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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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을 지금 사회의 시원으로 보지만 이는 농경사회, 특히 서구적 시각에 가깝다. 채집 및 유목은 농경보다 오래되었고, 특히 반건조지역인 초원은 화약의 발명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적은 인구수에도 인류문명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많은 문화 및 기술의 전달 통로 역할을 하였고 단절된 농경지역을 교역로로 연결했으며 때론 막강한 군사력으로 농경제국을 허물고 세계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초원은 적어도 5대 문명쯤 취급받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초원 문명중 농경사회에 삼켜지지 않고 이렇다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초원의 역사 역시 제대로 발굴되지 않는 측면이 상당하다. 

 농경문명을 계승한 지금의 국가들은 초원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을 갖는다. 우선 대국들은 과거 초원에 당한 것을 생각하며 야만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이룬 대제국을 이중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주변부의 국가들은 초원을 웬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한다. 동아시아로 치자면 전자는 중국, 후자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다. 하지만 둘다 옳지 못한 태도이며 기본적으로 초원이 농경국가와 꾸준히 교류하고 기술문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린 초원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인구가 적은 만큼 그 지역은 인구부양력을 갖지 못한 매우 혹독한 지역이다.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 초원은 이 짧은 여름에 자라난 풀에 의존한다. 식량이 없기에 유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효과적 가축 통제와 목초지로의 빠른 이동을 위해 식량수단이던 말을 이동수단으로 길들였다. 장성한 아들이 먼저 분가하여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기에 초원에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다.

 말을 길들이는데는 3가지 중요한 마구가 필요했다. 우선 재갈이다. 재갈은 말의 이빨을 뽑아서 끼우거나 어금니를 갈아낸 후 끼우는 것으로 약간의 힘으로도 고삐를 당겨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재갈이 개발되고 나서야 말에 탄 인간이 안정적으로 말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안장이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여 등에 타면 탄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과 불편한 감각을 준다. 때문에 안장을 개발해 등뼈를 덮고나서야 사람은 안정적으로 승마를 할 수 있게 디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병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금속제 등자다. 등자는 이전에 개발되었지만 금속제 등자는 3-4세기 고구려고 처음 개발했다. 금속제 등자로 중무장 기병이 등장한다. 말위에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말 자체를 무겁게 무장시키면 승마자가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금속제 등자의 등장으로 큰 훈련없이도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바로 이 금속제 등자의 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말을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는 무기이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전차는 매우 비싼 무기였는데 바퀴살이 개발되고나서 더욱 활성하한다. 유명한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었는데 히타이트는 바퀴살을 개발해 전차를 경량화한 덕에 3명이 전차에 승선했다. 한명의 방어, 한명의 공격, 한명의 운전이다. 반면 이집트는 기존처럼 한명 공격방어, 한명 운전으로 크게 불리했다. 전차는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상나라에 전파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선 별로 쓰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큰 전쟁이 없던 중교중심의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과 산악지형이 많아 전차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초원 민족은 승마를 하기에 생식력이 낮았다. 승마는 위험한 것으로 격렬하게 오래 말을 타면 자연거세 확률이 높았다. 유목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상하였고 생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전투에 집중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로 거듭났다. 유목사회는 인구유지를 위해 생식력을 보존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과 전쟁포로를 집단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썼다. 

 사슴은 초원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문화적 모티프가 된다. 사슴을 숭앙하는 풍습이 초원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도 이어진다. 기원전 9-5세기 초원에는 사슴돌이 만들어진다. 이는 2미터 정도 크기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전면을 사슴문양으로 채운 이 돌은 전체가 초원전사를 의미한다. 귀부분엔 그래서 귀걸이가 허리부분엔 허리띠와 칼 문양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역동적인 형태의 사슴을 새긴 청동이나 목제 장식품을 애용했다. 그들이 그린 사슴은 종류만 10종 이상에 자세도 매우 자세하여 사슴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사슴문화는 한반도에도 펴졌는데 그래서 기원전 3-1세기 사슴문양 청동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사슴문화가 크기 않은 지역이다. 

 중국에선 초원 세력을 야만시하고 적대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초원은 역시 깊이 자리한다. 중국은 초원세력인 원과 청, 요와 금을 겪었고, 몇몇 한족(?)왕조는 사실상 초원과의 연합세력이다. 우선 주나라를 들 수 있다. 주는 중원에서 서북방면으로 건너간 일파가 현지에서 주변 세력과 연합하여 힘을 키운 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을 멸하고 세운 나라다. 전국시대 조나라도 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인근 약소국인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중산국은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무령왕은 당시 중원인이 남여 모두 치마를 입던 것을 호복인 바지를 스스로 입고 명령하며 기병을 키웠다. 결국 이들은 중산국을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다. 다음은 진이다. 진은 위치 자체가 중국 서북방면으로 애초에 중원과 거리가 멀다. 진은 오래된 국가인데 기원전 7세기에 묵공이 서융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세력을 떨치게 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특이한 양식으로 4세기 갑자그 등장해 200년간 유지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이 매우 유사하다. 파지릭 고분은 무덤 주변에 둘레돌을 두르고 무덤 위로 돌을 쌓고 안에는나무 무덤방을 놓는다. 둘 다 유라시아에서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신라와 가야에는 후발주자이고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북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북방 문화가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보검 가야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나 마구등이 그러하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들 지역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가 내려와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런 인구이동의 흔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국인 이들에게 이런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강한 힘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스스로가 북방과 대결하며 교류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고구려와 강한 문화적 정체성과 폐쇄적 농경문화의 백제에 비해 바다를 접해 개방적이고 오히려 교류가 원거리로 가능했던 이들 지역이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로 추정한다.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문화인 불고기는 사실 농경과 유목문화의 결합품이다. 초원에선 샤슬릭이란 꼬치구이가 오래전 부터 유행인데 그들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넣고 다니며 불에 쉽게 구워먹곤 했다. 이를 발전시킨게 고구려의 맥적이다. 맥적은 반농반목 국가인 고구려에서 콩류의 양념을 고기에 재워 꼬치 형태로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고기와 양념이 없는 고기는 아무래도 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맥적은 양념을 하여 이것을 잠재운 것이다. 맥적은 중국과 초원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고, 조선의 설하벽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로 이어졌다. 지금의 불고기는 콩과 고추장류 양념에 채소를 곁들이는 것으로 완벽한 초원과 농경의 융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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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7-0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기병이 등장하자 전차도 등장했다’는 의미는 전차가 기병 이후에 나왔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전차가 먼저 나오고 한참 후 기병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닷슈 2022-07-05 22:01   좋아요 1 | URL
아니요, 북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차 이후 기병입니다. 어느 정도 말을 쓸 수 있게 된다음 전차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좀 문제가 있네요. 고쳐야겠습니다.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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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책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었다. 지금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당시만 해도 간신히 읽고 잘 이해도 안갔었다. 전공이 경제학이었음에도 말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경쟁과 그를 위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경제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소위 자유주의 계열의 부자의 경제학과 평등과 복지,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빈민의 경제학'을 나눠 제시하였다. 

