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아이 - 임길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남기고 간 시 보리 어린이 13
임길택 지음, 강재훈 사진 / 보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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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을, 우는 것들을 사랑하셨던 임길택 선생님이 소천하시기 며칠 전까지 쓰시던 아름다운 시들, 동시들. 어릴 적 방학 때면 가던 시골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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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쇠뜨기

수건 쓴 아줌마 지나갔나?
그러면서
쇠뜨기는 다시 올라와요. - P17

늦가을

바람끝 거칠어지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 하늘 한 귀퉁이에
하루살이들 떼지어 난다.

흔들림 속
작은 것들이 보여 주는
살아 있음.

작은 것들이 이끌어 내는
그 흔들림 속
살아 있음. - P66

장작가리

겨울이면
누구네 집 가릴 것 없이
뒤란 담벽 따라
장작가리가 생긴다.

어쩌면 하나같이
그리도 가지런히 자르고
그리도 가지런히 패 놓았을까.

그걸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소여물 저절로 꿇고
아궁이 속에 불이 넘실거린다.
겨울이 하나도 춥지 않다.

불을 때지 않고
그대로 두고만 싶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따뜻해
겨울이 하나도 춥지가 않다. - P70

몰라도 좋은 일

가고 싶은데 걸어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는 일들

일하느라 손을 움직이고
무얼 찾아 책을 펴 드는 일들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몰라요.
아무렇지 않지만

그런 일들이 기적 속에서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되는 날
세상이 달리 보이는 날. - P104

권정생 선생님

이웃 할머니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녹아들고

길섶 소똥을 보면
그 소똥과 함께
풀숲에서 잠들고

가뭄에 타는 곡식들을 보고는
함께 목이 타고서야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분

그러다는 어느 새
살며시 우리 귓가로 다가와
시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바람결 같은
우리들의
작은 하느님.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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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516
박준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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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시보다 많이 짧아졌다. 제목부터. 첫 시 <지각>이 가장 좋다. 뭐랄까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보던 시 같아 익숙하달까. 뒤편에 붙은 산문의, 작가가 거쳐 간 여러 도시들에 대한 단상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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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 P10

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 P32

"우리의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절의 밤은

세상에서 가장 길며
짙으며 높으며 넓습니다 - P33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신병원 장례식장에 정차합니까 하고 물으며 버스에 탄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가 운전석으로 가서는 서울로 나가는 막차가 언제 있습니까 묻는다 자리로 돌아와 한참 창밖을 보다가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내일 첫차는 언제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 P66

블랙리스트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금기형, 박상대, 박상미, 신천식, 샘말 아저씨, 이상봉, 이희창, 양상근, 전경선, 제니네 엄마, 제니네 아빠, 채정근 몇은 일가였고 다른 몇은 내가 얼굴만 알거나 성함만 들어본 분이었다 "네가 언제 아버지 뜻을 다 따르고 살았니?"라는 상미 고모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봄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 때 나는 모두에게 부고를 알렸다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 P72

산문_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제천. 이곳을 지나기 전에는 어디를 지나야 했을까. 나를지난날로 만드는 시간이 있었듯 너를 앞날로 만드는 시간도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우리를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일까. 분명한 일은 사람에게 못할 짓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도착하던 날의 바람은 어디 멀리 가지 않고 떠나는날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심을 마주하는 상대의손길과 그에게는 내가 진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과좀처럼 투명해지지 않는 눈길. 산간 도로는 오늘도 열리지않았다.

벽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힘은 세다. 다시 장례를 치른다.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그간의 일을 삼일 만에 떠나보내고 세상을 끝낸 풍경의 상가. 조등 하나 걸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들의 힘은 더 세다. 죽음이 이야기하는 삶은 한결같지만 삶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매번 다르다. - P83

대구. ‘빗소리가 요란하다‘라는 문장을 쓰면서 시작한다. 반쯤 걸쳐진 빛을 언제쯤 직시할 수 있을까. 비 오고 바람 부는데 나는 낯선 길에서 누군가와 눈인사나 하고 싶어한다.

서산. 저녁이 밤이 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해질 때가 있다. 시간은 가기도 잘도 간다. 정해진 방향이 없어 가끔 뒷걸음을 한다. 만약 그날을 기점으로다시 살아내야 한다면 지금과 꼭 같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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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 메리 올리버 시선집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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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결혼한 시인 메리 올리버. 그녀에게서 자연에 대한 감탄과 수긍과 희망과 절망 또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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