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은 1887년 벨라루스(백러시아)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거의 100년을 생존해 현대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넘어야 했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남겨진 다양한 작품이 많고 살아생전 명성도 얻은 화가이다. 샤갈이 소년기를 보낸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은 러시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차별받는 가난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청어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9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샤갈은 유대인은 갈 수 없는 공립학교를 어머니의 뇌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샤갈은 이 학교에서 또래의 유대인 소년과 달리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러시아어로 말하며 일반적 러시아인의 삶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샤갈은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 공동체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추억, 유대 정통, 종교에 대한 영성이 들어있다.

 

샤갈은 20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즈반체바학교에 입학한다. 가난했던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1910년 드디어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시대에 활동한 피카소의 입체파와 인상파의 기법을 받아들이지만 점차 독자적인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작업을 시도한다.



-‘아폴리네르 예찬

 

파리에서 만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그림 세계를 초자연적이라고 했고 뒤에 그것은 초현실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하나의 사조가 된다. 아폴리네르는 물심양면으로 샤갈을 도왔고 샤갈은 그런 아폴리네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준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샤갈의 거의 모든 그림에는 시적(詩的)인 의미가 들어 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 샤갈은 러시아에서 활동했고,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한다. 벨라는 샤갈의 뮤즈였고 그녀 역시 글을 쓰는 작가였다. 샤갈은 여러 형태와 푸른 색깔의 그림 등에 벨라를 그려 넣어 그의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샤갈은 벨라와 35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샤갈은 혁명 시기의 러시아에서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활동하지는 못했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샤갈의 시적 은유와 이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 온 샤갈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1931년에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한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샤갈은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극적으로 탈출해 뉴욕에 정착했다. 1944년 병으로 벨라가 죽고, 샤갈은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재혼한다. 샤갈은 남프랑스의 생폴 드 방스에서 여생을 보낸다.

 

 

미술 전시회 관람을 갈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책이 마로니에 북스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 연대기 순으로 작가의 삶을 정리하며 거기에 따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잘 해놓았다. 설명이 들어 있는 문장이 결코 쉽지는 않다. 전문가적 수준이라 한 번으로는 기억하기 힘들고,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 대해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전반적 작품 활동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만든 책은 드물다.

 

샤갈은 1922년 자서전 나의 삶을 완성한다. 마로니에 북스의 마르크 샤갈에는 샤갈의 자서전인 나의 삶중 여러 문장을 인용해 놓았다. 인용된 문장들이 좋았다.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늘 일을 하고 기도를 했고말이 없었다아버지와 마찬가지로나 역시 말이 적었다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한 것일까나도 벽에 기대앉아서일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었을까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아야 했을까나는 내 손을 보았다내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그래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예술이나 예술가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집에서는 예술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아버지가 샤갈에게 예술가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 없었던 아버지의 선택은 샤갈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바이올린 연주자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올린은 유대 공동체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악기이다. 바이올린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세상과 신의 신비를 연결하는 통로를 상징한다.





-생일

-라일락 속의 연인들

-파리 위의 신부

 

생일은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라일락 속의 연인들과 '파리 위의 신부' 역시 파리에서 벨라와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묘사이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백색의 예수 수난도

 

1938년 작품인 백색의 예수 수난도는 유대적인 요소를 지향하면서도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 시대 러시아와 유대인 마을의 복잡한 상황을 담고 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르크 샤갈 특별전-BEYOND TIME>에 다녀왔다. 샤갈은 워낙 유명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처음 만난 샤갈의 작품은 모두 너무 좋았다. 전시 작품 중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없었고,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실에서 설명된 것을 참조해서 작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샤갈의 작품에는 유대 정통의 영성, 공동체의 기억, 인간의 감정과 정체성이 들어있고 그것을 시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 담겨있는 샤갈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관람객 스스로가 해석해내고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아련하고, 구조적이기도 한 샤갈의 그림에 완전 빠져버렸다. 다른 전시회에 비해 작품 사진 찍기가 허용되지 않아 아쉬웠다.

전시는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파 위의 어린 소녀(마리아스카)

 

전시회에서 만난 샤갈의 초기 작품이다. 1907년 고향에 와서 여동생 마리아스카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가족들의 샤갈 그림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바꿔놓았다.



