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수업 - 따로 또 같이 살기를 배우다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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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나무는 많은 비밀을 털어놓는다.... 앞으로 나의 나무들은 내게 많은 교훈을 들려줄 테지만 지금껏 나뭇잎 지붕 아래서 내가 깨달은 것만 해도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사연들이 많다. 당신에게도 나무들이 전해 준 그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다."


중학시절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책을 읽고 식물들도 인간의 감성과 다를 바 없는 정서를 느끼며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무수업』도 그 책의 연장선상일 거라 지레짐작 했었다. 하지만 이건 생을 그리고 있다. 숲이라는 동식물들이 이루어낸 그들의 문명(?)의 구조랄까 생리를, 나무의 생을 축으로 해 다양한 구성원들의 모습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나무들, 균류, 이런저런 이름의 버섯류들, 나무좀, 진디, 딱따구리, 비버, 푸른머리되새, 어치, 사슴, 노루 등등... 자연계의 구성원들이 자아내는 그들의 문명(?)에 하루하루는 인간 사회 만큼 치열하면서도 인간이 만든 세계 보다 더 조화로운 이상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기와 이타가 적절히 어우러지고 이기적인 전략이 이타적 사회를 구조화하기도 했다. 인류 문명과 유사하지만 숲이라는 더욱 탁월한 문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딱따구리는 그저 나무를 쪼아 나무 속 벌레나 먹고 구멍을 파서 둥지를 삼는다고 생각했다. 헌데 딱따구리는 딱딱한 나무의 껍질과 겉층을 약간 쪼아 균류가 침투해 나무를 부식시키길 기다린다고 한다. 균이 나무의 조직을 해체해 부드럽게 만들기를 한달여 동안 기다린 후에야 쪼아대서 둥지가 될 구멍을 판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둥지가 된 구멍 내부를 균이 멈추지 않고 계속 부식시켜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듭 보수와 수선을 해야만 한단다. 그러다 딱따구리가 옮겨가면 다른 새와 다람쥐들의 거주공간이 된다고 한다.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것이 자연계의 진면목이었구나 싶었다.


비버가 댐을 만들려 나무를 쓰러뜨리면 시냇물에 쓰러진 나무가 웅덩이를 만든다. 그러면 센 물살을 못견디는 작은 생물들에게 숨쉴 공간이 된다고 한다. 그런 웅덩이엔 낙엽과 쓰러진 나무가 썩으며 부식산이 생겨난다. 그럼 부식산은 박테리아와 함께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물살을 피해 숨어든 작은 생물들이 살만한 청정한 수질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폭우 후에 그런 웅덩이에 이는 거품들은 부식산과 물살에 생겨난 공기가 결합하며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나무들 사이의 경쟁과 소통과 희생도 인상 깊었다. 나무도 종에 따라 빨리 성장하다가 성장이 더뎌지는 것, 처음엔 발육부진으로 다른 종의 나무 보다 더디게 자라나지만 끝내 거목이 되는 것 등 다른 성장 발육을 보인다고 한다. 같은 종의 나무도 개성이 다 달라서 나란히 선 세 나무도 겨울을 앞두고 어느 녀석은 빨리 낙엽을 떨구고 어느 녀석은 잎사귀를 오래 보유하고 있단다. 겨울이 오면 땅이 얼어 영양분과 수분을 줄기를 따라 가지를 거쳐 잎으로 이동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다 잎이 있으면 잎에서 수분이 증발해 나무가 말라간다고 한다. (겨울이 올 때쯤이면 침엽수는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잎의 표면에 수분증발 방지를 위한 두꺼운 왁스층으로 잔뜩 뒤덮는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을 앞두면 영양을 더 흡수해야 할지 잎사귀를 빨리 떨구어 수분증발을 막는게 나을지 결정해야 하는데 이때 나무 마다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도 저 마다의 개성을 지닌 채 나름 제멋에 산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판단착오가 있었더라도 뒤에 말할 공유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보살핌으로서 대처하는 것이다.


나무 사이의 경쟁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과도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자연계에서 나무의 삶이다. 뿌리 부근에 특정 버섯류가 자리잡으면 다른 나무와 영양분도 정보도 교류하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영양분과 정보의 교류... 그건 잠시 후 알아보고 나무의 분투를 좀더 보자. 나무는 천적의 위협에 방어물질을 만들어내 천적이 피해가게 하거나 심한 경우 사망하게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동종의 나무들에게는 미리 방어물질을 만들어내라고 향기를 매개로 정보를 준다고 한다. 더구나 놀라운 건 그런 정보전달의 과정에 향기만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전기 작용도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라니? 할테지만 학계 연구로는 나무는 220헤르츠의 소리를 뿌리에서 낼 수 있다고 한다. 한 나무의 뿌리가 침략자가 있다는 소식을 다른 나무들에게 알리면 다른 나무들 뿌리의 잔뿌리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한다고 한다. (무슨 판타지 속 괴기수도 아니고ㅡ.ㅡ;;;) 전기 작용도 상상 밖이다. 같은 종의 나무들 끼리는 서로 뿌리를 얽히고 있으면서 천적 동물의 등장에 전기적 흐름으로 알려준다고 한다. 뿌리가 닿지 않을만큼 멀리 떨어진 동종 나무에게는 토양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균류가 광섬유 역할을 하며 위험을 알리는 정보를 전달한다고 한다. 


-전기적 작용과 균류의 역할 그리고 나무의 기능이라고는 믿기 힘든 '소리'...(나무의 소리를 찾아서^^;) 다소 특이해 보이는 이런 현상들은 사실 토양에 퍼져 있는 균류의 역할을 공간이 대신하며 사람들 사이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신 또는 가족, 사랑하는 누군가가 위험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인체적 이상반응이 일어나거나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나무 사이 뿌리의 얽힘은 사회에서 서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다.-


이런 뿌리의 얽힘은 서로가 서로와 영양을 분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사회복지라는 인간 사회의 제도와 연결 짓던데 이건 복지제도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공평한 분배 그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란 나누는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 빼앗아 누구에게 주느냐 하는 것이다." 라는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정도전 대사는 구시대적 사고 방식이다. 나무를 보라. 애초에 뺏어서 나눌 필요도 없다 애초에 뺏을 것도 없이 공유하지 않는가? 어느 나무가 모든 양분이 인간 사회처럼 정점으로 편중되는 것을 내버려두다가 뒤늦게서야 재분배하자면서 열 올리며 복지를 찾고 있느냐는 말이다.


