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년이 파랗지는 않다
조지 M. 존슨 지음, 송예슬 옮김 / 모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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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자 퀴어인 남자 이야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와 자신의 성향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이 책의 저자인 존슨은 1985년 생이다. 그렇다면 지금 40이라는 말인데, 그가 살아온 시대라면 흑인도 퀴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니다. 그는 흑인이자 퀴어라는 이유로 언제 어떻게 배제되고 목숨을 잃을지 몰라 두려워 한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워 하는 세상이라면 그건 잘못된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세상이라면 그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두려워하던 존슨. 그렇다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줄넘기를 좋아하지만 미식 축구도 하고, 육상 선수로 나서기도 하는 등 소위 남성성이 강하다고 하는 운동에도 즐겨 참여한다.


성적 지향에 따라 좋아하는 운동과 잘하는 운동이 따로 있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니... 그 역시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밝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었음에도.


따스하게 감싸주는 가족들에게서 자란 존슨에게도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경찰이었던 아빠는 그것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흑인 경찰이지만, 흑인 경찰의 아들에게는 언제든 경찰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 책에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지만 폭력으로 죽는 경우도 있으니...


그렇지만 가족의 지지는 삶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어려움을 건네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존슨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을 축복이라고 한다.


게이 자식을 두느니 죽은 자식을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살해한 사람 이야기도 있는데, 존슨에게는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냥 친구로- 친구가 되는데 성적 지향성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니 -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이런 축복을 그는 자신의 축복만에 그치게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쓴 이유가 그것이다. 여전히 성적 지향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을 밝히기를 꺼리는 청소년들도 많다는 것.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들려줌으로써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그래, 세상이 하나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다양성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고 하면서 유독 성적 지향성이나 피부색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의 개념을 반려동물이나 인공지능 로봇까지로(사이보그) 확장하는 시대에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인 인간을 왜 구분하면서 내치려고 할까?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더욱 더 함께하려고 해야 하지 않나.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름이 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저자가 주장하듯이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활성화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저자의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커뮤니티에 공평과 평등을 부여할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억압자뿐이다.' (126쪽)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당신은 억압자이냐고? 왜 약자들에게 공평과 평등을 부여하면 안 되냐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흑인다움과 퀴어함, 그 밖에 정체성을 누르는 억압에 맞서 싸울 때 가장 든든한 도구는 바로 제대로 된 교육이다.' (93쪽)


흑인다움이나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강자들은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는 것. 백인이 강자인 사회에서 백인다움을,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이성애자임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으니, 여기서 흑인다움과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받는 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함의 주장이다.


그만큼 '주류 사회는 순전히 다름을 억압하려고 '정상' 개념을 세운다'(13쪽)는 말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다.


흑인 남성이자 퀴어로서 살아온 존슨의 회고록, 여전히 소수자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이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세대들이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점을 명심하자.


흑인여성이자 퀴어인 오드리 로드의 [자미], 백인여성이자 퀴어인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도 같은 맥락의 책이다. 다들 소수자지만 그들 또한 다른 상황, 다른 삶을 살았으니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준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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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데모 - 데모하러 간다 아무튼 시리즈 63
정보라 지음 / 위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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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환상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환상이 곧 우리 현실이라고 느끼곤 했다. 또한 작가의 말에서 대놓고 '복수'를 이야기하는데, 왜 그런가를 이 책을 통해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작가라면 세상의 불의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터. 불의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서명을 받고 행진을 하고 오체투지까지 한 작가니, 작품을 통해서 불의, 악을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모라고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거창하고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다. 정보라 작가의 데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하는 것뿐이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 자신들이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정보라 작가는 데모 현장에 함께한다.


이 함께함이 바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이다. 유토피아가 저기 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함께 가는 길이 유토피아임을 작가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고, 또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으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함께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며, 내가 바라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엄숙하고 무거울 것 같은, 데모라는 말에서 풍기는, 적어도 80년대 데모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그러한 행위가 이 책에서는 결코 무겁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잴 필요가 없이 그냥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발랄함, 그렇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불의를 없애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경쾌하고 발랄하게 참여한다.