[샤갈의 꽃들은 혹시 작가 자신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샤갈 작품에 등장하는 꽃다발은 단지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작가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식입니다. 작가의 작업실처럼 고요한 공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꽃들은 강렬한 존재감으로 일상의 덧없음과 삶의 연약한 본질을 상기시킵니다.

-출처: 예술의 전당]

 

이번 전시에서 내에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샤갈의 꽃다발과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이었다. 여지껏 본 꽃에 대한 그림들 중 가장 좋았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가까이 했던 화가였다. 샤갈은 이 꽃들에 여러 감정을 넣어 캔버스로 옮겼다. 꽃다발 그림 속에 샤갈의 마음이 담긴 듯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충만 되었고 아름다웠다. 니스 홍보 포스터도 멋졌다. 샤갈의 그림은 샤갈만의 개성이 듬뿍 담겨있다. 예술 작품에서는 그것이 최고다.



-샤갈과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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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7-10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샤갈 특별전이 있군요. 너무 덥지만 않으면 가보고 싶은데, 요즘 너무 더워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페넬로페님, 며칠째 폭염이 계속되고 있어요.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5-07-10 12:20   좋아요 2 | URL
정말 너무 더워요 ㅠㅠ
서니데이님 사시는 곳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이 더위를 뚫고 오기에는 정말 먼 것 같아요.
조금 시원해지면 오시면 좋겠어요.
서니데이님께서도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래요

바람돌이 2025-07-10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에서 샤걀전을 하는군요. 근데 궁금한거 있어요. 국내에서 샤걀전시는 여러번 한걸로 아는데 왜 할 때마다 포스터가 안 바뀌는거 같죠? 색감이 비슷해서 다른 그림을 제가 착각하는건가 싶기도 하구요. ㅎㅎ
샤갈 전시회를 여러번 봤는데 딱히 좋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작년 빈 미술관에서 하는 샤갈전 보고 완전히 감동했어요. 샤걀의 거의 모든 시기의 대표작들을 망라한 전시였는데 샤갈의 생각이나 그림풍이 바뀌는 과정, 그의 감정의 변화 이런게 모두 다가오면서 그림과 화가가 하나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그림도 훨씬 마음에 와 닿더군요. 그 감동을 잊기 싫어서 이번 전시는 가볼까 말까 고민이 좀 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5-07-10 12:30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전시 기획을 주관한 회사가 국내에서 계속 돌려막기를 하는 것 같아요.
샤갈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이고요.
특히 요즘 하는 전시는 유명 작가의 이름을 전시 제목에 내놓지만 막상 가서 보면 그 작가의 작품이 한 점 또는 두 점밖에 없어 실망을 하곤 합니다. 이번 전시에도 판화작품이 많았거든요. 판화는 계속 찍어도 되니까요.
한가람 미술관의 전시는 많이 부족했어요. 샤갈의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작품이 턱없이 부족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유럽으로 가야만 샤갈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 조금이나마 샤갈이라는 작가가 표현하는 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전시 작품 모두가 샤갈이었다는 것도요.
바람돌이님께서는 여행 많이 다녀셨기 때문에 이번 전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마 감동이 줄어 들거예요
ㅎㅎ

서곡 2025-07-10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자화상 바로 위의 마지막 꽃병 그림 정말 좋네요! 아름다울 뿐더러 청량해보여 지금 이 더위에 딱입니다 ㅋㅋ ˝이번 전시에서 내에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샤갈의 꽃다발과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이었다. 여지껏 본 꽃에 대한 그림들 중 가장 좋았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가까이 했던 화가였다. 샤갈은 이 꽃들에 여러 감정을 넣어 캔버스로 옮겼다. 꽃다발 그림 속에 샤갈의 마음이 담긴 듯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충만 되었고 아름다웠다.˝ 끄덕이게 되는 그림입니다

페넬로페 2025-07-10 16:28   좋아요 1 | URL
화병에 꽂힌 꽃그림뿐만 아니라 꽃다발 그림도 있었는데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사진을 못 찍게 해 아쉬웠어요. 꽃 그림들이 너무 좋더라고요. 샤갈의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도 좋지만 저는 항상 이런 그림을 더 좋아합니다 ㅎㅎ

희선 2025-07-11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갈은 구남매에서 첫째였군요 마르크는 잘 생각하지 않고 샤갈만 생각해서 프랑스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샤갈 하면 프랑스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데,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유대인이었군요 샤갈 아는 거 별로 없군요 아내를 그림에 그렸다는 것 정도밖에... 전시회 하는군요 맨 처음 그림은 피카소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갈수록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5-07-11 07:38   좋아요 0 | URL
샤갈이 러시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 유대식 이름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위해 이름을 개명했다고 합니다. 샤갈은 동시대의 화가 피카소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램브란트의 그림에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새파랑 2025-07-11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갈 그림들은 뭔가 신비롭네요~! 책 표지로 자주 본 작품도 보입니다 ㅋ 예술의 전당 가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5-07-11 12:37   좋아요 1 | URL
신비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은유적이었어요.

