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잉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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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모두에게 행복이 충만한 날. 그런데 과연 모두가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을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잉어를 먹던 풍습이 있던 오스트리아. 그런데 전쟁으로 잉어를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한 집안의 가장 큰 축제이던 잉어 요리가 힘들어진 상태. 


이 상태에서도 말리 고모는 잉어를 골라온다. 마른 잉어. 마치 당시 전쟁 통 사람들의 생활을 암시하듯 잉어는 살이 오르지 않았다. 이 잉어를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살려야 한다. 그래야 요리를 할 수 있다. 소설은 '라너 집안의 아이들한테 크리스마스는 12월 6일에 시작된다'(9쪽)고 하니. 거의 20일 가까이 잉어를 살려두어야 한다.


욕조에 들어간 잉어. 가족들은 잉어와 대화도 한다. 친숙해 진다. 그러나 때가 온다. 잉어로 요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죽이지?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는다. 결국 잉어 요리를 담당하는 말리 고모가 나선다. 드디어 나온 잉어 요리. 과연 가족들은 잉어를 먹을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도 자신들과 함께했던 잉어를.


못 먹는다. 모두 먹지 못한다고 하자... 말리 고모는 절규한다. 


"우리가 왜 잉어를 죽였지? 말해봐. 왜 잉어를 죽인 거야?" 말리 고모가 흐느꼈다. 

......

"맞아. 왜 죽이지? 왜? 왜?" 그가 크리스마스 잉어를 말하는 건지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잉어' 중에서. 28쪽)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잉어조차도 그렇다. 함께했던 시간이 쌓이면 쉽게 죽이지 못한다. 살생이란 그렇게 부담이 되는 것. 즉 가까운 거리가 살생을 머뭇거리게 한다. 반대로 가까운 거리가 살생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학살을 보라. 어제까지 다정한 이웃이었던 사람이 학살자로 변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가까운 이웃이든 멀리 있어 전혀 왕래가 없던 사람이든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니 이 소설의 말미에 말리 고모와 라너 박사의 말은 당시 전쟁 상황을 비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잉어의 죽임조차도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왜 전쟁을 하지? 왜 전쟁을 해서 서로를 죽이지?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얻지? 우리는 잉어도 먹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도대체 사람들은 왜?


크리스마스 잉어에 빗대어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잠식하는지까지 나아가게 하는데, 짧은 단편에서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를 맞는 사람들의 설렘, 행복이 드러나는데, 후반부에 전쟁으로 인해, 잉어를 죽이고 결국 먹지 못하는 장면에서 그런 소소한 행복을 전쟁이 앗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 다음 소설인 '길'은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쳇바퀴 돌 듯 집안일에 매여 살던 주부의 죽음.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너무도 기가 막히다. 


'어떻게 될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집안일은 누가 하지? 맙소사, 아이들은 어떡하나.'('길'에서. 70쪽)


아내 생각이 아니다. 남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다. 그만큼 아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그 역할을 할 때는 남들이 인정하지 않고 의식하지도 않지만. 아내의 부재 앞에서 기껏 생각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니...


당시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일 것이다. 아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 이렇게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떠나 이제 자신의 세계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길'이다. 그것이 죽음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만큼 당시 여자들 특히 주부들의 삶은 그렇게 가족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세번째 단편인 '굶주림'은 슬프다. 망상이라고 해도 좋지만, 굶주림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 '굶주림'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한 소설은 '백화점의 야페'다. 


마치 우리나라 최서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넥타이 하나로 세상의 화려함을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해 들어간 백화점에 결국 불을 내고 죽는 야페의 모습. 


아마 '굶주림'에 등장하는 가브릴로프스키의 회상록이 남아 있다면 최서해가 쓴 '탈출기'를 연상시켰을 수도. 망상인지 아닌지 불분명하지만 그녀는 젊었을 때 귀족이었고, 한때는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극심한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고, 그것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마 망상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굶주림'의 화자가 그래도 지식인의 모습을 조금 지니고 있고 화려한 세계를 경험했다면, '백화점의 야페'는 구루병 환자, 지하실에 사는 늘 사회의 하층민이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돈도 잘 벌지 못하는 직업. 그런 야페에게 백화점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 몰래 들어가 원하는 넥타이를 손에 넣지만 넥타이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그러다 의도치 않게 살인을 하고, 결국 방화를 한다.


최서해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기아와 살육'이나 '홍염'이 그렇지 않은가. 살인과 방화. 가난한 사람들이 막판에 몰렸을 때 했던 행동들.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던 조건. 그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나섰던 작가들.