데모가 축제가 되는 것. 그것은 정보라 작가의 이 책이 아니더라도 이미 작년 12월부터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응원봉이 등장하는 데모라니... 데모는 우중충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세상을 미리 만나게 해주는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곳, 그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는 행복하고 즐거운 장이 바로 데모 현장이어야 한다.


물론 슬프고 무겁고 어두운 데모 현장도 있다. 이 책에 나온 고공농성장이 그렇다. 땅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할 사람을 땅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 자신의 주장을 듣게 하는 것.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자기 주장을 펼치다 내려오면 경찰이 출동해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하게 하기보다는 체포부터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현장. 이런 현장이 결코 발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현장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데모를 하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아직도 데모를 사회를 혼란시키는 이기적인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왜 데모를 하는지, 그리고 데모가 과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


가령 이런 것이 있다. 차별금지법을 생각해 보자. 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는데 반대를 하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이 책에 나온다.


'2020년 여름 국회 앞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오체투지를 하러 갔을 때 확성기를 든 어떤 사람이 차별은 꼭 필요하다며 "사람은 차별을 당해야만 노력해서 극복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59쪽)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자신은 차별당한 적이 없기 때문. 차별이라는 말이 어떻게 삶을 왜곡하고 힘들게 하는지를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


정보라 작가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타인의 몸을 경험할 방법은 없으니까.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경험하는 세상을 정말 전혀, 하나도, 결단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배우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81쪽)고 하고 있다.


이러니 차별이 뭔지, 그것이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차별이 없다면 들지 않을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그 비용을 왜 약한 사람이,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차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삶은 형벌이 아니다. 게다가 피부색이나 출신 국가나 가족 상황 등은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기본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라기보다 차별로 인해 소모되는 비용일 뿐이다. 확성기 든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에게 그런 '차별 비용'을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59-60쪽)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 작가가 데모를 할 수밖에 없다. 데모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정보라 작가의 모습, 데모에 관한 글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혹시 그동안 데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면, 데모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리라. 정보라 작가가 데모에 대해서 경험하게 해주었으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했구나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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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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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직업에 귀천을 따졌기 때문에 이 말이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다면 말도 없었을 테니까.


문제가 없었기에, 문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귀천이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말로만 또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종 직업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인 일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귀천을 따진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와 직업에 성별이 없다를 연결시킨다면, 직업에도 성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예전 책들을 보면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늘 특정 성별이 선택되곤 했으니까. 그만큼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별을 따지는 것이 인권을 위배하는 행위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당연히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성별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없다고 여기는 사회라고 봐야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특정 성별에게는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또한 알게 모르게 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하다.


이제는 그런 압박을 없애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못할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냐 없냐로 따져야지 성별로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직업에 귀천을 따져서도 안 된다. 귀천을 따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특정 성별, 특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하기 힘들었다고 여기던 일들을 한 여성들이 있다. 열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택한 직업을 보면, 화물 노동자, 플랜트 용접 노동자,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 청소 노동자, 레미콘 운전 노동자, 철도차량정비원,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 주택 수리 기사, 빌더 목수가 있다.


여전히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만 이제 이 직업들은 여성들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아니다. 당연히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이들이 그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겪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성차별도 차별이지만, 우선 화장실 문제.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화장실이 없을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 자체가 가장 큰 성차별 아닌가. 화장실 문제가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성차별 문제 역시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조를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노조가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노조를 무슨 '건폭'이라고 폭력배 취급한 사람이 있었으니... 노조에 속한 건설 노동자들의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지도자인 양 하는 시대는 갔으니, 이제 노조를 범죄시하는 그런 시각들은 사라질 거라 믿는다.


