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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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는 남의 고통을 구경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남의 고통이 중계되기도 한다. 나와는 떨어져 있는 고통. 그러한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일까?


절대로 아니다. 그러한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다. 즉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고통을 구경하고 있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저자는 목격과 구경을 이렇게 분한다.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미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24-25쪽)고.


이 정의에 따르면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고통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고통이 남의 고통만으로 끝날까?


남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세상이니, 다른 이에게 닥쳤던 고통이 내게 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만큼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개인의 고통이 집단의 고통이 되고, 이는 공동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즉 고통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될 때 사회적 연대가 가능해지고,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거치는 과정, 애도의 순간들. 개인의 애도가 공동체의 애도가 된다면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책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262쪽)


아마, 이 책의 제목을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고 지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목격하고, 그러한 고통의 맥락을 찾고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담아서.


따라서 저자는 고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고통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 아직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뉴스룸 기자로서 많은 고통들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저자는, 그러한 고통을 전달할 때 고통받는 사람에게 또다른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또한 고통을 전시함으로써 고통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한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이러한 기자로서의 자세는 우리가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단지 흥미를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또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러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즉 고통과 고통을 이어 고통을 없애는 연대를 마련하기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들. 이런 기자들에게 '기레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자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진 이유를 기자들도 찾아야 한다. 그들이 내보내는 기사들에 대해 이 책의 저자만큼 고민을 했는지... 아마도 그러한 고민을 하고 기사를 내보냈다면 '기레기'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온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206쪽)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고민하고 기사를 내보낸다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그러한 고통을 없애려 하는 시도를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하고.


읽으면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떠올랐다. 사람 몸도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들은 물이 찌그러지듯이, 좋지 않은 뉴스들을 접하면 우리 마음도 많이 망가진다는 그런 주장을 한 책. 어떤 사람은 그래서 신문을,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는 이 책인데...


그렇다고 이런 뉴스들을 듣지,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나?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 감는다고, 그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몸이, 내 마음이 물과 같다면, 고통을 외면하면서 나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의 고민도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러한 고통을 보여주는 이유가.


이 책에서 저자의 답을 얻는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쪽)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 감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보고 단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러한 고통이 지속되지 않도록, 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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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으며 시는 은유구나 한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하나로 연결하는 언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연결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나를 고민하면서 찾아야 하는 연결. 은유.


  시는 아주 먼 은유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들을 거쳐 표현하고자 하는 마지막 존재까지 이른 상태. 그 과정을 시인은 알고 있겠지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어렵다. 중간이 생략되어 있고, 이 생략된 중간을 잇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시인의 언어와는 다른 독자의 언어로.


  이 시집에는 '직유법'(30-31쪽)이라는 시가 있다. 직유법이면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유는 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인데 뒷말이 생략되어 있다. 직유는 바로 이 뒷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처럼 어두워졌다 / 비 맞는 벤치같이 나는 하릴없어서 / 멀리 당신을 등대처럼 놓아주었다 / 물수제비같이 떠가는 것을 보며 / 미아처럼 나는 하릴 없이'처럼 풀이하는 말이 있다. 꾸며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직유법을 잘 쓰지 않는다. 직유법을 쓸 때도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뒷말을 감춘다. 


이러니 시는 직유라기보다는 은유다. 감추어져 있다. 직유는 은유로 가는 징검다리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면 사람들이 건널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직유라는 징검돌을 중간 중간에 놓는다. 그렇다고 징검돌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다. 편하게 간다면 은유가 아니다.


다시 이 시집의 제목을 보자.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다.


아름답다는 말이 통하려면 두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존재와 그것을 보는 존재. 그런데 여기서 '혼자'라고 하면 하나가 된다. 아름다움은 분리가 아니다. 하여 '혼자와 더불어 나는 혼자였다'('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69쪽)고 표현하고 있다. 은유는 이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혼자다.


아름다웠던 사람이 혼자고, 혼자는 나다.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 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저마다의 개성, 특성을 지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혼자는 이미 아름다움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이고, 이런 아름다운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대가 된다. 결국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삶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혼자들,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은유다. 직유가 아니라. 이 '혼자'라는 말에서 많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이 감추어두었던 많은 연결고리들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지점과 저 지점을 잇는 존재들은 시인이 알고 있는 것 말고도 많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시인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혼자고, 자신의 삶을 연출해야 한다. 시인이 '걸어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 살아 있는 무대의 / 빛 속으로'('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70쪽)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래서 시는 은유다. 감춰져 있는 의미를 찾는 일. 만들어내는 일. 그러한 일을 하는 작업. 때로는 즐겁지만 고통스러운 활동. 시를 읽는 일. 이현호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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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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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가 모두 관리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기록하기 위해서 팔뚝에 칩을 심고, 그 칩에 운동, 영양, 질병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늘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하면 법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 건강을 나라가 챙겨주니 좋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내 건강을 지키라고 권유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라면, 이 소설 [어떤 소송]에 나오는 '방법'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나라가 관리하는 것이다. 관리하고 처벌하고...


미아 홀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생물학자다. 그러니 건강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호의적이다. 반면 동생 모리츠 홀은 이렇게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 그리고 건강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자살을 한다. 자살? 이 사회에 가장 큰 범죄다. '방법'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은 오류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방법'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채취된 DNA가 모리츠의 것으로 밝혀져 모리츠가 기소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DNA가 모리츠의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방법'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방법'이 주장하는 바와 동생의 죄없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아 홀은 동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법'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즉, 개인의 건강을 모두 국가의 관리에 둘 필요가 없다는 것. 개인은 고통받기도 하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미아 홀을 선동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크라머라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방법'의 대변자다. '방법'만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그와 미아 홀은 대립을 하지만, 미아 홀은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고, 또 마지막 판결 집행에도 그를 임석할 사람으로 지명한다.