나무가 살신성인하다거나 자녀를 죽음으로서도 돌본다면 누가 믿을까 싶다. 헌데도 숲에서는 어미 나무일지 그냥 이웃의 어른 나무일지가 다 자란 나무들 틈에서 빛이 가려져 광합성이 어려운 아기 나무를 그런 얽힌 뿌리를 통한 공유로 보살핀다고 한다. 더우기 가문비나무의 씨앗이 쓰러져 있는 죽은 나무의 몸통에 떨어지면 특히나 더 잘 발아한다고 한다. 이를 '시신의 회춘'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죽은 어미 나무는 점점 부식되어 흙과 하나되며 그렇게 부식토가 되어 아기 나무를 돌본다. '죽어서도 아기의 요람이 되는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아기 나무라고는하지만 저자가 몇십년 수령의 나무 까지를 아기 나무라 보는건지 모르겠다. 저자의 말로는 스웨덴 달라르나 지방에는 수령 8000살이나 되는 가문비나무가 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150살 나무는 아직 어린나이의 나무라고 한다. 그러니 아기 나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보다 10살 이상 연세가 많으신 고령의 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이에른 숲 국립공원에 나무생물학자 마르틴 고스너 박사가 찾아와 (높이 52미터, 직경 2미터의 600세나 되신) 고목에 제충제를 살포했다고 한다. 이때 나무 주위로 죽어 떨어진 곤충이 '무려 257종, 2041마리'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들은 본서에 꽤 많이도 등장한다. 그 중 나무를 아프게도 하고 돕기도 하며 공생하는 여러 종의 균류가 있다. 이런 균류는 자신과 공생하는 나무가 양분이 모자라면 독을 방출해 톡토기 같은 절지 동물을 죽여서는 그로 부터 질소를 나무가 충당하게도 한다. 나무의 상처에 침투해 가지나 몸통을 손상 입히거나 심지어 나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균류도 있다. 나무 입장에서는 해충인 여타 곤충들이 나무좀 의 공격에 저항하며 나무는 면역체계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앞서 본 딱따구리가 나무를 해치는 것도 같겠지만 나무의 몸통을 침범하는 균류나 나무좀을 쪼아 먹어서 나무의 겉에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만회할 만한 도움이 되기도 한단다. 게다가 나무에 구멍을 파면서도 용케 수맥의 치명적 손상은 입히지 않으며 공생하고 있다고 한다. 어치 라는 새는 먹이감 삼아 나무의 열매를 따다가 모아 놓는데 그 과정에서 씨앗들이 먼거리로 가 싹을 틔우는 것이라 한다. 비버 같은 벌목꾼들도 나무 입장에서야 무자비한 살해자이겠으나 자연의 입장에서는 위에서 보았듯 나무의 또 다른 진가를 자연 속에 알려주는 매개이지 않은가? 인간들의 개발과 훼손으로 들이나 스텝(강수량이 풍부한 비옥한 지대) 지역에서 밀려난 사슴, 노루 같은 취약계층 동물들은 별 수 없이 나무 껍질을 뜯어먹으며 나무에게 고통과 손상을 주게 된다. 그 손상을 못버텨내고 죽는 나무가 있다해도 그 죽는 나무는 쓰러져 아기 나무의 요람이 될 것이다. 자연 속 갈등과 사랑은 그렇게 순환하고 또 순환하는 것이 순리인가 보다. 


순환의 순리를 나무와 바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學의 해양화학자 마쓰나가 가쓰히코 교수는 '낙엽에서 나온 산이 개울과 시내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 플랑크톤의 성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마쓰나가 가쓰히코 교수는 해안가에 나무를 많이 심으라 독려하며 실제 나무가 많으면 물고기와 굴의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한다. 이를 언급하며 저자는 "숲은 또 전 세계의 다른 자연공간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쯤이면 자연 공간 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숲은 지구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 구성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 책 속 나무들도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여타 생물들도 서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전략적 대응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정도 사랑도 나눔도 매서운 갈등과 충돌도 두루 있지만 결국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일방적으로 압도하며 갑질하는 구조이지 않더라는 말이다. 


나무가 자기방어를 못해 나무좀 등의 병충해로 가지 하나가 부식해 가면 가지는 결국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내린 썩은 가지는 균류의 도움으로 부식토가 되어 거름으로 재활용된다. 살아나야 할 나무를 위해 나무의 일부는 그렇게 자연히 사라져가며 나무의 새로운 날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그리도 오랜 세월 인류를 살게도 해왔지만 썩어가고 있는 제도가 있다면 과감히 떨어져 나가도록 해야 할 일이다. 난 그 썩어가고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또 자본주의라는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 대의민주정치에서 직접민주정치로 진화해야만 할 일이다. 그래야 새로운 날들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이후 우리가 만들었던 시대가 부식토로나 남아 다음 세대가 새로운 제도를 만들도록 미뤄두기 보다는 더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뿌리를 얽고 균류를 배양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채워주면서 새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면역체계를 만들지 못해 자신에게도 이웃생명에게도 독만 내뿜을 줄 아는 아픈 나무들에게 우리의 뿌리를 건네고 품어야 할 일이다. '아프냐고 아프다면 우리가 함께이니 함께 나아가자고 더불어 살아가자' 고 그렇게 따스하게 사랑으로 서로를 채워가는... 아름답게 공유하는 시대를 우리는 만들어 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부식토가 되어가며 한시대를 함께해온 생명들에게 건네야 할 전기적 흐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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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10가지 방법
이경윤 지음 / 글로벌콘텐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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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매매 시의 투자자들과 시장 전체가 아우러져 갖게 되는 심리상태에 대해 매번 관심은 있었는데 해당 저작을 읽어본 적은 드물다. 2007~2008년경 단한차례 있긴 했었는데 어느 서양인 저자의 제목도 기억 안나는 그 저작은 너무 간소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라 기대에 반비례 하는 감상만 갖게 되었었다. 


그래서 투자를 위한 시장 분석과 투자자의 심리 상태 양측면 모두가 주제인 본서에 나름 관심이 적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읽어본 감상은 어떻더냐고 묻는다면 50:50 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실제 주식투자를 위한 분석에 대한 경우는 전문 경제인인 저자 나름의 관점이 너무도 상식적이다 보니 워렌 버핏 씨의 며느리라는 누가 쓴 저서를 읽었을 때와 유사한 감상이 남았다. 원래 전문 투자자나 수익율이 높은 투자자일 수록 나 같은 평범한 개미들이 볼 때는 너무 상식적이라 노하우는 숨겨둔 것 아닌가 싶다던데 그 말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나 같은 갑갑한 개미에게 어필하려면 저자의 정의 하나하나에 실제 사례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나열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매수시점을 언제로 보았고 매도나 손절매는 어느 시점에 이루어졌는지 충분하게 제시해야 이해가 갈 것 같다. 물론 본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투자 관련 분석 내용이 메인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서의 정말 중요한 주제는 투자자의 자기심리 통제이다. 좀더 정확히는 '주식매매 중독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주제일테고...


주식매매 중 손실이 오는 상황에서도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러한 손실이 커가는데도 주식매매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상황, 이때 주식투자자의 심리 상태는 중독 상태라는 정의가 전개의 전제이다. 그 결과 야기되는 투자자 본인의 내적 고통과 가족 간 신뢰가 무너져 투자자 개인의 고통이 더해지고 가족으로 고통이 확장되는 경우를 막기 위해 주식 중독 치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주식심리상담치료가 존재하니 주식중독이라는 자각이 있게 되면 언제든 주식중독 치료프로그램 상담을 받아라. 신속히 치료하여 개인과 가족 사이 경제적 심리적 관계적 피해를 키우지 말라는 것이 저자의 집필 의도 중 하나인듯 싶다. 또 하나는 심리상담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기전에 투자자 자신이 스스로를 제어해 가며 중독 수위에 이르지 않도록 적절하고 안정적 심리상태를 유지하며 투자를 하라는 것일테고... 


