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서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그림을 낱낱이 분석한 평론가의 글엔 별로 집중하지 못한다. 어렵기도 하고 재미도 없다. 굳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성을 못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그 앎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저 여러 화가의 그림 앞에 서서 열심히 볼 뿐이다. 그림을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다. 눈이 열리고 감정과 생각이 교차되고 움직여진다. 작품마다 들어있는 개성과 창의성에 작가의 천재적인 면이 보이지만, 그 이면의 좌절과 성실에 더 감동받는다.
그림 안에는 화가의 의도와 작법이 있지만, 그 속에 작가 자신도 있는 것 같아 작가의 삶도 궁금하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사람자체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마로니에북스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도움이 많이 된다. 연대기적으로 화가의 인생을 서술했고, 그림의 전반적인 특징과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놓았다. 책의 분량이 많지 않지만 그 속에 개괄적 내용이 들어있어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좋고, 길지 않아 오히려 효율적으로 읽을 수 있다.
폴 세잔(1839~1906)은 오직 그림만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고, 사람들에 의한 좋은 평가도 비교적 늦게 받았지만 자신의 신념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간 예술가다. 은행가로 성공한 부르주아 아버지를 둔 세잔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파리로 간다. 세잔은 오랫동안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받았고,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안정적으로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유명한 그림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두 번이나 낙방했고, 살롱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세잔은 자신이 일드 프랑스(파리와 파리근교)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가 작업한다. 세잔은 잠시 인상주의의 기법을 사용했지만, 순간적으로 빛에 의해 변화되는 것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자연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인상주의 그림이 지나치게 일시적이며 순간적이라(p.45)’고 느낀다. 세잔은 변하지 않는 자연 내부의 영원한 것을 묘사하기를 원했다. ‘영속성과 안정성(p.68)’ 으로 집중한다.
엑상 프로방스 인근의 1011m 높이의 ‘생트 빅투아르 산’은 거대한 석회암 산등성이로 이루어져 있다. 세잔은 이 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을 거의 80여점 남겼다. 세잔은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빛을 표현하기 위해 푸른색을 많이 사용했다.
‘나는 사과 한 개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는 세잔의 포부는 그의 정물화에서 분명하게 이루었다. 이차원의 특성을 기본으로 신중하고 느리게 작업했다. 작업실 안의 모든 사물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고 한 작품을 몇 달 또는 몇 년간 그리기도 했다. 말년의 세잔은 ‘수욕도’를 많이 그렸다. 고전주의 화가에 대한 존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짐을 큰 캔버스에 그리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캔버스의 모든 요소를 동시에 나의 통제하에 둔다. 사물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다시 모으기 위해 나는 내 본능과 신념을 동원한다.…예술은 자연을 영속적으로 묶어두어야 한다. 모든 구성 요소와 변화의 모습까지도 고정시켜야 한다. 자연을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p.67]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그림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기쁨과 위안을 준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웃고 행복할 수 있다. 한순간 포착된 삶의 환희와 붉은 빛 낭만을 르누아르만큼 잘 표현한 사람이 있을까? 설사 이것이 그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일지라도 그의 그림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계가 어려워도 르누아르는 걱정이나 비관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그림보다 밝은 색의 그림을 그렸다.
세잔과 달리 가난한 중산계급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가난과 싸우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도자기 공장에서 도제로 일하며 회화와 드로잉에 재능을 보인 그는 13세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되었다. 돈을 모은 르누아르는 21세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샤를 글레르의 개인 화실에도 다니며 그림을 배웠다. 그곳에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났다.
르누아르와 모네는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의 인상’은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나중에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얻는다. 르누아르는 파리의 중산계급 사람들의 일상을 주로 그렸다. 로코코 거장들의 작품과 현대 프랑스 시각예술 전통에 뿌리를 둔 다양한 소재의 그의 그림은 당시 프랑스인의 일상과 여가를 잘 나타내주었다.
1883년경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양식을 버리기 시작한다. 2,3년 정도 ‘불모의 시기’를 거친 그는 더 이상 파리의 일상을 그리지 않는다. 르누아르는 친구 세잔처럼 ‘사물의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묘사하려(p.62)’했다. 그 후 부드러운 양식으로 다시 복귀한다. 그는 예술에 대한 관점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르누아르의 색채는 훨씬 더 화려하고 강렬해졌다. 눈부신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으로 넓은 곡선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선천적으로 선량하고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그림을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따라서 감각적인 아름다움보다 견고하고 이성적인 토대에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르누아르는 혁명적이기를 원치 않았다. 언제나 새롭고 항구적인 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는 진실의 한 부분을 보고 그대로 그렸을 뿐이다. 그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시각에 치우쳐 실제의 비례를 왜곡하지도 않았다. 그의 예술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빛, 영원한 자연을 사랑했다. 실존적 두려움과 중산계급의 불안과 절망이 커져갈 때, 르누아르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그림으로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p.91]

