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은 1887년 벨라루스(백러시아)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거의 100년을 생존해 현대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넘어야 했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남겨진 다양한 작품이 많고 살아생전 명성도 얻은 화가이다. 샤갈이 소년기를 보낸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마을은 러시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차별받는 가난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청어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9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샤갈은 유대인은 갈 수 없는 공립학교를 어머니의 뇌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샤갈은 이 학교에서 또래의 유대인 소년과 달리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러시아어로 말하며 일반적 러시아인의 삶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샤갈은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 공동체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추억, 유대 정통, 종교에 대한 영성이 들어있다.
샤갈은 20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즈반체바학교’에 입학한다. 가난했던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1910년 드디어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시대에 활동한 피카소의 입체파와 인상파의 기법을 받아들이지만 점차 독자적인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작업을 시도한다.

-‘아폴리네르 예찬’
파리에서 만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샤갈의 그림 세계를 ‘초자연적’이라고 했고 뒤에 그것은 ‘초현실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하나의 사조가 된다. 아폴리네르는 물심양면으로 샤갈을 도왔고 샤갈은 그런 아폴리네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준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샤갈의 거의 모든 그림에는 시적(詩的)인 의미가 들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 샤갈은 러시아에서 활동했고, 1915년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한다. 벨라는 샤갈의 뮤즈였고 그녀 역시 글을 쓰는 작가였다. 샤갈은 여러 형태와 푸른 색깔의 그림 등에 벨라를 그려 넣어 그의 깊은 사랑을 표현한다. 샤갈은 벨라와 35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샤갈은 혁명 시기의 러시아에서 완전한 자유로움 속에서 활동하지는 못했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샤갈의 시적 은유와 이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파리로 돌아 온 샤갈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1931년에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한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샤갈은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극적으로 탈출해 뉴욕에 정착했다. 1944년 병으로 벨라가 죽고, 샤갈은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재혼한다. 샤갈은 남프랑스의 생폴 드 방스에서 여생을 보낸다.
미술 전시회 관람을 갈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책이 마로니에 북스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다. 연대기 순으로 작가의 삶을 정리하며 거기에 따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잘 해놓았다. 설명이 들어 있는 문장이 결코 쉽지는 않다. 전문가적 수준이라 한 번으로는 기억하기 힘들고,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 대해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전반적 작품 활동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만든 책은 드물다.
샤갈은 1922년 자서전 『나의 삶』을 완성한다. 마로니에 북스의 ‘마르크 샤갈’에는 샤갈의 자서전인 ‘나의 삶’ 중 여러 문장을 인용해 놓았다. 인용된 문장들이 좋았다.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늘 일을 하고 기도를 했고,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말이 적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한 것일까? 나도 벽에 기대앉아서, 일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었을까? 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아야 했을까? 나는 내 손을 보았다. 내 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그래, 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예술’이나 ‘예술가’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집에서는 ‘예술’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아버지가 샤갈에게 예술가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 없었던 아버지의 선택은 샤갈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바이올린 연주자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올린은 유대 공동체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악기이다. 바이올린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세상과 신의 신비를 연결하는 통로를 상징한다.



-생일
-라일락 속의 연인들
-파리 위의 신부
‘생일’은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라일락 속의 연인들’과 '파리 위의 신부' 역시 파리에서 벨라와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묘사이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백색의 예수 수난도
1938년 작품인 ‘백색의 예수 수난도’는 유대적인 요소를 지향하면서도 당시의 고뇌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 시대 러시아와 유대인 마을의 복잡한 상황을 담고 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르크 샤갈 특별전-BEYOND TIME>에 다녀왔다. 샤갈은 워낙 유명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처음 만난 샤갈의 작품은 모두 너무 좋았다. 전시 작품 중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없었고,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실에서 설명된 것을 참조해서 작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샤갈의 작품에는 유대 정통의 영성, 공동체의 기억, 인간의 감정과 정체성이 들어있고 그것을 시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 담겨있는 샤갈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관람객 스스로가 해석해내고 상상하는 재미도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아련하고, 구조적이기도 한 샤갈의 그림에 완전 빠져버렸다. 다른 전시회에 비해 작품 사진 찍기가 허용되지 않아 아쉬웠다.
전시는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파 위의 어린 소녀(마리아스카)
전시회에서 만난 샤갈의 초기 작품이다. 1907년 고향에 와서 여동생 마리아스카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가족들의 샤갈 그림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바꿔놓았다.

[샤갈의 꽃들은 혹시 작가 자신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샤갈 작품에 등장하는 꽃다발은 단지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작가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방식입니다. 작가의 작업실처럼 고요한 공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꽃들은 강렬한 존재감으로 일상의 덧없음과 삶의 연약한 본질을 상기시킵니다.
-출처: 예술의 전당]
이번 전시에서 내에게 가장 좋았던 부분은 샤갈의 꽃다발과 화병에 꽂힌 꽃 그림이었다. 여지껏 본 꽃에 대한 그림들 중 가장 좋았다. 샤갈은 언제나 꽃을 가까이 했던 화가였다. 샤갈은 이 꽃들에 여러 감정을 넣어 캔버스로 옮겼다. 꽃다발 그림 속에 샤갈의 마음이 담긴 듯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충만 되었고 아름다웠다. 니스 홍보 포스터도 멋졌다. 샤갈의 그림은 샤갈만의 개성이 듬뿍 담겨있다. 예술 작품에서는 그것이 최고다.

-샤갈과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