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역사 - 당신이 몰랐던 동유럽의 대국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와타나베 가츠요시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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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독특한 흰색과 적색 두 줄무늬 국기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바웬사, 2002 월드컵 한국의 역사적 첫 승 상대, 최근 한국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폴란드는 이미 유럽연합과 나토의 가맹국이며 유럽연합에 많은 노동력을 수출하고 있다. 면적은 31만km2이고 인구는 3784만으로 면적에 비해서는 다소 적은 편이다. 다만 이 인구의 절반 이상이 35세 이하여서 경제 잠재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발등이 불이 떨어진 상태로 가성비 좋은 한국산 무기를 마구 사들이는 등 국방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것이 폴란드의 역사는 곧 외국의 침략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동부유럽의 드넓은 평원에 위치한다. 이렇다할 자연 장애물이 전혀 없기에 외세로 진출하기도 좋지만 의지할만한 방어수단도 전무하다. 여기에 서쪽에는 독일, 동쪽에는 러시아가 자리한다. 양강에 끼인 셈이며 실제 폴란드는 역사상 이들이 흥기하면 바로 어려운 형국에 처했다.  

 폴란드의 역사는 대충 10세기 정도에 시작한다. 카지미에시 3세가 왕국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한 때 대 제국을 이루었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빌뉴스, 우크라이나 키예프도 그들의 영토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대제국으로 일어서면서 사정이 바뀐다. 이전 스웨덴 과의 경쟁도 국력을 소진시켰다. 

 결국 폴란드는 1772년 러시아에 항복한다. 그리고 1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지는데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이 땅을 나눠가졌고 가장 큰 지분은 러시아 몫이었다. 폴란드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받아 1788-1792년 4년 국회를 개최한다. 중세귀족인 아우구스트와 슐라흐타의 권한을 제한하고, 시민의 토지소유와 고위 관직 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농민에 대한 권한을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폴란드 내의 기득권층이 당연히 이 법안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요구하여 4년 국회는 좌절된다. 그리고 이는 어이없게도 1793년 2차 분할로 이어진다. 이번엔 오스트리아가 빠지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를 분할한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자 1809년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한다.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에 충성하여 그의 러시아 원정에 무려 10만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공국은 소멸한다. 그리고 폴란드의 일부영토에서 러시아 황제를 통치자로 하는 폴란드 왕국이 들어선다. 

 폴란드는 프랑스 7월 혁명을 틈타 독립을 다시 선언하고 11월에 봉기하나 결국 러시아에 패퇴한다. 러시아는 살벌한 보복정책을 벌여 주모자를 처형, 유배시키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대학을 폐쇠한다. 이 때의 탄압으로 무려 1만명의 폴란드인이 해외로 망명한다. 1861년 다시 이 11월 봉기를 기념하는 데모가 바르샤바에서 열렸으나 러시아의 봉기로 5명이 사망한다. 이 사망에 대한 추모집회가 열렸으나 러시아는 당시 크림전쟁의 패배와 농노 해방으로 정신이 없는지라 이를 묵인한다. 하지만 결국 사태가 심각해지자 강경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폴란드는 1863년 붉은 색당 지도부가 임시국민 정부를 선언한다. 하지만 흰색당은 이를 경계하여 합류하지 않다 나중에 동참하게 된다. 양당은 결국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 분열하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실패한다. 이것의 실패 후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조기시도와 무장독립투쟁보다는 자신들의 경제,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추세로 돌아선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퀴리부인이 등장한 시기도 이 때다. 

 1860-1880년대 폴란드는 기본적으로 농업국이었지만 공업화가 진전한다. 그래서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는데 1892년 우치에서 왕국 최초의 총파업이 이뤄졌다. 1893년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고 당시의 중심활동가가 유명한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폴란드의 독립 기회는 1차대전으로 찾아왔다. 러시아와 독일 모두 폴란드의 도움을 원했으나 폴란드는 양자 모두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이 패배하자 1918년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123년 만의 독립이 이뤄진다. 서부는 포즈난, 실롱스크 접경지대가 국경이 되었고 동부는 그단스크와 발트해로 이어지는 폴란드 회랑이 설치되어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국과 분리되었다. 

 독립한지 얼마니지나 않아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난다. 피우수트스키는 주변국과 연방을 구성해 러시아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연합국은 폴란드-러시아 국경을 커즌선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피우수트스키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결국 1920년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는 39만km2의 영토와 인구 2700만을 가진 나라로 완전 독립하게 된다. 피우수트스키는 독재자였으나 파시스트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오늘날에는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폴란드는 농업국이었지만 대공황 시절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로 경제가 흔들린다. 폴란드의 외교는 기본적으로 친 프랑스였지만 독일과 소련에 대해서는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즉, 거리를 두고 양쪽 어디에도 힘을 실지 않았다. 1932년 피우수트스키가 사망하자 폴란드 외교상 유제프는 친독일 외교를 전개하고 독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독일의 유럽 침략을 염두해둔 무리한 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결국 1939년 9월 1일 그단스크를 친선방문한 독일 순양함 홀슈타인 호가 기습공격을 감행해 2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은 폴란드의 전력의 2배이상으로 손쉽게 폴란드를 점령한다. 

 소련은 사전에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비밀의정서를 통해 독일과 폴란드 분할을 결정한다. 그래서 독일의 폴란드 점령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지역을 소련에 빼앗기고 결국 독립 20년만에 다시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는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는 단순 노동담당국으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식 계급이 박해의 대상이었고, 중등교육 이상의 기관은 폐쇠되었다. 점령 당시 폴란드의 유태인 인구는 전체의 9.7%인 350만에 달했다. 독일에 의해 폴란드에만 400개의 게토가 설치되고 하루 184kcal의 비인간적 배급을 실시해 그들을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하였다. 무려 50만 이상이 게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은 점령 후 무려 1백만 이상의 폴란드 인을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 이송하였다.

 1944년 8월 1일 독일에 대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바르샤바를 소련이 들어오기 이전에 해방해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2달간의 봉기로 20만이 사상하였고 결국 독일이 승리한다. 여기엔 사전에 소련과의 협의가 부족하였고 애초에 반소련입장이었기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으며 영미도 방관한 측면이 있었다. 전투의 장기화로 국내군에 대한 시민의 비판이 거셌고, 망명정부에 대한 여론도 악화한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폴란드 문제는 연합국의 가장 큰 이슈였다. 동부국경은 과거의 커즌선을 따른다는데 이견이 없었지만 서쪽국경이 문제였다. 얄타회담 이후 소련은 자신을 적대하는 폴란드 내의 모든 세력과 조직을 탄압한다. 1946년 국민투표가 소련의 주도하에 이뤄졌는데 상원의 폐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 오데르-나이세르 강을 서부국경으로 할지에 대한 투표였다. 모두 대찬성으로 나와서 조치가 취해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투표결과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폴란드의 영토는 러시아의 입김에 의해 동부는 러시아 쪽에 상당히 상실하고 서쪽으로 독일을 잠식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즉, 나라전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부로 크게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78년 폴란드의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려 455년만의 이탈리아 지역 이외의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다. 폴란드는 이렇다 동구권의 일원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코메콘에 기압힌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동구권이 경제적으로 흔들리며 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대에 당국은 갑작스럽게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식육의 가격을 인상하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런 전반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파업과 쟁의가 증가하였고 1989년 노동운동가 바웬사가 대통령이 된다. 

 폴란드는 이렇게 반세기만에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정부에서 벗어났지만 현재 자유와 역행하고 있다. 현재의 폴란드는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약화하고, 언론의 독립성이 약하며, 이민과 난민의 수용에 소극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연합의 선진국가에 많은 노동력을 파견하고 있어 그들의 송금액이 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자국의 이주 노동자가 많은 만큼 자국의 노동자가 그 지역에서 피해를 입고 차별받는 것에 대해서는 난리를 치면서 폴란드 자국에 들어온 우크라이나 및 다른 동구권과 중동지역의 노동자에 대한 차별에서는 눈을 감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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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원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기후가 만든 한국인의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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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내용과 제목은 좀 예상과 다르다. 한국인의 기원이라면 고대 한국인에서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 이동과 융합, 흡수, 갈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 부분을 다루긴 하지만 책의 내용은 보다 거시적이다. 한국인의 기원이란 제목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중동과 유럽, 북미, 남미로 이어지는 인간의 이동을 살핀다. 그리고 여기에 환경 변화가 작용한다. 지구는 타원으로 태양을 공전하고,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고 세차운동으로 인해 그것이 조금씩 바뀐다. 이로 인해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환경 변화가 인간의 이동과 문명의 쇠퇴 및 발전의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리고 책은 다른 저서들과 다르게 연대의 기준은 인간이 지구 환경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친 서력1500년은 기준으로 삼는다.   

