줬으면 그만이지 -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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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관련해서 한 노인의 이름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다. “김장하 선생”이 그 주인공이었다. 오래 전 가난했던 학생 문형배는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 선생에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신의 돈을 가난한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하는 일은 치하해 마땅하지만,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독지가 이야기가 새로울 건 없지 않은가. 그런데 관련 이야기를 파면 팔수록 신기한 일화들이 쏟아진다. 그가 장학금을 지원한 학생의 수는 족히 수백 명이 넘는 것 “같고”,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일면식도 없는 경우도 많은데다가, 무슨 인사를 받으려 하지도 않고, 아예 얼마나 지원을 했는지 조차 감추고 알리지 않았다는 것.


후에 김장하 선생은 사재를 털어 사립고등학교를 세웠는데, 그가 세운 고등학교에는 회계의 조작이나, 재정의 유용, 계약 부풀리기나 리베이트 같은 일들은 일절 없었고, 오히려 이사장인 선생이 지속해서 사재를 출연해 학생과 교사들을 지원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학교를 국가에 기부를 했다는 것. 왜 그런 결심을 했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어린 시절 돈이 없어 공부를 못했던 일화를 털어놓으며(그의 최종학력은 중졸이다), 자신과 같은 학생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교육사업을 해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미담은 아직 끝이 아니었으니... 평생을 운영해 온 한양방의 문을 닫고(그는 이 모든 일을 한약방의 수입으로 충당했다!) 은퇴를 결심하면서, 재산을 지역의 대학에 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도움을 청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주었고, 교육사업 외에도 언론, 문화, 사회단체 등 수많은 영역에서 사람들을 키우고,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일들에 번 돈을 아낌없이 사용해 왔다고 한다. 이 정도면 클래스가 다르다.





책은 김장하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은 서글서글한 면 없이 조금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 나이대의 경상도 남자라면..) 앞서 서술한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는 진짜 부자의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의 가난함 때문에 고등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던 그였지만, 좋은 약재를 합리적인 가격에 파는 전략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을 가난의 한을 푸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사용했다. 어떤 보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더 자주오르내리는 건, 오늘날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더 자주 기억하곤 한다. 김장하는 그런 인물은 아니다. 사실 이 책도 그리 유려한 문체와 구성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의의가 있는 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을 드러나지 않게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놀랍게도 그런 그마저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오래된 집에서 수수하게 사는 것 자체가 유별나게 티를 내는 것으로 보였고, 그가 후원하던 기관의 정치책을 문제 삼아 색깔론에 빠져 다짜고짜 욕설 전화를 거는 덜 떨어진 인간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을 겪을 때에도, 선생은 그저 참고 넘어가는 식으로 대응할 뿐이다. 악플 하나에도 속이 상해 침울해지는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경지다. 욕설전화와 그에 앞서 보내온 욕설 문자 따위는 마침 옆에 있던 지인의 도움으로 차단 처리를 했지만, 우리 사회 저런 식으로 정신이 삐뚤어진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의 저열한 언행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더 팍팍하게 만드는 건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요새 유행하는 자극적인 맛은 아니지만, 대신 잔잔하면서 깊은 맛이 느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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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 소설 대환장 웃음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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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이긴 하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힘을 쭉 빼고 쓴 것 같은”(물론 실제로 힘을 아주 뺄 수는 없었을 거고) 작품들을 내기도 한다. 뭔가 이게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어디선가 실제로 일어났을 것 같은 일상적이면서 편안한, 그러면서도 살짝 개그가 섞인 이야기다.


이야기는 규에이 출판사에 새로 들어간 신입직원이 첫날 겪은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인사를 받은 편집장은 대뜸 그에게 골프를 칠 줄 아느냐고 묻는다. 출판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유명 작가를 위한 접대골프에 대신 나가라는 것. 그리고 잠시 후 사수로부터 좋은 편집자의 세 가지 요건에 대해 듣게 된다. 골프, 긴자, 아부. 한 번 점찍은 작가의 원고는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는 편집장의 비장의 무기는 ‘슬라이딩 무릎 꿇기’(아마도 ‘도게자’?)였다나.





총 열두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첫 편에 나오는 규에이 출판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출판사 직원들뿐만 아니라 작가들, 돈이 벌리지 않는 문예지와 문학상을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 같은, 출판사 내부의 은밀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낸다.


