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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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두 친구.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이기도 하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남들의 눈에 비친 이 아이들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까? 과연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친구란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면, 친구라는 말에는 이익이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이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친구 사이에서는 친해 보인다는 말도, 이용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냥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친구 사이를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테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위악과 위선'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주연이는 위악, 서은이는 위선. 그렇게 딱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아니, 소설 속 서은이는 위선이 아니라 선함을 지닌 아이다. 


그런데 그런 선함이 가장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주연이와의 관계에서다. 선함. 능력 없는 선함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남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넌 착하니까 ...:란 말 속에서 그런 힘없는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착함을 남에게 보여줄 때도 있다. 무언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착함으로 무장할 수도 있는 것. 이것을 '위선'이라고 해도 좋다.


서은이는 착하다. 본성이 착하다. 가난한 집에서 살지만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남에게 군림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착한 아이를 대부분의 영악한 아이들은 무시한다. 대놓고 따돌릴 수도 은근히 따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대응을 하지도 않는다.


이때 서은이에게 다가온 주연. 집이 부유하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주연이는 서은이의 친구가 되어 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운동화나 옷도 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주는 법을 잃었다.


기대에 찬 부모, 자신들의 결핍을 딸에게서 충족하려고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연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모른다. 늘 받고만 살았기 때문에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악으로 대응한다.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데, 그 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악'을 가장한다. '위악'이다.


그러니 주연은 서은이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군림이다. 자신의 뜻대로 서은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은 주연이 생각하기에 '위악'이지만, 서은에게는 '악'이다. 견딜 수 없는 행위이다. 지금은 없어서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참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을 감춘 '위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았으련만, 주연은 그것이 '위악'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행동, 친구를 위한 행동이라고 착각을 한다. 


왜? 서은이가 마치 그것을 진심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주연이 앞에서 서은이는 '위선'이었으니까. 진실을 감추고, 지금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관계.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주연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위선'이 필요하다.


자, 어떤 사람이 더 약한가? '위악'은 약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위선'은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꾸며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강함은 '위악'보다는 '위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 형편과는 다르게 내면은 서은이 훨씬 강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겉으로는 강한 것 같은 주연은 내면의 약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위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이 둘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위악과 위선'을 판단하려 한다. 아니 그들은 '위악과 위선'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과 선'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주변인들에게 보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악과 선, 위악과 위선'을 우리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무엇보다 친구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위악과 위선'이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친구란 그렇게 꾸며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과연 '친구'가 있는지를 묻게 한다. 두 아이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두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이는 두 아이의 관계를 통해서 학교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우정을 키우는 장으로서의 학교. 옛말이다. 지금은 '위악과 위선'이 판치는 관계들만 있는 학교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2권이 나왔던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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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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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은유'가 느린 우체통에 써 넣은 편지가 어떻게 과거의 다른 '은유'에게 전달이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편지. 일본 작가가 쓴 [나미야 백화점의 기적]은 현재와 현재를 잇는 편지로 치유가 되는 과정이라면, 이 소설은 현재의 은유가 과거의 '은유'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은유. 아빠가 재혼을 한다고 하는 바람에 반발심이 생기고, 늘 뚱한 표정과 무덤덤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아빠가 미소를 짓고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에 적응이 안된다. 게다가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은유.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달라진 아빠 때문에 쓰게 된 편지. 그리고 받은 과거의 은유가 보낸 편지. 여기서 작가는 우리에게 은유의 엄마에 대해서 추측하게 만든다. 도대체 은유의 엄마는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아빠와 할머니-할아버지는 은유에게 엄마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엄마에 대한 은유의 추적이 과거의 은유 도움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름이 같다. 그리고 현재의 은유에게는 딱 편지 올 시간만큼만 흐른다면, 과거의 은유에게는 편지 한 통을 받고 쓰고 다시 받는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한참 어리던 과거의 은유가 어느덧 동갑, 언니, 그리고 이모 나이까지로 성장해 갈 동안, 현재의 은유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게 된다.


고민. 마음 속에 쌓아두면 병이 되지만 밖으로 표출하면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소되기도 하고. 즉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면 그 고민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현재의 은유가 그렇다. 물론 편지를 통해서 청소년들이 좋아할 내용도 작가는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하는 가족에 대한 고민은 편지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고, 또 청소년기에 꿈꾸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을 이들의 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같은 시기를 거쳐간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서 현재의 은유는 점점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과거의 은유가 쓴 편지를 통해 엄마가 누구인지를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작가는 도처에 은유의 엄마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고 있는데, 그러면서 왜 아빠가 은유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추측을 하게 한다. 


그에 대한 답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 아빠의 편지에 실려 있고, 과거의 은유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엄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빠가 왜 은유에게 무덤덤했는지, 사실은 무덤덤이 아니라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해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였음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은유가 아빠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과거의 은유와의 편지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님을, 가족이라서 더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야 함을 보여준다.


