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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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돈이 모이면 그 돈을 부동산에 바친다.

벌이가 시원찮으면 빌려서라도 바친다.

부동산을 잘 모시는 사람일수록 높은 계급이 되고,

‘아파트신’과 ‘빌딩신’과 ‘토지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층 계급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단지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 요건 중 하나일 뿐인데,

부동산을 신처럼 모시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1. 요약 。。。。。。。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 중 하나인 부동산 문제. 모두가 부동산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일까?

     저자인 손낙구는 국회의원 보좌관이라는 신분적 장점을 적극 활용해 모은 국가 통계자료들을 토대로, 한국 사회 부동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지적하려고 애쓴다. 나아가 저자는 토지의 공공성과 사회성을 근거로 하는 토지 국유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2. 감상평 。。。。。。。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이라는 해학적 백과사전에서 ‘암세포’를 ‘다른 세포들을 고려하지 않고 불멸성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증식하다가 마침내는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자폐증이 걸린 세포’라고 정의한다. 암세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태도가 결국 모두 함께 죽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 집 부자는 혼자서 1,083채의 집을 가지고 있다. 2위는 819채, 3위는 577채, 5위는 476채, 6위는 471채, 7위는 412채, 8위는 405채, 9위는 403채, 10위는 341채를 가지고 있다. 판잣집, 비닐집, 움막에 사는 사람이 6만 명에 달하는 세상에서도, 자기만의 불멸성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는 이들이야 말로 이 나라의 암세포는 아닐까.

 

     대학원 시절 어느 날 ‘성토모’라는 동아리가 조직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의 약자 성토모. 모임에서 나눠준 팜플랫에는 토지 공개념에 기초한 각종 경제정책들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그에 관한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성경에 근거한 토지제도란 구호는 매력적이긴 했지만 과연 비그리스도인들이(그리고 어쩌면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이 운동에 공감을 하게 될까 싶은 생각이 좀 더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동아리의 생각이 꼭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이유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이 책에도 언뜻 고대 이스라엘의, 그러니까 성경의 토지관련 규정의 긍정적 측면이 살짝 실려 있기도 하다.) 결국 성경적 토지정의라는 것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자유(성경에서 ‘구원’로 표현되는)에 관한 것이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 투기로 번 돈으로 헌금할 생각 대신에, 성경적 관점에서 땅과 사회정의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세상과 좀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토지 공개념에 기초한 국유화라는 저자의 부동산 문제 해법은 상당히 ‘급진적’이다. 책에서도 언급된 ‘사유재산 절대주의’가 손댈 수 없는 진리처럼 숭배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이런 주장은 충분히 ‘빨갱이’라는 말 같지 않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쉬울 거고. 하지만 결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도로와 편의시설로 인해 얻게 된 부가가치를 소수의 땅부자들만 향유하는 현재의 사태는 결코 그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부당한 일이다.

     만국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단결하라. 성경적 토지정의를 회복시키는 일은 그대들의 사명 중 하나이다. 땅에 충만하라(히브리어 원문은 ‘땅을 완성하라’ 의미도 담고 있다)는 그 분의 첫 번째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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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참나무 2008-09-1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동산 계급사회에 대한 감상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노란가방님께서 언급하신 성토모는 지금도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한 번 방문해보시죠... 지금은 성토모를 모체로 발족한 '토지정의 시민연대',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토지+자유 연구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답니다...

노란가방 2008-09-10 18:17   좋아요 0 | URL
좋은 뜻을 가지신 분들이 널리 연합한다면 꼭 좋은 일이 이루어질겁니다. ^^
 

 

  

지하철을 타고 잘 가지 않던 곳에 가야할 때가 있다.

그냥 한 번에 갈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두 세 번 갈아타야 할 경우라면 걷는 것도 일이다.

자칫 갈아타는 위치보다 먼 곳에 일부러 걸어갔다가

다시 고생하며 돌아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가능한 적게 걸어서 지하철을 갈아타는 위치.

(어쩌면 이건 나를 위한 글일지도..;;)

이왕이면 딱 맞는 위치에 서서 먼 길을 편하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 이런 정보가 잘 나와 있다.