 

1. 인류의 이동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12만년 전 아프리카를 나와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유럽의 추운 지역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동아시아 지역엔 데니소바인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40만년번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빙기와 간빙기를 무려 5-6차례 견뎌낸 만큼 추위에 대한 강한 내성과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니소바인은 동아시아에 있었으며 기후가 따뜻해지자 네안데르탈인이 동진하면서 서로 교접해 혼혈아가 탄생하기도 했다. 

 13만년전 간빙기가 도래해 사하라가 습윤해지자 동쪽 지역에 초원이 생겨났다. 인간은 그 초지를 다라 시나이 반도와 남쪼그이 바브엘반데브 해협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세력들이 간빙기가 도래할때마다 습윤해지는 사하라를 따라 순차적으로 계속 아프리카를 빠져나갔다. 인간의 아프리카에서의 이동은 여러 차례였던 셈이다. 

 7만 4천년 전 수마트라섬의 대형화산 토바가 폭발하여 환경이 악화되어 사피엔스의 수가 격감했다. 이 때 상대적으로 온난한 아프리카에 있었던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유라시아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유럽의 인간 수렵채집민들은 이후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리냐크 문화를 이룩하고 다른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라베티안 문화를 이룩한다. 그라베티안 문화는 약 2만 2천년전 빙하기가 가장 추울 때 번성했다. 이들은 점성이 높은 역청, 동물 뼈를 녹인 물질로 창자루를 단단히 고정해 사냥능력을 높였고 뼈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추위에 적응했다. 1만 8천년 전 마그달레나 문화가 있었다. 이베리아에서 시작해 후퇴하는 빙상을 따라 전파되었다. 투창가속기를 발명하여 지렛대를 이용해 창을 더 빠르게 던질 수 있었다.

 과거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럽으로는 진출하지 않아 네안데르 탈인과의 교접이 없었던 기저유라시아인 집단이 존재했다. 그래서 현대 인류의 DNA는 네안데르 탈인과 교접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기저유라시아인의 유전자가 서로 반비례하여 존재한다. 기저유라시아인은 1만 4천년전 지중해 동부 레반트에 거주한 나투프인의 직계조상이다. 나투프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최초 농경민이다. 


2. 수렵채집민과 농경민, 유목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마지막 빙기의 최성기가 끝나고 1만 4700년전부터 약 2천년간 풍요로웠다. 수렵채집민 나투프인 그래서 농경없이도 여기에 정착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착은 농경에 우선한다는게 최근의 연구다. 하지만 영거드라이아스 한랭기가 1천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급속한 온난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했다. 나투프인은 인구가 불어난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농경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농경은 급작스럽기 보다는 이미 수렵채집민 시절부터 부분적으로 시도하거나 그 방안은 대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후 위기가 그 본격적인 시도를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서유럽인은 크게 레반트 농경민, 이란의 농경민, 서유럽의 수렵채집민, 동유럽의 수렵채집민 네 집단이 이주하여 혼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집단으로 유전적 차이가 컸지만 오랜 시간 서로 융합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민은 대개 활동반경이 넓고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식량을 찾아 이주한다. 따라서 인구 부양력이 낮고 영아와 노인 살해가 흔하다. 또한 피 정복 집단도 대개 노동력이 필요없기에 몰살시킨다. 농경민은 농경으로 항상 노동력이 필요하다. 정주 생활로 가내에서 일할 여성 노동력이 항상 필요하기에 정복하는 경우 상대편의 여성을 흡수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역사상 수렵채집민은 농경민 집단에 자주 흡수되었고 유전적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정주 농경사회에서 여성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발가락이나 윗팔의 뼈 변형이 그 증거다. 이는 곡식을 무수히 빻았다는 증거다. 농경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담당하자 남여의 차이가 생겨났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농경민들은 인구 증가로 농토가 부족해지자 이동했다. 9천년전 레반트와 이란 농경민이 아나톨리아 서쪽이로 이동하여 발칸 반도와 지중해를 따라 이베리아까지 이동했다. 다른 무리는 도나우 강을 따라 독일로 갔고, 또 다른 무리는 인더스 강으로 향했다. 

 홀로세 초기 농경민은 북부유럽에 관심이 없었다. 농경에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6천년전 기후가 온난습윤해지자 북유럽에 진출한다. 북유럽에 수렵문화 대신 깔대기 모양의 토기인 푼넬비커문화가 들어선 이유다. 한편 이란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흑해와 카스피해에 도달했다. 이들은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후손과 섞여 초원지역에서 유목문화를 발달시킨다. 이들이 바로 얌나야문화다. 

 얌나야 문화는 5300-4600년전에 존속한 청동기 문화권이다. 대형고분인 쿠르칸을 남겼고 바퀴와 말을 동시에 활용한 최초의 집단이다. 말은 초원지대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다. 처음엔 식량이었겠지만 추위에 잘 견디고 바퀴살이 발명되어 수레가 끌만한 무게로 가벼워지자 운송수단이 되었다. 수레는 얌나야 문화에서 전차로 거듭났다. 유목민은 얌나야 이래로 농경민에 숫자가 적음에도 군사적으로 우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병대였고, 야금술에도 앞섰다. 거주지 자체가 말 사육에 최적지이자 금속산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언젠가 기마술을 익혔다. 이로 인해 1인당 돌볼 수 있는 가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목축의 효율성도 증가한다.

 얌나야인의 확장은 쿠르간 분묘 문화의 확산과 인도유럽어의 확산을 가져왔다. 4900년전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며 기온이 하강한다. 얌나야 인은 초원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유럽지역을 장악한다. 이들은 동쪽으로도 이동하였는데 이 일파가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이룩한다. 얌나야인은 중앙아시아로 진추랳 신타슈타문화와 안드로노보 문화를 이룩했다. 안드로노보문화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 계곡으로 진출한다. 농경민이 이룩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문화가 기온하강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쉽게 진출한다. 그 후손들은 2800년전 서쪽 이란 고원도 침공한다. 그래서 이란의 경전 아베스타와 인도의 경전 라그베다는 모두 샨스크리트어로 내용도 매우 유사하다. 두 종교 모두 생명의 나무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을 숭배한다. 라그베다의 인드라 신은 초원지대의 초자연적 지배자다. 인도의 고대왕은 즉위하면 말희생제를 치뤘는데 말은 고온습윤한 인도에서 자생하기 어렵다. 이는 인도의 지배집단이 유목문화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3. 아시아로 향한 사피엔스

 아프리카에서 나와 동으로 향한 인간은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아라비아, 인도, 순다랜드, 사훌랜드의 순이다. 빙하기에 해안선이 내려가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되어 순다랜드라는 대륙을 형성했고, 호주와 뉴질랜드, 테즈매니아, 파푸아뉴기니가 모두 대륙으로 묵여 사훌랜드를 형성했다. 순다랜드에서 추운 북쪽으로 향한 이들이 티안유안인이 되었고, 동남아사이에 남은 집단이 호아민 집단이 된다. 

 티안유안인은 중국 남부와 북부, 만주, 몽골지역에 자리잡았다. 여기서 더 동으로 간 것이 일본의 조몬인이다. 이들은 동쪽에 격리되어 티안유안인과 유전적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일본 열도는 당시 숲이 많고 바다에 인접해 생산력이 높아 수렵채집민이면서 정착이 가능했다. 1만 6천년 전 조몬인은 토기를 사용했는데 이건 정주의 흔적이다. 2800년전 한반도 기원 농경민에 의해 크게 위축되는데 그래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한반도 기원 농경민이 90% 조몬인이 10% 정도다. 

