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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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가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었는데, 일곱 편의 소설.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 소설의 특징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읽기겠지만, 소설 역시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들이 지닌 어떤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러다 실패. 


어떤 작품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작품은 빠른 속도로 읽었고, 또 어떤 작품은 함께 실린 비평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대상 수상작이 백온유가 쓴 '반의반의 반'이란다. 반의 반이면 1/2이고, 그것의 반이라면 1/4이 되나? 그런데 왜 제목이 이럴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데... 등장인물은 넷이다. 할머니 영실, 엄마 윤미, 딸 현진, 그리고 요양보호사 수경. 


사건이 벌어진다. 영실이 꼭꼭 감추고 있었던 돈 오천만 원이 사라진 것.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넷에 범인으로 의심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요양보호사. 문제는 증거.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정을 받은 영실. 확실하지 않는 CCTV. 물증은 없다. 심증은 있는데...


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사실 소설의 중심은 이것이 아니다. 바로 비틀어진 관계. 즉 서로의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를 지속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들은 무엇을 공유했을까?


가족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이 사랑이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 행동, 마음가짐 등등이 상대에게 가 닿으면 된다.


어쩌면 상대를 가장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엄마니까, 아빠니까, 할머니니까, 자식이니까, 손녀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의 바람직한 형태 아닐까.


따라서 가족은 똑같지는 않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일 수 있다. 서로를 다독거려줄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이 소설 속 가족은 그렇지 않다. 영실-윤미의 관계는 데면데면하고, 영실-현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을 뿐 이들에게는 끈끈한 무엇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수경은 그렇지 않다.


인생 말년에 수경의 태도에 마음을 여는 영실인데, 어쩌면 영실이 기대한 가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마인 윤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고, 손녀인 현진도 그랬을 텐데,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영실에게는. 영실은 인생 말년에 자신을 보듬어준 수경이 고마울 뿐이니... 물론 돈을 수경이 가져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함께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비틀어져 어긋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인식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아마 윤미나 현진이 수경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했어도, 또 영실이 그렇게 했어도 이들의 관계는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비틀어진 관계를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성혜령의 '원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혜령의 '원경'을 읽으면서는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관계가 비틀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감독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서로 딱 맞는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기만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딱 맞지 않기 때문에 맞추려고 자신과 상대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고 함께 맞춰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맞춤은 된다. 2025 제16회 절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러한 관계를 비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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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숲 - 나와 지구를 살리는 경이로운 나무들의 이야기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 지음, 노승영 옮김 / 아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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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은 많지만, 이 책은 주로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 나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


나무들의 이로움을 이야기하라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고 긴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인데, 그 중에서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숲들이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음을 명심한다면, 함부로 나무를, 숲을 대하지는 못하리라.


인간들이 편리하게 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무를 베어 숲을 없애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인간의 편리로 다가왔던가. 오히려 인간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공기 문제만이 아니다. 나무로부터 우리는 수많은 의약품들을 얻어왔거나 힌트를 얻어왔는데, 그것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생각하고 연구했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 건강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음에도 얻으려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이 책은 나무들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지 우리에게 이롭다는 점이 아니라 나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지구에 이로운 방식으로 생존해 왔음을, 다른 존재들과도 감응하면서 지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오염이 심각한 지금, 우리는 숲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도심에도 나무를 심고 있다. 그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공기 정화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단지 공기정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도 하고.


이러한 나무들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가. 이 나무들이 약용으로도 쓰이고, 공기 정화 역할도,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기능도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만큼 나무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나무로부터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나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냥 나무를 지키자가 아니다. 나무로부터 배워야 한다다. 인류가 이 지구에서 계속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책에 어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사랑하는 아이. 그 아이가 나무에게 하는 말. "언젠가 난 너에 대해 배울 거야." (293쪽)


그렇게 나무로부터 배운 아이는 나무와 또 다른 존재들과 교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감을 바탕으로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려 한다. 한 존재의 멸종은 그 존재의 멸종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고리를 인위적으로 끊는다는 것은, 그 피해를 예측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만큼 다른 존재들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 지구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때문에 인간이 나무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나무가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을 인식하고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가 새롭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나무에 관한 많은 글들. 어떤 글들은 너무도 서정적이어서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또 어떤 글들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나무가 얼마나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나무에 관해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한 글들이 모여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무에 대한 사랑이 글 전체를 통해서 넘쳐나고 있다. 나무. 그리고 나무들이 중심이 된 숲. 그러한 세계숲. 이 세계숲은 바로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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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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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마음을 울린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첫 구절. 사람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은 마지막 구절.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7쪽) 

'답장은 마세요.'(288쪽)

<간단후쿠 :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스즈랑은 바늘 공장이다.

스즈랑은 실 공장이다.

스즈랑은 비단 공장이다.

스즈랑은 신발 공장이다.

스즈랑은 군복 만드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돈 많이 버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좋은 공장이다.

스즈랑은 간호사 양성소다. (58쪽)


소설을 이끌어가는 요코 (개나리)가 끌려간 곳이 '스즈랑'이다. 그런데, 이 스즈랑에 오기까지 많은 이들은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속였다. 어떻게 보면 '스즈랑은~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곳으로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스즈랑은 ~이다'는 거짓이다. 속임수다.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술수다. 이것은 거짓을 넘어 범죄다. 


범죄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없다. 범죄자를 비난하고, 그를 처벌해야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일은 없다.


