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새 나는 좀 이상하다. 밥을 먹으러 가서도 혹은 술을 마시러 가서도 먹다 말고 멍때리며 한곳을 응시하곤 한다. 그러다가 한숨을 한번 쉬고 다시 먹던 걸 먹는다. 그때쯤엔 사실 처음처럼 맛있게 먹지도 못한다. 한숨을 자주 쉰다. 내가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자꾸 한숨을 쉬는지 젊은 애가 웬 한숨이냐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어제는 영화를 보려고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내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완전 쌩쌩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은건가, 완전 가라앉아 보여요. 하아-  가슴에 뭔가 아주 묵직한게, 아주 단단하게 박혀있다. 다른사람은 힘이 들때 어떤 증상들을 보일까? 밥을 못먹을까? 잠을 못잘까? 나는 잘 못걷는다. 걷다 말고 멈춘다. 걷다가 내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 뜨린다. 마치 이 머리채를 쥐어 흔들면 내 고민들도 다같이 흔들려 사라져 버릴것 처럼. 그러나 한번도 내 뜻대로 된 적은 없다. 

 

- 일요일인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숨을 가득 쉰 채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또 아무것도 하고 싶지를 않아져서 나는 방안의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짚어 쓴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잠을 자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누워있고 싶었다. 얼마만큼을 누워있었을까, 엄마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오겹살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나는 괜찮아, 안먹어, 귀찮아, 라고 얘기했는데, 너 어제 며칠간 고기 못먹었다고 신경질 냈잖아, 그래서 지금 완전 우울한거잖아, 고기 먹으러 가자. 나는 알았다고 말하며 침대에서 나와서 오겹살을 먹으러 갔다. 엄마, 나 소주 한잔 마셔도 돼? 그래, 너 우울 풀리려면 소주 마셔, 그래서 나는 소주도 마셨다. 뭐, 소주를 마신다고 해서 뭔가 나아지진 않았다. 나는 또, 고기를 먹다 말고 벽에 기대어 앉아 멍때렸다.  

 

- 오겹살을 다 먹고 밥을 볶아 먹는데, 밥을 볶아주시는 분은 고깃집의 사장님이셨다. 손님이 확 줄어들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하셨고, 가끔 아들이 도와주러 온다고 하셨다. 아들도 직장생활 하느라 힘드는데 와서 도와준다고, 직장생활에 시달릴텐데 와서 해주는거 싫어서 가급적 도와달라는 말 안하게 된다고도 하셨다. 엄마는 아드님이 참 착하네요, 자기도 힘들텐데, 라고 대꾸해주셨다. 나는 아무말도 없기 고기만 먹다가, 소주만 마시다가, 그렇게 볶아지는 밥을 보다가, 

"엄마들은 다 알고 계시는군요, 자식들 직장생활 하느라 힘들다는 거." 라고 말했다. 왜 그런말을 했지? 나는 힘들다는 걸 누군가 알아준다는 데에 갑자기 뭉클했던걸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엄마랑 고깃집 사장님은 동시에 말씀하셨다. 

"그럼요, 알죠, 그걸 왜 모르겠어요." , "알지, 얼마나 힘들겠니, 직장생활." 

 

- 아, 내가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건 아니다. 나는 직장생활 8년차. 이 일을 한순간도 좋아한 적은 없지만, 이것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쓸 만큼 힘든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왜 힘든지 안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나는 무엇이 다시 내 기분을 좋게 만들지도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자꾸만 구석에 숨고 싶어져서, 자꾸만 아무말도 하기 싫어져서, 자꾸만 한숨이 나와서, 자꾸만 서운해서, 자꾸만 바보 같아서 나는 내 스스로 기분을 좀 바꿔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지? 뭘 하지? 그러나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책장을 둘러본다. 뭐 좀 좋은거 없나, 뭔가 따뜻해지는 거 없나, 뭔가 유쾌해지는 거 없나, 뭔가 날 좀 웃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젓가락! 젓가락질 잘 하는 남자를 읽어야지.  

 

이 대리는 테이블 한켠에 있는 플라스틱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어 내 앞과 자신의 앞에 열 맞춰 놓았다. 칼날 같은 인상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진 행동이라 의외다 싶어서 몰래 남자를 훔쳐보았다. 뜨끈한 국수 국물을 들이켜더니 쇠 젓가락을 식탁 위에다 탁탁 작게 두드리며 키를 맞췄다. 그리고는 도시락 안에 담겨 있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난 그 평범한 행동에 이상하게도 시선을 빼앗겼다.
지난번 식사 때는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지만 이 대리의 손놀림은 근사했다. 단지 젓가락질을 하는 것뿐인데도 무기를 갖추어 든 병사처럼 날렵하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은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다.
(p.67) 

 

 

 

 

 

 

 

그러니까, 흐음, 젓가락질 잘 하는 남자를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내 앞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젓가락질을 잘 한다면. 내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굳이 젓가락질을 잘 할 필요는 없겠고, 다른 여자들 앞에서는 굳이 이름을 가지지 않아도 좋을테다.  

 

 

- 며칠전, 여동생한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나 하나뿐이었으면 좋겠어" 라고. 여동생은 "그래?" 라고 되물었는데, 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이내 생각했어. 만약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라면, 세상에 여자가 나 하나뿐이라고 해도 나를 선택하진 않겠지. 세상에 여자가 많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렇지만 순수하게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세상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내 옆에 바로 김태희가 같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음.................언니, 그건......쫌 아닌 것 같다." 

"김태희 선택할까?" 

"응." 

세상은................그런걸까? 

 

 

- 블랙베리 화이트 9700을 확, 질러버리면 나는 좀 기분이 나아질까? 

 

- 일요일이 이제 한시간 이십분도 채 남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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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3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0-04 13:06   좋아요 0 | URL
저 우산쓰는 거 캡 싫어하는데 오늘 출근하면서 우산 써야 했어요. -_-

그리고 블랙베리 화이트9700과 모델은 이 사진과 같습니다.


다이조부 2010-10-04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어쩌다가 주인장 개인블로그까지 가보게 되었습니다 ㅎ

이런 말 쑥스럽지만, 제가 놀러가는 알라딘 블로그 중에서

가장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공간은 다락방님의 공간입니다 ㅋ

젓가락질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살짝 서글퍼지긴 하네요. 젓가락질을 30대인데도 이렇게 엉망이라니 하하하

김태희 이야기 에서도 뻥 터졌습니다. 저에게 행정학을 가르쳤던 쌤은 40대 초반인데 수강생들 수업 진행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아이리스 랑 신데렐라언니를 보던 아저씨 였는데 그 양반은 도대체

김태희 의 어떤 점이 매력을 끄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군요 ㅋ


다락방 2010-10-04 13:09   좋아요 0 | URL
여기서 말하는 주인장이란......다락방 말씀이십니까? ㅎㅎ
가장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공간이라니, 오, 다행입니다. 여기서 슬프고 찌질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으니깐요. 뭐, 가끔 찌질한 글을 쓰기도 하지만. 이 페이퍼도 찌질하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또 코믹버젼으로.. ( '')

저는 제가 젓가락질을 잘하는줄로만 알았는데, 아주 오래전에, 젓가락질을 기가막히게 하던 늙은애인이 저더러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내가 젓가락질을 못하는구나, 하고 알았더랬죠.

저는 김태희가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참으로 이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한테는 이쁘면 장땡! -_-

다이조부 2010-10-04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여초사이트 라고 하는데, 남초사이트 에 가면 하긴 김태희가 인기는 있나봐요~ 동생이 즐겨 가는

야구사이트에서 한때 별명은 김노예 였다고 하네요. 매일 등판한다고 --

저는 김태희 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학창시절 공부하는 시간을 아낄려고 하교 후 뛰어갔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에 내 자신이 한심했었죠. 바보처럼 말이죠


이 근사하고 멋진 공간에 시덥지 않은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은것 같아서 민망하네요. 어쩌면 삭제당할지도 ㅋ

다락방 2010-10-04 13:10   좋아요 0 | URL
제가 왜 삭제를 합니까, 매버릭꾸랑님. 저는 이 댓글을 읽으면서, 아 내가 공부를 못한 이유는 하교 후 뛰어가기는 커녕 느릿하게 걸어가면서 분식집이란 분식집은 다 들어가서 먹었기 때문이구나, 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ㅎㅎㅎㅎㅎ

치니 2010-10-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제가 아는 분이 한숨은 몸에 아주 좋은 거라고 그랬어요. 한숨을 휘 - 몰아쉬면 몸의 나쁜 것들이 빠져나가는 거라고.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쉬라고. :)

다락방 2010-10-04 13:11   좋아요 0 | URL
오, 한숨이 좋은거에요? 몸의 나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겁니까? 저, 잘 하고 있군요. 죄다 빠져나갔으면 좋겠어요, 죄다!!