지금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 속에 또 마음 속에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소설이다. 특히 가족에 대해서 불만을 지니고, 왜 우리 가족은 이래? 하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부모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청소년에게 이 소설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은유를 통해 현재의 은유가 가족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현재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엄마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편지 형식을 통해서 잘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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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인간을 말하다 - 예술로 만나는 삶의 기쁨과 슬픔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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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예술 아닌가 하는데... 이 책은 미술과 음악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지닌 요소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다양한 인간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젊음, 사랑과 결혼, 실연과 이별, 병과 죽음, 예술가의 고독, 밤, 미녀와 팜 파탈, 신화, 노동과 휴가, 집과 식탁, 친구, 자연과 계절, 미인과 누드, 여행과 유학, 경제, 군주의 초상, 정치


인간들의 삶이 바로 이런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은 이러한 삶의 요소들을 미술과 음악을 통해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눈을 호강하게 해주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큐알 코드로 그와 관련된 음악들을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있어서 귀도 즐겁게 된다.


무엇보다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장점이 있겠다. 결코 짧은 분량이 아니지만, 장황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만큼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겹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그린 그림이, 작곡한 음악이 어디 한 분야에만 머무르겠는가. 인생의 다양한 면모를 그림과 음악을 통해서 나타냈기 때문에, 이 책에 같은 작가가 여러 번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반복이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 다양한 변주들을 통해서 우리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서 그러한 삶의 다양성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후반부에 예술과 정치 부분이 있는데, 예술가와 정치가 아니다. 예술가는 사람인만큼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녀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작가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과 작품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정치적 잣대로 작품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작품에 굳이 정치적 잣대를 들이밀 필요도 없고. 작품을 작품 자체로 보면서 그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정치든 경제든 아름다움이든 무엇이든 작품을 통해 잘 드러냈는가를 평가해야지 외적인 기준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을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한다면 예술을 좌파, 우파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작품 속에 주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주제를 드러내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어거지로 그냥 밀어붙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부분들을 미술과 음악을 통해 들여다보게 해주고 있는 이 책. 더위로 지쳐가는 요즘, 시간을 내서 읽으면 어느 정도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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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구절은 없다. 그런데 시는 어렵다. 우리 현실의 과거와 현재가 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고, 때로는 마음을 찡하게 하기도 하는데...


  '니들의 시간'에서 '니들'은 '너희들'의 줄임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너희'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의미한다.


  어떨 때는 나와 함께 하는 존재였다가 어떨 때는 나와 다른 존재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으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니들과 달라.'


하지만 '니들'이 없으면 '나'가 있을까? 아니다. '나'는 바로 '남'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말장난 같지만, '남'이라는 말의 받침 'ㅁ'은 발판, 토대로 볼 수 있다.


'나'를 올려놓는 토대. 그렇다면 그 토대가 크면 클수록 '나'도 커진다. 그러니 '니들'이 많을수록, '니들'이 클수록 '나'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을 망각하고, '니들'을 자꾸 줄이면 '나'도 줄어든다. '나'도 약해진다.


그 점을 보여주는 시가 바로 '니들의 시간'이다. 1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1연. 창비. 2023년. 35쪽)


그래야 하는 인간이 지금은 어떤가? 이 '니들'을 얼마나 많이 파괴했는가? 마치 지구에 '나'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한 생명이라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일본에서는 핵폭발로 인한 오염수들을 바다에 방류하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라는 시를 보자. 그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2023년 8월 24일, / 인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 엘니뇨, 미래의 소년들이여, / 너희 선조들은 핵물질을 열배 희석한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 삼십만년 동안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김해자,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중 1연. 창비. 2023년. 100쪽)


이전에 핵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1980년대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이미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친환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1년에 또다시 후쿠시마에서 핵폭발을 겪고도...


건설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발전을 할 때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으로 인해 나오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는데, 여전히 핵발전, 핵발전하고 있으니... 여기서 도대체 우리는 '나'를 제외한 '니들'을 정말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다르게 체르노빌에서는 이렇게 많은 돈과 물질을 들여 그곳을 폐쇄하고 있다. 시인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다.


'나는 비쌉니다 / 초기 자금만 해도 28개국에서 칠억 육천팔백만 달러 기부 받았죠 / 감마선을 견뎌내는 고품질의 강철만 팔천 톤 / 백오십 미터 이중막 / 클 뿐만 아니라 무겁기까지 한 / 내 이름은 아르카입니다' (김해자, '내 이름은 아르카' 중 3연. 창비. 2023년. 96-97쪽)


여기에 묻혀 있는 수많은 '니들'. 더 많은 '니들'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들인 그 시간과 돈과 물질들. 이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돈과 시간과 물질을 절약한다고 더 많은 '니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오염수 방류 아닌가.


'니들'을 죽이는 시간. 아니 '니들'이 살아갈 시간을 빼앗아가는 행위. 그것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 시인은 '니들의 시간'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수많은 '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 앞으로 올 니들을 / 니들의 시간을'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마지막 연. 창비. 2023년. 39쪽)


이렇게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 덕에 '우리는 각자도생의  사명을 띠고'(32-33쪽)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로 안 좋은 분야에서는 1위, 좋은 분야에서는 아래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이렇게 씁쓸한 마음을 들게 하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배시시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시들도 많다. 시인은 '니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을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니들의 시간'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한번 '니들의 시간'을 생각해 보자. 이 '니들'과 '나'를 과연 분리할 수 있는지. '니들'이 바로 '나'임을, '나'가 바로 '니들'임을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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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17 0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집과 시인 알고 가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4-08-17 08: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은 시집이고,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김해자 시인이에요.
 