 이번 '역사의 역사'도 그렇게 나눴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직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과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물론 당연히 저자는 이 정도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고 그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서술을 했을 것이다.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고대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 시점부터 최근의 역사서술을 망라한다. 물론 중요한 역사서와 사람만이다. 처음으로 다룬 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큼 역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문자시대 초기의 사람으로 당시 대부분의 정보는 구술로 전해졌고 문자로 접한 것도 구술을 문자화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가 전달과정에서 즉시 사라졌고 살아남아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왜곡, 각색, 변형되었다. 이들은 이런 시대를 살았기에 상당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은 역사서를 쓸수 밖에 없었지만 매우 의미있는 작업을 해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대의 문명이었던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에 대한 지리, 인정, 도시 ,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스 인임에도 이들 문명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적절한 분량을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래도 그의 성향은 딱딱한 사실 중심보다는 군데군데의 빈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서사꾼이나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정보의 진위와 가치를 비교적 꼼꼼하게 점검하였고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며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 여기에 주요사건들이 서로 몇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서술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이 해당 사건의 연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아의 역사가로는 역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 국가의 흥망, 다야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중국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로 종이가 없었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실을 중시한 사마천은 사기를 쓰며 무려 103종의 책을 참고 했다. 역시 죽간이 없었기에 최초의 사기는 죽간에 남았다. 본기 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열전70권 총 130권이다. 본기는 황제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행적과 업적을, 표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서는 도덕, 음악, 군사, 천문, 치수 등 고대 중국 문화나 제도의 특징과 변화를,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황제까진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권세가에 대해, 열전은 지식인, 정치인, 강도, 자객, 광대까지 독특한 개인의 생애를 다뤘다. 

 사마천의 이런 역사서술체계는 기전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마천의 사기도 약점은 많다. 우선 주변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한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라 부정확하고 단편적이며 편향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기록된 사실이 빈약한 열전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도 많이 발휘한다. 물론 이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엔 그 유명한 이븐 할둔이 있다. 그는 역사 서설을 썼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역사서설은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책 뒷부분에 언급하는 총균쇠 및 사피엔스와 닮았다. 이븐할둔은 뜬금없게도 역사서설 중반중반에 과도할 정도로 신에 대한 찬양을 하는데 유시민은 당시 종교적 압박이 강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을 파악한다. 

 유럽으로 돌아가 랑케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는 산업과 과학의 시대로 랑케는 많은 학문들이 전문화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태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전문역사학자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 성향으로 군주제를 옹호했기에 유럽의 여러 각종 문서와 왕실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랑케는 과학기술문명은 진보하나 인간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보였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니 신학과 군주정이 옹호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큰 사고를 불러왔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와 많은 역사가들을 정치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도 있었다. 

 유시민은 맑스도 역사가로 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이 역사의 주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있었던 노예, 농노,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계급을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유물사관도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만 해도 물질적인 것 보다는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질서나 이성, 법칙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물질이 먼저이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가도 언급된다. 우리의 역사가로 유시민은 박은식과 신채로 백낙준을 거론한다. 박은식은 조선망국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와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남겼다. 박은식은 다소 옛 인물로 개명유학자이기에 한문이 가장 편해서인지 순한문체로 저술했다. 때문에 초기엔 보수적인 시각도 남아있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훗날 쓰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다. 신채호는 고대사 검증에 주력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남겼는데 사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다루고 싶었으나 무장투쟁운동에 주력하고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면서 단군부터 백제의 패망까지만을 다루게 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주터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이 아니라 만주나 요동까지였음을 밝혀냈다. 

 에드워드 카는 랑케와는 다르게 정확성은 역사가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실은 이야기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가가 그 사실을 남기고 다루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랑케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위해 문헌을 무척 중시했지만 사실 이 문헌조차 어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만을 주목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하다. 크로체는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로고 선언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주고 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반대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즉,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이나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토인비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문명단위로 승격된다. 토인비는 유럽은 역사가 모두 연결되어 대영제국을 제외한다면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슈팽글러의 영향을 받았는데 슈팽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한물간 천동설과 동격취급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도 중시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지동설로 취급하고 스스로를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하기도 했다. 토인비는 그의 관점을 받아들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를 서술했다. 토인비는 20개가 넘는 당대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였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았다. 그는 인종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였고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정과 실패로 흥망성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토인비가 말하는 도전은 다섯 가지로 척박한 땅이 주는 도전, 새로운 땅이 주는 도전,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침공),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사회의 진보는 이런 도전에 대해 소수의 창조적 천재에 의해 이뤄진다. 이들이 이런 도전을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루면 비창조적 다수가 결국 이를 따르게 되고 사회는 성공한다. 이를 미메시스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적 소수자는 언젠간 그 창조력을 잃는다. 그러면 비창조적 다수는 기존의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것이 네메시스다. 

 창조적 소수자는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망하는데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 일시적 기술의 우상화가 그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새로운 도전에 적응못해 나타나는 문제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는 세 집단이 있는데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다. 내적인 집단 내부의 노예, 농노, 천민, 노동자등 피지배 계급이며 외적은 문명 외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집단으로 야만인이다. 이 세 집단의 상호관계가 문명의 향배를 좌우한다. 

 최근엔 역사서술의 하나로 인류사가 등장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첫 등장에서 가장 최근을 다루는 인류사가 역사서술의 단위로 대두한 것이다. 인류사는 실제 과학과 역사를 전면 통합한다. 그래서 총균쇠나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및 그외 여러 학자가 다루는 최근의 인류사 책을 보면 이것이 과학서적인지 인류학 서적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총균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는 다르게 환경을 인류사에 주 원인으로 다뤘다. 인간의 차이 및 사회 문화와는 크게 무관하게 인류사는 환경이 좌우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마다 가축, 작물의 분포가 큰 차이를 보이고 확산과 이동의 속도가 대륙마다 지형, 기후에 의해 크게 다르며, 대륙마다 고립도가 다르고, 대륙마다 인구과 민족 분포가 다름을 제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4가지는 객관적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더 나아가 인류사는 사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물학적 사건이라 말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혁명인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모든 혁명을 사실상 촉발한 첫번째 혁명인 인지혁명이 인간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이 인류사의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에서 벗어나 호모 데우스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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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28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방대한 내용을 기준점을 잡아 정리하는 능력 참 부럽습니다.

닷슈 2022-06-29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꾸 정리만 하고 제 생각이 잘 안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2-06-29 18:38   좋아요 1 | URL
네엣? 닷슈님 생각이 안 들어가다니요ㅠㅠ 너무 잘 쓰시는데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시다니... 또 부러워하면서 배워갑니다^^
 
BTS와 철학하기 - 소유에서 존재로, 넘버원에서 온리원으로, 진리에서 일상으로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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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그룹 BTS가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전 세계 아미들이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한데, 아직 그룹 해체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군대라는 예상해 왔던 현실적 문제가 있으며, 서로가 새로운 성장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유 등 갑작스런 활동중단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많았다. 그리고 몇몇 구성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혼자 활동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기에 활동 중단에 따른 사회적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큰 그룹이 될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초창기엔 무척 작은 기획사의 그러 그런 그룹이었다. 2014년에 아는 초등학생이 BTS를 좋아한다기에 대체 그것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방탄소년단이라길래 난 박장대소하며 대체 왜 그런 애들을 좋아하냐고, 당시 인기 많던 인피니티 같은 그룹도 있지 않냐고 했었다. 그리고 조롱하며 그 그룹은 무대에 방탄조끼라도 입고 나오냐고 비아냥댔었다. 2018 평창올림픽 때 개막식과 폐회식에 많이 사용된 건 한국 가요였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무대에 섰던 것은 EXO였다. BTS는 그때를 거의 기점으로 세계적 그룹으로 치고 올라갔으니 하나의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하여튼 이 책은 독특하다. 세계적 인기 그룹의 노래 가사를 철학과 연결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책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내가 BTS의 노래들을 잘 모르고, 뭣보다 철학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BTS가 워낙 유명하기에 그들의 노래를 여기저기서 제법 많이 듣기는 했는데 워낙 90년대 느린 노래들의 가사도 잘 듣지 못하는 편이라 그들의 빠른 노래 가사는 사실 전혀 듣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해한 바로 책의 철학 주제를 정리해본다면 문화와 자본주의, 다른 모든 사회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로서 자신의 자유, 그리고 완성을 위한 아픈 성장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 

