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서티브 -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
일자 샌드 지음, 김유미 옮김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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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내성적”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어디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아서, 학교를 다니는 내내 무슨 “장” 같은 건, 딱 한 번 그것도 부회장이라는 뭘 하는 지도 알 수 없는 미심쩍은 감투를 한 번 쓴 적이 있을 뿐이었다.(고등학교 때는 동아리 부단장이라는 걸 했었는데... 그 시절은 굉장히 이례적인 시기라..)


뭐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 서면 말도 못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고, 발표라든지 하는 영역에서는 그리 부담 없이 나서서 대체로 좋은 성적을 받았었다. 다만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에너지가 사용되고, 피곤하게 느껴지니 굳이 일부러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거나 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다른 친구들과 뛰어 놀기보다는 그냥 보고 싶은 책을 읽는 게 편했다.


쉬는 날이라고 어디 밖에 나가는 사람들, 기분 전환을 위해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들, 쉬면서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 되긴 한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에너지가 급격히 소모되는 느낌이었으니까. 반복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대인 기피까지는 아니고 굳이 말하면 성향에 관한 것 정도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시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이것도 나이를 먹으면서, 또 일을 하면서 조금은 변하기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은 상황이 좀 더 심각(?)한, 혹은 “증상”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서는 내성적이니 내향적이니 하는 표현보다는 “매우 민감한(highly sensit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 둘은 애초에 같은 게 아닌데, “매우 민감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약 30%가)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의 민감성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깊이 공감을 한다. 가장 주된 문제는 이들이 지나치게 높은 이상적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주 죄책감과 강한 실망을 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게 만들고, 전반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꼭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닌데, 이들의 민감성은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큰 감동과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특성이 되기도 한다. 느리지만 신중하기도 하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높은 지향을 가지기도 한다(물론 이 부분이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건 저자가 이들을 가리키면서 자주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으면서, 그들의 문제가 꼭 “나쁜 일”이 아닐 수 있으며,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그 민감함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 저자의 책이 대체로 이런 느낌이다. “그래 괜찮아. 우리 할 수 있어.” 뭐 크게 도덕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 이상, 이런 식의 격려가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책 말미에 자신의 민감도를 측정할 수 있는 몇 개의 질문들이 있다. 응답에 따라 점수를 부여해서 간단하게 더하고 빼는 건데, -52부터 140까지의 범위 중 높을수록 더 민감하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60점 이상이면 매우 민감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데... 내 점수는... 93, 아, 나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던 건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학습이 필요하다. 특히 성향이 많이 다른 경우 더더욱 그렇고.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 중심으로, 나와 비교해서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매우 민감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조언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우리 주변의 “매우 민감한” 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서로 이해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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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다소 의외의 메시지 - 통념을 바꾸는 성경 읽기 믿음의 글들 398
김구원 지음 / 홍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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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책이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된다. 일단 구약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 보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보인다. 성경 자체를 아예 처음 읽는 사람들 보다는, 어느 정도 구약의 내용에 익숙한(읽어서든, 들어서든) 사람들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다.


고대 근동 문화를 전공한 저자의 배경의 영향인지, 책 초반의 몇 장들에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대교 배경의 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내용을 진행해 나간다. 현대에 활동하는 유대교 배경의 학자들이 쓴 글을 읽다보면, 확실히 이 책의 저자가 추구하는 인문학적 해석이 두드러지는 면이 있다(다만 이게 종종 그냥 ‘윤리 중심의 해석’으로 치우치는 느낌이 좀 있긴 하다).


책 초반 저자는 “인문학적 읽기”를 해 보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이 말은 성경에 대한 신화적 해석, 혹은 신앙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해석을 해보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잘만 사용한다면 이런 식의 배경지식과 새로운 관점은 성경을 이해하는 폭을 더 넓고 깊게 만들도록 도와줄 수 있다.





몇몇 본문들에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만나볼 수 있다. 사사 중 하나였던 삼갈이 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개인적 다산과 연결시키는 것이 왜 무리한지에 관한 설명, 사무엘하와 역대상에서 이른바 “다윗 언약”의 내용을 설명하는 문구의 변화(“네 집”에서 “내 집”으로) 같은 부분은 신선했다.


물론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내용들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의외”가 아니었던 내용들도 있던 셈. 뭐 하루 이틀 읽은 게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이런 내용들을 한 데 모아서 학술적인 설명과 함께 읽을 수 있게 해 준 건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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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기원 - 아기를 통해 보는 인간 본성의 진실 아포리아 4
폴 블룸 지음, 최재천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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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하는 질문은 인류의 지성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물어왔던 질문이다. 철학과 종교에서는 이 질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쉽게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이른바 뇌과학의 영향으로, 선악과 같은 도덕, 윤리의식을 뇌의 기능으로(그러니까 순수하게 물리적인 효과로) 치환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질문에 합리적인 대답은 아니기도 하다.


이 책은 영유아들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선과 악을 언제부터 구분하게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결과를 제시한다. 사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실험 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비윤리적이니까)를 지니는데, 저자는 그런 변수가 최소한으로 생기는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실험을 꾸밈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가 보려고 시도한다.


