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넌 빨갱이야!"


한때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였다. 이 말 하나면 그 사람은 고립되고, 다른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빨갱이'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이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말의 쓰임새는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넌 수구꼴통이야!"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인다. 이 말 하나면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수구꼴통'이 의미하는 어쩌면 '꼰대'라는 말과도 통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이렇게 한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한 단어로 규정되어도 좋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을 율리 체가 쓴 이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보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뉜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강요는 자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게 하려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 어떨 때는 자신도 자신을 모를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도라도 그렇다. 진보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우주의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답게 환경도 생각하고, 이민자 정책에도 찬성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열려 있다. 함께 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로베르트도 외견상으로 잘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로베르트를 도라는 견딜 수가 없다. 도라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로운'(36쪽)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마저 강요당할 수 없다고 느낀 도라는 브라켄으로 이주한다.


브라켄으로 이주한 날 마주친 옆집 남자가 대뜸 외친다.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 난 이 마을 나치요."(57쪽)라고. 이게 뭔 일이야? 나치라니...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이 이웃이라니... 기겁을 한 도라.


이후 고테는 수시로 도라의 집에 들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도라의 땅을 정리하게도 하고, 의자와 같은 물건을 갖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쇠도 갖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도라. 하지만 고테는 도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라에게 도라가 자신을 나치라고 경멸한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이주민을 그렇게 여기듯이 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냐고.


이때 도라가 외친다. "물론 내가 낫죠! 당신보다 백배 낫죠!" (453쪽)이 말을 하고 난 뒤 도라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편견, 우월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이나 고테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도라.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사람을 편 가르고, 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하는 도라. 진보주의자든 극우주의자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물론 내가 낫죠!" 근데 언뜻 보면 이 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브라켄 마을 근교에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 전 인류를 갉아먹는, 장기간에 걸쳐  퍼져나가는 독이라고 할까.' (453쪽)


이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치와 이웃에 사는 진보주의자 여자. 그러나 둘은 이웃이다. 친구가 된다. (도라의 생각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정을 하는 고테가 남겨둔, 도라의 강아지 요헨데어로헨의 조각상으로 고테 역시 도라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라는 말에 진보라는 말에 서로를 틀 지우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틀에 가두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이웃에게는 한 없이 친절할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자식에게도 애정을 베풀 수 있음을 (이는 고테가 딸인 프란치에게 하는 행동이나, 도라의 아버지가 도라에게 하는 행동이 비슷함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다르다고 마냥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치면 극단주의자들인 그들과 다를 점이 없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나치인 고테를 위해 파티를 여는 모습,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도 와주는 모습. 이것은 한 사람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만나면서 점점 넓혀 서로를 볼 수 있고 연결해주는 창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도라는 코로나로 인해 이사한 마을에서 나치라고 주장하는 고테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간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다.'(400쪽)고 도라는 깨닫는다. 그렇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으로 인해 평생 이웃으로 만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을 멈추는 도라. 이런 도라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들이 흔하게 만나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말. 편가르는 말. "넌 일베야. 넌 페미야. 넌 좌파야, 넌 수구야. 넌 꼰대야. 넌 범생이야. 넌 문제아야" 등등.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서 자신 역시 가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모습을,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틀 지워서도 안 되지만 상재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도 지녀서는 안 된다. 소설의 도라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고테를 이해하려 하지만, 고테가 혐오 발언이나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는 비판하고 막으려 한다. 이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람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과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 세대 -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을 화성에 보내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화성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거대 기업 운영자도 있지만, 그것이 가능해졌다 치자. 화성은 지구와 중력도 환경도 모두 다르다. 그런 곳으로 당신 자녀를 보내겠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지구에 적응된 몸이 화성에 가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 아무리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든다고 해도 지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어른들도 많은 변화를 겪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더욱 커다란 변화,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몸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 자녀를 화성에 보내겠느냐는 질문.


뜬금없이 화성이 나온 것 같지만 아니다. 화성에 이주하는 것이 지금 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 시작했다면, 이미 이 지구에 그러한 화성이 만들어졌음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이런 질문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구에 있는 화성, 즉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지구와 달라진 지구를 만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디지털이다. 더 범위를 좁히면 '스마트폰'이다. 내 손 안에 있는 컴퓨터이자 고해상도의 사진기, 음악 플레이어, 텔레비전 등등의 역할을 모두 하는 기기. 언제 어디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니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기기.