듄 신장판 6 - 듄의 신전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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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끝났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가 살아 있었다면 뒤를 이은 작품이 더 나왔을 듯.


듄은 파괴되었다. 명예의 어머니들이라는 집단에 의해. 베네 게세리트의 성적인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성의 힘으로 남성들을 종속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집단들을 무자비하게 파멸시킨다.


베네 게세리트 집단도 마찬가지로 파멸되어야 할 존재다. 명예의 어머니들과 이에 맞서는 베네 게세리트의 대결이 이번 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왜 신의 성전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의 성전이라고 하면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소설을 읽은 내 느낌으로는 베네 게세리트는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는 이 집단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 어쩌면 전편에서 레토를 등장시켜 이 집단이 각성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이들 집단에 아트레이데스의 혈통이 이어지게 해서,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집단을 형상화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 지닌 한계는 뚜렷하다. 이 한계를 인식하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인물이 이번 호에서 중심을 이루는 오드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드레이드에게 발견된(?) 시이나와 무르벨라에게서 더 나은 발전을 찾을 수도 있고.


하지만 시이나가 우주선으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이 끝맺음하고 있으니, 베네 게세리트의 계획, 성공은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에 매여 있을 뿐이다.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지 않다. 사랑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는 그들에게 작가 역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게 되지만, 레토가 제시한 황금의 길은 집단성보다는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하지 않았나 싶다. 대이동, 인류의 대이동은 결국 인류가 자신들의 삶을 각자의 자율성에 따라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파괴된 듄을 재건하려고 하지 않고, 또 베네 게세리트의 참사회가 있는 곳에서 듄과 같은 모습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시이나가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의 어려움을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시이나의 작품을 통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의 삶이 과거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안 된다.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 발판이 되어야 한다. 현재를 구속하는 장애가 아니라. 또한 사랑은 인간이 지닌 잃어서는 안 되는 삶의 요소다.


교단의 생존을 위해서 교배는 하지만 사랑은 거부하는 베네 게세리트들의 방식은 인류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성적 유혹에 침범당하지 않는 시이나를 작가가 창조한 것은 인간은 다른 존재에 의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예의 어머니들과 베네 게세리트의 전쟁. 서로가 서로의 반쪽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 즉 과거의 기억들을 보존하고 자손들을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과 성적으로 남성들을 유혹해서 자신들의 뜻에 따르게 하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래서 명예의 어머니 출신인 무르벨라가 베네 게세리트의 최고 대모가 되고, 이 둘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될 수밖에 없다.


듄 출신인 시이나는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른 많은 갈등 요소들이 잠복해 있기는 하지만, 삶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무엇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은, 순간 순간의 선택으로 다양한 삶들을 살아가게 되는 것. 여기에 사랑이라는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


인류의 삶에서 그런 사랑을 거세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사랑은 누가 누구를 이용하거나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사랑이 인류들 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런 사랑이 깃들여 있음을 알고,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율성 속에서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방대한 소설이다. 엄청난 우주 창조 속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갈등 속에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각 권마다 숨어 있는 많은 요소들을 찾아낸다면, 그것들이 하나하나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하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당신은 인간이고, 인간들은 모든 것을 뷴류해서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 깊은 욕망을 갖고 있으니까요. ... 그렇게 하면 우리가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소유권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거지요. - P32

어떤 식으로든 폐쇄된 곳은 외부인들에 대한 증오의 비옥한 온상이 됩니다. 그것이 모진 수확물을 만들어내지요. - P35

삶은 항상 압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 P79

압력과 다듬기, 그것이 삶이었다. - P80

아주 깨끗한 석판을 가지고, 겉으로든 속으로든 아무것도 품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오, 무엇이든 그 석판에 적히는 것은 저절로 적히는 거요. - P116

관료들이 지배적인 권력을 얻게 되면 항상 탐욕스러운 귀족으로 변한다는 걸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겁니다. - P160

억압받는 자들은 항상 억압자들의 행태를 배워 흉내 내곤 했다. 형세가 역전되면 복수와 폭력이 다시 한번 세상을 휩쓸고 지나갈 무대가 마련되었다.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 그런 식으로 지겹도록 역할의 역전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 P253

배움에 천천히 제동을 거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축적이었다. - P341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는 건 뜻밖의 일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 P559

고통을 보지 않은 사람은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더 커다란 고통을 야기하기 쉽다. - 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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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17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듄 읽어봐야겠어요. 방대한 작품이라 시작을 못했는데 좋은 문장들이 심오하네요. 글 감사합니다^^

kinye91 2024-08-17 08:59   좋아요 0 | URL
정말 방대해요. 하지만 정치-사회에 관해서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문장들이 참 많아요. 여러 생각을 하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