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롤라모 사보나롤라 - 중세의 세례요한
김남준 / 솔로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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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내가 원하는 바는 추기경의 모자도 아니고 주교의 관도 아닙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 대신에,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당신들의 성자들에게 주신 바

순교의 붉은 피로 물든 모자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와 함께 최고조의 문화적, 경제적 영향력을 자랑했던 피렌체. 그 도시에 나타났던 이색적인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였다. 사보나롤라는 매우 극단적인 두 가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광신적인 선동가로, 피렌체에 신정국가를 수립해 그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섰다가 몰락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반대편에서는 중세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던 개혁가라고 평가되고 있다. 

        책의 부제인 ‘중세의 세례요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사보나롤라는 중세라는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적 상황에서 진리를 외치다가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순교를 당한 인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 자체가 적었기 때문인지 주로 청장년 이후의 일에 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전기문은 아니다. 저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를 우선 하나의 위대한 설교자로 보고, 오늘날 설교자들이 따라가야할 한 표상으로 그를 조명하고 있다. 때문에 그와 관한 에피소드들도 대부분 설교자로서의 그의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측면은 좀 약한 편이다. 내가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을 읽었던 다른 책과는 매우 평가가 다른데, 그런 평가를 내리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든다. 또, 저자가 쓴 책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 ‘약간은 지나친 감이 있는 반복적 서술’이 아쉬웠다. 목적을 가지고 쓴 글이 대부분 그렇듯이 저자는 자신의 생각에 독자들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고 있고,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주제의 반복이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지적하자면, 저자도 인정하고 있는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이 가진 한계다. 저자는 그 한계를 단지 ‘시대적 상황’으로 돌리거나,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것으로 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내가 생각하기엔 그 ‘한계’는 결코 작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이런 한계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왜 문제시되지 않는 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한마디로 균형있는 서술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보나롤라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아직 사보나롤라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그리 길지 않은 책이다.) 특별히 설교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설교 하나로 한 도시의 시민들을 리드했던 사보나롤라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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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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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

 

        어느 날, 별다른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아내,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 2년여가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싶었던 그에게, 한 사람이 나타난다.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어쩌면 아내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남자는 미하일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게 되고, 마침내 사라진 아내까지 만나게 된다. 



        소설을 1인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주인공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의도적인 듯, 이야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주인공을 단지 ‘선생’이나, ‘당신’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철저하게 주인공의 시각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내면에 대한 성찰’이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리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서술방식이다. 물론, 의미있는 심리적 변화의 순간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빠지면, 아무리 좋은 서술방식이라고 해도 그 빛이 바래버리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글의 첫 머리에서 아내의 실종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밖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하지만 자유가 뭔가?

 

        오랫동안 나는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왔다. …… (중략) …… 투쟁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별난 권리를 옹호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갔다. 부모의 욕망의 노예, 타인과 ‘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결혼생활의 노예, 체중계의 노예, 정치체제의 노예, 금방 포기하게 될 무수한 결심들의 노예였다. 


        이 개념은 이야기의 끝까지 지속된다. 주인공은 에스테르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원래 바라던 무엇인가를 점차 잃어버리고 결국 완전히 관습과 상황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또 에스테르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사랑)을 위해 여타의 모든 부수적이며 옭아매는 것들로부터(‘결혼’까지도 포함하는) 자유로워지기를 원해서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이제 아내를 찾아 나서지만, 아직 버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히르였다. 

        자히르는 사람을 강력히 빨아들이는 무엇인가다. 어떤 사람이 한 번 보거나 만지고 나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래서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자히르였다. 주인공에게 자히르는 아내였던 에스테르. 주인공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야만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지만, 아내를 향한 꺼지지 않은 사랑으로부터도, 곧 자히르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된다. 딜레마였다. 

        하지만 마침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새기게 된 주인공은 아내와 다시 재회를 한다. 아내가 다른 이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주인공의 ‘깨달음’을 '증명'했다. 



