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진지함’ 때문이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는 ‘연극사 2‘ 강의를 같이 듣는 미도리를 대신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간병한다. 처음 만난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와타나베는 부담감과 서먹함을 없애려고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날씨 얘기로 시작해 ’연극사 2‘에서 배우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설명해준다.
[에우리피데스 아세요?
그 사람 연극의 특징은 이것저것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 하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요.…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합니다.
-p.323,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길지만 이 문장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이렇게 쉬우면서도 간결하게,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이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의 어떤 다른 부분보다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구절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보통사람 같으면 처음 만난 사람, 그것도 친구의 아버지에게 지금 배우고 있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 와타나베를 멍하니 쳐다보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그는 ‘피스’라고 말하며 어색함을 모면한다.
둘은 오이도 나눠먹는다. 오이를 먹으며 와타나베는 생명의 향기를 운운하며 엉뚱하게 오이예찬도 한다. 결국 미도리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인정한다. 와타나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진지한 의미를 두어 지금 생을 찬란하고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5일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세상은 신의 개입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오이의 아삭거림으로 삶은 가볍고 경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와타나베 덕분에.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키에 의해 진하게 각인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이제서야 읽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19편이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에서는 ‘이온’, ‘오레스테스’의 결말에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사용된다. 여러 가지 갈등이 연속되다가 거의 마지막에 신이 등장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이 장치가 단지 연극적 기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인간의 삶에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인력(人力)으로 할 수 없어,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일들도 허다하다. 어쩌면 신이라도 나타나 뭔가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이 이 속에 들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꼭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비극의 상당 부분에 신이 등장한다. 절대자인 신에 복종하고 신탁에 따르는 행위는 그만큼 고대인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험난하고 위험했다는 의미이다. 한편으로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실현시킬 도구로 무수히 신의 이름을 도용하기도 한다. 여러 신전의 사제들이 정확하지 않은, 우물거리는 말로 신탁을 전하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적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방향으로 그것을 해석했다.
에우리피데스는 『헬레네』를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게 서술한다.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으로 파리스는 헬레네를 트로이아를 데려갔고 그리스 연합군은 헬레네를 데려오기 위해 트로이아로 출정한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아로 간 헬레네는 환영이고 실제 헬레네는 이집트로 갔고, 헬레네의 기지로 남편 메넬라오스와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온다는 다른 버전을 가져온다.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인 아가멤논 가(家)의 비극과 복수는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복수 3부작'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에우리피데스 역시 이 소재로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아가멤논 가의 비극은 사실 선조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결정적 원인은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가 그리스 연합군의 출정을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설정이다.
아가멤논은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결국 딸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캇산드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죽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부부의 아들과 딸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엄마인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죽이는 복수가 되풀이된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오레스테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등이 아가멤논 가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이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것이어서 결국 이 소재와 연결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비극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의 여러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는 것도 많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그런 의도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을 것이다. 이 기법이 현대의 막장 드라마 결론처럼 황당하거나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비극적 고리와 인간의 광기를 끊는 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장치가 없다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연결된 악연에 의한 폭력에 시달릴 것이다. 과감하게 끊고 매듭지어 새롭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성은 지금 현재에도 절실하다.
[아폴론이 헬레네와 함께 기계장치를 타고 무대 뒤편의 높은 곳에 나타난다.
아폴론; 메넬라오스여, 그대는 날이 선 분노를 무디게 하라.…그리고 손에 칼을 빼 들고 여기 이 소녀를 위협하고 있는 오레스테스도 내가 전하러 온 말을 명심해 들어라.
오레스테스; 오오, 예언의 신 록시아스이시여,
하지만 결론이 좋으니, 그대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오레스테스’, 1625행~1670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