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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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직업에 귀천을 따졌기 때문에 이 말이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다면 말도 없었을 테니까.


문제가 없었기에, 문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귀천이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말로만 또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종 직업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인 일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냐에 따라 귀천을 따진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와 직업에 성별이 없다를 연결시킨다면, 직업에도 성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예전 책들을 보면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늘 특정 성별이 선택되곤 했으니까. 그만큼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별을 따지는 것이 인권을 위배하는 행위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당연히 직업에도 성별을 따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성별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없다고 여기는 사회라고 봐야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특정 성별에게는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또한 알게 모르게 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하다.


이제는 그런 압박을 없애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못할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냐 없냐로 따져야지 성별로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직업에 귀천을 따져서도 안 된다. 귀천을 따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특정 성별, 특히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하기 힘들었다고 여기던 일들을 한 여성들이 있다. 열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택한 직업을 보면, 화물 노동자, 플랜트 용접 노동자,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 청소 노동자, 레미콘 운전 노동자, 철도차량정비원,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 주택 수리 기사, 빌더 목수가 있다.


여전히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만 이제 이 직업들은 여성들이 할 수 없는 직업은 아니다. 당연히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이들이 그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겪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성차별도 차별이지만, 우선 화장실 문제. 바깥에서 일을 하는데 화장실이 없을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 자체가 가장 큰 성차별 아닌가. 화장실 문제가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성차별 문제 역시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조를 중심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노조가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노조를 무슨 '건폭'이라고 폭력배 취급한 사람이 있었으니... 노조에 속한 건설 노동자들의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지도자인 양 하는 시대는 갔으니, 이제 노조를 범죄시하는 그런 시각들은 사라질 거라 믿는다.


처음에 시작한 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당당하라'다. 주눅들 필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참여하라고. 못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부딪쳐 보라고. 그리고 남들이 무시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또한 직업에 성별도 없다.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빌더 목수의 말로 맺는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엄청 멋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노동'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요.' (빌더 목수 이아진 편에서.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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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카프카 씨 - 카프카 서거 100주기 기념 앤솔러지
한유주 외 지음 / 카프카의방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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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작년은 카프카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하여 카프카 서거 100주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여러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책도 여러 권 나오고.


죽어서 더 명성을 누리게 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 카프카일 텐데, 그만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형용사까지 지니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행사나 책이 나왔겠지만, 이 책은 카프카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실었다. 네 명의 작가가 각자 자신에게 영향을 준 카프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로 섰다.


한유주의 '암담'은 제목 자체에서 불안함, 불명확함, 불확실성 등이 느껴진다. 암담하다는 말을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쓰기 때문이다. 사실 카프카 작품들이 이러한 불안, 암담함을 많이 드러내고 있기는 한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유주가 받아서 쓴 것.


배경은 인도다. 낯선 곳이다. 아마도 유럽 사람들에게 인도란 다른 세계, 그들이 탐험하고자 했던 세상이기도 했으리라. 물론 카프카 생존 시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탐험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또 영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는 낯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인도는 지금 우리에게도 낯선 나라이니까.


낯섬과 만나는 불안함. 그 속에서 지내야 하는 모습을 '암담'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인도'보다는 카프카 소설 중에서 '실종자'를 더 많이 떠올렸으니...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 이야기.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함,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 그런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실종자'이고, 한유주가 쓴 '암담'을 읽으면서 '실종자'에 나오는 카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카알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암담'이었으니... 어디 그만 그런가? 이제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도 미래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암담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카프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불안감이나 한유주가 확장한 암담함은 지금도 우리 삶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 문학의 현재성!


김태용이 쓴 '카프카 씨, 영화관에서 울다' 역시 불안함,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가 1913년 11월 20일에 쓴 일기'영화관에 있었다. 울었다,'(52쪽에서 재인용)라는 내용에서 착안한 소설이라고 한다.


카프카가 영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김태용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풀이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관이 어떤 곳인가? 남과 소통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로 다른 세계를 관찰하는 곳 아닌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영화관 아닌가. 영화와 소설의 차이나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영화관을 생각하면, 우선 어둡다. 그리고 단절된 세계다. 나만의 의자에 앉아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혼자 곱씹으면서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오면 이제 현실로 돌아온다. 다른 세상에서 현실로...


물론 김태용의 소설은 다르다.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구두를 가져간다. 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간접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는데...


