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방 - 남자-되기, 유흥업소, 아가씨노동
황유나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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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하는 태도, 자신이 돈을 지불했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이것은 인권에 위배되는 생각과 행동이다.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노동력을 상픔으로 판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노동자들도 자신을 상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사람을 상품으로 여기는 분야가 있다. 바로 유흥업소다. 요즘은 남녀 불문하고 상품으로 취급한다고 하지만 (호스트 바 같은 경우?), 그럼에도 여성은 더 상품처럼 대우받는다. 그래도 된다는 듯이. 


유흥업소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이 남성이고, 유흥업소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현실. 여기에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법이다.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즐기는 사람들이 남성이고,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인식이 법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식품위생법 시행령 제22조 제1항'에 보면 '유흥종사자란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인 유흥접객원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유흥종사자가 '부녀자'로 법에 명시되어 있다. 여성이 유흥종사자란 말이다. 남성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습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을 추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어찌 여성이어야만 하는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도 문제지만 단순히 법을 넘어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데... 물론 저자가 지적하듯이 '부녀자'를 '사람'으로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 법에 나온 문구는 바뀌어야만 한다.


이 책은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상품으로 여기는 남성들의 모습, 그러한 모습을 '남자들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남자의 방'이 아니라 복수형인 '남자들의 방'이라고 한 이유는, 어떤 특정한 남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남자들'의 사고와 행동이 고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법 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법은 빠져나갈 구멍이 늘 있기 마련이니까.


하여 남성 여성 구분없이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이 당연한 말이 쉽지 않음은 저자 역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기업의 접대비 손금계산에 유흥업소에서의 접대비를 불포함한다거나, 경찰이나 검사를 대상으로 한 유흥업소 접대는 성매매 유무와 상관없이 뇌물로 강도 높게 처벌하는 방법은 고려해볼 법하다'(219-220쪽)고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흥업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이러한 업종이 계속 살아남는 이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제도의 문제임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남자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로 '남자다움'이 '남자 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없어야하겠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기 전에 집단적으로 성매매를 하던 일들이 그런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어쩌면 남자들도 남자다움 또는 남자되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책이 바로 [맨박스]란 책이었는데, 이 책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남성 만들기는 타자로서의 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52쪽)고 하고 있으니... 여성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 상품으로 삼음으로써 만들어지는 남자 되기 또는 남자다움이란 바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말한 내용에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어도 통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1988년 중판.  326쪽 프랑스어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On ne naît pas femme: on le devient.”)


  다양한 종류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이들이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 여기에 그들의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자들의 방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종속적인 (성별) 권력관계와 이를 합리화하는 경제논리'(220쪽)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칸트의 말처럼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하여 '유흥산업을 비롯한 성매매산업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평범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장소이고, 그 특정한 장소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게 한국 사회다.'(223쪽)는 말이 나올 수 없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남자다움, 여자다움' 또는 '남자 되기, 여자 되기'가 아니라 '사람다움, 사람 되기'가 아닐까 한다. 


성별이 사람의 삶에 권력 관계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함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이렇게 남성들의 유흥을 위해 상품이 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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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사회 - 시각문화로 읽는 현대 중국
탕샤오빙 지음, 이현정 외 옮김 / 돌베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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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의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책. 현대 예술이라고 하지만 미술에서도 유화나 수채화 또는 추상화보다는 주로 판화에 관한 내용이 많고,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는 장이 있다. 즉 중국의 현대 예술, 특히 미술과 영화를 중국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중국에 대해서 단일한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단일체제라고 하고,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중국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 중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과 같이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라임을 명심하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예술을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편협한 이해에 빠지기 쉽고 또 예술을 독단의 늪에 빠뜨리는 격이 될 것이다. 서양의 미술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유독 중국의 미술에 대해서는 또 중국의 영화에 대해서는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렇게 되면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를 구체적인 작품과 작가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중국 현대 미술과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얻게 되며, 예술가들이 어떠한 고민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작품 활동은 당대 사회를 관찰하고 당대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살리려는 노력이었다는 점.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하나의 틀에 가두는 것은 문제라는 점을 저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어 그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그 작품들이 창작되게 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중국 역사와 문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 중국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들이 중국을 보는 시각이 고정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서양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중국의 다양성을 놓치게 되어 중국의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주장은, 당대 중국 시각문화의 역사적 특수성과 보편적 의의를 만들어낸 열망들과 변화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점점 더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사회를 좀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402쪽)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으니...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동안 중국 문화에 대해서 지니고 있던 자신의 시각을 인식하고 그 시각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문화대혁명을 저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그 문화대혁명이 미술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면서,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관점을 여전히 잇는 예술가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렇다고 문화대혁명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하진 않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시각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은 다양한 중국 시각문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니,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주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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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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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한다. 그 사람에 대해 맹목적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눈이 먼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이때의 판단은 남에게도 해당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또 표현도 하지 않은 채 상대에게 나를 알아달라고만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을 몰라주면 서운함을 느끼고, 그 서운함이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미움, 증오로까지 가게 된다.