        연금술사에서도 읽어 낼 수 있는 저자의 내적 성찰에 관한 의도가 거의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여전히 저자는 인간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고결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이번에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였다. 인간 외부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모습은, 근대 이후 신을 버리고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자 노력하던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완전한 자율, 신으로부터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오류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재를 가져다 사용한다.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소재에 빠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될 테니 말이다. 저자는 아마 어떤 종류의 권위도 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것들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며,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하일과 그의 동료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사는 모습들은 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지처럼 구걸을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복장에, 한 밤중에 술을 연신 들이키며, 빈 건물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자유’였다. 이상이 미하일의 도시 친구들이라면, 중앙아시아의 친구들은 보다 ‘영적’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초원의 종교’를 믿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그런 식으로 발현되었다.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추구하던 이들이 결국 또 다른 종교적 형태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종교의 규칙에 따라 행하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 꽤 흥미롭지 않은가?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는다면 온갖 종류의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인간 내부에서 지고의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고,(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반대된다) 역시나 그런 전제 아래 나온 결론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다.(사실 세계관은 종교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러한 신념에서 나온 결론은 결코 온전한 것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냥 사랑 이야기로만 읽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약간 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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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전쟁 금언 밀리터리 클래식 2
나폴레옹 지음, 데이비드 챈들러 엮음, 원태재 옮김 / 책세상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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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군이 그렇게 하기를 적군이 바라고 있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적이 그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장르를 뭐라고 구분해야 할까. 군사학? 내 서평들을 분류해 놓은 폴더에는 군사학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므로(그다지 군사학에 관해 읽은 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서평은 역사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야만 할 듯싶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이미 다 말하고 있다. 책은 나폴레옹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전쟁과 관련된 금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총 일흔 여덟 개의 금언들이 실려 있는데, 이 금언들을 편집한 챈들러는 각 금언들과 관련이 있는 실제적인 예나, 금언에 대한 해석을 매 금언마다 붙여 놓고 있다. 

        책의 내용이 전쟁과 관련된 금언이기 때문에 약간은 전문적인 느낌이다. 당연히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와 같은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금언들을 실려 있지 않다. 병력의 배치와 이동, 병사들을 다루는 법, 지휘관의 자질 등에 관한 금언들만이 기록되어 있다. 




        책의 초반부에 있는 약간은 지루한 서론만 빼고 본론만 본다면 군인이 아니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진정한 유익은, ‘원리’의 제시부분이다. 비록 총과 칼이 맞부딪히지는 않더라도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쟁이 아닌가. 그런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한데,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을 자신이 처한 상황의 내용들과 적절하게 대응시킬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그 효과를 직접 보여준 그 ‘원리’들을 이용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통일된 지휘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나폴레옹의 금언은 실제 어떤 일을 할 때, 중구난방 식의 일처리가 아니라 분명한 지휘계통을 세우고, 효과적인 지휘를 함으로써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내가 전공하지 못한 부분의 전문가의 생각을 듣는 것은, 언제나 처럼 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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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 버스로 둘러 싸 놓은 서울 광장.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 21조 1항과 2항은 이렇다.

①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서울에만 온통 몰려 있는 각종 행정기구들을 지방으로 옮기겠다는 정부에게

600년 된 조선시대 '경국대전'을 끌어다가 '관습헌법' 위반이라고

위헌이라고 우겨댔던 헌법재판소 사람들은 이런 일에는 못 본 척 어물쩍 넘어간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광장'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 터'라고 정의되어 있다.

쉽게 말해 광장이란 사람들이 모이라고 만들어 놓은 건데,

우리나라의 '광장'은

사람들 못들어가게 잔디나 심어 놓고 평소에는 줄을 둘러 놓더니,

모일라 치면 경찰들로 막아버리는 곳이다.

국어사전의 '광장'이라는 항목을 어서 빨리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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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제 방에 있는 허브 이름입니다.

언제부턴가 제방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좀처럼 자리를 비워주지 않고 있는 녀석이죠.. ^^;;
 

 

이 녀석이 처음 제 방에 들어온 것이... 
 