저자는 주식매매중독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 중독 상태에 대한 정의를 나열하고 있다. 물질 중독, 행위 중독, 주식매매 중독으로 분류한 세부적 내용은 본문을 읽어 보시고... 

저자는 물질중독과 행위중독이랑 주식중독이 차별화 되는 것은 앞선 두가지는 개인이 고통스러운데 그치지만 주식 중독은 경제적 손실을 키워 가정의 유지를 어렵게 해 가족의 해체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허나 술, 마약 등의 물질 중독 경우에도 소위 주폭이라는 음주폭행으로 가족이 피해대상이 되거나 술이나 마약을 통해 취중이나 환각 상태에서의 운전, 폭력, 강간 등 2차 범죄로 이어지면 가족도 사회적 지탄과 내적 수치와 공황 등을 경험할 수 있다.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이 심각해지면 아마 생업 활동도 불가능할테고 마약의 경우 내성이 생기며 점점 다량의 마약을 투여하게 되어 상당한 경제적 부담에 놓일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면 가족 해체가 뒤따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결말일 것이다. 행위중독도 도박, 쇼핑, 도벽, sex 등에 중독된 가족 구성원은 가정에 경제적 부담이나 대내외적 오명과 지탄으로 물질중독에서 든 예와 같은 고통을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불러올 수 있다. 본서의 저자도 이런 면을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물질중독, 행위중독의 경우와 주식중독을 구분 지을 때) 그 고통의 대상이 개인의 고통에만 머무는 경우를 물질중독, 행위중독으로 분류하고 가족으로 고통이 확장되며 가족의 해체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을 주식 중독이라 분류했다. 그것은 아마도 주식중독으로 오는 경제적 손실의 규모가 앞서 두 경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중독에 대한 본서의 정의로는 물질중독, 행위중독은 동기가 스트레스이나 주식중독은 순수하게 수익이 동기이다 보니 중독자가 중독 자체가 폐해임을 자각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주위에 자신이 중독 되었다고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양성화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본서를 읽고보니 어떠한 경로로든 주식투자로 인해 야기되는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다면 저자가 말하는 주식심리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을듯 하다. 게다가 본서를 읽고 있자니 주식심리상담을 통해 그저 주식매매중독만이 치료 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삶에 대한 태도 변화 마저 불러올듯 했다. 저자는 메타연구소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을 수료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식중독 치료를 위해 적용된다고 하는 체계들이 인지행동치료 체계일 것 같은데 그 심리치료 체계가 원래 삶에 대한 태도 변화를 동반하는 체계인듯 하다.


[Part7 마음 다스리는 세부상담 프로그램의 성과]의 내용과 [Part5 주식투자자 행위 메커니즘], [Part6 주식 투자자 심리 진단]의 내용들 그리고 [Part1 개미의 소리]에서 <1. 사례분석 방법 및 의미>의 내용 중 『2)내면 심리상태 4가지, 3) 외면 심리상태 4가지, 4)인지행동 메커니즘 5가지』는 주식중독이던 어떤 중독이던 중독에 국한될 내용들이 아니다. 기억해 두면 충동적인 행동이 일려는 순간 마다 내면을 관조하며 자기절제할 기준 개념들로 쓸모 있을 것이다. 


초보 주식투자자에게는 한번쯤 가볍게 읽고서 많이 가볍지는 않을 투자 시의 내적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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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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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 종교에 대해 숙고해 볼 기회는 된다. 단, 지나치게 기대하진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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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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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리뷰를 써내려가기 전에 몇가지를 전제 할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난 2016년 3월 13일 아침까지 기독교인이던 사람으로 불교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살 때로 기억하는데(그 보다는 조금 늦을지도 모릅니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돌아보고나서 실제 그 시절의 사진이나 기록 등으로 재확인을 거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종종 내 기억에 다소 간의 시간차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더군요. 다소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은 기억과 사실 간에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수긍할 도리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즈음 《불교의 체계적 이해》라는 책으로 처음 붓다의 가르침을 읽고서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께서 펼치신 가르침에 깊은 울림과 함께 압도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무리 힘겹고 때론 방황과 휘둘림이 교차하며 거듭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순둥이 아기였던 시절에도 원초적 불균등한 무력차에 압도 당하며 아기시절 부터 유년시절 전체를 감당할 필요없는 부조리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로 내면에서 없던 반골기질이 싹틀 수 밖에 없었고 자라며 또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의 양지 속 음지와 있는 그대로의 음지랄까를 거듭 거치며 더욱 사회의 부조리 하나하나를 겪어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부조리는 그 자체를 수긍하고 받아들여 나 또한 그 부조리를 강화하며 난 적응한 것이다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고 바꿀 수도 없으니 남들 보다 더 잘 적응해 갑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키워가거나 저항하거나 그냥 체념하고 아무 의식없이 살아가거나 하는 고작 이 정도의 선택의 폭 정도 밖에는 없는 문제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적응해서 갑이 되어 바꾸면 된다는 논리를 펼치는 이도 있으려나 몰라도 적응이라는 정신승리(자기합리화)로 사회가 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 중에 사회 부조리를 강화하지 않고 바꾼 인물은 역사상 누가 있었던가 의문이니까요. -프랑스 혁명 등을 예로 든다해도 마리앙트와네트가 프랑스 혁명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소외계층의 삶에 무지했던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소외계층에 지속적 후원을 해 왔다는 내용을 일요일 아침 10시30분 이후에 하는 MBC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애초에 낭비벽으로 프랑스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게 마리앙트와네트 왕비라는 주장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승자가 되면 패자의 과오는 무턱대고 과장하고 비방할 권리가 생겨나는 구조 속에서 역사는 이어져 왔습니다.-


동양에서 태어나 자라며 동양의 전통들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고 삶이 버겁게 짓이기도 무너뜨리며 압도해 왔기에 자연히 무너지고 주먹을 쥐기를 반복하며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 길에서 붓다께서 펼치신 가르침이 때론 빛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기독교인이었었기에 무조건적인 붓다의 설법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만을 한 것은 아니나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에 대한 애정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사랑 역시 너무도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전>이라는 법정 스님의 문득문득 혜안과 사랑이 흠씬 느껴지는 질문과 성철 큰스님의 답변에 대한 나의 감상은 기독교적 프리즘을 통해 이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불교 경전과 논서 몇몇만의 짧은 불교 철학에 대한 지식만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노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듯 싶습니다. 더욱이 타고난 순응성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더해 반강제적으로 육성된 반골기질로 인해, 종교적 수용과 비판적 반론이 교차하는 리뷰일 것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설전雪戰》이라는 본서는 『我, 자기를 바로 보라. 俗, 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 佛, 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 이렇게 세단계로 전개됩니다. 