민병훈이쓴 '예언자의 꿈'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다리'를, 김채원이 쓴 '더블'은 카프카 소설 중에서 '공동체'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카프카가 다리를 서술자로 삼고 있다면, 민병훈은 그 다리를 찾아 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중간중간에 소설 '다리'에 나온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서술자가 달라졌으므로,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더블' 역시 카프카 소설에서 배제되는 여섯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카프카는 여섯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내용으로 이미 존재하던 다섯을 중심으로 썼다면 김채원은 나중에 온 여섯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리'나 '공동체' 모두 번역된 소설집에서 두 쪽짜리 소설이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소설 나같은 경우는 읽고는 그냥 잊고 말았는데, 소설가들은 그러한 소설에서도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소설을 쓴다. (이 소설들 덕분에 다시 카프카의 두 작품을 찾아 읽었다. 정말 짧았다. 이 짧은 소설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작가들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을 그냥 넘기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다시 재탄생 시키는 작가의 모습들. 그것이 바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이렇게 우리 곁에 있고, 또 다른 작가들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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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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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글이다. [자미]를 읽고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은 다음에 읽게 된 글. 두 책을 이미 읽었기에 로드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함을, 그런 점을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여성이자 레즈비언이자 흑인이고, 어머니, 시인이자 전사였던 사람.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으면 전사가 되려 했을까? 아니 전사가 되었을까? 전사로서 싸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오드리 로드라고 할 수 있다. 글로, 행동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차이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보여준 사람.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감동적이다. 특히 첫글에 실린 이말. 1960년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포스터에 실린 말을 로드는 인용한다. '그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형제입니다!' (36쪽)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서는 차이를 무시하려 한다. 왜 흑인이 아니라고 하나? 물론 흑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흑인인 것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흑인이라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뭉뚱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로드는 이 문장을 바꾼다.


'나는 흑인 레즈비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37쪽)


'그'에서 '나'로 주체를 바꾸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 형제, 자매라는 말로 함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함께함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차이를 품고 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오드리 로드의 이 말이 바로 이러한 차이의 인정, 함께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다.


'우리는 우리의 차이 속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 두 가지는 차이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77-178쪽)


이것, 차이를 다리로 만드는 법. 이것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 그것을 고치려는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분노가 배제와 적대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했던 것.


'내가 배워야 했던 것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행동의 원료로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분노에 양분을 대는 바로 그 억압적 환경을 바꾸는 행동의 원료로 분노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63쪽)고 하고 있으니, 이 말에서 전사로서의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차이를 없애라고 주문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흑인 레즈비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정말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36쪽)라고.


그렇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습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무너져 가게 될 테니까.


이렇듯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으면 고정관념에 갇힐 새가 없다. 고정관념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차이가 들어온다. 차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다리가 된다.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오드리 로드가 시인이자 교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


로드의 이 말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다른 무엇보다 배움의 장치이다. 진실한 감정을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배우는 것들이 있다. 함께 소통한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진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가르치는 일이다. 참된 시를 쓴다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145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차이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와 함께 가는 것이다. 하여 그러한 차이들이 세상의 어려움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될 수 있음을 오드리 로드의 글을 통해서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로드의 말처럼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오드리 로드의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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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시 - 광신의 언어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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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의 언어학'이라는 작은 제목이 있다.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언어라는 뜻이다.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의 언어에 의해 틀지워지는 것,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어떤 식으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컬트라고 한다. 좋은 의미로 쓰지 않고,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흐름을 컬트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컬티시라는 말은 합리, 이성을 넘어 맹목적으로 휩쓸려 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물론 컬트를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다.이 용어 자체의 난해함에 대해서는 28쪽-33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냥 좋지 않은 흐름으로 사람을 빠뜨리는 정도의 언어로 쓰겠다)


'소위 컬트 (컬트 집단에 몸담으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한 인류학적 매혹 모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특히 존재론적 고민이 널리 이루어지는 시기에 성황을 누린다.' (40쪽)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쉽게 컬트에 휩쓸리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단정적이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컬트에 사람들은 위안을 받기 때문에 컬트가 유행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컬트의 특징은 무엇일까?


컬트의 언어는 전향conversion, 조건형성 conditioning, 강제 coercion라는 체계적인 기술을 적용한다고 한다. (97쪽)


전향은 바로 '러브 바밍 love bombing'이라고 할 수 있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별하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불안한 시대에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또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받고, 그 사람이나 집단에 충성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언어 전술을 통해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고. 집단 바깥의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여겨진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행동을 학습하는 이 무의식적인 과정은 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을 조건형성이라고 부른다'(98쪽)고 한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사람들이 기존의 현실, 윤리의식, 그리고 자의식과 완전히 상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깔려 있으며, 최악의 경우 개인이 파괴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강제라고 한다'(98쪽)고 하는데, 이 과정까지 가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말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컬트 집단이 지닌 모습이고, 거기에 빠진 사람들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성적인 인간이 컬트에 빠질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치가 작동된다고 한다.


