽂이는 베스트셀러에 더 많은 자리를 내어줍니다. 우리가 처세와 실용서적에만 마음을 쏟는다면 새책방 책꽂이는 처세와 실용서적에 자리를 훨씬 많이 내어줍니다. 우리들이 어린이책을 많이 찾아보니 새책방 꾸밈새가 확 달라지지요? 우리들이 인문학 책을 좋아한다면, 자연과학 책을 좋아한다면, 생태와 환경 이야기를 다룬 책을 좋아한다면, 돈-이름-힘이 아닌 사랑-믿음-나눔을 담은 책을 좋아한다면, 새책방 책꽂이와 꾸밈새는 어떻게 거듭나겠습니까. 우리가 도서관에서 즐겨 빌려읽는 책에 따라 도서관 사서 눈높이도 달라집니다. 도서관 높낮이는 도서관을 즐겨찾는 우리들 몸가짐과 손뻗음에 달려 있습니다. (4341.1.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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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리고 뒤돌아보니 극장에 남은 사람 열대여섯
 [내가 본 영화 10]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고



 - 1 -

 홍성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는 ㄱ출판사 사장님이 시내에 나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때 극장에 함께 있던 사람 숫자는 다섯이라고 합니다. 제가 인천 ㅇ극장에서 옆지기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열대여섯쯤 함께 보았습니다. 사백 사람 남짓 들어올 수 있는 극장에 열대여섯이라.

 고등학교 다니던 때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나 〈숲속의 방〉을 보러 인천 ㅇ극장이나 시민회관에 찾아갔을 때, 영화를 함께 본 다른 사람들 숫자는 너덧이었습니다. 그때 뒤로 이렇게 적은 숫자가 큼직한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 2 -

 124분에 걸친 짧지 않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핸드볼 하나로 살아가는 아줌마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펼칩니다. 배경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훈련과 올림픽 때 경기를 치르던 일.

 국민학교 적부터 핸드볼이라는 운동경기가 참 좋았고, 학교에 운동부라도 있으면 이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며 고등학교며 대학입시에 따른 교과서 외우기에만 치달을 뿐, 동아리 활동으로라도 핸드볼 운동을 즐길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장 한쪽 구석에 핸드볼 골대라도 있어야 이 운동을 하지요. 골대가 있어도 그물이 없으니 공 한 번 넣으면 주으러 가는 것도 일이지만.

 혼자서는 핸드볼을 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평일 낮 두어 시에 가끔 보여주는 방송중계를 보곤 했습니다. 그것도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 때 드문드문.

 중고등학생 때(1988∼1993) 집에서 핸드볼 중계방송을 보노라면, 관중자리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는데, 저처럼 핸드볼 중계방송을 ‘재미있다고 지켜본’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제가 핸드볼 중계방송을 보던 때, 형은 으레 ‘재미없는 걸 왜 보냐?’ 하면서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 3 -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첫머리에, 전국대회 결승전을 치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응원하는 관중 거의 없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인천 ㅎ’ 팀은, 우승을 했어도 팀이 해체가 됩니다. 해체되는 핸드볼 팀 연고지가 ‘인천’이라는 대목이, 인천을 연고지로 했다가 해체된 숱한 운동팀들을 떠올리게 해서 살짝 아찔합니다. 현실 삶과 영화 이야기가 다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또 누구나 알면서도 바꾸지 않다시피, 핸드볼이건 하키건 체조건 펜싱이건 양궁이건 배드민턴이건, 여느 때에는 이러한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선수들한테 눈길 한 번 따숩게 건네는 사람이 드뭅니다.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 하나만 해서 먹고살아간다는 일은 아주 위험합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즐기는 가운데 자기 밥벌이가 따로 있어야지요. 따로 자기 밥벌이가 되는 일을 하면서 생활체육으로 운동경기를 즐길 수 있어야지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 얼거리를 살피면, 돈이고 힘이고 이름이고 없는 사람들이 돈과 힘과 이름을 얻는 어렵고 고달프지만 고작 하나 보임직한 길이 ‘운동선수로 금메달을 따거나 세계대회 1등’이 되는 길입니다. 박세리는 그저 골프를 즐기면 좋았을 사람이지만, 세계대회 1위를 하지 않고는 스스로 먹고살 길도 자기 운동을 이어나갈 길도 없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보면 불쌍하고 쓸쓸하고 고단한 삶입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나오는 핸드볼 선수들은 어떠한가요. 팀이 우승을 해도 포상금 한 푼이나마 제대로 주어졌을까요. 고작 스물 앞뒤일 선수들이 ‘뛸 곳이 없어지’면 어찌해야 할까요. 운동 하나만 죽어라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 나오는 ‘한미숙’ 남편처럼, 핸드볼 하나만 알고 사회는 ‘좆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사기에 걸리고 폐인이 되다시피 스러져 갈밖에 다른 길이 있을까요. 그래서 몇몇 생각있던 운동선수들은 영화에 나오는 ‘김혜경’처럼 나라밖으로 눈을 돌리며, 더 가시밭길과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일본 구단으로 가고 스위스로 가고 오스트리아로 가고 하면서 선수목숨을 이어가잖아요.