 중국 북부의 아무르 강 유역의 티안유안계통에서 아무르강 집단이 분기된다. 이 집단에서 현대 동아시아인의 특징은 두꺼운 모발과 삽모양의 앞니, 땀샘 관련 유전자가 발견된다. 이 유전자는 추위에 적응하며 생겨난 것이며 기후가 더 한랭해지자 아무르집단이 한반도로 남하한다.  

 신석기 시대 농경으로 인구가 급증한다. 아무르강 집단은 수렵채집민이었고 황허는 동아시아 최초로 조와 기장을 작물화했다. 동아시아 유전자 구성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랴오허강은 반농반목문화였다. 이들은 기후가 한랭화하자 적극 남하하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형성에 기여한다. 양쯔강 중류는 세계 최초의 벼농사 지역이었다. 이들은 6-7천년전 해안에 도달했고 일부가 북으로 이동하여 황허와 섞이고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이들은 서로 썩여 동북아시아 현대인의 유전자에 기여한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 이후 동북아시아인은 중원, 랴오둥, 한반도로 이동한다. 양쯔강 하류에서 남으로 이동한 이들은 대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스터, 마다가스카르까지 이동한다. 


4. 빙기와 간빙기의 원인

 온난한 신생대 3기가 끝나고 260만년전 부터 기온이 하강하여 4기가 시작된다. 4기는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한다. 플라이스토세는 간방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했다. 이는 지구 공전궤도의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기, 자전축의 세차운동 때문이다.

 플라이스토세의 간빙기는 20히 이상이다. 마지막 빙기 후 도래한 간빙기가 지금의 홀로세다. 대략 70만년전부터 지구는 빙기 11만년 간빙기 1만년의 기후 사이클이 있었다. 홀로세는 1만 1700년전 시작했다 지금은 주기상 빙기가 와야할 시점이지만 지구 공전 궤도의 이심률이 낮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홀로세의 간빙기는 향후에도 수만년간 지속될 예정이다. 

 인간은 20만년전 출현했다. 13만년전 빙기가 끝났고, 홀로세 이전 간빙기인 미이안 간빙기가 시작되었고 이때 사하라가 습윤해져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략 10만년전, 7만 5천년전, 5만 5천년전, 3만년전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빙하기에도 열대 수렴대가 북쪽으로 확장했다. 

 11만년동안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2만 5천년 주기로 간방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1500년 주기의 아간빙기가 25차례 도래했는데 이는 대서양의 열염순환때문이다. 남대서양의 따뜻한 물은 고위도로 가서 한랭한 지역을 덥힌다. 그리고 동시에 이동하며 편서풍과 태양복사로 증발이 많아져 염도가 증가해 수온이 낮아지고 밀도가 높아져 심해로 하강한다. 그린란드 부근에서 하강해 다시 남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아간빙기가 오면 빙하가 녹아 담수가 대량 유입되어 대서양 고위도에서 물이 심해로 하강하지 않아 열염순환이 약화된다. 그러면 북반구가 추워져 빙하가 증가하고 다시 담수 유입이 줄어 염원순환은 강화된다. 이 반복이 아간빙기의 주기원인이다.

 홀로세의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적도태평양 해수온도의 변화다. 적도 서태평양은 강력한 무역풍으로 항상 따뜻한 바닷물이 몰려든다. 하지만 무역풍이 약해지면 기온이 내려가며 바닷물이 북과 동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서태평양 해수 온도가 하강하여 인도네시아와 호주 일대에 가뭄과 산불이 증가한다. 동태평양은 기온이 상승해 홍수가 나는데 이것을 엘니뇨라 한다. 4-7년 주기이며 아기 예수라는 뜻이다. 이는 성탄절 즈음해 이 현상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홀로세 후기 400-60년 주기로 서태평양 온도가 내려갔는데 그러면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여러 지역이 추워진다.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태양 흑점변화다. 태양 표면 흑점수가 늘면 태양에너지가 강해지는데 이 흑점 주기는 1년이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태양활동의 변화가 사실상 열염순환과 장주기 엘니뇨의 원인이라 본다. 


5. 홀로세의 기후 변화와 문명

 8200년전 갑자기 많은 담수가 대서양에 유입되어 열염순환 교란으로 기온이 3.3도나 내려가 단기 한랭기가 도래한다.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많은 수렵집단이 남하한다. 하지만 8000년전은 기후 최적기로 고위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무려 3-4도, 중위도는 1-2도 저위도는 비슷하게 기온이 올랐다. 온난화의 영향은 항상 고위도에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시기 전세계에 초기 문명이 많이 나타난다. 

 황허강 이북에는 츠산문화가 있었고 7천년전에는 양샤오 문화가 있었다. 랴오허강은 싱릉와 문화가 있었다가 6700년전 훙산문화가 생긴다. 훙사문화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다르고 옥을 이용한 공예품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유목이나 목축 기반임에도 계급이 분화했음을 의미한다. 이 신석기 시대 훙산문화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현대 한국인이다.  

 고조선은 시기상 훙산문화보다는 샤자덴 상층-하층 문화와 시기적으로 관련한다. 4200-3700년전 가뭄과 추위로 사람들은 괜찮은 환경으로 밀집했고 그러면서 문화집단이 생겨난다. 

 8200년전 외에도 4200년전에도 기상 이변이 있었다. 이는 엘니뇨 때문으로 동북아시아의 기후가 건조해졌다. 그래서 지구 상의 여러 문명이 붕괴한다. 아카드 문명, 나일강 고왕국, 인더스 하라파, 중국 룽산문화, 양쯔강 하류 저장성 량주 문화 등이 붕괴했다 기후가 한랭해지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서식지의 악화로 인구가 살기 좋은 곳으로 유입되어 갈등이 유발된다. 이를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 엘니뇨는 400-600년 주기로 이 시기마다 여러 문명이 붕괴했다.

4200-3900년전 세계 여러 문명 붕괴

3700년전 이집트 중왕국 붕괴

2800-27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2300년전 한반도 벼농사 문화 쇠퇴

1700년전 한제국 멸망, 삼국시대 도래

1200년전 멕시코 테오티우칸 문명 멸망

600년전 유라시아 흑사병 유행


6. 한반도의 인구 유입

 한반도에는 대략 5500년 전 부터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격은 아니고 수렵채집의 보조수단이었다. 3000년전에야 정주 농경이 본격화 하였다. 안정적 기후로 숲의 생산성이 높고 삼면이 바다라 어패류가 많았다. 3700-3200년전 외부에서 농경 집단이 들어온 후 농경이 본격화한다. 4천년전 양쯔강 량주문화와 황허강 중산 문화 모두 기후변화로 쇠퇴한다. 이들은 동해안으로 이주해 혼합되고 산둥반도, 랴오둥, 한반도 남부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북방 유목민이 차지한다. 기후가 나빠질때마다 북방민은 한반도로 남하하였고 이들은 선진문화도 같이 전파한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토기 사용이 가장 늦을 정도로 고대인이 선호하는 지역은 아니었다. 산지가 많았고,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기온이 지나치게 한랭화하면 남하하며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왔다. 홀로세 후기가 되면 동아시아 전역으로 농경이 확대되며 인구 압박으로 남쪽을 향한 갈망이 커졌는데 이러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도 본격적으로 선택 된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랴오허 지역의 인구의 영향을 많아 받았는데 이 지역은 특히 한랭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기후가 악화될때마다 이 지역 인구가 남쪽으로 이동하며 한반도로도 향한 것으로 보인다. 3200년전쯤 한반도 금강 유역의 송국리 문화는 이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의 기후는 3600년 전부터 습윤해졌고 때 마침 전파된 벼농경 덕분에 한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민무늬 토기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는 2800년전 전성기였다가 차츰 쇠퇴하여 2300년전 거의 소멸한다. 이들이 일본 규슈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연다. 한반도는 송국리 문화가 사라져 무주공산이다 다시 북방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빈틈을 채우게 된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유전적 유사성이 높음에도 언어가 전혀 다른데 이는 송국리 문화 때문으로 보인다. 농경민은 송국리 문화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남아 그들의 언어를 조성했고, 한반도에는 이들이 거의 사라져 새로운 반농반목민이 언어를 형성한 것이다. 

