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류 살림지식총서 103
이희수 지음 / 살림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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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기 전에 미리 그 곳에 대해 알고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이 말의 위력은 실제로 알지 못하고 여행을 갔을 때와 알고 갔을 때 느끼는 엄청난 차이에서 실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천년고도 경주가 있다면 터키에는 천년고도 이스탄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스탄불은 이름이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듯이 매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성소피아 성당이라고 불리는 아야소피아 사원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기독교 성당이었다가, 다음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쓰였고, 지금은 아예 박물관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 사원에 들어가보면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탄불에는 각종 문화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국제적인 도시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이 책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터키 사람들의 친절함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고, 이 친절함이 다른 문화를 용인하는 자세로 나타남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시에 대해서 이만큼 자세하게, 그리고 쉽게, 실감나게 쓴 책이 있을까 싶다. 

작은 소품에 불과한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살고 겪은 경험도 녹아 있으며, 이스탄불에서 우리가 보고 알아야 할 건물, 풍습, 환경, 역사까지 잘 녹아들어 있다. 

단 하루만에 이스탄불을 겉만 훑어보고 온 나에게 이 책은 그곳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해주었고, 저자의 말대로 이스탄불은 한 번 오면 또 오고 싶어지는 도시라는 말에 동조하게 해주었다. 

아야 소피아, 술탄 마흐메트 사원, 히포드롬 광장, 톱카프 궁전,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과 피에르 로티 찻집 정도밖에 들르지 못한 나에게, 이 곳들에 대한 설명은 그곳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것을 넘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그밖의 곳에 대한 설명은 다시 한 번 이스탄불에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을 품게 했다. 

이스탄불을 여행하고 싶으면 그 전에 이 책을 읽고, 손에 들고(사실 손에 들기 딱 좋은 크기이고, 가는 도중 비행기에서 읽을 수도 있고,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이 책을 참조하면서 곳곳을 여행해도 좋다) 가면 좋을 듯하다. 미리 가 본 사람들은, 나처럼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막연히 이스탄불에 대해 알고 갔다온 사람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이스탄불을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스탄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이 본 것에 더한 것들을 채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게 한 책이다. 

작은 책이지만 이스탄불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책. 

여행을 가기 전에 꼭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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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묵자 -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01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1
친위 지음, 이영화.송철규 옮김 / 예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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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생각나는 사람, 그가 바로 묵자이다. 

겸애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 겸애는 그의 기본적인 사상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비공'이나 '절용'의 사상가로 다가온다. 

몇 해 전에 영화 "묵공"이 상영되었다. 묵공에서 주인공은 혁리라는사람인데, 이는 묵자의 제자이고, 묵자는 비공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를 펼치고 있다. 

특히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으니, 크고 작은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지금 묵자는 다시금 우리가 새겨볼 사람이 된다. 

여기에 절용편을 보면 묵자는 형식에 치우치는 모습을 비판하고 실질을 숭상하라고 하는데, 묵자의 절용편을 지금에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도 화려하게만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묵자라고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은 비공편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제목을 이리 붙인 까닭은 묵자의 평화주의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뜻이리라. 

묵자의 말 중에서 좋은 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뽑아놓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묵자의 글도 읽을 수 있고, 그와 관련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하루에 한 편씩 곱씹으면서 읽으면, 읽고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나는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 우리 삶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중에 요즘 정세와 맞물려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요즘의 군자,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은 작은 지혜만 알고 큰 지혜를 알지 못한단 구절이다. 

자신의 이익, 자신이 속한 정파의 이익은 잘 챙기며,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또 정파에게 이익일까 하는 면을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전체를 위한 일, 옳음을 위한 일에는 까막눈인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신만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올바름의 견지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들은 묵자의 관점에서 보면 소인배일 뿐이다. 

여기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번잡할 뿐이라는 절용편을 보면, 텔레비전에서 늘 보이는 핸드폰(휴대전화) 광고가 생각났다. 