 - 4 -

 운동경기는 돈이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일까요. 그러면, 고작 서른다섯도 못 되어 거의 다 은퇴를 해야 하는 이런 운동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서른다섯, 또는 마흔쯤 되는 나이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들 여느 사람들한테는 왜 자기 일터를 다니는 가운데, 야구며 축구며 핸드볼이며 하키며 체조며 달리기며 헤엄치기며 활쏘기며 탁구며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터전이 없을까요.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구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천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침 축구’ 하나를 빼면 무슨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을까요. 그나마 아침 축구도 남정네들이 하지, 남녀가 아우르며 즐길 수 있는 놀이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마음껏 맑은 바람을 쐬면서 뛸 수 있는가요. 하다못해 골목길에서 자동차 빵빵거림에 시달리지 않으며 배드민턴이라도 할 수 있는지요. 초중고등학교 잘 닦인 테니스장에서 동네사람들이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지요. 운동부가 있는 초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동네사람들도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는지요.

 “생각도 하고,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시골학교 체육교사가 된 스승이 한미숙한테 하는 말)

 ‘한미숙’과 ‘송정란’ 들이 뛰던 핸드볼팀 감독이었던 분은 어느 시골학교 체육교사가 되어 아이들한테 핸드볼을 가르칩니다. 실업팀 감독이었을 때는 늘 찌푸린 얼굴이었는데, 시골학교 체육교사로 일할 때에는 활짝 갠 밝은 얼굴입니다.


 - 5 -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갑니다. 얼마쯤 나오다가 툭 끊어집니다. 영화를 볼 때는 자막 올라가는 마지막까지 보는 맛이 있는데, 인천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늘 자막을 잘라먹습니다.

 뒷간에 들러 물을 빼고 낯을 씻습니다. 옆지기와 손을 잡고 터덜터덜 싸리재 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 앞에 섭니다.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동네 구멍가게에 들르기로 합니다. 보리술 두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삽니다. (4341.1.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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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 적잖이 있습니다만, 헌책방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헌책방을 깎아내리는 사람도 제법 됩니다. 헌책방은 한낱 참고서만 파는 데로만 여기는 사람도 많아요. 헌책방은 ‘우리 나라 사회경제가 낮았을 때나 찾아들던 추억어린 옛날 곳’으로, 그러니까 사라져 가는 곳으로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헌책방 참맛을 못 보고 참느낌을 못 느끼는 분들이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을 굳이 안쓰러워할 까닭은 없습니다. 불쌍하다면 불쌍하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훨씬 크게 배울 수 있고 얻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책쉼터이자 문화쉼터이자 동네쉼터 한 군데를 놓치고 있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저대로 헌책방 나들이를 즐깁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는 분들은 새책방 나들이도 부지런히 합니다. 모두들 ‘책’을 좋아하고 찾기 때문입니다. 책 하나에 담긴 깊은 우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푸고 또 푸어도 마르지 않는 시원한 우물을 느꼈는데, 어찌 이곳을 자주 찾아가면서 새로 물 한 바가지 떠 마시고프지 않을까요.



 1959년에 우리 말로 옮겨진 《에밀 파게-독서술》(양문사)을 봅니다. 이 책은 1972년에 ‘서문당’ 출판사에서 다시 나옵니다. 1959년판과 1972년판은 옮긴이가 같습니다. 둘 모두 이휘영 님.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판이 끊어졌습니다. 일본사람 야마무라 오사무 씨가 펴낸 《천천히 읽기를 권함》(샨티,2003)은 에밀 파게 님이 쓴 《독서술》이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건만, 《천천히 읽기를 권함》은 우리 말로 옮겨져도, 《독서술》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1900년대 첫머리(양문사 판은 1923년에 나온 판을 옮겼다고 합니다)에 나온 책이라서, 요즘 세상과 견주면 너무 낡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면 무엇이 낡았을까요.


― 잘된 소설은 우리들에게 잡히지 않던 인생, 우리들 손에서 반쯤 빠져 달아나던 인생 그 자체를 우리들이 잡도록 거들어 주는 것이다. (33쪽)


 집 앞에 있는 할아버지 헌책방에서 1980년대 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요즘은 어느 누구도 안 사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책입니다. 누군가 이 책을 팔려고 헌책방에 찾아오면, 헌책방 일꾼들은 ‘요새는 이런 책 사가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저희도 살 수 없어요.’ 하고 손사래를 칠 만한 작은 책입니다. 책이름은 《경기남부 노동조합 임금인상 대책위원회 엮음-노동자는 왜 싸워야 하는가》(사계절,1988)입니다.


