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탄생 : 울버린 - X-men Origins : Wolveri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줄거리 。。。。。。。

 

     신비한 능력으로 인해 스트라이커 소령의 팀에 들어가게 된 로건. 하지만 목적을 위해 민간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팀에서 나와 혼자 살아가게 된다. 괴로운 과거를 잊는 과정에서 만난 카일라는 그에게 가장 큰 안식처가 되어 주지만, 어느 날 나타난 빅터에 의해 카일라가 죽게 되면서 로건은 복수를 위해 다시 스트라이커를 찾아가게 된다.

     새로운 기술로 인해 온몸의 뼈가 강한 금속으로 변하게 된 로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먹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날은 울버린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리고 복수의 과정 가운데서 알게 된 사실은... 카일라가 살아 있었다.

 




2. 감상평 。。。。。。。

 

     전작의 흥행에 기대서 만들어진 이 놀랄 만큼 뻔하고, 그래서 지루한 영화는 그 자체로서는 딱히 내세울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인물들의 비중조정은 실패해서 딱히 신기한 능력을 가진 다른 멤버들의 이야기가 자주 비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인공 로건에 의한, 로건을 위한, 로건의 영화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뭐.. 주인공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이 완전 80년대 영화를 보는 듯 했다. 스트라이커의 팀을 탈퇴하고 간 곳이 도끼 들고 나무 베는 벌목장일 건 또 뭐고,(그래야 런닝 입고 그동안 키워 온 근육 자랑을 좀 할 수 있기 때문일까) 당연히 그 가운데 비춰지는 로건의 모습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전형적인 마초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인물들의 액션이 딱히 뛰어난 영화도 아니고(이정도 와이어 액션은 좀 과장하면 요새 독립영화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멋진 풍경이 등장해 카메라 감독의 능력을 발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감동마저 없다!!

     광고와 예고편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영화. 이 영화는 번외편이기에, 굳이 보지 않더라도 추후 나올지도 모르는 엑스맨 시리즈를 이해하는 데 하등의 장애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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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촛불집회에 우리가 ‘모자람’을 느껴야 한다면,

그 까닭은 ‘고시 철회’를 이뤄내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합법적이고 정상적 시민’으로 안도했던 기억만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 가린 우리의 태도에 있다.

 

1. 요약 。。。。。。。

      작년 여름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집회에 관한 이론적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목차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여러 저자들은 각각의 눈으로 본 촛불집회에 관한 소회를 쓰고 있는데, 1부가 촛불집회의 정치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면, 2부는 그에 담긴 미학적 의미에, 3부는 실천적 함의에 관해 주로 논하고 있다.

     다양한 저자들의 촛불집회에 관한 평가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일관되게 ‘촛불’은 단순한 사회 현상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난 여름의 '촛불'이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현실 앞에, 그 이유와 대안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2. 감상평 。。。。。。。

     지난여름, 우리나라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시간을 내서 차분하게 되 집어 보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닐 것이다. 연인원 수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걸쳐서, 수십 일 동안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경험은 지난 2002년 월드컵 이후로 그리 드문 장면은 아닌 것이 되었지만, 지난여름의 그것은 단순한 유희나 즐거움을 위한 희구가 아니라 좀 더 실제적인 삶의 필요를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는 후배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잘 지켜보라’고, ‘우리는 지금 역사의 중요한 기점에 살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라는 게 우리 시대가 접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정부는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한창 시위가 고조되었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가진 칼을 동원해 가차 없이 반대했던 시민들을 잡아 보복하고 있고, 그토록 반대했던 고시는 강행했으며, 여전히 전국토를 파헤쳐서 국민 세금을 건설사들에게 퍼주겠다는 계획은 포기하지 않은 듯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이는 것을 주저하도록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이 책은 잘 조직된 결론은 아니지만,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제공해 주려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해냈다. 특히 1부에서 이 작업은 촛불의 정치학적 의미를 분석해 내는 흥미로운 작업으로 정리되었고, 3부에서는 촛불이 부족했던 점과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관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결과를 제시해주고 있다.

     내가 불만인 것은 이 책의 2부에 해당하는 몇 개의 글들인데, 지나치게 미학적 분석으로 치달아 ‘무식한 일반인들’(나도 여기 포함된다)은 알아듣지 못할 학자들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결론적으로 그저 좀 삐딱하게 보는 것 이외의 다른 결과물들을 내지 못한 글들이 제법 보인다. 서동진은 물론 클로드 르포르나 알튀세르와 같은 사람들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걸 모르는 지, ‘신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이니 ‘뒤르케임주의적 종교사회학’이 뭐니 하는 것들은 그들의 리그에 가서 떠들며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내가 ‘무식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촛불집회에 관한 건전한 인식에 현대인들의 ‘과학주의’ 혹은 ‘증거주의’가 끼친 악영향에 관한 것처럼 쉽고 유익한 글도 있긴 했다.

