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란 건

참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공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굴절되거나 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소음의 연속인데 말이죠.

(물리학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학문인지를 말해주는 듯.. ㅡㅡ;)

 

 

 

악이 단순한 소음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를 지켜보면 알 수가 있죠.

때로는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단조로운 선율의 음 서 너개만 눌렀을 뿐인데도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니까요.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흩어지게도 할 수 있죠.

 

 

 

악이란 결국,

우리의 정신적인 영역,

즉 우리의 영혼의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악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습니다.

음... 성적이 안 나와서요..

다른 과목은 다 '수'인데, 음악과 체육은 '우'더라구요..

(엇.. 멀리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ㅡㅡ;)

 

 



악이라는 것이 사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 아니겠습니까.

그 것을 실제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오늘날엔 단지 생산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오랜 시간 동안의 학습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약간 미루도록 하구요..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니까요)

 

 

 

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였습니다.

필그림이라는 합창단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노래를 한다는 것, 음악을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

이 모든 걸 거기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이제 고급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걸음마 정도는 뗀 것 같습니다.







서 말한 것처럼,

음악이란 것은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힘을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젠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죠.

글을 쓸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고.

평화와 따뜻함을 서술할 때는 그런 음악을 듣고,

위기와 격정을 써 내려갈 때는 또 그런 음악을 듣고..

그걸 읽고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저도 그 방법을 사용해봤죠.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더라구요.

 

 

 
즘은 무엇인가를 긁적일 때마다 항상 음악을 듣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잡문들을 쓸 때나,

레포트를 쓸 때도 듣죠. ^^

 

 

 

가 주로 듣는 음악은 영화음악입니다.

(요즘에는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를 좀 듣기도 합니다만..)

영화음악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든요.

남의 것을 베끼는 글이 아닌 이상,

무엇인가를 쓰면서 상상력만큼 중요한 건 없는 듯 싶습니다.

특별한 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영화음악을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지는 느낌이 들어요.

 

 

 

화음악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다 좋다는 식은 아니구요..

일단 '선곡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같은 영화에 실린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곡은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곡은 제외될 수도 있죠.

평가기준은.....

뭐, 제 느낌이죠. ^^; 

 

 


만히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른 곡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은,

피아노 연주곡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곡도 있긴 하지만,

절반 이상이 피아노 연주곡이더라구요.

 

 

 
마도 피아노 연주라는 것에 제 영혼이 매력을 느끼나 봅니다. ^^

(그래서 피아노 연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나... ㅡㅡ;;)

정작 저 자신은 피아노라는 걸 치지 못하지만,

피아노 건반이 내는 소리 자체,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선율..

참 매력적인 악기인 것 같아요.

사람의 영혼을 저 밑바닥부터 떨리게 만들 수 있는..

(그렇다고 다른 악기들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니 이해하세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무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내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요.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영화 '아는여자'에 나왔던 음악들입니다.

영화 자체는 그다지 슬프지 않은데 음악 자체는 안 그러네요. 



 

 

시나,

아직도 제가 쓰는 이 방법을 써보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할 때,

그것이 글이 되었든, 계획이 되었든, 그밖에 무엇이던간에

음악이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꺼에요.

뭐... 개인적인 편차야 존재할 수도 있고... 에... 또...

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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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혼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이제 나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겨서

주위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외로운 섬처럼 혼자 누워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1. 줄거리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영국 런던. 전쟁이 지속되면서 영국 정부는 어린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시골로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던 빌도 그렇게 시골로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게 된다. 하지만 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한 시골집에서 며칠을 머물던 빌은 아버지를 찾아 다시 런던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미 런던 시내는 전장이 된 지 오래였고, 군대에 간 빌의 아버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빌의 앞에 새롭게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빌처럼 피난을 가려다가 배가 침몰해 겨우 돌아오게 된 소녀 줄리였다.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나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2. 감상평 。。。。。。。

 

     내 방을 정리하시던 어머니가 책을 집어 드시더니 책장을 쭉 넘겨 훑어보신다. 읽으려고 그러시냐고 했더니 책 제목이 마음이 들어서 읽을 만한 책인가 해서 보셨다고 하신다. 제목이 썩 ‘예쁘게’ 지어진 책이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특히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년과 소녀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이라서(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2차 대전의 추축국 중 하나) 사람들에게 경원시 당하면서도 어눌한 영어로 빌과 줄리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해 주는 마르코, 부자지간인 큰 버트와 작은 버트 등은 전쟁이 반드시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던가 하는 생각에 반대를 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소년을 시점으로 하는 서술(1인칭 주인공 시점)은 소녀에 대한 소년의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자신이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소년의 순수한 사랑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현대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날카로움이나 세련됨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황순원의 ‘소나기’ 등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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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으로 들리는 철제(鐵題)의 마찰음.