 2800년전에서 시작되어 5-600년 지속된 저온기를 철기 저온기라 한다. 이 때 서유라시아에서는 스키타이가 대대적으로 이동하고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한반도는 벼농사가 쇠퇴하고 북방민이 유입하고 토착민과 갈등한다. 이후 200-300년간이 로마 온난기다. 로마는 전성기를 맞고 중국은 한이 들어선다. 이후 1-100년간 태양 흑점수가 감소해 혼란기가 찾아오고 100-200년에는 흑점수가 증가해 로마는 5현제 시기가 온다. 200-300년은 다시 흑점수가 감소해 대 혼란기가 오고 중국은 삼국시대를 맞는다. 374-468년은 흑점수가 뚜렷히 감소해 기온이 내려갔는데 이 시기가 훈족이 이동한 시기이며 게르만의 대대적 이동을 초래하여 로마멸망의 원인이 된다. 

 한반도는 4세기 후반 부터 기온이 하락했는데 420년이 가장 기온이 낮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천도는 427년인데 기후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주된 Y염색체는 C2(15%아무르), D(2%조몬), N(5%훙산), O1b2(32%샤자덴), O2(40%), Q(2%)다. 역시 샤자덴의 영향이 가장 강함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큰 변화가 없다. 한국인과 유전적 조성이 가장 비슷한 것은 역시 북중국인이다. 

 일본은 야요이 문화에 이어 다시 한반도 도래인이 들어가 야마토 문화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우리와 조상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언어는 일본 야요이 시대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지금의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7. 기후 변화와 문명의 쇠퇴

 책은 기후의 주기적 한랭화와 문명의 쇠퇴를 강조한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정주여건이 좋으면 인구를 불린다. 하지만 기후가 안좋아지면 인구 압박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즉, 인간 이주와 확장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후의 쇠퇴는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다. 기후가 좋으면 각 문명의 인구가 늘고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지만 그 상태에서 기후가 나빠지면 생산성이 악화하여 인구 부양이 힘들고 갈등이 생긴다. 특히 영양상태가 나빠져 전염병이 창궐하기 쉽고, 외부인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침투하고, 사회갈등이 심해져 문명이 붕괴하기 쉽상이다. 

 4200년전은 매우 한랭했다. 이후 1000년마다 기온이 상승하는데 3400-2800년은 청동기 최적기로 미케니, 히타이트, 이집트 신왕국이 전성기였다. 3200년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침략해온다. 2800-2300년전은 철기 저온기로 이 기시는 축의 시대다. 세계 10개의 종교가 이 때 탄생하는데 기온 저하로 인한 식량부족과 사회혼란이 종교의 도래와 관련이 깊다. 철기 저온기에는 게르만이 남부로 내려오고 스키타이는 서부로 이동했으며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2250-1600년전은 로마 온난기로 로마의 전성기, 중국은 한이 융성했다. 이후 중세 저온기가 오며 게르만 대이동이 일어나고, 훈족이 이동했으며 중국은 삼국시대가 된다. 이시기 한국의 삼국도 쇠퇴하였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다. 반면 아라비아는 강수량이 증가하여 초지가 많아져 전투와 상업에 필수적인 낙타를 많이 키울 수 있었고 쇠약해진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세력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서기 800-1200년은 중세 온난기로 중국은 송이 전성기였고 고려도 전성기를 맞이한다. 13세기는 다시 기온이 하강했고 몽골의 침입과 쇠퇴기가 있었고, 1280-1350년에는 소빙기가 찾아와 흑사병이 창궐했다. 1620-1720년에도 한랭기가 찾아왔는데 당시에는 30년전쟁으로 800만이 사망했으며 한반도에는 경신대기근이 찾아온다. 또한 명청 교체가 일어났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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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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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한국 정치가 매우 암울한 시절에 나온 책이다. 10년 정도 전으로 당시 대통령은 탄핵 당한 박근혜였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고, 통진당이 해산되었으며 국정 농단 사건은 아직 일어나기 전의 상황이다. 저자 한홍구는 역사가로 세월호 사건과 통진당 해산을 바라보며 한국 보수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보기에 친일반공세력으로 시작하여 독재정권과 결탁한 한국 보수의 탄생은 소위 세월호 사건과 통진당 해산 사건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는 이런 시선으로 한국 보수가 과거 친일세력에서 한국 전쟁을 이용해 반공세력으로 탈바꿈하고 이후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 왔는지 조목조목 서술한다. 그리고 이들이 매우 무책임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보수에겐 뼈아프겠지만 작금의 현실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보수정권이 배출한 대통령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윤석렬이다. 김영삼을 제외한다면 이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다. (사실 김영삼은 오랜 야권인사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보수쪽에 붙었기에 정통 보수 세력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여튼 이들의 공통점은 범법자라는 것이다. 노태우 이전은 독재자 및 그 협력자로 헌정 질서를 부정선거, 쿠데타 등으로 파괴했고 노태우 이후로는 모두 징역 10년 이상의 중범죄를 저질렀다. 보수 세력에서 이런 대통령들만이 배출된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적어도 그 정당에 민주주의를 중시하고 수호하려는 철학과 시스템이 부재하다고 봐야 한다. 책에 나온 그들의 역사로 들어가 보자.


1. 한국 전쟁

 광복 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파를 때려 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택을 받은 이승만은 이런 친일 세력을 자신의 정권 파트너로 선택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떤 정당성도 없고 지탄을 받는 상황이었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지며 상황은 급변한다. 이들은 이 전쟁을 이용해 적극적인 반공세력으로 변모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할 기회로 사용한다. 민족반역자에서 민족 영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개전하자 국군은 형편없이 밀리면서도 거짓 승전보를 전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무려 대구까지 피신하면서도 마치 자신은 서울에 있는 것 같은 방송을 녹음한다. 상당수 시민들이 이것을 믿고 피란하지 않았다 서울에 묶이게 되다. 당시 서울시민은 무려 100만이었다. 국군은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자신들의 주요 인사들이 피신하자 사람들이 건너고 있음에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수백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정권은 비난일 일자 명령을 따랐을 뿐인 대령 최창식을 처형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수복까지 2주가 걸렸다. 핵심 친북세력은 모두 서울을 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도망갔던 도강파는 어쩔수 없이 남았던 잔류파를 부역자로 몰아 처벌한다. 이런 부역자 처벌은 일부 극우세력에 좋은 기회였다. 살인, 고문, 재산약탈, 부녀자 겁탈이 자행되었다. 한국 경찰사 제 2권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 3개월 간 부역자 검거 15만 3825명, 자수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이 부역자 처지가 되었다. 이들과 그 가족은 이후 두고두고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받게 된다. 부역자 처벌에 앞장선 것은 친일민족반역자에서 애국 반공투사로 변신한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같은 이들이었다.

 집권층은 한국 전쟁에서 적들이 물러간 후 부역자 처벌에만 열을 올렸지 정작 전쟁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그의 큰 아들을 한국 전쟁에 참전시켰다 잃었다. 그 아들의 무덤은 북한에 있는데 수만의 중국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그 아들만 귀환시킬 수 없단 이유였다. 또한 미국장성의 아들 중 한국전에 참전한 자는 145명으로 이들 중 무려 35명이 전사했다. 어떤 특권도 없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전쟁 당시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의 참전하여 군인으로 아들이 사망했다는 이렇다할 자료는 없다. 


2. 간첩 사건

 독재정권은 정당성이 없기에 태생적으로 취약하며 자주 흔들린다. 그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것이 반공몰이였고 그 수단이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방첩당국이 적발한 간첩은 무려 4500명이다. 