법정 스님과 성철 큰스님의 질문과 답변의 첫시작은 성철 큰스님께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은 매번 3천배를 하고 나서야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묻고 답변하는데서 부터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자신은 무슨 대단한 불교인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니 자신이 아닌 부처님을 사람들이 찾도록 하기위해 3천배를 하도록 하신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며 말씀하시길 " '내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중이야. 나한테 속지 말어. 도道를 아는 사람이니 뭐니 그런 뜬소문에 속지 말란 말이야.' 그 말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중략... 자꾸 중한테 속으려고 달려드니, 할 수 없이 철망을 쳐 버린 거예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하고 말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이 말씀은 선불교 책자 한권이라도 읽어본 분들은 다들 아실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베어라(죽여라)'는 말씀을 비틀어 하신 말씀 같습니다. 부처라는 형상에 연연해 공경과 헌신을 나무나 돌이나 청동 조각상에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게 선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 깊은 곳에 담긴 심의를 체득하는 것으로 맹목적인 계율의 준수나 철학적 담론으로 논쟁에서 이기려고만 머리로 불경을 읽고만 있는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성철 큰스님을 공경하는 이들이 성철이란 법호를 가진 한 사람에게 연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서고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정체될까 염려하신듯 합니다. 더욱이 그렇게 성철 큰스님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동경하는 이들이 있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망상이다 또 성철 큰스님을 동경하던 이가 만에 하나, 사람인 성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가려던 걸음에 회의를 느끼기라도 할까 여러 방면에서 고려하시고 이런 말씀도 이런 대응도 하신듯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진제 차원의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고 가르침하시기 이전에는,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붓다가 될 이의 남다른 전생들을 말씀 하시기도 했고 아미타여래와 앞으로 오실 마이트레야 붓다에 대해서도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의 전생들에 대한 말씀은 그로 해서 카르마에 대해 즉, 인간의 삶에서 자신과 타자가 주고 받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 가르침하시며 생의 버거움, 납득하기 힘든 절망스런 운명들을 감당할 근거를 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연기라는 자신과 대상 사이 서로 주고 받는 상관관계를 설명하시려 하신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선을 행하는 삶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정의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셔서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고자 욕망을 불러일으키신 이후 그런 욕망을 갖는 이들이 부처님께서 보시기에) 팔정도 이상의 바른 삶(보살행)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더해 사람들이 붓다라며 공경하는 깨달은 분 자신이 남다른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는 논리적 귀결에 대중의 이해력이 이르도록 유도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앞서 말한 연기에 대해 카르마에 대해 선한 삶을 살아야할 필요성과 이유에 대해 설명하시며 깨달음에 대한 목표를 지닌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부처님을 공경하는 관점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이미 깨달음이 목표인 이들 외에도 깨달음을 목표로 삼을 사람도 선한 삶을 선택할 사람도 또 깨달음에 바로 이를 근기라고 하나 오성이라고 하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할 재능(지성, 감성 등등의 다중지능적 재능)을 이르는 그것이 낮은 이들도 부처님을 공경하는 삶 속에서 경건한 삶과 자기정화를 통해 거듭 성장할 것이라 고려하시고 그리 하신 것일 겁니다. 


요가에서도 박티요가라는 힌두교 신자들이 그들의 신에 대한 경배와 헌신 자체를 수행으로 삼는 요가분파가 있으니까요. 또 부처님께서도 성문(부처님 설법을 듣고 읽고 계율을 지키며 따르는 수행) 연각(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요가 수행 등과 같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라 이해했었는데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으로는 홀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 홀로 연기에 대해 깨우쳐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고 하는군요) 보살(대중 속에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며 자신과 타인의 깨달음을 함께 추구하는 수행)의 삼승으로 가르침 하시며 삼승은 방편이며 일승이 있을뿐이라 하셨다해도 분명 각각의 승을 따라 수행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요가에서도 갸나요가라 하여 지적인 각성을 거듭 갱신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요가분파가 있습니다. 즉, 경전에 대해 학습하며 궁구하는 것을 통해 깨우쳐가며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는 계율이나 문자에 집착하는 것 마저 경계하고 더우기 부처님의 상에 공경하는 것도 집착하는 것으로 보고 경계합니다만 그런 집착이 미망이라하던 미혹이라하던 어리석음이 그릇되이 착각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라한다해도 그 어리석음 마저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일 수 있을 것입니다. 탄트라나 불교의 밀교 수행들은 상에 집착하는 그런 분별 마저도 이용하여 무드라와 아사나, 만트라, 심상화 등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으로 삼지 않습니까? 더나아가 탄트라 중에서도 그렇고 불교 밀교의 시륜교에서는 성애(성교) 마저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혹에 쉽게 빠진다면 그 쉽게 빠지는 어리석음을 깨려고만 하기보다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께서 삼승을 말씀하셨고 아미타여래의 극락천에 왕생하기를 사람들이 기대하고 추구하도록도 하신 것이고 미래엔 마이트레야 붓다가 오실 것을 기다리도록 유도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께서 "우리에게 일체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라고 질문 드리자 성철 큰스님께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렇게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답변하시며 이후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별로 없었다고 하시는데 음... 자이나교에서도 그렇고 요가철학에서도 사람이 깨달음에 이른 경지를 이르는 표현이나 불교에서 붓다의 경지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부도지에서는 복본復本을 말하고 있고 한단고기에도 사람(이 경우는 참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이 되고 싶다며 환웅께 말씀 드려서 웅족과 호족 여성이 삼칠일 간 수행에 정진해 웅족 여성이 웅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본은 회복으로 의역할 수 있을듯 합니다. 본래의 우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원성실성, 불성을 이룬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복본 개념입니다. 그러니 그런 본래 그대로의 자신으로 회복하는 것이니 복본이라 한 것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전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복본 개념이나 불교의 불성, 자이나교나 요가에서 깨달음을 이르는 것과 같은 경지를 논하는 신화나 철학이 즐비할 것입니다. 종교를 정치화하며 몇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카톨릭 교단이 예수님의 상을 정형화하려 정경(캐논)과 외경(아포크리파)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에도 정경 속 예수님의 상 또한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존재이시지 무슨 목각인형이나 점토상과 같이 조야해지지는 않았지요. 여하튼 이렇게 예수님 마저 재단하려 드는 정치조직화 되어 변모된 카톨릭이기에 대중 종교로서의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앙인을 그저 창조주와 구세주와 피조물이자 구원의 대상인 신앙인으로 삼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에서는 다르지요. 불가에서 말하는 분별을 그치라는 가르침과 다를 바 없는 말씀이 아포크리파 전체를 채우는 말씀이며 서양의 트리메기투스 헤르메스의 에메랄드 타블렛 가르침은 명백히 천상의 것을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21에도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는 것이고요. 유대의 카발라 전승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그대로의 아담을 아담카드몬이라 하고, 카발라 철학에 입각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아담 카드몬을 새로운 시대에 다시 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현을 해내고 출현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그분과 같아질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구현해내는 그 완전성의 회복 상태(온전한 사람, 다시 말해 참사람)가 과연 그렇게 완벽히도 신적이기만 한 것일까 의문이 일기도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함에 대해 계속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 자기와 똑같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 능력만 완전히 발휘하면 모두가 다 절대자이고 부처인 것입니다....한 문장만 중략... 그런데 어째서 중생이 근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집착으로 인해 사물의 본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하는 분별망상 때문에 이 능력을 깨치지 못해서 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선 깨달은 이 즉 붓다의 경지를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 여기는데 이 역시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처럼 부처님의 상을 분별하여 지니신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면 진제의 깊이를 숨기고 속제로서 대중을 제도하기 위해 그런 가르침을 펼치신 것인지도 모르지요. 