그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인공색(人工色)이 진한 경적음.

웅성이는 소리.

플라스틱과 석재가 맞부딛히며 발생시키는 소리...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선지,

아니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알리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는 곳이 있다.


 

매일 아침 타는 지하철이 바로 그 곳이다.
 

 


혹시나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아니면 급작스럽게 여유를 가져야만 할 때(?)가 생긴다면,

지하철 승강장에 설치된 의자에 잠시 앉아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용하는 지하철이란 곳에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소음이 들리는지 들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듯 싶다.

 


지하철과 "관계된(매일, 일정 시간에, 일정장소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장소와 뭔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군상들이 발생시키는 소음을 듣고 있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차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의식을 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들은 하루종일 너무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그리고 다채로운 소음을 발생시킨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각종 소음을 발생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러한 소음들은 동료 인간들에게 불쾌함으로 다가온다.

 

 

 

한 번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이 지구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 낸 소음을 발생시키는 수많은 인공구조물들까지 없어진다면,

그래도 이 세상은 이렇게 시끄러울까 하는..

 


물론 인간 이외의 것들도 소리를 발생시킨다.

우리 인간들의 청력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자연이 쉴새없이 쏟아내는 그 수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매우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쉴 새 없이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의 발자국 소리,

여름이면 연못을 점령해버리는 소금쟁이, 물방개들이

헤엄치는 소리들로 금새 귀가 가득차게 될테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기들의 날개짓 소리가

100배는 더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ㅡㅡ;

 


그런 소리들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 모든 소리들은 적어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불쾌감과 고통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다는 점이다.

새 소리가 동료 새에게 불쾌감을 유발시킬까?

매미 소리가 다른 매미에게 고통으로 느껴질까?

(오히려 반대다. 매미들은 동료가 우는 소리에 용기를 얻는다.)

 


똑같이 지하로 다니더라도

지하철이 내는 소음과 두더지가 내는 소리는 천지차이다.

두더지의 그것을 지하철의 그 찢어지는 소음에 비교할 수나 있을까.

(옆에서 쉬고 있는 개미에게는 크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ㅡㅡ)

 


문제는 조화를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유달리 조화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조화를 이루려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외부의 사물을 변용시키고, 부수고, 깍아내고, 찢어놓는다.

 


물리적인 사물 뿐만 아니라, 소리의 영역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음"인 것이다.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리. 

그 것이 바로 소음이다.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운 걸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지간히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인가 보다.

 

 

 

한 번쯤은 시끄러운 소리 내기를 그치고,

다른 사물들과 조화를 이뤄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보다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조금만 천천히 걷고,

조금만 말 소리를 낮추고,

조금만 주위에 귀를 기울여보면 된다.

조금만 주위를 더 느껴보면 된다.

 


단지 그것으로 족한데 말이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보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인데..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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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의 신화 - 일본 역사 교과서, 미디어의 정치학
사토 다쿠미 지음, 원용진.오카모토 마사미 옮김 / 궁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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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호에서의 ‘항복’이 아니라 옥음방송의 ‘종전’을 기억하고 싶었던 일본 국민에게

옥음사진은 존재하지 않으면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증거사진이었던 셈이다.

 

 

1. 요약 。。。。。。。

 

     일본에게 있어서 8월 15일은 종전일인가 패전일인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종전이라는 말은 우열의 판단이 배제된 어휘지만, 패전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공인 미디어 연구를 통해 1945년 이후 일본의 미디어들이 어떻게 그 날의 기억을 윤색하고 창조해왔는지를 밝혀낸다.

     사실상 8월 15일에는 소위 옥음방송(일왕의 종전교서를 라디오를 통해 내 보낸 것)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교서가 실제로 녹음된 것은 8월 14일이었고, 실제적으로 항복문서에 조인을 한 것은 9월 2일이었다.(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쪽 연합군 측에서는 9월 2일을 대일전승기념일로 기념한다) 우익은 우익대로 원자폭탄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켰는가하면(왕의 결단으로 전쟁이 ‘끝났을’ 뿐이라는), 좌익은 좌익대로 당시 왕과 각료들을 파시스트로 몰아붙이며 그들로부터 해방된 날(그러니까 소위 민중들은 파시스트의 압제 아래 있었다는, 어찌 됐건 대중은 죄가 없다는 식)로 8월 15일의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원자폭탄,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문제를 풀어나가며, 저자는 일본인들이 좀 더 정직하게 그 날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8월 15일을 일본 고유의 명절인 오봉과 함께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날로 기린다면, 9월 2일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서 그에 대한 반성을 하는 날로 말이다.