 

     몇 달간 쏟아졌던 소나기는 지나갔다. 비록 그것이 몇 달에 걸쳐서 일어났긴 했지만, 난 아직 장마가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지성 호우는 그저 우산을 챙기거나 장화를 꺼내도록 만들 뿐이지만, 장마는 외출에 대한 의사 자체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출에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외출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집에 주저앉힌 대가이자, 더 많은 사람들을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에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그 소나기를 분석하고, 어떻게 장마를 기다릴 지에 관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리라. 이 책이 그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분명히 아니지만, 일단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시각으로 그 때의 일을 한 번 정리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 사족을 붙이자면, 책의 제목은 나름 매혹적이지만, 책의 내용과는 딱히 ‘밀접한 관련’까지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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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 청소년인권 이야기
공현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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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지만 그 경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쟁을 하려 했던 것 아니었던가요?

끝없는 경쟁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런 경쟁은 그만둬야 합니다.

 

1. 요약 。。。。。。。

 

     청소년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들’은 청소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학교와 가정, 사회에서의 반인권적 상황들을 직접적으로 직면시키고 있다. 1부에서는 입시경쟁으로 규정되는 한국의 학교문화가 학생들에게 어떻게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지에 관해 논하고 있고, 2부에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강압적인 여러 규제들의 인권침해 요소를 다루고 있다. 3부에서는 학교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제한당하는 많은 것들을 지적하고, 4부에서는 좀 더 제도적인 부분에서의 인권침해를 다룬다.

 

2. 감상평 。。。。。。。                        

  

 

     군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가까이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도 군대 안에서 만나는 모든 병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물론 ‘합쇼체’ 같은 아주 높임법은 아니지만, 그보다 약간 낮은 ‘해요체’를 사용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이렇게 말하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란 그 사람의 정신구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낮추다보면 그 사람보다 내가 뭔가 우월하다는 착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사들이 단지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거나 계급이 낮다고 해서 ‘낮은’ 사람들은 아니니까.(말을 놓는 간부들이 꼭 병사들을 낮춰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권이란 그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 사회적 위치, 종교 등에 관계없이 인정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권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에는 이것이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존재해왔고, 그 중 하나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 즉 청소년들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어떤 억압과 고통의 감수를 강요하고 있는지를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구조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가장 큰 장점은 명쾌하다는 데 있다.(또, 폼도 난다!) 구조는 어차피 현실의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 된 권력양상을 그리기 때문에 좀 덜 중요해 보이는 건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 그럴 때 이 책 처럼 무언인가 문제를 지적하는 책의 경우 한쪽을 완전한 악으로, 다른 쪽을 완전한 선으로 가볍게 선을 그어버리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증거를 자신의 논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만 가져다 붙이는 현상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사복을 입을 경우 경제적 격차로 인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학교 측의 주장에 대해, ‘학교에서 사회의 불평등을 몸으로 겪은 청소년들이야말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교복폐지를 주장하다가도(105),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다수가 입시경쟁에서 탈락하는 이유 중 하나로 학교 내에서 겪는 차별이나 열등감을 꼽기도 한다.(230) 영상물, 게임, 음악 등의 선정성 판단 기준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나 맥락이 성폭력적이거나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것인지,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인지, 인권침해적인지 같은 것은 판단’해도 된다는 투로 말하다가도 금새 ‘별 같지도 않은 가사 한두 개 가지고’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판단한다고 조롱하기도 한다.(253) 규제의 필요성은 인정하겠다는 말인지, 또 그 ‘별 같지도 않은 가사 한두 개’란 누구의 판단기준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인지, 가사 한 두 개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것인지 하는 것들은 불분명하다. 

 

      논지를 위해 상대를 과하게 비난일색으로 설명하는 부분도 많다. 학교란 처음부터 폭력을 주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136)라는 설명이나 가정에서 자녀세대를 부양하는 모습을 ‘청소년들이 가정의 지원으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은 경제적 지배의 성격이 있다(233)’는 말로 평가절하 하는 부분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결국 가정의 해체(277), 학교의 전복(137)이라는 나머지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술 담배의 금지는 그들이 제대로 된 판단력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라는(252), 의도하지 않은 부분을 비난하는 오류도 보인다. 