― 그러면 왜 기업주는 물건을 만들어 팔면 돈을 벌게 되느냐?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물건을 생산해서 팔았을 때 비로소 돈을 가장 많이 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물건을 만들어 팔되 자기가 만들어서 파는 것이 아니고 남을 부려서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이 돈을 버는 원천이고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비결입니다. (47쪽)


 2004년에 우리 말로 옮겨진 책 하나를 책상맡에 두고 가끔 들춰보고 있습니다. 2004년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책상맡에 두었는데. 아직도 다 안 읽고 있습니다. 아니, 아직 책상맡에서 떠나보내기 싫어서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어서 읽어치우고 새로운 책을 읽어도 나쁘지 않지만,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이 책을 생각하고 싶어서 빨리 읽어내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아서 누군가라도 소개하는 글 하나 끄적여 주지 않으면 그예 잊혀져 버릴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늘 보고 있으니 날마다 기쁨과 고마움을 얻어 가집니다만.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일본에서 1981년에 펴냈던 《내가 만난 아이들》(양철북)이라는 책입니다.


― 인간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인간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다른 사람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을 흙발로 짓밟는 일일 것이다. (69쪽)


 일본에서도 《내가 만난 아이들》은 꾸준히 사랑받고 있을까요. 아니면 아쉽게도 판이 끊어져서 사라져 버렸을까요. 우리 나라에는 스물세 해 만에 알려지며 읽히는데, 앞으로 언제까지 살아남으며 읽힐 수 있을까요.

 책상맡 오른쪽에는 《내가 만난 아이들》이 있고, 왼쪽에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즈/김명덕 옮김-우리네 목마름은 우리 샘물로》(한마당,1986)가 있습니다. 종교에 크게 눈길을 안 두던 때에도 해방신학 책을 곧잘 사다 읽었고, 종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요즈음도 해방신학 책이 보이는 대로 마련해서 조금씩 읽어 보고 있습니다. 앞에 ‘해방’이 붙었든 안 붙었든 ‘신학’입니다. 뒤에 ‘신학’이 붙었든 안 붙었든 ‘해방’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 착취와 가난에 희생 제물이 되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려는 자는 누구나 그같은 문제의식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31쪽)


 곰곰이 돌이켜보니, 예나 이제나 대통령으로 뽑힌 이들이나 국회의원이 된 이들은 한목소리로 ‘부동산 정책’을 외쳤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지키려는 정책을 외친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파트에 살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골목길 허름하다고는 해도 조용하며 오붓한 터전에서 옆집 사람하고 이웃하면서 떡이며 밥이며 술이며 김치며 나눠먹고 살고픈 이가 있습니다. 시골에서 논밭을 일구며 제힘으로 밥과 옷과 집을 풀어내며 살고픈 이가 있습니다. 도심지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거나 공무원 일을 하면서 다세대주택에서 알맞는 전세집 얻어서 살고픈 이도 있습니다. 전통 기와집에서 살고픈 이가 있고, 흙으로 지은 집에 풀로 지붕을 얹어서 살고픈 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나라 정책은 ‘아파트만 우걱우걱 지어내려는 데’로만 쏠려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안 지켜 줍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나 아닌 사람이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려는 터전’을 고이 껴안으려는 매무새를 잃어가거나 내버립니다.




 히유, 한숨 한 번 쉰 다음, 모니터 옆에 살짝 기대어 놓은 손바닥책을 잡아서 펼칩니다. 《폴 란돌미/김자경 옮김-슈베르트》(신구문화사,1977)입니다. 신구문화사 손바닥책은 1989년쯤인가 재판을 한 번 찍은 뒤로는 싹 자취를 감추었지 싶습니다. 그 뒤로 한 번 더 찍은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슈베르트가 서먹서먹해 한 곳은 에티켓이 까다롭고 격식만 따지는 상류사회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구석에 숨어 있었다. (71쪽)


 슈베르트 노래를 아는 이 많을 테며, 슈베르트 노래가 흐르는 ‘고급스러운 까페와 공연장이나 미술관’ 또한 꽤 많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슈베르트 삶과 생각을 알면서 슈베르트 노래를 듣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슈베르트가 어떤 마음으로 옥구슬 같은 노래를 지어냈는지 차근차근 짚으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얼마쯤 있을까요.