첫번째가 바로 편 가르기다. 내 편과 저쪽 편을 갈라 다른 쪽을 배제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를 쓰게 되는데, 이를 로드된 언어 loaded language라고 한다. 그 말만 들어도 전율이 이는 언어. 그런 언어들을 우리는 집회에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특히 몇몇 집단의 경우에서 더더욱. 여기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고 차단 클리셰를 사용하면 컬트는 완성된다고 한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될 때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을 우리 역시 자주 만나지 않았던가. 누군가와 토론을 할 때 아예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말을 차단하는 말들. 그것이 바로 사고 차단 클레셰다.


이 책에서 말한 그러한 '컬티시'가 미국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다. 저자가 들고 있는 컬트의 예는 종교, 외계인을 믿는 집단, 다단계 판매, 피트니스(지금 우리 사회에서 하고 있는 피트니스와는 결이 다르다)와 같은 운동,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등등이 있다. 이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컬트에 빠지게 했는지를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보여주는데,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컬티시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집단들, 다른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단정적으로 차단하는 말들. 우리 편 아니면 다 나쁜 쪽이라는 사고를 고수하는 집단들. 참 많다. 그런 집단들이 우세하게 되면 안 된다.


이 책에서 컬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컬트의 위험성을 이 책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니,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말한 방법은 너무도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우리가 충분히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적당히 신중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논리적 사고나 (다 이유가 있는) 감정적 직감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의하'(322쪽)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생존의 본능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 감정적 직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직감에 질문, 논리적 사고를 덧붙이면 컬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저자는 '마음 한편에서는 동시에 여러 '컬트'에 속하'(324쪽)는 방법도 건강한 방법이라고 한다.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으면 편향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컬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는 다른 관점을 들을 귀를 갖추라는 말과 통한다. 즉 열린 귀를 가지고 다양한 말들을 듣는다면 편향된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컬티시한 언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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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탁 걸리는 것이 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왜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을까'


  쉽게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알 것 같은데 결국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알 수가 없다.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말이다. 말은 기호이기 때문에, 이 기호를 둘러싼 많은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말을 하는 입(혀)를 아무리 살펴도... 말이 밖으로 나와 다른 존재에게 가 닿을 때까지 그 의미, 그 위력을 알지 못한다.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자리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앉는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자세를 지니고. 그러니 하나의 말에도 수많은 의미가 겹쳐 있다. 


'창틀엔 무수한 손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 있다'


이때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내려 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상대의 말을 내가 더 많은 의미를 덧붙여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것이 말의 역할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은가. 상대의 속, 두께를 가늠하지 않고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한 말들을 잘 살펴야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상처를 입은 말들을 하지 않았던가. 잘못된 말이 있었다면 그 말들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말이 지닌 위력을. 좋은 말은 상대와 나를 연결해주는 못과 같은 역할을 하니.


'못이 가득 쌓인 상자 안에서

휘어진 못을 골라내면서'


하지만 잘못된 말은 우리를 잘 연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낸다. 상대만이 아니라 말도 제대로 쓰이지 못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지점에서 부적절한 말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생각한다

빗나간 망치가 내려친 곳을'


자,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듣는 귀가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잘 듣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려 해야 한다. 그런데도 잘 들리지 않으면, 무언가 이상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다시 뒤돌아봐야 한다.


'두 귀를 세우고 뛰어가던 토끼가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처럼'


이때 나를 멈춰 세우는 말은 남의 말이 아니다. 바로 내 말이다. 잘못 나온 말. 상황에 맞지 않는 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 그 말이 화살처럼 나에게 와 박힌다. 아, 말을 걸러내지 못했구나. 


'앞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후회가 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발화된 말.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주워담으려 해도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말 자체가 혼자라 아님을, 내가 홀로 앉아 있다고 해도, 그 자리가 내 자리라 해도 이미 누군가가 앉았던 자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앉을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붉어진 두 눈엔 이유가 없고

나의 혼자는 자꾸 사람들과 있었다'


엄청난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많은 말들 중에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서로를 이어주는 말들이 아니라 서로를 떨어뜨리는 말들. 그런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 제 자리만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는 내 자리야 하지만, 아니다. 세상에 지정석이라 해도 나만의 자리는 아니다. 지정석 역시 함께 앉는 자리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9현대문학상수상시집 수상작 '지정석'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말이 나만의 것이 아니듯, 자리 역시 나만의 자리가 아님을...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야 함을.


작은 따옴표(' ') 안의 문장은 수상작인 안미옥의 '지정석'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2019 현대문학상수상시집.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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