 한국전쟁 이후 실제 대남 간첩은 많았다. 북한의 직파 간첩은 1950년대 90.9%, 1960년대 75.9%, 1970년대 42.1%, 1980년대 27.9%로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전쟁 직후엔 상당히 많았다. 1970년 이후에는 간첩의 수는 상당히 줄었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다. 1950년대만 해도 국경은 허술했고, 남북한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고 지역마다 피란민과 다른 지역의 사람이 섞여 외부인이 쉽사리 의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가 달라지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진다. 남북한의 차이가 책으로 배우기 어려울 만큼 커졌고, 지역사회는 안정되어 외부인은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간첩은 교육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적발이 되며 그 효율성은 떨어져갔다. 북한이 간첩을 줄이게 된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남한의 상황은 반대였다. 1950-60년대 대량이 남파간첩이 들어서며 방첩조직은 크게 비대화하였다. 이들은 조직의 유지를 위해 간첩이 필요했으며 정권은 안정을 위해 간첩이 필요했다. 양쪽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요 시국마다 간첩사건은 조작된다. 1950-60년대의 간첩은 진짜 간첩이었던 반면 1970-80년대가 되자 간첩은 재일동포나 납북어부, 월북자 가족등의 조작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가 간첩이 된다. 1990년대에는 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은 운동권 출신 그리고 이후에는 탈북자가 간첩 조작의 대상이 된다. 

 간첩조작 사건에는 검사와 경찰, 사법부의 협조가 잇따랐다. 일반형사사건은 경찰10일 검찰은 20일 수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간첩사건에는 내란죄나 외환죄에도 없는 특별형사소송규정이 국보법에 적용되어 경찰이나 안기부 20일 검찰30-50일 합법 구금이 가능했고 이 기간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상당기간 구금하고 실제로는 서류를 합법적으로 조작했다. 

 또한 비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부분의 간첩은 누구나 아는 사회적 사안을 누설한 거승로 기밀누설죄를 적용받았는데 1997년에서야 헌재가 비공지성과 실질비성을 갖춰야 한다고 엄격히 규정하기 전까지 비밀을 이현령비현령수준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이라더라 짜장면이 싸고 맛있다라는 말까지 기밀이었다. 

 고문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마치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간첩사건에서는 자백이 증거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간첩사건은 재일동포 관련 경우 외국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 경우 영사의 증명이 또 다른 증거의 왕이었다. 영사는 형사 업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희안하게 그러했다. 당시의 법관들은 이 모든 정황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증거미비에도 많은 억울한 이들을 간첩으로 판결했다.


3. 진보적인 제헌헌법

 남한의 제헌헌법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매우 진보적이다. 제헌헌법 18조는 노동자의 권리규정이다. 기존의 노동 3법외에도 4번째 권리로 이익 균점의 권리를 보장했다. 이는 기업 운영이 이득을 기업인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제헌헌법은 당시 좌파나 중도층이 만든 것이 아닌 이승만을 비롯한 보수 우경세력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이다. 제헌헌법 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저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 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적 자유는 위의 이념실현을 위해 제한되는 것이었다.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을 국유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7조는 중요하나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서을 가진 기업은 공영이나 국유로 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사실상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여기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있다. 일단 광복 당시 한반도 내의 사업시설을 포함한 자본의 94%가 일제가 남긴 적산이었다. 이를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불하하는 것은 민중의 적대감을 유발하는 것이었고 마땅히 조선 사람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 했다. 다음은 당시만 해도 한국이 농업국가로 자본이나 기득계층이 이렇다할 산업 기반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되어야 그들이 마땅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북한의 상황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먼저 더 강한 토기개혁에 앞장섰다. 그렇기에 남한에서도 지주 계층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체제유지를 위해 강제 토지수용을 통한 토지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4. 전시작전권

 한국 전쟁이 끝난지 70년이 넘었고 한국의 국력과 국방력이 세계적 수준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한국의 전시작전권은 미군에 있다. 그래서 수도방위사령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대가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한국이 작전권의 통제를 받은 것은 광복군 때부터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제약과 지원을 받았다. 중국정부는 이른 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제정하여 광복군에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위를 받으며 임시정부가 아닌 중국 최고 통수부의 유일한 군령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한다. 임시정부는 궁색한 상황에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으나 강한 내부 반발에 부딪힌다. 그리고 3년에 걸친 교섭 끝에 중국 정부는 1944년 9월 마침내 9개 준승 폐기를 결정한다.

 전작권 이양 논의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있었다. 당시 파월 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은 베트남 전쟁이 패배할 전쟁이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전 지휘권을 강하게 요구한다. 당시 한국군 이외의 다른 우방국이 작전권이 있었기에 한국이 미국의 용병부대라고 국제적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남베트남군조자 작전권이 있었기에 이런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주월군이 작전권을 획득하자 한국군도 전작권을 요구한다. 특히 한국의 전작권은 한국 전쟁 당시 국회비준 조차 없이 이승만의 편지 한장으로 이양된 상태였기에 법적 문제도 있었다. 1976년 미국의 카터가 당선되자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 한다. 중공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며 미군은 한국에 더 이상 유엔사령부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대신 설치된 것이 한미연합사령부다. 

 전시작전권은 미 오마바 정부 때 양도받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이를 포기했고, 이제는 미중 갈등이 장기화하며 시대적으로 양도받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다. 이번 윤석렬의 친위 쿠데타에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사전통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상한 상황이다. 비록 불법적 반란이긴 하나 이것이 다른 나라에 미리 보고하고 간섭까지 당할 상황일까. 미국이 이렇게 대놓고 짜증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전작권때문이다. 한국군의 움직임은 전작권이 미국에 있기에 그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국보수는 박근혜 탄핵 때 결국 그 강을 건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탄핵 동조세력과 탄핵 반대 세력 중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탄핵 반대세력이었다. 이 때 한국보수는 체질개선을 하지 못했고 그것이 이어져 지금의 비극으로 이어졌단 생각이다 이번에도 대통령 탄핵을 두고 보수는 갈라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보수 지지층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이번엔 올바른 보수 세력을 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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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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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 독일 히틀러의 나치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획득했다. 이 정치적 결과의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다.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군인과 민간인 수천 만이 죽었다. 그리고 그 중 전쟁 당사자도 아닌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은 무려 수백 만이 학살 당했다. 우린 대개 이것을 독일인이 자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대인의 학살에는 상당 부분 현지인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다. 책 '블랙 어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 같은 입체적인 분석이 담긴 책이다. 우선 히틀러에 대해 언급한다.


1. 히틀러의 세계관

 히틀러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의 하나로 자연의 풍요를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차지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본성에 반하는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겐 약자인 다른 이들의 생존을 허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다. 그는 낙원을 창조의 조화가 아니라 인류의 투쟁으로 생각했고 이는 기독교적 열명을 생물학의 리얼리즘과 결합한 것이다. 

 그는 인간 종족이 생물종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여전히 하등종족에서 고등종족들이 진화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등종족과 고등종족이 교배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고, 종족투쟁으로 유사종족이 짝을 이루고 다른 열등 종족은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국가나 민족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에게 2차대전은 독일 국가의 승리라기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법칙을 통과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는 만약 독일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독일 민족이 약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왜곡된 투쟁적 자연관을 가진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였다. 히틀러에게 인간의 원죄는 정신과 영혼의 범죄가 아니라 다른 인간 종족을 투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하는 동료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지구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목적은 자연 투쟁이 아닌 인간의 질서로 도치시키는 초자연적 관념을 생성해 냈는데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그런 일련의 것들이었다. 

 히틀러에게 윤리학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며 유일한 도덕이라 할 만한 것을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종족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비종족적인 것은 모두 유대적인 것이 되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도구가 된다. 이 보편 관념은 비유대인의 정신에 침투하는데 이것은 그 종족 공동체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어 유대인을 이롭게 할 뿐이었다. 

 이런 유대인의 왜곡으로 인해 강자가 약자를 굶겨 죽이는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오히려 최적자가 희생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유대인이 존재하는 한 독일인 같은 강자들은 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차 대전 때 독일이 패배한 것도 세상의 전체구조에서 유대인에 의해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만약 1차대전 개전 초기 독일이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제거했다면 독일은 패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독일의 지배를 위한 투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열등한 종족을 굶겨 죽여 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다. 강자로써 독일인은 다른 열등종족을 지배해야 하며 그들을 유대인에게서도 해방시켜야 한다. 즉, 해당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히틀러의 정책은 식민주의이면서도 반식민주의의 모순을 띄게 된다. 