이 기기에 잠식당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은 화성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편리함에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2010년 이후에 전세계에서 청소년들의 우울과 불안이 급증한 이유가 무엇인지 찾다가 바로 '스마트폰'에서 즉 '디지털 세상'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상관관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것은 상관관계를 넘어 인과관계라고 한다.


그만큼 청소년들의 불안과 우울 증세가 심해졌고, 그것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라는 것인데... 단지 스마트폰만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변한 세상이라고 하겠다.


놀이를 중심으로 하던 아동기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아동기로 바뀌었고, 이를 '아동기 대재편'이라고 이름짓는다.


아동기가 대재편되었는데, 이것은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의 과소 보호(26쪽)'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근거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데,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는 미국에서 아동을 홀로 두게 하지 못하는 법만 봐도 알 수 있다. 자녀를 차에 홀로 두고 쇼핑을 해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현실, 아동이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어도 아동학대가 되는 과잉보호.


그런데 반대로 가상 세계,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는 다른 세계에는 보호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연령 제한이 있는 사이트도 감시를 별로 하지 않아 자유롭게 아동들이 접속할 수 있으며, 어른들이 규제를 한다고 해도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가상 세계에서는 보호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만 그런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역시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현실 세계 과잉보호는 지금 심각하다. 특히 학교에서... 걸핏하면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교사들을 보라. 신고당하는 부모보다 교사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데...


아이를 남게 해서 상담을 했다고 정서 학대로 신고하는가 하면, 무단 외출을 하는 아이를 막고 나가려는 아이 팔을 잡았다고 아동학대로 신고하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고 학대라고 신고하는 부모들도 있는 현실.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교사들이 체험학습을 거부하겠는가. 체험학습에서 사고가 나면 신고당하는 사람들이 교사이기 때문이다. 교육적 활동에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무엇도 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체험학습같이 학교를 벗어난 다양한 활동을, 또 또래끼리 방을 함께 쓰면서 잠을 자고 함께 이야기하면 활동을 하는 경험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과잉보호다. 아이들을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는 과잉으로 보호하면서, 스마트폰의 사용은 어떤가? 부모들이 감시하기 힘들다. 또한 스마트폰을 주어서 부모들의 돌봄 노력을 줄이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온갖 문제는 스마트폰으로 인해 일어난다. 


저자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의 네 가지 기본적인 해악은 ...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 중독'(174쪽)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스마트폰에 눈을 주고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게임을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스마트폰 세계 즉 가상 세계 속에서다. 현실 세계에서는 더 많은 접촉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 수면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업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하려고 애를 쓰는 아이만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의 정신이 스마트폰에 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중독 수준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해악을 주는 스마트폰 세상은 가히 '화성'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화성으로의 이주'를 완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저자는 빨리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어른들이 먼저 정신차려야 한다고... 부모와 학교와 나라(정치)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 방법은 참 단순하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면 된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이 가장 힘들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윤을 위해서 수많은 어린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또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힘이 필요하다. 법률로써 제도화해야 한다. 이 점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넘어갔다고 하는 판에, 가능할지... 참.


그래도 저자가 주장한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보자.


1.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는 스마트폰 금지

2. 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 금지

3. 학교에서 휴대폰 사용 금지

4. 감독하지 않는 놀이와 독립적 행동을 더 많이 보장하기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말하라, 연결하라'고 한다. 알려야 한다. 사실 알고는 있지만 먼저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과감하게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 역할을 하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라고. 홀로 할 수는 없으니.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홀로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부모가 있으면 아이 역시 고립되지 않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법으로는 현실 세계에서 걸핏하면 아동학대로 신고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로 정비해야 한다고... 이것을 말하고 연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상 세계에서 아이들이 벗어나 현실 세계에 발딛고 지낼 수 있게 하는 방법, 이것은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방법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는 비용도 들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인가? 문제는 실행 의지다. 부모와 학교, 나라(사회)가 얼마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이것을 실행하느냐다. 