 

 

2. 감상평 。。。。。。。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그 날.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날을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이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무엇을 기준으로 그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는가?’ 일왕이 라디오로 ‘종전교서’를 발표한 것을 기준으로? 남의 나라를 무단으로 점령해 수십 년 동안 갖은 약탈을 하다가, 이제 간다고 말하면 그냥 그 날을 기뻐하는 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준 책이다.

     종전교서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 그것을 반포한 8월 14일을 기념하는 것이 옳다. 교서에도 날짜는 14일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제는 이 땅에서 금방 물러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 등지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얼마 전 읽었던 장준하의 ‘돌베개’에도 실려 있듯 일본군은 그날 이후에도 임시정부의 환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15일의 신화, 즉 그들의 천왕이 거룩한 결단으로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종전을 선택했다는 환상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미국 전함 미주리 호 갑판에서 이루어졌던 항복문서 조인식은 차차 잊혀 갔다. 이제 일본은 8월 15일에는 A급 전범들까지 합사 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이 참배를 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날로 삼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생중계 되는 기념식 말고는 그냥 노는 날일 뿐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왜 이런 책이 일본인들에 의해 쓰일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지 아쉬울 뿐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일본의 초중고 교과서들을 분석하며 어구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전제들을 상세하게 밝히는 부분은, 독도 문제, 정신대 문제, 새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나올 때에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비교가 되어 무안할 정도였다. 이미 일본이 다 연구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확고하게 구축 한 뒤 문제를 공론화 시킬 때에야 연구를 시작하는 식으로는 언제까지나 당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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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벌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병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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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력을 단순히 추리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분석가는 하나같이 추리에 능하지만 추리에 능하면서도

 의외로 분석적이지 못한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흔히 추리력은 구성력 내지는 결합능력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1. 줄거리 。。。。。。。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을 모아 만든 단편집이다. 세계 최초의 탐정인 ‘오귀스트 뒤팡’이 등장하는 최초의 추리소설 ‘모르그 거리의 살인’, 그리고 단지 신문에 난 기사들만을 토대로 미궁에 빠진 실제 살인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한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뒤팡이 등장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인 ‘도둑맞은 편지’ 등과 함께 앨런 포 특유의 심리 스릴러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검은 고양이’ 등의 괴기, 환상 소설들이 실려 있다.

 

2. 감상평 。。。。。。。

 

     내가 어렸을 땐 탐정이 되는 게 꿈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빌려 온 추리소설을 밤을 새워 읽기도 했고, 탐정이 되는 법이라는 책도 사 봤던 것 같다. 탐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각종 도구들을 세트로 만들어 광고하는 상품을 사고 싶었지만 차마 돈이 없어 그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 때 즐겨 보던 작가들이 셜록 홈즈로 유명한 코난 도일, 뤼팽 시리즈로 유명했던 모리스 르블랑,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전집은 번번히 읽으려다 실패했고, 목을 잘라 T자형 십자가에 매단 이야기로 유명한 앨러리 퀸 등이었다. 모두 추리소설의 고전시기 작가들이라고 할까. 그래봤자 100년 전후의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시드니 셀던과 같은 현대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지만, 아무래도 멋스러움이 좀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은 워낙에 고전 추리소설들을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읽었던 작품들이 많은 소설집이었지만, 이 책을 다시 꺼낸 것도 도서관에 갔다가 갑자기 이런 향수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좀 오랜만에 읽어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현대에 쓰인 책들을 많이 봐서일까. 한편으로 작품들이 지나치게 심리적 흐름이 강조되어 있다는 느낌도 든다. ‘검은 고양이’처럼 현대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작품도 있었지만, ‘라이지아’처럼 지나치게 과장된 수식어들의 사용이 읽기에 방해되는 작품도 있었다. 역시나 시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기 때문일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윌리엄 윌슨’이었다. 현대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을 읽고서 정말로 기발한 착상을 한 천재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미 백 여 년 전에 그런 착상을 했던 작가가 있었다니.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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