점심 뭐 드셨어요, 치니님? 저는 대구탕 먹었습니다. 우하하핫

레와 2010-10-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다락방의 일기와 페이퍼를 보며 위로 받고 위안을 얻어요.
그런데 다락방은 어디서 나와 같은 위로와 위안을 얻을까 궁금해요.
어딘가 있겠죠? 있어야해요.

다락방의 지금이 빨리 지나가길..

다락방 2010-10-04 13:13   좋아요 0 | URL
그럼요, 나도 위로를 받고 위안을 얻죠. 그것은 누군가의 글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문자메세지이기도 하고, 책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견디지 못할건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지나가겠죠!
:)

moonnight 2010-10-0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락방님이 엄마랑 오겹살을 드시러 가는 거, 엄마께 소주 마셔도 돼? 하고 물을 수 있는 거, 엄마께서 그럼, 마셔. 하고 허락해 주시는 거. 무척 부러워요. ㅠ_ㅠ;
그나저나, 우리 다락방님 요즘 많이 우울하시구나. 뭐가 이유인지 알고 계시다면, 지금 이렇게 기분이 쳐져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해도 시간이 분명히 약이 될 테니까요. 다락방님은 우울할 때 써 주시는 페이퍼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어요. ^^

다락방 2010-10-04 13:16   좋아요 0 | URL
네, 기분이 쳐지는게 반드시 나쁜것만은 아닐거에요, 그쵸? 매일 좋을 수 없는 것처럼, 매일 나쁠수도 없을테니까,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고, 그렇게 살면 되는거겠죠. 조금 우울하다가 금세 기운차릴거에요. :)

엄마가 소주 마시는 걸 허락해주는 이유는 엄마도 한두잔쯤 마시는 걸 좋아하시기 때문이에요. -_-
어제는 심지어 입병이 생겼는데도 소주를 두잔 드셨다는 ;;


2010-10-04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0-10-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하게(이게 중요한 거네요, 순수!) 그를 좋아한다면 옆에 비, 원빈, 소지섭 등등이 줄지어 서서 내게 추파(?)를 던진데도 난 끄떡없을 자신이............ 있,을,까...???
난 김태희를 읽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불순한 생뚱맞음이란!)

다락방님이 한숨을 내쉴 때마다 우울도 그만큼씩 빠져나갔으면 좋겠네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날렵하고 우아한 젓가락질 배우기에 몰두해 보는 건 어때요?
다락방님 페이퍼 때문에 당장 오늘 점심부터 내 젓가락질을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운내세요, 사랑스런 다락방님.

다락방 2010-10-04 13:19   좋아요 0 | URL
저는 비, 원빈, 소지섭이라면 안넘어갈 자신이 있는데, 이선호라면 살짝 얘기가 달라질거 같아요. 아마, 구십구프로, 넘어가지 않을까...하고 말이지요. 막 뚫어지게 쳐다봐주면 어어, 왜...뭘 그렇게 봐, 이러면서 가슴이 콩닥콩닥 거릴지도. ㅎㅎㅎㅎ

좋아요, 섬사이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날렵하고 우아한 젓가락질 배우기. 오늘부터 젓가락질할때 노력해보겠어요! 2010년 남은 시간들을 젓가락질 배우는데 다 써버리겠어요!!


섬사이님도 잘 지내세요!
:)

차좋아 2010-10-04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세븐이가 빨리 나타나야겠습니다 ^^

다락방 2010-10-04 13:20   좋아요 0 | URL
저는 세븐이 좋은가 이선호가 좋은가 정말이지 심각하게 상황극까지 만들어가며(응?) 생각해본 결과, 저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꼭' 선택해야 한다면 이선호를 선택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뭐래 ㅎㅎ)

다이조부 2010-10-0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선호 와 세븐에 관한 애정도에서 이선호 판정승 거두었군요 ㅋ

옛날 비디오가게 이름 으뜸과 버금 이 불현듯 생각났어요.

블랙베리 세븐 포스터는 정말 흐뭇하네요. 흐흐

다락방 2010-10-05 09:00   좋아요 0 | URL
앗 저도 으뜸과 버금 알아요! 매버릭꾸랑님과 저는 같은 세대를 살았는가 보군요! ㅎㅎ
매버릭꾸랑님도 잘생긴 남자 좋아하시는구나! ㅎㅎㅎㅎㅎ 블랙베리도 예쁘죠? 아, 너무 예뻐요! orz

네꼬 2010-10-0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요새 한숨 많이 쉬어서 곧잘 지적 받는데.. 다락님의 그런 기분, 감기처럼 지나가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진짜로요. 식사 거르지 말고, 건강하게 버텨봐요.

다락방 2010-10-05 09:00   좋아요 0 | URL
네꼬님도 그래요? 누군가 내 심장을 꺼내어 따뜻한 손으로 스윽스윽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는, 그런 기분을 가진채로 살고있어요?

잘 견뎌요. 아프지 말고!

Mephistopheles 2010-10-0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베리를 사다 주는 남자친구만 있다면야......한방에 그냥 다 날라갈텐데 말입니다.(이런 당연한 댓글을 봤나!)

다락방 2010-10-05 09:02   좋아요 0 | URL
아, 뿜었네요. ㅋㅋㅋㅋㅋ

그치만 블랙베리라는 거대한 선물이라면, 어휴, 부담되서 어디 살겠어요? 아마도 블랙베리를 사주는 남자라면 저는 단단히 발목잡히지 않을까요? 제가 여태 남자한테 받았던 선물중에 가장 비싼게 CD 였던걸 감안한다면, 블랙베리가 주는 구속력과 책임감은 아휴 어마어마하네요. 역시 비싼건 제돈주고 사는게 방법인듯.
그렇지만 블랙베리 사주는 젊고 잘생긴(내맘대로 추가)남자를 생각하니 쾌락이 밀려와요. 죄책감이 드네요. ㅎㅎ

Mephistopheles 2010-10-05 09:26   좋아요 0 | URL
꼭 고가의 선물이 아니더라도 사랑과 연애엔 어느정도 구속이 동반하긴 합니다. (법정구속 불구속 이거 말구)

다락방 2010-10-05 10:54   좋아요 0 | URL
사랑과 연애에 수반되는 '어느정도의' 구속이라면 괜춘합니다. 언제나 늘 과한게 문제죠. 혹은 모자라거나.
어느 정도까지는 저도 나름 감당할 수 있어요. ㅎㅎ

새초롬너구리 2010-10-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다락방님한테 물어보러왔는데 님 분위기가 대답해주실 여력이 계신건지 몰겠어요. 아, 너무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아주아주 차갑고 센 바람을 맞아도 허파에 들어가면서 뻥뚫리지않는 이상 어떻게 답답한 속을 뚫을 방법은 없을까요? 전 지금 아주아주 차가워서 물통의 물이 얼어버리는 칸에 한동안 놔두었던 버드와이저를 마셔요. 물은 얼어도 알콜은 안어나봐요? 차가운데 시원하진않네요. 음, 차갑다랑 시원하다가 다른 느낌이란거 이제 알았어요.

근데 블랙베리가 017을 포기할만큼은 아닌거 같아요. 이제 이쁜쿼티폰이 주루룩 나올터이니 기다리삼.

근데 엄마들은 정말 언제나 먹이는거 꼬시는데 최고예요. 근데 오늘에서 새삼 밥먹고나니까 몸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다락방 2010-10-05 09:08   좋아요 0 | URL
블랙베리가 017을 포기할만큼은 아니다, 란 말씀이시죠? 좀 더 참아봐야겠어요. 이쁜쿼티폰, 으윽,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해요!

아주아주 차갑고 센 바람을 맞아도 허파에 들어가면서 뻥뚫리지 않는 이상, 이라는 댓글을 보자니 이솝우화 생각났어요. 왜 태양과 바람이 서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잖아요. 바람은 당연히 자기의 거센 바람으로 벗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간 따뜻한 햇볕이었죠. 차갑고 센 바람으로 안될 것 같은 지금의 답답한 속은 차라리 따뜻함으로 건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여기, 새초롬너구리님께 주고 싶은 글이 있어요.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에 나오는 글이에요.

"아니야, 우주는 무한할 거야. 이 우주에 내가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 생각만 해도 추워. 무주에서 보내던 그해 겨울이 기억나.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그때 달달달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가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은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일이었어. 그게 누구든, 나는 연결되고 싶었어. 우주가 무한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뭐래도 상관없어. 다만 내게 말을 걸고, 또 내가 누구인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우주에 한 명 정도는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우주가 무한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무한한 우주에서 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추울 것 같아."


