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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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의 오스트리아, 아빠도 오빠도 죽고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모시며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난에 허덕이며 근근이 먹고 살고 있고 크리스티네의 삶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스위에서 놀러오라는 이모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젊은 시절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다가 그 관계를 정리하며 큰 돈을 받고 미국으로 가 정착했던 크리스티네의 이모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니가 그립고 한 번도 본 적없던 조카를 보고 싶어 자기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호텔로 초대한거다. 제대로된 옷한벌 없는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두고 가도 될까 걱정하지만, 크리스티네의 엄마는 적극적으로 크리스티네를 보낸다. 너도 젊음을 즐겨봐, 다른 삶을 가져봐, 엄마에게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봐. 그렇게 크리스티네는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스위스의 화려한 호텔에 도착한다.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꾸만 위축되고 그래서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이모는 이곳에 걸맞는 옷을 사주고 속옷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이렇게 크고 깨끗한 방에서 나같은 사람이 자도 될까, 움츠러들었던 크리스티네는 비싼 옷을 입고 미용실에 가 머리도 다듬으니 한결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차림에 자신감이 생기자 호텔에 머무르는 다른 손님들도 다가와 말을 건다. 자신감 뿜뿜한 크리스티네는 한결 밝아지고 밝아진 크리스티네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구애하는 신사도 생긴다. 와, 이런 곳이 있어, 이런 삶이 있어, 난 여기가 너무 좋아, 짱이야!!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볼품없었는지 잊고 싶고 그리고 들키고 싶지도 않아 사람들이 이모부의 성(family name)으로 자기를 착각하는 걸 애써 수정하지 않는다. 가난한 내 성으로 알려지기보다 이곳에서는 부유한 이모부의 성으로 알도록 두자, 뭐 어때.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이 호텔에 퍼진다. 사실 그녀의 성은 가짜라는 사실이, 아주 가난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금 모습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 물론 거짓을 말한 건 잘못된거지만, 그런 거짓이어야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문화라는 건 제대로 된 것인가. 크리스티네 너무 좋다고 호들갑 떨면서 그녀와 어울리려던 사람들이, 그녀의 원래 신분을 알게 되자 차갑게 돌아서는 건 도대체 왜 때문인가. 호텔에 떠도는 소문을 알게된 뒤 이모는 그러다 자신의 과거까지 밝혀질까 두려워 얼른 크리스티네를 집으로 보내버린다. 크리스티네는 호텔에 떠도는 소문과 그리고 이모가 자신을 보내려고 애쓰는 모습에 절망하며 이모로부터 받았던 옷들을 다 그대로 둔채, 다시 원래의 초라한 옷을 입고 초라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착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신 돌보아주던 이웃집 남자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우체국에서 일해봤자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은 뭘 하든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하며 엄마의 유품을 가져가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게 지긋지긋하다. 분명 저기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아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하고 화려한 삶이 있는지를 분명 아는데, 크리스티네가 아는데, 그 세계에 속해 있었는데, 이제는 근근이 먹고 살아야하는게 너무 지긋지긋하다. 그런 그녀에게는 그렇게 풀지 못한 분노가 쌓여있고, 그녀는 분노에 잠식되어 있다. 그런참에 자신처럼 아니 자신보다 더 분노에 잠식되어 있는 남자, 페르디난트를 만나게 된다. 전쟁에서 두 손가락을 잃고 역시 가난에 허덕이는 남자.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고 결국 가까스로 구해도 언제 짤릴지 모를 삶, 일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 사회는 얼마나 엉망진창인가, 분노에 함몰되어 있는 남자. 너무나 가난하고 그 가난이 세상의 부조리함인것도 알겠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렇게 연인이 된다. 서로의 분노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그녀와 함께 있길 원하는 페르디난트를 보며 나는 크리스티네에게 애원했다. 안돼, 그 손을 잡지마,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의 손을 잡지마, 안돼, 빠져나와. 그러나 크리스티네는 내가 아니고 나는 크리스티네가 아니다.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사실 자신들이 하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밖에 없기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연인의 데이트란 얼마나 비참한가. 이들은 돈이 없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돈이 없다. 처음 성관계를 할 때 들어갔던 모텔이 너무나 후져서 크리스티네는 비참했다. 저기 어딘가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호텔이 있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그런 호텔에서 자신에게 구애했던 남자들은 또 돈 많은 남자들이었는데, 돈 걱정 하지 않고 아무곳이나 들어가고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 그런 남자들이었는데, 지금 여기 이 남자는 누구? 나는 어디?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가난한 우체국 아가씨, 가난한 나라의 소모품 크리스티네를 더이상 화려한 남자들이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가난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그러니 갈 데가 없다. 남자는 자신 혼자 사는 집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라 이들이 주말에 데이트를 하면 까페에 처박혀있기 일쑤다. 이 데이트가 어떻게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생활도 서로도 점점 더 비참할 때쯤, 남자는 심지어 다니던 직장을 잃고 자살을 결심하며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크리스티네를 찾아온다.



부자들의 화려한 휴가와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의 매일의 일을 대비시키며 드러나는 빈부의 격차는 너무나 부조리하다. 왜 어떤 사람은 매일 피곤하게 일을 해도 머물 곳이 없는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돈걱정 없이 어디든 이동하고 또 어디든 머무를까.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페르디난트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런 사회를 몸소 알고 있는 만큼, 언급했듯이, 그는 분노에 가득 차있다. 나는 그의 분노와 크리스티네의 분노는 합당하고 마땅히 그러할만하며 누구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야말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늘 말해오면서, 그러면서도 가난 때문에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마주하고 싶진 않은 거다.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들의 옆에 있으면서 그 분노가 내게 전해질 것이 나는 너무도 겁이 난다. 크리스티네에게 안돼 도망가, 너는 지금 너의 분노도 어쩌지 못하면서 왜 또 다른 분노를 옆에 두려는거야!!



