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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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한다. 그 사람에 대해 맹목적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눈이 먼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이때의 판단은 남에게도 해당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또 표현도 하지 않은 채 상대에게 나를 알아달라고만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을 몰라주면 서운함을 느끼고, 그 서운함이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미움, 증오로까지 가게 된다.


증오는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증오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미움으로 증오로 변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움과 증오가 가장 쉽게 발현되는 관계는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일 수밖에 없고, 그 점을 이 소설집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소설집에 실린 '그 개와 혁명'은 이러한 미움을 잘 극복한 상태의 가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상대가 지닌 결함을 감쌀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함보다는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소설은 유쾌하고 발랄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죽음이라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는 결함을 모르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조차도 사랑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우리 철봉 하자''내가 머물던 자리'다. 결함이 도드라지는데, 그렇다고 결함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 결함을 딛고 나온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따라서 결함이 미움과 증오로 가게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서로의 결함들이 보이고 연결이 되면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함께 철봉을 하는 장면이나 트럭을 함께 타고 나가는 장면은 그래서 희망을, 밝음을 전해준다. 결함보다는 사랑을... 미움과 증오가 사랑으로 감싸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팜'이라는 소설은 '그 개와 혁명'의 전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아버지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딸. 여전히 딸이 아버지를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결함을 감싸는 전조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분재'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적절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서로를 미워하지는 않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 상대를 사랑하기에 배려한다고 하는 행위들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할머니(차연)-엄마(수진)-딸(윤재)의 모습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그냥 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표현을 해야 한다고, 자신의 결함도 드러내고 또 사랑도 드러내야 한다고, 그래야 결함을 사랑이 감쌀 수 있다고. 가족이니까 무조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니까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차연이 식물들에게 쏟는 관심, 말들을 딸인 수진에게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수진 역시 딸인 윤재에게 했더라면, 이들의 관계는 더 돈독한 관계이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에서 이들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거리'가 느껴진다. 물리적 거리도 있지만 심리적 거리가 많이 느껴진다. 무엇이 그런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할까 했더니 바로 이런 표현들이다. 


'차연은 주말마다 오는 윤재에게 부러 오지 말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손주가 오면 일단 좋은 음식을 먹여야 했다., 그것뿐일까. 몸단장도 해야 했다.' ('분재' 중에서. 255쪽)


가꾼다? 손녀 앞에서. 이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심리적 거리. 교육과는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미 손녀도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성인인 손녀 앞에서도 단장을 하고 요리도 자신이 해야한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거리'다. 결코 편하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만남이 될 수 없는 관계.


이렇게 비틀어진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사랑과 결함'이다. 어른들의 사랑과 결함이 오롯이 자신에게 전해졌다고 믿는 인물. 그런데 어떤 것이 더 우세하게 전해졌을까? 자신의 현재를 만든 것이 사랑일까 결함일까? 그것은 모른다.


다면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여기는 고모(순정)가 동생의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을 때다. 그만큼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그러한 순정의 모습은 바로 벽(턱)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로 나타난다. 


나는 쓸모가 있는데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느냐고, 자신의 온몸을 벽에 부딪히는 청소기. 그것은 사랑을 주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고모 순정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것은 다른 가족을 바라보는 순정의 관점이 왜곡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왜곡되어 있다고 하기보다는 오래되어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상황이 바뀜에 따라 자신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 그것이 바로 벽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와 같은 모습으로 고모(순정)이 행동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 가족 간에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른 행동,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과거에 했던 것처럼만 하면 안 된다. 그건 결함이다. 변화, 그것이 사랑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에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시절(초등학교), 우리는 계절마다(중학교), 그 얼굴을 마주하고(고등학교)'는 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가장 가까운가? 우선 가족, 그리고 친구다. 그런데 이들과 관계맺기에 실패하면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도 결함을 감싸주기가 쉽지 않은데, 친구 사이에서 한번 드러난 결함은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한때로 그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음을,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상대의 결함만을 보았을 때는 더더욱 힘들어짐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일들이 남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중에서. 133쪽)


그렇다. 상대의 결함은 잘도 보았으면서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 결함을 알았을 때, 그 다음의 삶은 달라진다. 내 결함을 알면 상대의 결함을 감쌀 수 있는 마음의 빈공간이 생기기 때문인데, 그래서 어두우면서도 어떤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객관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상대의 결함을 결함으로만 여기지 않고 감쌀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전체집합 속에 결함이라는 부분집합이 있다는 것. 결함을 아예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사랑의 한 부분집합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 아닐까. 