또한 부끄러워해야 할 존재는 범죄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은? 이들은 여전히 거짓을 말한다.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스즈랑은 ~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곳으로 자발적으로 왔다고, 즉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왔다고 우긴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속임수로 사람을 끌고 갔음에도,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들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를 감추려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우기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들의 범죄를 이토록 가리고 없는 것으로 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은 그러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묻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다. 다만 그 책임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서글픈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젠 생존자가 몇 분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일본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소녀상을 세워도 일본 눈치를 보는 사람들.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외치는 상황.


마지막 구절, '답장은 마세요.'란 말을 응답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는지, 원. 아니다. 인간의 존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답장은 마세요.'라고 하는 것.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 어찌 응답을 안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있나?


소설은 담담하게 전개되지만, 이 담담한 전개는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슬픈 현실, 우리 아픈 역사.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소설은 '요코'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첫 문장은 사람의 존엄을 잃은, 옷(간단후쿠)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또한 돈을 벌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한 자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나나코가 죽은 다음에 눈이 먼 하나코를 위해 모두가 나나코가 되어주는 모습을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니 요코가 '답장은 마세요.'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응답을 작가 김숨이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 지속적인 응답에 우리 역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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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편]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짧은 시에 그토록 많은 시간이 담겨 있다니... 


  시란 말의 절제, 그 절제 속에서 더 많은 말들을 하는 것.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과연 할 말을 다할 수 있을까?


  '찰나'라는 말, 시간은 한없이 짧을 수도 있는데, 그 짧음이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논쟁이 있었듯, 시간이 연속이냐 불연속이냐는 논쟁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하나로 정할 수 없는 것이 빛과 시간 아니겠는가.


시도 마찬가지다. 무어라 딱 정해서 하나의 틀에 가둬둘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닌가. 그래서 서정춘의 시를 읽으면 짧은 시 속에서 더 긴 인생을, 더 많은 삶을 만나게 된다.


시인의 말이 마음에 치고 들어온다.


'아하, 누군가가 말했듯이 / 나도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5쪽)'


하, 더 짧게 못 써도 좋다.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처럼 아예 백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서정춘의 시는 충분히 짧다. 그리고 충분히 길다.


첫시 '랑'에서 말한 것처럼, 서정춘의 시는 시와 우리를 이음새 좋게 이어지고 있다. 시랑 나랑 우리랑 사회랑 세계랑 우주랑, 이렇게 이어주고 있는 시들을 읽으면 짧음 속에서 긴 여운을 느끼게 된다. 좋다. 그 말밖에는.


 랑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사랑하기 좋은 말


서정춘. 랑. 도서출판 b. 초판 1쇄. 9쪽.


이렇게 우리는 이어짐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서정춘의 이 시가 더 마음에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최근에 겪었던 탄핵 정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 이어져 있었던지... 시인 역시 시를 통해 또 행동을 통해 함께 이어져 있었기에 이러한 '랑'을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2016년 탄핵 정국을 시인은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2016년 10월 26일부터였다

광화문 촛불 혁명 광장에서

내 촛불이 힘껏 빛나 보였을 때

나여, 그날만은 비로소 시인이었다


서정춘. 랑. 도서출판 b. 초판 1쇄. 31쪽.


하아, 우리 모두는 이때, 그리고 반복된 탄핵 정국에서 시인이었다. 우리는 모두 '랑'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시도 짧고 수록된 시도 많지 않지만, 그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다. 읽으니 그냥 마음에 물결이 인다. 너랑 나랑 우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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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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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이 된다. '악녀서'라니.. 악마같은 여자가 나오는 소설인가 싶었다. 세상에서 악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데, 요즘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악녀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읽어도 악녀를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악녀인가? 하는 의문. 오히려 상처받아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 이야기. 


밀려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 이야기. 이런 사람들을 악녀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악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녀들이 악녀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텐데... 네 편의 소설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사랑한다. 소위 말하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데, 퀴어 축제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시위대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찬성법 또는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동성혼이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인구총조사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한다는 최근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 역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만은 동성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자유중국 타이완에서 첫 번째 동성 혼인신고를 하고 당당하게 함께 살고 있는 1호 부부이기도 하다. 다산 작가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자신의 삶이지 타인이 개입하거나 타인에게 권유할 성격의 어떤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존재이자 삶이지 선택 가능한 가치나 이념이 아니다.'(242쪽)고 하고 있다.)


대만 작가인 천쉐가 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 이러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를 이 소설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아 찾기에 성공한다. 그래 그러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하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한데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는 않는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면 그 인물이 겪은 갈등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주인공이 자신을 찾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상한 집'은 약간 다르지만) 과정에서 읽는 내 마음도 펴지게 된다.


굳이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통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배제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된다.


다수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다른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런 강요를 누구도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사랑은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 편인 '고양이가 죽은 뒤'라는 소설은 천쉐의 자전적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내가 천쉐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 실린 '후기-칭에게'를 읽어보면 아, 작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천쉐는 소설을 쓰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려 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과 작가의 삶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오더라도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가의 삶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천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일은 어떻게 계속 소설을 써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제재는 무엇이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12쪽)


그렇다면 작가의 삶을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또한 작가의 삶을 잘 알아도 읽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한 편 한 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 빛이 남에게서 주어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빛임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녀서'라고 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런 '악녀'가 더 많이 생겨, '악녀'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악녀'라는 말이 소수자라는 말로 쓰이고, 소수자는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수든 다수든 다 다른 존재라는 것, 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이 소설집의 복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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