 오늘 모처럼 날이 풀립니다. 해가 반짝입니다. 다만, 바람은 퍽 부네요. 책상맡에 가득가득 쌓인 낡은 책에는 이만 눈길을 접고, 내 사는 동네에 있는 할배 헌책방들에 꽂혀 있는 낡은 책을 구경하러 나들이를 가 보아야겠습니다. 등짝으로 햇살을 느끼면서 두 눈과 두 손으로는 낡은 종이장을 느끼며 머리를 식히고 싶습니다. (4341.1.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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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옥중기
 

 감옥에 갇힌 분들이 남긴 글이 책으로 묶이기도 합니다. 신영복 님이 보낸 짤막한 엽서를 모아 《엽서》가 나오기도 했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오기도 합니다. 박석조 님 형제가 주고받은 《옥중에서 오고간 편지》가 있으며, 서준식 님이 쓴 《서준식 옥중서한》도 있습니다. 문익환 님도 감옥에서 쓴 글과 편지를 모아 책이 여러 권 나왔고,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 이런 일 저런 일로 감옥에 갇혀서 식구들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남긴 일기나 편지가 책으로 묶이기도 합니다.


 ┌ 오스카 와일드 쓴 《옥중기》
 └ 루이제 린저 쓴 《옥중기》


 나라밖에서 이름난 책이라면, 그람시 님이 남긴 《옥중수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루이제 린저 님이 쓴 《옥중기》가, 또 오스카 와일드 님이 쓴 《옥중기》가 있어요. 


 한편, 나라안에 이름난 시인이 남긴 책이지만, 거의 알려지지 못한 김현승 시인 《옥중일기》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가만히 보면, 모두들 ‘옥중(獄中)’이라는 말을 씁니다.


 ┌ 감옥에서 쓴 글
 ├ 감옥에서 부친 편지
 └ 감옥에서 적은 일기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이 쓴 이야기는 ‘동물기’로 알려졌습니다. 장 앙리 파브르 님이 쓴 이야기는 ‘곤충기’로 알려졌습니다. 김찬삼 님이 남긴 이야기는 ‘세계여행기’로 알려졌습니다.


 ┌ -記
 └ 적음 / 남김


 시튼 님이 남긴 ‘들짐승’ 이야기인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와 《회색곰 왑의 삶》과 《뒷골목 이야기》와 《위대한 늑대들》과 《표범을 사랑한 군인》과 《다시 야생으로》를 한 권 두 권 찾아서 읽습니다. 가슴찡함을 느끼면서 자연 삶터를 담아내는 문학이란 얼마나 자연 삶터를 사랑하고 아끼며 가까이하는 가운데 적어내려가야 하는가를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야기’라는 말은 쓰지 못할까요.


 파브르 님이 남긴 ‘벌레’ 이야기를 읽고 ‘푸나무’ 이야기를 읽습니다. 책이름은 《파브르 곤충기》와 《파브르 식물기》이지만, 파브르 님은 크고작은 ‘벌레’들을 살펴보면서, 또 ‘풀과 꽃과 나무’를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당신 딸아들한테 읽히려는 마음으로. 그나저나 우리는 왜 ‘-이야기’라는 말은 넣지 못할까요.


 ┌ 들짐승 이야기
 ├ 벌레 이야기
 └ 푸나무(풀꽃/풀) 이야기


 옛날 옛적부터 내려온 이야기이기에 ‘옛날이야기’이건만, ‘민담’이나 ‘민화’니 하는 이름으로만, ‘설화’니 ‘신화’니 하는 이름으로만 우리들한테 읽힙니다. 알려집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책,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책은 ‘어린이책’이고 ‘어린이 이야기’일 테지만, 한결같이 ‘동화’라는 이름으로만 자리매깁니다. 이 땅에는 ‘이야기’가 자리잡을 수 없는가요.


ㄴ. 가톨릭 다이제스트


 새벽에 일어나 성당에 다녀옵니다. 오늘은 성당에 바깥손님 한 분이 와 있습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라는 잡지를 만드는 일꾼 가운데 한 사람. 짤막하게 잡지를 소개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책을 넘겨 봅니다. 2007년 4월치에 박완서 님 만나보기가 있습니다.


.. 사노라면 형제 간처럼 든든한 힘이 없는데 요즘은 아이들을 하나나 둘밖에 안 낳으니 사촌끼리라도 자주 만나 정을 들이고 우애 나누라고 타이르고 그런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 실은 요새 손자들을 다 모으기도 힘들어요. 누구는 고3이니까 빼 줘야 한다, 누구는 과외공부 갈 시간이다, 이런 식이거든요. 예전엔 특별한 집에서나 아이들을 공주님, 왕자님 취급하는 걸 보았는데, 요즘은 내 손자, 손녀가 다 왕자님, 공주님입니다. 세상이 그렇다니 제가 어쩌겠어요. 저는 이미 구세댄걸요 ..  〈18∼19쪽〉


 몇 꼭지를 빼고는 우리 둘레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로 채워 놓았습니다. 퍽 수수하게 꾸미고 있구나 생각하며 판권을 보니, 잡지가 나온 지 벌써 스무 해. 2007년 4월에 206호였으니 그동안 먼길을 뚜벅뚜벅 걸어왔군요.