이 실행이 더 늦어지면 우리 아이들은 '화성'에서 살게 된다. 몸과 마음이 '화성'에 맞게 변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실제 살고 있는 세상은 '지구'다. 그러니 마음이 아플 수밖에. 불안과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느껴왔던 스마트폰으로 인한 문제들을 잘 정리했다는, 해결책 역시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는,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육에 목을 매달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이지만,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 아닌가 한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연결이 되겠지. 적어도 이 책은 문제를 크게 말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아이를 둔 부모들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들이 정치인에게 압력을 넣어야 법과 제도가 바뀔 테니. 최근 교육부에서 학교 수업시간에 스마트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청소년 단체로 있다고 하고, 인권과 책임, 그리고 사회의 미래. 


교육부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 (관련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과 같은 책들을 참고 서적으로 하여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하면 좋겠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는 남의 고통을 구경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남의 고통이 중계되기도 한다. 나와는 떨어져 있는 고통. 그러한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일까?


절대로 아니다. 그러한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다. 즉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고통을 구경하고 있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저자는 목격과 구경을 이렇게 분한다.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미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24-25쪽)고.


이 정의에 따르면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고통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고통이 남의 고통만으로 끝날까?


남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세상이니, 다른 이에게 닥쳤던 고통이 내게 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만큼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개인의 고통이 집단의 고통이 되고, 이는 공동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즉 고통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될 때 사회적 연대가 가능해지고,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거치는 과정, 애도의 순간들. 개인의 애도가 공동체의 애도가 된다면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책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262쪽)


아마, 이 책의 제목을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고 지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목격하고, 그러한 고통의 맥락을 찾고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담아서.


따라서 저자는 고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고통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 아직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뉴스룸 기자로서 많은 고통들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저자는, 그러한 고통을 전달할 때 고통받는 사람에게 또다른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또한 고통을 전시함으로써 고통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한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이러한 기자로서의 자세는 우리가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단지 흥미를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또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러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즉 고통과 고통을 이어 고통을 없애는 연대를 마련하기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들. 이런 기자들에게 '기레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자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진 이유를 기자들도 찾아야 한다. 그들이 내보내는 기사들에 대해 이 책의 저자만큼 고민을 했는지... 아마도 그러한 고민을 하고 기사를 내보냈다면 '기레기'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온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206쪽)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고민하고 기사를 내보낸다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그러한 고통을 없애려 하는 시도를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하고.


읽으면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떠올랐다. 사람 몸도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들은 물이 찌그러지듯이, 좋지 않은 뉴스들을 접하면 우리 마음도 많이 망가진다는 그런 주장을 한 책. 어떤 사람은 그래서 신문을,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는 이 책인데...


그렇다고 이런 뉴스들을 듣지,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나?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 감는다고, 그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몸이, 내 마음이 물과 같다면, 고통을 외면하면서 나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의 고민도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러한 고통을 보여주는 이유가.


이 책에서 저자의 답을 얻는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쪽)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 감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보고 단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러한 고통이 지속되지 않도록, 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가 모두 관리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기록하기 위해서 팔뚝에 칩을 심고, 그 칩에 운동, 영양, 질병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늘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하면 법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 건강을 나라가 챙겨주니 좋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내 건강을 지키라고 권유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라면, 이 소설 [어떤 소송]에 나오는 '방법'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나라가 관리하는 것이다. 관리하고 처벌하고...


미아 홀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생물학자다. 그러니 건강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호의적이다. 반면 동생 모리츠 홀은 이렇게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 그리고 건강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자살을 한다. 자살? 이 사회에 가장 큰 범죄다. '방법'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은 오류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방법'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채취된 DNA가 모리츠의 것으로 밝혀져 모리츠가 기소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DNA가 모리츠의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방법'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방법'이 주장하는 바와 동생의 죄없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아 홀은 동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법'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즉, 개인의 건강을 모두 국가의 관리에 둘 필요가 없다는 것. 개인은 고통받기도 하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미아 홀을 선동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크라머라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방법'의 대변자다. '방법'만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그와 미아 홀은 대립을 하지만, 미아 홀은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고, 또 마지막 판결 집행에도 그를 임석할 사람으로 지명한다.


