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을 읽다가 왜 시인이 이런 말을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검색을 해보니 시인이 병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구나. 병으로 고생을 한 것이 이 시집에 영향을 주기도 했겠구나 하는 생각.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시인의 말'에서. 114쪽) 


  하아, 이렇게 해서 또 카프카를 만나는구나. 시집에 실린 시 중에 '단식하는 광대'라는 시가 있는데, 이 제목을 보는 순간, 카프카의 '단식 광대'가 떠올랐으니...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라는 말, 카프카 작품은 대부분 미완성이다. 과정이다. 그러니 시인은 영원히 살게 될지 모른다고 했는지도. 이는 자신의 작품을 딱 떨어지게 완결하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상태로 놓아두겠다는 것.


시인은 고정된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미정형을 정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고 싶다는 바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현실에 마음 아파하는 시들도 꽤 있으니, 현실을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다. 그러다 이 시 '어떤 보병'을 읽으며 시인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어떤 보병


글자들의 사막을 지나

도시들의 시궁창을 지나

별과 얼음 녹은 진창길을 지나


  여름

    가을


너덜거리고 찢어진 마음의 끝단이

어느 검고 부드러운 가죽 장화 속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벗기 싫어

밤새 알지 못하는 어느 주홍빛 막사 앞에서

나는 보초를 섰습니다


흠뻑 젖은 외투 위로

가벼운 밤눈이 또다시 내리고 있습니다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창비. 특별한정판 1쇄. 2023년. 57쪽.


시인은 이렇게 보초를 서는 존재. 너덜거리고 찢어진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과 함께 하는 존재. 그러한 존재인 시인은 세상을 가장 낮은 곳에서 본다.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곳까지 자신의 눈을 낮춰 이제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


하여 시인의 눈은 높고 크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낮고 작고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존재들도 본다. 그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보초가 된다. 자신은 흠뻑 젖을지라도...


이 시를 읽고 'Bucket List -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를 읽으면,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가장 낮은 곳에서 보는 눈을 가진 시인이 높은 곳에 올라 있는 김진숙을 본다. 그 거리를 메울 수 있다면, 시인은 기꺼이 그를 지키는 보초가 되리라. 그래서 시인 김남주를 통해 김진숙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많은 시들이 가슴에 와닿았는데... 좋다. 시인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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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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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빨갱이야!"


한때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였다. 이 말 하나면 그 사람은 고립되고, 다른 모든 것을 잃고 오직 '빨갱이'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빨갱이'라는 말이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말의 쓰임새는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넌 수구꼴통이야!"는 말도 있다. 이 말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데 쓰인다. 이 말 하나면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수구꼴통'이 의미하는 어쩌면 '꼰대'라는 말과도 통하는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이렇게 한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게 한 단어로 규정되어도 좋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음을 율리 체가 쓴 이 소설 [인간에 대하여]를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한다. 격리되어야 한다. 보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뉜다.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 강요는 자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에 속하게 하려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되지 않는다. 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 어떨 때는 자신도 자신을 모를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도라도 그렇다. 진보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극우주의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답게 환경도 생각하고, 이민자 정책에도 찬성하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열려 있다. 함께 사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로베르트도 외견상으로 잘 맞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로베르트를 도라는 견딜 수가 없다. 도라는 '규정을 지키나 생각은 자유로운'(36쪽)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마저 강요당할 수 없다고 느낀 도라는 브라켄으로 이주한다.


브라켄으로 이주한 날 마주친 옆집 남자가 대뜸 외친다. "반갑소." 고테가 말한다. " 난 이 마을 나치요."(57쪽)라고. 이게 뭔 일이야? 나치라니...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이 이웃이라니... 기겁을 한 도라.


이후 고테는 수시로 도라의 집에 들른다. 다른 사람을 통해 도라의 땅을 정리하게도 하고, 의자와 같은 물건을 갖다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쇠도 갖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도라. 하지만 고테는 도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도라에게 도라가 자신을 나치라고 경멸한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이주민을 그렇게 여기듯이 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냐고.