 ┌ 리더스 다이제스트
 └ 가톨릭 다이제스트


 잡지이름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왜 ‘다이제스트’라는 말을 붙였을까? 꼭 ‘다이제스트’라는 말을 붙여야 했을까? ‘다이제스트’라는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까? 이 나라 이 땅에서 ‘다이제스트’ 아니면 안 되었을까?


 ┌ 가톨릭 이야기
 ├ 작은 가톨릭
 ├ 가톨릭과 삶
 └ …


 벌써 스무 해나 《가톨릭 다이제스트》로 써 왔으니 그대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름이야 어떻게 붙였든, 알맹이를 차근차근 다지고 추스르면서. 어쩌면 스물다섯 돌을 기리면서, 또는 서른 돌을 기리면서 새 이름으로 거듭날 수 있어요. 잡지이름 고치기란 참말 어려운 노릇이지만, 이런 어려움이란 마땅히 짊어지고 나아갈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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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
쿠루사 지음, 최성희 옮김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
- 글 : 쿠루사
- 그림 : 모니카 도페르트
- 옮긴이 : 최성희
- 펴낸곳 : 동쪽나라(2003.10.15.)
- 책값 : 6800원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가꾸는 동네 놀이터
 [그림책이 좋다 42] 쿠루사 + 모니카 도페르트,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



 (1) 눈과 길


 밤부터 눈이 내립니다. 소록소록 내리는 눈발은 멎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쌓이며 온 동네를 하얗게 물들입니다. 요 가까이에 있는 제일제당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도, 두산중공업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도, 동일방직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도, 동국제강과 인천제철에서 내뿜는 연기도 잠재우면서 눈이 내립니다.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철길에도 눈이 쌓입니다. 서울로 들어서는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에도 눈이 쌓일 테지요. 걸어가면 코 닿을 자리에 있는 인천 제2부두, 제3부두, 제4부두, 만석부두, 화수부두에도 눈이 쌓일 겝니다. 얼마 앞서까지 유리공장이 있던 터에도 눈이 쌓일 터이고, 골목집을 쓸어내고 우뚝 솟아 버린 아파트 지붕에도 눈이 쌓이겠지요.


..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칼리토스의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였을 때만 해도, 베네수엘라의 산에서는 퓨마가 울부짖었습니다. 당시의 산은 거의 원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커다란 나무들과 작은 잡목들이 우거진 숲속에는 계곡이 뻗어 있고,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습니다 ..  (1쪽)


 아침에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다가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건너편 빈집 3층 창가에 비둘기 한 마리 오들오들 떨며 옹크리고 있습니다. 그러게, 참. 이렇게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날짐승들은 어떻게 먹이를 얻지? 어디에서 따순 잠자리를 마련하지? 보금자리 틀 나뭇가지 하나 찾을 수 없는 도심지에서, 보금자리 틀 키큰나무 한 그루 없는 도심지에서, 짓궂은 사람들 손길을 안 탈 만한 조용하고 호젓한 자리 하나 찾을 길 없는 도심지에서, 비둘기며 까치며 참새며 박새며 어떻게 겨울나기를 할 수 있담.

 비둘기가 자주 앉아서 쉬는 창턱에 옆지기가 빵조각을 뜯어서 놓곤 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이 빵조각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앉았다 떠날 뿐입니다.


..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베네수엘라 각지의 소도시와 농촌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와 산기슭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이 집을 짓는 동안, 아이들은 나무에 오르거나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널찍한 공터를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  (5쪽)


 눈이 쌓이니 자동차는 하나같이 굼벵이가 됩니다. 이런 길에는 아예 차를 못 몰겠다며 투덜거리며 길을 나설 분이 있을까요. 대중교통 타야겠구나 하며 일찌감치 길을 나설 분이 있을까요.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서 쉬는 아이들은 방학숙제며 학원숙제를 잠깐이마나 제쳐놓고 동무들한테 사발통문을 돌려서 ‘눈싸움 하자!’고 들떠 할까요. ‘먼 놈의 눈이 이렇게 와?’ 하면서, 골목집 사람들은 빗자루를 들고 골목길을 쓰윽쓰윽 쓸고 있을까요.

 저도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살그머니 골목길 마실을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눈발 날리는 골목길에서 뒹굴며 노는 아이가 있는지, 눈발이 멎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언손 녹여가며 골목길 쓰는 어르신이 있는지 살펴보러.