사실, 원하고 있는건, 시원함이 아니라 따뜻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hanalei 2010-10-0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김태희에 대해서 잘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김태희가 글을 잘 쓰나 말을 잘하나 생각이 깊은가 머리가 좋은가 대체 다락방님보다 나은게 머가 있죠?

hanalei 2010-10-05 00:06   좋아요 0 | URL
저 이야기는 순뻥이야요.
저, 김태희가 누군지 전혀 아는바가 없어요.
저, 다락방님이 누군지 알아요.
저한테 김태희가 무슨 의미가 있죠?

다락방 2010-10-05 09:10   좋아요 0 | URL
아이고 미드나잇_레이님, 이런 기분 좋은 댓글이라뇨!
그렇지만 레이님이야 말로 순뻥이에요.

김태희가 쓴 글을 읽어보신적 없으시잖아요!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없잖아요! 글도 잘쓰고 말도 잘하고 머리가 좋은 여자일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얼굴은, 얼굴은!!

김태희가 저 멀리 있기 때문에 아직 의미가 없지만, 눈앞에 나타나면 우주만큼의 의미를 가져다 줄지도 모르죠.ㅎㅎ
그렇지만 현재는 레이님께 김태희보다는 제가 의미있는 여자사람이네요. 헤벌쭉 ^_____^
 
옥희의 영화 - Oki`s Mov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실 알고보면 보잘것없는 남자, 여자, 연애, 섹스, 인생이야기 그리고 키스에의 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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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10-03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선균이니까 보러 가려구요 ㅎㅎㅎ

다락방 2010-10-03 15: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선균은 별로라서 ㅎㅎ 저는 이선호 ♡

다이조부 2010-10-03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선균은 참 남자가 봐도 매력만점~


다락방 2010-10-03 15: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선균 안매력적이에요. 목소리도 별로 ㅎㅎ 코 풀라고 말하고 싶은 목소리 ㅋㅋ 정유미가 예뻐요!!

Jade 2010-10-03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영화 최고의 대사는 뭐니뭐니해도 "착할게"라고 생각 ㅋㅋㅋ

다락방 2010-10-03 15:26   좋아요 0 | URL
아 기억나요. 정유미가 뽀뽀잘하네 하는 것도 웃겼어요. 이선균이 너가 젤 예뻐, 라고 하는 것도 웃겼고. 문성근이 걔한테 정말 공평하고 싶어 라고 하는것도 ㅎㅎ

마늘빵 2010-10-0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스에의 충동 맞아요. 나도 뽀뽀고프다.

다락방 2010-10-03 15:26   좋아요 0 | URL
아 진짜 죽을뻔했다요. ㅋㅋ
역시 대학은 남녀공학을 다녀야한다고 뼈저리게 실감했네요. ㅎㅎ

다이조부 2010-10-0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광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볼수록 애교만점을 하더군요~ 이선호가 눈에 보이는데 아 저 친구가

다락방님이 좋아라하는 연기자군 생각이 들더군요 ㅎㅎ


다락방 2010-10-03 18: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아 뭔가 부끄러워지는 이 시츄에이션 ㅎㅎ 네, 그 친구가 제가 좋아라 하는 연기자 입니다. 사실 저는 그를 '연기자'라기 보다는 '남자'로 좋아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일전에 황우슬혜랑 [우리 결혼했어요]인가 거기에 나오는 걸 우연히 보게 됐는데, 황우슬혜를 완전 뚫어지게 쳐다보더라구요. 그거 보면서 와, 녹겠다 녹겠어 싶었어요. ㅎㅎㅎㅎㅎ

moonnight 2010-10-0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꼭 챙겨보는 편이에요. 보고 나서는 괜스레 어리둥절, 씁쓸, 착잡 등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요. 술을 부르는 영화 ^^
이번 영화는 어떨지. 기대하고 있어요. ^^

다락방 2010-10-03 21:09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키스를 부릅니다, 문나잇님. 다 보고 나면 아는 남자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오르며 누구를 불러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핫.
저의 경우엔 아무도 부를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워낙에 남자관계가 클리어해놔서 ;;

마노아 2010-10-0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가 참 독특해요. 엔지 없이 그냥 한 번에 간 것 같지 않아요? 영화 굉장히 빨리 찍었을 것 같아요.ㅎㅎㅎ

다락방 2010-10-03 22:18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엔지 없었을 것 같아요. 이 영화속의 배우들은 감독이 원하는바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 같더라구요. 문성근이 술자리에서 화내는 역할도 너무 잘 어울리는거에요! 게다가 아차산 ㅎㅎ

저도 오르막을 오를때 안아주는 남자랑 함께 아차산을 가야 할텐데 말이죠. 추석때 아빠랑 남동생이랑 다녀왔네요. 하하하핫

프레이야 2010-10-04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사 가만 들어보면 실실~ 진짜 웃겨요.
쓸쓸하기도 하지만 쓸쓸하지만도 않은..ㅎㅎ

다락방 2010-10-04 11:28   좋아요 0 | URL
구질구질한 인간사에요. ㅎㅎ
우리네 삶이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미화없이 그대로 다 드러난 듯한 그런 영화였죠. 아차산 오르면서 문성근한테 머리 더 빠지면 안되요, 하는데 웃겼어요. ㅎㅎ

레와 2010-10-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봤어요. 그래서 공감 할 수 없어 외로와.ㅡ.ㅜ


ㅎㅎ

다락방 2010-10-04 11:29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이거 봤어야 되는데. 어찌나 키스충동 이는지 사람 아주 죽는다요. ㅎㅎ 이 감독 [생활의 발견]에서도 술마시다가 테이블 너머로 키스하게 하더니, 이 영화에서도 소주를 가운데 놓고 키스하게 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실재야 실재. 허구가 아니야. ㅋㅋㅋㅋㅋ
 

손암 선생은 갈치를 무린어, 즉 비늘 없는 생선 종류에 포함시켰는데 피부의 은색 가루가 비늘이다. 구아닌이라는, 색소의 일종으로 회로 먹을 때는 칼로 긁어내야 한다. 호박잎으로 긁기도 한다. 소화가 안 되기 때문. 힘줄도 걷어내야 한다. 익힐 때는 상관없다. 지혈작용도 하는 구아닌은 모조진주나 매니큐어, 립스틱에 쓰인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 (p.19) 

 

 

 

 

 

 

 

내가 좋아하는 국내 작가는 정미경 말고는 없었다. 김훈의 단편 『언니의 폐경』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김훈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고, 그러고보니 내게는 국내작가중에는 이러이러한 작가가 좋다, 라고 말할만한 작가가 별로 없었다. 한창훈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정미경과 한창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행도 여행기도 좋아하지 않아서 여행기를 읽어봤자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 것처럼, 해산물도 별로 좋아하질 않기 때문에 한창훈의 이 책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었다고 해서 책 속에 나오는, -게다가 한창훈이 꽤 자세히 설명해 놓은-그 어류들을 먹고 싶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집이 센 듯.) 

그런데 한창훈의 글이 좋았다. 한창훈의 글이 너무나 맛깔스러웠다. 게다가 그가 이 책속에서 밤낚시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그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은 멋진 남자와 밤낚시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졌다.  

   
 

밤낚시의 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들 돌아올 때 찾아가는 역행의 맛이 있고 모든 소음을 쓸어낸 적막의 맛도 있다. 넓은 바닷가에서 홀로 불 밝히는 맛도 있고 달빛을 머플러처럼 걸치고 텅 빈 마을길 걸어 돌아가는 맛도 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회 떠놓고 한잔 하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밤에 하는 짓이 몇 가지 되는데 가장 훌륭한 게 이 짓이다. (p.99) 

 
   

아! 나는 한번도 낚시에의 로망을 가진적이 없다. 아빠를 비롯한 친척 어른들 모두, 심지어 제부까지 낚시를 좋아한다. 어릴적에는 아빠를 따라 낚시를 몇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얼음낚시 까지도. 그러나 한번도 그 순간이 좋았던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고기를 낚지 않아서인걸까? 낚시가 취미라는 사람을 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한창훈이 말한다. 밤에 하는 짓 중에 가장 훌륭한 짓이라고. 밤에 하는 가장 훌륭한 짓을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적막속에서 새벽 다섯시에 회 떠놓고 한 잔 하는 남자. 캬~ 좋다. 그 밤에 온전히 내가 옆에 있어 준다면 그 밤은 찬란하지 않을까. 적막하지만 찬란한 밤. 고요하지만 황홀한 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멋진 남자와의 밤낚시' 에 대한 로망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는 혼자인 쪽을 더 좋아할까, 그 순간 만큼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숱한 이웃들의 작은 사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미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사연이다. (그러고보니 어류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한다는 것에서 퍼뜩, 프레모 레비의 [주기율표] 랑 비슷한 전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기율표]의 '티타늄'편을 엄청 좋아했는데!!) 해산물 공장에서 일하는 '은미 엄마'의 이야기인데, 평소에 지각이나 게으름을 전혀 보여주지 않던 그녀가 하루는 늦게 출근하고 기운도 없어 뵌다. 섣불리 뭐라 물을 수도 없어 주변 사람들은 퇴근후, 그녀와 함께 술 한잔을 하며 왜 그런지 까닭을 묻는다.  그녀는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넣고 얘기한다. 