여기까지 '방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미아 홀을 보면, 개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결말로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미아 홀은 사면된다.


이유? 국가는 희생자,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희생자나 순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 '방법'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 권력은 그러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아 홀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싸움이 결국은 거대 권력인 '방법'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는 언론과 권력이 유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에서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거대 권력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질이 된다.


(미아 홀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증거로 채택이 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크라머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이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거나 말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모습들... 이거 과거의 일도 또 다른 나라의 일도 아니다.)


미아 홀의 싸움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러한 싸움은 언론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며 권력이 미아 홀을 고립시킴으로써 - 순교자로 만들면 이는 미아 홀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니, 사면함으로써 미아 홀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하는 방식으로 -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설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난다. 이런 일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방법'이라는 건강 독재...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입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좋을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러한 권력의 통제는 알게모르게 작동을 하거나 또는 언론을 통하여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경계에 서는 일 또는 경계에 서서 이곳과 저곳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일.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러한 것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비록 권력이 이들을 마녀로 또는 범죄자로 낙인 찍을지 모르지만 단일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권력에게 그러한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임을...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 아웃사이더야. 아웃사이더는 위험하게 살아가.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 (145쪽)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라고 해도 좋지만, 각 장르로 분화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장르 중에 사실주의 소설과 판타지 소설, 또는 SF소설도 있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과 SF소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르 귄 같은 경우에는 SF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가 르 귄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판타지에 SF소설도 포함시키면 된다.


판타지를 그냥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주의 소설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사실주의 소설도 역시 상상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있음 직한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읽는 작품인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과연 판타지 소설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냥 상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상상은 현실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것을 채우려는 우리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문학으로 표현된 것이 판타지 문학이고, 판타지 문학은 현실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생각하기에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읽음으로써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이 판타지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는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 판타지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읽고 현실에서 부족한 점,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생각한 독자가 행동으로 나설 때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문학의 힘.


소위 정통 문학이라고 하는 문학만이 아니라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기에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해 준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한계 너머를 보게 해주는 것이 판타지다. 그러므로 판타지는 현실의 쌍으로 현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현실이 판타지에 영향을 주고, 다시 판타지는 현실에 영향을 준다. 이 책의 첫장에서 저자는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판타지는 물론 진실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았을 뿐, 진실인 것은 맞다"(62-63쪽)


사실이라고 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실이다. 진실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주의 문학이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서 진실로 향해 간다면,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진실로 간다.


경계 너머,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 그러한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기. 이것이 판타지가 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소설에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마법의 세계, 허황된 것 같지만, 그러한 마법은 우리의 사고를 극한까지 몰아갔을 때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불교의 화두에 있는 말,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와 같다고 할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절벽에 서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판타지를 보는 아홉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제목만 이어 보아도 책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기, 마법이 현실 세계로 뻗어 나간다면, 화합을 추구하는 결말, 갈등보다 건설적인 각본, 여성을 억압하는 북 클럽에 저항하기,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 환상 동화 속 소년 찾기, 익숙한 과거를 재구성하는 공간, 두려움 너머의 진실을 보기


그렇다. 판타지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이 나오지만 마법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향하고, 갈등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한다.


여기에 유토피아란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 중의 세계라는 점을 보여주며, 그래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는 과거를 보여주더라도 현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마주치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법을, 다만 두려움에 이름과 얼굴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한 공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411쪽)고 한다.


이 문장만 보아도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작품과 자신이 설정한 아홉 가지 주제로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판타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판타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판타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5-07-0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울리지의 불신의 유보, 란 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게 환타지겠지요. 그러려니 하는 거~. 해리 포터에 나오는 1과 2분의 1이란 승장강이 있다고 바로 믿어지는 것. 아니, 믿고 싶어하는 것! 전 판타지를 잘 읽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좀 사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는 것 같아요. 그치만 판타지에 정말 좋은 예술 작품이 많다는 건 압니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이라든가 아술러 르 귄의 모든 소설들....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더 꼼꼼히 읽어야겠어요~. 덕분에요!

kinye91 2025-07-06 08:28   좋아요 0 | URL
판타지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판타지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에요. 그리고 저도 칼비노 소설과 르 귄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르 귄에 대한 글도 꽤 있어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