-오베르 인근에서 그림을 그리는 폴 세잔, 1847년경, 사진, 헤이그 시립 미술관(p2)
-작업실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912년, 사진, AFG 베를린, 뒤표지
(사진에서도 르누아르의 손가락은 많이 변형되어 있다.)
세잔과 르누아르의 말년은 병마와 싸우는 시기였다. 세잔은 당뇨병과 우울증을 앓고 있어 예민해져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르누아르는 심한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뼈가 변형되었고 몸무게가 47kg밖에 나가지 않았다. 르누아르의 손은 심하게 비틀려 휘어져 손과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누군가와 얘기할 때 통증이 밀려오면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얘기를 멈추어야 할 정도로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런 힘듦에도 세잔과 르누아르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그 시기에 조각을 그리기 시작했고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기 위해 매일 그곳에 올랐다. 1906년 가을, 세잔을 큰 폭풍이 왔음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시간동안 비에 젖은 몸이 쇠약해졌지만, 다음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원으로 나가서 다시 악화되어 폐렴으로 사망했다.
엑상프로방스의 부르봉 학교에서 만난 세잔, 에밀 졸라, 장 바티스트 바유는 단짝 친구들이었다. 이 세 친구는 주변 지역을 여행하며 사냥을 했고, 수영을 즐겼다. 그들은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고 빅토르 위고와 알프레드 드 뮈세를 좋아했다. 그들은 시작(時作)을 했고, 세잔은 라틴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세잔을 파리로 불러들인 사람은 친구인 에밀 졸라였다. 세잔이 평론가와 대중에게 비판받던 시기에도 에밀 졸라는 그를 옹호했다.
‘루공 마카르 총서’를 쓰던 졸라는 성공해 세잔보다 훨씬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이미 예전 같지가 않았다. 1886년 3월,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 출간은 두 사람이 완전 결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누가 봐도 세잔을 모델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책을 보내준 친구에게 세잔은 형식적인 편지를 보내고 관계를 끊는다. 세잔은 졸라의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세잔이 에밀 졸라가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자 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거나, 내용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의 우정은 되돌릴 수 없었다. 편지의 내용에서 세잔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친애하는 에밀에게.
『작품』을 막 받았네. 친히 한 권을 보내주다니 정말 친절하군. 『루공 마카르』총서의 저자 분께 추억의 증표로 감사하다고 전해주게나. 또한 과거를 생각해서 그에게 그의 손을 꼭 붙잡아봐도 좋은지 여쭤봐 주게나.
과거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의 폴 세잔. -p.62]

한가람 미술관의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는 파리의 오랑주리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세잔과 르누아르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전시하는 기획전이다. 몇 년 전에 열렸던 <오르세 미술관>전에 비해 작품의 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전시가 세잔과 르누아르의 작품을 서로 교차하며 보여주어 두 예술가의 세계를 비교할 수 있어 좋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의 사진 찍기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사진 찍기가 허용되는데 왜 한국에서 그것을 금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품 보호 차원에서라면 오르세와 오랑주리에서도 금지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분명 허용된다. 관람객이 많으므로 빠른 회전율을 원한 주최측의 꼼수가 아닌지 의심되기도 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으니 좋은 점은 있었다. 작품 자체에 완전 집중할 수 있었다. 사진에 담을 수 없고, 내가 파리에 다시 갈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기도 하고, 그림을 보고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면서 내 눈에 최대한 그림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
-푸른색 꽃병
-밀집 장식 꽃병, 설탕 그릇과 사과(사진출처; 전시회홈페이지제공)
-폴 세잔

-튤립 꽃다발
-꽃병에 꽂힌 꽃
-복숭아가 있는 정물(사진출처;전시회홈페이지제공)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세잔과 르누아르의 그림은 나름 다 좋았다. 그런데 정물화에서만큼은 세잔이 완벽하게 승리한 것 같았다. 작품 자체를 놓고 볼 때 르누아르의 꽃을 그린 정물도 좋았지만, 세잔의 작품과 비교해서 보니 왜 세잔의 정물화가 그렇게나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피아노를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오랑주리 미술관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