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감사하고 그래도 감사한다
남기철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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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자폐를 안고 있는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명 서번트 증후군 때문이었다. 한 번 읽은 내용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정확하게 마치 사진을 찍어둔 것처럼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물론 모든 자폐성 장애가 서번트 증후군으로 발현되는 건 아니고, 또 모든 서번트 증후군이 기억 쪽의 고, 악기 연주라든지, 회화 같은 쪽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기 일쑤였다. 시험 성적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지만, 자폐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데려가려는 로펌은 없었다(작중에서는 아버지와 관련된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된다). 드라마 자체는 경쾌한 느낌으로 유쾌한 사건해결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영우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늘도 꽤나 자주 보였던 그런 드라마였다.





이 책의 저자에게도 자폐증을 가진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위해 산행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그들을 도우며 함께 산행을 하는 도우미들이 늘어났다. 이른바 “밀알산행”의 시작이었다.


한 번은 폭우가 퍼붓는데도 신행에 동참하기로 한 부자가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왔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가 했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집사람을 좀 쉬게 해 주고 싶어서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자녀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도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애를 자니 자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의 틈은 너무나 좁다. 결국 저자는 직접 장애인 작업장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자폐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에게로도 관심이 확장된다.


하지만 보통의 사업도 3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아무래도 작업의 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애인 작업장이라는 것의 운영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 뻔히 예상이 된다. 실제로도 그런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다. 책에는 그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로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제를 꼽는다. 이 부분은 정책담당자나 행정 책임자들이 좀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부분.





전에 장애와 관련된 책 읽기 영상을 만들면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만큼 장애인들이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리고 나오기가 참 어렵다는 의미였다. 장애인들에게 우호적인 도시는 비장애인들에게도 편리한 도시인 법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보다 관련 정책이 발전해 있는 일본의 예는 꽤나 부럽기도 하다.


잔잔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에세이다. 감정적으로 너무 격정적이지도 않고, 너무 심각하고 전문적인 비판적 관점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고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지만, 읽어나가는 마음이 또 쉽지는 않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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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백성의 제자도 -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짐 월리스 지음, 강봉재 옮김 / 아바서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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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현실 순응적 기독교’이다.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은 타락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 속에 나타는 다양한 문제들─이 책에서는 주로 빈부의 격차와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폭력과 억압 등을 지적한다─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존재론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만들었으나, 교회는 그 타락한 구조와 타협하고 연합한다면 그들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개인적 차원으로 가둬둠으로써 ‘제자도 없는 은혜’라는 이단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반면 진보적임을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계시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같은 기독교의 독특한 기초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그들의 메시지에서 영적인 기초를 상실시켜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계시에 기초하면서도(진보적 한계 극복),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인으로 선포하는(보수적 한계 극복) 방법을 통해 이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단지 이론이나 운동으로서만 해결할 수 없으며, 영적인 차원에서의 바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이것을 위해서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해법은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새롭고 강한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 얻는 내적인 힘으로, 파괴적인 원리를 숭배하는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교회는 적극적으로 분쟁의 현장 가운데로 들어가 화해와 반성, 치유의 사역을 해내야 한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책이다. 그 옛날 박해를 받았을지언정 조롱의 대상은 되지 않았던 기독교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적대감은 분명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국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교회라는 본질의 문제가 놓여 있다.


교회의 본질이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앎과 그 실천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보수적인 사란들은 ‘바른 앎의 내용’에 집중했고 진보적인 이들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한쪽에만 천착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 사이 양편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데 애써왔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은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론적 기초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된 메시지’에 철저하게 기초해 교회다움을 정의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는 월리스를 좌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가 정의하고 있는 기독교나 복음은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정통적’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딱지 붙이기 같은, 세속 정치인들이 권력획득을 위해 심각하게 망가뜨려놓은 틀로 교회를 재단하려는 태도야 말로 ‘정통적’이거나 ‘복음적’이지 못하다.)





저자가 발견한 복음은 ‘사회 변혁적 복음’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게 ‘제자도’라는 말의 의미다. 물론 제대로 된 앎 없이, 그저 행동만 따라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에 부합하는 삶 없이, 복음의 내용을 쉼 없이 되뇌기만 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지경일 것이다. 전체 그리스도인의 10%만 제자도에 충실하게 살았어도, 오늘날처럼 교회가 조롱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미국의 기독교를 바라보며 40년 전에 쏟아 냈던 이 선지자적 외침이 여전히 우리나라 교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메시지라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슬픈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닳고 닳은 경구가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건 분명 진실의 한 조각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본질로부터의 일탈이지 본질 자체가 아니라는 건 이 책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지 않은가.


우리는 다시 한 번 교회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교회는 교회다움을 온전히 회복한 교회, 제자도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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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술
제프 고인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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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의 삶에 참 중요한 요소다. 그건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때로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은 일을 그저 고되고 힘든 것, 가능하면 적게 하면 좋은 것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뭐든 뒤집어 보는 게 “일”인 현대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아예 노동에 대학 악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기인 분위기도 보인다. 물론 여전히 일에 담겨 있는 좀 더 숭고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자기실현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쪽이 좀 더 많긴 하지만.


기독교적 차원에서 일은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다. 이른바 “소명”이라는 개념이다. 영어(calling)든 한자어(召命)든 의미는 같다. 그건 우리가 어떤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주로 이 단어는 특정한 일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양의 오래된 표현으로는 천직 같은 표현도 있는데, 이쪽은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게 주어진 일 정도의 수동적 의미라면, 소명은 하나님에 의한 능동적인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


중세에는 이 소명이 단지 특수한 직업군, 즉 성직자들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리로 부르셨다고 교정했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을 하면서, 그분과의 교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그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관해서 다양한 종류의 오해와 오류들이 널리 퍼져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에 관해 훌륭한 조언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소명에 관한 신화들 중 하나는 “그것은 운명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거나, “일단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별 훈련을 하지 않고도) 곧 그 일에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다” 같은 내용들이 있다. 저자는 소명에 관한 그런 어설픈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뜨린다.