 주제가 이래서인지 책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서 철학적 핵심어들을 찾아내어 연결해나간다. 저자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은 선과 악, 자신의 문화적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연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의 틀을 넘어야 한다. 이 시도가 방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답을 강하게 찾고자 하는 욕망이 드는 청소년기와 20대에 사람들은 많이 방황한다. 자유롭기 위해 방황하고 그 방황이 자유를 위한 성장을 낳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존재론은 있는 것을 연구했기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는 있음에서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두 제거하니 결국 남는 것은 없기에 유와 무가 사실 같아짐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있음인 삶은 없음인 죽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의식해야 하며 그를 통해 살아있음과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제대로 존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적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미리 마주보는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은 삶과 존재의 방식을 바꾼다. 주어진 세계에서 사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이나 목적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가며 본래적인 자유로운 삶은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산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성취와 소유만 추구하면 정작 나의 삶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 소유할 것이 워낙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한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유지향의 삶과 존재지향의 삶이다. 소유지향의 삶은 삶은 성취, 소유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존재 지향의 삶은 삶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프롬은 맑스가 사회구조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할 것으로 파악한데 반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롬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과 성향도 함께 변화하해야 사회가 비로소 바뀐다고 보았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가 바뀌는데 있어 구조를 바꾸느냐 사람은 바꾸냐는 중요한 문제다. 조선왕조의 개창자 정도전은 왕이라는 변수가 심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왕을 철저히 견제하고 보좌하는 관료 중심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관료인 양반이 세월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모습을 보였고, 세종이나 정조처럼 신하에 의지 않고 개혁을 스스로 이루는 왕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양자는 같이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책은 사람의 자유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소로 욕망을 꼽는다. 사실 이는 계속 언급하는 소유하는 삶, 실존하지 않는 삶과 관련한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상에 대한 일반적 욕망과 욕망 자체에 대한 욕망이다. 전자는 직접적 욕망으로 생물로써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래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지만 후자는 간접적이고 보다 사회문화적인 것이자 경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역시 생득적인 것이기도 한다. 이런 욕망은 매우 다양하지만 후자의 욕망일수록 늘 그것을 채워도 채워도 공허해진다. 결국 나만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이기고 나면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만의 고유한 실제세계로 돌아가 온갖 상징의 가면을 벗고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본능에 충실한 삶은 살아야 한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해 라깡과 들뢰즈의 욕망도 언급된다. 라깡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반면 들뢰즈가 언급하는 욕망은 생산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라깡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는 욕망이나 들뢰즈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를 넘어선 무생물도 갖는 비인격적 욕망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생산하는 힘을 갖고 에너지기에 혁명적이다. 이것은 끝없이 떠돌고 유랑하기에 유목적이다. 라깡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이 분명하나 들뢰지의 욕망은 그 대상이 비어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무한한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운동장에서 분열증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다른 욕망을 금지하는 영토화돤 보통의 욕망들의 선을 무너뜨린다. 무엇이든 욕망하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러면서도 다른 욕망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어서 돈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영토를 만들어 놓고서는 다른 욕망은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다. 사랑이나 감정, 해방등의 모든 욕망도 돈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혁명성에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라는 주체, 가족,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기호가 만들어지고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 하고 이 기호는 차이를 본질로 삼는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라는 가치가 중요한데 인기 있는 이미지나 브랜드들은 그만의 기호로써 가지는 가치가 있다. 때문에 그런것들을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차이라는 기호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개 남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성취나 소유로써 으스대는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나만의 개성이나 고유함이라는 욕망이 억압되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욕망이 이동함으로써 욕망의 미끄러짐 현상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나라는 고유함을 차이라는 기호에서 찾으려하니 채워도 채워도 밑빠진 독처럼 공허함만 남게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나만의 고유함보다 차이라는 기호나 이미지를 욕망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시뮬라르크의 사회라 칭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구별짓기나 시뮬라시옹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교환이나 대체불가능한 본래의 억압된 개성찾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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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폐증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레인맨으로 유명하다. 워낙 자폐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가장 잘 보여준 사례지만 80년대 영화이니만큼 이젠 모르는 사람도 많다. 최근 자폐 관련 영화나 드라마는 템플 그랜딘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 굿닥터 정도가 떠오른다. 굿닥터는 한국판과 미국판 두 개가 있고 한국판은 주원이 미국판은 프레디 하이모머가 주연을 하여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자폐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 세상의 주목과 지원을 끌어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등장하는 자폐인이 모두 서번트 신드롬을 갖고 있어 자폐아는 곧 천재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폐아중 천재의 비중은 일반인중 천재의 비중보다 몇 배 높은 것은 사실이나 절대 다수의 자폐인에겐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절대 자폐인은 드러나는 특별한 재능없이 그져 자폐 증상만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폐를 다룬 책은 생각보다 많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2000년대 중반 실제 일본의 자폐인을 소재로 나온 만화다. 만화로 보기 편하며 15권까지 나왔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가 아니면 구매가 어렵다. 십년 정도 전에 관심을 갖고 모두 보고 싶었는데 그 때에도 이미 돌아다니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유명한 템플 그랜딘의 책이다. 그녀는 자폐이면서도 교수의 자리에 올랐고 미국에서 도축당하는 소의 심리를 최대한 안정시키는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일을 기다리는 아이는 민수라는 자폐 소년이 주변의 지원과 적절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렸고, 책 그래 엄마야는 한국의 냉혹한 현실에서 자폐아동을 둔 부모가 정부 사회와 싸워가며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자폐아들을 둔 과학자입니다.는 최근의 논란이 되고 있는 자폐에 대한 관점을 다룬다. 자폐는 증상이나 장애로 취급되지만 요즘에는 자폐를 하나의 개성이자 특성으로 보고 오히려 진화상의 이점으로 보는 생각도 생겨났다. 이 책은 자폐의 여러 측면이 그와 부합됨을 보이는 책으로 강렬한 세계 이론을 주창한다. 이는 자폐인이 주변 감각에 매우 예민하여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오히려 둔감해보이고 세상 및 사람과 거리를 두려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과감각을 뇌가 제대로 소화해낼수 있고 조절할수 있는 쪽으로 진화가 이뤄진다면 자폐는 그것으로 향하는 중간과정정도로 느껴질수도 있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런 자폐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자폐의 역사다. 자폐라는 개념의 정립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자폐인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고 그들의 권익이 어떻게 신장되었으며, 최근의 자폐연구 및 자폐의 정의에 대한 변화를 다룬다. 

