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새롭던 봄날은 펼치기도 전에 제목에 이미 마음을뺏긴 책이다. 새롭다, 새칩다는 경상도에서 흔히 쓰는 입말이다. 쌀쌀맞으면서 얌전하다는 뜻의 ‘새초롬하다‘와 헷갈리기 쉬운데 ‘새롭다‘는 작고 예쁜 상태를 말한다. 논밭에 뿌린 씨앗들이 움틀때 농부는 "이리 새칩은 기 참말 장하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새촙은 시절이 있다. 우리에게도. - P147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울었나 보다. 잠에서 깨니 목이 잠기고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다. 어떤 꿈을 꾸었던 걸까. 아무리 애를 써도떠오르지는 않는다. 뭔가 가슴을 짓누른다. 가끔 내 잠에는 누군가가 댕겨간다. 나는 댕겨가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 그런날이면 자면서도 엉엉 울었다. 기다림이 허망하고 서러워서 제풀에 우는 것이다. ‘댕겨가는(다녀가는)‘ 건 늘 이런 것이다. 차마 잡을 수 없이 바라만 보거나 몰래 왔다가 가버린다. 댕겨오다, 댕겨왔다가 아니다. 댕겨오는 건 원점으로의 회귀이고 누군가의기다림이 가서 닿은 말이다.
그래서일까.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도 가끔 김기림의 시「길」을 흉내 내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라고 혼자 노래 부를 때가 있다며 "댕겨가는 것들의 절망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영영 다시만날 수 없다"라고 했다. 나는 김기림의 시구절보다 김연수가 풀어놓은 "댕겨가는 것들의 절망"에 꽂히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댕겨가는 것들의 절망은 헤아려지지 않았다. 다만 수없이 댕겨가고 이제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댕겨간 것들의 흔적을 바라만보는, 남은 자의 지독한 열망에 내내 마음이 저렸다.
시인 허수경은 그래서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고읊조렸을까. 「공터의 사랑」에서 허 시인은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라며 애달픈 마음을 노래했다. 어딘지 모를 길 한가운데서 버려지기보다는 때로는 ‘댕겨오는 것들‘을 다정하게 혹은 격렬하게 맞이하고 싶다.
……그래요, 당신. 댕겨와요, 꼭요.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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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딱 겉다, 목딱 같다‘ 혹은 ‘혹딱 같다‘로도 쓴다. 못 생기고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혹딱같이 생기기" 하는 식으로 주로 생김새를 빗대거나 "에이, 혹딱 같다"처럼 (마음) 상태를 이야기할 때도 쓴다. 어머니 말이다. "그랑께네 내 맴이 혹딱 같다아이가." 목딱이나 혹딱의 어원은 잘 모르겠다. 더러는 울퉁불퉁못생긴 모과에서 나왔다 하고 더러는 호떡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는 목딱 같다는 말이 더 익숙하다. - P27

손택수 시인의 시 「애나」를 읽다 보면 경남 진주의 대표 지역 말
‘애나‘에 얽힌 이야기에 실없이 웃고 만다. 여기서 ‘애나‘는 경상도 말 ‘애나가‘ 혹은 ‘에나‘‘에나가‘를 말한다. 진주 사람들은 ‘애나‘가 진주의 고유한 말이라고 내세운다. 입말이라 그런지 ‘애나‘
‘에나‘ 두 가지 표기 다 쓴다. 애나는 ‘참말‘ ‘진짜‘라는 뜻인데,
‘애나가?‘ 하고 물을 때는 ‘참말입니까?‘ 반문하는 것이고 ‘애나로‘라 쓸 때는 진짜를 강조하는 것이다. - P33

‘끌베이‘는 거지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거렁뱅이를 아주 빠르게 발음하면 끌베이가 된다. 꽤 오랜 세월 끌베이와 비슷한 생활을 했고 자존심도 없었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으니까. 그렇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재미. 재미만 있으면 최소한의 버틸 수 있는 여지만 있어도 무조건 오케이였다. 하지만매번 재미를 따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사람도 세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조금씩 삶의 노선을 수정했다. 11년전 헌책방을 열 때 "돈보다 책, 책보다 사람"이라는 운영 원칙을정했는데, 지금은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믿거나 말거나 돈이 먼저다! 인제 그만 끌베이는 면하고 싶다. 그런데 재미는 여전히포기가 안....... - P41

