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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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빨갱이야!"


한때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였다. 이 말 하나면 그 사람은 고립되고, 다른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빨갱이'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이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말의 쓰임새는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넌 수구꼴통이야!"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인다. 이 말 하나면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수구꼴통'이 의미하는 어쩌면 '꼰대'라는 말과도 통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이렇게 한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한 단어로 규정되어도 좋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을 율리 체가 쓴 이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보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뉜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강요는 자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게 하려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 어떨 때는 자신도 자신을 모를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도라도 그렇다. 진보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우주의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답게 환경도 생각하고, 이민자 정책에도 찬성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열려 있다. 함께 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로베르트도 외견상으로 잘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로베르트를 도라는 견딜 수가 없다. 도라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로운'(36쪽)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마저 강요당할 수 없다고 느낀 도라는 브라켄으로 이주한다.


브라켄으로 이주한 날 마주친 옆집 남자가 대뜸 외친다.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 난 이 마을 나치요."(57쪽)라고. 이게 뭔 일이야? 나치라니...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이 이웃이라니... 기겁을 한 도라.


이후 고테는 수시로 도라의 집에 들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도라의 땅을 정리하게도 하고, 의자와 같은 물건을 갖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쇠도 갖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도라. 하지만 고테는 도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라에게 도라가 자신을 나치라고 경멸한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이주민을 그렇게 여기듯이 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냐고.


이때 도라가 외친다. "물론 내가 낫죠! 당신보다 백배 낫죠!" (453쪽)이 말을 하고 난 뒤 도라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편견, 우월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이나 고테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도라.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사람을 편 가르고, 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하는 도라. 진보주의자든 극우주의자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물론 내가 낫죠!" 근데 언뜻 보면 이 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브라켄 마을 근교에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 전 인류를 갉아먹는, 장기간에 걸쳐  퍼져나가는 독이라고 할까.' (453쪽)


이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치와 이웃에 사는 진보주의자 여자. 그러나 둘은 이웃이다. 친구가 된다. (도라의 생각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정을 하는 고테가 남겨둔, 도라의 강아지 요헨데어로헨의 조각상으로 고테 역시 도라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라는 말에 진보라는 말에 서로를 틀 지우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틀에 가두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이웃에게는 한 없이 친절할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자식에게도 애정을 베풀 수 있음을 (이는 고테가 딸인 프란치에게 하는 행동이나, 도라의 아버지가 도라에게 하는 행동이 비슷함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다르다고 마냥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치면 극단주의자들인 그들과 다를 점이 없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나치인 고테를 위해 파티를 여는 모습,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도 와주는 모습. 이것은 한 사람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만나면서 점점 넓혀 서로를 볼 수 있고 연결해주는 창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도라는 코로나로 인해 이사한 마을에서 나치라고 주장하는 고테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간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다.'(400쪽)고 도라는 깨닫는다. 그렇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으로 인해 평생 이웃으로 만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을 멈추는 도라. 이런 도라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들이 흔하게 만나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말. 편가르는 말. "넌 일베야. 넌 페미야. 넌 좌파야, 넌 수구야. 넌 꼰대야. 넌 범생이야. 넌 문제아야" 등등.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서 자신 역시 가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모습을,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틀 지워서도 안 되지만 상재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도 지녀서는 안 된다. 소설의 도라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고테를 이해하려 하지만, 고테가 혐오 발언이나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는 비판하고 막으려 한다. 이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람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과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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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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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가 모두 관리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기록하기 위해서 팔뚝에 칩을 심고, 그 칩에 운동, 영양, 질병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늘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하면 법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 건강을 나라가 챙겨주니 좋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내 건강을 지키라고 권유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라면, 이 소설 [어떤 소송]에 나오는 '방법'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나라가 관리하는 것이다. 관리하고 처벌하고...


미아 홀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생물학자다. 그러니 건강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호의적이다. 반면 동생 모리츠 홀은 이렇게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 그리고 건강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자살을 한다. 자살? 이 사회에 가장 큰 범죄다. '방법'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은 오류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방법'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채취된 DNA가 모리츠의 것으로 밝혀져 모리츠가 기소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DNA가 모리츠의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방법'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방법'이 주장하는 바와 동생의 죄없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아 홀은 동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법'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즉, 개인의 건강을 모두 국가의 관리에 둘 필요가 없다는 것. 개인은 고통받기도 하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미아 홀을 선동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크라머라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방법'의 대변자다. '방법'만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그와 미아 홀은 대립을 하지만, 미아 홀은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고, 또 마지막 판결 집행에도 그를 임석할 사람으로 지명한다.


여기까지 '방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미아 홀을 보면, 개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결말로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미아 홀은 사면된다.


이유? 국가는 희생자,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희생자나 순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 '방법'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 권력은 그러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아 홀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싸움이 결국은 거대 권력인 '방법'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는 언론과 권력이 유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에서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거대 권력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질이 된다.