그런 한편, 나는 그동안 내가 강하게 믿어왔던 신념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니까, 경험의 확장은 선인가? 하는 의문.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믿고 살았다고. 그런데 크리스티네를 보자 묻게 되는 거다.


경험의 확장은 과연, 정말로, 선이기만 한가?



크리스티네는 스위스에 휴가를 가게 되며서 경험의 확장을 맞닥뜨린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문화. 내가 와보지 않은 곳이야, 내가 먹어보지 못한 것이지, 내가 놀아보지 못한 놀이야, 나는 한 번도 이런식의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 이 모든 일들은 그녀를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너무 짜릿해!!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와서 와, 그런 세계를 경험했었지, 대단했어, 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는데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이지? 왜 그게 일시적으로만 허용된거지?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가난하지? 왜 비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하며 오히려 분노에 침몰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확장된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내 자신을 절망속으로 더 밀어넣게 되었다면, 경험의 확장은 반드시 선이라고 볼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렇게 더 비참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라는 전제도 너무 엉망진창이지 않나. 



다른 세계가 저기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내것이 될 수는 없다는 부조리함 혹은 기이함. 도시 한 복판에 통유리창 고층 아파트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이십년이상 아무리 일해봤자 그런 집 근처에도 가볼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갸웃함. 확실히 이건 잘못됐다. 이건 이상해. 이상한 게 맞다. 이상한 거 알면서 분노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분노에 잠식당하진 말자고 꼭 당부하고 싶다. 분노는 힘이 세다. 분노에 잠식 당하면 종국에는 분노가 나를 잡아먹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크리스티네 보다 형편이 더 낫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눈감는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신경 쓰는 사람에게 '신경쓰지마' 라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듯,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분노가 널 잡아먹게 두지마'라는 말은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겠지.



아주 좋은 소설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역시 소설 안에 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소설 안에 다 있다. 역사와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소설은 가장 좋은 인문학이다.



"아니야! 다른 일자리는 찾지 않을 거야! 지쳤어! ‘일자리‘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지난 11년 동안 용케도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때마다 간신히 연명만 했을 뿐,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 일자리는 항상 있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지.

나는 4년 동안이나 ‘전쟁‘이라는 살인 공장에서 일했어.

그 후에는 이런저런 공장과 회사를 전전했지.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어. 돈 많은 사업가,자본가, 소유주 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데 내 인생을 허비했어.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나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어. ‘자, 이제 그만 나가! 너는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제 다른 데로 가봐!‘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어. 이제 정말 더는 못 하겠어. 지쳤어, 더는 안 할 거야!"

크리스티네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남자가 여자의말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티네, 또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짓은 못 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절이 예정된 전화를 걸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아침이면 청소부가 쓰레기로 가져가는 이력서와 구직 신청서를 수도 없이 썼어. 이제 더는 못 하겠어.

그나마 입사를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지를 받을 때도 있었지. 대기실에서 나와 똑같은처지에 놓인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비참한 기분으로 앉아 기다리다가 한참 만에야 호명되어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면접실로 들어가면 면접관이라는 자들이 냉랭하고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나를 뜯어보며 앉아있었어. 수십, 수백 명의 지원자가 일자리 하나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면접관이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듯이 내 신청서와 이력서를훑어볼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취직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다른 한편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상점 쇼윈도의 강아지가 되어버린 모욕감 사이를 오가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부 심사를 거쳐 결과는 수일 내에 개별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나 통보는 대부분 ‘애석하게도………‘ 라는 문구가 달린 불합격 통지였어. 나는 취직될 때까지 그 짓거리를 계속했어. 그리고 설령 취직이 되어도 1년 후에는 어김없이 해고되었지. 나는 지금까지 많이 참았어. 전쟁 때에는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신고 러시아의 시골길을 일곱 시간씩 걸어 다녔어. 흙탕물을 마셔가며 어깨에는 기관총을 세 자루나 메고 다녔지.

포로가 되어 빵을 구걸하고, 삽으로 시체를 파묻고, 술에 취한 감시병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어. 한끼 식량을 위해 중대원 전원의 군화를 닦거나, 음란한사진도 팔아봤어. 살아남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그래도 모든 것을 참고 견뎠어. 언젠가는 그 지겨운 신세를 면하고 자리를 잡아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면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밑으로 떨어지기만 해. 요즘은 누구한테 구걸하느니 차라리 때려죽이거나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제 더는 직업소개소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거나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버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안 할 거야.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야. 더는 못 하겠어." -p.368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해요." 여자가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미안하다고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가 대뜸 여자에게 물어보면서 버림받는 자의 절박한 갈망을 감추지 못한 채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망연한 표정으로 플랫폼에 홀로 서서 자신을 싣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한 남자가강렬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의 열망에, 여자는 온몸에 충격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대단한 느낌이었다. 이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서 사랑받게 된것이다. 불현듯 남자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섬광처럼 빠르게 결심했다. 충동적으로 마음을 바꾼것이다. 여자는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뛰었다. - P324

그리고곰곰이 생각하듯 말했다(하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속으로결정한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저어…………. 당신과 같이 있어도 될 것 같아요. 내일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새벽 열차를 타고 가면 되거든요. 그러면 형편없는 제 직장으로 늦지 않게 출근할 수있어요."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처음 알았다. 마치어두운 방에서 성냥불이 타오르듯이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여자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남자가 돌연 용기를 내어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가지 마세요.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요." - P325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남자가 여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신경쓸게. 당신이 아직도그 일로 마음을 닫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잘못이아니잖아."
"맞아."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듯 씁쓸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 잘못일까? 왜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 일이생기는 거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누구한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우리가 한 걸음만 움직여도 세상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우리를 괴롭히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아무것도 요구한적이 없었어. 난생처음 휴가를 갔고, 남들처럼 자유롭고가벼운 기분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고 싶었어.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남자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여자를 달랬다. - P350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잖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경찰은 범인을 찾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그 호텔에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나도 알아, 안다고. 운이 나빴을 뿐이지. 하지만 거기서 일어난 일………… 당신은 이해 못 해, 페르디난트, 당신은 몰라.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처음 밤을 보낼 때 무엇을 꿈꾸는지,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나이 든 여자든 어린 소녀든 마찬가지야. 누구나 그런 꿈을 꾸지.
당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야.
여자들은 누구나 그 순간을 성대한 축제와 같은 것으로상상하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로 여긴다고. 어쨌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기억이 여자로 하여금 세상의 온갖 의미 없는 것들을 극복하게 해주는힘이 되는 거야. 오랫동안 당신도 그런 순간을 꿈꾸고 상상했을 거야. - P350