네, 알고 보니 샤갈의 작품들이 많이 인용되더라고요.
여름 저녁에 예술의 전당에서 분수쇼를 하는데 저도 조금 시원해지면 한 번 가서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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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더워 강력한 카페인이 필요하다. 오수를 쫓고 정신 줄도 놓지 않기 위해 산미가 거의 없는, 쓴 맛이 강한 ‘도서전 그 원두’로 커피를 내린다. 위스키, 헤이즐넛 맛은 잘 느껴지지 않고 그저 다크한 이 커피로 잠시나마 우주를 여행하는 상상을 한다. 물속에 들어가는 설정이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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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07-08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페넬로페님 7월하고도 8일이네요...어휴 너무 덥군요 저는 원래 여름에도 뜨아파인데 올해는 아아입니다 ㄷㄷㄷ

페넬로페 2025-07-08 20:4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랬습니다.
여름에도 뜨아와
따뜻한 칼국수나 우동 먹었는데
오늘 점심으로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막국수 먹고 왔어요.
당연히 커피도 아아이고요 ㅎㅎ
서곡님!
날씨가 너무 더워요.
건강 유의하시기 바래요^^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 P38

살면서 어떤 긴장은 이겨내야만 하고, 어떤 연기는 꼭 끝까지 무사히 마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그건 세상의 인정이나 사랑과 상관없는 가식이나 예의와도 무관한, 말그대로 실존의 영역임을 알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어서였다. - P40

꼭 연애 상대가 아니더라도 희주는 ‘일단 만나면 기분좋아지는 사람‘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 찝찝한 후회나 반추를 안 하게 만드는 사람. 상대에게 자신이 판별당하거나 수집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사람. 근본은 따뜻하되 태도는 선선한 술친구였다.  - P152

몇 년동안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선주 입장에서는 이명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전부터 경수의 현재에서 늘 자신의 미래를 봤으니까. 그리고 그 미래에 자기 곁에는 아마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선주는 ‘아직까지는 괜찮아‘ ‘더 버틸 수 있어‘라는 암시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문제를 계속 모른 체하고 있다는 걸. 너무 무겁고 괴로운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음을. 그리고 그건 기진도 마찬가지였다. - P195

그동안 여러 어려운 일을 겪어왔지만 가끔 이런 자연 속을거닐 때 나는 내가 다른 존재가 됨을 느낀다. 고통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일부러 집밖으로 나가 수백 년 된 나무들 사이를걷는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엄마 아빠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듯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공원을 지나간다. 마치거길 다 통과하면 내가 더 자라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뒤집으로 돌아와 세상에 고통을 해결해주는 자연 따위는 없음을깨닫는다. 그러곤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깨달으려 다음날 다시같은 장소로 나간다. 내 고통에 무심한 자연 앞에서 이상하게안도한다. - P204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비로소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타까움과 미안함, 짜증과 홀가분함, 연민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 P209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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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반적으로 한강 작가의 소설이 쉽게 읽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책을 구매해놓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시처럼 읽힌다는 짧은 단락의 문장들이 어려울 것 같았다.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올해 그의 작품을 거침없이 읽어보고자 결심했기에 어쨌든 이 책도 시작해야했다. 심호흡을 하며, 책속의 문장들과 단단히 싸워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잘 읽혔다. 막힘없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편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다양하게 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뼘 더 깊이 내려가 더 큰 의미를 알아내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그들이 살아내는 인생을 이해할 수 있기에 내가 더 착하고 정의롭게 산다고 착각한다.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같은 존재들이 그런 나의 자만을 깨준다. 한강의 은 그 어떤 종류의 필터도 통하지 않고 과거와 사물, 인간을 직접 마주한다. 거기에서 인식하고 느낀 것들을 압축된 문장들로 표현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깊이 있지만 애써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기보다 가볍게, 천천히 읽으며 직관적 느낌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좋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흰(p.186)’이 담긴 글을 쓰기 원했다. 그러기에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과 죽음, ‘에 대한 마음이 들어있다.