물론 여기에도 어려움은 있는데, 말을 할 줄 모르는 아기들의 의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 부분은 아아들의 표정과 눈동자의 움직임 등을 분석하는 최신 기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선택지에 더 오랜 시간 눈길이 머문다는 것. 이게 절대적으로 맞는 추측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실험이고, 저자의 결론도 명쾌하다. 아기들은 생후 1년이 되기 이전에 이미,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분할 줄 알고, 대다수가 선한 행위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실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는 그렇게 단순하게 선악을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것들도 잔뜩 있기에, 아기들의 행동에서 발견된 결과를 지나치게 확대해석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실험 결과는 책에서 묻는 “도덕은 타고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소위 진화심리학의 상투적인 표현(어떤 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존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존재론과 정의론의 기괴한 융합)을 사용해 가며, 어떻게든 (입증되지도, 관찰된 적도 없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며 이어져 온 진화적 생존 적응설을 꺼내지만, 애초에 그런 설명을 할 거라면 굳이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필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연구의 방법론은 신박하긴 했지만, 선악이 무엇인지를 묻기에 아기들은 그리 적합한 스승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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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 성서의 그림들 - 현대 종교미술의 거장 지거 쾨더와 함께하는 뜻을 여는 말씀 묵상
게르트루트 비드만 엮음, 지거 쾨더 그림, 유명철 외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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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예술은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추상예술조차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면을 포착해서 과장하거나 의도적인 왜곡, 축소를 통해 예술가가 경험한 감흥과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술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중세는 교회 예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용도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중세 교회 예술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런 것들을 관리하는 교회 또한 함께 부유하고 화려해져만 갔다. 화려함에 익숙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패해버렸고, 가장 본질적인 말씀의 선포는 약해지다 못해 희미해졌다.


종교개혁자들이 예술을 의심스럽게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시기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화 된 교회의 각종 부속들을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시기였다. 마치 과식을 해서 체한 사람이 기름진 음식을 끊고 죽만 먹어야 하는 것처럼. 개혁자들은 미술과 음악, 건축 등 여러 부분에서 소박한 (때로는 금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양식을 선호했다.


아쉽게도 이 때문인지 개신교회 안에서 예술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물론 개혁파 화가라고 인정받는 얀 베르메르 같은 걸출한 작가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 양과 질에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이전 시대 이른바 “성화”라고 불렸던, 기독교적 주제를 담은 좀 더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작품들이 부족한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이 책은 가톨릭 사제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던 지거 쾨더라는 인물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전체에 걸쳐서 컬러 도판이 잔뜩 실려 있고(무려 103개), 그 그림을 해설하는 다양한 필자들(무려 28명이다)의 글이 덧붙여져 있는 형태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은 그 필자들의 글이고, 개중에는 꽤 인상적인 통찰들도 보이지만, 역시 이 책의 백미는 그림이다. 독특한 화풍인데, 계속 보다보니 특징 같은 것들도 눈에 좀 들어오고(문외한인 나에겐 꽤 큰 발견이다), 성경 속 이야기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사이의 시간과 공간적 간격을 그림 속에서 극복하는 모습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게 예술의 능력이지 않을까.


상당수의 그림에서 손이 자주 보인다. 하나님의 손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이는데,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하나님의 손이 전쟁과 증오로 시끄러운 오늘 우리의 세계에도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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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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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웃나라인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착취를 당했지만,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물론 이 과정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치열한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이 소설은 그런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미 나라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집권을 한 채, 국민들을 통제하는 여러 법률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인공 아일리시의 남편은 교원노조 부위원장으로서 이런 사태에 대한 항의를 위한 시위에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억압은 점차 수위를 높여간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닥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어떻게든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을 처음 그대로 붙들고자 하던 그녀의 노력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던 맏아들은 징집영장을 피해서 반군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공습 파편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가 정부군에게 끌려가 죽은 채로 돌아온다. 딸아이는 엄마와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막내는 아직 우유를 먹여야 하는 어린 아이다.





작가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아이일리시가 조금씩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서술이 철저하게 아일리시 개인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도 아일리시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아일리시의 생각을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보의 결핍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어렵게 만들고, 닥쳐오는 사건들에 대처하는 데 급급하게 만든다.


여기에 책 전체에 마침표와 쉼표를 제외한 다른 문장부호들이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줄 바꿈마저 매우 적게 사용된다. 대화라고 해서 따로 줄 바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영화로 치면 롱 테이크로 장면을 연속해서 촬영하는 것처럼, 긴박감과 함께 시각적 압박감을 준다. 페이지 전체를 여백 없이 꽉 채우고 있는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사방이 꽉 막힌 주인공의 상황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권위주의 정부의 독재적 지도자, 그로 인한 격렬한 폭력이 동반된 충돌과 그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쓰는 (곧 난민이 될 운명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작품 속 이미지는 저자가 시리아 난민들을 보고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우리는 더 많은 곳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고 있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좀 더 정치적인 메시지나 분석이 담길 만도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저자는 철저하게 아일리시라는 개인의 눈으로 사태를 서술한다. 만약 좀 더 직설적으로 정치적 비평을 가했다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피해자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사태의 잔혹성, 정치적인 문제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더 생생하게 묘사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간들에 둘러싸여서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입을 틀어막고, 정치적 반대파와의 대화를 거부한 채, 종래에는 상대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며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까지 획책했던 윤석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참혹한 모습은 어쩌면 윤석열이 바랐을 미래였을 지도 모르겠다(직접 그 끝까지 그리지는 못했을 지라도―생각이 참 부족한 인사였으니까―그가 그렸던, 그리려고 시도했던 미래와는 비슷할 것이다). 최근에는 트럼프가 그와 비슷한 짓을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작품 속 사건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어떻게 그 문제가 결말에 이르렀는지 퍽 궁금하다. 권위주의적 독재정부를 출현시킨 것도 시민들의 의사(투표)를 통해서였을까.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리고 누군가는 제대로 책임을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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