아니, 당신은 절대로 상상하지 않았을거야.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
그저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막연히 꿈꾸었을 거야. 그런데 그 꿈이 내게는 몹시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고,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어. 당신은 그 꿈이 무너졌을 때 어떤 기분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 꿈이 무너지거나 더럽혀진다면, 아무도 되돌릴 수 없어."
남자가 여자의 손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여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지저분한 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결국 돈이 문제야. 구역질나고 더러운 돈. 그 치사한 돈 말이야. 돈만 있었다면, 지폐 두세 장만 있었다면 나도 축복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거야.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겠지. 아무도따라올 수 없는 곳에서 혼자 자유롭게 마음껏 여행할수 있을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인생일까. 당신도 마찬가지지. 돈만 있다면, 당신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 P351

우리 같은 사람들은정말 개 같은 신세야. 다른 사람들이 쓰던 더러운 방에기어들어 갔다가 내쫓기듯 나왔잖아. 아아, 이렇게 참담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여자는 얼른 덧붙였다.
"알아, 당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서워. 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이해해줘야 해.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오늘 돌아갔다가 다시 나를 보러 올 거지?"
남자의 물음에 배어 있는 불안감을 감지하고 여자는기분이 풀렸다. 남자가 처음으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래, 다시 올 거야, 믿어도 돼. 다음 주 일요일. 다만, 알지? 제발 그것만 부탁해." - P351

여자가 떠났다. 남자는 역 구내식당으로 들어가 브랜디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바싹 말라버린 목구멍으로넘어간 브랜디가 뜨거운 흔적을 남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를 이제야 다시 움직일 수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두 팔을 휘두르며도로를 따라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행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공사장에서 일하러 갔을 때에도 인부들은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전에는 언제나 얌전하고 조용했던 그가 걸핏하면 화를 내고늘 언짢아 보였기 때문이다. - P353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따라서 돈은 ‘자유‘라는 거룩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분노가 솟구치게 한다. 이른 아침 어둠 속에 앉아 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볼 때나, 황금빛으로 물든 커튼이 돈 많은 사람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부유한 남자들은 원하는 여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커튼이 쳐진 방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갈 곳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연계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내포하고 있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었다. 바다는 엄청난 양의물을 가지고도 사람을 갈증으로 죽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아늑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폭신한 침대가 있는 조용하고 안락한 방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 P356

수십만, 수백만 개의 방, 셀 수도 없이 많은 방, 아무도 사용하지않거나 비어 있는 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 방 한 칸이 없었다. 잠시 서로 기대거나 입을맞출 공간이 없었다. 온종일 쏘다니며 느꼈던 미칠 것같은 갈증과 분노를 풀어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고 자신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카페에 앉아 신문 구인 광고를 읽거나 구직 신청서를 썼고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전망을여자에게 들려주었다.
"전쟁 때 만난 친구가 꽤 큰 건설회사의 관리직으로일자리를 구해주기로 했어. 그 회사에 다니면 돈을 많이벌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내 꿈이었던 건축사가 될 수 있겠지." - P357

여자도 이야기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빈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본청에 전근신청을 냈어.
그리고 힘을 좀 써달라고 삼촌을 찾아가 부탁도 했으니까 1, 2주 후에는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올 거야." - P357

"솔직히 말해봐 우리 만남에 무슨 의미가 있어? 둘이 추레한 행색으로 거리나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잖아. 서로 도움도 되지 못하고, 서로 거짓말이나 해야 한다면 네 마음도 아프잖아. 우리가 그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에게 희망이란 게 있어? 내 나이지금 서른이야. 그런데 원하는 일을 할 기회가 없어. 늘 취직했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 달이 1년처럼 느껴져.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어. 사람답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저 ‘나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내 인생을 시작하는구나.‘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내게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는 끝났어. 이제는 일어설 수가 없어. 당신도 앞으로 나 같은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 해.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해. 당신 언니가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내가 프란츠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지. - P371

지금은 내가 당신의 마음마저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긴장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지팡이 끝으로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리고마치 온몸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크리스티네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맞아." 남자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난 지쳤어.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끝내고싶어. 러시아에 있을 때 전우 넷이 그 길을 택했지. 순식간이었어. 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 친구들의 행복한 표정을 봤어. 어렵지 않아. 이토록 힘들게 살기보다 훨씬 쉬워!"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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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3-06-01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로 읽었는데 원제가 그대로 제목으로 번역되어 새로 나왔군요. 이 원제가 더 나은 듯.. 와 저 이거 읽을 때 제목과 책의 1부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랑 2부때랑 너무 달라서 괴리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같은 책 맞냐며.. 크리스티네 자체도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아니었어서 정말 마지막 부분은 괴롭게 읽었었네요..