 정확한 사례는 사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자폐인은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개념이나 진단조차 없었던 당시이지만 몇몇 특이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나 특성을 살펴보면 지금의 관점에서 그가 자폐인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폐라는 개념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당시는 끔찍한 우생학의 시대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17개주가 강제 불임술을 법제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당시 충격적이게도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3년 버지니아에서는 1333명, 캘리포니아에선 8504명이 강제 불임시술을 당했다. 1942년 독일도 아닌 미국에선 미국정신의학저널에 정신장애 어린이의 안락사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정도였다. 미국정신의학의 수준도 낮았다.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은 일반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정신병원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는게 고작이었다. 어떤 정신의학에 대한 전문성과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총체적으로 부재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것이 카너였다. 그는 당시 미의학계가 모든 환자를 증후군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구속복을 항싱 입는 것이 관례였는데 카너는 크리스마스에 근무하던 병원 환자들의 구속복을 벗겨낸다. 그리고 그래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음을 입증함으로써 환자들이 구속복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한다. 카너의 최대 업적은 바로 자폐증을 최초로 명명하고 진단한 것이다. 자폐는 그리스어로 자기 자신을 뜻하는 auto에서 파생한 것으로 자폐는 autism이다. 카너는 자폐인들이 제각각 매우 다르나 공통의 두 가지 결정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항상 동일한 상태에 있기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너의 이런 자폐에 대한 최초의 명몇과 진단에도 불구하고 자폐에 대한 의학계와 과학계 대중의 관심은 매우 적기만 했다. 자폐의 진단과 더불어 그 증상을 가진 사람의 수는 점차 늘어갔지만 그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몇몇 정신의학자들은 자폐증의 원인으로 엄마를 지목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엄마를 냉장고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념을 널리 퍼뜨린 건 베텔하임이란 인물이다. 그는 자폐증을 부족한 엄마의 사랑으로 귀결시켰다. 그는 2차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강제수용소와 자폐를 연결시켰고, 나치가 수용소 성인의 정신을 망가뜨렸던 엄마가 자녀의 정신을 망가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베텔하임은 다만 나치와 엄마의 직접적 비유가 너무나도 잔혹한 표현이었기에 냉장고 엄마란 좀더 온화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흐름속에 자폐의 최초 진단자인 카너마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자폐가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폐가 선천적인 것이라는 최초의 통찰을 스스로 배신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진단과 비유는 역설적이게도 자폐증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게 된다. 1959년엔 자폐증을 유일 주제로 다룬 52편의 논문과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네덜란드를 필두로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자폐증 진단이 시작되었다. 

 냉장고 엄마는 애초에 실패할수 밖에 없는 이론이었다. 우선 의사들의 연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폐증의 타당한 이유가 후천적으로 의학 외부에 존재하는데 굳이 의학적 연구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폐아를 키우느라 엄청난 부담을 가진 엄마들 그리고 자녀를 수용기관에 보낸 부모에게 고통과 혼란을 부여했다. 자신의 탓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문제의 원인을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엄마에게서 찾음으로써 의미없는 치료를 하게 만들었다. 원인이 자녀의 선천적인 것임에도 의사들은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루스 설리번과 울버니 엄마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험적으로 이런 이론이 말도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이들은 대항이론이 필요했으며 찾아낸 것이 1964년에 나타난 버나드 림랜드박사였다. 

 림랜드는 자폐증에 관하여 보고된 모든 증례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여 자폐라는 장애의 전체적인 모습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2년간 증례만 230건을 모았고 그는 이를 모두 과학적으로 검토한 후 냉장고 엄마 이론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우선 자폐 엄마들 대부분이 다른 자녀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정상이었다. 냉장고 이론 처럼 엄마의 초기 정서적 학대가 결정적 자폐 발생 요인이라면 다른 형제에게서도 상당비율로 자폐가 발생했어야 맞다. 하지만 아니었다. 게다가 냉장고 엄마 이론은 엄마에 의한 아동의 초기의 정신외상에 주목했지만 많은 자폐 발현 양상이 그리 초기에만 집중되지 않았다. 림랜드는 이를 바탕으로 베텔하임을 공격하였다. 사실 베텔하임의 주장은 이렇다할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다. 베텔하임은 대중매체에는 자폐에 대한 글을 자주 기고하면서도 정작 장애학교에서 수행한 연구는 단 한건도 동료심사를 요구하는 저널에 게재하지 못했다. 

 이런 흐름속에서 1965년 전미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했다. 그동안 자폐아동은 방치되어 왔다. 우생학이 판치던 야만의 시대에는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누구나 부모에게 권장했다.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지 않더라도 돌봄이나 교육의 손길은 없었다. 당시의 미국법은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학생을 거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매우 드문경우가 아니람녀 대부분의 자폐아는 원해도 학교입학이 거부되었다. 

 협회가 설립된 후 많은 자폐 부모들은 교육받을 권리에 집중했다.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모든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자폐라고 해서 교육받을 권리가 박탈된다면 이는 분명한 위헌사항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장애아동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재판에는 흠잡을데 없는 자격을 갖춘 교육전문가들이 강력한 증인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지체아동을 교육하고, 그 발달을 연구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교육가들의 증언에 의해 장애아동도 학습하고 학습잠재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소송은 당연히 승소였고 1973년 주정부에서 실행한 각 조정서의 조항은 장애인의 권리와 교육에 대한 기념비적 성과를 담아내게 된다.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전국 각지에서 관련 소송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폐는 이 와중에도 소외되었다. 

 하비와 코니부부는 자폐부모 활동가가 되었다. 자녀가 자폐로 진단되었기 때문이다. 하비는 전미자폐어린이 협회를 워싱턴으로 이전했는데 권력층과의 접근성이 협회의 발전과 영향력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손레이핀 대 캘리포니아 주 소송이 일어났다. 이 소송에서는 처음으로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 명시되었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였고 당시 주지사였고 향후 미국의 대통령이 될 로널드 레이건이 서명하여 최종통과되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면서 비용의 절감을 강하게 외쳤던 자라 이 서명은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당시 레이건과 친우였던 사람의 자녀가 자폐였고 법안 통과시점 그와 레이건의 통화가 이뤄졌던게 결정타였다. 

 한편 미국의 시설 수용자수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급감하기 시작했다. 장애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소송이 잇달아 승리하면서 아아들이 학교로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5년 연방장애아동교육법이 제정되며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는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장애목록이 명시되었고 1990년에는 자폐증도 등재되었다. 

 자폐증의 치료방법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초기 맹위를 떨친 것은 ABA로 대표되는 행동주의적 요법이었다.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지는 행동주의 요법은 자폐아동을 강하게 억압하거나 때리고 충격을 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런 방법은 효과도 있었지만 비도덕적인 측면이 강해 부모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또한 행동주의적 요법은 많은 인적 자원을 요구했기에 비용이 비싼 단점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런 혐오치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쇼플러가 등장했다. 그는 자폐증이 선천적인 기질적인 원인으로 생겨나며 엄마는 이 증상에 관해 비난받을 존재가 전혀아닌 치료의 강력한 협력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플러는 자폐어린이들이 가까운 감각(촉각, 고유감각등 내부의 감각)을 이용하여 정보를 잘 받아들이고 먼감각(시각, 청각, 후각등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감각)보다 의미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연구결과로 이를 입증했으며 이는 자폐증에 신경학적 독특함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자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폴스타인과 리터는 영국의 쌍둥이 자폐를 연구하였다. 쌍둥이 중 하나이상이 자폐인 경우는 21건이었는데 이중 둘다 자폐인 경우는 4건으로 모두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는 유전이 자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였다. 가족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모두 자폐인 경우는 1/50정도였지만 일란성 쌍둥이라면 무려 1/3까지 확률이 올라갔다. 마음이론도 자폐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마음이론은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인 실체임을 알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이론에 대한 연구 결과 지적장애인은 마음이론이 있음이 밝혀졌고 이는 지능지수와도 무관함이 밝혀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폐인은 지능지수가 지적장애보다 높은 경우에도 마음이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자폐인은 패턴과 시스템을 인식하고 각 부분을 조작하는데 뛰어는 능력을 보였지만 각 부분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어우러져 작동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부족했다. 배런-코언은 자폐인은 체계적 사고 경향을 두드러지지만 공감능력을 희생하는 남성형 뇌로 이해할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2년 윙은 들쭉날쭉은 자폐인의 수를 정확히 하고 싶었다. 윙과 굴드는 15세 이하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이를 모두 확인하고 그들을 가르친 교사 900명과 1:1면담을 시행하였다. 132명 어린이와 그 가족을 직접 찾아가 어울리고 시간을 보내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윙은 자폐증 진단범위가 너무 좁게 설정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윙과 굴드는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사회적 기술 장애,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 사회적 상상력을 결여였다. 그리고 자폐인은 이 세 가지 증상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나므로 정확히 정상과 경계선 상에 걸쳐있을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연속선이란 단어가 등장했고 1988년 지금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자폐 스펙트럼 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 들어 자폐증은 일반인에게도 더 이상 생소한 분야나 용어가 아니었다. 여기엔 영화 레인맨과 템플그랜딘이 큰 역할을 하였다. 레인맨은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정확히 그려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수 있었다.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책은 최초로 경험의 형태로 자폐인에 의해 서술된 책이었다. 이처럼 자폐가 널리 알려지면 지원과 관심도 크게 늘었지만 이에 대한 공포도 늘어갔다. 2000년대 들어 자폐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1987-1998년 사이에 자폐인의 수는 이전 보다 무려 273%나 늘어났다. 이를 두고 현대사회의 병폐나 디지털 문명과 기기등이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사실 궁극적 원인은 자폐 스펙트럼 개념의 대두로 인한 폭넓은 자폐의 진단이 그 이유였다. 실제 1980년대의 환자를 지금의 기준으로 진단하면 그것만으로도 환자의 수는 25%가 증가한다. 