 히틀러는 과학기술도 부정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과도한 발전은 인간의 생존력을 지나치게 높여 적자생존이라는 투쟁의 결과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과학기술의 발전은 종족투쟁에서 종족의 우월성을 보인다는 면에서만 유효했다. 히틀러는 농학을 부정했는데 그것이 자연에 개입하여 더 많은 땅을 취하지 않고서도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하여 투쟁 논리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과학은 한계가 분명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잔혹한 자연을 대면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그들을 자연이 가혹하게 작용하는 이질적인 곳으로 보내면 정글의 법칙에 굴복할 수 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히틀러에게 그곳은 시베리아 였으며 실제로 히틀러는 초기 유대인을 학살하기 보다는 그런 곳으로 보내버려서 치워버리려는 생각을 했었다.

 유럽에 대한 히틀러의 세계관도 독특하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인정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독일과 피를 나눈 우수종족이고 대제국의 건설자로 이를 입증했다. 그는 세계를 구분했는데 우랄산맥까지의 유럽대륙의 건설은 영국과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영미와의 아마겟돈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독일은 1차 대전 당시 영국에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히틀러는 이것이 식량을 확보하여 남에게 주지 않을 능력으로 일종의 지배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넓은 유럽 대제국을 확보하는게 우선 과제였다. 

 유럽제국의 건설로 눈을 돌린데는 독일이 차지할만한 식민지가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관련한다. 독일은 강했으나 늦게 통일한 국가로 남은 땅은 유럽 뿐이었다. 하지만 유럽대륙은 이미 꽉 찼었는데 인종주의 관념이 그 해결책이었다. 이는 기존 유럽제국의 시각으로 이미 원주민이 있음에도 그들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겐 이 대상이 동유럽인이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벨라루스인 등이다. 러시아 슬라브 족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이런 열등종족들은 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점령할 때 해당 국가를 철저히 파괴한다. 마치 전에 없었던 것처럼. 이들이 현재 만든 정부는 환영으로 유대인이 만든 보편관념에 의한 껍데기일 뿐이다.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독일인 상층계급과 지식인이 만든 창조물이었다. 우크라이나 인은 더 우습게 보아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7가지 정책을 추진한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생성, 정복지를 무정부 국가 상태로, 제도들의 이중 교배,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다. 


2. 소련

 독일은 다른 제국에서 토지를 강탈하는 재식민적 경향을 , 폴란드는 다른 제국들을 해방하여 그 식민의 이탈에 기여하는 탈식민적 경향을 띄었다면 소련은 내부식민국가를 지향했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토착민에게 쓴 정책을 자국민에게 쓰고 싶어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단절되었다. 하지만 체제 경쟁으로 더 성공해야 했기에 유일한 희망은 인적자본을 포함하여 소련 국경안의 자본을 잘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부식민화의 핵심은 농업집단화로 사유지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부는 농업 노동자, 나머지는 도시나 수용소 노동자가 되었다. 이는 거센 저항과 대규모의 기아를 초래한다. 특히 우크라나이 지역에서는 대량기아가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하 현지인들은 소련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내부에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폴란드는 이런 기아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원이나 비판을 하기는 커녕 자국의 이익을 위해 1933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폴란드에 대해서도 상당한 배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인들에게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그 체제를 부수는 것이 희망이 된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히틀렁게 상당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 인들을 열등종족으로 보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3. 폴란드

 폴란드는 1차대전의 결과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지위는 크게 불안했다. 서로는 독일이 동으로는 소련이 있었다. 폴란드는 균형외교를 추구하며 소련과 독일 양자와 모두 불가침 조약을 맞는다. 동상이몽이었다. 이 상호간 불가침 조약에 대해 폴란드는 현상유지에 대한 양국의 약속이라 믿었고, 독일은 폴란드가 소련과의 군사행동 협력에 나섰다고 보았으며, 소련은 폴란드가 소련의 협력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련은 1939년까지 자국내 폴란드 인들을 모두 정화해버린다. 폴란드는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이렇다할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히틀러는 폴란드 인을 우습게 보았음에도 2차대전 전까지 폴란드를 협력자로 삼으려 했다. 이는 1차대전의 아픔 때문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서로는 프랑스 동으로는 러시아를 모두 상대해 패퇴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의 지정학 때문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협력자로 하여 동쪽의 안정을 도모하고 소련을 같이 상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현상 유지를 위한 폴란드에겐 위험천만한 생각으로 그들은 이런 독일의 제안을 계속하여 거절한다. 폴란드에게도 독일처럼 반유대감정이 있었다. 폴란드내 유대인은 3백만으로 가장 큰 유럽 내 유대인의 터전이었다. 그만큼 자국내 유대인의 영향력도 컸고 이는 대공황 이후 더욱 강해진다. 


4. 오스트리아

 인구 5300만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1차대전으로 붕괴한다. 제국은 여러 개로 쪼개졌는데 오스트리아는 수도 빈과 독일어권 지역으로 인구 700만의 소국이었다. 제국의 가장 부유한 곳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광대한 국내시장도 붕괴하였다. 그래서 신생 오스트리아 인은 정체성이 없었고 자신을 독일인이라 생각하였다. 

 베르사유조약은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 금지를 명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싫어하면서도 통합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대공황 때 농업국인 오스트리아는 상당한 고난을 겪었지만 독일은 이를 먼저 극복하고 오스트리아 노동자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에 오스트리아는 큰 감명을 얻는다. 

 독일은 군사적 팽창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린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대공황으로 인한 보수적 경제 정책으로 외환과 금 보유가 충실했다. 이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오스트리아는 동맹인 이탈리아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슈슈니크 정권은 히틀러의 침공협박에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표명함으로써 자연스레 독일에 합병된다.  

 이후의 일은 놀랍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홍위병이 되어 나치의 구호를 외치고 유대인을 폭행하고 찾아내어 거리에 무릎을 꿇리고 청소시키는 망신주기를 시킨다. 재산도 강탈하는데 이 충격으로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은 수백명이 자살한다. 


5.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티아는 독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산악지대를 베르사유조약에서 요구한다. 이는 승인되었고, 그들은 다민족국으로 자유주의 헌법을 만든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부유한 지역을 차지해 유럽 최고의 군수산업국이 된다. 

 히틀러는 이를 탐내 체코 침공을 선언한다. 1938년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이 침공을 승인하여 체코가 독일에 영토를 이양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체코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국가가 파괴되고 재산권 상실의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이는 실현되어 독일은 체코 내 금융, 산업 자산의 1/3을 헐값에 탈취하다. 


6. 폴란드 합병

1938년 11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상당부분을 병합한다. 오스트리아의 재정과 체코의 무기 여기에 900만의 주민이 제3제국에 추가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의 영토 양도를 원했고 그 대가로 소련과의 전쟁, 폴란드내 유대인 문제 해결, 우크라이나 지역 영토를 약속한다. 폴란드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이를 거부했고,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 폴란드를 끌어들이려는 지난 5년간의 노력을 뒤로 하고 침공을 결정한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20일 소련과 리벤트로프-밀로로프 협정을 맺는다.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를 소련과 독일이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서부는 독일로 동부는 소련으로 쪼개지게 된다. 히틀러는 서부 폴란드에서 인텔리를 몰살한다. 그리고 1941년 유대인은 게토에 수용한다. 히틀러는 이들을 프랑스를 격파한 후 그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격파했으나 해상을 장악한 영국에 의해 대규모 해상운송이 불가능했다. 이에 선회하여 소련을 침공해 유대인을 보내버릴 장소로 시베리아를 선정한다. 

 동부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의해 거의 30만 폴란드 시민이 굴라크로 추방되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폴란드 장교단이 위협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군사, 교육, 정신적 토대였다. 그래서 모두 제거한다. 폴란드 남자가 사살되면 그 가족은 추방되거나 착취되었다. 소련은 민족차별을 범죄로 규정한 나라로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범죄였다. 하지만 소련의 반자본주의적 행태가 유대인을 괴롭힌다. 소련은 폴란드 통화를 폐지시켜 유대인의 재산을 소멸시켰고, 이로써 채무도 같이 소멸되어 주요 채권자인 유대인에 큰 손실을 안겼다.  