허나 세속의 대중이건 득도하신 큰스님이건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고 가르침하듯 부처의 경지를 품고 있는 이가 중생이라면 부처님 속의 중생 혹은 부처님의 삶 속에서 중생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제약 또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생노병사를 초월하시겠다며 왕위계승권도 갓출산한 아름다운 아내도 첫아들도 아마도 한껏 아름다웠을 궁녀들도 안락한 하루하루도 모두 버리고 떠나 수행에 전념하셨던 분이시지만 결국 늙고 병들어(탁발하신 공양을 드시고 식중독으로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 절대자이시고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시는데 부처님 같은 깨달은 이께서 등장하셨다해도 모든 이들이 제도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뭇중생들 누구나가 깨달음에 이르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대승적 삶을 살도록 하게는 못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아기를 잉태했다며 대중들 앞에서 부처님을 음해하던 여인도 있었고 법왕 지위를 빼앗으려고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를 살해하려던 것은 부처님의 사촌형이셨습니다. 이로만 보아도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중생의 근기, 오성을 넘어서 깨달음에 이르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의원 후보이던 대통령 후보이던 아무리 자신이 상대 후보 보다 국민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고 공약의 실천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믿는다해도 국민들이 몰라주면 국민들에게 유익한 삶을 안겨줄 기회 조차 갖지 못하고 맙니다. 물론 정치인들이라면 그런 경우 대중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려 유세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정치인이라 말하겠지요. 하지만 총선시기 즈음 국가영수가 남북관계 마저 의도적으로 경색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치면 선거에 악영향은 피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을 출마한 후보자의 능력이 없어서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살아가다보면 모사재인 성사재천 謨事在人 成事在天 이란 말 마따나 아무리 잘난 사람도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만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상전에서 이전엔 이 계절에 단한번도 없던 폭우나 지진이나 돌풍이 전쟁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고 해전에서 역시 예기치 않은 해저지진이나 예상을 벗어난 폭풍으로인한 풍랑이 승전 상황을 백지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인이라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는 있지만 대처방법이 없을 문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라 해도 그 능력이 절대적이고 무한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수용하는 상대의 내적 상태에 따른 것입니다. 내가 잘나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을 넘어선 극단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것은 상호간의 관계성 즉, 불가에서 이르는 연기 속에 서로가 영향력이 있는 것이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으로 연기를 벗어나 모든 것을 압도한 사람은 인류가 인식가능한 기록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짚어보아야 할듯 합니다.

역사상 어떤 사람도 그렇게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보인 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직후 분명히 "다 이루었다"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완수하는 것임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증명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으나 며칠 후인가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절 버리시나이까" 라며 절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분명 자신의 뜻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추할 수 있을 외마디셨다고 봅니다. 애초 따로 하나님께 하셨다는 기도도 "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연출을 명확히 아셨고 연출에 동참도 하신 후 연기하셨다고 해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 그 상태로 돌아가시기까지 해야 하는 것은 모르셨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왜 나를 버리시느냐' 는 식의 절규가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자신에게 초능력이 태생적으로 쭉 있으셨으니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후에도 언제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실 역할을 다 하시고 나면 자신의 능력으로 손발에 박힌 못이 저절로 뽑히고 상처가 아물고 에녹과 엘리야처럼 하나님께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막상 이젠 다 되었으니 십자가에서 내려가자 싶을 때 능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서 절규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인간의 의지 따위는 자신에게 주어진 설정과 배경 내에서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은 죽고 딸은 강간 당하고 집은 무너지던가 그랬고 나중엔 (한국에서 나병이라고 번역하는) 온몸에 종기와 괴사가 이는 질병에 걸리는 등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 버티기 어려울 난이도의 시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신을 사울 왕에게 보내시어 그후 사울 왕은 미친듯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는 성경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직접 명하셔서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자기 손으로 헌제를 바치던 곳으로 데려가 살해하려는 순간까지 가기도 했었습니다. 이를 근거하자면 엘리사가 단지 대머리라고 놀린다고 어린이 42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해서 곰을 불러내 찢어죽인 사례나 아브라함이 아내를 여동생이라며 원하는 남자에게 보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를 보호하신 경우나 여호수아의 적국의 민간인들 마저 어린이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성노예와 가사 노예로 삼기 위해 살려둔 후 성인남성은 노소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몰살하던 경우나 다윗 왕이 신하의 아내를 탐해 그를 죽음이 확실한 전장으로 보내 사망하게 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솔로몬 왕이 배교하는 경우나 룻의 딸들이 소돔과 고모라 이후 아빠를 강간한 것이나 노아가 물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직후 주사로 바바리맨 추태를 부린 것이나 하다못해 카인이 지 동생 죽인 것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인간 의지의 무력함을 보여주려 하신 것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와에게 보낸 뱀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전제로 인간이 실락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펼치시려 사단을 이용하신 것일지 모릅니다.


다시 예수님으로 돌아가 보아도 예수님께서 성전의 환전상들과 비둘기를 가둬놓고 파는 이들의 상을 엎으셨던 것도 예수님 스스로의 의지일 가능성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의 내면에 격분을 불러일으킨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보이신 여러 성향으로 보아 늘 성스럽기만 한 분이 아니라 다혈질에 분노조절장애 성향도 보이셨고(이미 언급한 성전 환전상들에 대한 폭력 일화) 여자도 나름 밝히셨고(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며 대접하던 여인과 주방에서 일하다 와서 자신만 수고하고 있다며 그녀를 그만 주방 일하게 보내주라던 그녀의 언니 일화) 그러면서도 부를 싫어는 하셨으나 타인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은 호탕하게 받아들이실 만큼 "청빈하게 살며 부는 모두 경멸하고 멀리하라"는 식의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신 분(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자신의 머리결로 닦아드렸던 여인 일화) 입니다. 때론 독선적이셨고(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는 말씀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가 자매를 바로 옆에 두고 하신 그 일화) 편협하기도 하셨고(공정한 추와 공정한 저울의 비유가 구약에도 등장하리만치 경제가 일상이고 사망하여 천국에 가면 심판을 할 때 가장 먼저 '너는 사업을 할 때 정당하게 했느냐?'고 묻는다는 종교만큼이나 경제를 중시하는 유대 사회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유를 드셨고 돈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이들을 경멸하고-세리를 바리새인과 외식하는 이들과 동급으로 언급하시며 비난하셨다-심지어 실제 물리적 타격까지 하셨다-성전의 환전상 공격 일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돌발적 테러에 해당한다-) 찌질할 때 마저 있으셨지만("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달라"던 기도와 동시에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박성호씨 다중이 캐릭 실사판이셨던 분이다. "다 이루었다" 해 놓고는 "하나님 하나님 절 버리시나이까?"라는 대사가 이어진다는 건 아무리 보아도 설정 자체가 다중이 캐릭 포텐 터지는 연기셨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뛰어난 지성과 인간적 매력의 소유자로서 성스러운 길을 선택할 안목과 의지와 훈훈함을 모두 지니셨던 분입니다.