이때 도라가 외친다. "물론 내가 낫죠! 당신보다 백배 낫죠!" (453쪽)이 말을 하고 난 뒤 도라는 곧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자신에게도 이러한 편견, 우월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자신이나 고테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도라.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사람을 편 가르고, 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역할을 하는지를 생각하는 도라. 진보주의자든 극우주의자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갈등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는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물론 내가 낫죠!" 근데 언뜻 보면 이 말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브라켄 마을 근교에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 전 인류를 갉아먹는, 장기간에 걸쳐  퍼져나가는 독이라고 할까.' (453쪽)


이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치와 이웃에 사는 진보주의자 여자. 그러나 둘은 이웃이다. 친구가 된다. (도라의 생각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결정을 하는 고테가 남겨둔, 도라의 강아지 요헨데어로헨의 조각상으로 고테 역시 도라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라는 말에 진보라는 말에 서로를 틀 지우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틀에 가두면 안 보이던 것들이, 못 보던 것들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때 보이기 시작한다.


이주민이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이웃에게는 한 없이 친절할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자식에게도 애정을 베풀 수 있음을 (이는 고테가 딸인 프란치에게 하는 행동이나, 도라의 아버지가 도라에게 하는 행동이 비슷함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비슷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다르다고 마냥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치면 극단주의자들인 그들과 다를 점이 없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나치인 고테를 위해 파티를 여는 모습,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도 와주는 모습. 이것은 한 사람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그 틈을 만나면서 점점 넓혀 서로를 볼 수 있고 연결해주는 창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도라는 코로나로 인해 이사한 마을에서 나치라고 주장하는 고테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간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세상으로 통하는 창이다.'(400쪽)고 도라는 깨닫는다. 그렇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으로 인해 평생 이웃으로 만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을 멈추는 도라. 이런 도라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들이 흔하게 만나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말. 편가르는 말. "넌 일베야. 넌 페미야. 넌 좌파야, 넌 수구야. 넌 꼰대야. 넌 범생이야. 넌 문제아야" 등등.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서 자신 역시 가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음을, 그래서 더 많은 모습을,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틀 지워서도 안 되지만 상재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도 지녀서는 안 된다. 소설의 도라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고테를 이해하려 하지만, 고테가 혐오 발언이나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할 때는 비판하고 막으려 한다. 이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사람을 언어 속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과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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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세대 -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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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화성에 보내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화성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거대 기업 운영자도 있지만, 그것이 가능해졌다 치자. 화성은 지구와 중력도 환경도 모두 다르다. 그런 곳으로 당신 자녀를 보내겠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지구에 적응된 몸이 화성에 가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 아무리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든다고 해도 지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어른들도 많은 변화를 겪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더욱 커다란 변화,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몸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 자녀를 화성에 보내겠느냐는 질문.


뜬금없이 화성이 나온 것 같지만 아니다. 화성에 이주하는 것이 지금 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 시작했다면, 이미 이 지구에 그러한 화성이 만들어졌음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이런 질문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구에 있는 화성, 즉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지구와 달라진 지구를 만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디지털이다. 더 범위를 좁히면 '스마트폰'이다. 내 손 안에 있는 컴퓨터이자 고해상도의 사진기, 음악 플레이어, 텔레비전 등등의 역할을 모두 하는 기기. 언제 어디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니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보게 만드는 기기.


이 기기에 잠식당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은 화성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편리함에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2010년 이후에 전세계에서 청소년들의 우울과 불안이 급증한 이유가 무엇인지 찾다가 바로 '스마트폰'에서 즉 '디지털 세상'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상관관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것은 상관관계를 넘어 인과관계라고 한다.


그만큼 청소년들의 불안과 우울 증세가 심해졌고, 그것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라는 것인데... 단지 스마트폰만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변한 세상이라고 하겠다.


놀이를 중심으로 하던 아동기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아동기로 바뀌었고, 이를 '아동기 대재편'이라고 이름짓는다.


아동기가 대재편되었는데, 이것은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의 과소 보호(26쪽)'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근거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데,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는 미국에서 아동을 홀로 두게 하지 못하는 법만 봐도 알 수 있다. 자녀를 차에 홀로 두고 쇼핑을 해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현실, 아동이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어도 아동학대가 되는 과잉보호.


그런데 반대로 가상 세계,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는 다른 세계에는 보호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연령 제한이 있는 사이트도 감시를 별로 하지 않아 자유롭게 아동들이 접속할 수 있으며, 어른들이 규제를 한다고 해도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가상 세계에서는 보호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만 그런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역시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현실 세계 과잉보호는 지금 심각하다. 특히 학교에서... 걸핏하면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교사들을 보라. 신고당하는 부모보다 교사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데...