다락방 2023-06-01 12:16   좋아요 2 | URL
이 책이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인줄 모르고 제가 있는데 또 사지 않았겠습니까? 에휴..
맞아요, 1부에서는 이 아가씨야 그러지마, 변신에 도취하지마! 막 이렇게 되었다가 2부에서 분위기 급반전 분노 팡팡 터지는데 와.. 저도 너무 괴로웠어요. 일하는 것도 괴롭고 버티는 것도 괴롭고 그러나 그들의 결심도 괴롭고 말이지요.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너무 싫었네요 ㅠㅠ

잠자냥 2023-06-01 10: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원작에 비할 만큼 아주 좋은 리뷰입니다!
경험은 늘 선인가.... 이건 저도 회의적인데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스티네의 경험 같은 것에서도 분노만 하기보다는 그 분노를 조절할 줄 알거나 분노 외에 다른 것을 이끌어내는 능력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부장님이나 저나 계속 월급쟁이로 살면서 다달이 떼가는 세금 이 정부 들어 더 올랐어?! 근데 고소득자들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분노 이글이글.........그런데 그 분노에 잠식당하면 답 없어요... 분노는 하지만 분노만 하고 있지 말고 그러니까 투표로....(님들아 제발 제대로 투표해... ㅠㅠ) 아니면 그 분노를 다른 식으로 돌리거나... 뭐 이런 거요.
페르디난트랑 사랑에 빠질 때 저도 아이구 이 아가씨야 도망가, 했답니다.

좋은 소설은 정말이지 가장 좋은 인문학입니다.
부장님 오늘 세 가지 메뉴 드세요~ ㅋㅋ

다락방 2023-06-01 12:15   좋아요 6 | URL
네, 잠자냥 님. 분노 외에 다른 걸 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도 그렇게 살아주길 바라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른 걸 끌어낼 수 없을만큼 이미 모든 힘을 다 쏟지 않았나, 너무 열악한 환경 아닌가, 그정도도 끌어낼 수 없을만큼 지쳐버린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분노에 잠식당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이게 오히려 저의 오만인것 같기도 하고, 참 여러가지로 복잡합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이게 그러니까 다 이 세상 탓이다!! 이렇게 되면서 세상이 미워지고요. ㅠㅠ

저는 소설을 비웃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얼마나 좋습니까, 소설 말이지요. 츠바이크의 이 소설은 정말 좋았어요!

은하수 2023-06-01 1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 또 저 문장들에 잠식당해요...
모든 문장을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문장들이죠!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ㅠㅠ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럴수가 없었죠 전 그게 너무 이해되니까 저 두 사람을막을수가 없는거 아닐까 생각하게 됐거든요. 사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 이해된다는게 너무 슬프죠!

다락방 2023-06-01 12:12   좋아요 2 | URL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는 문장을 읽을 때, 와 이건 참이다, 이건 사실이다 했어요. 몇 권 안되지만 츠바이크 책 읽으면서 저는 이 책이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음 <연민>도 좋았는데.. 아주 재미있게 그렇지만 답답해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읽었습니다. 크-

은하수 2023-06-01 13:50   좋아요 2 | URL
네... 정말 쵝오 쵝오입니다~~^^
우리 플친님들 다~~ 읽으셔야 해요!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걸까요?

얄라알라 2023-06-05 01:49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서재 플친님들 리뷰를 그토록 기다리셨는데 다락방님께서 드디어^^

한국어판 책 제목이 두가지라는 것도 오늘 알았네요

˝소설 안에 다 있다˝^^

새겨 듣고 갑니다.^^

다락방 2023-06-05 10:09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이 책 참 좋아요.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소설책 안에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거 같습니다. 후훗.

책먼지 2023-06-02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다락방님 이 책을 읽고 이런 명제를 던져주셔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네요ㅠㅠ 저는 20대 후반에 엄청 돈이 많은 사람과 아주 잠깐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갔던 곳들,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향유하는 문화, 사용하는 물건들 이런 거에 엄청나게 주눅들었던 한편으로 그 사람 곁에서 내가 느끼는 세계 외의 다른 건 다 너무 시시하고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거든요.. 그 사람과 다니면 걸을 일이 거의 없었고 무언갈 기다리거나 인내할 필요도 없었고 모든 게 다 편리하고 정돈되어 있고 맞춤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데이트 끝나고 돌아오게 되는 제 현실은 그게 아니니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엄청난 감정의 진폭과 가치관의 혼돈이 왔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과 사귀었던 경험을 여행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경험하고 나왔으면 됐다고 (나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에 저는 내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들켜서 그 사람 세계에서 금방이라도 쫓겨날까봐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렸었어요ㅜㅜ (사귀는 동안 불면증 엄청 심했고 음식 먹는 게 너무 힘들었어서 인생 최저 몸무게 갱신..) 어우 이 책 저는 교보문고에서 츠바이크 이름만 보고 낼름 집어왔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23-06-05 10:13   좋아요 2 | URL
저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설은 저를 반성하게 하는데요,
경험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고 있던 제 신념에 금이 가버렸어요. 저는 회복가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러나 그 회복도 회복가능할만큼의 여건이 있었기에 가능한게 아닌가 싶고요.
제가 몇해전에 한남동에서 콘서트를 보고 당시 애인하고 가볍게 와인 한 잔 하고 주변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가장 저렴한 병와인이 99,000원 이더라고요. 가만있자, 그게 언제인가.. 14년은 아니고 13년도 아니고, 아마도 2012년 쯤이었을텐데요, 와, 제일 저렴한 와인이 99,000원인데 어떻게 마시냐! 이러고 완전 쫄아서 생맥주 두 잔 시키고(그것도 비쌌어요)병아리콩 샐러드 하나 시켜서(그게 제일 거기서 저렴했어요) 먹고 후딱 나가자 했거든요. 그런데 그곳의 모든 테이블에는 다들 병 와인이 놓여있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앉아서 병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다 저희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거예요. 심지어 ‘내일 레포트 제출할 수 있어?‘ 하고 오고가는 대화들에서 대학생인거 다 알겠는데, 직원 부르더니 대리 불렀다고 오면 알려달라고 하고 … 그날 대충격이었어요. 나는 구만구천원 와인 못마시는데, 고개를 돌려 내 애인을 보니 내 애인은 나보다 더 가난해 …
그러나 그런 기억이 있었고 나는 이제 한남동 안간다 어휴 할 수 있는건,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만큼만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아무튼 경험은 선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매우 좋은 책입니다.
책먼지 님이 이 책을 읽고 써주실 감상이 진짜 너무 기대됩니다!!

건수하 2023-06-02 1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지라 반가웠어요.