증오는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증오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미움으로 증오로 변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움과 증오가 가장 쉽게 발현되는 관계는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일 수밖에 없고, 그 점을 이 소설집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소설집에 실린 '그 개와 혁명'은 이러한 미움을 잘 극복한 상태의 가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상대가 지닌 결함을 감쌀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함보다는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소설은 유쾌하고 발랄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죽음이라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는 결함을 모르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조차도 사랑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우리 철봉 하자''내가 머물던 자리'다. 결함이 도드라지는데, 그렇다고 결함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 결함을 딛고 나온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따라서 결함이 미움과 증오로 가게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서로의 결함들이 보이고 연결이 되면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함께 철봉을 하는 장면이나 트럭을 함께 타고 나가는 장면은 그래서 희망을, 밝음을 전해준다. 결함보다는 사랑을... 미움과 증오가 사랑으로 감싸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팜'이라는 소설은 '그 개와 혁명'의 전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아버지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딸. 여전히 딸이 아버지를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결함을 감싸는 전조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분재'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적절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서로를 미워하지는 않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 상대를 사랑하기에 배려한다고 하는 행위들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할머니(차연)-엄마(수진)-딸(윤재)의 모습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그냥 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표현을 해야 한다고, 자신의 결함도 드러내고 또 사랑도 드러내야 한다고, 그래야 결함을 사랑이 감쌀 수 있다고. 가족이니까 무조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니까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차연이 식물들에게 쏟는 관심, 말들을 딸인 수진에게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수진 역시 딸인 윤재에게 했더라면, 이들의 관계는 더 돈독한 관계이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에서 이들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거리'가 느껴진다. 물리적 거리도 있지만 심리적 거리가 많이 느껴진다. 무엇이 그런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할까 했더니 바로 이런 표현들이다. 


'차연은 주말마다 오는 윤재에게 부러 오지 말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손주가 오면 일단 좋은 음식을 먹여야 했다., 그것뿐일까. 몸단장도 해야 했다.' ('분재' 중에서. 255쪽)


가꾼다? 손녀 앞에서. 이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심리적 거리. 교육과는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미 손녀도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성인인 손녀 앞에서도 단장을 하고 요리도 자신이 해야한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거리'다. 결코 편하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만남이 될 수 없는 관계.


이렇게 비틀어진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사랑과 결함'이다. 어른들의 사랑과 결함이 오롯이 자신에게 전해졌다고 믿는 인물. 그런데 어떤 것이 더 우세하게 전해졌을까? 자신의 현재를 만든 것이 사랑일까 결함일까? 그것은 모른다.


다면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여기는 고모(순정)가 동생의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을 때다. 그만큼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그러한 순정의 모습은 바로 벽(턱)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로 나타난다. 


나는 쓸모가 있는데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느냐고, 자신의 온몸을 벽에 부딪히는 청소기. 그것은 사랑을 주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고모 순정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것은 다른 가족을 바라보는 순정의 관점이 왜곡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왜곡되어 있다고 하기보다는 오래되어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상황이 바뀜에 따라 자신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 그것이 바로 벽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와 같은 모습으로 고모(순정)이 행동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 가족 간에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른 행동,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과거에 했던 것처럼만 하면 안 된다. 그건 결함이다. 변화, 그것이 사랑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에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시절(초등학교), 우리는 계절마다(중학교), 그 얼굴을 마주하고(고등학교)'는 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가장 가까운가? 우선 가족, 그리고 친구다. 그런데 이들과 관계맺기에 실패하면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도 결함을 감싸주기가 쉽지 않은데, 친구 사이에서 한번 드러난 결함은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한때로 그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음을,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상대의 결함만을 보았을 때는 더더욱 힘들어짐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일들이 남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중에서. 133쪽)


그렇다. 상대의 결함은 잘도 보았으면서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 결함을 알았을 때, 그 다음의 삶은 달라진다. 내 결함을 알면 상대의 결함을 감쌀 수 있는 마음의 빈공간이 생기기 때문인데, 그래서 어두우면서도 어떤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객관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상대의 결함을 결함으로만 여기지 않고 감쌀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전체집합 속에 결함이라는 부분집합이 있다는 것. 결함을 아예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사랑의 한 부분집합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 아닐까. 


이 소설집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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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한 삶은 쉽게 드러나고 남들에게 칭송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삶은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사람들 아니었는가.


  그 다른 모습이 그냥 다름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기록된다.


  그러나 기록된 삶만이 남에게 칭송받는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일까? 아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또 남에게 잘 보이려, 칭송을 받으려 하는 삶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위대하지 않은가?


위대하다. 은유의 [아무튼, 인터뷰]를 읽다가 계속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말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냥 사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대단한 사람이고 모두가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한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은유의 책을 읽고 문태준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 점에서 연결되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런 연결을 해준 시가 '오솔길'이란 시다.


