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감사하고 그래도 감사한다
남기철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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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자폐를 안고 있는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명 서번트 증후군 때문이었다. 한 번 읽은 내용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정확하게 마치 사진을 찍어둔 것처럼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물론 모든 자폐성 장애가 서번트 증후군으로 발현되는 건 아니고, 또 모든 서번트 증후군이 기억 쪽의 고, 악기 연주라든지, 회화 같은 쪽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기 일쑤였다. 시험 성적은 언제나 최상위권이지만, 자폐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데려가려는 로펌은 없었다(작중에서는 아버지와 관련된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된다). 드라마 자체는 경쾌한 느낌으로 유쾌한 사건해결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영우의 인생에 드리워진 그늘도 꽤나 자주 보였던 그런 드라마였다.





이 책의 저자에게도 자폐증을 가진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위해 산행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그들을 도우며 함께 산행을 하는 도우미들이 늘어났다. 이른바 “밀알산행”의 시작이었다.


한 번은 폭우가 퍼붓는데도 신행에 동참하기로 한 부자가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왔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가 했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집사람을 좀 쉬게 해 주고 싶어서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연스럽게 자녀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도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애를 자니 자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의 틈은 너무나 좁다. 결국 저자는 직접 장애인 작업장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자폐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에게로도 관심이 확장된다.


하지만 보통의 사업도 3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아무래도 작업의 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애인 작업장이라는 것의 운영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 뻔히 예상이 된다. 실제로도 그런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다. 책에는 그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로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제를 꼽는다. 이 부분은 정책담당자나 행정 책임자들이 좀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부분.





전에 장애와 관련된 책 읽기 영상을 만들면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만큼 장애인들이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그리고 나오기가 참 어렵다는 의미였다. 장애인들에게 우호적인 도시는 비장애인들에게도 편리한 도시인 법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보다 관련 정책이 발전해 있는 일본의 예는 꽤나 부럽기도 하다.


잔잔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에세이다. 감정적으로 너무 격정적이지도 않고, 너무 심각하고 전문적인 비판적 관점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고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지만, 읽어나가는 마음이 또 쉽지는 않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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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백성의 제자도 -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짐 월리스 지음, 강봉재 옮김 / 아바서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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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현실 순응적 기독교’이다.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은 타락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 속에 나타는 다양한 문제들─이 책에서는 주로 빈부의 격차와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폭력과 억압 등을 지적한다─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존재론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만들었으나, 교회는 그 타락한 구조와 타협하고 연합한다면 그들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개인적 차원으로 가둬둠으로써 ‘제자도 없는 은혜’라는 이단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반면 진보적임을 자칭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계시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같은 기독교의 독특한 기초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그들의 메시지에서 영적인 기초를 상실시켜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계시에 기초하면서도(진보적 한계 극복),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인으로 선포하는(보수적 한계 극복) 방법을 통해 이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단지 이론이나 운동으로서만 해결할 수 없으며, 영적인 차원에서의 바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이것을 위해서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해법은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승리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새롭고 강한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 얻는 내적인 힘으로, 파괴적인 원리를 숭배하는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교회는 적극적으로 분쟁의 현장 가운데로 들어가 화해와 반성, 치유의 사역을 해내야 한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책이다. 그 옛날 박해를 받았을지언정 조롱의 대상은 되지 않았던 기독교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적대감은 분명 이례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국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교회라는 본질의 문제가 놓여 있다.


교회의 본질이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앎과 그 실천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보수적인 사란들은 ‘바른 앎의 내용’에 집중했고 진보적인 이들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한쪽에만 천착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 사이 양편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데 애써왔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은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론적 기초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된 메시지’에 철저하게 기초해 교회다움을 정의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는 월리스를 좌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가 정의하고 있는 기독교나 복음은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정통적’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딱지 붙이기 같은, 세속 정치인들이 권력획득을 위해 심각하게 망가뜨려놓은 틀로 교회를 재단하려는 태도야 말로 ‘정통적’이거나 ‘복음적’이지 못하다.)