그들이 그런 현실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은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는, 사회를 바꾸어야 하기에 연대하자는 외침이 아니었던가.


비키 바움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전쟁 반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조건 개선, 그리고 집안일에 매몰된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또는 그러한 조건의 개선 등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짧은 소설들이지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과 연결지어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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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1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 한칸을 파란색으로 만들고 싶게 만드는 흄세! 번역도 맘에 들구요! 이 책을 살 이유가 스멀스멀 한개씩 더해지는 중입니다! ㅎㅎ

kinye91 2025-07-21 12:43   좋아요 1 | URL
저에게는 시대를 넘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좋은 소설이었어요.저도 읽기가 편해서 번역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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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7월이 시작하자 무더위도 함께 왔고, 그냥 참을 만하다가 아니라 체온보다도 높은 온도가 되어 일하는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덥다, 참아라. 이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더위를 참으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 더위를 겪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은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폭염 속 노동 시간 중에 휴식 시간을 더 많이 주라는 말에도 반박하는 사람은, 정말, 그런 더위에 나가서 일해봐야 한다. 자신이 과연 그 더위 속에서 한 시간이라도, 아니 십 분이라도 견딜 수 있는지...


이런 폭염이 자연스러울까? 자연이라는 말과 같이 이런 폭염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이 지구를 변화시켰으니까. 기후 위기, 기후 재앙이라는 말 또는 인류세라는 말이 통용이 될 정도로 기후 변화에 인간이 끼친 영향이 크니까.


이렇게 기후 변화에 인간도 고통을 받는데, 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생물들은 어떨까? 바다의 수온이 올라가면 바다 생물이 살아가는 서식지가 변하게 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바다 생물들이 폐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기후 변화는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구에 사는 생물들도 함께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까지 고민할 수 없다고, 내 코가 석 자라고. 아니, 그건 나만이 아니라 함께 겪는 문제니까.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겪는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정보라 소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처음 제목만 보고는 외계인 침공을 다룬 소설인가 했다. 그런데 아니다. 바로 지구 환경 문제다. 물론 외계 생물도 등장한다. 말하는 문어, 대게 등이 등장하니까. 이들을 외계의 권력자가 지구의 권력자와 결탁해서 팔아넘기고 있다는 설정이기도 하니까.


이는 지구라는 생태계에서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들, 또 다른 존재들을 이용하는 것에 빗대었다고 봐도 좋은데...


이런 생명체들을 등장시켜 지구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경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그러니 외계 침공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를 얼마나 망가뜨리고 있는지, 또한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사람들을 어려움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설정도 참신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참으로 경쾌하다. 무거운 주제인데 가볍게 보여주고 있어서 좋다. 너무 진지하게만 접근하면 사람들이 외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으로 소설을 쓴 것은 읽기에도 좋고, 그래 이건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니 좋은 서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읽은 [아무튼, 데모]가 이 소설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책이 머리 속에서 겹쳐지면서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고나 할까. 


소설은 허구라고 작가의 삶과 일대일로 연결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튼, 데모]에서 읽었던 작가의 삶이 떠올라서 싱긋 웃음이 떠오르기도 한다. 대게들에게 연대해서 저항하라는 남편의 말. 그렇지. 약자들은 연대해야지. 저항하지 않으면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지. 그래서 '고래'에서는 우리나라 현실 문제가 나오게 되지. 고래들이 다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우리가 바다를 생물들이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문제는 바다를 오염시키는 존재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모습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 


이 연작소설들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약자라고 해서 권력자에게 길들여지지만은 않는다는 것. 약자들은 연대하고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그리고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함을.


내용은 무겁지만 전개는 가볍다. 이 가벼움이 오히려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물론 환경 문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가 함께 나온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바다 생물들을 통해서 보여주며, 각 소설들이 모두 행복하게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는 비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을 조금 바꾼다. 지구 생물체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지금 조건이 나쁘더라도 웃으며 이 환경을 바꾸기 위해 연대하고 저항할 것이다. 권력을 비판하는 데는 진지함도 좋지만, 때로는 웃음이 더 큰 역할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웃음은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하나로 엮어줄 것이니. 


그래서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웃음이 결국 세상을 바꿀 때까지. 이 소설의 웃음도 그런 역할을 하겠단 생각을 한다.


혹시 이 소설을 읽고 아직 [아무튼, 데모]를 읽지 않았다면 그 책을 꼭 읽길 바란다. 그러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느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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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오즈마 공주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3
L. 프랭크 바움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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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계속 읽으려 했다가, 어느 순간 끊겼다. 다시, 시작. 서두르지 말자. 그냥 천천히 생각날 때마다 읽는 것도 좋다. 한 권 한 권의 내용이 독립적이니까. 물론 등장인물들이 겹치기도 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다시 찾아보면 된다.