 하지만 자폐인의 증가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 대표적 사건이 지금도 상흔을 남기고 있는 웨이크 필드의 사건이다. 1998년 2월 영국 의사 웨이크 필드는 당시 새로 개발된 MMR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심스러웠지만 매우 파급력이 컸다. 사람들은 안그래도 백신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이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그의 논문 발표후 4개월이 지나자 MMR백신 접종률은 무려 14%가 떨어졌다. 사람들의 공포는 수은물질은 티메로샬로 까지 이어졌다. 이 물질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사용금지까지 되었다. 하지만 웨이크 필드의 주장과 이후 이어진 모든 논란은 정확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웨이크 필드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MMR논문과 관련하여 웨이크 필드는 조사과정중 변호사와 관련하였고 논문 발표후 그를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논문 발표전 새로운 홍역 백신을 만들어 특허 출원도 해놓은 상태였다. MMR이 대중적 신뢰를 잃는다면 크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든 상황으로 2009년 미국에서 자폐 부모는 백신 재판에서 패소한다. 백신이 자폐를 일으켰고,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었다. 또한 웨이크 필드는 2010년 의사면허를 취소당한다.

 이 모든 논란은 어이없게도 하나였던 자폐 공동체를 둘러 찢는 상흔을 남겼다. 많은 수의 자폐 부모가 웨이크 필드와 백신 논란에 낚여 자폐에 대한 원인을 백신과 티메로샬에서 찾았다. 그들은 매우 힘든상황이었고 뭔가 책임을 물을 만한 것이 필요하기는 했다. 한편 다른 부모들은 자폐의 원인을 비과학적 미신 같은 것에서 찾는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비과학적 시도는 자폐에 대한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지원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오히려 안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 우려했다. 이런 입장 차이로 두 집단을 대립한다. 

 하여튼 백신가설은 과학계에서 배척당하고 소송에서도 패하면서 2010년대 들어 지지경향이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회자될만큼 그 영향력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신경다양성 이론이 등장한다. 이는 싱클레어와 에세이에서 우리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는 선언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모운동에서 자폐증의 모습은 항상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는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폐를 그저 한 사람이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신경다양성 운동은 자폐증의 완치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적 노력을 거부한다. 애초에 장애나 병이 아니기에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박도 많이 불러왔다. 사실 싱클레어 같은 자폐인은 매우 드물다. 고학력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주장을 여러 사람앞에서 할수 있으며, 언론활동까지 할수 있는 자폐인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넓다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자녀가 중증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녀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지 않는다.

 한편 자폐에 대한 현대의 연구는 더 많은 것을 밝혀내고 있다. 자폐 어린이는 뇌의 크기가 20%정도가 클 수 있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때 뇌에서 쾌락과 만족에 반응하여 분비되는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폐인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등 감정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시가적 과제를 수행하는 전두엽과 후두엽의 혈류 조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수면때 급속안구운동이 1/3정도 적었고, 일일 수면시간도 일반인보다 1시간 부족했다. 엄마가 임신 전 엽산을 복용하면 자폐인이 태어날 확륙은 40%나 줄어들었다. 한편 고열이 나면 자폐 증상이 크게 완화되는 보고가 나타났다. 그리고 멜라토닌을 복용하면 평상시보다 잠이 잘 들고, 리스페리돈을 복용하면 반복행동과 과다행동이 줄어드는등 약물 치료 연구도 이뤄졌다.

 하지만 자폐에 대해 갈길은 아직 멀다. 그 발현 스펙트럼이 복잡한 만큼 이렇다할 원인도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치료방법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신경다양성 운동에서 더 나아가 자폐인이 사실 지나치게 고성능이기에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지능이 낮아보인다는 주장부터, 자폐가 인류의 다음 진화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폐인을 키우는데 부모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이렇다할 성과도 얻기 힘들다는 오래된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자폐인의 지원에 대한 한국의 지원은 매우 열악하다. 자폐인 및 발달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대개 학생신분일때만 유지된다. 아이가 학교를 다닐때면 그래도 부모는 낮에 시각을 확보할수 있고, 직장도 다닐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졸업하면 모든 지원이 종료된다. 성인 발달 장애인을 수용할만한 시설이나 기관도 거의 없는 편이며, 이들을 자립시킬만한 직장도 거의 없는 편이다. 일부 부모가 자구책으로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전무하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발달 장애 및 자폐 부모는 자녀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것이 소원인 상태다. 이런 정부는 정부도 아니라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많이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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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팀 마샬은 지리의 힘 1권을 펴냈다. 이 책은 방송도 타고 책 자체도 훌륭하여 여러 지리책이 국내 출간되는데 힘을 보탰던 듯 하다. 그 덕에 오랜 인문학이자 사회과학의 선두주자였음에도 역사의 대중성에 눌려있던 지리가 모처럼 빛을 본 듯 하다. 이후, 좋은 지리 책들이 많이 나왔다. 가급적 놓치지 않고 보려 애썼다. 

 팀 마샬은 주요 선진국의 지리적 조건과 거기서 나오는 역사, 가능성, 그 한계를 다룬 '지리의 힘 1권' 이후 '장벽의 시대'도 펴냈다. 문을 걸어잠궜던 트럼프 시대에 발맞춘 책이었는데 흥미롭긴 했지만 사실 지리의 힘 만큼은 아니었다. '지리의 복수'는 지리가 가진 가능성과 그것이 제기하는 근원적 한계를 여러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러시아가 자연적 척박함으로 인한 폭력성과 전제정치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 또한 광활하게 펼쳐졌음에도 자연 방어물이 없어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오히려 팽창하는 성향을 지닌 것, 인도가 자연지물의 한계로 세력이 중국처럼 통합되지 못한 것, 멕시코가 가까운 시일내에 미국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본 지점이 독특했다.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은 작년에 본 책으로 미중 전쟁으로 과거 미국이 제공하던 제1질서가 붕괴할 것으로 본다. 제1질서는 자유로운 교역과 이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으로 국제분업과 상호교류 및 유래없는 평화의 시대를 가져왔다. 하지만 미중전쟁으로 미국이 이 질서를 보장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향후 교역로에 의존하지 않고 지리적으로 자급자족적 능력을 가진 국가들이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남미는 아르헨티나, 유럽은 터키나 프랑스,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이 그러했다. 매우 좋은 책인데 좀 미국중심적이었다.

 지리의 힘 2권은 1권에 비해 기존의 논조를 따르면서도 좀더 주변적인 나라들에 초점을 둔 것이 좋았다. 덕분에 잘 모르던 나라들에 대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고 마지막 장을 우주로 설정하여 지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1. 호주

 호주는 넓고 평평하며 몹시 건조한 평야가 국토의 대부분이다. 70%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인 outback이다. 그래서 그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2천 6백만으로 한국의 절반에 불구하다. 인구는 시드니, 맬버른, 브리즈번, 3대 도시에  50%가 몰려있고 유일하게 쓸만한 머리-달링강 유역이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여 강에 의지하며 사람들이 내륙으로 이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머리-달링강도 선박의 운행이 가능할만큼 깊지는 못하다. 