  

      구조화는 비판하는데는 용이한 부분을 제시하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썩 유리하지 못하다. 요컨대 ‘모든 것이 반대로 된 나라’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책 자체에서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의 가장 당면한 문제 중 하나인 대학입학과 관련해 입시 폐지와 대학평준화가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는가 하면(73), 결국 그런 것들도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25-27) 저자들은 자신이 맡은 단락의 말미에 공통적으로 ‘청소년들의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문구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28, 87, 112 등), 그래서 무엇을 만들기 위해 뒤집어엎고 때려 부수자는 것인지 목표에 대한 설정은 약하다.(대안이 부족하다고 해서 비판의 의의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굳이 책으로까지 만들었다면 뭔가 좀 보여주는 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동성애나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는 갑자기 왜 따라 붙었는지 모르겠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주장들을 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굳이 청소년 인권을 다루는 책에 끼어들어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감히’(이건 저자의 표현이다) 선언함으로써 또 하나의 흑백논리를 펼치는 이유는 뭘까? 


  

      물론 책에서 말하는 청소년 인권과 관련된 많은 제안들과 현실에 대한 고발은 새겨 들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지 자기주장의 끊임없는 되풀이에서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그런 태도는 결국 스스로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그래서 인권이라는 매우 대중적이며 당연한 주장을 하면서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해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장애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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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나긴 했지만... 
 

이제 800일 남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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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바이 : Good&Bye - Good&By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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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도쿄의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다이고는, 갑자기 악단이 해체되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나름 프로에 걸맞는 첼로를 사기 위해 엄청난 돈을 대출받은 그는 어떻게 하든 급히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결국 생활비라도 줄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시골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남겨주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어느 날 지역 신문에 난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온 다이고. 무슨 여행사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전형적인 다단계 사업 광고로 의심됐지만 일단 돈이 급했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끝난 면접. 합격이다. 뭐가 이리 쉬운 걸까.

     다이고가 새로 시작하게 된 일은 여행사가 맞긴 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는 일, 즉 죽은 이들을 염(殮)하는 것이었다. 이 ‘충격적인’ 내용에 급 후회를 했지만, 당장에 두둑한 현찰을 쥐어주는 데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하게 된 일. 처음 하는 일로 인해 겪는 여러 당혹스런 상황들과 그가 하는 일을 알게 된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2. 감상평 。。。。。。。

 

     염습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장애인(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호모(메종 드 히미코) 같은 이색적인 소재들을 즐겨 다루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죽은 이에게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시킨다는 경건한 이미지의 직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체를 주물럭거리는 일이라는 폄하를 당할 수도 있는 일. 감독은 이런 양면적인 직업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라는 진지한 주제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배우들은 감독의 의도를 훌륭히 연기로 표현하고 있고,(료쿄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배우고 남자 배우인 모토키 마사히로도 이 영화로 꽤나 상을 받은 연기파 배우다) 감독은 멋진 영상으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건, 시체 역할을 하느라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어야 했던 여러 단역 배우들의 공로다. 영화 내내 포인트 마다 깔리는 첼로연주소리는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루에도 우리나라에서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고 있고, 당장 가까운 종합병원에 가면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애써서 죽음에 관한 기억과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만 하고 있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간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연구되고 있는 각종 기술들도 ‘삶’의 기간을 늘리기 위한 것뿐이지 ‘어떻게’ 살지에 관한 것은 논외의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닐뿐더러, 죽음에 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현재에 대해 충분히 책임을 지지 않는 자세로 나아갈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웰 다잉(Well Dying)’이라는 주제가 부각되면서, 인격의 성숙에 이르기 위한 노력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이것조차 단지 ‘고통 없이 죽는 방법’과 같이 여전히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 전락되지 않는다면 말이다.(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 하찮은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한편으로 좀 아쉬운 생각도 든다. 삶과 죽음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대답을 해주는 것은 종교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제는 이 역할마저 신앙과 믿음에서 영상과 배경음악에 넘겨주어버린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해서다. 종교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기를 즐겨하고 말았으니, 세상이 종교의 기능을 취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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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9-04-28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포스팅하셨네요.
한동안 궁금했더랬습니다.
건강하세요.

노란가방 2009-04-28 17:05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바빠서 편하게 책 읽을 만한 여유가 없더라구요..
잘 지내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