처녀 시절 은미 엄마는 마을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밤마다 연애바위 뒤에서 만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주겠다는 다짐도 날마다 듣고 언제 김밥 싸서 바닷가로 노래미 낚시 가자고 손가락도 매일 걸었다. 사랑은 소문이 나기 마련이고 소문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p.130)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은미 엄마는 마을 청년과 헤어진 뒤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십년만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귀찮게 할게 아니니 딱 한번만 만나달라고. 그래서 그녀는 나갔는데 이제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십년전의 그 청년은 그녀를 횟집으로 데리고 간것이다. 까페가 아니라 횟집을. 

"글쎄 말이요. 같이 노래미 낚으러 가자 해놓고서 한 번도 못 가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요...회를 가리키면서 좀 먹어보소, 얼른 먹으시요, 이 말만 서로 하고."  

"......."

"내가 가난해서 갔지? 그랬지? 이 소리만 하면서 울더라고. 결국 그 사람만 소주 한 병 마시고 밥상 위에 젓가락 한번 못대보고 그냥 나왔소."  

은미 엄마는 축축해진 목소리로 말끝을 맺었다. 궁금증이 풀어진 우리는 건배를 하고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망연자실 한동안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면서 말했다. 

"가야겠구만.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자꾸 생각이 나." 

철이 엄마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헤어졌으니 생각이 날 만도 하지." 

"그게 아니야." 

"아니면?" 

"노래미회가." 

"......" 

"먹고 올 것 그랬나?" (pp.131-132) 

 

아, 좋아. 정말 좋다.  

 

소라 편에서는 한창훈의 어릴적 사연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한창훈이 여덟,아홉살 적에 해녀인 할머니를 따라가서 해녀들의 옷을 지켜준다. 옷을 지키면서 그는 무료함이란 걸 알게된다. 갯돌을 뒤지고, 구름을 보고, 비행기가 세대째 지나가고, 그리고 세시간이 넘게 물질을 하다가 육지로 올라온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옷을 갈아입을 때, 어린 한창훈은 그때, 풍성함을 만난다. 

   
 

아낙들의 출렁거리는 젖가슴과 눈부신 엉덩이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한동안 나타났다 사라졌다 계속 되었다.
한 아주머니는 속고쟁이를 벗으려다 내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히면서 고쟁이를 내렸다. 깊은 무료함 뒤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풍성함이 찾아온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일은 계속해볼 만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생각이 너무 길어 나중에 먹으려고 둔 큰 소라는 그만 까맣게 타고 말았다.
(p.247) 

 
   

 

 

『나는 여기가 좋다』의 담백한 이야기들이, 그 맛깔스런 사투리가 생각났다. 「밤 눈」과 「올 라인 네코」의 그 말랑말랑함도 같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무척 신이 났었는데!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홍합』이 품절이었다. 그런데 어제 다시 검색해보니, 오, 품절 아닌 2009년 판이 뜬다! 앗싸! 

 

 

브론테님은 어제 이승우를 읽어보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제 한창훈을 다 읽어보겠다. 아, 신난다! 

 

음, 근데 앞으로 키스를 할 때는 자꾸만 갈치 비늘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갈치 비늘...갈치 비늘.... 

 

춥다. 가을이다. 그리고 금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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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10-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류들을 먹고 싶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 다락방님은 어류보다 육류가 좋은거에요 :)

전 낚시를 많이 해본건 아니지만 낚시를 좋아해요. 새벽낚시도 해봤고 밤 꼴딱새고 바다낚시도 해봤고 아침낚시도 해봤지만 모두 좋았어요. 낚시라는건 고기를 잡는 행위보다 그 곳, 낚시터의 시간과 분위기가 좋았던듯 싶어요.물론 동행도 중요하지요.
(제 낚시 경험의 파트너들은 모두 신랑이 아니었다는...ㅎㅎㅎ)

다락방 2010-10-01 13:14   좋아요 0 | URL
ㅎㅎ 일전에 소개팅 했을 때 그 상대가 그러더군요. 회보다는 삼겹살을 좋아하죠? 라고. 완전 빵 터졌네요. 회 안먹고 고기 먹게 생겼다며 -_- (아무래도 욕인듯!) 맞아요, 저는 육류가 훨씬 훠어어얼씬 좋아요. 그러나 생선도 잘 먹습니다! ㅎㅎ

낚시터의 시간과 분위기를 제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화장실도 불편하고(저는 어딜가나 화장실이 깨끗해야 좋아하는 여자사람인지라;;) 저는 그다지 야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밤낚시 부분 읽고 어찌나 밤낚시 떠나고 싶은지. ㅎㅎ 남자가 낚시 하고 있을 때 옆에 가만히 앉아있고 싶어요. 므흣

푸른바다 2010-10-0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잘못 들어온 줄 알았어요^^ 밤 낚시같은 걸 좋아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다락방 2010-10-01 13:1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밤낚시 보다는 밤에 잠 자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밤에는 잠을 자야죠. 아마 밤 낚시 가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지도 몰라요. ㅎㅎ

레와 2010-10-0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홍합은 보관함에 담고.

노래미회를 두고 와선 다시 생각하는 은미엄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요. 소주한잔 털어넣고 초장찍어 회 한점 입에 넣으면 어깨춤이 절로 나오지. 암!암!

배타고 나가는 밤낚시, 한번 해보고 싶긴 한데 겁쟁이 본인이 과연 적막한 그 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의심부터 들고.

아이고, 회를 떠올리니 군침돌아 안되겠다. 이번주말엔 회 한사라 소주 한잔 해야지!!
다락방, 나는 삼겹살 만큼 (어쩌면 그 보다 더) 회를 좋아해. 언젠가 다락방이랑 회와 소주를 마시고 싶군.

^^


다락방 2010-10-01 13:16   좋아요 0 | URL
나 아직 결재전인데 댓글 쓰고 결재하러 가야겠어요. 아, 2010년 책 안사기 프로젝트는 1일이 되자마자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군요! ㅎㅎ

배타고 가는 밤낚시는 너무 무섭고(수영 못함), 뭐 적막한 곳에서 그와 나와 단 둘이 낚시 하는 거라면 참 운치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뭐, 자주 하고 싶지는 않고 말입니다.

나도 회와 소주를 마시고 싶어요, 레와님이랑!!

다이조부 2010-10-0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데

팍 떠오르는게 없ㄴㅔ요 ㅋ

갈치비늘~ 음

다락방 2010-10-01 13:17   좋아요 0 | URL
책 읽다보면 한창훈이 낚시 하는 사진이며, 생선 손질하는 사진이며, 생선 회 사진같은것들이 종종 나와요.

앞으로 키스할때는 눈 앞에 갈치가 둥둥 떠다닐 거에요!! ㅎㅎ(뭔가 저주같은 뉘앙스ㅋ)

책가방 2010-10-0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밤낚시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답니다.
같이 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한밤중의 그 고요함만이 기억에 남더군요.
그날 뭘 먹었는지, 고기는 몇마리나 낚았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던것만은 분명하답니다.

다락방 2010-10-01 13:18   좋아요 0 | URL
한밤중의 고요함, 은 대체 어떤걸까요? 그것도 낚시터의? 저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요.
책가방님이 그날 뭘 드셨는지, 고기를 몇마리나 낚았는지는 저도 궁금하질 않아요. 그 때 하셨던 수없이 많은 생각이 어떤걸까, 그게 궁금하네요.