경남에서는 빼떼기가 주식으로 쓰일 때가 많았다. 배곯던시절 고구마는 구황작물이다. 고구마를 오래 보관해서 먹으려씻어서 납작납작 썰어 채반에 받쳐 마당에서 말린다. 여기에 콩이나 팥 등 잡곡을 넣어 뭉근하게 죽을 끓여 먹었다. 이걸 빼떼기죽이라 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 주던 빼떼기죽이 생각난다. 내 눈에는 그저 시커먼 덩어리가 씹히는 죽이었다. 깨작깨작 몇 숟가락 먹었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빼떼기죽의 진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니 빼떼기죽은 어른의 맛인가 보다.
요즘 통영은 남해 바다 관광 일번지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옛 문화나 전통을 구현해 낸 먹거리를 상품화하고 있다. 빼떼기죽이 그중 하나로 여행객의 먹거리가 되고 있단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이는 통영 항구 앞 허름한 식당에 앉아 빼떼기죽 한 그릇 먹고 싶다. 김이 서린 안경알을 닦아 가며……………. - P73

정지용은 「문장 (18호, 1940년 9월)에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라고 박목월의 시를 높이평가했다. 그가 「가을 어스름」과 「연륜」이라는 작품을 투고하고받은 평이었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북 경주, 대구에서 청년시절을 보낸 그는 고향의 풍경과 서정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사투리」도 그런 작품이다. 이 시에서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 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 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이 마르는
황토 흙 타는 냄새가 난다. - P75

2012년 1월 MBC경남은 다큐멘터리 「사투리의 눈물』을 방영했다. MC메타가 랩으로 내레이션을 맡아 표준어에 밀려 사라져 가는 경상도 사투리의 처지와 현실을 알렸다. MC메타와 DJ렉스는 2011년 「무까끼하이」라는 곡을 발표했다가 지상파 방송에서 방송금지처분을 받았다. ‘무까끼하이‘는 대구 지역에서 주로 쓰는 말로 ‘무식하게‘ ‘무뚝뚝하게‘ ‘융통성 없이‘라는 뜻인데, 단지 일본어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린 것이다. 어이없다.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어처럼들린다고 엄연히 우리말로 지은 노래를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게하다니.
반전이 있다. 비록 방송심의위원회의 심의는 통과하지 못했지만 이 노래는 결국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 ‘대중음악 평론가20인이 뽑은 올해의 노래‘ 4위에 오르고 ‘제9회 한국 대중 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노래‘ 후보에도 올라 대중의 많은 지지와 찬사를 받았다. "외래어와 외계어에 가까운 단어들이 판을 치는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 순수 한국말의 전통을 지키면서 지방 방언의특수성을 가미한 의미 있는 노래"라는 평을 받았다. 대중이 선택한 말은 강제로 금지한다고 죽지 않는다. - P85

김원일의 단편소설 「여름 아이들」을 읽다가 ‘살강‘에 꽂혔다. 살강은 지금으로 치면 부엌 개수대 앞에 놓인 스테인리스 선반 같은 것이다. 갓 씻은 그릇이나 자주 쓰는 것을 올려놓는 선반으로
‘시렁‘이라고도 한다. 내가 사는 경상도 산골에서는 부엌을 ‘정지‘라 했고 그 정지에는 살강이 있었다. 김원일은 경남 진영에서태어나 대구, 경북에서 자라고 활동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말투에는 경북과 경남이 다 들어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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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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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 없었기에, 아니 만나지 않았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겠지. 헬렌은 낯선 영국인에게 어쩜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는지.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마음과 소포가 가득한 서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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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2-07 0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아름다운 책이죠!
제가 이 책 읽고 반해서 이 서점 자리 찾아갔는데 맥도날드로 바뀌었더라고요. ㅠㅠ