언제더라... 한 1년 가까이 되는것 같군요.

어느날 어머니가 갑자기 사 오신 화분 하나.

이제부터 제 방에 두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이 녀석은 제 방에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제 손바닥 보다도 작은 화분에 몸을 싣고서,

정말 오래 버티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로즈마리를 키우고 있다는 말에 제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거 빨리 죽지 않느냐고.. 자기집에 있던 것은 금방 죽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 집에 있는 녀석은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시련(?)도 있었죠..

제 성격 탓이 아닌가 한데........

별로 관리를 못했거든요.

모... 자기가 방 한 쪽에 얌전히 앉아있겠다면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그냥 놔두었죠..

 


그러던 어느날..

학교를 다녀와서 우연히 창가를 보니까,

그새 녀석이 풀이 죽어있지 뭡니까.

그 작은 화분에 손바닥 길이만한 허브 세 포기가 있었는데,

한 포기가 말라버렸더라구요..

 

갑자기 안쓰러운 느낌이 들어서

서둘러 물을 주고, 물뿌리개로 잎을 적셔 주었죠.

그렇게 하고 햇볓에 놔두니

다음날엔 나머지들은 다시 생생하게 기운을 차리더라구요.

안타깝게도 처음 녀석은 그냥 죽어버렸죠.. ㅜㅜ

 


그렇게 해서 관심을 갖게 된 허브 화분.

요즘은 그래도 화분 겉흙이 마르지 않게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구여.. ^^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손바닥 길이를 훨씬 더 넘어서게 자라버렸습니다.

생각 외로 너무 크게 자라서,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입니다. ^^;;

 

 
모.. 차로 끓어 먹으라는 사람도 있고,

그냥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좋다는 사람도 있고..

얼마전에 본 텔레비젼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로즈마리를 잘라서 고기 요리에 사용하더군요.. ^^
 

 

저두 연구 끝에 얼마 전에 살짝 잎 몇 개를 잘라서 씹어봤습니다.

우선 로즈마리 자체가 향이 엄청 진하거든요..

요즘은 커피들을 다들 자주 마셔서리,

어지간히 진하지 않은 향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로즈마리는 그걸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만한 강한 향을 가지고 있죠.

그냥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손에 향이 남아있을 정도니..
 

 

그래서 첨엔 잔뜩 기대하고 씹었습니다.

이걸 입에 넣고 씹으면, 입안 가득히 그 향이 넘칠라나..

근데... 그냥 풀 맛이더군요.. ㅡㅡ;;

향은.... 거의 안 납니다. (켁..)
 



그렇게 키워온 로즈마리..

이젠 화분이 작은지 좀 우울해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도 빠뜨리지 않고 주고, 햇볕도 좋은데...

자꾸 풀이 죽어 있는 것이..

흙 속에 양분이 다 된건지..

아님 작은 화분에서 살 수 없을만큼 커진건지..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중입니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빨리 이렇게 글로 남겨두지 않으면 영영 기억에서 지워져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 급히 글을 쓰고있죠.. ^^

뭔가를 잃어버린다는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슬픈일이니까요..
 

 

로즈마리를 볼 때마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은 화분 하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금방 병이 들어버리고 만다는 것.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는 가장 효과적인 것은

관심을 가져주는 일부터 시작이라는 것.



 

사람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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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11-1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전에 허브 레몬밤을 키운 적이 있는데, 첨에 잘 자라다가 분갈이를 안해주어서 그런지 나중에 말라버렸어요.ㅠ_ㅠ 그 뒤로 식물을 함부로 키우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정말 그게 중요하겠죠.

노란가방 2007-11-12 07:1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에요.
도시에 살면서 식물이라는 생명을 키운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로즈마리란 녀석도 원래는 그냥 마당에 심어 놓으면 잡초처럼 잘 자라는 녀석인데 좁은 화분에 가둬두려니 답답해 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거겠죠?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