비로그인 2010-10-0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보관함으로 고고! 전에 한창훈의 '나는 여기가 좋다' 도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보관함에 담아놨는데 깜빡 잊고 있었거든요..이 기회에 둘 다 봐야겠어요 ㅎㅎ

다락방 2010-10-01 13:19   좋아요 0 | URL
나는 여기가 좋다 좋아할거에요, girlever님. 정미경의 [아프리카의 별]은 별 다섯을 줄 수 없는 책이지만, [나는 여기가 좋다]는 별 다섯을 줄 수 있는 책이에요. 제 생각엔 girlever님도 그러실 것 같아요.
:)

Mephistopheles 2010-10-0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있어...처음이자 마지막 밤낚시의 추억은......
모기와의 사투였습니다.

다락방 2010-10-01 15:03   좋아요 0 | URL
저는 제 남자가 모기와 싸우지 않을 수 있도록 제가 다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있습니다!! ㅎㅎ

다이조부 2010-10-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를 정미경 과 한창훈으로 꼽는 조합은 드물것 같아요~ ^^

두 사람의 작품을 읽은게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만~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ㅋ

나도 언젠가 좋아하는 작가 목록 리스트를 만들고 싶네요 ㅎㅎ

다락방 2010-10-01 16:14   좋아요 0 | URL
언젠가 만들게 되실 좋아하는 작가 목록 리스트가 궁금합니다, 매버릭꾸랑님.

금요일 오후 잘 보내고 계세요? 전 눈알 빠지게 일하다가 또 알라딘을 잠시 들렀어요. 하도 컴퓨터를 봤더니 눈이 아파요. 도넛츠 먹으면서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좀 쉬어야 겠어요. 하핫.

한창훈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매버릭꾸랑님!!

sslmo 2010-10-0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홍합'을 읽고 한창훈이 별로였단 말이죠~
근데,'인생이 허기질때 바다로 가라'제목이 좋아서 홀라랑 샀는데,
이 리뷰를 보니 발라당 읽어줘야 할 것 같아요~^^

다락방 2010-10-01 17:33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홍합] 별로에요? 저는 [나는 여기가 좋다] 읽고 완전 쑝갔어요!! 아시마님 리뷰읽고 홍합 절대 읽어주리라, 막 불끈 다짐했어요. 그런데 품절이라 완전 의기소침해있다가 품절 풀린거 보고 얼씨구나~ 하며 주문했어요.

그런데 양철나무꾼님 페이퍼 보면 정말이지 독서내공이 상당하신 것 같아요!! @.@

2010-10-01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치 2010-10-0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거 인쇄소에 갔다가 인쇄되어 나오는 거 봤는데, 갈치 편을 읽으면서 막 흥분해 가지고'아, 이 책 사야지' 생각했더랬어요 ^^
다락님 페이퍼를 보니 다락님에게 갈치회를 사주고 싶어지네요! 한라산 소주랑 같이 먹으면... 쓰읍~

다락방 2010-10-03 00:56   좋아요 0 | URL
저 갈치회 잘 못먹을지도 몰라요, 또치님. ㅎㅎ 저 회를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물론 친구들 말로는 회 좋아한다는 애들보다 더 많이 먹는다고는 하지만.. ㅎㅎ

이 책 정말 좋아요, 또치님.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들을 얘기해주는데 어찌나 정이 가는지요. 으음, 또치님이 좋아할 이야기들이 분명해요!
:)

2010-10-02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스티아 2010-10-0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지난주 토요일인가? 암튼 주말이었어요. 감성다큐 미지수 라는 KBS2 프로그램에 한창훈 씨 나왔었어요.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시작하는 부분부터 봤는데요. 나레이션듣고 바로 "엇... 한창훈이다" 소리질렀더니 남편이 깜짝 놀라더라구요. "나...저 사람책 읽었어~~" 했더니.. 신기해하면서 함께 봤죠~
최근 나온 책 소개도 나오고 한창훈씨의 일상이 나오는 다큐였는데 볼만했어요. 다락방님이 생각나더라구요.
그거 보니깐..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특히. 이 페이퍼에 소개된 "인생이 허기질때 바다로 가라" 는 더더욱이요..
근데.. "나는 여기가 좋다" 의 소설들이 전부 한창훈씨의 인생이 베어나온 소재였더라구요. 암튼 알려드리고 가요~
저 이제 출산 9일 남았어요. 17일이 예정일이거든요.
매일 조마조마 하고 있어요. ㅎㅎ 그럼 바이바이

다락방 2010-10-08 12:26   좋아요 0 | URL
[인생이 허기질때 바다로 가라]도 다 일상이 베어나온 이야기들이에요. 한창훈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동창들의 이야기 등등요. 그래서 그런지 읽기가 아주 수월하고 또 읽고나서도 아름다워요. 읽다보면 가슴이 훈훈해질거에요.

오와- 제 여동생 보니까 예정일을 아주 많이 경과하던데, 헤스티아님, 얼마 안남았으니 아주아주 건강하게 순산하시기를 바랄게요!! 아기 낳고 나면 또 소식 전해주세요!
:)

 
뻔뻔한 Happy birthday to me 이벤트 :)

(웬디양님의 생일축하 이벤트 참여글입니다.) 

 

사람마다 이성을 마주하는 순간,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곳이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이라고 하는데, 나는, 눈은 좀 식상하다고 생각한다. 그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으면서. 얼마전에 만난 남자에게 내 눈이 하는 말을 읽어보라고 했더니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흥! 남자라면 여자의 눈이라고 대답하면서 사실은 가슴을 볼 수도 있고 뒤돌아 있는 엉덩이를 볼 수도 있으며 다리를 볼 수도 있겠지. 어제 읽은 하루키의 일큐팔사에서 덴고는 아오마메의 다리를 아주 아름답다고 말했다. 마음에 쏙 든다고. 여자의 경우에는 눈이라고 말하면서 엉덩이를, 손을, 뒤통수를, 어깨를 볼 수도 있을거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엉덩이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엉덩이를 본 적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입술과 코와 눈을 그리고 볼을(으응?), 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손을 보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의 어느 신체부위가 마음에 든다면 그 순간 사랑에 빠진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을거다. 아니,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잘 모르겠다. 사랑하니까 예뻐보이는 건지도. 아, 이런건 정말 어려워. 진짜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한나는 미카엘을 사랑한다. 미카엘의 미소를, 미카엘의 손가락을. 아니, 다시 미카엘을. 나의 미카엘.  

 

   
 

나는 그의 미소와 손가락이 좋았다. 그의 손가락은 각각이 개별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는 듯이 찻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찻숟가락은 그 손가락에 쥐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내 손가락은 그의 턱을, 제대로 면도가 되지 않아서 수염이 삐죽 나와 있는 그 부분을 만져야만 할 것 같은 희미한 충동을 느꼈다. (p.9) 

 
   

 

후아- 한나는 아마도, 그가 만지작 거리고 있는 찻숟가락이 되고 싶었겠지. 그러니 찻숟가락이 가졌을 느낌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겠지. 후아- 그의 턱을, 제대로 면도가 되지 않은 그의 턱을 만져야만 할 것 같은, 그러니까 '만지고 싶은' 이 아니라 '만져야만 할 것 같은' 충동! 

 

 

 

 

 

 

 

 

 

그들은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만나고 데이트하고 그리고 그들은 그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어쩌면 연애 (혹은 사랑)의 끝일지도 모르는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도 한나와 미카엘이 달콤했다면, 처음 시작처럼 이렇게 두근거리고 설레이는 마음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저 한낱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아모스 오즈는,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결혼은 현실이다, 라는 분명한 명제를 드러낸다기 보다는, 아모스 오즈가 얘기하는 건 결국, 

사랑이든 설레임이든 그게 뭐든, 영원한 것은 없다, 는 것. 인간은 결국은 혼자라는 것. 변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이라는 것. 

그것이다. 

 

미카엘은 여전히 미카엘이다. 미카엘의 손가락도 여전히 그대로 미카엘의 손가락이다. 미카엘의 턱도 여전히 미카엘의 턱이다. 미카엘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미카엘을 마주 보고 있는, 함께 살고 있는 한나의 마음은 변했다. 한나는 조금, 표독스러워졌다. 시간이 변하게 하는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변하지 않는 진리는 그게 무엇이든 '변한다'는 것이다.  

 

 

   
 

난 당신과 함께가 아니에요. 우리는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p.289) 

 
   

 

이 소설은 아주 말랑말랑하게 시작한다. 두근거리게 시작한다. 마치 내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쿵쿵거리면서. 그러나 이 소설은 점점 쓸쓸해진다.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어, 사랑이란 게 고작 이런거라니까. 그 쓸쓸함은 눈물을 흘리고 싶은 쓸쓸함은 아니다. 그보다는 입꼬리 한쪽을 치켜 올리며 피식, 웃게 되는 쓸쓸함 쪽에 가깝다. 그치, 영원한 건 없으니까, 하는. 