마치 핸드폰이 없으면 원시인인양, 그냥 통화만 되는 전화기가 아니라, 사진 촬영에서 노래듣기, 그리고 영상통화에 인터넷 검색, 영화감상까지 모두 되는 전화기가 나와서, 그것을 지니고 다녀야만 현대인인 것처럼 광고하는데... 이 광고 덕인지, 우리 주변에선 소음이 넘쳐나 번잡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는 묵자의 관점에서 보면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이다.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데, 필수적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묵자가 배격하는 행위이다. 

이런 묵자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생각나게 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 이 묵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말, 하나, 나를 물에 비추지 말고, 사람에 비추라는 말. 

결국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또 남들도 역시 나를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말. 

내가 잘났다고 생각할수록 내 주변의 사람을 살펴볼 줄 아는 능력, 그것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이 묵자에 관한 책이 알려주고 있다. 

어려운 철학서라기 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을 읽고, 묵자를 꼼꼼이 읽고 싶다면 "묵자"를 사서 읽어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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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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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그냥 학교에서 배운대로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으로 존재하는 정치형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더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간접민주주의니 직접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을 듣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기도 했고. 당연하다는 생각은 발전을 가로막는다.

요즘에 민주주의의 위기니, 독재니 하는 말들이 나와서,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나 하는 고민은 하긴 했지만...민주주의란 개념 자체에 대한, 그리고 그 개념 속에 들어있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철학의 부재!

그런데, 이 책, 민주주의에 대해서 정말로 많이 생각하게 해 준다. 

우선 민주주의의 다른 나라 이름인 데모크라시를 분석한다. 데모스와 아르케에 대한 이야기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시작한다. 데모스는 민중의 힘을 이야기하는데, 글쓴이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이를 서로 번역가능하게 만들고 서로 소통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신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즉 데모스는 이미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무엇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또 아르케는 근거,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민주주의에서는 정체를 규정하는 특정한 근거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것이 비판에 직면한 곳에서 제기된다'고 하여, 민주주의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닌, 생성, 발전, 이행되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민주화란 자격이나 조건, 척도를 넘어 다양한 존재들이 연대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부여된 형상을 넘어 공동의 삶, 연대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를 '데모스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사람들의 복종을 끌어내는 통치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이 유포하는 유혹이나 공포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의 크기, 권력조차 그런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크기로 표현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앞으로 민주주의 싸움은 우리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과 이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대안적 형식의 발명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이라고 책을 끝맺음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지 말고,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우리가 우리 삶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상생활의 형태가 바로 정치 형태가 되는 모습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 삶들이 정치와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이런 삶의 형태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기도 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란 늘상 있어온 어떤 것인데, 이 민주주의란 개념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가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란 결국 배제되고 소외된 집단이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찾아나가는가로 귀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국민(인민), 주권, 대표로 표상되는 민주주의에서는 배제가 이미 전제되어 있으니, 이런 배제를 어떤 방식으로 참여로 전환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 이후가 아니라  도래할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글쓴이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민주주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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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를 봤다. 

황선미 원작의 소설을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온 가족이 다같이 보러 갔다. 

물론 원작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관심있게 보기로 했는데... 

어떻게 다른가 보다는 여전히 이 작품이 감동적인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았다. 

그런데 과연 어린이들이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어쩌면 이 작품은 어른들에게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해주는 수달, 달수의, 그리고 박철민의 목소리가 무거운 내용을 어느 정도 부드럽고 아이들의 취향에 맞게 해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의 그림도 좋고, 가족이 함께 보면 좋은 영화라는 생각. 