이번에는 도로시가 등장한다. 2권에서 도로시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아마도 당시의 어린 독자들은 도로시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견을 보내 왔습니다. "도로시를 다시 오즈의 나라로 가게 해주세요."라는 작가의 말이 있으니.


그렇다. 오즈의 마법사에 도로시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어린 독자들은 실망하고 말리라. 게다가 역시 어린이였던 오즈마 공주가 2권에 나왔으니 오즈마 공주와 도로시가 만나는 장면도 보고 싶어할 테고.


이런 독자들의 바람을 작가는 무시할 수가 없다. 작가와 독자의 교감을 통해 다음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도로시를 다시 오즈로 보낼 수는 없다. 무언가 사건이, 1권에서처럼 토네이도와 같은 강한 바람이 분다든지 해야 하니, 이번에는 바다에서 표류하게 한다.


바다, 파도, 표류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는 설정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 도로시는 헨리 아저씨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길에 함께 가다가 폭풍우가 몰아칠 때 다시 모험에 나서게 된다. 이번에는 암탉과 함께다.


이 암탉이 큰 역할을 하는데, 작은 존재가 커다란 역할을 하니, 이 책을 읽은 어린 독자들은 작은 생명체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을 것이다. 암탉의 이름을 '빌'이라고 한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암탉인데 '빌'이다. 빌은 주로 남자 이름이니, 당시 남녀가 분리되고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암탉 '빌'은 이상에게 보일 수 있다. 도로시가 그 점을 지적하는데, 암탉 자신은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이다.


도로시는 '빌리나'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지만, 빌리나든 빌이든 암탉은 암탉일 뿐이다. 하니, 성별에 따른 고정 관념에 대해서 토론할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할 수 있고... 여기에 양철나무꾼과 비슷한 기계를 만나기도 한다. 태엽을 감아줘야만 움직이는 기계 틱톡.


이들이 만나 모험을 하는데, 여기에 오즈마 공주가 위기에 처한 이브 왕국을 구하기 위해 오고, 1권에서 만났던 도로시 친구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러니 작가는 어린이들의 바람을 3권에서 이뤄주고 있다.


이들이 만나 마법을 부리는 놈 왕국으로 간다. 이브 왕국의 왕비와 왕자, 공주를 구하러. 여기서 펼쳐지는 모험, 그리고 해결책.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도로시. 


이 소설을 읽은 어린 독자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할 수 있을까? 아니다.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 속 모험들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환상 속 모험을 즐기는 이유는 바로 현실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의 바람을 상상 속에서 이루려는 것, 이것이 어린 시절에 지니는 자세 아닌가. 그렇다고 상상 속에만 빠져 있으면 안 된다. 현실에서는 현실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놈 왕국에서 도로시가 얻은 마법의 허리띠가 오즈의 세계에서는 작동하지만,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명확하게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현실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때로는 상상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는 시기. 그러한 시기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 작가. 하여 동심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다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자. 


가끔은 현실을 떠나 환상 속 세계를 여행하는 것도, 도로시와 함께하는 여행을 하는 것도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살기 위한 디딤돌이 될 테니까. 다음에 4권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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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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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빨갱이야!"


한때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였다. 이 말 하나면 그 사람은 고립되고, 다른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빨갱이'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이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말의 쓰임새는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넌 수구꼴통이야!"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인다. 이 말 하나면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수구꼴통'이 의미하는 어쩌면 '꼰대'라는 말과도 통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이렇게 한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한 단어로 규정되어도 좋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을 율리 체가 쓴 이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보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뉜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강요는 자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게 하려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 어떨 때는 자신도 자신을 모를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도라도 그렇다. 진보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우주의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답게 환경도 생각하고, 이민자 정책에도 찬성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열려 있다. 함께 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로베르트도 외견상으로 잘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로베르트를 도라는 견딜 수가 없다. 도라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로운'(36쪽)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마저 강요당할 수 없다고 느낀 도라는 브라켄으로 이주한다.


브라켄으로 이주한 날 마주친 옆집 남자가 대뜸 외친다.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 난 이 마을 나치요."(57쪽)라고. 이게 뭔 일이야? 나치라니...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이 이웃이라니... 기겁을 한 도라.