 

가끔 소설이 가져다주는 가장 완벽한 느낌은,  그것이 주는'현실성'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허구의 이야기이고, 만들어진 캐릭터였어도, 그 속의 삶은 정말 존재하는 진짜 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 그 안에 들어있는 달콤함과 쓸쓸함이 사실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렇기에 읽으면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것.  

여자에게 완전한 나이란게 있을 수 있을까? 여자는 언제나 지금의 나이가 아닌 다른 나이를 꿈꾸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미카엘]을 읽는 것은 삼십대가 가장 완전하다. 이십대는 뒤편의 쓸쓸함을 무시하기 쉽고, 사십대는 앞편의 살랑거림을 놓치기 쉬울테니까. 삼십대는 설레임과 쓸쓸함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이 책을 읽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나이대다. 나는 내가 이 책을 삼십대에 읽었다는 것이 아주 만족스럽다. 이십대에 읽었다면 별을 세개나 네개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삼십대에 읽었기 때문에 별 다섯을 줄 수 있었다. 온다 리쿠는 [밤의 피크닉]에서 '요는 타이밍이지' 라는 말을 했었는데,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보다 사랑을 잃는 쪽이 훨씬 낫다.
그런 오래된 격언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덧없는 위로, 허무한 지혜
.(하권, p.191)

 

그냥 갑자기 생각났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보다 사랑을 잃는 쪽이 훨씬 낫다. 아..가슴 시려. 

 

웬디양님, 지난 생일 축하하고 앞으로의 생일도 계속 축하해줄게요. 나는 웬디양님의 마흔에도, 쉰에도, 예순에도, 일흔에도, 그리고 그 뒤의 모든 생일을 계속 축하해주고 싶어요. 가까이에서.  

그리고 웬디양님, 쑥스럽지만, 잘 말하지 않는 단어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이 말하고 싶어졌어요. 

 

>> 접힌 부분 펼치기 >>

 

 

진짜에요. 이 감정은 살아있어요! ㅎㅎ  

 

따뜻한 커피가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계절이 왔다. 

 

아, 잊을 뻔 했는데,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성의 신체부위는 날 바라보며 웃어주는 그의 눈동자다. 식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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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9-2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이거 정말 오로지 웬디양님 한 사람만을 위한, 와닿습니다. 그래서 내가 젤 먼저 댓글 다는 게 왠지 미안;; ^-^

다락방 2010-09-29 09:48   좋아요 0 | URL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랑 같이 인터넷을 떠돌고 다니는 치니님 ㅎㅎ
에이, 뭐가 미안해요. 나와 웬디양님은 언제나 오픈된 마음을 갖고 있어요. 닫고 싶은 사람을 향해서는 빼고. 히히

치니 2010-09-29 10:00   좋아요 0 | URL
이것 봐요, 내 글 밑에 웬디양님 글이 올라오니까 아무래도 웬디양님만을 위한 페이퍼에 김칫국물 튀는 거 같잖아요. 으헝. 지우까 마까 막 고민. ㅋㅋ

다락방 2010-09-29 10:07   좋아요 0 | URL
지우지마요, 치니님! 지우면 나 진짜 치니님 미워할거에요!! 그리고 라면국물 보다는 김칫국물 쪽이 이백배쯤 낫잖아요!

웽스북스 2010-09-29 10:16   좋아요 0 | URL
지우면 치니님 미워할거에요!!! 2222222
저 김치국물 좋아해요

다락방 2010-09-29 12:40   좋아요 0 | URL
김칫국물에 밥 비벼 먹어본 적 없다면 감히 김칫국물을 논하지 마요!

웽스북스 2010-09-29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감동이에요 ㅜㅜ

[나의 미카엘]을 읽는 것은 삼십대가 가장 완전하다. 이십대는 뒤편의 쓸쓸함을 무시하기 쉽고, 사십대는 앞편의 살랑거림을 놓치기 쉬울테니까.

라는 추천, 너무 좋아요. 이 문장 때문에 제가 삼십대라는 게 기뻐졌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전 아무래도 복이 많은 사람인가봐요 :) 나만을 위한 페이퍼도 받아보고 ㅜㅜ

다락방 2010-09-29 10:08   좋아요 0 | URL
책까지 슝- 하고 보내줄까 하다가, 그럼 내가 너무 멋지니까, 그럼 나한테 홀랑 빠질테니까, 그건 안할라고요. ㅎㅎ

웬디양님 복 더 많이 받아요!!
:)

비로그인 2010-09-2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편의 살랑거림을 놓칠 수 밖에 없는 저는 이 글에 서글퍼져서...흥~

다락방 2010-09-29 10:09   좋아요 0 | URL
으응? 서글퍼하지 말아요, 마기님. 놓치기 쉽다는 거지 반드시 놓친다는게 아니잖아요!
:)

2010-09-29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09-2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장바구니에 넣어요.
앞쪽의 살랑거림을 놓칠까 우려되지만~~~

아아아아아~좋아요.

다락방 2010-09-29 12:3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아아아아아~ 좋아요라니. 아, 양철나무꾼님의 아아아아아, 가 너무 좋아요!!
이 책 저는 참 좋았어요, 양철나무꾼님. 앞쪽의 살랑거림을, 그러나 양철나무꾼님이라면, 놓치지 않으실거에요!!

nada 2010-09-2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좋겠다. 이런 페이퍼 받으시는 분은.
락방님은 세상 모든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세요. :)

다락방 2010-09-29 12:40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책은 특별하니까요, 꽃양배추님.

(특별하지 않은 책은 빼고요! ㅎㅎ)

moonnight 2010-09-29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책부터 보관함에 넣고 ^^
웬디양님 너무 기쁘시겠어요. (스리슬쩍 다락방님께 얹혀서;;;) 생일 축하드려요. ^^
저도 다락방님처럼 섬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점점 더 책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읽어나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아쉬워지거든요. 이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흑흑. -_ㅠ;;;;;

다락방 2010-09-29 13:01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나잇님 막 한달 결산 하셨잖아요. 저는 그때 문나잇님 페이퍼에서도 많은 책들을 보관함에 넣어두고 읽곤 했는데요. 지금 딱 기억나는 건 수 몽 키드의 [인어의자]네요. 그 책 읽으면서 수도사가 섹시하구나, 이런 생각했었는데. 그때처럼 한달 결산 해보시는 건 어때요, 문나잇님? 저 그 페이퍼 좋아했어요, 정말!!

나의 미카엘이라면, 문나잇님도 정말 좋아하실거에요!!

poptrash 2010-09-2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리언 달라 베이비 보셨어요? 전 이 소설을 보면서 그 영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한 소녀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권투선수가 되어 점차 성장해나가는 조금은 뻔한, 그렇지만 언제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가, 같다가, 같다가... (사실 절반 정도는 온전히 저 이야기가 맞아요.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나의 미카엘을 보면서 가장 좌절했던 건 아모스 오즈가 남자라는 사실. 말이 되는 겁니까 이게?

다락방 2010-09-30 08:34   좋아요 0 | URL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안봤어요. 지루하지 않은가요, 그 영화? 볼래요, 봐야겠어요. 볼게요!

아모스 오즈가 남자라는 사실은 정말 말이 안되죠, 안되고말구요! 표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당연히 여자작가가 쓴거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정말 그래요.

그런데, 볼은 좀 가라앉았어요?

비로그인 2010-09-2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긴 속눈썹과 긴 다리를 봤어요. 봐버렸어요.

다락방 2010-09-30 08:34   좋아요 0 | URL
나는 눈동자를 코를 입을 뒤통수를 손을 봤어요. 봐버렸어요.

... 2010-09-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러니까 저는 완전해 지기 위해서 <나의 미카엘>을 읽어야 겠습니다! 그러나 심정적으론 여전히 이십대인 제가 뒤쪽의 쓸쓸함을 놓칠것 같군요, 하핫 ^^;;
"당신의 눈이 아름다운 건 그 눈이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예요"란 진부한 대사를 이야기하려니, "내 눈이 아름다운 건 바로 당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했던 것도 같네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생각이 안나요. 엉엉.
날씨가 부쩍 쌀쌀해졌기 때문이예요.

글쎄 말이죠, 제가 이 페이퍼를 읽고 감동받아 땡스투를 한 후 <나의 미카엘>을 장바구니로 밀어넣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책장을 보니 떠~억 꽂혀있네요. 저는 저 책을 대체 언제 샀던 걸까요?