.. 예전에는 계곡 아래가 풀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높다란 건물들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언덕배기는 집들로 빈틈없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큰길은 고속도로가 되어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산에는 나무 몇 그루만 겨우 남아 있었고, 그 많던 꽃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  (11쪽)



 (2) 종합건설본부 공무원과 길


  어제, 1월 10일 낮 세 시, 인천종합건설본부는, 인천 동구 청소년수련관에서 ‘주민 몰래 주민설명회’를 열려고 했습니다. 중구 삼익아파트 앞부터 동구 동국제강까지 2.51킬로미터 길이에 너비 50미터가 넘는 산업도로를 뚫겠다는 생각을 그예 밀어붙이려고만 했습니다.

 어제 ‘주민설명회’라는 자리를 하기 앞서, 종합건설본부는 인천 동구청과 동구에 있는 동사무소에만 7일날 깜짝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이 산업도로라는 길이 뚫릴 때 피해를 입게 될 주민들한테는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귀띔도 알림글도 공문도 걸개천 같은 것 하나 없이 몰래 하려다가 주민대책위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허울로만 주민설명회를 열었다고 내세우면서 막공사를 밀어붙이려 했기 때문에 이런 짓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종합건설본부 사람들은 말합니다. “설명회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협조와 의견수렴을 거치고자 했다. 그러나 필요성을 알리려 해도 도저히 설득이 안돼 답답할 따름”이라고(경인일보 2008.1.11.).


.. 아이들은 풀이 죽은 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계단에 앉아 각자 자기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놀 만한 장소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거야.” 맨 먼저 말한 아이는 키가 큰 카밀라였습니다. “그런 장소는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시장님을 만나서 우리한테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리자.” 한 아이가 그렇게 제안했습니다. “시장님 집이 어딘데?” ..  (22쪽)


  인천시 공무원은 말합니다.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지만 계획안을 내놓기 전에 이미 많은 대화를 했기 때문에 시 계획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 다음 주민설명회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시가 세운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고(인천일보 2008.1.11.).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지난 달, 동 자치위원들과 도로개설에 따른 소음방지를 위한, 터널 확장, 녹지조성 등 여러 대안과 관련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설명회 요청이 있어 이번에 개최하는 것 … 이미 행정절차는 다 끝난 마당에 굳이 절차적인(요식적인) 설명회를 열 이유는 없다”고(인천신문 2008.1.11.).

 그러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설명회’를 왜 열려고 했을까요. 게다가 ‘굳이 안 해도 되는 설명회를 왜 몰래 하려고’ 했을까요. 종합건설본부와 시청 공무원들이 만난 ‘주민’은 참말로 어디에서 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주민’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을까 모르겠습니다. 또한, ‘주민을 부르지 않으면’서 왜 ‘주민설명회’라는 이름을 내걸었을까 모르겠습니다.


.. “네, 그래요. 저희들은 시청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러 왔어요. 저희들은 놀이터가 필요해요.” “아저씨, 들어가게 해 주세요.” “한가하게 너희들을 만나 줄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러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거라.” 경비원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돌아가라는데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어서 돌아가! 여기에서 얼쩡거리면 경찰을 부를 거다!” “아저씨, 저희들은 이런 놀이터를 갖고 싶어요. 자, 보세요!” 가장 어린 칼리토스가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를 펼쳐 보였습니다 ..  (31쪽)


 사람이 사는 곳이니 집을 마련해야 하고, 길도 내야 하고, 가게도 들이고, 일자리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논밭 일굴 땅이 남아야 하고, 숨쉴 바람을 마련해 주는 숲이 남아야 합니다. 숲에서 베어내는 나무는 우리들이 날마다 엄청나게 써대는 온갖 종이로 바뀝니다. 그러니 숲에는 나무도 많이 남아 있어야 하고, 우리들이 나무를 베어내는 만큼 새 나무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또 새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도록 지켜야겠지요.

 그러면 우리한테는 집을 마련하는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는 길이 얼마만큼 있어야 하나요. 우리 동네에는 가게가 몇 군데쯤 있으면 좋을까요. 우리 동네 일자리는 몇 가지쯤 있어야 할는지요. 우리 동네에는 쉼터와 숲이 얼마만큼 남아 있어야 하며, 우리는 동네 숲을 얼마만큼 간직하면서 가꾸어 나가야 좋을까요.


