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학 - 서양, 중국, 일본과의 다름을 논하다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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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서양, 중국, 일본과의 다름을 논하다]이다. 저자는 서양의 문화 의지를 분화로 보고 중국은 동화, 일본은 응축, 한국은 접화로 정의하고 있다. 서양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나누는 데서 미에 대한 감각이 출발한다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미에 대한 감각은 어우러지는 데서 출발하지만 세부적인 게 다른 것이 중국은 생명체의 동화, 이화 작용처럼 하늘, 땅과 어우러지면서도 이물은 배출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는 수증기가 모여 구름을 이루고 유전학적으로 염색질이 염색사로 응축하듯이 정수를 응축하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일본은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 정수를 모아 의미를 두기를 즐겨해 일본에는 사소한 부분의 박물관들까지 많다 보니 전 국토에 어마한 숫자의 박물관들이 있는 정도라고 하며 작게 응축하는 것을 좋아해 초소형화하는 기술이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중국의 미술은 기운생동을 중시해 겉이 아닌 정신을 담는 것을 중시한다고 하며 서양이 수학적으로 칠음계를 기본으로 할 때 중국은 오행 철학에 입각해 오음계를 낳았다고 한다. 물론 중국의 오음계도 수학적인 기반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학적 기반의 토대는 오행 철학이다. 이 오행 철학이 기반이 되기에 서양이 무지개색을 일곱 색깔이라고 할 때 오색찬란한 무지개라는 다섯 가지 색깔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철학과 정신을 높이 여겨 사물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표현해내는 것이 근간이 되었고 그림에서도 서양의 일원적인 원근법이 아니라 기억을 근간으로 해 낮은 곳에서 높이 보는 고원법, 앞에서 뒤를 보는 심원법,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보는 평원법을 한 번에 아울러 표현하는 삼원법으로 그림이 표현된다고 한다.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서양이 육적으로 보이는 데 비해보다 깊은 통찰을 위해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미술은 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는 물아일체와 유겐, 모노노아와레가 예전에는 미쳐 몰랐던 일본의 문화를 엿보는 계기를 주는 듯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깊이를 이해하려 하고 타자와 공감함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어 우분투처럼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정신이 일본 문화에서도 느껴졌다.

 

한국의 문화는 맛의 시원함을 논하듯 어우러지고 통합된 것에서도 그 맛을 찾고 느끼는 바가 이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한국문화의 맛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국의 풍류는 다름 아닌 멋이고 이 멋은 하늘과 사람이 통하는 데서 온다고 선조들은 믿었다. 신라 화랑 물계자의 이런 미학적 해석이 그의 이전부터 그의 이후까지 한국의 미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신명이라는 것은 결국 억압된 한이 풀어지는 데서 오는 쾌라는 것도 명쾌하게 다가왔다. 평온이라는 것은 정중동과 정감 어린 절제라고 보던데 동양의 율려가 율동과 려정으로 설명되며 율려(우주와 세상의 기반 운영 원리)라는 것은 결국 동적이면서도 정적임이 동반되는 것이자 그 어울림이라 이해하게 되었다. 평온의 기반이 되는 절제에 대한 한민족의 이해는 서양의 그것과 달랐는데 서양은 억압이 절제이고 이것이 결국 내적 충돌을 야기하는데 비해 내가 이해하기로는 한민족의 절제는 억압이 아닌 자연 그대로라고 느껴졌다. 이를테면 옷을 벗은 나신의 정신을 잃은 여자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주치고 서양인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내적 갈등을 하는 데 비해 한국인의 절제는 내가 다른 행동을 하면 이 여성이 깨어난 이후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할까 라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이해되었다. 서양인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한국인은 이성이 사라지는 데서 신과의 합일이 있다고 믿는다는 데서 서양과 한민족의 원형적 의식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 외에도 저자는 해학과 소박을 한국 문화 또는 한국 미학의 특징으로 보았는데 웃음, 차이와 평등, 애환을 아우르는 해학,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소박은 다른 미적 요소들과 함께 한민족의 문화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데서 소박이 드러나며 이는 큰 기교나 큰 재주는 오히려 어설퍼 보인다는 대교약졸이라는 사자성어로 저자는 표현하기도 했다.