    오솔길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새로 돋아난 여린 잎사귀 사이로 고운 새소리가 불어오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햇살 아래 나뭇잎 그림자가 묵화를 친 것처럼 뚜렷하게 막 생겨나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 끝에서 보았네

조그마한 샘이 있고 샘물이 두근거리며 계속 솟아나오는 것을

뒤섞이는 수풀 속에서도 이 오솔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네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년. 1판 7쇄.  75쪽.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 눈에 잘 안 보이는 길. 넓지 않은 길.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길. 그러니 이 길에는 온갖 생명들이 깃들어 있다. 그들을 품어주고 있다. 


이런 오솔길을 없앨 수 있을까?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숲으로 덮어두자고, 또는 더 큰 길을 내 편리하게 하자고 할 수 있을까?


오솔길은 오솔길의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오솔길이다. 우리의 삶을 어느 척도로 재서 대단하다, 대단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오솔길 역시 길이다. 존재하는 길.


가끔 산에 가다 이런 오솔길을 발견하면 기쁘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 기쁨이라고 할까. 이렇게 우리는 모든 삶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 아닐까. 이러한 오솔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


은유의 인터뷰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오솔길과 같은 사람들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책과 책을 연결해주고 삶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주는 시. 그런 시인.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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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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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이후 우리의 삶은 확 달라졌다. 인간을 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분야에서 인간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것. 이제는 챗지피티 시대다. 많은 대학에서 시험 답안에 챗지피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의 학습 성과를 검토한다는 시험에서도 챗지피티라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인간. 이제 인간은 이러한 기계(기계라고 하면 지능이 없다고 여기기 쉽지만, 로봇이라는 말에는 기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차페크의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에서 로봇들은 이미 지능이 있다. 인간에게 저항하고 인간을 쫓아내고 있으니...)의 도움 없이는 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생겼다.


단순한 일에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 이제 인간이 기계의 보조 역할을 하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불안감. 위기의식.


알파고는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인공지능이 바둑에서만큼은 안 되리라는 예측이 무색해지고, 지금은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래서 이제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으로 학습을 한다고 한다.


바둑 해설도 마찬가지고... 바둑 방송을 거의 보지 않지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인데, 기사라 한 수를 놀 때마다 승리 확률이 화면에 나왔다. 이것이 바로 알파고 이후 바둑계에 생긴 변화다.


그 돌이 지닌 의미를 따질 필요는 없다. 오직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하다. 이렇게 이기기에 최적화된 알파고와 같은 바둑 인공지능들을 인간은 이길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한 확률을 너무도 빠른 시간에 계산해내고, 이길 확률이 높은 (가장 확률이 높은 수를 꼭 두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질 확률이 있는 수를 놓는 경우는 없을 테니) 수를 놓는 인공지능을 인간이 이길 수는 없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존재,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바둑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그리고 바둑계는 엄청나게 변했다고 한다.


이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 이 책에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음은 확실하니, 바둑이 무엇인지, 바둑이 인간에게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바둑은 예술인가, 스포츠인가 그냥 게임(놀이)인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때에 따라 바둑이 자리한 분야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바둑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립해야 한다. 


이렇게 바둑계는 미래를 먼저 경험했다. 그렇다면 다른 분야는? 우리 분야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아니다. 바둑계에 먼저 일어났을 뿐이다. 곧 다른 분야에서 이런 일은 생겨난다.


단적으로 미술에서도 음악에서도 또 문학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쓴 작품과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랐다고도 한다. 또한 챗지피티는 학생들의 공부에 필수가 되고 있으니... 자신의 학업까지도 챗지피티에 의지하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런 현실에서 바둑계가 겪은 경험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작가 장강명이 많은 바둑 관계자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 그들이 경험한 세계가 이 책에 펼쳐진다. 그야말로 먼저 온 미래를 겪은 사람들, 분야 이야기다.,


그리고 바둑계가 겪은 일은 이제 예술계에서도 겪고 있다. 예술,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되는 분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예술도 인공지능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예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인공지능보다 못한(이러한 우열의 개념을 예술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지만, 예술 분야만큼 우열을 나누고 평가하는 곳이 있었던가 하면, 아니라고 하기 힘들다. 그것을 인공지능처럼 명확하게 수치로 밝힐 수 없었을 뿐. 직관으로 또는 권위로 우열을 나누지 않았던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과연 그때도 예술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까?


무서워졌다. 그렇다고 이러한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는데... 분명 기술은 퇴보하지 않는다. 한번 나온 기술은 더 발전된 쪽으로 나아가지 사라지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 마치 엔트로피 법칙처럼.


이렇게 바둑계가 경험한 인공지능 이야기를 인간의 다른 여러 분야를 끌어와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뒷부분에 가면 인공지능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조지 오웰을 중심으로 삼아 기술 발전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고. 무조건 기술발전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판단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평가하고 지켜봐야 한다고...


그래서 장강명은 오웰의 [1984]를 좋은 소설,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 세계가 너무나 끔찍해서 사람들은 그런 세계가 오지 않도록 하려고 노력했으니까. 이 말을 이 작품에 적용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보조로 격하시킬 세상은 너무도 암담하기에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작가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인공지능이 이것까지 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상상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340쪽)


이 책이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인공지능이 펼칠 미래를 한번 상상해보고,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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