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미래 - 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필립 젠킨스 지음, 김신권 외 옮김 / 도마의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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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에 대해 현대인이 가지는 이미지는 

대개의 경우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유대교나 이단에 대해 가혹했던

성직자들의 세속 지배, 신정국가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중세의 상당한 기간에 세계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 통치자들 아래에서 소수파로 살아야 했다.

 ……

중세에 자주 나타났듯이, 기독교인은 세련된 도시인이라기보다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었다.

 

1. 요약 。。。。。。。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점차 쇠퇴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쇠퇴할 종교이다. 하지만 저자는 각종 통계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지구 남반부 전역(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에 걸쳐 기독교 인구의 대대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향후 세계 기독교에 관한 고전적 이미지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주류’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흐름’이라고 정의할 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주류’ 기독교는 남반구의 강렬한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열정적인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흐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충돌들’에 대해 설명한다. 남반부의 교회들은 그들의 오랜 신앙들(이를 테면 정령신앙과 같은)의 여러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미 등지에서는 교회가 매우 강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모습들을 세속화되고 학문화된 서구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기독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반부에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급격한 증가는 단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또 다른 주요 종교로서 이슬람교도 있다. 특별히 높은 인구증가율을 가진 국가들에 있어서 이 두 종교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서구의 예측과는 다르게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기보다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때문에 저자는 미래 사회의 중요한 분쟁들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아울러 지적한다. 


2. 감상평 。。。。。。。

 

 

     이 인구통계학에 근거한 학술적인 책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전세계의 종교인구의 추이에 대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서구와 유럽인의 종교, 제국주의적 종교라고 적대시하는 어떤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기독교는 그 태동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적이었으며,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 자체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이 맞닿는 지역이기에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만, 사실 그동안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점이기도 하다. 초기부터 기독교의 중심지는 안티오크였고, 알렉산드리아였으며, 바빌로니아에도 제법 큰 교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세계적으로 기독교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는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인구증가율이 매우 높은 나라들이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럽 등지의 기독교인은 줄어들겠지만 대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기독교의 중심이 더 이상 유럽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책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늘어나고 있는 남반구의 신생 교회들의 성격은 기존의 교회들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도 가벼이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아 대부분의 공동체를 포괄시키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좀 더 작은 이유로 분열되기도 하고, 사실 생각이라는 것에 금을 긋는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엄청난 변화에 대한 이 책의 지적은 비단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만이 아니라, 종교적, 영적 차원에 무관심한 이들도 함께 귀담아 들을 만 한 내용이다. 이 책의 지적이 옳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미래는 종교를 무시하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던져줄 것이다. 우리는 이 ‘신의 미래’에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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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 : 최후의 결사단 - Bodyguards and Assasi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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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1. 줄거리 。。。。。。。

 

     중국 청조 말, 중국의 격동기. 이미 조정의 부패와 무능력은 대륙을 적절하게 통제할 능력을 상실해버렸고, 남쪽에서는 인민들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위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혁명의 핵심 기획자였던 손문은 전국적인 거사 계획을 위해 홍콩을 방문하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암살단을 파견한다.

 

     손문을 대신할 가짜 손문을 만들어 암살단의 주의를 끌기로 결정한 혁명가. 하지만 너무 일찍 죽어버리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에, 손문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다양한 이유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과 그들을 뚫고 손문을 죽이려는 암살자들 사이의 한 시간 동안의 추격전..

 


 

2. 감상평 。。。。。。。

 

     단순히 액션 영화로 봐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영화이다. 19세기 말 이미 영국에게 할양되어 국제적인 도시였던 홍콩의 동서양을 아우르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름 꽤나 하는 무협 배우들이 과감한 와이어 액션을 펼치니 볼만은 하다. 다만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인물들은 짧은 상영 시간 동안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 결과는 인물 사이의 관계나 갈등은 잘 보이지 않고 날아다니는 배우들만 보이는 완성도 떨어지는 작품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청조 말 중화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홍콩을 찾은 중산 선생은 중화민국을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손문을 가리킨다. 손문은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활동을 폈는데, 그래서 그런지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립한 국가인 대만에서 국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언뜻 그러면 공식적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는 당연히 배척해야 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국공합작과 같이 정파적 이해보다는 중국 국민 전체의 힘을 결집시키려 노력했고, 그 중심에 인민, 혹은 국민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는 양쪽 모두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견될만한 인물로 누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김구나 여운형 정도가 떠오른다. 모두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남과 북으로 나뉘는 것을 찬성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던 그 때, 활발하게 남북을 오가며 좌우합작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이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아쉬움으로 오늘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아직도 자기와 다른 소리를 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하며 마녀사냥 하듯 몰아가는 작자들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린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인 중국만도 못한 유치한 사회적, 정치적 수준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들은 이런 속 좁은 민족이 품기에는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이야기들은 영화를 보고 좀 멀리까지 사유의 흐름을 따라 나섰을 때나 떠오르는 것들이고, 영화 자체는 뭐.. 그냥 그렇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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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었던 학생 때가 좋았다.
 
졸업을 하고 나니 공부해야 할 것의 한계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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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막 출판사에서 책 그냥 보내준다. ^^

 
간밤에 처음으로 당직을 해 보고 돌아오닌 책 세 권이 도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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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뭐 이런 쓸 데 없는 질문을 하느냐고,
친절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화내고 싸우는 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를 내지 않는 것과 친절한 것은 다르다.
전자가 매우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적극적이면서 능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과 친절을 베푸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수월할 지를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논의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이유로 친절에는 대가가 따른다.
대개 친절에는 ‘양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종종 ‘희생’이라는 덕목까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히지 않는 선까지는 친절하더라도
그것이 양보를 넘어 희생까지 요구하게 되면
쉽게 친절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디까지 친절해 봤는가?
이래도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친절이란,
단지 무조건 잘 해주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친절한 사람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잘 돌려서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친절해야 한다고 해서
마음에 안드는 남자의 대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친절보다는 우유부단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시간을
딱히 중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수다로 보내자는 요구는
거절하는 것이 옳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니까.

요점은 거절의 기술에 있다.
상대를 덜 아프게 하면서 거절을 하는 방식.
(전혀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거절이란 주사바늘처럼 늘 아픈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무시’라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이 방법은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멜리 노통브는 무시를 인격적인 살인이라고까지 말한다.)
거절은 조금 더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좋다.
좀 더 부드럽고, 덜 직접적이어서
상대가 거절을 당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라면,
혹은 후에 알게 되었더라도
씁쓸한 미소를 짓고 넘어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당신은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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