 

본서의 내용과 본서를 통한 감상을 짧은 리뷰에 다 담을 수 없기도 하고 풀어내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짧게 서술했지만 타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길이, 맺힌 것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되기도 한 것 같다. 미학책이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치유의 효과도 있다는 걸 다소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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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 해학 - 본성에서 우러나는 유쾌한 웃음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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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한국의 미학에서 언급한 한국 문화의 특징을 저자는 접화 接和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한국 미의식을 신명, 해학, 소박, 평온으로 분류하여 1권에서는 신명을 다루었다. 2권인 본서에서는 두 번째인 해학을 다루는 데 보통 풍자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해학의 정의를 저자는 징벌과 포용을 함께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문화 접화를 강압적 행위인 굴복시키는 행위와 다르게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되는 것으로 설명하며 이는 전쟁이나 싸움이 아닌 놀이로써 주지시키고 있다.

 

서로 즐기며 함께하는 것이 놀이이니 서로를 죽이려 하고 파괴하고 쓰러뜨린다면 이는 이미 놀이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다. 접화는 어디까지나 놀이의 경지인 것이다. 이를 고구려 귀면 문양과 백제의 귀문전, 통일 신라의 귀면와를 중국의 짐승문과 도철문, 일본의 귀면와, 인도의 키르티무카 문양과 비교하며 중국의 문양이 무서움을 근간으로 하고 일본 문양이 신경질적이며 날카로움을 특색으로 할 때 한국의 문양은 무서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주는 것으로 해학의 요소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장승도 이러한 해학을 담고 있고 그리스 조각상의 아르카익 미소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리스의 미술에서는 이것이 정형화되어 창에 찔리는 그림에서도 아르카익 미소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며 정형화된 도식인 서양의 그것과 한국 미술에서 그려진 미소는 달라 한국 장승들은 웃고 있더라도 다 지역적으로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 미술에서도 차이가 드러나는 데 한국에서 사천왕들은 무서움과 친근함이 동시에 표현된 반면 중국의 사천왕은 근엄, 위엄, 매서움으로 표현되고 일본의 사천왕들은 매섭고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한다.

 

서양 로코코 미술에서는 유럽 귀족들의 환락과 그에 뒤따르는 공허가 표현되었는 데 비해 한국의 민화에서는 민중들의 일상에서의 해학이 담겨있고 그 가운데서도 신윤복의 그림에는 사회적 금기와 긴장을 다루어 같은 에로티시즘이라도 한국의 그것은 다르다고 한다. 귀족의 일상을 다룬 것과 민중이 귀족의 금기를 웃어넘기는 것을 다룬 바는 분명 다른 빛깔로 비추어진다.

 

민중의 두려움을 막아주는 부적과 같은 전래인 한국의 처용과 중국의 종규도 색깔이 엄연히 다른데 처용은 징벌보다는 포용으로서 귀신 두려움을 샀고 종규는 임금의 배려에 대해 갚음으로서 공포로 작용해 귀신을 살벌하게 물리치는 전승이 있다. 중국에도 은혜 갚음이라는 은유가 담겨있지만 그 갚음의 양식이 다른 대상에 대한 처참한 살해로 이어지는 것과 한국의 처용처럼 죄지은 대상을 포용함으로써 귀신도 감복하게 하는 바는 엄연히 다른 게 아닌가 싶다.

 