 우리는 흔히 호주의 원주민을 단일종족처럼 여기나 아메리카 토착민의 종족이 매우 다양한 것처럼 이들도 에오라족, 무리족, 능가족, 왈라족등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1788년 이들의 수는 25만에서 50만이었지만 20세기의 영토전쟁으로 수만이 사망한다. 시드니 주변 백인 정착촌들은 점차 성장하여 개척 전쟁을 일으켰는데 2천의 식민지인과 그 수배에 달하는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1910년에 이르러서야 호주는 학살에서 벗어났지만 원주민 아이를 동화시킨다는 이유로 가족과 떨어지게 하여 백인 가정이나 국가시설에 위탁하였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종료되었고 그 결과 10만의 가족과 과거 유산과 단절된 도둑맞은 세대가 탄생하였다. 2008년이 되어서야 호주 케빈 러드 총리가 일련의 원주민 탄압에 대해 사과하였고 현재 원주민의 수는 80만까지 성장하였지만 이미 과거의 언어와 문화를 많이 잃어버린 후였다. 

 호주는 지리적 제약으로 성장이 매우 늦었다. 미국은 동부에서 출발하여 서부로 갈수록 비옥한 토지들과 운송이 쉬운 강들이 등장하여 폭발적인 인구성장세와 확장을 이루었지만 호주는 해안 지역을 벗어날수 없어 그러지 못했다. 해안의 거점들은 공식적 교류가 없이 자체 경제, 정치제도를 이루고 있었고 교역도 상호가 없었다. 호주엔 마땅한 짐승도 없었기에 사람이 짐을 육상으로 날라야만 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철도가 부설되자 일부 해안도시들의 연결되었고 운송과 통신이 발전하며 연방형태로 여러 지역을 묶자는 생각이 탄생했다. 1889년 국민투표가 이뤄졌고 큰 반대속에 통과되었다. 1901년 6개의 영국령 식민지가 연합하여 호주 연방을 구성하였고 이것의 지금의 호주가 된다. 

 호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천연자원이 많고 양모, 양, 육류, 밀, 와인이 풍부하다. 또한 우라늄과 아연, 납은 세계적이며 철광석과 질좋은 석탄도 풍부하며, 금과 은, 텅스텐도 많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바로 원유다. 때문에 호주는 중동에서의 원유 수송이 나라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교역료는 말라카, 순다, 듬복 해협을 지나는데 현재 적대적인 중국이 이를 봉쇄한다면 호주는 원유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호주의 국방력은 원유 수송선 호위를 위한 전함과 잠수함, 그리고 원거리 해상 초계기 확보가 급선무다. 

 호주는 중국과의 대결을 위해 남태평양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호주는 중국이 남중국해를 지배하는 것은 어찌하지 못하나 남태평양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호주는 이미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섬 나라들은 과거 호주의 식민역사로 그 저의를 의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호주는 이들 국가들을 섬이 아닌 대양 국가로 인정하는 정책으로 호의를 사고 있다. 


2. 이란   

 이란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즐겨 먹는 빵에 비유한다. 그 빵은 안은 평평하면서도 가장자리 껍질 부분이 두텁고 높은데 딱 자신들의 나라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특징은 이란 요새로 만들어주는 이점을 지니면서도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란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은 자그로스 산맥이다. 서북쪽은 알부르즈 산맥이며 호르무즈 해협 부근은 샌트럴 마크란 산맥이다. 이라크와 접경지역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샤트알아랍 부근이 유일인 저지대 접근로이지만 이 지역 역시 습지이고 돌파하더라고 바로 자그로스 산맥이 등장하기에 이란 침공을 매우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점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렉산드로스와 몽골, 티무르 제국이 이런 이란의 지리적 장벽을 돌파하고 이 지역을 접수한 전례가 있다. 이란의 이 지리적 장벽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껍질이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작용도 하는데 실제로 이란은 페르시아가 오래전 아랍 지역을 지배했던 적을 제외한다면 항상 이 틀안에 갇혀있었다. 

 대다수 이란 인구는 산악지대에 밀집해 거주하는데 둘러싼 산악 지대 안쪽의 평지가 모두 사막이기 때문이다. 카비르 사막과 투르 사막인데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산악지대의 특성상 지리적 격리가 이뤄지고 그래서 이란인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어 서로간의 단결과 화합이 쉽지 않다. 언어도 매우 다양한데 공식어인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자가 60%정도에 불과하다. 거기에 16%의 아제리족, 10%의 쿠르드 족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이란인들은 산비탈을 따라 건설한 도시에 거주하는데 카스피해-테헤란-샤트알아랍강 유역에 대부분이 거주한다. 건조지역이라 물이 부족해 도시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산비탈에 터널을 파서 작은 수로로 물을 끌어올린다. 국토의 1/10만 경작이 가능하고 이중 물을 댈수 있는 곳은 1/3에 불과하다. 

 이란은 페르시아의 영광이후 긴 침묵을 겪는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으로 제국이 붕괴했고 이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랍에게 상실한다. 몽골 침략 이후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는데 이 때 시아파가 국교가 된다. 사파비는 수니파인 오스만에 대항하기 위해 시아파를 정략적으로 선택했다. 사파비 이후 200년간 혼란이 지속되고 서구 열강이 들어온다. 영국은 유전이 있는 페르시아를 보호국으로 하려 애썼는데 1921년 레자 칸이 정권을 탈취하여 팔레비 왕조를 만든다. 그는 강한 페르시아의 부활을 선언하고 여러 종족을 통합하기 위해 페르시아 대신 이란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그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지만 1951년 국유화 지지자인 모하마르 모사데그가 총리가 되자 서방의 반발로 이란은 국제적 제재를 받게 된다. 호메이니는 샤에 대한 비판으로 이라크로 추방된 뒤 프랑스에 거주했는데 1978년 이란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가 샤가 1979년 해외로 망명하자 들어아 집권한다.

 당시 이란내에서는 세속주의적 지식인들이 종교적 환멸에도 불구하고 국왕축출을 위해 호메이니를 지지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포정치를 시작했고 소수파 종교, 공산주의자들이 고문과 처형 실종되었다. 반혁명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 이란혁명 수비대를 창설했고 이들은 가장 위압적 군사조직이 되어 나라의 여러 사업도 장악한다. 현재 이란의 젊은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이 집단을 싫어하지만 거꾸로 많은 부를 제공하는 이들 대기업에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3.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는 인구 3500만으로 인구 대부분이 제다, 메카, 메디나 인근에 거줗나다. 사우디는 주변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같은 아랍 형제라는 말이 무색하고 민족, 종교, 성향이 달라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744년 종교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 충성을 맹세하고 두 집단은 연합한다. 정치는 사우드가 종교는 와하브가 차지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사우디 중앙의 황폐한 네지드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세력 확장 중 오스만 제국에 진압당해 사우드는 이스탄불로 끌려가 참수당한다. 

 일족은 이 비참한 실패에도 살아남아 1824년 사우드 가문은 네지드의 중심지 리야드를 수복한다. 북쪽의 샴마르를 지배하던 라시드 가문과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도 패배해 사우드는 쿠웨이트로 도주한다. 1901년이 되어서야 20대 중반의 이븐 사우드가 사우드 왕조의 수장이 된다. 그는 1902년 네지드로 침투해 과감히 라시드 총독으 암살하고 1914년에는 네지드 상당부분을 회복한다. 여기에 뜨는 해 영국과 연합해 지는해 오스만과 라시드를 공격하여 1920년 라시드를 제압하고 1925년 메카, 메디나가 있느 헤자르 왕국을 제압한다. 1927년엔 영국과 협정을 맺어 영국은 사우드를 네지드와 헤자르의 왕으로 인정하고 대신 사우드는 요르단에 헤자르 북부를 양도한다. 