아이를 남게 해서 상담을 했다고 정서 학대로 신고하는가 하면, 무단 외출을 하는 아이를 막고 나가려는 아이 팔을 잡았다고 아동학대로 신고하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에게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고 학대라고 신고하는 부모들도 있는 현실. 학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교사들이 체험학습을 거부하겠는가. 체험학습에서 사고가 나면 신고당하는 사람들이 교사이기 때문이다. 교육적 활동에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무엇도 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체험학습같이 학교를 벗어난 다양한 활동을, 또 또래끼리 방을 함께 쓰면서 잠을 자고 함께 이야기하면 활동을 하는 경험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과잉보호다. 아이들을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는 과잉으로 보호하면서, 스마트폰의 사용은 어떤가? 부모들이 감시하기 힘들다. 또한 스마트폰을 주어서 부모들의 돌봄 노력을 줄이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온갖 문제는 스마트폰으로 인해 일어난다. 


저자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의 네 가지 기본적인 해악은 ...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 중독'(174쪽)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스마트폰에 눈을 주고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게임을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스마트폰 세계 즉 가상 세계 속에서다. 현실 세계에서는 더 많은 접촉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 수면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업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하려고 애를 쓰는 아이만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의 정신이 스마트폰에 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중독 수준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해악을 주는 스마트폰 세상은 가히 '화성'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화성으로의 이주'를 완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저자는 빨리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어른들이 먼저 정신차려야 한다고... 부모와 학교와 나라(정치)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 방법은 참 단순하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면 된다. 하지만 이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이 가장 힘들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윤을 위해서 수많은 어린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또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힘이 필요하다. 법률로써 제도화해야 한다. 이 점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넘어갔다고 하는 판에, 가능할지... 참.


그래도 저자가 주장한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보자.


1.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는 스마트폰 금지

2. 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 금지

3. 학교에서 휴대폰 사용 금지

4. 감독하지 않는 놀이와 독립적 행동을 더 많이 보장하기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말하라, 연결하라'고 한다. 알려야 한다. 사실 알고는 있지만 먼저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과감하게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 역할을 하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라고. 홀로 할 수는 없으니.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홀로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부모가 있으면 아이 역시 고립되지 않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법으로는 현실 세계에서 걸핏하면 아동학대로 신고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로 정비해야 한다고... 이것을 말하고 연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상 세계에서 아이들이 벗어나 현실 세계에 발딛고 지낼 수 있게 하는 방법, 이것은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방법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방법에는 비용도 들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인가? 문제는 실행 의지다. 부모와 학교, 나라(사회)가 얼마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이것을 실행하느냐다. 


이 실행이 더 늦어지면 우리 아이들은 '화성'에서 살게 된다. 몸과 마음이 '화성'에 맞게 변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실제 살고 있는 세상은 '지구'다. 그러니 마음이 아플 수밖에. 불안과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느껴왔던 스마트폰으로 인한 문제들을 잘 정리했다는, 해결책 역시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는, 그래서 더더욱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육에 목을 매달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이지만,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 아닌가 한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연결이 되겠지. 적어도 이 책은 문제를 크게 말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아이를 둔 부모들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들이 정치인에게 압력을 넣어야 법과 제도가 바뀔 테니. 최근 교육부에서 학교 수업시간에 스마트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청소년 단체로 있다고 하고, 인권과 책임, 그리고 사회의 미래. 


교육부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 (관련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과 같은 책들을 참고 서적으로 하여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하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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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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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는 남의 고통을 구경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남의 고통이 중계되기도 한다. 나와는 떨어져 있는 고통. 그러한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일까?


절대로 아니다. 그러한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다. 즉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고통을 구경하고 있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까.


저자는 목격과 구경을 이렇게 분한다.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미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24-25쪽)고.


이 정의에 따르면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다. 자신의 흥미와 관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고통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고통이 남의 고통만으로 끝날까?