.. 시장과 직원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희들은 그런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안내해 드릴게요.” “거기가 어딘지 함께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사서 선생님이 시장과 직원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좀…….” 직원이 말을 흐렸습니다. “으흠.” 시장이 헛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습니다 ..  (40쪽)


 우리 사는 이 땅에는 나라밖으로 내다 팔 물건을 실어나를 길만 있으면 좋은가요. 우리 사는 이곳에는 하루하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으로 부자를 만들어 주는 크고 높은 아파트만 있으면 되는가요. 우리 사는 이 동네에는 흙 한 줌 밟지 않고도, 풀 한 포기 쓰다듬지 않고도, 나무 한 그루 돌보지 않고도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있는가요.


.. 카밀라의 말이 맞았습니다. 몇 주일이 흘러도 시청 사람들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공터는 갈수록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온갖 잡동사니들만 쌓여 갔습니다. 놀이터가 들어설 만한 자리 같지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어느새 그 일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  (52쪽)



 이른아침부터 방송차가 다니면서 ‘눈이 많이 오니 집 앞 눈을 쓸자’는 이야기를 외칩니다. 그러나 이런 방송차가 다니지 않아도 골목집 사람들은 알아서 집 앞 눈을, 골목길 눈을 씁니다. 골목집 사람들 문간에는 언제나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마련해 놓고 ‘청소부가 치울 쓰레기’도 먼저 치우고 쓸며 살아왔거든요.





 (3) 책과 길


 아침나절, 창영동과 금곡동과 숭의동을 두루 돌아봅니다. 눈 덮인 길을 걸으며 돌아봅니다. 한 번 쓸어 놓은 길, 두 번 쓸어 놓은 길, 세 번째 쓸려고 사람들이 나와서 일하고 있는 길,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길, 자동차가 밟고 지나가며 눌러 놓은 길을 어기적어기적 걷습니다.

 골목집 사람들은 비질을 하며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 놓습니다. 동사무소 사람들은 염화나트륨까지 뿌리며 아예 눈을 다 녹여 버립니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을 거닐며 눈을 뽀도독뽀도독 소리나게 밟습니다. 차가 오가는 조금 넓은 길은 눈녹은 질퍽거림을 잔뜩 느낍니다. 시커멓게 바뀌어 가는 얼음물이 바지로 튑니다.


.. 어느 날 아이들이 거리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식료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습니다. “얘들아, 저리 비켜! 왜 길에서 노는 거야!” 트럭 운전사가 소리쳤습니다. “왜요? 길에서 놀면 안 돼요?” 아이들은 그렇게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트럭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크고 힘도 셌습니다. 화가 난 운전사가 아이들 쪽으로 트럭을 몰았습니다. 아이들은 하는 수 없이 그곳을 피해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  (16쪽)


 두 시간 남짓 동네 마실을 하고 집 앞에 닿습니다.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가까운 헌책방 한 곳에 들어가서 손을 녹입니다. “모처럼 눈이 많이 오는데 눈 구경 안 하셔요?” “저희는 (책방에 일하러) 오는 길에 했지요. 이제 눈 구경 가시려고요?” “아니요, 아침부터 죽 돌고 이제 막 들어오는 길이에요. 조금만 늦으면 눈을 다 쓸어내서 없으니까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웅크리면서 녹이고 있을 무렵,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들어와서, “《궁》 있어요?” 하고 묻습니다. “아니요, 없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돌아나갑니다. 바라는 만화책 한 가지만 물어 보았습니다. 이웃가게에 들러서도 똑같이 물어 볼까요? 그러다가 아무 헌책방에도 자기들이 바라는 만화책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 가까운 새책방에 가서 살까요?


.. “음, 좋은 의견이구나. 아주 훌륭하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사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문제는 어른들이에요.” 카밀라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만약 어른들이 우리와 함께 시장님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좋고 훌륭한 의견을 내놓으면 뭐 해요? 실행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죠.” “어른들이 너희들과 함께 시장님을 만나러 가지 않으려고 하시니?” “어른들은 우리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래? 그렇다면 너희들끼리 가지 그러니? 그럴 생각은 없나 보구나?” ..  (28쪽)


 모든 아이들, 또는 모든 어른들이 “무슨무슨 책 있어요?” 하고만 물으며 그 책이 없으면 돌아나가지는 않습니다. 제법 많은 아이들은 자기가 살 참고서나 문제모음도 꼼꼼히 살피고 들여다보면서 고릅니다. 적잖은 어른들도 자기 마음밭을 살찌울 책을 고르려고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서너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 동안 다리아픔도 잊은 채 서서 책을 고릅니다.