저자에 따르면 소명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행동하려는 의지가 없이 소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해 왔던 일들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성과, 그리고 그것을 대할 때의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도제 기간에 상당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단번에 새로운 곳으로의 전환보다는, 단계별로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이를 수 있다.





“소명”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책이 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이다.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을 예시로 들면서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풀어낸 고전이다. 이 책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일단 소명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독자에게 좀 더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책 중반까지 성경인용이 거의 없었다. 후반부에는 두 부분 정도를 발견한 것 같은데, 기독교 출판사인 걸 생각하면 살짝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과 소명이라는 것이 일반은총의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책을 권해 줄 때 장점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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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만나다 - 신약성서 신학의 정점,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 비아 만나다 시리즈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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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성경비평적 관점에서 쓰인 요한복음 입문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의 특징과 저자, 저작 연대와 배경 등 개론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주요 주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요한복음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간략히 살피면서, 요한복음을 읽어나갈 때 집중해야 할 부분에 관해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비슷한 관점을 지닌 나머지 세 복음서들(공관복음)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얼개와 사건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그 인상적인 시작구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언행을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만든다.


덕분에 많은 학자들도 요한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주장들을 해왔다. 특별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만이 진리추구의 유일한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견해들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것이 본인의 학문적 수준의 높음을 드러내는 증표인양 여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이런 부류의 결과물들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근 1년 간 매일 성경을 읽는 모임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주 아주 근본적이면서 강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자신을 신앙을 발견하고 싶은 초심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질문은 꽤나 묵직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그리고 신학이라는 “놀음”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이 책의 논의를 따른다면,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누가 쓴 책인지 확실치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과도 상관이 없다면,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저자의 주장(78)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성령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확인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훌륭하기 때문에(그 훌륭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에 따라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결국 책의 신뢰성, 심지어 영감성까지도 그것을 읽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주체성에 대한 현대주의적 신봉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책의 구성은 나름 알차다. 현대의 비평적 관점을 잘 정리해 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인다. 다만 그 논리 과정이 어떻게 일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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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성경을 읽을 적에도 요한복음이 나머지 3개의 성경과 성격이 좀 달라서 의아한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그런데 성경은 노란 가방님 말마따라 저자가 불분명해서 (실제 4복음만해도 에수님의 12제자가 직접 저술했는지도 아라송함),그 당시에도 계파마다 읽던 성경이 제 각각이었다고 하지요.그건 아무래도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로마에 박해를 박고 30세 전후로 일찍 돌아가시고 12 제자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에 비해 꾸란이나 불경의 경우 마호메트(62세)와 부처님(80세)이 오래 사신데다가 살아생전 어느 정도 교세도 있어서 (많은)제자들이 두 분의 말씀을 모두 암기했다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성경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것 같아요.
 
오리게네스 성경해석학 서사기 - 해석·상징·드라마
곽계일 지음 / 다함(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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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는 초기 기독교 시기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교리문답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헥사플라”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6개 성경 본문을 비교/대조한 대작을 펴내기도 했던 성경연구가이자, 수천 편의 저작을 남긴 정력적인 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비운의 신학자인데, 최근에는 그 이단 정죄의 근거에 대해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오리게네스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성경해석학에 기여한 독특한 공헌 때문인데, 그는 이른바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 책은 오리게네스의 성경해석법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지 그 과정을 서사적으로 되짚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오리게네스 이전에도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문헌을 해석하는 시도는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에 상징(그리스어로 “심볼론”)은 BC 6세기에서 4세기 사이 인간과 신 사이를 이어주는 신성한 증표로 여겨졌고, 이 시기를 거치며 호메로스 같은 이들을 시인에서 선지자로, 그들의 작품은 서사시에서 신탁을 감추고 있는 상징으로 격상되었다.


플라톤 사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이런 상징을 전면에 들고 나온 인물이 암모니아스였다. 그는 텍스트 상징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플라톤이 물질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던 천상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런 암모니아스의 1세대 제자가 바로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 주창자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리게네스가 등장한다. 오리게세네스 역시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암모니아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동기인 플로티노스와는 다른 문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구약성경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신적 비밀이 가득한 일종의 텍스트 상징으로 보았고, 이른바 비유 해석법, 즉 알레고리를 통해서 그 상징 속 본래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저자는 우선 이렇게 오리게네스의 학문적 계보가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책은 흥미롭게도 오리게네스의 개인적 삶의 연대기와 그의 신학적 작업을 매치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그러니까 오리게네스의 저작이 나온 순서와 배경을 아울러 살핌으로써)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와 사상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주된 주제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 방식이 어떻게 나왔고,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난 후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아(가이사랴)에서 그의 작업은 유대 랍비들과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장으로 접어든다. 흥미로운 건 성전이 파괴된 시대를 살고 있던 랍비들 역시 일종의 알레고리로 구약을 해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월절의 핵심적인 상징인 “피”를, 유대인들은 모리아산에서 흘린 이삭의 피나, 그에 앞서 할례를 행할 때 흘린 아브라함의 피로 해석하곤 했다. 이에 반해 오리게네스의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고.



국내 저자 가운데 교부 신학을 전공하고 이렇게 책(원래는 논문이었지만)까지 내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책의 내용 역시 흥미로운 설명들이 잔뜩 발견되어서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 1장 “상징의 시대”와 4장 “텍스트 상징으로 지은 성전” 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 많아 집중해서 읽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다. 작고 얇은 볼륨이기도 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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