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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ㅣ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평점 :
악녀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이 된다. '악녀서'라니.. 악마같은 여자가 나오는 소설인가 싶었다. 세상에서 악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데, 요즘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악녀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읽어도 악녀를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악녀인가? 하는 의문. 오히려 상처받아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 이야기.
밀려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 이야기. 이런 사람들을 악녀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악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녀들이 악녀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텐데... 네 편의 소설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사랑한다. 소위 말하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데, 퀴어 축제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시위대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찬성법 또는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동성혼이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인구총조사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한다는 최근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 역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만은 동성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자유중국 타이완에서 첫 번째 동성 혼인신고를 하고 당당하게 함께 살고 있는 1호 부부이기도 하다. 다산 작가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자신의 삶이지 타인이 개입하거나 타인에게 권유할 성격의 어떤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존재이자 삶이지 선택 가능한 가치나 이념이 아니다.'(242쪽)고 하고 있다.)
대만 작가인 천쉐가 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 이러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를 이 소설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아 찾기에 성공한다. 그래 그러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하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한데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는 않는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면 그 인물이 겪은 갈등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주인공이 자신을 찾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상한 집'은 약간 다르지만) 과정에서 읽는 내 마음도 펴지게 된다.
굳이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통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배제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된다.
다수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다른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런 강요를 누구도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사랑은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 편인 '고양이가 죽은 뒤'라는 소설은 천쉐의 자전적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내가 천쉐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 실린 '후기-칭에게'를 읽어보면 아, 작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천쉐는 소설을 쓰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려 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과 작가의 삶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오더라도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가의 삶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천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일은 어떻게 계속 소설을 써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제재는 무엇이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12쪽)
그렇다면 작가의 삶을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또한 작가의 삶을 잘 알아도 읽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한 편 한 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 빛이 남에게서 주어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빛임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녀서'라고 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런 '악녀'가 더 많이 생겨, '악녀'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악녀'라는 말이 소수자라는 말로 쓰이고, 소수자는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수든 다수든 다 다른 존재라는 것, 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이 소설집의 복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