여기서 잎싹이 이름을 짓는 모습은 이름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모습일테고. 즉 이름없는 존재에서 이름이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남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우쳐가는 과정이고, 다른 존재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는 과정은 나와 함께 하는 남들은 누구인가를 깨우쳐가는 과정이라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목이 마당을 나온 암탉인데, 처음에는 잎싹이 양계장에서 탈출해 마당에서 사는 삶을 꿈꾼다. 이 때 잎싹이 꿈꾼 마당은 자유와 협동이 존재하는 공동체였는데, 그러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곳에서도 서열과 복종만이 있었다는 사실, 처음엔 추방이지만, 다음엔 스스로 마당을 거부하는, 즉 마당은 울타리가 쳐진 남의 통제에 길들여진 공간이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주고 그래서 잎싹은 이 마당을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마당을 나와서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 그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잎싹의 최후로 말해주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보든, 책을 먼저 읽든 관계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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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평전 - 지성과 역사적 상황
김용직 지음 / 일지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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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그의 이름을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다. 조선소설사를 쓴 사람이라는 사실. 

그 전까지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좌익활동을 한 죄목으로 1949년에 총살을 당했고, 그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그에 대해서 연구하고 언급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말이다.

그 때 그의 이름을 듣고, 그의 책 이름을 듣고, 그것이 20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와,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과연 나는 20대에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 부러움을 가졌었다. 

우리의 20대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지금의 20대도 역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고,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생각할 여력도 없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없지도 않으니...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김태준이 살아갔던 그 시대도 공부에만 집중하기엔 상당히 문제가 있었던 시기였다. 일제시대, 조국을 상실한 상태에서 공부에만 집중한다면 그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상태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업적을 남겼다면 그는 이런 시대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고 있었단 얘기가 된다. 

사회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일을 개척해나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이지 않겠는가. 

그가 국문학계에서 큰 업적을 남겼지만, 그 업적은 그가 장년이 되어서 더 발전되지 않는다. 발전시킬 사회적 상황도 아니었고,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이 그런 사회의 모습 속에서 학문에만 안주하게 하지도 않았으리라. 

김용직이 쓴 이 김태준 평전은 더이상 자료가 유실되고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김태준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간단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기보다는 그에 관한, 또 그가 살았던 시대, 함께 했던 인물들에 관한 총체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대 순으로 내용을 전개하되, 김태준 주변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평전이라기보다는, 예전 김윤식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처럼, 이 책도 김태준과 그의 시대라 할 정도의 방대한 책이다. 

초반기 국문학자로서의 업적과 한계를 나름대로 자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또 현대 이론의 성과까지 참조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가 학자로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남로당의 핵심인물로서 활동하는 후반기에는 그의 주변 인물들까지 다룸으로써 그 시대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이 책에는 김태준의 공과가 고스란히 실려있다고 봐도 좋으니, 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읽으면 좋겠다. 굳이 이런 전공분야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한 시대, 그 격랑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 간 김태준...  

우리는 한 지식인의 더 큰 업적을 그의 죽음으로 보지 못했고,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한 사람의 죽음이 결국 우리나라 문화 수준, 지적 수준을 가리킨단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이념을 지녔다는 이유로 사장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덧말 

김태준에 관한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눈에 거슬리는 구절들이 있으니... 

47쪽 4번째 줄 학생들은 고종의 인산날... 6.10만세 운동은 순종의 인산날이니... 고종을 순종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나? 

160-161쪽 조선한문학사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160쪽의 밑에서 8번째 줄 조선소설사에 임한 의식은 조선한문학사에 임한 의식으로 바꾸어야. 또 161쪽의 6번째 줄 조선소설사 역시 조선한문학사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12쪽 10번째 줄 도남은 1983년 중반기부터... 이건 도남은 1938년 중반기부터여야 할 거고 

322쪽 44년 3월 백철 부부가 ...이육사를 발견했다 고 했는데... 328쪽에 보면 1943년 당시의 경성에서 체포된 다음... 다음해...1월 16일 ..감방에서 절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철 부부가 육사를 만난 것은 43년이 아닌가. 44년에 죽은 이육사를 만났을 리도 없고...이 두 쪽에서 연도가 헷갈린다.    

뭐.. 소소한 오탈자야 그렇다치더라도, 이런 문제는 바로잡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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