《제 2의 성서 아포크리파 신약시대》 중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토마스 복음』이라는 『토마스복음』과는 별개의 아포크리파에서 어린시절의 예수님은 무섭고 섬찟하기까지 한 순수함을 보이십니다. 남다른 능력을 지니셨기에 누구보다 바르게 자라야 할 필요성이 더 컸던 분이셨습니다. <맨 오브 스틸>에서 지구에 와서 클라크 켄트로 자라나는 칼 엘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마 갈등의 시절을 충분히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야 클라크 켄트와 칼 엘 사이에서 갈등하던 한 사나이가 자신의 내면을 조율하고 수퍼맨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였듯 예수님께서도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신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어린시절의 무섭고 섬찟한 순수함을 스스로 제어하게 되신 것일테지요. 그 과정에서 많은 슬픔과 아픔이 그를 잠식했을 것임을 넘치게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맨 오브 스틸> 속 수퍼맨은 너무도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화가가 창조해내 살냄새가 나지 않으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인간미 넘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바로 위의 아포크리파에서 해당 장과 절의 내용을 줄거리만 요약하면, 어린이였던 예수님께서 물웅덩이를 만들며 놀았던 자리에 다른 어린이가 버드나무가지로 웅덩이를 건드려서 웅덩이의 물을 빼버리자 화가 난 어린 예수님은 그 어린이를 저주해서 온몸이 바짝 말라 죽어가는 지경이 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피해아동의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에게 하소연 하자 예수님께서 피해 아동의 소년 몸의 작은 일부분은 남겨두고 다 치유해 주셨다고 합니다. (몸의 작은 일부분은 남겨두고 치유하시다니 예수님 잔인하신 분, 피해아동 캐안습) 


무엇보다 예수님의 무섭고 섬찟한 순수함이라 표현하던 그런 면이 주목되는 사건은 어린 예수님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른 어린이가 달려오다가 예수님의 어깨에 부딪쳤다고 하는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너는 더이상 걸을 수 없어" 라고 저주하셨고 해당 피해아동은 그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에게 "그 아이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게 하던가 아니면 여기를 떠나 주시오. 그 아이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기 때문이요"라며 하소연 합니다. 요셉이 이 일로 어린 예수님께 "넌 왜 사람을 해쳐서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게 만드느냐?"고 탓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 탓하진 않겠지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을거에요"라고 저주합니다. 그러자 요셉을 찾아와 하소연하던 사람들 모두가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이 죽었음에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도록 하면 않되겠냐는 부탁 수준의 소극적 대응만 하던 순둥이 같은, 자식 잃은 피해자가 눈까지 멀어야 하는 2차 피해의 대상이 되고만 것입니다. 게다가 영원한 벌을 받을거라 했으니 이 첫 저주가 파훼되지 않는다면 저들은 자식도 잃고 눈도 먼 채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도 장님인 채여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출생 전후 부터 어린시절까지 그 시절 예수님의 등장으로 사망한 해당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축복이기 보다 대재앙이던 날들을 거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동방박사를 보고 당시 이스라엘의 통치자인 로마 정치인이 방문 이유를 묻자 동방박사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나셨다고 그래서 방문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당시 통치자가 문제의 근원을 없애려 그즈음 태어났거나 태어나는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당시 피해아기들과 산모들과 가족들 전체에게는, 이스라엘 거주민들 대다수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대재앙이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역설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하시는 수퍼 하이레벨 조크인 모양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성철 큰스님과 대담하던 그 시절 흉악 범죄로 피해사망 사례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께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성철 큰스님께 물으셨고 성철 큰스님께서는 "요새 사람들이 너무나 물질에 치중한다고 물질에 치중해서 물질에 자꾸 매달리다 보니 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중략... 그 근본 원인을 보면 서양의 물질문명을 너무 맹종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물질 탓만한다고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을 맹종하고 개인 성취와 성장만 중시하는 사회, 인간 내면의 이기성과 이타성 중 그러한 이기주의 성향만을 주목케하고 그러한 성향을 확장하도록 조장하는 제도적 문제점을 개인의 문제로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에서 문제 인식과 문제 해결 방안을 그쳐버리면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질 것입니다.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만할 뿐 개인의 변화에 제도적 차원의 기여를 간과한다면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공염불일 뿐이지 않습니까? 


개인이 변해야 한다며 설법하고 다른 승려분들에게도 그런 말하라 한다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철 큰스님, 법정 스님 입적하신 이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시절의 문제점들은 변한게 없을 것입니다. 문제 많은 세상 적당히 정도에서 그친다면 "뭔 말이 뭔 말이 필요해!"-미스 에이- 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양산될 때 개인이 문제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며 제도적 차원의 접근을 시도 조차 안한다면 실제 변화를 바라는 말은 아닌 것이 명백하다 싶습니다. 