(미아 홀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증거로 채택이 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크라머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이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거나 말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모습들... 이거 과거의 일도 또 다른 나라의 일도 아니다.)


미아 홀의 싸움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러한 싸움은 언론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며 권력이 미아 홀을 고립시킴으로써 - 순교자로 만들면 이는 미아 홀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니, 사면함으로써 미아 홀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하는 방식으로 -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설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난다. 이런 일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방법'이라는 건강 독재...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입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좋을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러한 권력의 통제는 알게모르게 작동을 하거나 또는 언론을 통하여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경계에 서는 일 또는 경계에 서서 이곳과 저곳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일.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러한 것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비록 권력이 이들을 마녀로 또는 범죄자로 낙인 찍을지 모르지만 단일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권력에게 그러한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임을...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 아웃사이더야. 아웃사이더는 위험하게 살아가.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 (145쪽)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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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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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라고 해도 좋지만, 각 장르로 분화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장르 중에 사실주의 소설과 판타지 소설, 또는 SF소설도 있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과 SF소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르 귄 같은 경우에는 SF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가 르 귄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판타지에 SF소설도 포함시키면 된다.


판타지를 그냥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주의 소설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사실주의 소설도 역시 상상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있음 직한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읽는 작품인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과연 판타지 소설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냥 상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상상은 현실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것을 채우려는 우리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문학으로 표현된 것이 판타지 문학이고, 판타지 문학은 현실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생각하기에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읽음으로써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이 판타지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는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 판타지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읽고 현실에서 부족한 점,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생각한 독자가 행동으로 나설 때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문학의 힘.


소위 정통 문학이라고 하는 문학만이 아니라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기에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해 준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한계 너머를 보게 해주는 것이 판타지다. 그러므로 판타지는 현실의 쌍으로 현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현실이 판타지에 영향을 주고, 다시 판타지는 현실에 영향을 준다. 이 책의 첫장에서 저자는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판타지는 물론 진실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았을 뿐, 진실인 것은 맞다"(62-63쪽)


사실이라고 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실이다. 진실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주의 문학이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서 진실로 향해 간다면,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진실로 간다.


경계 너머,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 그러한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기. 이것이 판타지가 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소설에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마법의 세계, 허황된 것 같지만, 그러한 마법은 우리의 사고를 극한까지 몰아갔을 때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불교의 화두에 있는 말,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와 같다고 할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절벽에 서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판타지를 보는 아홉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제목만 이어 보아도 책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기, 마법이 현실 세계로 뻗어 나간다면, 화합을 추구하는 결말, 갈등보다 건설적인 각본, 여성을 억압하는 북 클럽에 저항하기,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 환상 동화 속 소년 찾기, 익숙한 과거를 재구성하는 공간, 두려움 너머의 진실을 보기


그렇다. 판타지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이 나오지만 마법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향하고, 갈등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한다.


여기에 유토피아란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 중의 세계라는 점을 보여주며, 그래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는 과거를 보여주더라도 현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마주치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법을, 다만 두려움에 이름과 얼굴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한 공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411쪽)고 한다.


이 문장만 보아도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작품과 자신이 설정한 아홉 가지 주제로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판타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판타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판타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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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울리지의 불신의 유보, 란 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게 환타지겠지요. 그러려니 하는 거~. 해리 포터에 나오는 1과 2분의 1이란 승장강이 있다고 바로 믿어지는 것. 아니, 믿고 싶어하는 것! 전 판타지를 잘 읽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좀 사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는 것 같아요. 그치만 판타지에 정말 좋은 예술 작품이 많다는 건 압니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이라든가 아술러 르 귄의 모든 소설들....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더 꼼꼼히 읽어야겠어요~. 덕분에요!

kinye91 2025-07-06 08:28   좋아요 0 | URL
판타지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판타지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에요. 그리고 저도 칼비노 소설과 르 귄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르 귄에 대한 글도 꽤 있어서 좋았어요.
 
밤이 오면 우리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1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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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기후 재앙이 일어나는 때다. 세계 각국은 기후 재앙을 과학기술로 풀려고 한다. 인공 태양을 만드는 것. 그러나 태양은 수소폭탄과도 같으니, 또다른 수소폭탄을 만든다고 오해하는 나라도 나온다.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 로봇을 만든다. 로봇이 판단하게 한다. 무엇이 위험한지, 그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서.


하지만 로봇은 판단한다. 인간이 위험요인이다. 인간을 제거해야 위험이 사라진다. 그래서 로봇은 인간을 제거한다.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었다.'(21쪽)


이 소설에는 세 부류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흡혈인. 본래 인간이었으나 흡혈인이 되어 로봇에 맞서 싸운다. 이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자신을 인간이라 믿는 로봇 빌리. 그리고 인간. 인간은 다시 로봇에 대항하는 인간과, 로봇을 추종하는 로봇의 노예 역할을 하는 인간으로 나뉜다.