저는 요즘 다니엘이 부른 <인어공주> OST를 들으며 (예쁜데 노래도 잘하는 다니엘!) 이 만화 내에서 인어공주는 어떻게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궁금해졌어요. 어릴 때 읽은 동화에는 왕자를 구한 후 왕자를 좋아하게 되어서 사람이 되려고 했으나, 요번 OST가사에는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아마 왕자 만나기 전인 거 같은데) 느껴져서요.


‘걸어다니는 걸 뭐라고 불러? 아, 다리‘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가 다리가 없으면 춤도 못 춰‘
‘돌아다니는 곳을 뭐라 그러지? 아, 거리‘


다리, 거리, 춤추는 것.. 모두 알고 있는 거니까. 인어공주는 책을 읽었을까요?


그래서 사람이 사는 세계에 관심이 많았으니 왕자도 좋아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 들으며 별 생각 다함...)


근데..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간다는 건 너무 인간 중심의 생각 같아요. 인어는 바다를 누빌 수 있는데. 지구 표면적만 봐도 바다가 70% 육지가 30% (대략) 인데.. 게다가 바다는 깊은데... 깊은 바다 속을 인간은 보지 못해서 배를 띄우고 뭘 내려보내고 난린데...

그니까,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안다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이 책 읽고 싶네요. (급 마무리)

인어공주 평이 별로 안 좋다던데 엉망인지 한 번 보고 싶기도 하지만... 언제부턴가 영화는 우선순위가 밀려서.. 책만 읽고 있는지라 안 보게 될 것 같네요.

다락방 2023-06-05 10:16   좋아요 1 | URL
수하 님, 차라리 모르면 알고자 노력할 수 있는데 수하님 말씀처럼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아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조금 아는 걸로 안다고 추측하고 함부로 판단하기가 너무 쉬운 것 같아요. 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그건 나쁘다 그러지말자고 결심하고 있지만, 제가 번번이 그것에 성공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도 좋고 책도 좋은데, 그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마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토리와 로키타>를 보고 다시 영화에 대한 사랑에 불붙어서 조만간 또 보러 가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후훗.

수하 님, 여행가셨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습기도 가득 느끼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Falstaff 2023-07-0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책을 신청하자마자 (정말로 한 시간? 아니, 몇 분 안 지나서) 딱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이 됐네요. 아주 기대가 되고 즐겁습니다. 다락방님을 흉내내서..... 그럼 이만... ㅋㅋㅋ

다락방 2024-11-01 22:20   좋아요 0 | URL
폴스타프 님의 리뷰는 제가 잘 읽었습죠!!

얄라알라 2023-07-07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책을 빌려왔습니다^^표지가.얇아서 딱.데리고 다니기 좋은 질감^^설렙니다

다락방 2024-11-01 22:17   좋아요 0 | URL
벌써 일년도 더 전인데 다 읽으셧겠죠?

달자 2024-11-0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이런 후기… 이런 건 유료로 공개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슈테판 츠바이크가 무덤에서도 뿌듯해할 것 같아요…

다락방 2024-11-01 22:17   좋아요 1 | URL
댓글 달려서 덕분에 제가 쓴 글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ㅎㅎ
 

세상에, 6월이 되기 전에 6월 도서를 안내했어야 하는데, 요즘 회사 너무 바쁘고 어제도 갑자기 회의하고 그래가지고 오늘에서야 쓰네요. 여러분, 6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는

 

낸시 레빗, 로버트 베르칙' 의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입니다.

우리 함께 한달 동안 이 책을 읽어보고 틈틈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과 느낌들을 적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 화이팅!! (여러분 이 책 오늘 주문하면 6/7 배송예정 이랍니다. 아직 구입 안하신 분들은 주문 빨리 고고고!!)















아울러, 다음 도서들도 안내합니다.


7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의 《성의 변증법》















8월, '실비아 페데리치'의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9월, '어맨다 몬텔'의 《워드 슬럿》














10월, '레이첼 모랜' 의 《페이드 포》















11월, '마릴렌 파투-마티스' 의 《파묻힌 여성》















12월,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 의 《여전히 미쳐있는》




이 책은 다들 아시겠지만, 《다락방의 미친 여자》후속편 입니다.

2023년 6월 8일까지 북펀딩 진행한다고 하니, 펀딩하실 분들은 고고!!

이 책을 우리 2023년 마지막 함께 읽기 책으로 읽어봅시다.

빠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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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0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에도 제가 생각했던 책이 올라왔군요^^ 바쁜 와중에도 안내 감사드려요. 6월에도 화이팅!

다락방 2023-06-01 09:33   좋아요 1 | URL
우리 같이 읽으라고 또 올해 똭 후속편 나와주시는 센스 어쩌나요. ㅋㅋㅋ 그러면 제가 캐치해줘야죠! 그래, 알았어, 읽어줄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님,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3-06-01 10:12   좋아요 1 | URL
아니 그런데 6월 책 주문했더니 6월 7일에나 온다네요? 저만 그런가ㅠㅠ 주문 안하신분들 얼른 고고하시는 게 좋을듯합니다!

다락방 2023-06-01 10:30   좋아요 0 | URL
아이고 큰일이네요. 그렇게나 늦게 온다니.. ㅠㅠ

햇살과함께 2023-06-01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바쁜신 중에도 안내 감사합니다^^
땡투하고 결제하러 갑니다^^

다락방 2023-06-01 09:34   좋아요 2 | URL
아이고 땡투도 감사하고 그리고 앞으로 함께하게 될 독서도 감사합니다.
같이 한 번 힘내서 읽어봅시다. 빠샤!!

독서괭 2023-06-01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싸! 8월 10월 책 가지고 있고~ 9월 책 읽었고~ 12월 책 펀딩했다!! 저도 하반기엔 꽤 참여할 수 있겠어여!^^

다락방 2023-06-01 10:29   좋아요 3 | URL
오오 참여하시면 우리 또 열심히 읽어봅시다. 그나저나 저는 이제 펀딩하러 가야겠어요. 후훗.