실제적 변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접근해야 할 일은 가정 폭력과 학교(유치원 포함) 폭력에 강력 대응하도록 해당 범죄에 처벌을 강화해야 합니다. 또 가해자들이 수감기간 동안 재범의 여지가 없도록 폭력성향과 공감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각도의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해자에 대한 치료라면 피해자 역시 지속적인 가정 폭력과 학교폭력으로 부터 받은 내적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지속적 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갖게된 이상심리로) 자살이나 자해 등과 성장 이후 결혼하여 자신의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 있을 수 있을 가해 성향을 즉, 고려할 수 있을 모든 경우의 2차 피해를 차단하기 위해 피해자의 심리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피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성취만을 추구하도록 교육하여 인간의 이기성과 이타성 중 유독 한가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가 정보습득이나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중지능을 육성하는 곳으로 혁신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공감능력 없이 이성만 강화된 인간들이 기득권층에 있는 세계가 어떤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초중고교 동안 정보 습득이 아니라 정서 함양과 정서적 소통과 교류를 통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기대하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어야 할 일입니다. 다중지능에 대한 연구와 교육학 교육심리학 예술치료를 중심으로 심리치료 전반에서 시작해 자아초월심리학에 이르는 과정으로 아이들을 정서적 영적으로 충만하게 자라나는데 중점을 둔 교육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명상과 뇌심리학 전반을 적용해야 하며 파동학과 음성학 등의 학문과 빛을 이용한 치료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적용하거나 더욱 연구를 지원하여 심리치료와 영적 성장에 활용해야 할 일입니다. 그에는 요가 철학에서의 만트라, 얀트라, 차크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 기술과 요가의 전통을 결합한다면 사람의 정신과 영성을 위해 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법정: 우리사회의 존립 터전으로 여겨 온 기존의 가치체계나 규범이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철: 이 병을 고치려면 아무래도 정신문명이 동양문명이 서양 보다 수승하다고 보는데, 그래서 우리 고유의 동양 정신문화를 새로 복구시켜서 정신이 위주가 되어 정신이 물질을 지배해야 합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역지배가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상실을 하고 힘을 가진 사람은 완전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약육강식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바른 생활을 하려면 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종이 되어 따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중략... 지금 서양의 나라들도 그런 것 같은데, 물질만 자꾸 발달하면 인간은 자신을 상실하고 악행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질문명이 금전만능 주의적인 세계상을 말씀하신다면 부분적으로는 동의 합니다.(돈이 문제라고 해도 결국 돈에 집착하는 사람과 성장만 중시해서 성장과 사회적 성취(성공)의 척도를 부의 축적으로 가늠하게 해 돈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로 비약하게까지 만든 사회에도 문제가 있으니 부분적으로는 동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돈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집 없는 이에겐 집이 되고 굶주린 이들에게는 식량이 되고 병든 이들에게 치료가 되는 마법의 원료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질문명이, 과학기술까지를 포함한 개념이라면 과학기술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둘다가 있는 것이지 어두운 면만 두드러진다고 볼 수는 없을듯 합니다. 컴퓨터 사줬더니 야동만 보고 이상한 짓만 한다고 초등 고학년 아동이나 중고딩들을 나무라는 부모님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 부모님들 말씀만큼이나 답답한 말씀이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야동만 보는 소년소녀들이 어디있겠습니까? 기성세대가 답답하게만 새로운 기술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과학기술의 결실로 시간 낭비만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영화와 TV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런 식의 비난은 있었을 것이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고 문학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 이상의 정서적 지적 충격을 주는 영화도 있습니다. TV 역시 바보상자라는 평과는 달리 뉴스와 시사, 건강, 역사 교양프로그램 등등으로 정보전달자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부패케 한다며 아이들 EBS채널도 못보게 하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는 인터넷 강의도 수강 못하게 하는 등의 극단적 처방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질문명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이 문제인 겁니다.


앞선 문단에서 말했듯 과학기술과 요가철학의 만트라, 얀트라, 차크라의 형상과 빛과 소리를 연계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적 진보에 마저 과학기술은 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영적 차원에 까지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는데 물질의 부정적 면에만 주목해야 할까요? 그리고 애초 정신문명에 있어서 동양문명이 서양문명 보다 수승하다는 말씀 역시 근거가 미흡해 보입니다. 서양인들이 되려 동양의 명상과 철학 체계 연구에 매진하다시피해서 그렇지, 《유럽의 신비주의》를 보면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의 명상과 철학 체계와 전혀 다름없는 정신문명을 유럽은 충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이 정치권력화 되며 예수님의 상을 정형화하려 성경을 정경과 외경으로 분리하면서 신앙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남기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어린시절 기록 마저 줴다 가지치기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영지주의를 일부만 권력화된 카톨릭에 포섭하고 대부분의 영지주의 가르침은 사장하다시피 하였기에 유럽인들 스스로가 동양에서만 정신문명을 찾게 되었던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물질문명 차원에서는 20세기가 다 지나도록 눈에 띠게 서양에 밀렸던 동양으로서는 정신문명은 우리가 낫다는 정신승리를 하고 있게나 되었던듯 합니다.


하지만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그것이 불가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신이 먼저니 물질을 따르면 자기를 상실하며 동물이 되느니 (게다가 인간은 애초에 동물입니다. 식물도 광물도 아니지요) 자신을 상실하고 악행이 더 많아질거라는 것은 지나친 판단착오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물질을 과학기술을 포함하지 않는 단지 돈이라고만 본다하더라도 화엄경에서 장자(부자)들이 선을 행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결국은 돈이 아닙니까? 


또 연기적 차원에서 논한다해도 정신이 있기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있기에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과 뇌 과학적으로 봐도 마음의 변화가 뇌 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주며 그와는 역으로 뇌 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주어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파동학인가 양자학인가로 보아도 뇌를 감싸고 있는 전자기 파동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뇌 내 호르몬 분비 변화를 유도 할 수 있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 결국 뇌뿐만 아니라 온몸을 감싸고 있는 장(필드) 차원의 변화만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상태도 그러한 장 차원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장이나 파동을 물질 보다는 영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면 영적 변화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의 변화 역시 영적 변화를 준다고 보면 틀린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정신과 물질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지 정신만이 물질을 지배하고 압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끈이론을 잘은 모르지만 초끈이론에서는 하나의 원형고리가 근원적 파동에 의해 물결치는 것이 초끈이며 이것이 물질을 이루는 소립자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떤 과학자는 초끈이론이 수학적으로는 성립되지만 증명할 길이 없는 가설이라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초끈이론으로 물질과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희론이라 하여 가치없는 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왕에 시작한 말이니 끝맺고 보자면 초끈을 구성하고 있는 원형의 끈이 물결치는 상태 즉 파동이 초끈에 더해진 상태가 물질을 존재하게 한다고 하는 그 상관관계 속에서 물결치게 하는 파동을 정신으로 보고 원형의 끈을 물질적 요소로 본다면 정신과 물질은 상호 영향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초끈이론으로 그러한 상관 관계(연기) 자체가 정신과 물질을 상호 존재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애초에 그 둘이 결합된 상태가 물질이 존재케 하는 구성요소이니 끈을 물질적 요소로 파동을 정신적 요소로 전제한 자체가 오류입니다. 하지만 상호 관계성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무엇이 무엇을 압도한다는 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저는 물질차원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에서는 그다지 깊은 여운으로 남기에는 부적절한 가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다시 인간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을 걱정하시며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이 의지할 가치 의식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십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에 있는 것이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려면 인간의 존엄성부터 회복시켜야 된다고 봅니다....중략... 인간의 존엄성은 명경明鏡 , 깨끗한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거울은 본시 깨끗하고 아무 티도 없는데, 먼지가 꽉 앉으면 제 역할을 못합니다. 이것은 거울의 근본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중략... 먼지만 닦아 내면 딴데 가서 거울을 구할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습니다. 먼지만 닦아 내면 깨끗한 본래의 거울 그대로이니까요. 절대적 인격, 인간의 존엄성을 복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답변하십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 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부도지》에서 말하는 복본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일 겁니다. 거듭남은 잠시 뒤로 미루고 복본에서 부터 시작하자면 부도지에서 복본이 필요케 된 이유 즉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스스로를 잃게 된 원인은 포도 열매로 상징된 감각 세계의 총체를 통해 오미五味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미라는 다섯가지맛으로 상징되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불교에서 말하는 육식에서 의식을 제외한 전오근前五根에 해당하는 것인듯 합니다. 즉, 감각을 통해 의식이 외부로 향하기에 -동양에서는 흔히 술취한 원숭이로 상징 되는- 미혹(어리석음, 또 어리석음을 통한 착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감각이 대상을 향하는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불교에서 "거울을 닦는다"는 비유는 결국 감각을 제어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가에서 말하는 제감制感일테지요. 한국 선도에서 말하는 지감止感이기도 할테구요. 감각을 제어하는데서 부터 시작해 의식을 통제하여 이르는 것이 止(사마디)이고 불교 수행은 그와 함께 觀(위빠사나)가 있습니다. 불교수행이 요가와 차별화되는 바는 위빠사나인듯 합니다. 변성의식(초월의식) 상태에 이르는 것은 거의 모든 명상체계가 의도하는 바이나 특정지은 의식수준에서 대상을 해체하며 지성을 닦는 것은 불교 외에서는 흔히 찾기 어려울 수행인듯 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저작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불교 만큼의 역사를 지닌 수행법 중 국내에서 불교의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법을 본 바가 없습니다. 어쨋든 근본적으로 대다수의 수행체계들과 목표가 같은 수행법은 감각을 제어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변성 의식이 깊은 수준에 이르면 수행의 성취가 있다고 하던데 그 의식수준을 유지하며 그 의식 수준에서 지혜를 활용가능하면 깨달았다고 하는가 봅니다. 불교의 철학과 요가의 철학이 유사하면서도 달라 불교 이외의 다른 모든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차별화하며 다른 가르침들은 유사하지만 다르다는 뜻으로 사이비(似而非)라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도 했지요. 각 가르침의 차이 같은 이렇게 세밀하고 방대하게 들어서야 할 것은 직접 깊이 공부하여 검증하고 습득하여야 할 겁니다. 