 마침내 1932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건국된다. 그는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려태조 왕건처럼 자신이 굴복시킨 부족 및 고위 성직자 딸들과 결혼하여 20명의 부인과 100명이 넘는 자손을 탄생시켰다. 현재 사우디를 지배하는 가족 네트워크의 시작엔 셈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반만 해도 사우디엔 석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1935년 시추를 시작해 1938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다. 사우디는 1945년 루스벨트와 협상해 미국에 원유접근권을 제공하는 대신 사우디의 안전보장을 확약받는다. 사우디로서는 오랜 숙적 하심가문이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있기에 이 같은 보장이 매우 중요했다. 

 사우디를 일으킨 이븐 사우드가 죽자 그 계승자는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1964년 실각한다. 이복동생인 파이샬이 즉위했는데 국유화로 석유 수입이 1600%가 증가했다. 이 돈으로 그는 통신 및 운송망을 건설하고 후한 복지제도를 수립한다. 이런 부로 인해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게 된다. 이들이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을 하기에 오늘날의 사우디는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고 상당히 낭비가 심하다. 사우디는 적은 인구에도 세계에서 6번째로 원유 소비가 많으며 발생 전력의 70%를 냉방에 사용한다. 부족한 물 역시 담수화 시설을 통해 가정과 농가에 보급하는데 수많은 보조금으로 가격을 낮추기에 이 역시 아까지 않는다. 젊은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과 경쟁력 확보, 에너지의 절약이 향후 사우디의 과제다.

 하여튼 파이샬 지위 기간은 1965년 TV방송이 이뤄졌고 이에 대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인다. 파이샬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귀국시키고 교육기회까지 부여하는데 이것이 향후 독이 된다. 1975년 파이샬은 암살되고 할리드가 즉위한다. 1979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메카에 침입해 테러를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국왕은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게되고 사우디 왕가는 그간 추진해오던 국가 현대화에 제동을 걸게 된다. 오히려 이슬람에 기대 시대를 역행하게 되는데 극장이 폐쇄되고 공교육에서 종교시간이 늘어나고, 학교와 대학은 이슬람 성직자를 더 많이 고용하는등 제대로 시대를 역행한다. 

 한편 이라크 전쟁으로 왕국이 위협을 받자 사우디는 빈라덴의 요청을 거부하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미군을 주둔시킨다. 미군은 승리하고 왕국은 보호받았으나 극단주의자들은 이 현실이 매우 불편했다. 결국 이들은 사우디 내에서 테러를 자행하여 외국인 거주지와 미영사관등을 공격해 100명 이상이 사망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사우디내 외국인 고급 인력의 20%가 위협을 느껴 떠나게 된다. 

 2017년 MBS, 모하메드 빈 살만이 왕세자로 올라선다. 그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외교정책과 개혁을 실시한다. 여성에 운전을 허용하고 영화관을 열고 종교적 판결을 현대화하고 시장주의를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각국의 외교를 조종하고 급기야는 자신을 비판한 언론인을 살해하기도 해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사회계야긍ㄹ 제시하는데 국민은 덜 부패하고 덜 관료적이며 석유시대 이후에도 살아남을 국가의 건설이다. 하지만 이 국가에서 국민들은 지금의 고복지 시스템에서 벗어나 더 일하고 대신 더 큰 자유를 얻어야한다. 그에게 걸림돌은 오랫동안 같이 해온 와하브 극단주의자들이다.  


4. 그리스

 이 나라는 국토의 4/5가 산맥이다. 본토의 중심부에 핀토스 산맥이 남북으로 자리한다. 동쪽의 테살리아, 마케도니아에서만 경작이 가능하다. 때문에 그리스는 세력을 뻗어나가기 힘들고 인구부양이 어렵다. 지형으로 인해 연결도 안되고, 상호교류는 물론, 인구증가와 중앙집중도 어렵다. 때문에 현재도 식량 수입이 많고 도로, 철도 부설이 어려우며 뱃길로 쓸만한 강도 딱히 없다. 이런 황폐함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해상교역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고대에 문화를 꽃 피운다.

 그리스는 아테네-페르시아-아테네-스파르타-로마-비잔틴으로 역사가 이동한다. 비잔틴은 1453년 멸망하는데 1800년이 되어서야 제국이 약화되 그리스 봉기가 가능했다. 1832년 열강에게 주권을 인정받으니 그리스인은 정작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 인구의 1/3만이 새로운 그리스 국경에 포함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과거 비잔틴 제국 수준의 부활을 염원했지만 열강은 그리스를 군주국가로 만들고 덴마크 빌헬름 왕가의 요르요스 1세로 등극시킨다. 그리스인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혈통이었지만 왕은 러시아 영국 왕가와의 친분을 이용 더 많은 영토를 얻어낸다. 테살리아를 병합하고 그 그세로 1600년만에 1896년 1회 올림픽도 개최한다. 

영국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고자 그리스를 보호국화하려 한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고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대 오스만이 대결했다. 여기서 그리스가 이겨 테살로니키 항구를 획득한다. 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그리스 세르비아를 공격했다고 패해 영토를 상실한다. 그리스는 이 두 차례 전쟁으로 영토가 70%늘어나고 인구도 480만까지 증가한다. 

 1차대전에서 그리스는 상황을 관망하다 연합국에 참전하여 터키 이즈미르를 포함하여 오스만의 영토를 획득한다. 하지만 1922년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군에 패해 비잔틴 제국의 재건 야망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양국에 살던 그리스 터키인들이 서로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터키에서 그리스로 돌아간 그리스인이 무려 150만 반대 상황의 터키인이 40만이었다. 150만의 난민은 새로 획득한 테살로니키로 주로 유입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역이 황폐화하고 유대인으로 불똥이 튀어 반 유대주의 정서가 강화한다. 이 배경에서 공산당이 지지를 얻자 그 혼란으로 군사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한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시스의 지휘아래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탈리아에 패해 독일에 항복한다. 산악지형을 이용해 게릴라가 항전했으나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명이 아사하고 7만이 처형되었으며 수백곳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여기에 6만의 그리스계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해방 후엔 내전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미국이 그리스 군대를 지원하였고 그리스 반군은 알바니아로 퇴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5만이 사망하고 50만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그리스는 이후에도 군부독재를 겪다 1974년에야 민주화가 되었다. 현재 그리스는 경제위기를 겪고 난민의 통로로 고통받으면서도 터키와 대결하고 있다. 그리스는 인구의 1/3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섬에는 고작 수십만만 거주한다. 섬은 무려 6천여개에 달하는데 터키-그리스 사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극히 유리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그 수가 워낙 방대하여 방어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최근 지중해 동부에서 거대 가스전이 발견디었는데 이로 인해 그리스 터키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자국수역에 에너지가 없는 터키는 사이프러스, 그리스 영해를 탐색하고 터키-사이프러스-리비아를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강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물론 이 지역은 사이프러스와 그리스의 영해를 포함한다. 또한 러시아는 서유럽이 가스를 자국에 의존하는 현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이 상황에 터키의 편에서서 초조히 지켜보고 있다. 그리스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탈리아, 요르단과 함께 동지중해 가스포럼을 형성했다. 이 기구는 에너지와 안보기능을 같이 한다. 