이 소설집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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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까지 다섯 걸음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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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설들. 이 길이를 지구의 종말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그만큼 지구의 종말까지 남은 기간도 짧지 않을까?


우주가 탄생한 지가 약 138억 년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지구는 한참 뒤에 태어났고, 그 지구에 인간이 나온 것은 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우주의 나이로 보면 갓 태어난 아이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우주에 늦게 온 자가 우주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는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하고 있는 일 아닐까.


그런데도 종말을 부정한다. 지구에서 살아갈 날이 무한하다고 여기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점점 지구는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데... 그래서 우주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개척하자고 하는데...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자고 하고도 있는데...


[종말까지 다섯 걸음]이란 소설 제목을 봤을 때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떠올렸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 과정을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인류의 종말 앞에서도 과연 이 과정을 밟을까.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하는데... 소설집은 이 과정을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


'부정-절망-타협-수용-사랑'


이러한 다섯 단계를 통해 다른 내용의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이 주제들의 맨 앞에 실린 소설은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로 봐도 된다. 그렇지만 나머지 소설들은 딱히 연결이 된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럼에도 종말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냥 각 주제의 처음에 실린 소설 제목을 보면 '종말을 부정하고 - 종말에 절망하고 - 종말과 타협하고 - 종말을 수용하고 - 마침내, 종말을 사랑하고'로 되어 있다. 이 소설들에서 각 장의 주제가 만들어졌다고 보면 되는데...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란다. 그때 지구는 파괴될 것이고, 모두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현실 앞에 소행성을 폭파한다는 영화 '아마겟돈'과 같은 일은 불가능하니, 인류가 지구에서 벗어나는 길밖에는 생존의 방법이 없다.


우주선을 만든다. 방주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를 보라. 모든 생명체가 탈 수 있는가? 아니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탈 수 있다.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면 우주선에 탈 수 있는 존재와 타지 못하는 존재를 어떻게 가를까?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배제된 사람들은 이판사판이 된다. 어차피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물귀신 작전을 쓰기도 한다. 나만 죽을 순 없다가 된다. 그럼 선택받은 사람들은? 우린 살 수 있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가 된다. 저들과 다른 우리가 생겨난다.


이때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들이 우주선을 파괴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인간은 또다른 우주선을 만들어낸다. 물론 탑승 정원은 대폭 줄어든다. 이 줄어든 인원을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 


이미 첫 선발 때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우주선 기지로 왔다. 그 다음에는 제비뽑기다. 추첨으로 결정하면 된다. 그 전에 자발적으로 남을 사람을 모집한다. 그리고 추첨. 과연 추첨은 공정한가?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서 추첨 역시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권력과 이익이 개입하지 않을까? 작가는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게 우주로 나아가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마지막 소설에서 남아 있는 사람의 '사랑과 행복'이 펼쳐진다. 그렇다. 무엇인가를 욕망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사랑을 찾고 행복할 수 있음을...


종말까지 남은 시간의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하루하루가 충만했고 행복했으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도 우리에게 삼 일이나 있다는 거야.'(208쪽)라는 말에서 이들은 종말까지 충만한 나날들을, 사랑으로 넘치는 나날들을 보낼 테니, 그 나날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아니다. 어차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그 끝을 거부할 수는 없다. 끝을 거부할 수 없다면 현재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 현재에 살아야 한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으로 현재를 채워야 한다. 그러면 종말까지 다섯 걸음이라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다섯 걸음이나 남았으니까. 그동안 사랑할 일이 너무도 많으니까. 


하여 이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인류세라는 시대 개념을 만들자고 할 정도로 인간이 지구에 해를 끼치고 있는데,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데, 이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할까? 마지막 소설에서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연결되는 다섯 소설말고도 마음을 울리는 소설들이 있으니, 찬찬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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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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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제목을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예상한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게 소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어쩌고 저쩌고'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기타 등등이라고 하는 etc.가 소설에 나오기도 하니, 왜 이렇게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까?


수많은 이야기를 이렇게 섞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읽다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되기도 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목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먹고 자고 싸기. 인간이라면 누구도 해야만 하는 일. 먹는 일을 제목이 대변한다면, 그렇다면 나머지는? 자는 일은 이 소설에서 찾기 힘든데 싸는 일은 찾기 쉽다. 왜냐하면 '어쩌고 저쩌고'만큼 특색있게 다가오는 말이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보면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야(224쪽),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 분명해요,'(265쪽)라고 한다. 똥구멍은 싸는 곳.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목이라면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은 싸는 곳이다. 무얼 싸지?