햇살과함께 2025-12-08 08:55   좋아요 0 | URL
앗 맥도날드 ㅠ 너무 아쉽네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런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저는 임항 열차에서 내려 지저분한 보도를 이 두 발로 직접 밟을 그날을 꿈꾸며 살아간답니다. 걸어서 버클리 광장까지 올라갔다가 윔폴 거리로 내려오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런던 탑 입성을 거부하고 앉았던 세인트폴 성당의그 계단, 존 던‘이 앉아 연설하던 바로 그 계단을 저도 한 번 밟아보고 싶어요. 대전 중에 런던 주재원으로 나갔던 신문기자 한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 말이 관광객들은 영국에 어떤 고정 관념을가지고 가기 때문에 늘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는대요. 전 영국문학 속의 영국을 찾아 갈 거라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거기에 있어요."
안녕을 빌며-
헬렌 한프 - P28

제가 뭘 썼는지 아세요? 월턴의 생애에서 고용주의 딸과 눈이맞아 달아난 존 던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지요. 텔레비전을보는 사람들은 존 던이 누군지 알 리가 없지만, 헤밍웨이 덕분에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은 아닐지니는 삼척동자도 줄줄 꿸 정도죠. 이 구절 하나 집어넣으니까 곧장 팔리더라고요. - P93

*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의 설교문을 모태로 태어났다. 인용문은 이 설교문의 한 구절이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서 온전한 하나의 섬은 아닐지니, 무릇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요, 또한 대양의한 부분이어라. 한 줌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지며, 작은 곳 하나가 그리 되어도, 그대 벗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어라. 그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축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알고저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어다.
좋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 P94

친애하는 캐서린 -
1969년 4월 11일
책장을 정리하다가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여 앉아 순풍에 돛단여행을 기원하며 몇 자 끼적입니다. 브라이언과 런던에서 멋진시간을 보내길 빌어요. 브라이언이 전화로 ‘여비만 있다면 우리랑 같이 가시겠어요?‘ 그러는데,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헬렌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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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종소리 - 김하나의 자유롭고 쾌락적인 고전 읽기
김하나 지음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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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작가가 들려주는 고전 문학 이야기. 고전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에는 총 5편의 고전 문학이 담겨있다.


<아우라> ─ 카를로스 푸엔테스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맥베스> ─ 셰익스피어
<변신‧시골의사> ─ 프란츠 카프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외의 4편은 이미 읽은 책이다.


이 책 덕분에 <아우라>를 다시 읽었다. 이렇게 짧고 강렬한 소설이라니.

이 책 덕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이디스 워튼의 <환락의 집>을 읽었다.

<환락의 집>은 1권이 참~ 속 터지고 답답해서 읽기 힘들었는데, 익숙해져서인가 체념해서인가 2권은 생각보다 잘 읽혔다.

<순수의 시대>도 다시 읽고 싶다. 이디스 워튼의 번역된 작품을 다 읽어야지.

이 책 덕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구매했다(마침 이번 달 민음사 패밀리데이에서). 남성 작가의 책이라면 절대 손이 안 갈 제목의 책이지만 여성 작가가 썼다니, 오랜 시간을 들여 쓴 책이라니 궁금해졌다. 5권 중 독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책이 아닐까 싶다. 과연 40페이지 허들만 넘으면 될지.

<맥베스>와 <변신>까지 다시 읽진 못했지만 또 기회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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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11-29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이라니 김하나 작가의 이 책 참 좋은 책이네요.
저는 일단 김하나 작가 책을 먼저 읽어야겠어요^^

햇살과함께 2025-11-29 09:42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좋고 고전 다시 읽기도 좋고요~

독서괭 2025-11-29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동안 김하나작가 팟캐스트 열심히 들으며 좋았었는데, 이 책은 나온 건 알지만 못 읽었어요. 책 좋은가 봅니다. 책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

햇살과함께 2025-11-29 10:37   좋아요 1 | URL
책읽아웃 끝나고 요즘 달릴 때 여둘톡 정주행 중이라. 이 책 출간할 때 방송 듣다가 바로 샀어요. 역시 김하나 작가는 책팔이 장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