 그리스는 미국에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크레타섬의 수다만에 미군해군 기지를 유치했다. 2020년 그리스는 미국에 군사훈련, 급유, 응급상황시 그리스의 군부대 접근권까지 부여했다. 이들은 미국의 믿을 만한 동맹이 되어가고 있다. 


5. 에디오피아 

 에디오피아는 지리적 이점과 많은 인구, 풍부한 수자원으로 이 지역의 잠재적 패권국이다. 이 나라는 무려 12개의 커다란 호수와 9개의 큰 강을 갖고 있어 유독 수자원이 풍부해 이를 다른 나라에 제공해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다. 이 담수는 멀리는 중동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를 이용해 홍해로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한다. 

 에디오피아는 동아프리카 지구대가 나라를 관통한다. 산맥과 계곡이 6400km나 이어지며 나라는 동서로 갈라놓는다. 지구대의 서쪽이 인구 밀집 지역인데 다수의 커피 농장이 있다. 숲이 울창한 삼림에서 강물이 솟아나고 그물이 지대를 빙빙돌아 폭포가 되어 비옥한 평야로 흐른다. 하지만 가파른 협곡과 폭포는 역시 장거리 운항을 방해한다. 

 핵심지인 아디스 아바바는 주변 낮은 완충지대로 둘러쌓여 난공불락이다. 에디오피아는 인구가 1억1천이며 향후 10년간 1억3천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나라는 드물게 에너지와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하지만 농업은 물이 풍부함에도 주기적 가뭄과 삼림남벌, 과도한 방복, 군사독재, 빈약한 인프라로 휘청거린다. 이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수백만의 인파가 인도적 손길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아프리카국가처럼 종족 문제를 겪는다. 9개의 주요 부족이 국가내 존재하고 이들의 분포에 맞게 9개의 행정구역이 있으며 4개의 주요언어가 있다. 오모로족이 35%로 가장 많고, 암하라족이 27%, 티그리에족이 6%, 소말리족이 역시6 %이다. 에디오피아의 중앙지형은 이들 부족들을 지역적으로 격리시키고 통합을 어렵게 한다. 

 에디오피아는 유구한 역사처럼 건국전설이 있다. 고대의 시바여왕이 이스라엘 솔로몬 왕과 정을 나누어 메넬리크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메넬리크는 성장하여 아버지 솔로몬을 찾아가 모세의 십계명이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오는데 이것이 현재 악숨에 보관되어 있다. 메넬리크부터 시작된 왕좌를 1970년까지 이어진다. 

 에디오피아는 악숨제국때 강성하였고 이집트 남쪽과 홍해, 예멘을 지배했다. 300년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이집트 곱트파와 함께하면서 서방 교회와 단절된다. 1500년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이 침공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도와 막아낸다. 에디오피아 인구의 상당수는 카톨릭이지만 1/2은 무슬림이며 이들은 외곽지역인 동부저지대에 거주한다. 이 지역에도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가 침투하여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1855년 현대 에디오피아가 탄생한다. 국왕 테오도르스 2세가 여러 왕국을 강제통합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유럽 기술자들이 상인에 활력을 넣는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이집트와 이탈리아와 침공도 방어해냈고 수도를 아디스 아바바로 옮겼고 수도와 지부티 항구, 홍해를 잇는 철도를 부설한다. 1930년에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즉위하여 경제를 현대화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하지만 2차대전에 참전했다 무솔리에 패배하여 점령당하는데 해방후 황제는 미국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이탈리아에서 해방된 에리트리아를 획득한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승인하는데 1960년 에리트리아가 봉기하고 1974년 멩기스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이에 경제가 무너지고 기근이 발생하였으며 에리트리아에도 패배한다. 멩기스투는 구소련이 붕괴하자 짐바브웨로 도주한다. 새정부는 티그레이 출신의 멜레스 제나위가 이끌었다. 그는 각 지역에 독립을 도무할 권한을 주었고 이에 에리트리아가 독립한다. 2018 아비 아미르가 총리에 선출되고 그는 최초의 오모로족 출신으로 반대파와 언론인 수천명을 석방하고 에리트리아와도 화해한다. 

 이런 일련의 시도에도 종족간 긴장은 여전한데 오로모는 무슬림으로 가장 수가 많음에도 이제서야 처음으로 권력을 잡을 만큼 그간 소외되어왔다. 암하라는 기독교이며 오랜 지배역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고, 티그레이는 수가 적음에도 최근 나라를 지배한 것에 대한 향수가 여전하다.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들을 두려워하며 다시 전제적 지배를 당할가 걱정한다. 

 에디오피아는 내륙국으로 홍해연안에 접근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지정학이 난리다. 2017년 사우디와 UAE는 테러지원을 이유로 카타르와 단절한다. 터키는 카타르 편을 들고 이로 인해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UAE는 소말리아가 터키와 손을 잡자 바로 투자자금을 소말릴랜드와 푼틀란드로 돌려 군사기지와 항만을 건설했다. 이지역의 오랜 후원국인 터키는 소말리야 쪽의 주요항구와 항만을 지배하는데 인근 아랍국들은 이것을 터키의 신 오스만 주의로 보고 경계하고 있다. 에디오피아는 중립을 견지하고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 쉽지 않아보인다.

 결국 강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혼란을 잘 조절하는 것이 이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6. 우주

 지금까지의 지구지배는 지상군과 해군을 전략적 위치에 배치하고 해상항로와 요충지의 출입을 저지하고 여기에 공군력을 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주시대가 다가오자 저궤도에 자리를 선점하고 자산을 배치하는 것이 새로우 지구 지배 전략을 대두하고 있다. 

 우주는 3개의 범주로 구성된다. 우선 테라인데 지구와 그 영공 비행체가 연료 재공급 없이 지구 주위의 궤도로 갈수 있는 한계거리다. 지구우주는 최저 지구궤도에서 지구자전과 궤를 같이 하는 지구 정지궤도까지이다. 달우주는 여기서 달 궤도까지를 의미한다. 이중 향후 수십년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우주로 거대한 군사적 이점을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지구가까이에는 5개의 칭동점이 있다. 이곳은 지구와 달의 중력효과가 서로 상쇄되어 정박한 물체가 연료소모없이 머무는게 가능한 황금포인트다. 이 중 하나는 위성들이 있는 벨트를 내려다볼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거대한 조망권을 제공한다. 가장 값진 곳이다. 다른 하나는 달의 뒤편에 존재하는데 지구와는 멀지만 향후 우주범위가 더 넓어지면 중요해 질 지역이며 때문인지 중국이 달 뒤편에 진출했다. 

 이런 흐름속에 미국은 2019년 우주군을 창설한다. 세계 각국은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데 이 미사일은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다르게 포물선 비행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방향과 고도변환이 가능해 타격지점과 요격 좌표를 계산하지 못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미사일을 방어할 수단이 우주에서의 레이져 요격이다. 

 최근 위성은 통신기술의 발달로 그나라의 통신과 정찰의 최첨단 장비다. 때문에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정보와 감시활동을 위성에 의지한다. 따라서 그 나라의 위성 파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어진다. 러시아, 중국, 미국, 인도, 이스라엘은 이런 중요성 때문에 위성을 공격하는 킬러위성 시스템을 개발했다. 레이저로 위성을 파괴하는 방법, 위성교란 통신 기술, 위성 충돌 기술등이 그것들이다. 

 인류는 남극의 경우처럼 아직 우주에 대해서 이렇다할 평화적 이용 협약이 없다. 물론 남극 조약역시 이를 거부하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극 인접 지역 국가들이 적지 않다. 아마 지구와 가까운 우주도 그리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지구권 국가들인 지리라는 요소의 가능성과 한계에 갇혀있지만 우주에서는 새로운 지리적 조건과 지정학이 등장할 것이다. 이에 발빠르게 다가갈 필요가 있으며 세계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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