건수하 2023-06-01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12월 책 반갑습니다~ 역시 ^^!
하반기 알차게 읽어봐요!

다락방 2023-06-01 10:29   좋아요 3 | URL
네네 아무래도 마무리를 알차게 해야겠죠? 다락방의 미친 여자도 읽은 우리들이니 후속편도 당연히 고고!!

청아 2023-06-01 14: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항상 고맙습니다^^*
<다락방의 미친여자>후속 완전 반갑네요. 이번달에는 저도 독후감도 쓰고 더 참여해볼께요.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기대됩니다 헤헷

다락방 2023-06-01 14:48   좋아요 4 | URL
미미님, 우리 6월엔 자주 만나도록 합시다. 화이팅!!

우끼 2023-06-01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항상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늦지 않고 저도 독후감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정말 기대됩니다~~222

다락방 2023-06-01 16:30   좋아요 2 | URL
좋아요, 우끼 님! 우리 한 번 열심히 읽고 힘차게 써봅시다. 화이팅!!
 
개 신랑 들이기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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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태어나 유럽,미국에서 살았던 여성들에겐 감히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나 예민함이 있는 것 같다. 그 감각은 차별과 혐오를 더 민감하게 캐치하고 억압을 온몸으로 맞서게 하는 것 같다. 그들이 할 말을 앞으로 부지런히 읽어보겠다. (그치만 똥꼬 핥는 개신랑 싫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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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덴 형제의 <토리와 로키타>는 미성년 난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년 '토리'는 본국에서의 아동학대가 인정되어 벨기에에서 머무를 수 있는 체류증을 받았지만, '로키타'는 체류증을 받기 위한 인터뷰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토리는 심사단에게 '왜 나는 여기 있을 수 있고 우리 누나는 있을 수 없냐' 묻지만, 돌아오는건 '네 누나에게 물어보렴' 이라는 싸늘한 대답이다. 우리 누나와 내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나를 누가 돌봐주죠? 이 커다란 문제 앞에 아무도 답을 주지 않고 시간은 흘러간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화들로 토리와 로키타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밀입국하던 배에서 만나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체류증을 더 쉽게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서 친남매로 지내기로 한 것. 서로에게 서로뿐이었던 만큼 이들은 떨어져 지내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어딜 가든 함께 다니고 앞으로도 함께여야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세상의 어른들이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미성년자 난민에게 너무 가혹하다. 쉼터에서 그들을 돌봐주는 어른들이 있긴 하지만, 벨기에의-물론 벨기에 어른만 그런건 아니겠지- 어른들은 이 보호자 없고 오갈데 없는 처지의 미성년자 난민들을 착취한다. 노동을 착취하고 성적으로 착취한다. 그리고 겨우 벌어들인 몇 푼의 돈도 착취한다. 게다가 이 미성년자들에게 대마초 팔이 심부름까지 시킨다. 거기에서 얻게 되는 돈은 극히 적고, 그러나 토리와 로키타에게 돈은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한다. 또다시 인터뷰에 실패한 로키타에게 마약 판매상 쉐프는 대마초 키우는 컨테이너에서 3개월간 생활하면 가짜 체류증을 만들어주겠다 제안한다. 그곳은 불법이며 드러나서는 안되기에 일단 들어가는 이상 그 안에서 3개월간 갇혀 있어야 한다. 갖다 주는 음식을 먹고 외부와의 연락도 단절된 채로 대마초를 키워내야 하는 것. 내 동생을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는 요구는 묵살되지만 토리는 어떻게든 누나를 만날 방법을 찾아낸다. 물론, 이 어른들에게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에 몰래 이루어져야 하고 몰래 들어갔다 몰래 빠져나와야 한다. 


로키타는 체류증도 필요하지만 돈도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체류증이 필수다. 로키타의 가장 큰, 아니 유일한 희망은, 체류증을 얻어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다. 고향에 동생들이 있고 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하고 그런데 집에 돈은 없고, 여기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데 어떻게든 고향에 돈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민 브로커가 숨어 있다 벌어들인 돈을 착취하는 세상속에 사는 로키타에게, 엄마는 통화할 때면 왜 돈을 못보내냐 너 돈 다른데 쓰냐며 윽박지른다. 도처에 학대하고 원망하는 어른들 뿐인데 이 와중에 로키타를 진심으로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는 토리 뿐이다. 물론 토리에게도 마찬가지. 이들이 그러니 서로와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라는 것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은 과거의 나를 보여준다. 장래 희망이 가사 도우미라고 답을 하는 소녀에게는 어떤 시간들이 그동안 있었던걸까. 어떤 시간들이 로키타에게 있었길래 인생 목표가 가사 도우미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가사 도우미는 로키타의 가장 큰 희망이고 행복의 상징이다. 가사 도우미가 된다면 이 성착취와 노동착취와 불법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브로커의 폭력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감히 과학자나 대통령이나 유튜버를 희망할 수 없는 현재는 그 전의 온통 학대와 가난으로 얼룩진 과거를 반영한다. 내 목표는 체류증 받아 가사도우미가 되는 거야, 라고 말하는 십대의 소녀를 보는 일은 짐작보다 더 크게 가슴을 찌른다. 이 십대 난민 소녀는 모든 어른들에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나 머무를 곳도 돈도 보호해줄 어른도 없는 소녀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항변도 할 수 없고, 하다못해 경찰에 신고도 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삶이 가사도우미인 소녀가 벨기에의 유럽의 하늘 아래서 다른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나는 희망을 바랐다. 어떤 작은 희망이라도 그들을 찾아오겠지. 매 장면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말해주는데도, 그래도 미성년이잖아, 절망만 주지는 않겠지 했는데, 다르덴 형제 할아버지들 얄짤 없으셨네요. 내용 언급 없이 결말을 말하자면 비극이고, 그러나 그것은 현실일 터였다. 그렇다면 현실은 비극인걸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속에는 미성년 난민의 성착취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직접적인 장면 묘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착취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관객은 알고, 충분히 끔찍하게 여길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또다시 잔인한 강간 장면을 묘사하는 다른 많은 영화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장면은 필요했는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능력 부족 아닌가? 다르덴 형제는 그러지 않고서도 이미 충분히 전달했는데?