호랑이 그림도 중국의 그것과는 다르게 익살맞은 모습인 한국화는 무섭다는 개념을 모르는 민족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그림에서 호랑이의 수염을 물어당기는 까치를 그리고 있는 것을, 까치로 상징된 민중이 호랑이로 상징된 폭정을 일삼는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은유가 담겨있다며 해학의 하나로 해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의 요구로 한국에 관왕묘가 설치되고 관우의 그림 등 삼국지의 일화들을 담은 그림들이 전시되는 데 이에 모두 익살맞고 캐리커처와도 같은 그림들이 동원되어 한국의 해학이 담기기도 했다. 한국화에서 자연도 이러한 유희적 모습으로 탈바꿈되기도 했고 이러한 해학은 근현대 미술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실 놀이 형식이 경쟁에서도 느껴지는 게 한국의 그 숱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경쟁과 놀이를 일체화시키거나 경쟁에 놀이의 요소를 담으려는 노력이었다고 보이기도 한다. 경쟁 당사자인 본인들은 긴장감이 더 컸을지도 모르지만 관객(시청자)들은 그 경쟁의 양식에서 출연자들이 즐기기를 바랬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요소들을 전쟁이 아니라 놀이로만 보기에는 파괴되고 되돌릴 수 없이 되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자주 언급한 카라 멤버 충원을 위한 방송이었던 베이비카라의 소진 양의 경우도 그렇고 말이다. 또 다른 사례는 스포츠계의 성폭력 이야기들과 같은 경우나 선수 선발 비리 같은 경우들처럼 사회에서는 접화의 양식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경우들도 많아 이런 일들에 대한 풍자는 해학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지 않나 싶다. 해학은 기본적으로 악의가 느껴지지 않거나 완화될 여지가 있는 은유나 풍자의 대상에 한정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미술로보는한국의미의식 #해학 #최광진 #미술문화 #풍자 #은유 #익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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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신명 - 역경을 이겨내는 흥겨운 정서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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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의식을 말하는 관계로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어 독서하고자 했다. 저자의 전작 [한국의 미학]에서 저자는 민족마다 문화가 다른 것은 환경에 따른 문화의지가 다르기 때문이고 서양은 분화’, 중국은 동화’, 일본은 응축’, 한국은 접화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가 한국의 문화의지라고 추출한 접화 接和태극처럼 상극의 이질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한국문화의 기반을 이루는 천지인 사상에서 착안했다는데 천지인사상에서 인간은 하늘의 창조적인 신성(영혼)과 땅의 굳어진 물질성(육체)이 접화된 존재라고. 그렇기에 한국인은 천인묘합의 상태에서 미적 쾌감을 느끼고 그 상태를 이라고 불러왔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은 멋을 느끼고 창출할 수 있는 의식이고 이것이 신명, 해학, 소박, 평온의 미의식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신들에게서 미적 쾌감을 느끼며 부여한 선조들의 미의식을 엿보고 그것이 고정적이며 기학적인 서양의 미의식과는 달다며 역동적인 한국의 미의식을 설명한다. 서양의 팔메트 문양과 고구려 고분 벽화와 금동관 장식 등에서 보이는 문양을 설명하기도 하고 금동관과 한국 특유의 범종의 용뉴(종의 꼭지 같은 이을 수 있는 고리)에서 보이는 비대칭을 설명하기 위해 대칭을 이루는 중국 용뉴와 비교하기도 한다. 비대칭에서 보이는 역동성은 한국 특유의 빛깔이기도 했다.

 

여기서 이해가 갈 수밖에 없는 게 서양인들은 자연이 대칭을 이룬다며 수학과 과학을 들어 이야기하는 데 그들이 대칭을 이룬다는 자연물들도 자세히 보면 나노미터 차원이 아니라 센티미터나 미리미터 차원에서도 이미 대칭이 깨지고 있고 자연계에서 기계로 찍은 듯한 대칭은 없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장부가 좌우 한쌍씩 다 대칭을 이루며 존재하지도 않기에 여자의 가슴과 남자의 고환도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거의 다 짝 가슴에 짝 고환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얼굴도 이미 저작(씹는)활동을 좌우로 균등히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의 좌우 완벽한 대칭은 없고 손과 다리의 사용에서도 그러하기에 팔의 길이나 다리의 길이 역시 좌우 완벽한 대칭은 없다. 중국의 태극권을 보더라도 대부분의 태극권 기세가 대칭을 이루며 손을 내리고 있지만 진씨 태극권 중 진정뢰 노사의 가르침을 보면 기를 느끼며 비대칭으로 자연스레 기세를 취한다. 자연계에서 대칭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은 대강 보기에 그런 것이지 실제 정밀하게 검증하자면 완벽한 대칭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미의식이 갖는 비대칭성은 자연스러움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과 겸재 정선의 그림들을 비교하며 서양은 기하학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양은 주역에 기반하고 있다고 서양은 고정된 것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동양은 변화를 기반으로 세계와 진리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로 이해를 더하는 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그림과 관 장식과 향로와 범종들에서 보이는 비대칭성과 역동성은 살아있는 힘을 구현하려는 것이었고 이것은 과 함께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는 신명난다는 그 살아 맥동하는 미적 쾌감이 구현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본서는 한국의 미의식을 논하는 데서 엿보이듯 한국 역사와 한국 미술 전반을 다루며 근현대까지의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신명이라는 미의식이 어떻게 구현되어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숙독하기보다는 속독하며 읽어서 깊은 이해보다는 대강만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가치있는 독서였다는 감상이 드는 책이다. 서양 미술책은 많지만 동양미술, 더욱이 한국의 미술과 한민족의 미의식을 논하는 책은 드물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더욱 빛나는 책이지 않은가 싶다.

