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도 1월과 마찬가지로 과거가 현재에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었다.

13장 큰길의 시민들: 축제, 행진, 혁명
11월 2일에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 기념행사가 열린 곳은 미션 지구 24번가였다. 그해에도 역시 아즈텍 댄서들이 앞가리개와 발목딸랑이와 4피트 길이의 깃털로 차려입고, 맨발로 빙빙 맴을 돌고 쿵쿵 발을구르며 퍼레이드의 선두를 이끌었다. 과달루페의 성모를 앉힌 제단과 아즈텍 신을 앉힌 제단을 짊어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화장지를 둘둘감은 거대한 십자가를 등에 진 사람들, 얼굴을 해골처럼 칠한 사람들, 불을 손에 든 사람들이 또 그 뒤를 따랐다. 전부 해서 1000명쯤 되는 것같았다. 대형 퍼레이드와는 달리 이런 행사는 거의 모두가 참여자다. - P347
자기 도시를 능숙하게 자기 영토(상징적 영토이자 실질적 영토)로 삼을수 있는 시민들, 자기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데 익숙한 시민들이라야 반란을 도모할 수 있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 권리로서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와함께 "사람들이 평화롭게 한 장소에 모일 권리가 보장돼 있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다른 권리들에 대한 침해는 쉽게 인지되는 반면, 자동차 위주의 도시설계, 보행 환경 악화 등 집회 가능성을 차단하는 요소들은 인과관계를 추적하기도 어렵고 시민권의 사안으로떠오르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공공장소가 없어진다면 결국은 공공성도 없어진다. 개인이 시민, 즉 동료 시민들과 함께 경험하고 함께 행동에 나서는 존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시민이 되려면 모르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모르는 이들에 대한 신뢰이잖은가. 공공장소란 바로 모르는 이들과 차별 없이 함께하는 장소다. 공공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구체적 현실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적 행사들을 통해서다. - P351
11월 4일, 100만 명이 동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에 모여 깃발과 현수막과 포스터를 흔들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친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유는 장벽이무너졌다는 오보가 퍼졌기 때문이라고 말해줬다.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장벽이 정말로 무너지게 됐고, 겁을 먹은 국경수비대는 사람들이 장벽을 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벽의 붕괴가 진실이 된 것은 그것을 진실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인원이장벽 앞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두 발이 쓴 역사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은 혁명의 해에 일어난 가장 근사한혁명이자 혁명의 해를 마감하는 혁명이었다. (루마니아의 크리스마스 혁명은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 마법의 해 1989년의 1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이 1968년 ‘프라하의 봄‘ 혁명의 압살에 대한 항의 표시로프라하의 심장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자살한 학생의 20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1989년 11월 17일은 나치 점령기에 나치에게 살해당한 또 한 명의 체코인 학생 열사의 추모일이었는데, 이날의추모 행렬은 1월 추모 행사 때보다 훨씬 큰 규모였고 훨씬 대담했다. 카렐대학교에서 출발해서 해 질 녘에 공식 일정을 마친 대열은 촛불을 켜고꽃을 꺼낸 다음 행진을 이어나갔다.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11월도 1월과 마찬가지로 과거가 현재에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으로 출동한 경찰은 시위대를 포위하고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우르르 옆길로 도망쳤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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