여기에 지나가는 것처럼 흡혈인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성폭력의 위협에 놓인 여성을 이야기한다. 여성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보는 남성들. 여성을 자신들의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남성들. 인간이 로봇에 의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여성의 화장실을 몰래 보려는 성적 욕구에 지배당하는 남성들. 그 남성들을 물어뜯는 화장실의 여자. 그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흡혈인의 유래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사실 소설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다만,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역시 디스토피아니, 그런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되는 것.


기후 재앙 역시 비인간적 폭력 아니던가. 자신이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하는. 그래서 본질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기술로 상쇄하려는 모습. 지금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세 아닌가.


여기에 맹목적으로 기계를 추종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합리성은 없다. 그들은 노예에 불과하다. 어쩌면 과학기술이 인류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을 보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진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만을 밀어붙이는 특정 종교집단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들에게 소수자들의 삶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악에 물든 행위라고. 그런 사람들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종교인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기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기계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려 하는 인간들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인간들과 달리 로봇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간이라 생각하는 빌리는 "인간의 기준이 뭐죠?"(65쪽)라고 묻는다. 그렇다. 빌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이때 흡혈인인 나는 대답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83쪽)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몸의 약 70%가 물로 이루어졌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액체가 나오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인간성(이것에 대한 정의는 거의 무한하다)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그러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라면 인간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인간에 대한 정의의 확장. 갑자기 해러웨이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그래서 나는 빌리의 죽음에서 '기계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존재가 있었다'(124쪽)고 말한다. 빌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생물학적인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것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인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흡혈인인 나와 로봇인 빌리는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로봇에 대항해서, 비인간성에 대항해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기후 재앙의 위기에 있고, 각종 과학기술이 인간을 위협하기도 하는 이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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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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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는 곧 사람 이야기다. 귀신을 꼭 사람으로만 보지 않아도 결국 귀신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로 귀결이 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존재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귀신을 보고 그것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지금 현재로는. 우리는 둘리틀 박사가 아니기 때문에 동물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또 외계 존재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기에...)


이번 소설은 연작소설이다. 공간적 배경이 같다. 연구소다. 연구소 하면 먼저 감성보다는 이성을 생각한다. 이성이 작동하는 것,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려 하는 곳이 연구소다. 따라서 연구소에는 비합리적인 것들이 들어서기 힘들다.


그런데도 연구소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비합리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 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도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이성을 작동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귀신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귀신은 그냥 귀신이 되지 않는다. 귀신에 홀리는 사람은 그냥 홀리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있다. 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면 그것은 비합리, 비현실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현실적이 된다.


귀신 이야기가 사람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다. 정보라 소설은 이렇게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고, 귀신을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는 선배다. 그런데 선배는 앞을 볼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주로 예지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경향이 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존재가 된다. 선배 역시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또한 이 소설집에서 귀신에게 도움을 받는 존재들은 약자들이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그러나 남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존재들, 그런 존재들은 귀신이 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준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소설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을 읽으면 우선 재미있다. 귀신 이야기는 늘 흥미롭지 않은가. 오죽하면 21세기에도 '심야괴담회' 같은 방송이 인기를 끌겠는가. 영화에서도 공포물에 주로 귀신이 등장하기도 하니, 귀신 이야기는 우선 우리의 호기심을 끈다.


무서워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귀신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무서워하면서도 귀신에 끌리는 존재들... 그런 호기심을 지나면 이제 우리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박에 빠져 가족을 내팽개치는 사람, 산재를 당했는데 그 산재로 인해 능력이 있음에도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양의 침묵)이 나오는가 하면, 귀신을 단지 자신을 알리는 흥미거리로 삼는 사람(저주 양)도 나오고, 금기를 어겨 고난을 겪게 되는 사람(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사람(손수건)과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없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푸른 새), 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고양이는 왜)도 나온다.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인물, 사건을 통해서 그런 인물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잘 되거나 못 되는 모습을 이번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귀신 이야기가 그렇듯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양의 침묵'을 보라. 연구소 부소장 이야기인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사회에서 배제 당하지만 그럼에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존재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대로 '저주 양'에서는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자신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연구소를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양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양이지만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귀신 역시 마찬가지라면 위안이 될까?)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고양이는 왜'에서 살인이 밝혀지지 않아 살인자로 잡혀가지 않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는다) 모습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여름에 이 소설을 읽으면 시원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예전에 '전설의 고향'이란 방송이 한여름에 납량특집이라고 해서 방송되기도 했으니...


여름을 나는 방법으로 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위도 잊고, 또 나름 귀신과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적어도 이 소설을 읽으면 '귀신은 뭐 하고 있나? 저런 인간 잡아가지도 않고.'라는 말을 왜 옛날부터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정작 그러한 귀신도 시한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 소설 '햇빛 쬐는 날'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원한이라는 것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주변에 원한이 있는 존재, 무언가 풀지 못한 문제가 있는 존재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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