아! 기독교의 거듭남에 대해서 짚어야겠군요. 기독교의 거듭남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이고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근거할 때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며 사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결실로 물질질료로는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그 육체에 하나님 자신의 숨(영)을 불어넣으셔서는 사람을 생령이게 하셨지요.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부분을 담은 존재입니다. 요한일서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전제 할 때 우리는 우리 내면에 사랑을 담고 있는 존재이며 우리 자체가 이미 사랑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안의 그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할 때 사랑은 아마도 우리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내면의 사랑을 일깨워 사랑 속에서 사랑의 손길을 서로에게 건네며 더불어 함께 사랑 가득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삶인 것일 겁니다. 그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우리의 존재 이유이리라 성경을 읽으며 생각케 되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영생과 거듭남의 이유가 따로 있는거라면 누구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과 기독교인이 살아야 하는 다스리는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거듭남도 영생도 다스리는 것도 모두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까지가 설전이라는 본서의 세 단원 중 첫번째인 『我, 자기를 바로 보라』의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 두차례 더 리뷰를 올릴 것이지만 아마 4월 중순 경에 올리게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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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SIC 시리즈 3
슬라보예 지젝.레나타 살레츨 외 엮음, 라깡정신분석연구회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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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를 읽으며 느낀 것은 본서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라도 지니고서 들어서야 할 전문서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을 위한 입문서라고는 절대 볼 수 없을 저작입니다. 저는 제가 난독증이 도진 줄 알았습니다. 2009~2011년 즈음까지 난독증 (진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각하기에 심각한 난독증이었다 느끼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는 커녕 들여다 보고 있지도 못했으니까요) 증세를 느꼈었는데 마치 그때 같아진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라깡의 정신분석학에서의 용어들은 하나의 암호 수준이었습니다. 암호해독관의 통역이 없이는 이해불가인 경우랄까요? 이를테면 "거시기가 지금 거시기해서 거시기하기가 거시기하니까 거시기가 거시기하면 내가 거시기할게!" 이 말을 "남편이 퇴근해서 지금 통화하기가 불편하니까 남편이 샤워하거나 잠들면 내가 바로 전화할께!"라는 외도하는 여성이 불륜남과 통화하는 내용으로 해석하려면 통화할 당시의 배경지식 이전에 '거시기'란 표현이 다양한 어의를 지닐 수 있음을 우선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을듯 합니다. 

타대상이란 말은 뭔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타는 '상징 질서를 지칭하며 상징 질서의 총체적 거미줄, 성문화되지 않은 암시적 규칙의 난해한 망도 포함'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애초에 라깡 씨가 용어를 정의할 때 이는 대타(le grand Autre, 영어로 big Other)란 하나의 용어를 다의적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었다 싶었습니다. 상징이 이해와 오해를 넘나들며 교류되고 치환되는 체계에 대한 용어, 오해의 여지를 묵살(무시)한 '상징의 모호한 교류(치환)'를 이르는 용어, 암묵적 관행을 지칭하는 용어 등으로 세분화해서 개개의 용어로 정의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신분석이란 실적용 의학용어를 철학적 용어 마냥, 함의로써 해석할 여지를 둔다는건 (대타 이외의 다른 용어상에서는) 실제 환자를 처음 진단한 의사나 심리상담가의 진단서를 독해할 타 의사나 상담사들 간에, 다소 이론(異論)이 난무할 여지가 있지 않나 싶으니 말입니다.

대타자, 소타자, 빗금친 주체, 주이상스, I와 O가 결합한듯한 기호, $◇I와 O가 결합한 기호 옆에 ⒜... 이런 기호들로도 정신분석 용어를 삼는 것이 라깡 씨 스타일이더군요. 이래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제가 독서를 포기해서 그렇지 그이후 장을 펼쳐보니 이후에도 이해 불가와 판독 불가의 용어들은 난무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체로서 우리가 가짜(postiche)를 쓰는 방법인 'I와 O의 결합 기호'가 될 수 있고 가짜(postiche)에서 놀고 거세된 남성 안에서 A를 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소문자 파이(phi), 즉 'O에 빗금을 친 기호'⒳로 기입할 수 있다」

이 말이 당최 뭔 말인지 판독 가능한 날이 오려면 아마도 여러 날을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몰두해야 할테지요.
앞으로 본서를 읽기 위해 라깡의 정신분석학의 핵심개념을 설명한 저서들, 입문서에 해당하는 라깡의 정신분석학 저작들, 라깡의 정신분석 용어 사전을 읽어볼 작정입니다. 꽤 여러 날을 몰두한 이후에 본서에 도전해야 암호문의 집대성 같은 본서를 이해 이전에, 독서라도 할  여지가 있을듯 합니다.


그나마 정신승리 할 수 있을 여지라면 '라깡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신경증적 증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보시는 분들도 약간은 이 증상을 공유하리라는 가정에서 친밀감을 느낍니다.' 라는 역자 이수연님의 서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건 신경증이 없어서야!" 라고 정신승리하며 미소 짓다가 어느 순간 본서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씩 일렁이고 있음을 깨닫고서 정색하게 되었습니다. <성화>라는 본서의 목록을 보고서 신경증적 증상이 이는 분들이 있다면 입문서들 부터 차분히 정독하고나서 본서에 뛰어들라 당부드립니다. 아니면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에서 형사역의 송강호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의심대상자 역의 박해일씨 눈을 쳐다보며 비내리는 기차길에서 읊조리던 그 대사를 되뇌이게 될지 모릅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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