저자가 발견한 복음은 ‘사회 변혁적 복음’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게 ‘제자도’라는 말의 의미다. 물론 제대로 된 앎 없이, 그저 행동만 따라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에 부합하는 삶 없이, 복음의 내용을 쉼 없이 되뇌기만 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지경일 것이다. 전체 그리스도인의 10%만 제자도에 충실하게 살았어도, 오늘날처럼 교회가 조롱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이미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미국의 기독교를 바라보며 40년 전에 쏟아 냈던 이 선지자적 외침이 여전히 우리나라 교회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메시지라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슬픈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닳고 닳은 경구가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건 분명 진실의 한 조각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본질로부터의 일탈이지 본질 자체가 아니라는 건 이 책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지 않은가.


우리는 다시 한 번 교회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교회는 교회다움을 온전히 회복한 교회, 제자도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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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시대 책의 행방 - 출판평론가 한기호가 바라본 책
한기호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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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출판평론가(라는 직업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한기호의 책이다. 언젠가 중고도서를 이것저것 사면서 함께 내 책장에 끼어들어온 것 같은데, 이제야 손에 들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흠칫 놀랐던 건 이 책이 2006년에 나왔다는 사실. 20년 전 책이라는 의미다.(정확히 말하면 2006년이 2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책은 급격한 디지털 전환 시대 속에서 책과 출판이 처한 위기들, 그리고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인가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이다. 저자의 다른 책들이 자주 그런 것처럼,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모으기 위해 쓴 글들은 아니고, 이곳저곳에 기고했던 글들을 한 데 모았다.


흥미로운 건 무려 20년 전 고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제 하는 고민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 것 같고, 출판계의 미래는 암담해 보이기만 하고 하는 식.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저자는 그저 우는 소리만 하며 누가 살려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나름의 활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예컨대 최근(당시 기준으로) 책의 트렌드를 파악해보는 1부에서는 결국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면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로 결론이 모아지고, 다양한 정책적 고민들 담고 있는 3부와 4부에서는 독서에 관한 문화 개선, 그리고 학교 도서관의 내실 있는 확충 같은 해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오래 전 책이다 보니 지금과는 좀 다른 상황도 보인다. 2006년이면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이었으니(아이폰이 처음 나온 게 2007년) 휴대폰이 어떤 식으로 사람의 독서 활동에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때였을 텐데도, “지금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은 인간이 휴대전화를 통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결과는 그리 긍정적인 것 같지 않지만, 반면 당시까지만 해도 “수익을 내는 데 실패했다”는 전자책 시장은 2024년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을 1년에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의 비율은 40%인데, 전자책은 그 절반인 약 20%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이다.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도서관의 확충과 관련해서 책을 쓸 당시까지는 학교도서관의 사서 배치율 3%라는 절망적인 수치였으나, 지금은 광주광역시와 서울 같은 경우 80%까지 사서교사나 사서공무원이 배치되는 식으로 변했다. 물론 전국적으로는 아직 40% 중반대 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 법을 안 지키는(최소 1인 이상 배치) 학교가 여전히 많다는 건 아쉬운 부분.


책 후반에는 서울국제도서전과 관련된 내용도 보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큰 흥행을 거둔 행사인데, 책 속에서는 흥행부진, 콘텐츠 부족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 독서 상황은 나아지고 있는 건지, 악화되고만 있는 건지.. 물론 팔리지 않는 책을 붙잡고 망하는 출판사들은 언제나 있었으니 누군가에게는 늘 이 시장이 암담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또 전반적인 상황은 느리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만들어 팔고 싶은 출판사에게도, 그리고 책을 좋아해서 출판계 전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유용했을 책이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서 그냥 옛날이야기처럼 읽고 넘어가면 될 내용들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유용한 통찰들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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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술
제프 고인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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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의 삶에 참 중요한 요소다. 그건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때로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은 일을 그저 고되고 힘든 것, 가능하면 적게 하면 좋은 것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뭐든 뒤집어 보는 게 “일”인 현대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아예 노동에 대학 악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기인 분위기도 보인다. 물론 여전히 일에 담겨 있는 좀 더 숭고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자기실현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쪽이 좀 더 많긴 하지만.