오늘 아침 읽기 시작한 책은 '조문영'의 《빈곤 과정》이다. 서문부터 좋은데, 나는 이런 구절을 보게 된다.



불안정성에 대처할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은 비합법적 관계망에 연루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낙인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구별하며 스스로 안전고 정상성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서문, p.13











로키타에게 체류증이 있었다면, 대마초를 키우는 컨테이너에 갇히는 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마초를 키우는 일은 합법적이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로키타가 놓여 있다. 로키타에게 돈이 있었다면, 대마초를 키우는 컨테이너에 갇히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키타에게 머물 곳이 있었다면, 돌봐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대마초를 키우는 컨테이너에 갇히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정성에 대처할 자본이 전무했던 로키타는, 비합법적인 일에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연루된다. 



로키타-자본 없는 미성년 난민-를 착취하는 어른들은, 착취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이익을 채웠다. 돈을 벌었고 불법적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얻었고, 성적 쾌락을 만족시킬 수단을 얻었다. 원하는 것들을 더러운 방식으로 다 가지게 됐지만, 그에겐 더러운 방식을 썼다는 일은 남아 있다. 물론 쉐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착취에 가담한 모든 어른들에게는 그런 행위를 한 자신이 남는다. '미성년 난민을 착취한 나' 가 그들 자신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건 보지 않기 때문은 아닐지, 그러니 봐야 되지 않겠냐며, 다른덴 형제들이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네. 그러나 극장에는 나와 친구를 포함 열한명만이 있었다.


가끔, 아니 자주. 제도와 체제와 정치와 기득권이 해야 할 일들을 예술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예술이 해야 할 일도 그것이겠지만, 불안정성에 놓인 자들을 좀 더 안정적인 곳으로 이끌어줘야 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불안정성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본인의 만족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다. 비극이지만, 무겁지만, 어휴 너무 쎈 거 아니에요, 했지만 그러나 좋은 영화였다. 



자, 월요일에 올리지 못한 책탑을 화요일에 올려보자.



















《개 신랑 들이기》는 제목만 보고 선택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상상도 안돼. 그러니까 개 성질 닮은 남자를 들였다는 건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동물과의 섹스를 얘기한건지-그러지마-, 아니면 집에서 키우던 개가 사실은 마법에 걸린 왕자님이었는지... 내가 한 번 읽어보겠다.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는 출간 당시,그러니까 아마도 2016년에 이미 구매해서 읽고 다시 판 책인데, 최근에 이 책 생각이 자꾸 나서 또 샀다. 책을 파는 일은 과연 잘하는 일인가?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는 받아들고나서 앗차 싶었는데, 어쩐지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부터 <산 책> 앱에 정리를 안하고 있거등여? 표지가 너무 익숙해서 아, 제기랄 책장 어딘가에 있는거 아니여.. 싶어졌다. 흑.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어려울 것 같아서, 도저히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내내 미뤄두던 책인데, 얼마전에 북플에 재밌게 읽었다는 평이 올라오길래, 그래? 그럼 어디 나도 한 번? 이러고 샀는데, 사놓고 나니 또 아 역시 나는 안될지도.. 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최재천의 동물대탐험1》은 2를 샀으니까 샀는데, 아직 1도 안읽었다. 흠흠.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읽기 싫은데 읽고 싶다. 뭔지알쥬? 모르고 싶은데 모르면 안될것 같다. 흑 ㅠ


《여성, 총 앞에 서다》는 사게 된 계기에 대해 정말 할 말이 많은데 … 얼마전에 '페미니스트라면 반전에 앞장서야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아득해져서 샀다. 페미니스트는 세상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나, 다 앞장서야 하나, 그리고 반전 시위와 운동에 있는 여자들이 안보이나. 뭐 이렇게 페미니스트들에게 바라는 게 많아. 반전도 해라, 애들 생각도 해라, 디지털 성폭력 잡아라, 환경 생각도 해라, 채식해라 … 페미니스트는 신입니까? 페미니스트는 흠없고 세상 모든 일을 두루 다 참견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페미니스트에게는 그러라는 요구가 많아? 아득하고 한숨이 난다. 


《문화의 위치》는 정희진 쌤이 극찬한 호미 바바의 책이라 샀다. 정희진 쌤의 추천으로 읽은 인생 수업 좋았어서 호미 바바도 좋겠지 싶네.




《늑대 인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언제? 나도 몰라용.













식물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지만, 치커리는 영 힘이 없어 연휴동안 다 뽑아버렸다. 이로써 상추랑 치커리를 없애버리게 됐는데, 자라는 걸 보면서 그리고 나의 성격을 보면서 '상추랑 치커리는 다시 심지 말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식물을 키우면서 내 자신을 좀 더 알게된다. 


콩이 진짜 무럭무럭 잘 자라는데, 내가 이렇게 자라는 콩을 보면서 엄마한테 그랬다.


"엄마, 얘 보면 집이 가난하고 부모도 지원을 안해주는데 지 혼자 잘나서 서울대 간 사람같아." 엄마빵터짐..