7. 홀로코스트

 독일이 동유럽을 병합하고 침공하며 히틀러가 사전에 국내에 조직했던 특수임무단이 위력을 발하게 된다. 이들은 1941년 독일 군경과 함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민족주의자와 협력하게 된다. 이 집단들은 6개월간 같이 집단 학살 기술을 개발한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대량학살을 억압당한 민족들이 추정상의 지배자인 유대인에 터뜨린 정의로운 분노로 포장했다. 하지만 동유럽 현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히틀러의 생각과는 다르게 종족적 동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기였고 극히 일부에게만 향했다. 

 이에 당황한 히틀러는 과거 소련에 점령당했다 독일에 점령당한 이 이중점령지에서 소련에 점령된 경험을 이웃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꾸려 한다. 현지인들 역시 소련 점령하에서 협력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존과 죄를 씻기 위해 독일에 협력한다. 마치 조선에서 친일파가 미국에 빠르게 부역한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은 유대볼셰비즘에 입각해 공산주의는 결국 유대인의 작품이고 유대인을 공산주의자로 정의하면서 사실상 소련 부역자들을 대개 용서한다. 그 결과 독일과 현지인의 합작으로 대량학살이 가능해지게 된다. 

 폴란드에서는 지역에 따라 학살의 양상이 크게 달랐다. 폴란드 북동부는 유대인 학살이 적었던 반면 남동부에서는 학살이 많았다. 남동부에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들은 국가설립을 위해 나치에 기대하는 것이 많았기에 협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현지인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을 죽임으로써 정치적 사면을 받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유대인이 사라짐으로써 그 재산의 강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지식 계층과 군을 몰살한다. 그리고 이런 강압적 분위기에서 상당수 현지인들이 소련에 협력하게 되었으며 재산상의 손실도 컸다. 때문에 후에 독일이 점령한 이런 이중 점령지에서는 소련의 재산 몰수와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결합으로 비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일만한 물질적 유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점령이 주민의 상당수는 나치의 기대와 다르게 분별없는 반 유대주의자라 종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어디나 소련에 적극 협력한 경찰이나 의용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수만에 이르렀다. 

 이런 이중점령지에서는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해 유대인의 사망률이 무려 97%로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놀랍게도 이는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소련의 영토를 상당히 많이 점령하는데 이들은 상당히 나치에 협력적이었다. 이들은 공산정책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기아를 겪었으며 소수 민족의 경우는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소련의 정책은 내부간의 고발 문화를 권장하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소련시민에게 나치에 대한 협력은 소련정책 협력이라는 범죄에 대한 손쉬운 세탁이었다. 그리고 소련시민들은 나중에 소련 세력이 회복하자 바로 다시 판을 바꾸게 되고 대조국 전쟁으로 자신들이 유대인 이웃을 학살한 행위를 덮어버리게 된다. 1941년말까지 나치가 소련 시민의 협조를 받아 소련 점령지에서 학살한 유대인의 수는 100만에 가깝다.

 독일의 수용소는 처음엔 학살장소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정문의 문구처럼 이 장소는 강제 노역의 장소였다. 독일에게 사로잡힌 유대인의 운명은 독일의 사정에 따라 달랐는데 노동력이 절실할 때면 잠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노동력보다 식량이 절실할 때면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지만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장소는 트레블린카, 베우제츠, 소비부르, 헤움노다. 

 혹자들은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전쟁 중 학살을 몰랐다고 하지만 당시 학살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독일 내에서 학살이 처음부터 정해졌던게 아닌 만큼 수차례의 정책적 토론이 있었고, 전장과 수용소에서 학살에 참여한 이들의 편지가 가정으로 송부되었다. 심지어 일부 가족은 수용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은 거의 전체적으로 학살에 대한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인지했다.

 독일의 학살은 3가지 방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처음엔 구덩이 위에서 사살하였고, 나중엔 기차칸에 가두고 내연 기관의 배기가스를 투입하여 질식시켰고, 마지막은 가스실이었다. 가스실에서 사용한 시안화수소는 원래 폴란드인 수감자 수용소 훈증에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엔 소련 포로 살해에 그리고 유대인 살해로 이어졌다. 

 유대인의 학살엔 국가파괴도 관련한다. 나치의 점령지중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학살은 쉽게 자행되었다. 반유대주의가 있었을 지언정 국가가 존속한 곳에서는 그 시민을 보호하는 기관과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덴마크와 에스토니아는 모두 나치에 점령당했는데 에스토니아는 사전에 소련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고 덴마크는 나치에만 점령당해 그렇지 않았다. 나치는 덴마크 국가 파괴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덴마크는 주권을 유지하며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은 동유럽에서 노동력 부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동부유럽은 2차 대전 당시 농업지대로 기계화는 없었고, 인력과 축력에 의한 노동집약적 농업이었다. 대공황의 강타로 시장에서 분리되어 자급자족적 농업이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 때 운송수단으로 수백만 마리의 말을 사용했으며 동유럽에서도 말을 마구 잡이로 징발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독일 내 노동력이 부족하자 처음엔 고용의 형태로 나중엔 징발과 강제의 형태로 동유럽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수백만의 동유럽 사람들이 독일로 끌려가게 되었으음로 동유럽의 농가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나치를 피해 돌아다니는 유대인 아이들은 노동력의 수단으로 구원의 손길을 얻기도 한다. 

 그외에도 결혼이나 결혼의 전망, 성적 욕구 등은 유대인에게 또 다른 생존의 기회가 되었다. 그 외에도 일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을 구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대인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였고, 반면 고발하면 부족한 식량상황에서 설탕과 소금, 보드카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근심걱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때문에 보호보다는 밀고가 보다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8. 미래의 홀로코스트

 히틀러는 생활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량학살로써 지구를 회복하겠다는 계획과 독일인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처럼 생활 수준이 삶과 혼동되면 부유한 사회가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더 가난한 사람을 공격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류는 이런 위기를 겪고 한다. 녹색 혁명이후 전 세계 식량은 안정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2010년 농산물 가격이 치솟자 중동에서는 항의 시위와 혁명, 민족 정화가 자행되었다. 때문에 장래의 식량 부족은 국가의 엘리트로 하여금 히틀러처럼 정치와 과학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지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 위기를 겪고 있다. 현재 1.5도가 상승한 상태가 이대로라면 금세기 안에 4도의 상승도 예측된다. 이런 기후 위기로 전례없는 폭풍이나 가뭄에 발생하는데 이는 기본적인 자원의 안전에 대한 예상을 뒤흔들게 되고 사람들은 이에 히틀러식의 정책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기후 위기는 세계적 문제이므로 세계적 해법을 요구하나, 일부 지역에서는 그 세계적인 적을 규정하는 것이 한 가지 확실한 해법이 된다.