기독교적 차원에서 일은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다. 이른바 “소명”이라는 개념이다. 영어(calling)든 한자어(召命)든 의미는 같다. 그건 우리가 어떤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주로 이 단어는 특정한 일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양의 오래된 표현으로는 천직 같은 표현도 있는데, 이쪽은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게 주어진 일 정도의 수동적 의미라면, 소명은 하나님에 의한 능동적인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


중세에는 이 소명이 단지 특수한 직업군, 즉 성직자들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리로 부르셨다고 교정했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을 하면서, 그분과의 교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그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관해서 다양한 종류의 오해와 오류들이 널리 퍼져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에 관해 훌륭한 조언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소명에 관한 신화들 중 하나는 “그것은 운명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거나, “일단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별 훈련을 하지 않고도) 곧 그 일에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다” 같은 내용들이 있다. 저자는 소명에 관한 그런 어설픈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뜨린다.


저자에 따르면 소명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행동하려는 의지가 없이 소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해 왔던 일들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성과, 그리고 그것을 대할 때의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도제 기간에 상당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단번에 새로운 곳으로의 전환보다는, 단계별로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이를 수 있다.





“소명”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책이 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이다.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을 예시로 들면서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풀어낸 고전이다. 이 책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일단 소명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독자에게 좀 더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책 중반까지 성경인용이 거의 없었다. 후반부에는 두 부분 정도를 발견한 것 같은데, 기독교 출판사인 걸 생각하면 살짝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과 소명이라는 것이 일반은총의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책을 권해 줄 때 장점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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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시대 - 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지음 / 타인의사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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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특권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잘났든 못났든, 키가 크던지, 얼굴이 못생겼는지, 정치의식이 바르든지, 아니면 왜곡되고 심지어 삐뚤어진 사고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모두가 한 표씩 행사하는 제도니까. 물론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두에게 한 표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법률에 따라 선거권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으니.(주로 범죄관련)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이런 종류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별한 계급, 나면서부터(이점에서는 시대에 따라 다른 관점들이 좀 있지만) 평민들과는 다른 이른바 고귀한 계급이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런 척 했다). 바로 귀족이다. 이 책은 유럽의 귀족에 관한 다양한 상식들을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책이다.





1부는 가볍게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흥미를 돋우고, 2부에서는 귀족들의 일상을, 3부에서는 유명한 귀족들의 이야기를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놓는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4부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전반적으로 교양역사서라고 할 만한 구성 가운데서 그나마 조금은 학술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귀족이 되고, 귀족이 된 후에 했던 일은 무엇인지 같은 내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실 그들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피를 따로 타고났겠는가. 오히려 그렇기에 블루 블러드니 프랑크족 전사의 혈통이니 하는 것들에 집착을 하고, 엄청난 양과 진기한 향신료를 들이부은 음식을 준비해 파티를 열고, “수준”을 맞추기 위해 과시적이고 소비적인 삶을 살고 하는 것들은 그런 허구를 둘러싸서 깨지지 않게 하려는 포장재였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그 안에는 단순히 허위의식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가치들, 이를테면 명예와 충성,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책임감과 자선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까지 함께 내다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 시대의 문제는 다분히 왜곡된 겉치레를 버리면서 그 안의 선한 가치들마저 무시하는 데 있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외피가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귀족”들이 민주사회 안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귀족의 특권이라는 건 국가의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받고, 범죄를 저질러도 종종 무마되거나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고, 자기들만의 혼맥과 학맥을 통해 특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계급을 공고화 한다는 부분일 것이다. 우린 이런 무리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귀족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혈통에 따라 전통적으로 귀족으로 인정되었던 이른바 대검귀족이고, 다른 하나는 국왕의 임명으로 주로 법관이 됨으로써 귀족계급의 문 안으로 들어갔던 법복귀족이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얼마 안 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소수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 국민이 노예화되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대검귀족에 해당되는 신분은 거의 사라진 것 같지만, 이제 그 자리를 막강한 권력을 지닌 새로운 법복귀족들이 차지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존재는 민주공화정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인데, 이들을 해체하는 일이 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제 혈통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자본에 기반해 그들의 권력은 점점 더 공고해져만 가는 것 같다. 중세의 귀족 이야기야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귀족들의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없으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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