 “무슨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찾습니다. 자기한테 낯선 사람이 쓴 책, 낯선 출판사에서 펴낸 책, 아직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 붙은 책은 코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으며 꺼내어 들춰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스테디셀러가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본다고 하여 우리 자신한테도 도움이 되거나 재미가 있거나 읽을 만할까요. 우리가 책 하나를 고르거나 사는 잣대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보는 책’이나 ‘두루 사랑받는 책’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 “와, 우리에 대한 기사다!” 케오가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신문에 나오다니, 우리는 이제 유명한 사람들이네!” 칼리토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여전히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카밀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  (48쪽)



 지금 꼭 《궁》이 보고 싶으니까 《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고픈 그 《궁》이 없으면 어쩌지요? 언제까지나 《궁》만 찾아야 할까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주식회사 천재 패밀리》도 눈길이 갈 만하고, 《조폭 선생님》도 손길이 갈 만하고, 《테르미도르》도 마음길이 갈 만합니다. 때로는 《교도관 나오키》에, 때때로 《어시장 삼대째》에, 가끔은 《태일이》에 손을 뻗어 볼 수 있어요. 오늘은 《위안부 리포트》에, 내일은 《따끈따끈 베이커리》에, 모레는 《요츠바랑!》을 펼칠 수 있겠지요.

 학교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내십시오’ 하는 숙제를 낸다고 해서 꼭 ‘이런저런 책’만 읽고 느낌글을 써야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런저런 책’은 그다지 마음이 안 가고 재미도 없을 듯하며 읽은 보람이 없다고 느낀다면, 손수 책방 나들이를 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든 다음, 이 책을 차근차근 읽고 자기 깜냥껏 느낌글을 써서 내도 좋아요.

 ‘1 + 2 = 3’이라고 맞는 답만 적어서 내야 숙제를 잘하는 셈은 아니거든요. ‘1 + 2 = 4’라고 적으면서 틀릴 수 있는 숙제이고, 자기는 다르게 생각하서 다르게 마무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적어도 좋은 숙제입니다.


.. 어느 날, 칼리토스는 삼촌이 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장이나 시청 따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뭐 있어? 우리끼리 힘을 합쳐 만들면 돼.” 삼촌이 탁자를 ‘쾅!’ 소리나게 치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삼촌의 친구들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신나간 소리하지 마. 무슨 힘을 합친다는 거야? 자기 집 앞 골목도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힘을 합쳐 놀이터를 만들기나 하겠어?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야.” ..  (55쪽)


 (4)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그림책


 그림책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를 읽습니다. 책을 고르던 책방에서 한 번 읽고, 책을 사들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전철길에서 한 번 더 읽습니다. 집으로 와서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이웃집에 놀러가서 ‘동네사람끼리 모여서 책읽기 모임을 해 볼까요?’ 하고 말문을 열면서 또 한 번 넘겨봅니다.


.. “시장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들끼리 놀이터를 만들면 안 될까?” 칼리토스가 말했습니다. “놀이터를 만드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아니? 그건 아주 복잡한 일이야.” “하지만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끼리 놀이터를 만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호세 아이들은 저마다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형이나 누나들을 모았는데, 나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들까지 나섰습니다 ..  (53쪽)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났던 일을 차근차근 그림책으로 엮어내 보여주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입니다. 달동네 아이들은 자기들이 마음놓고 뛰어놀 곳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집안 어른들한테 놀이터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모두들 ‘바쁘다’는 핑계로 손사래를 칩니다. 시청 공무원들도 말로만 다짐을 하고 자기들 다짐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놀아야 합니다. 놀 곳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놀이터였던 골목이 자동차가 빵빵거리며 내달리는 곳이 되어 버리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신나게 뛰어놀던 빈터에 빌라가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고속도로로 바뀌면서 자꾸만 산꼭대기로 쫓겨나고 있는데, 아이들은 마냥 팔짱을 끼거나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바로 놀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손으로 놀이터를 만듭시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은 칼리토스의 삼촌과 아이들뿐이었습니다 ..  (58쪽)


 어른들은 일을 해야 하니 바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왜 일을 하지요? 무엇 때문에 일을 하지요? 누구 때문에 일을 하지요? 일을 해서 얻은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지요?

 아이들은 바로 지금 놀고 싶어합니다. 놀이동산에 가자는 소리가 아니라, 동네에서 동무들하고 웃고 떠들고 울고 복닥이면서 놀고 싶어합니다. 미끄럼틀이나 시소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터만 있으면 됩니다.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터, 못이나 병조각이 흩어져 있지 않은 터, 차가 함부로 들어와 빵빵거리지 않는 터, 맑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땀흘려 뛰고 구를 수 있는 터를 바랍니다. 키 크고 굵은 나무가 있어 그네를 맬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잎 많은 나뭇가지 그늘이 있으면 한결 좋겠지요. 팽이를 치고 연을 날리고 구슬을 치고 땅따먹기를 하고 고무줄을 뛰며 오재미나 오징어도 하고 빗돌치기나 자치기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어른들도 함께 놀거나 곁에서 수다 떨면서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놀이터를 바랍니다. (4341.1.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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