남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세상이니, 다른 이에게 닥쳤던 고통이 내게 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만큼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개인의 고통이 집단의 고통이 되고, 이는 공동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즉 고통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될 때 사회적 연대가 가능해지고,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거치는 과정, 애도의 순간들. 개인의 애도가 공동체의 애도가 된다면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 책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수 있도록.'(262쪽)


아마, 이 책의 제목을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고 지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목격하고, 그러한 고통의 맥락을 찾고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담아서.


따라서 저자는 고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고통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 아직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뉴스룸 기자로서 많은 고통들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저자는, 그러한 고통을 전달할 때 고통받는 사람에게 또다른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닌지, 또한 고통을 전시함으로써 고통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한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이러한 기자로서의 자세는 우리가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단지 흥미를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또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러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즉 고통과 고통을 이어 고통을 없애는 연대를 마련하기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들. 이런 기자들에게 '기레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자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진 이유를 기자들도 찾아야 한다. 그들이 내보내는 기사들에 대해 이 책의 저자만큼 고민을 했는지... 아마도 그러한 고민을 하고 기사를 내보냈다면 '기레기'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온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206쪽)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고민하고 기사를 내보낸다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그러한 고통을 없애려 하는 시도를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하고.


읽으면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떠올랐다. 사람 몸도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들은 물이 찌그러지듯이, 좋지 않은 뉴스들을 접하면 우리 마음도 많이 망가진다는 그런 주장을 한 책. 어떤 사람은 그래서 신문을,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는 이 책인데...


그렇다고 이런 뉴스들을 듣지,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나?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 감는다고, 그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몸이, 내 마음이 물과 같다면, 고통을 외면하면서 나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의 고민도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러한 고통을 보여주는 이유가.


이 책에서 저자의 답을 얻는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쪽)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 감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보고 단지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연대하여 그러한 고통이 지속되지 않도록, 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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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으며 시는 은유구나 한다. 하나의 존재를 다른 하나로 연결하는 언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연결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나를 고민하면서 찾아야 하는 연결. 은유.


  시는 아주 먼 은유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들을 거쳐 표현하고자 하는 마지막 존재까지 이른 상태. 그 과정을 시인은 알고 있겠지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는 어렵다. 중간이 생략되어 있고, 이 생략된 중간을 잇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시인의 언어와는 다른 독자의 언어로.


  이 시집에는 '직유법'(30-31쪽)이라는 시가 있다. 직유법이면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유는 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당신같이 당신처럼 당신인 듯이'인데 뒷말이 생략되어 있다. 직유는 바로 이 뒷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림자처럼 어두워졌다 / 비 맞는 벤치같이 나는 하릴없어서 / 멀리 당신을 등대처럼 놓아주었다 / 물수제비같이 떠가는 것을 보며 / 미아처럼 나는 하릴 없이'처럼 풀이하는 말이 있다. 꾸며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직유법을 잘 쓰지 않는다. 직유법을 쓸 때도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뒷말을 감춘다. 


이러니 시는 직유라기보다는 은유다. 감추어져 있다. 직유는 은유로 가는 징검다리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면 사람들이 건널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직유라는 징검돌을 중간 중간에 놓는다. 그렇다고 징검돌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는 않다. 편하게 간다면 은유가 아니다.


다시 이 시집의 제목을 보자.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다.


아름답다는 말이 통하려면 두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존재와 그것을 보는 존재. 그런데 여기서 '혼자'라고 하면 하나가 된다. 아름다움은 분리가 아니다. 하여 '혼자와 더불어 나는 혼자였다'('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69쪽)고 표현하고 있다. 은유는 이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혼자다.


아름다웠던 사람이 혼자고, 혼자는 나다.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 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저마다의 개성, 특성을 지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혼자는 이미 아름다움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이고, 이런 아름다운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대가 된다. 결국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삶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혼자들,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은유다. 직유가 아니라. 이 '혼자'라는 말에서 많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이 감추어두었던 많은 연결고리들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지점과 저 지점을 잇는 존재들은 시인이 알고 있는 것 말고도 많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시인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혼자고, 자신의 삶을 연출해야 한다. 시인이 '걸어나갔다 나의 보폭으로 // 살아 있는 무대의 / 빛 속으로'('살아 있는 무대' 중에서. 70쪽)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그래서 시는 은유다. 감춰져 있는 의미를 찾는 일. 만들어내는 일. 그러한 일을 하는 작업. 때로는 즐겁지만 고통스러운 활동. 시를 읽는 일. 이현호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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