이후 고테는 수시로 도라의 집에 들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도라의 땅을 정리하게도 하고, 의자와 같은 물건을 갖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쇠도 갖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도라. 하지만 고테는 도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라에게 도라가 자신을 나치라고 경멸한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이주민을 그렇게 여기듯이 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냐고.


이때 도라가 외친다. "물론 내가 낫죠! 당신보다 백배 낫죠!" (453쪽)이 말을 하고 난 뒤 도라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편견, 우월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이나 고테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도라.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사람을 편 가르고, 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하는 도라. 진보주의자든 극우주의자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물론 내가 낫죠!" 근데 언뜻 보면 이 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브라켄 마을 근교에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 전 인류를 갉아먹는, 장기간에 걸쳐  퍼져나가는 독이라고 할까.' (453쪽)


이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치와 이웃에 사는 진보주의자 여자. 그러나 둘은 이웃이다. 친구가 된다. (도라의 생각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정을 하는 고테가 남겨둔, 도라의 강아지 요헨데어로헨의 조각상으로 고테 역시 도라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라는 말에 진보라는 말에 서로를 틀 지우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틀에 가두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이웃에게는 한 없이 친절할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자식에게도 애정을 베풀 수 있음을 (이는 고테가 딸인 프란치에게 하는 행동이나, 도라의 아버지가 도라에게 하는 행동이 비슷함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다르다고 마냥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치면 극단주의자들인 그들과 다를 점이 없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나치인 고테를 위해 파티를 여는 모습,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도 와주는 모습. 이것은 한 사람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만나면서 점점 넓혀 서로를 볼 수 있고 연결해주는 창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도라는 코로나로 인해 이사한 마을에서 나치라고 주장하는 고테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간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다.'(400쪽)고 도라는 깨닫는다. 그렇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으로 인해 평생 이웃으로 만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을 멈추는 도라. 이런 도라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들이 흔하게 만나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말. 편가르는 말. "넌 일베야. 넌 페미야. 넌 좌파야, 넌 수구야. 넌 꼰대야. 넌 범생이야. 넌 문제아야" 등등.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서 자신 역시 가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모습을,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틀 지워서도 안 되지만 상재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도 지녀서는 안 된다. 소설의 도라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고테를 이해하려 하지만, 고테가 혐오 발언이나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는 비판하고 막으려 한다. 이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람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과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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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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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가 모두 관리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기록하기 위해서 팔뚝에 칩을 심고, 그 칩에 운동, 영양, 질병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늘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하면 법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 건강을 나라가 챙겨주니 좋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내 건강을 지키라고 권유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라면, 이 소설 [어떤 소송]에 나오는 '방법'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나라가 관리하는 것이다. 관리하고 처벌하고...


미아 홀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생물학자다. 그러니 건강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호의적이다. 반면 동생 모리츠 홀은 이렇게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 그리고 건강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자살을 한다. 자살? 이 사회에 가장 큰 범죄다. '방법'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은 오류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방법'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채취된 DNA가 모리츠의 것으로 밝혀져 모리츠가 기소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DNA가 모리츠의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방법'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방법'이 주장하는 바와 동생의 죄없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아 홀은 동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법'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즉, 개인의 건강을 모두 국가의 관리에 둘 필요가 없다는 것. 개인은 고통받기도 하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미아 홀을 선동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크라머라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방법'의 대변자다. '방법'만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그와 미아 홀은 대립을 하지만, 미아 홀은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고, 또 마지막 판결 집행에도 그를 임석할 사람으로 지명한다.


여기까지 '방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미아 홀을 보면, 개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결말로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미아 홀은 사면된다.


이유? 국가는 희생자,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희생자나 순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 '방법'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 권력은 그러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아 홀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싸움이 결국은 거대 권력인 '방법'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는 언론과 권력이 유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에서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거대 권력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질이 된다.


(미아 홀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증거로 채택이 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크라머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이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거나 말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모습들... 이거 과거의 일도 또 다른 나라의 일도 아니다.)


미아 홀의 싸움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러한 싸움은 언론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며 권력이 미아 홀을 고립시킴으로써 - 순교자로 만들면 이는 미아 홀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니, 사면함으로써 미아 홀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하는 방식으로 -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설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난다. 이런 일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방법'이라는 건강 독재...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입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좋을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러한 권력의 통제는 알게모르게 작동을 하거나 또는 언론을 통하여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경계에 서는 일 또는 경계에 서서 이곳과 저곳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일.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러한 것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비록 권력이 이들을 마녀로 또는 범죄자로 낙인 찍을지 모르지만 단일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권력에게 그러한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임을...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 아웃사이더야. 아웃사이더는 위험하게 살아가.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 (145쪽)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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