다락방 2010-09-30 08:3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내 눈이 아름다운 건 바로 당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죠'가 맞는 것 같아요. 어디 나왔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ㅎㅎ

나의 미카엘은 브론테님이라면 읽으셨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 읽으셨군요. 저는 정말이지 완전 엄청나게 좋았어요. 글쎄요, 브론테님이 그 책을 언제 사신걸까요? ㅎㅎ
저는 집에 나쓰메 소세키 책이 [그 후]며 [도련님]까지 있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네요. 도련님 살라고 했는데.. ㅎㅎ


추워요, 브론테님.

춘희 2010-09-3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후반부, 196페이지 정도에 가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전 거기를 정말 좋아해요.

다락방 2010-09-30 12:49   좋아요 0 | URL
오늘 퇴근후에 집에가면 이 책의 196페이지를 펼쳐 읽어보겠어요!

2010-09-30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다니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했는데, 그 때 내가 맡은 역할은 동박박사3 이었다. 아주 작은 교회였고, 나는 그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또 꽤 수줍음 타는 아이었기 때문에, 더 큰 역할이 주어지지 않은것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박박사3은, 아기예수가 태어났을 때 찾아가서 선물만 주면 되는 역할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늘 연극연습을 하러 교회에 갔는데, 공연을 며칠앞두고 마리아 역을 맡았던 6학년 언니가 마리아 역을 하고싶지 않다고 했다. 그 언니가 동방박사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마리아 역을 단순히 하기 싫어했던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국 그 언니와 나는 갑작스레 역할을 바꾸게 됐고, 나는 6학년 H 오빠를 남편, 요셉으로 둔 마리아로 분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 오빠와 좀 친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러니까 연극 당일,  평소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어른들까지 불러모아 연극을 무사히 마친 그날 밤에, 연극 후 예배를 보기 전의 그 약간 소란스러운 틈을 타, 3학년 남자아이 한명이 누나, 이러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전해주었다. H 형이 누나 주래, 라는 말과 함께. 나는 어 그래? 하며 카드를 막 열어보려는데, 6학년 언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야, 걔가 준거야? 우리는 못 받았는데? 카드 받은 여자는 너 뿐인것 같아, 열어봐 열어봐 등등. (시끄러워..) 그런데 카드를 열자 이렇게 써있었다. 

소라에게. 

 

내 이름은 소라가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소라가 아니었다. 나는 대수롭잖게, 어, 카드를 잘못 보냈네 나는 소라가 아닌데. 소라한테 가야 할 카드가 나한테 왔네 싶어 다시 봉투에 카드를 넣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6학년 언니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야 소라래, 소라. 소라 아닌데. 하면서. 나는 H 오빠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오빠, 나 소라 아니야. 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내 자리로 갔다. 그리고 엄마 옆에 앉아 예배를 볼 준비를 하는데, 그 작은 교회안이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나는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곳을 둘러보니, 오, H 오빠였다. 그가 울고 있었다! 으응? 왜 울지? 

 

그 때, 옆에서 그 오빠를 달래주시던 선생님 한분이 나를 손짓으로 부르셨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서 왜요? 이 오빠 왜 울어요? 했더니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구석으로 가시며 조용히 얘기해주셨다. 

H 가 너한테 카드보냈는데 이름이 잘못 써져 있었다며? 네. 나한테 네 이름을 묻길래, 쟤 장난이 심한 아이니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싶어서 일부러 잘못 알려줬거든, 소라라고. 아, 네... 카드를 쓸 줄은 몰랐어. 네. 카드 들고 와서 니 이름이 소라가 아니라며 막 울기 시작했어. 아..........  니가 가서 괜찮다고 좀 달래주면 안될까? 네? 나는 울고 있는 오빠에게 가서 오빠 괜찮어, 울지마. 라고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 엄마랑 연극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 오빠에 대해 얘기했더니 엄마는 깔깔 웃으시며, 너 벌써부터 남자를 울리는구나, 하셨다. 어, 내가 남자를 울렸어. 뭐, 그게 그게 아니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말은,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몬터규가 뭔데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에요. 오, 다른 이름 가지세요!
이름이 별건가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다른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 날 겁니다.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황벽성을
유지할 거에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이름이 별거 아닌게 아니라는 거다. 이름이 별건가요? 라고 묻는 순간, 줄리엣은 이미 로미오의 이름이 주는 고통을 깨닫고 있었다는 거다. 이름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왜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라고 말하겠는가. 장미라 부르는 건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장미의 향기는 날 테지만, 장미의 향기가 나는 걸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장미는 더이상 장미가 아닌게 되잖아. 이름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이름은, 

특.별.하.다. 

고스란히, 온전히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이윽고 우편함 중에서 '가와나' 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아오마메 주위에서 모든 소리가 일시에 사라진다. 아오마메는 그 우편함 앞에 우뚝 선다. 주위의 공기가 갑작스레 희박해지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입술은 벌어져 가늘게 떨린다. 그대로 시간이 흘러간다. (중략) 하지만 아오마메는 그 우편함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낼 수가 없다. '가와나'라는 한 장의 작은 이름표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몸을 얼어붙게 한다. (pp.504-505) 

 

 

 

누군가의 이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그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줄 알기 때문에. 혹은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헤어진 옛 연인의 이름을 보는것이 고통스러워 메신저에서 그 이름을 삭제시켰었고, 그 이름으로 오는 메일을 여는 것이 두려워 메일주소에서도 차단시켰었다. 그 이름은 내게 의미가 있으니까.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메신저창에 로그인이든 로그아웃이든 누군가의 이름을 볼때마다 떨린다. 그냥 이름인데. 고작 이름일 뿐인데. 간혹 손 끝으로 모니터에 드러난 그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짚어보기도 한다. 마치 손끝에서 그 사람을 느낄 수 있을것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그 이름에 손을 댄 순간 내가 느끼고 싶은건 모니터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다. 물론, 그 이름이 잘 생겨서도 아니다. 나는 온전히 그 누군가를 느끼고 싶었던것 뿐이다. 그 이름을 가진 그 누군가를. 

 

언젠가 예쁜 여자후배와 밥을 먹으면서 나 참으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라는 말을 꺼낸적이 있다. 후배는 언니, 그 사람 이름은 뭐에요? 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 싫다고 했다. 그 이름을 말해주기 싫다고. 왜요? 나는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너무 궁금한데요? 나는 싫어, 내가 말하는 거랑 니가 듣는거랑 같지 않으니까.  라고 얘기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만 알고 싶다. 물론, 그 이름은 세상 누구에게도 불려질 이름이지만, 그 사람이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계속 그렇게 누구에게든 불려질테지만, 내가 부르는 이름은 그들이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이런 마음은 마누엘 푸익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에게서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거야. 내 마음속으로 말이야.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날 위해서 이름만은 안 돼. 그걸 말할 수는 없어......」 (p.86)
 

 

 

 

 

 

 

출근길에 아오마메가 덴고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성이 마비되는 걸 본 순간, 이름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졌다. 당신의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도 얘기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H오빠는 내게 다시 카드를 줬다. 추우니까 내 잠바 입어, 라고 말하면서 카드를 잠바에 감춰서 줬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혼자서 읽어, 라고. 나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들어가 혼자 앉아 카드를 읽었다. 누구나 봐도 괜찮을 내용, 그러니까 정말이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름 잘못 알고 보낸것 미안해, 크리스마스 잘 보내.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러나 카드에는 또박또박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며칠 후, 해가 바뀌면서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오빠는 중학생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더이상 H 오빠를 볼 수 없었다. 그 쪼끄만 교회, 나눌 게 뭐 있다고, 오빠는 중등부 예배에 참석해야 한단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그만뒀다. 내 신앙은 사실 고작 그만큼이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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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9-2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이야기는 정말 동화 소재거리여요.
"이 오빠 왜 울어요?"
라고 묻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 앞에 막 보여요.

다락방 2010-09-29 09:25   좋아요 0 | URL
hnine님, 지금 그렇게 어쩌다 보니 시를 쓰시게 된 것 처럼, 동화 한 편 써주세요. 제가 아주 좋아라 하며 읽을게요. 눈 앞에 막 보이는 여자아이의 얼굴은 어떤가요, 예쁜가요? 전 예쁜 아이었어요(라고 과거형으로 얘기한다).

moonnight 2010-09-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학년이면 제법 어른스러운 척 할 나이인데 다락방님이 카드를 돌려주었다고 울음을 터뜨리다니, 그 오빠는 참 순수하고 착했었나봐요. 그리고 다락방님을 참 많이 좋아했었나봐요. 예뻐요. 다락방님의 추억들은. ^^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같은 이름이 언급되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식은 땀이. ;;;; 누군가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름을 부른다. 하는 건 정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10-09-29 09:26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이름은 아주 특별하죠? 같은 이름이 언급되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맞아요, 맞아요. 문나잇님은 역시 알아주는군요! 이름을 부른다는건 정말 큰 의미가 있어요.

