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
전은주(꽃님에미)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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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교통방송 책 소개에서는 원래 하지현, 엄기호가 쓴 <공부중독>을 소개하려고 했다.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 선생님에게 메시지가 왔다.

"요즘 책 선정이 무겁다고 모니터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금 가벼운 걸로 될까요?"

나는 메시지를 받고, "제가 몸이 무거워 책도 무거운 것을 좋아해요"라고 답을 드렸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최근 소개했던 책은 가벼운 책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에서는 단편 <소나기>를 이어쓰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소개했고, (32)에서는 진중권이 쓴 <아이콘>, (30)에서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소개했다. 다소 무거운 책이라면, (31)에 했던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지만 이 책도 사실 어렵거나 무거운 책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 가벼운 책이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많은 분들에게 권할 수 있을만한 더 가벼운 책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하신다는 분들에게 묻고 싶었다. 어떤 책이 무겁다고 생각하시는지, 라디오에서 소개할만한 가벼운 책은 어떤 책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물론 모니터 회의에 갈 수가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모니터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책을 재미있게 소개해줘 유익하다 정도의 반응이 나왔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번 모니터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나치게 완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무겁다면, 그보다 더 가벼운 책은 나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다른 방송 예컨대 TBS에서 진행되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책은 <당신을 만나서 참 좋았다>, <가족이라는 병> 같은 책들인데, 솔직히 이런 책은 나는 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방송에서 소개할 책을 고를 때는 신간이나 청취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특별히 염두에 두기 보다 우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려하고, 그렇게 읽은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될 수 있는 내용 같다는 생각이 들면 소개글을 썼다. (물론 쉬운 책을 골라야 한다는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세상에 책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책 소개는 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소개하는 이의 취향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책소개고 그런 것이 공감을 얻기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과정이 썩 잘 되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작가 선생님에게 그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만 한다면 되도록 빨리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개편이 이뤄지는 11월까지는 해야 한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한주에 한권 가볍게 책을 읽어본다'는 취지에 맞는 책을 골라서 소개해야 한다. 오늘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소개한 것도 그런 맥락이 있다. 물론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특히 부모에게라면 강력히 추천할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라디오에서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행과 제주에 대해서 내 생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적어보려고 했다. 너무 유명한 책이라 관심 없는 분들도 소개글은 읽어봐 주신다면 고맙겠다.

여하간 교통방송 책소개는 몇 개월을, 최소한 3개월은 더 해야 하지만 그동안 좋은 점도 많았다. 쉬운 책을 늘 선정해야 한다는 부담 탓에 평소라면 잘 읽지 않았을 책을 읽고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 것이 기뻤다. 책선정이 너무 무겁다는 말이 아니라 책 소개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만하겠다고 마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겁고 가볍고 무슨 기준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여행은 어려워도 책은 어려우면 안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소개하고 그런 반응이라면 수긍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솔직한 내 생각을, 끝으로 말하자면, 전혀 수긍이 안된다. 그동안 내가 소개한 책 중 그 어떤 책도 무겁지 않다. 아무튼, 이제 몇 번 안 남았다. 쉬운 책 사러 알라딘 중고서점에 나가봐야겠다.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달 살기

-전은주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북하우스에서 만들고, 전은주씨가 쓴 <아이들과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텐데요, 제주도 한달살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은주씨는 꽃님이, 꽃봉이 두 남매의 엄마인데요, 이 책에는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함께 보낸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2016년 처음으로 소개해드렸던 책이 마이케 빈네무트가 쓴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였습니다. 이 책은 마이케가 퀴즈쇼에서 우승을 해 받은 상금으로 1년동안 한 달동안 한 도시를, 그래서 모두 열 두 개의 도시를 여행하는 내용을 담은 책인데요, 전은주씨는 퀴즈쇼 우승도 하지 않았는데도 한 달 간 제주도에서 살기로 마음 먹고 떠난 것이지요. 


2. 퀴즈쇼에서 우승을 했다면 아마 아마 제주에서 일 년 살기를 했을 수도 있겠죠. 아이들 학원 보내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말은 쉽지만 그래도 한 달 살이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에서 마이케의 경우는 50만 유로나 되는 상금도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고, 사실 직업도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케가 떠난 후에 자유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마이케의 상황은 이미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꽃님엄마 전은주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월세방을 구해 방학동안 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이웃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남편은?”이었다고 해요. 이 질문은 “마누라가 밥도 안 해주고 한 달이나 집을 비운다는데, 또 재롱떠는 아이들을 못 보는건데 남편이 허락해줬냐”는 뜻이기도 하구요, 아니면 “애 아빠도 없이 혼자서 두 아이를 어떻게 돌보냐”는 뜻이기도 한 거죠.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방학이었다고 해도, 아이들은 사실 방학 때 더 바쁘거든요. 각종 캠프를 가고 학원 뺑뺑이를 돌기 때문에 학교 다니면서 해오는 것들을 모두 중지하고 ‘한 달’의 휴식기를 갖는다는 것이 보통 부모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지금은 제주 한달살이가 정말 힙한 문화처럼 유행이 되었지만 전은주씨 가족이 가던 2013년은 그런 문화는 거의 없었던 때거든요. 그런 점에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3. 정말 그렇네요. 요즘 제주도 많이 가잖아요? 대구에서도 제주로 가는 비행편이 많이 생겨서 예전보다는 쉽게 2박 3일, 3박 4일 짧게 다녀오시는데, 한 달씩이나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좀 들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서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주에 가면 누구나 가는 곳들이 있잖아요? 천지연, 천제연 폭포, 용두암, 만장굴,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여미지식물원 같은 유명 관광지들 말이죠. 식당도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꼭 가봐야 하는 식당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살이도 길다고는 물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달 정도는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가볼 수 없는 곳들을 이 책은 여러 장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꽃님이네도 처음에는 잘 알려진 장소 위주로 방문을 합니다. 한림공원이나, 김녕미로공원 같은 곳들이죠. 그런데 한 달 살이의 종반으로 갈수록 단기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제주 기적의 도서관, 아부오름, 휴애리 자연생활농원 같은 곳들은 아마 가보지 못한 분들이 더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제주도가 굉장히 넓습니다. 서쪽 애월에서 동쪽 성산까지 가려면 차로 2시간은 가야 하거든요. 2박 3일 여행으로 제주도를 다 봤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죠.