 

내가 나고 자란 남쪽의 따뜻한 도시에는 눈을 거의 볼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도시가 마비될 정도이다. 어릴 때(아님 중학생 정도일 때) 많은 눈이 내려 그 도시가 하얗게 잠긴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진기를 꺼내 눈이 쌓인 여러 풍경과 흰 색을 배경으로 한 가족사진을 찍어주셨다. 지금도 그 사진이 남아있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 별 표정 없이 눈 위에 일렬로 선 나의 가족들이 있다. 나에게 은 색깔보다는 이미지와 직관으로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선명하기도, 흐릿하기도 한 연결고리이다.

 

딸아이를 낳기 전, 배내옷을 장만했을 때, 그 옷이 너무 작아 신기했었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 어떻게 아기를 감쌀 수 있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온 아기는 배내옷보다 훨씬 작았다. 배내옷이 너무 커 어른 옷을 입은 아이처럼 보였다. 배내옷에 폭 파묻힌 생명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눈물이 났다.

 

작가의 어머니는 혼자서 여덟 달 만에 첫 아이를 낳는다. 산달이 많이 남아 아직 아기의 배내옷도 준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산통을 참으며 흰 천으로 배내옷을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는다.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배내옷을 입은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얼마나 막막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때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혹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상상하며 폴란드의 바르샤바 거리를 걷는다. 죽은 아기가 살아있는 작가를 찾아오는 길에, 살아있는 아기가 작가대신 사는 삶에 자신의 희망과 웃음을 넣을지도 모른다.


[태어나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어머니의 첫 아기가 만일 나를 이따금 찾아와 함께 있었다면나로서는 그걸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그이에게는 언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까한 시간 동안 눈을 열고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아직 시신경이 깨어나지 않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죽지 마죽지 마라 제발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

-p.32]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작가는 아들과 함께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떠난다. 그곳에서 걷고 또 걸으며 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에 대한 글을 쓴다. ‘소년이 온다의 도시와 바르샤바가 흰빛으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에는 왠지 슬픔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재건되고 복구되는 사물과 인간의 힘이 에 담겨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작가는 흰 것의 목록을 만든다. 그 중 하얗게 웃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얗게 웃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백목련에 잠시 머물며 옛 친정집 정원을 생각했고, 백발에 나를 대입했다. 그리고 수의....엄마는 아버지와 당신의 수의를 미리 마련해 두셨다. 아버지에게는 옥색을, 거의 20년 후의 당신에게는 연분홍의 수의를 입혀 세상을 떠났다. 흰 수의가 아니라서 난 조금 덜 슬프게, 하얗게 웃으며 그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소설을 읽었다. ‘을 주제로 한 각 제목에 짧게 씌여진 문장을 읽으며 천천히 쉬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직관의 묘미가 가득하다.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얼굴로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알 수 없었다대체 무엇일까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동시에 연약한 것사라지는 것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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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7-04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깊이있는 페넬로페님~!! 큰 스토리가 없어서 금방 읽을수 있었지만 이해하긴 싶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작품~! 저는 검은 사슴 읽으려고 준비중입니다~!!

페넬로페 2025-07-04 23:37   좋아요 1 | URL
네, 옆에 두고 조금씩 읽으면 좋을 문장들이 많았어요.
저도 이렇게 짧고도 강렬한 글을 쓰고 싶더라고요. 저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을 다음 책으로 정했어요^^

새파랑 2025-07-05 10:09   좋아요 1 | URL
여수의 사랑 좋습니다. 사랑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레이스 2025-07-0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흰 안에 소제목의 배열과 구조가 연결되더라구요. 놀라웠습니다.
바르샤바에서 쓰고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수정을 했다는데 그 과정이 그려졌습니다.

페넬로페 2025-07-05 18:17   좋아요 1 | URL
네, 작가가 당연히 치밀하고 의미있게 연결시켰을 것 같아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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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상도 버거운데, 짊어져야 할 불행은 왜 그렇게 많은지…크로스비에서 겪는 각자의 회한과 감정을, 모두에게 적용되는 삶으로 연결해준 작가의 문장이 너무 좋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행 바구니’를 올리브가 열어준다. 우리 모두에게 이 괴팍하고 당당한 올리브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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