당연히 소화가 되지 않은 것을 싼다. 소화가 되지 않은 것? 과다 생산된 것. 필요 없음에도 필요하다고 광고해서 남들로 하여금 사게 하는 것. 그리고 곧 쓰지 않게 되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는 것. 버려진 다음 자연스레 분해가 되지 못해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에 더 해를 끼치는 것.


소설에서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드웨인과 관련된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싸버리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끝모를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성장, 성장하는 미국 또는 지구의 나라들로 인해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이 편하자고 썼다가 버린 것들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트라우트는 슈거크리크의 범람을 막는 콘크리트 홈통에 자신의 예술적인 발을 담갔다. 그러자마자 수면에 떠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물질이 발을 코팅했다. ... 한쪽 발을 물에서 꺼내자 플라스틱 물질은 공중에서 즉시 마르며 진줏빛의 얇고 타이트한 단화로 변해 그의 발을 감쌌다.'(302쪽)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한 피해는 잘 알려져 있으니, 보니것은 그런 미래를 선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때의 성장, 발전이 지닌 위험을 내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이 어디 플라스틱 뿐이겠는가. 그는 미국 사회가 지닌 많은 모습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인간이 그러한 노예 또는 기계와 별반 다름이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미국 사회는 '우주의 똥구멍'일 뿐이다. 그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자신들이 먹는 것이 소화가 되지 않고 똥으로 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장과 발전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구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이니, 우리는 여전히 우주의 똥구멍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똥구멍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곳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보니것은 비관적이었다가 생각을 바꾼다. 이 장면이 소설 속에 있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 역시 자본의 먹이로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자본에 먹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잃지 않는, 기계로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는데...


너무도 짧은 이야기들, 소설 속의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 자신의 등장인물과 대화하는 장면까지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낯설기도 한데... 그럼에도 비사실적인 표현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계속 겪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제목을 생각한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자본과 성장이 결국 먹는 것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작가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먹어치운 것들이 결국은 배출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제목인 아침식사와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이라는 말이 연결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표현은 제너럴 밀스사에서 만든 아침식사용 시리얼 상품의 등록 상표다.(17쪽)라고 해서 다른 오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자본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깊숙히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아침식사용 시리얼'이라고 하지 않나? 기본적인 먹는 것조차도 거대 기업이 잠식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게 우리 삶으로 들어와 우리를 삶으로부터 더욱 떨어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니것은 비판하고 있다.


계속 보니것 작품을 읽고 있는데, 이 작가의 작품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다음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 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지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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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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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으키는 비극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 모를 수가 없는데도, 세상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자신들은 이런 비극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건지. 악마에 씌웠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전쟁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 속에서 겪을 뿐이다. 


이들의 명령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속으로 들어간다. 눈 앞에서 그들은 전쟁을 겪는다. 이 전쟁 속에는 참여하는 사람만 있지 않다. 전쟁과 관련 없이 살아온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빠져들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게 전쟁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하는 일. 그런 전쟁을 막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만들고 국제연합도 만들었지만, 전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세계 도처에서. 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 곳도 여럿 있고.


언제까지 인류는 자신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주의 긴 역사에서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중에서도 전쟁이 없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


참... 힘들다. 커트 보니것이 [제5도살장]을 비롯해 많은 소설을 썼지만, 그가 소설을 통해 전쟁의 참담함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세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가 절망할까?


그의 아들이 펴낸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아버지에게 글 쓰는 일은 신앙과 다름없는 행위였고, 당신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믿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했지만 당신의 글이 세상일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믿은 적은 결코 없었다.' (7쪽)


그럼에도 그는 글을 썼다. 연설도 했다. 왜냐? 가능성을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글을 통해서 그는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인간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이 희망이라고 하는데, 이 희망이 바로 가능성이다. 될 수 있다는 것...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체제 전복적 행동이다. 읽고 씀으로써 전복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다. 세상이 지금 이대로여야 한다는, 당신이 혼자라는, 당신과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 고작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 다른 곳이 된다. 그런 일을 상상해보라.'(13-14쪽)


이것이 바로 그가 글을 쓰고, 우리가 글을 읽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다. 그렇게 조금 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이 조금 더 다른 '나'가 '우리'가 되면 사회 역시 조금은 변할 테니까.


하여 커트 보니것의 이 소설집을 읽는 것은 우리가 전쟁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바꾸거나 또는 더욱 확신하게 할 수 있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다'는 소설을 보면 첫부분부터 전쟁이 지닌 비인간적인 모습이 나온다.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품성을 지니고 싶어할 테니까.