여기까지 '방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미아 홀을 보면, 개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결말로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미아 홀은 사면된다.


이유? 국가는 희생자,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희생자나 순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 '방법'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 권력은 그러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아 홀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싸움이 결국은 거대 권력인 '방법'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는 언론과 권력이 유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에서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거대 권력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질이 된다.


(미아 홀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증거로 채택이 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크라머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이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거나 말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모습들... 이거 과거의 일도 또 다른 나라의 일도 아니다.)


미아 홀의 싸움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러한 싸움은 언론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며 권력이 미아 홀을 고립시킴으로써 - 순교자로 만들면 이는 미아 홀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니, 사면함으로써 미아 홀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하는 방식으로 -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설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난다. 이런 일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방법'이라는 건강 독재...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입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좋을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러한 권력의 통제는 알게모르게 작동을 하거나 또는 언론을 통하여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경계에 서는 일 또는 경계에 서서 이곳과 저곳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일.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러한 것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비록 권력이 이들을 마녀로 또는 범죄자로 낙인 찍을지 모르지만 단일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권력에게 그러한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임을...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 아웃사이더야. 아웃사이더는 위험하게 살아가.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 (145쪽)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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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 기후위기, 기술봉건주의


  이번 호에서 핵심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다.


  핵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핵 자체가 거대 자본과 결합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곳을 희생으로 삼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건설된 곳을 보라.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도심에는 짓지 않는다. 


  도심에서 먼 곳에 핵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공급하느라 먼 거리를 송전선로를 건설한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에 관해서 시민들이 관여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그러니 민주주의와 먼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같은 사고를 겪었으면서도 다시 핵개발을 들고 나오고 있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세상에 핵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에너지 정책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여러 정책들과 기후위기가 겹쳐 있기 때문인데, 반민주적일수록 기후 정책에 관심이 없다. 미래를 끌어 현재에서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런 점을 이번 호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봉건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났다. 봉건주의는 이미 지나간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영주로 등장한 것이 거대 플랫폼들과 아이티 기업들이라니... 그들이 영주가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기사가 되고, 그럼 시민들은? 자칫하면 농노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소비하고 생산하지만 결국 이윤은 몇몇 소수에게 돌아가고,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신적 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것에 경청해야 한다. 지금 닥친 위기들이 갑자기 나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던 일들 아닌가. 그러한 경고에 눈 감고 발전, 성장만을 외친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근본적인, 너무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왜 이런 주장을 녹색평론이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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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만 돌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데... 시집에는 이러한 오른쪽이 없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면 왼쪽이 되고,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이다. 이런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출구가 보이련만, 미로가 훤히 밝혀지련만, 미로를 내려다볼 위는 없다. 오로지 미로 속에 있을 뿐이다. 미로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 높이보다 높은 미로들,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난 시어들. 시들. 그러한 시를 쓴 시인(들)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간다. 언젠가는 나가겠지. 나가더라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논리로,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으며, 기억하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래서 시집은 미로다. 시라는 미로 속에 우리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출구를 찾으라고 한다. 하, 갑자기 다이달로스가 생각났다. 그는 미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궁에 갇혔다. 미궁 밖으로 만든 사람은 나갈 수 있을까?


그가 갇힐 때 아리아드네의 실을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사람. 탈출할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미궁은 아리아드네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을 다이달로스라고 하더라도 시인 자신도 시집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시인은 시를 쓰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을 잃었을 테니. 시인 역시 시집이라는 미궁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시인 자신이 다이달로스라고 말한다 해도, 시인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없다.


시인이 다이달로스라고 해도 미궁에 갇힌다면 이 시집을 읽는 나는? 당연히 미궁 속에서 헤맨다. 헤매다 헤매다 그럼에도 계속 헤맨다. 오른쪽으로 찾으려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으려고 애쓴다.


애쓰면서 그렇게 시집의 끝에 다다른다. 시집의 끝. 출구인가? 아니다.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에라, 이런... 황혜경 시집은 이렇게 나에게는 미궁이 된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이 시집 제목을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되는 길이 바로 쓰는 것 아닐까 한다.


어떤 특검이 사초 쓰는 자세로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초(史草) 역사의 기록이다. 쓰는 행위다. 그런데 사초는 현재가 아니다. 쓴다가 현재지만 이미 쓴다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행위는 과거로 가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가서 현재에 남겨 놓는다는 의미다.


결국 쓰는 것은 과거로 가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는 의미다.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을 붙들어 놓는 행위. 이것이 쓴다는 행위다. 쓰면 보게 된다. 언젠가는 보겠지. 황혜경이 쓴 이 시집의 출구를... '목도(目睹)'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그 구절을 쓴다.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쓰기는 보기다. 그리고 쓰기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목도' 중에서.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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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같은 표현도 맥락에 따라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합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과거에는 분별하지 못한 것을 드디어 보기에 과거를 ˝눈여겨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겠죠~~~.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좀 난해한 시집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사유에서 배울 게 있어 보여요~~많은 시들이 그렇지만요

kinye91 2025-07-06 08:27   좋아요 0 | URL
저에게 시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요. 무언가 명확하지는 않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미로를 나오듯이, 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