찌질한 고백을 하자면, 저는 다른 여자가 제가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을 때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은 경험도 했어요. 그런 제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싫었지만요.

2010-09-28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0-09-2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살았다.
유난히 맛없는 밥을 먹다 반찬 떨어트려 옷을 버리고 물을 마시다 또 옷에 쏟고 심지어 화장한 얼굴에도 튀고..
괜찮아졌어요. 정말 나 괜찮아졌어. 다락방.

다락방이 날 살렸어. ♡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김춘추의 시'꽃'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건 어쩌면 지금이 가을이라서..

아.. 좋다. :)

다락방 2010-09-29 09:29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그 시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부르는게 싫어요. 다른 사람에게도 꽃이 될까봐. 나에게만 꽃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훌쩍.

가을은 가을인가봐요.
:)

마노아 2010-09-28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이 가을 날에 꼭 어울리는 글인 걸요. 그림이 그려지게 글을 쓰는 탁월한 재주. 무엇보다 감성을 울려서 좋아요. 그 순진한 H오빠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그이도 다락방님을 가끔 떠올리지 않을까요?

다락방 2010-09-29 09:33   좋아요 0 | URL
글쎄요, 기억이나 할까요? 전 기억력 젬병인 남자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어쩐지 화낸다 ㅎㅎ)
그리고 저한테 인상 깊었던 일이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가끔 떠올리려나, 글쎄요. 저도 이런 해프닝은 다 기억나지만 사실 그 오빠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주근깨가 있었다는 것 밖에는. 헤헷

nada 2010-09-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말하는 거랑 니가 듣는 거랑 같지 않으니까, 라니!
정말이지 대단한 성찰인걸요.
오, 전 락방님을 좋아하고 사랑스러워하고 얼마쯤 질투하지만
오늘은 존경하고 싶어졌어요!

다락방 2010-09-29 09:34   좋아요 0 | URL
오, 저를 얼마쯤 질투하나요? 대체 왜요? 무엇때문에요? 꽃양배추님처럼 미치도록 글 잘 쓰는 사람은 대체 어떤걸 부러워하나요? 꽃양배추님의 글빨이야말로 거의 세계최고수준이잖아요!!

대단한 성찰이라뇨, 별 말씀을.
:)

stefanet 2010-09-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글이네요.
늘 서재 들락거리며 글 훔쳐보고만 있었지 댓글 한 번 안달았는데 이 글 보고는 꼭 잘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

다락방 2010-09-29 09:36   좋아요 0 | URL
와, 고맙습니다, stefanet 님!!
잘 읽어주셔서, 그리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셔서요. 이렇게 낯선 닉네임을 뵙게 되니 설레여요. 뭔가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막 솟아납니다.

커피 드셨어요? 저는 이제 막, 한잔 다 마셨어요.
:)

... 2010-09-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다락방님은 점심먹고 나면 이런 멋진 글을 쓰실 수가 있으신 거로군요! (글 올린 시각 13시 32분 ㅋㅋ) 동감 천만번 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특별해요, 그렇구 말구요.
근데 태그에 동방박사3은.... ^^;;

다락방 2010-09-29 09:37   좋아요 0 | URL
전 밥만 먹이면 아주 순해져요. 포악해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기본적인 욕구만 채워주면 아주 부드러운 여자가 되요. ㅎㅎ 예전에 사귀던 남자한테는 소리지른 적도 있어요. "나 밥 좀 먹이란 말야!" 하고요. ㅋㅋㅋㅋㅋ 밥은 참 좋아요. 쓰잘데기 없는 놈씨들보다 밥이 훨씬 좋아요. 정말로요.

음..근데 왜 밥 예찬론을...

누군가의 이름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특별하죠. 정말 그래요!!

네꼬 2010-09-2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성탄절 연극 때 '불량소년 3'이었어요. 성당 가겠다는 애 꼬드겨서 오락실 가게 하는. 남자 역할 맡아서 되게 재밌어 했는데.. 음, 그건 딴소리고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 부분은, [Go]에서도 멋있게 인용되잖아요. (책에서도 그랬는진 생각 안 나는데 영화에서는, 친구가 죽고 나서 주인공이 혼자 만담 극장에 가 훌쩍이며 그 말을 되새기는데...) 으응...?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지? 다락님은, 다락님이어서 좋아요. 어려서부터 남자를 울린 다락님. 그럴 줄 알았어.

다락방 2010-09-29 09:38   좋아요 0 | URL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를 말하는 건가요? 난 그거 엄청 울면서 읽었는데, 왜 저부분이 인용된 건 전혀 생각이 안날까요?
네꼬님은 불량소년 3이었구나. 나는 동방박사 3. 우리는 그렇게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 아이들이었나봐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나봐요. ㅎㅎ

어려서부터 남자를 울린 다락방은, 커서도 남자를 울렸을까요, 안울렸을까요? ㅎㅎ

머큐리 2010-09-2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난...왜 초등학교 때 여자에게 처음 받은 카드가 장난과 욕설이 뒤범벅 되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카드였던 것일까요?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원래 그리 사악(?)한 것일까요? 왜 락방님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없는거냐구요..ㅎㅎ

다락방 2010-09-29 09:40   좋아요 0 | URL
사악...장난과 욕설이 뒤범벅 된것이 그 여자아이에겐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뭐, 저는 그런 적 없지만. 갑자기 6학년때 남자아이에게 받은 편지가 생각나네요. 너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 라고 쓰여있었던. ㅎㅎ

머큐리님, 제가요 글쎄, 남동생이 초등학교때 받은 편지를 읽어봤거든요. 저랑 5년차이가 나는데요, 글쎄 초등학생이 이렇게 썼더라구요. "니 생각 때문에 수업시간에 집중이 안돼!" 와- 정말 엄청나게 조숙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이보다 더하겠지만 말입니다. ㅎㅎ

poptrash 2010-09-2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n't wanna fake it
너를 알게 된 후 매일 기다린 phone call
I got to make it 어느새 알게 했어
매일 같은 식 또 아직 먼 듯한 내일 ahh
그렇다면 take it
아주 조금만큼 뭐든 되고픈 현실

너를 알게 된 후 매일 달라진 Fine Days

- 보아, My Name

다락방 2010-09-29 09:41   좋아요 0 | URL
아니 근데 요즘 왜들은 왜이렇게 노래에 영어를 넣고 난리래요, 난리가. 지들도 가사 뜻 알고 넣는거야 뭐야..(화낸다)

보아의 노래 밀키웨이 알아요, 팝님? 그 노래는 불후의 명곡이에요! ㅎㅎ

비로그인 2010-09-2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아름다운 추억이예요.
난 4학년 때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로 '허슬부'에 들었거든요.
알죠, 허슬?
뭐 에어로빅 비슷한거요.
밤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다가 정전이 한 번 되었어요.
그러더니 자꾸 불이 꺼지는거예요.
엥~~몇 번 꺼지더니 누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가 가버리대요.
나중에 알았어요.
좋다는 말은 못하겠구 정전을 핑계로...푸히히~~
나도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둔 관계로 스토리는 거기서 끝이지만...그놈하고는 지금도 성당에서 마주치는데 ㅋㅋ쫌 어색해요.
어쨌거나 어릴 때 그런 추억은 참 좋아요.

지나간 사랑타령은 언제까지 할거예요?
현재진행형 좀 중계해주면 안되겠어요, 응?

다락방 2010-09-29 09:42   좋아요 0 | URL
오와, 교묘한 남학생이었군요. 정전을 핑계로...ㅎㅎ 에이, 마기님 짝사랑만 한거 아니라 짝사랑을 받기도 했었네요, 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짝사랑 대상이었을 수도 있는거에요.

현재진행형은 중계할 수도 없고, 중계할 것도 없네요. 또 한 2년쯤 지나면 어떤 말을 쓰게 될지 모르지만. ㅎㅎ

차좋아 2010-09-2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샥~~ 읽고,
프린트해서 천천히 읽었어요.
원래 샥 읽고는 휙 가는데...

보통 H들이 좀 멋지지요.


다락방 2010-09-29 09:43   좋아요 0 | URL
으응? 왜 프린트까지. ㅎㅎ 쑥스럽게. 난 누가 내 글 프린트 해서 읽었다고 하면 완전 쑥스러워가지고 몸이 막 베베 꼬여요. ㅎㅎ

보통 H 들이 좀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윤종신의 노래가 생각나네요.

H 에게..

2010-09-28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