'우리의 일은 제군들을 세계 역사상 가장 치사하고 비열한 싸움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 어떤 방법이든 써서 죽여라. 죽여. 죽여. 죽여라. 알아듣겠나?'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다' 중에서. 53-54쪽)


이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그런 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떻게 지낼 것인가. 그들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이 된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아직도 전쟁을 하겠다고, 힘의 우위를 통해 상대를 무력하게 하겠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힘의 우위를 확보하려 하면, 상대 역시 힘의 우위를 확보하려 해, 군비 경쟁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에는 지구를 파괴할 무기들이 계속 쌓여갈 텐데, 그 점을 당당하게 말하는 자들이 버젓이 있다는 사실이 참. 이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쉽게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이 소설집에 실린 '1951년의 행복한 생일'이란 소설에서 만나게 된다. 슬프다. 좋은 날, 아이를 위해 나들이를 간 노인. 노인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이가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가장 멋진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이 만들어준 수레를 아이는 '탱크'라고 한다. 그리고 함께 가는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느끼기보다는 '녹슨 거대한 탱크'를 보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한다. 이렇게 아이는 아직 전쟁의 고통을 모른다. 노인은 그 고통을 알기에 아이에게 가장 평화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탱크를 찾아가고 있다. 


전쟁이 없는 자연의 평화로움을 아이는 아직 느끼지 못한다. 이 아이에게 그러한 느낌, 경험을 주려고 노력하는 노인. 아직 그것을 못 느끼는 아이.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노인이 무엇을 주려 하는지. 아이가 느껴야 하고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바로 읽기의 힘이지 않을까.


아이가 자연보다는 탱크를 좋아하는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가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두려움. 커트 보니것이 그런 두려움을 이 소설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포로로 잡혀 있는 미군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들. 또한 전쟁이 끝난 뒤 일어난 약탈 등을 묘사하면서 그는 전쟁이 인류에게 끼친 참화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보다는 풍자적인 요소가 적지만 오히려 '전쟁 속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소설들이다. 반전(反戰) 소설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쟁이 인간에게 끼치는 나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다시 서문의 말을 생각한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체제 전복적 행동이다.' 


그러니 많이 읽자. 보니것의 소설은 이 점에 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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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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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가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었는데, 일곱 편의 소설.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 소설의 특징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읽기겠지만, 소설 역시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들이 지닌 어떤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러다 실패. 


어떤 작품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작품은 빠른 속도로 읽었고, 또 어떤 작품은 함께 실린 비평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대상 수상작이 백온유가 쓴 '반의반의 반'이란다. 반의 반이면 1/2이고, 그것의 반이라면 1/4이 되나? 그런데 왜 제목이 이럴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데... 등장인물은 넷이다. 할머니 영실, 엄마 윤미, 딸 현진, 그리고 요양보호사 수경. 


사건이 벌어진다. 영실이 꼭꼭 감추고 있었던 돈 오천만 원이 사라진 것.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넷에 범인으로 의심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요양보호사. 문제는 증거.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정을 받은 영실. 확실하지 않는 CCTV. 물증은 없다. 심증은 있는데...


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사실 소설의 중심은 이것이 아니다. 바로 비틀어진 관계. 즉 서로의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를 지속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들은 무엇을 공유했을까?


가족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이 사랑이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 행동, 마음가짐 등등이 상대에게 가 닿으면 된다.


어쩌면 상대를 가장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엄마니까, 아빠니까, 할머니니까, 자식이니까, 손녀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의 바람직한 형태 아닐까.


따라서 가족은 똑같지는 않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일 수 있다. 서로를 다독거려줄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이 소설 속 가족은 그렇지 않다. 영실-윤미의 관계는 데면데면하고, 영실-현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을 뿐 이들에게는 끈끈한 무엇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수경은 그렇지 않다.


인생 말년에 수경의 태도에 마음을 여는 영실인데, 어쩌면 영실이 기대한 가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마인 윤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고, 손녀인 현진도 그랬을 텐데,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영실에게는. 영실은 인생 말년에 자신을 보듬어준 수경이 고마울 뿐이니... 물론 돈을 수경이 가져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함께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비틀어져 어긋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인식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아마 윤미나 현진이 수경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했어도, 또 영실이 그렇게 했어도 이들의 관계는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비틀어진 관계를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성혜령의 '원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혜령의 '원경'을 읽으면서는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관계가 비틀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감독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서로 딱 맞는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기만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딱 맞지 않기 때문에 맞추려고 자신과 상대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고 함께 맞춰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맞춤은 된다. 2025 제16회 절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러한 관계를 비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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