 

#미술로보는한국의미의식 #신명 #최광진 #미술문화 #한민족정서 #한국인미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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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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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이들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그러나 우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 몽테뉴

 

E. T. 시튼의 [인디언의 복음]을 통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유럽 문명의 조우 그리고 원주민의 문명을 야만이라 부르던 이들이 결국 그들의 문명이 자신들, 유럽의 문명보다 보다 원숙하고 거룩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엿보기도 했었다. [인디언의 복음]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에 경탄하는 과정이 영성서처럼 담겨있다면 본서 [야만의 해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걸친 원주민들을 인디저너스라고 칭하며 그들 전체 문명과 유럽 문명의 교류를 담고 있다.

 

본서에서는 해양 개척시대에 신대륙을 발견하고 최초의 만남에서 인디저너스 문명과 부에 감탄하며 그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대목부터 시작된다. 당연히 인디저너스들이 노예가 되며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과 같은 향방에 처해진 대목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인디저너스는 난생 처음 마주한 유럽인들의 질병들에 취약했고 너무도 쉽게 죽어갔다. 노예화한 인디저너스보다 주목되던 것은 초기 유럽에 외교사절로 건너가게 된 인디저너스인데 이들은 사절단 형식으로 가수, 서커스단원 등도 정치인들과 함께 건너가 유럽에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절단 형식만이 아니라 특정 부족의 어린 왕자 같은 이도 유럽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유럽으로 향하기도 했고 유럽에 도착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살다 죽은 사례도 있다. 본서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디언의 복음]에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유럽인 사이의 외교를 논하며 거짓과 위선과 가식으로 뭉친 자신들 스스로를 자기비판하는 경우에서 엿보이듯 유럽인들은 약속이나 맹세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앞서 말한 어린 왕자의 경우도 부모가 유럽인들에게 20개월 내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보냈지만 유럽인들과의 약속은 도무지 믿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유럽으로 간 인디저너스, 대개 외교적 목적으로 간 이들은 한결같이 부와 가난, 거대함과 초라함, 조직력과 폭력이 공존하는 유럽을 보고 기이하다 여겼는데 그들이 남긴 몇 안되는 기록 중 남아있는 것을 보자면 이렇다.

 

친우들이여, 이 나라의 수많은 백인들처럼 우리가 부유했다면, 이 추운 날씨에 신발도 신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몸을 데워주었을 것입니다.

 

친우들이여, 우리는 이 나라에 온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마음 아픕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가난합니다. 그러나 빈곤한 이들에게도 충분히 먹을 것이 있고, 따뜻하게 입을 옷이 있습니다. ......

 

친우들이여, 이렇게 부유한 나라에서 이렇듯 많은 이들이 빈곤하고 굶주리며,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과거 유명했던 [빠빠라기]라는 책의 시각과도 같은데 야만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분류인지 알 것도 같았다. 유럽인들이 야만이라고 바라보던 신대륙의 인디저너스에게는 이렇게나 문명을 자처하는 유럽의 계층 간의 격차와 불평등이 열등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술의 격차에서는 유럽이 앞섰지만 기술만이 문명화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대륙의 인디저너스 문명들에 한참이나 열등한 것이 유럽 문명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열등한 문명이 대세가 되어 전 세계를 물들인 지금 우리는 더불어 열등한 존재가 되어 평준화되어 버렸다. 암과 바이러스처럼 유럽 방식의 문명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유럽과 같은 격차와 불평등을 조우하게 되었다.