처음에 시작한 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당당하라'다. 주눅들 필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참여하라고. 못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부딪쳐 보라고. 그리고 남들이 무시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또한 직업에 성별도 없다.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빌더 목수의 말로 맺는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엄청 멋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노동'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요.' (빌더 목수 이아진 편에서.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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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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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글이다. [자미]를 읽고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은 다음에 읽게 된 글. 두 책을 이미 읽었기에 로드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함을, 그런 점을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흑인이고, 어머니, 시인이자 전사였던 사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으면 전사가 되려 했을까? 아니 전사가 되었을까? 전사로서 싸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오드리 로드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행동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차이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감동적이다. 특히 첫글에 실린 이말.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포스터에 실린 말을 로드는 인용한다. '그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형제입니다!' (36쪽)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서는 차이를 무시하려 한다. 왜 흑인이 아니라고 하나? 물론 흑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흑인인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흑인이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뭉뚱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드는 이 문장을 바꾼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37쪽)


'그'에서 '나'로 주체를 바꾸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형제, 자매라는 말로 함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함께함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차이를 품고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오드리 로드의 이 말이 바로 이러한 차이의 인정, 함께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 속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두 가지는 차이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77-178쪽)


이것, 차이를 다리로 만드는 법. 이것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치려는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가 배제와 적대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했던 것.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행동의 원료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분노에 양분을 대는 바로 그 억압적 환경을 바꾸는 행동의 원료로 분노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63쪽)고 하고 있으니, 이 말에서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36쪽)라고.


그렇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습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무너져 가게 될 테니까.


이렇듯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으면 고정관념에 갇힐 새가 없다. 고정관념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차이가 들어온다. 차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다리가 된다.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오드리 로드가 시인이자 교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로드의 이 말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다른 무엇보다 배움의 장치이다. 진실한 감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배우는 것들이 있다. 함께 소통한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참된 시를 쓴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145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차이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차이들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될 수 있음을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서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로드의 말처럼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오드리 로드의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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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 호모심비우스
최재천.팀최마존 지음 / 더클래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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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외면할 수 없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온몸으로 덤벼들자.'(20쪽)


이런 마음가짐, 행동이 바로 양심이고 양심의 실천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욕인가? 그럼에도 자신이 양심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양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런데 양심을 잊고, 또는 잃고 사는데 남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양심 없음은 사회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 또 생명체가 아닌 존재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이처럼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다 같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양심 없는 행동이, 말이 다른 존재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재천 교수의 강연 중에 양심과 관련이 있는 강연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총 7개의 강연이 실려 있는데, 영상으로 볼 수도 있게 큐알코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책을 읽고 또 영상을 찾아 봐도 좋겠다.


첫 강연은 서울대 졸업 축사로 시작한다. 서울대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누리고 사는지도 다 안다. 그렇게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들의 말, 행동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다른 존재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최재천 교수는 강연의 마지막에 '부디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주십시오'(40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사회에서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집단이 서울대 출신들이라면, 그들은 그보다 더 남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양심일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서울대 출신들도 그들 나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만.


다음은 복제한 반려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복제한 반려견은 진짜 반려견일까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 진짜란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똑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아니라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주장이다. 복제를 했다고 해도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세상을 떠난 반려견을 잊지 못해 복제 반려견을 들이려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여기에 복제 인간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 과연 우리는 복제를 어떻게 봐야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네 번째 강연은 수족관에 갇힌 동물 이야기다. 제돌이로 대표되는 돌고래와 롯데아쿠아리움에 있는 벨루가 이야기. 


대양을 누벼야 하는 그들이 수족관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존재의 생활과 환경을 제약하는 것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자신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막고 있는 현실. 그래서 그들을 자신들이 본래 살던 환경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기업 이야기도 있지만. 벨루가는 지금도 롯데아쿠아리움에 있으니.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과학자(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도 양심 때문일 것이고,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금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구처럼 보이는 그러한 연구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진정 과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기초 연구비를 꾸준히 오랫동안 지급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국가가 해야 한다. 기업은 당장의 성과를 내는 연구에 지원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에는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에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강연은 호주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우리나라는 호주제라는 제도는 없다. 호주제가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녀불평등을 상징하는 제도였기에 폐지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과연 남녀불평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느냐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한번에 청소한 헤라클레스는 없다고 해야 할 테니... 이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진화와도 어울린다면,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마치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이 바로 '양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전념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 권력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바로 최재천 교수의 '양심'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인용한 말. 그것이 바로 양심이니, 그런 양심 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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