물론 인물들은 조금 과장되어 있고, 사건들 역시 꽤나 버라이어티하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출판계 속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만 쓸 수 있는 이야기겠다 싶다. 당연히 여러 작품을 내면서 출판 관계자들과 적지 않은 교류를 했으니 그럴 테지만. 가까이 있어서 잘 알고 있는 사정에, 탁월한 글솜씨가 더해지니 이 또한 읽을 만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확실히 독서하다 지칠 때 리프레시를 하는 데는 이만한 작가도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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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전
루이스 카우언 & 오스 기니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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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는 고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대(20세기 초중반)에도 학생들은 최신의 이론만 따라다니며, 더 이상 고전을 읽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정작 그 책 자체는 읽지 않은 채 그저 평론가와 해설자들이 하는 말만 주워섬기고 있을 뿐이었다.


루이스는 이런 태도에 이른바 “연대기적 속물주의”가 깔려 있다고 비판한다. 어떤 생각이 좀 더 현대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착각을 가리킨다. 과거는 케케묵은 것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되고 밀려난다. 새로 나오는 것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뭐 하러 낡을 것을 들여다보고 있느냐는 생각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런 생각을 뒤집어 이렇게 말한다. 고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된 것이고, 최신의 이론이란 아직 충분히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어쩌면 조만간 버려지고 말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그래서 루이스는 현대의 책과 고전을 한 권씩 번갈아 읽거나, 최소한 오늘날 쓰인 책 세 권을 읽으면 고전 한 권을 읽으라고 권한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은 우리에게 어렵다. 고전과 우리 시대 사이에 놓여 있는 깊은 시간과 문화의 골짜기는 아무나 쉽게 뛰어넘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 데에는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 노력을 제대로 했을 때 얻어지는 기쁨은 몇 배는 거 크겠지만.


우선은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부터 어렵다. 뭔가 바닷가에 가서 내가 원하는 색깔의 조개껍질을 찾는 일 같달까. 막상 주웠는데 그냥 별 가치 없는 오래 된 플라스틱 조각일 수도 있는 거다. 이 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양 고전 65편(저자 중심이라 실제로는 몇 권이 더 포함된다)을 시대 순에 따라 한 편씩 골라 간략한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여기에 중간 중간 각 시대별 흐름과 그 흐름을 잘 보여주는 따로 더해서 설명해 주니, 감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방대한 내용을 공부해 나갈 때는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나마 전체적인 흐름을 확인하고 기억해 두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공동 편집자로 두 명의 이름(그 중의 한 명은 “소명”의 작가이기도 한 오스 기니스다)이 올려 있지만, 이런 방대한 작업물을 두 사람의 힘으로만 완성하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각각의 항목은 주로 영문학 교수인 기고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이 분야 종사자들의 컨센선스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이 작업, 그러니까 여기 소개된 고전의 선정뿐 아니라 그 해설과 해석에 기독교적 관점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학에 대한 평가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고, 작품의 메시지를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괜찮은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다만 이렇게 방대한 내용들을 읽는 건, 일종의 백과사전처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한 내용들이 그런데, 나 역시 견문이 짧은지라 근현대로 올수록 점점 아는 내용이 적어지니 집중도가 좀 떨어지기는 했다.


그래도 이런 책을 한 권 두고 있으면 앞으로 읽을 책들을 고를 때 톡톡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지는 8년쯤 지났지만, 최근 몇 년 고전 문학에 대한 기독교적 소개라는 콘셉트로 나온 책을 몇 권 본 것 같다. 의미 있는 작업이다. 참고로 이 책은 결국(?) 절판되었지만(일단 판형부터 꽤 크고, 두껍다), 다행이 전자책으로는 구입할 수 있으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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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와 기도 가운데 알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인격적 하나님의 개념을 놓친다면,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라 종교 철학이 된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은 이 점을 아주 산뜻하게 표현했다.

“철학자들의 신은 세상 뒤로 사라졌다.

그들이 그를 3인칭으로 묘사할 뿐 2인칭으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알리스터 E. 맥그래스,  『C. S. 루이스 길라잡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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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고통이 의미를 상실할수록

경미한 고통조차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고통을 지붕으로 덮어주고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의미연관도, 서사도, 더 높은 심급이나 목적도 없다.

고통을 주는 완두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로 인해 고통 받는다.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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