 

본서에서는 유럽의 개척자들이 신대륙으로 들어와 자기들의 통역사로 쓰기 위해 강제로 인디저너스를 납치하고 인디저너스 국가들에 전염병을 전파하며 그들을 복속시키고 절멸시킨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조우에 주목하고 한 문명이 파괴되고 각각의 국가가 사라져간 역사는 간략히 넘어가고 있다.

 

본서에서 참고한 것은 역사 외에도 그 시대 유럽 각국 왕의 칙령서와 교회 기록 그리고 당시 유럽으로 온 인디저너스에게 지출된 회계기록 등인데 그만큼 당시 유럽에 방문내지는 납치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유럽에 남긴 그들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개척자를 자처하는 침입자들이 자신들의 통역사로 쓸 목적으로 납치한 사람들부터 시작되어 노예화된 이들과 피랍된 고위층들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이어졌다. 유럽의 왕들은 국가의 다름을 떠나 인디저너스라도 왕족과 귀족은 우대했는데 그들이 유럽에 오게 된 경위를 떠나서 그들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지출되는 금액을 부담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인디저너스는 유럽의 질병에 취약했는데 유럽까지 오는 항해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결국 유럽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들이 잦았고 그 장례비용도 유럽의 왕들이 각기 자기 국가에서 사망하는 경우 부담했다. 하지만 대다수 노예가 된 인디저너스들의 삶은 달랐다. 자유인이 되었다가 다시 강제로 노예가 되는 경우 소송전을 통해 자유를 얻고 위로금 형식의 피해보상금을 받는 사례들도 있었다.

 

노예가 되지 않더라도 개종을 핑계로 문명화라며 유럽의 개척자들을 위한 사람들도 세뇌된 인디저너스는 자기들의 국가와 주변 국가와 민족들을 유럽인들이 복속시키고 멸망시키는 데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에 저항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경우에 따라서 수감된 상태에서도 유럽의 왕에게 소송전과 서한을 보내 다시 자기들의 기여에 따른 보상을 받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미대륙의 현재 국가들의 원류가 유럽에 그들이 헌납하거나 빼앗긴 보물과 유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한 건 그들의 자신의 문화와 정신을 그리고 언어를 빼앗기고 단절하게 된 경우가 미대륙의 원주민 전체가 겪은 최악의 결말이 아닌가 싶다. 시대는 흘러가지만 미대륙의 과거 번영하던 문명들은 이제 그 전승을 잃게 되었다. 인체의 암세포가 확산될 때 암은 자신에게만 영양과 혈액이 밀집하도록 만들면서 커나간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암의 특성이다. 그 특성이 유럽의 문화가 전 세계에 전파된 과정에서 여실히 동일하게 보인다. 인류는 지구에서 이젠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몇 세기 안에 행성 간 탐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유럽 문명의 전파와 같은 양상이 우주 개척시대에는 바뀌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면 그런 기대를 접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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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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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라는 주제로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께서 연작을 쓰신 것이 [너 어디에서 왔니], [너 누구니], [너 어떻게 살래], [너 어디로 가니] 다. 이 책 [너 어디에서 왔니]는 한국인의 탄생을 다룬 책이기도 한데 한국인의 탄생과 양육과 성장기를 다룬 보다 더 원형적인 웅장히도 거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물론 이건 완독하고 난 감상이지 읽으면서는 소소한 삶과 삶의 이면 이야기들이다.

한국인이 임신하고 출산하고(난 출산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쓰이던 생산이란 표현이 일제 시대 일제가 제품이 만들어지는 걸 생산이라고 하며 인간은 出 나오고 産 낳는데 기계는 되려 生 태어나고 産 낳는, 어의가 이상하게 뒤바뀐 기괴한 언어 세계가 되어버린 게 어이없다) 태어나고 아기를 돌보고 돌봄을 받고 자라는 과정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본서이다.