요즘 제일 예쁜건 바질 담당이다. 볼 때마다 예쁘고 기특해서 베란다를 온통 바질로 가득차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데 얘도 한 화분에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어서 앞으로 좀 더 건강하고 여유롭게 자라라고, 치커리 뽑아낸 화분에 옮겨 심어주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다. 애들이 다 힘이 빠져버렸어. ㅠㅠ 내가 잘못한거니? ㅠㅠ 힘내, 바질들이여…



어휴 그나저나 쓸 거 너무 많아서 큰일이다.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도 써야 되는데. 이 책 너무 좋아. 여러분 읽으세요, 두 번 읽으세요. 흑흑. 시간나는 대로 우체국 아가씨에 대해서도 쓰겠습니다.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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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5-30 09: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우체국 아가씨> 너무 좋아요? 난 제목이 좀 그렇고 -..- 이미 나온 거 다시 나온 거라길래 좀 우습게 알았는데 그럼 지금 바로 주문해도 되는 걸까요? 바질 정말 이뻐요. 콩 꼬투리도 맺혔네요. 저는 애가 학교에서 씨 세 개 뿌려서 화분 들고 왔길래 그거 키우는 중이에요. 분갈이 했다가 죽을까 봐 무서워 죽는 줄 ㅋㅋ 이게 화분 옮기는 게 식물한테 엄청 스트레스래요. 인간 이사랑 같은 수준인가봐요. 다락방님의 책탑은 언제나 기다려집니다. 저는 <우체국 아가씨> 주문하러 갑니다용.

다락방 2023-05-30 17:20   좋아요 1 | URL
우체국 아가씨 라는 어감이 좀 안좋지요? 이게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의 개정판이더라고요. 저는 구판 가지고 있으면서 안읽었네요. 껄껄.
오와 정말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여러가지 생각도 많이 들어서 메모까지 해가며 읽었거든요. 감정들 다 날아갈까봐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 적어보고 싶어요.
블랑카 님, 분명히 재미있게 읽으실 거고요 그리고 아마 근사한 글 써내실 겁니다. 저는 일정 부분 <노멀 피플> 생각도 났어요. 빈부의 계급차에 대해서 말이지요. 블랑카 님, 얼른 읽고 얼른 써주세요. 기대됩니다!

분갈이 했다가 무서워 죽을 뻔 햇다는 블랑카 님의 마음이 바로 제 마음입니다. 지금 바질 잘못될까봐 전전긍긍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유수 2023-05-30 1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전쟁은 지들이 해놓고 왜 반전 앞장을 페미니스트한테 서래???? 웃기고 있네요 진짜. 3기니구만.. 3기니여…책 독후감 못쓰고 여기서 뭉뚱그리고 있음
바질 너무 탐나네요. 얻으러 가고 싶어요. 계속 탐스럽게 자라라~~

다락방 2023-05-30 17:19   좋아요 1 | URL
각자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을텐데,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힘을 실어주면 되는거 아닙니까. 왜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세상 모든 이슈에 앞장 서야 하는건지, 아 피곤합니다. 너무 피곤해요. 성평등 주장한다고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라는 사고방식은 왜 튀어나오는건지 원. 아 피곤합니다. 피곤해요.

바질 너무 예쁜데 제가 너무 망쳐버린 것 같아서 미치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트랑 2023-05-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옥과 악마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옆에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절감케하는 좋은 글입니다. 마음이 무겁군요. 시대는 늘 정신을 요망합니다.

다락방 2023-05-30 17:21   좋아요 0 | URL
차트랑 님, 오셨네요.
좋은 영화는 마음을 무겁게 하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면서도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저도 그런 사회를 만든 사람이겠지요. 역시 마음이 무겁습니다.

잠자냥 2023-05-30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가 또 개봉했군요. 지난번에 내한하셨다고 해서 무슨 영화를 개봉하나 싶었는데.... 저도 이 영화 봐야겠어요. 또 마음이 불편해지겠지만...

그나저나 서울대콩 비유 너무 웃깁니다. <우체국 아가씨> 리뷰 기다릴게요~

다락방 2023-05-30 17:21   좋아요 1 | URL
친구는 ‘극장에야 가나 볼 수 있고 집에서느 안보게 되는 영화‘ 라고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얘기했는데, 다르덴 형제의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극장에 가 보고싶지만 집에서 혼자는 안보게 되는 영화 ㅠㅠ

우체국 아가씨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시간 내서 꼭 써볼게요. 그런데 제가 너무 바쁘네요. 오늘도 오전 내내 회의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독서괭 2023-05-30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대 콩 ㅋㅋㅋㅋㅋㅋ 너무 찰떡 비유예요!!
영화 내용이 참 너무 씁쓸하고 슬프고 안타깝네요 ㅠㅠ 그와중에 성착취 ㅠㅠ 아오 한숨..
오늘도 멋진 책탑으로 대리만족합니다👍 산책어플 다시 꼬박꼬박 활용하시기를 바라고요 ㅋㅋ

다락방 2023-05-31 07:47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에도 들여다보고 왔는데 콩이 정말 잘 자라고 있어요. 기특합니다. 제가 뭐 해주는 것도 없는데. 흑흑.
독서괭 님의 말씀을 받을어 산책 앱을 꼭 활용하겠어요. 어제도 책이 왔거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건수하 2023-05-30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는 흠없고 세상 모든 일을 두루 다 참견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페미니스트에게는 그러라는 요구가 많아?

- 이거 진짜 공감입니다 ㅠㅠ

이슬람~ 땡투 감사해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23-05-31 07:48   좋아요 0 | URL
페미니스트라면 ~해라, 하는 요구가 진짜 너무 많죠. 매사에 다 페미니스트 소환돼요. 아주 놀고들 있어요 증맬루. 성차별을 하지말자!! 이러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신같은 존재라고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쯧쯧. 아득하고 힘빠집니다.

이슬람 땡투로 책 한 권 더 사시기 바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23-06-02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며 다락방님 정말 글 잘 쓰신다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여러 식물들이 잘 자라는 모습 정말 좋네요.

페미니스트라서 앞장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다 앞장서야 하는 것이거늘.
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늘 뒤쳐져 있는 건지 오히려 따지고 싶네요.
 
Life Lessons: Two Experts on Death & Dying Teach Us about the Mysteries of Life & Living (Paperback) - 『인생수업』 원서
Elisabeth Kubler-Ross / Scribner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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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얘기들이 가득하지만 그러나 작가의 문장들은 읽는 나와 합이 맞았던 것 같다. fear 부분은 내게 큰 위로를 줬고 surrender 는 다시 한번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가급적이면, 사전 뒤지고 번역본 옆에 두고서라도 원서로 읽어보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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