 아프리카는 지금도 경작 가능한 토지와 식수가 부족하다. 하지만 허약한 소유권과 부패한 정권, 그리고 전 세계 미개간 토지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아시아 식량 안보의 핵심 계획이 되어 버렸다. 현재 중국은 일인당 경작지 공급이 세계 평균의 40%에 불과하고 이 마저도 연간 100헥타르씩 감소하고 있다. 중국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데 과거 중국 공산당은 대규모 기아와 경제적 풍유를 모두 가져온 바 있어 식량안보에 무척 민감하다. 그래서 중국은 아프리카를 자국의 식량 안보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식수도 마찬가지다 80억 인구중 10억은 생존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10억은 위생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한다. 중국의 일인당 물소비는 아직 세계 평균의 1/3에 불과하다. 중국인 다수가 의존하는 물은 빙하가 녹은 물이며 중국의 민물 절반과 지하수 상당수가 이미 오염으로 사용이 어렵다. 향후 온난화로 인한 물부족으로 중국을 물이 풍부한 시베리아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중동에서는 국가가 약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미국인과 영국인, 유럽인을 전 지구의 적으로 규정해왔다. 이들의 이런 반세계적 사고는 전 지구적인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에 용이하다. 중동에서 기후 위기 및 경제위기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위기가 발생하면 유대인은 손쉬운 희생양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위기의 해결책으로 의외로 국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런 저런 불만이 있어도 국가는 권리의 인정과 보증, 보호 역할을 하기에 이런 현상을 지역에서 방어한다. 또한 복지국가도 중시한다. 성공적 복지국가는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한 국가내 극우주의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낙후되는 불평등이 심한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꾸준한 투자도 방법이다. 히틀러는 과학을 부정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은 기후 위기 시대에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물부족은 해양담수화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으며 식량문제도 수직 농업이나 배양육 등의 문제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 저자는 연대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학습도 강조한다. 현재의 우리는 생각보다 히틀러로부터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가 연대하지 않고 특정 세력을 전 지구의 희생양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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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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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에게 조선은 애증의 나라가 아닐까 한다. 시기 상 가장 대한민국과 가장 인접한 나라라 정서적 공감과 이해가 상대적으로 강하고, 많은 기록이 있어 무수한 이야기 거리를 주기도 하며, 세종대왕인 이순신처럼 뛰어난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00년 전 거의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치욕적 망국을 기록했고, 성리학에 경도되어 실리보단 명분과 형식에 치우쳐 자주적인 면에서 아쉬움을 보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국과 관련하면 항상 세도정치 이전의 영정조 르네상스 시기가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은 개화시기에 국왕이 영정조였거나, 그 당시의 실학이 주류로 자리잡아 조선을 변화시켰다면 망국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무척 강하며, 정조와 함게 했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로 꾸준히 만들어져 사람들은 정조와 정약용 하면 매우 근대적이고 개방적이며, 상당히 지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란 이미지가 많이 생성되어 있다. 

 하지만 책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책을 보며 처음 알았는데 정조는 재위시절 문체반정이란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는 청의 전성기로 청을 통해 조선에 많은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명말 청초의 양명학이나 서학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정조는 놀랍게도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은 선비들의 문체가 정도를 벗어나 경박하고, 좋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정조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승들을 중심으로 경고하고, 몇몇 선비들은 심지어 실제 벌을 내리기도 했다.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지 않은가. 

 보수적인 측면에서는 다산도 마찬가지다. 다산의 대표적 저서는 목민 심서인데 여기서 다산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수령에게 강조한다. 소위 수령은 성리학에 밝으면서도 이호예병형공의 모든 지식에 통달하며, 윤리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빈해야 한다. 상당히 많은 메뉴얼을 수령에게 요구한는데 정말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형국이다.

 실학자 중 박지원은 정조 그리고 다산 정약용에 비해 주목도가 크게 적다. 정약용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많지만 박지원을 다룬 것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박지원을 알고 있는데 바로 역사 교과서에 그가 남긴 열하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제목만 알고 열하일기의 열하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열하는 북경 동북부에 있는 곳으로 청황제의 피서지였다. 박지원은 청황제의 팔순잔치를 축하하는 조선 사신단에 합류하여 북경을 갔다가 연경까지 들르게 되고 당시 경험한 문물을 남긴 것이 열하일기다. 당시 열하는 유목민의 문명과 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여러 나라의 사신단과 선물들이 얽혀 매우 국제적이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런 모든 것들이 흥미롭고 재미를 느낄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같은 실학자로 분류되나 매우 다르다. 일단 둘은 나이차가 상당하다. 연암 박지원이 거의 30이 되어서야 정약용이 태어난다. 한참 병아리인 셈이다. 다른 것은 나이 뿐만이 나이다. 박지원은 의외로 집안이 노론 정파 계열이다. 당시 집권 세력의 주류였던 셈이다. 반면 다산 정약용은 남인 출신이다. 이들은 정조 시절 등용되어 영수격인 체제공이 정승이 되며 전성기를 맞미나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천주교로 인해 공격 받아 몰락한다. 이런 배경과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성공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도 다르다. 연암은 나그네 혹은 유목민 같은 성격으로 평생을 변방을 떠돌았다. 벼슬에 대한 생각이 도통 없었다. 명성이 높아 정조가 은연 중 몇번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그 때마다 겉돌았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생활고에 시달려 어쩔수 없이 음서로 관직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때도 정조가 크게 쓰기 위해 과거를 보게 하려 했다. 그의 높은 학문적 경지와 노론의 중심이었던 집안 형편으로 보았을 때 필시 과거만 봐서 입격했다면 고속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걸 거부하고 적당히 외관직을 떠돈다. 반면 다산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항상 꿈꿨다. 다산은 일찍 성균관 태생이 되었으나 이후 대과에 붙는데는 무려 6년이 걸렸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중앙정계에 진출했고 관직도 높이 오를 수 있었다.

 둘은 인간 관계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연암은 그 특유의 수평적 성향으로 인해 관계도 그렇게 맺는다. 연암은 같이 풍류를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고, 여인이나 중인등 하층 계급과도 적극저긍로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다산은 다르다. 다산의 인간 관계는 주로 형제 집단이 많다. 둘은 다른 사람의 묘지명도 많이 썼는데 그것도 다르다. 연암은 여인이나 친구들의 묘지명을 주로 썼고, 묘지명은 하나 같이 짧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과 감정이 묻어난다. 반면 다산이 남긴 묘지명은 상당히 긴 편이다. 특히, 천주교로 인해 희생당한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을 상당히 남겼다. 

 학풍도 달랐다. 연암은 사상이 자유롭고 서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다양한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관료로 근무할때도 형식이나 겉치레를 중시하지 않았고 본질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저작을 많이 남기지도 않았지만 하나같이 짧고 핵심을 찌른다. 그리고 열하일기 같은 글에는 해학과 유머가 넘쳐난다. 열하를 방문했을 때, 청 사신이 티베트 승려를 만나는 것을 권장했는데 유학자입장인 사신단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암은 조선 사신이 이를 거부해 황제의 진로를 사게 되어 저먼 강남으로 유배되면 같이 온 마당에 본인도 동행하여 낯선 문물을 경험할 생각에 오히려 기뻐한다. 그는 이런 식이다. 하지만 다산은 다르다. 다산은 보수적이지만 성리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천주교에 빠져든다. 그는 중심과 질서를 향한 갈망이 있는데 천주교는 이런 그의 성향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정조와의 만남으로 서학을 정리한다. 그는 과거의 선진고경의 드높은 이상을 체득하고 그것을 경세치용에 쓰는 것을 이상적으로 삼았다. 다산은 백과사전적 인물이고 관직을 통해 현실정치를 오래 경험했기에 이상적 학문을 중심으로 경세치용을 위한 글을 매우 길고 많이 썼다. 그래서 다산은 연암과 다르게 무척 저술이 많다.

 이런 둘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정조에 대한 애정이다. 물론 정조에 대한 애정은 그의 죽음과 운명을 거의 같이 한 다산이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연암도 호학 군주였던 정조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문체반정의 용의자로 의심 받았음에도 말이다. 또한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것도 같은 점이다. 연암은 항상 주변인이었기에 학문적으로 힘쓸 시기가 많았다. 하지만 현직에서 꾸준히 일한 다산은 정조가 죽어서 고초를 당하고 집안이 몰락하고 나서야 학문적으로 꽃을 피운다. 다산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다산초당을 만들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주요 저작들을 저술한다. 다산은 강진에서 거의 18년만에 유배가 해제되고 이후에는 비슷한 시기를 더 살았으나 묘하게도 유배 이후엔 거의 저술이 없다. 거칠고 모진 유배와 세상과의 단절이 오히려 그에게 학문적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어보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생각했었던 다산과 정조는 보수적이었고, 별 관심이 없었던 연암이 보다 진보적이었다. 이 둘을 삶과 학문, 성격적인 측면에서 비교한 이 책은 무척 재미있었다. 다만 책이 다소 두꺼운 편이었는데 비슷한 내용이 다소 다른 맥락에서 변주되는 느낌이어서 좀 아쉬운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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