본서에서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이야기를 여는데 이를테면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 가벼우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본서의 내용을 보아주길 바라시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나 싶다. 하나의 민족의 개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아기를 갖고 낳고 돌보는 이야기는 무겁다고 보면 한없이 무겁지만 일상이라고 보자면 한없이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어령 선생께서는 이런 이야기가 무겁기보다는 가깝게 느껴지기를 의도하시고 집필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실제는 꼬부랑 할머니가 자신이 눈 똥을 꼬부랑 강아지가 먹으려 하자 꼬부랑 강아지를 꼬부랑 지팡이로 내리치는 똥 같은 이야기라는 현실도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이어령 선생의 말씀이다. 희화된 이야기의 이면에 진짜 현실을 담아낸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처럼 희화할 수 있다 해도 처참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본서의 서술은 시종 경쾌함을 유지한다.

태명을 짓는 관습은 한국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어디를 보아도 태명짓기의 시작은 한국이라고 언급된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런 문화가 대중화된 건 2001년인가 2007년부터라고 한다. 아기에게 말을 거는 독특한 문화는 태교라는 아시아 전체의 문화유산이라고 보기에는 한국의 독특함이 담겨있다. 아기에게 말을 거는 문화에 과학적인 이유가 담긴 것은 아기들이 옹알이, 영어 발음으로는 배블링을 시작할 때 프랑스 아기들은 ‘바바’라고 하는데 나이지리아 아기들은 ‘아바 아바’로 자음+모음의 결합이냐 자음+모음+자음의 결합이냐는 차이를 불러오기도 하며 아기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봐도 프랑스 아기들은 상승조로 울고 독일 아기들의 울음은 하강조라고 한다. 태내에서부터 부모의 억양과 발음 특성을 배워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울음소리가 다르며 옹알이도 자기 나라 말에 맞게 한다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근원적이구나 싶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이야기는 서양 아기들은 스와들링이라고 낳고부터 거의 1년을 보자기에 꽁꽁 쟁여 묶어서 돌보는데 우리 아기들은 그렇게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로서 생각되는 것이 그렇게 생애의 최초 시기에 억압받는 서양 아기들은 자라며 이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며 사는 삶을 달게도 부여되는데 비해 동양 아기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는 동안 생애 대부분의 선택 특히나 학업과 대학 및 진로 선택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생의 선택안 중 대부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정마다 가풍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주제나 소재 하나가 부모의 자식 결혼 반대이지 않은가? 그리고 청소년 드라마들에서 학업 스트레스, 대학 선택 문제, 진로 문제에서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는 본 적도 없다. 반면 서양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이런 문제는 소재로도 사용되지 않는 주제들이다. 스와들링 잠시 당하고 자신의 삶을 일생 자신이 선택하는 서양인의 삶과 이 시대에 한국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제한되어온 선택의 폭을 자각하게 한다. 이런 문제를 자기 비판적 차원에서 언급하는 학자들은 없으며 이어령 선생 또한 본서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를 업어 키우는 문화는 일본과 아메리카 인디언 외에는 없다는 일본 보건학자의 말을 언급하시면서 스와들링 하는 유럽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들이 업어 키운다는 말씀도 하신다. 업어 키우며 접촉이 지속되는 경우를 연구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과거 유럽 고아원 환경을 배경으로 한 연구이다) 아기를 업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는 접촉이 잦으면 아기의 성장 발육과 면역력 형성에 유익했으며 이런 접촉이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 심지어는 다시 접촉의 기회가 생긴 아주 오랜 기간까지도 아기의 성장이 중단된 경우도 보고되었다고 한다. 접촉이 완전히 차단되면 심지어는 아기가 사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돌잡이라는 게 우리 문화의 되게 독특한 면이기도 한데 1500년대의 기록에 의해도 아기가 태어난지 1년째 돌잡이를 했으며 그건 오래된 예로부터의 전통이라고 언급되고 있기도 하단다. 무언가 잡는 것을 생의 선택과 연결 짓는 것은 참 독특한 전통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본서는 분량이 꽤 되고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한국인만의 무의식이라고 생각되는 면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꽤 있었다. 한국인만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여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인을 이해하고 싶다거나 한국인만의 무의식을 알고 싶다는 취지라면 민담이 주제인 책들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본서에서 보듯 민간의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을 이해한다는 건 민담만으로는 부족할 듯도 하다. 우리의 일상을 눈여겨본 학자들의 강의로 다가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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