지하철 노선 검색 페이지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가는 최단거리와 소요비용,

그리고 몇 번째 칸의 몇 번째 문에서 타면

최소한으로 걸어서 편하게 갈아탈 수 있는지도 나온다.

 

 

하지만 모든 여행에 그렇게 먼저 인터넷을 검색하기는 어렵다.

가끔은 긴급하게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에 가야하지 않겠는가.

이럴 때 한 가지 팁이 있다.

 

 

지하철 역 바닥을 보면

선명한 노란색으로 된 타일이 줄지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타일은 올록볼록한 입체감이 있다.

이름하여 '점자 블록'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할 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물이다.

 

 




 
 

포인트는 바로 이 '점자 블록'을 따라 걷는 것이다.

점자 블록은 아까 말했던 대로,

시각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블록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지하철을 타고내리는데

문제가 없도록 말이다.

 

 

그냥 걷기도 쉽지 않은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라면

당연히 가능하면 적게 걷고도 편리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처음 가는 길을 갈 때는,

가능하면 점자 블록을 따라서 걷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점자 블록이 '최단거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최단 거리보다 한 칸 내지 두 칸 정도 멀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을 터.

 

 

아마도 비 장애인들이 최단거리를 이용하기 위해

서로 밀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설계자가 본 듯 하다.

자칫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시각 장애인으로서는 위험하니까

차라리 한 두 칸 옆에서 인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볼 때

점자 블록을 이용하면 편하게 지하철을 갈아탈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혹시라도 내 관찰이 틀린 경우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나한테 직접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는 않기 바란다.

그건 우리나라의 행정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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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게 너무 많은 사람은,

더이상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법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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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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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광기를 인식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더 나빠질까? 아니, 사람들은 보다 올바르고 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1. 줄거리 。。。。。。。

 

     슬로베니아의 한 수녀원에서 베로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자살을 하기 위해 수면제 세 통을 한 알, 한 알 삼켰다. 하지만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던지, 정신을 잃은 채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빌레트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의식을 되찾은 베로니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의사로부터 희망적인(?) 말을 듣는다. 다량의 수면제 섭취로 인해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고, 일주일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견을 들은 것이다. 어차피 자살을 하려고 했던 차에 잘 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베로니카의 심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살을 시도한 시한부 인생의 베로니카와 그녀를 둘러싼 정신병원 안의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흥미로울 뻔 한 드라마.

 

 

2. 감상평 。。。。。。。

 

     혹시나 하고 읽었으나, 역시나 하는 결론이었다. 이 작가는 그를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게 만들어 준 『연금술사』라는 작품에서 도대체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연금술사』에 이어 『11분』, 『오 자히르』, 그리고 이 책까지 네 권의 소설을 읽어봤지만, 모든 소설은 한결 같이 인간 내부에서 발산되는 힘과 에너지에 집중해서 그것을 표출하라는, 쉽게 말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메시지만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정신병원과 광기(狂氣), 자살에 실패한 여인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사용한 이번 작품에서도 이 점은 변함이 없었다. 언뜻 일상적인 삶의 진정한 가치라든지, 사회적 편견을 뛰어 넘는 사랑 이야기 같은 ‘좀 다른’ 주제를 담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파울로 코엘료라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져다주어도 늘 똑같은 비빔밥만 비벼댄다.

 

 

     무엇이 이 작가의 작품들을 늘 똑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걸까? 아마도 작가가 지나치게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의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굳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대사를 통해 자신이 직접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도 꽤나 구체적으로. 그래서 마치 뉴에이지 영성운동의 지침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 여기에 작가가 청년기 경험했다는 히피 생활에 대한 동경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보인다.

     문득 작품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코엘료는 사람들이 보다 올바르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사람들 내부에 숨겨두었던 탐욕과 폭력성이 드러나 더 큰 혼란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작가는 사람 내부에 있는 힘이 선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악한 무엇일수도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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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견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양의 구름.


 

나 여기서 구름이랑 논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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