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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넌 빨갱이야!"
한때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였다. 이 말 하나면 그 사람은 고립되고, 다른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빨갱이'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이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말의 쓰임새는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넌 수구꼴통이야!"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인다. 이 말 하나면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수구꼴통'이 의미하는 어쩌면 '꼰대'라는 말과도 통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이렇게 한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한 단어로 규정되어도 좋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을 율리 체가 쓴 이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보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뉜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강요는 자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게 하려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 어떨 때는 자신도 자신을 모를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도라도 그렇다. 진보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우주의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답게 환경도 생각하고, 이민자 정책에도 찬성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열려 있다. 함께 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로베르트도 외견상으로 잘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로베르트를 도라는 견딜 수가 없다. 도라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로운'(36쪽)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마저 강요당할 수 없다고 느낀 도라는 브라켄으로 이주한다.
브라켄으로 이주한 날 마주친 옆집 남자가 대뜸 외친다.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 난 이 마을 나치요."(57쪽)라고. 이게 뭔 일이야? 나치라니...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이 이웃이라니... 기겁을 한 도라.
이후 고테는 수시로 도라의 집에 들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도라의 땅을 정리하게도 하고, 의자와 같은 물건을 갖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쇠도 갖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도라. 하지만 고테는 도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라에게 도라가 자신을 나치라고 경멸한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이주민을 그렇게 여기듯이 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냐고.
이때 도라가 외친다. "물론 내가 낫죠! 당신보다 백배 낫죠!" (453쪽)이 말을 하고 난 뒤 도라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편견, 우월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이나 고테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도라.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사람을 편 가르고, 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하는 도라. 진보주의자든 극우주의자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물론 내가 낫죠!" 근데 언뜻 보면 이 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브라켄 마을 근교에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 전 인류를 갉아먹는, 장기간에 걸쳐 퍼져나가는 독이라고 할까.' (453쪽)
이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치와 이웃에 사는 진보주의자 여자. 그러나 둘은 이웃이다. 친구가 된다. (도라의 생각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정을 하는 고테가 남겨둔, 도라의 강아지 요헨데어로헨의 조각상으로 고테 역시 도라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라는 말에 진보라는 말에 서로를 틀 지우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틀에 가두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이웃에게는 한 없이 친절할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자식에게도 애정을 베풀 수 있음을 (이는 고테가 딸인 프란치에게 하는 행동이나, 도라의 아버지가 도라에게 하는 행동이 비슷함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다르다고 마냥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치면 극단주의자들인 그들과 다를 점이 없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나치인 고테를 위해 파티를 여는 모습,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도 와주는 모습. 이것은 한 사람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만나면서 점점 넓혀 서로를 볼 수 있고 연결해주는 창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도라는 코로나로 인해 이사한 마을에서 나치라고 주장하는 고테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간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다.'(400쪽)고 도라는 깨닫는다. 그렇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으로 인해 평생 이웃으로 만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을 멈추는 도라. 이런 도라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들이 흔하게 만나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말. 편가르는 말. "넌 일베야. 넌 페미야. 넌 좌파야, 넌 수구야. 넌 꼰대야. 넌 범생이야. 넌 문제아야" 등등.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서 자신 역시 가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모습을,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틀 지워서도 안 되지만 상재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도 지녀서는 안 된다. 소설의 도라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고테를 이해하려 하지만, 고테가 혐오 발언이나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는 비판하고 막으려 한다. 이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람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과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