4. 제주에서 한 달 살이가 제주도를 ‘재발견’하도록 해준 거네요.


 책과는 조금 먼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최근 제주는 국제자유도시가 되겠다고 기치를 세우고 나서부터 부동산 광풍에 외국의 개발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난개발이 우려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주도민들도 그런 문제를 대체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데요, 많은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문제는 사람들이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주를 잘 모른다는 것이 단지 좋은 관광지가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의 문화, 정서, 제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채로 관광지를 훑어보고, 맛집을 들르거나 하는 것은 지역을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여행 방식 자체가 대단히 소비적이고 파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이 마을을 전혀 모르는 관광객이 해마다 1000만명 이상이 오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드린 이유는 이 책이 좀 다른 방식의 여행을 제안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관광지를 훑어보는 여행, 여행지에 대한 이해 없는 여행이 아니라 이 책은 “느린 여행”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5. “느린 여행”, 느낌이 좋은 말인데요, “슬로우푸드”처럼 여행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여행을 디투어링이라고도 하는데요, 말 그래도 진짜 여행은 목적지까지 바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 좀 우회로를 거치는 여행이거든요.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참 충실합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특히 어린이들과 함께 읽을만한 도서 목록을 제시해줍니다. 설문대할망을 모르면 제주 문화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설문대할망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일을 나간 해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책, 또 저희가 잘 알지 못하는 제주의 역사, 특히 4.3 항쟁에 대해 소개해주는 이야기 책 등 여러 권을 소개해 줍니다. 제주를 더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제주를 더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한거죠. 특히 전은주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제주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서 이런 책들을 읽었다고 해요. 제주에는 아름다운 도서관이 참 많은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도서관’이라는 곳이 참 좋았습니다. 바람도서관은 카이스트와 서울대를 나온 젊은 부부가 지리산에서 꿀을 치면서 살다가 제주로 와서 펜션을 운영하면서 거실을 이렇게 도서관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고 해요. 꽃님이와 꽃봉이가 여기서 책을 읽고 뛰어놀고 낮잠도 자는 것을 보니 저도 제 아이와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 비가 오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고, 햇살 좋은 날이면 바닷가로 나가고, 정말 슬로우여행이네요. 


 슬로우여행으로 꽃님이네는 ‘제주’도 재발견을 했지만, 무엇보다 전은주씨는 ‘가족’을 재발견합니다. 아이들과 밀착해서 한 달을 아름다운 제주에서 보내니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한 달 동안 부비고 다니다 보니 남매는 서로를 더 의지하게 된 것은 물론입니다. 또 전은주씨 역시 제주에서 밥그릇 네 개, 식판 두 개, 냄비 하나로 살아보니 그동안 외출할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며 불평했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늘 입던 옷도, 똑같은 반찬으로 지내도 괜찮았던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애초에 삶이 지루하지 않으니 옷이나 메뉴따위로 변화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루한 삶을 소비로 바꾸려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은 언뜻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살아본 사람의 여행기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책입니다. 엄마와 아이가 여행을 통해서 성장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여행기이기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는 육아서적이기도 하고, 엄마가 된 여성의 성장 에세이이기도 한 여러 얼굴이 있는 책입니다.


7.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는 것이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기는 한데,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 비용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월세를 얻고, 항공권을 사는 것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텐데요, 전은주씨는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일단 꽃님이네가 가장 많이 간 곳이 바닷가와 도서관인데요, 아시다시피 바닷가와 도서관은 입장료가 없지요. 아침은 해 먹고,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외식과 해먹기를반반으로 하니까 생활비도 많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평소 쓰던 한 달 생활비를 바탕으로, 아이들 학원비가 안들어가니까 서울에서 살 때와 큰 차이가 없었던 거죠. 그리고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려면 차가 필요한데요, 렌트 비용이 크기 때문에 꽃님이네는 배에 차를 실어 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저렴했다고 해요. 이 책을 읽으면 정말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 가고 싶어 온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꽃님이와 꽃봉이는 밤이면 엄마와 그림 그리기, 만들기를 해서 작품을 벽에 붙여두고, 동화책을 읽고, 비오면 수학 문제도 풀고, 날씨 좋으면 올레길도 가고, 바다도 갑니다. 그리고 금새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밤이면 깊은 잠에 빠집니다. 학원 다닌다고 지쳐 있는 아이의 모습 대신에, 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모습 대신에 내 아이에게 한 달이라도 그런 시간을 오롯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 안할 수가 없어요. 저도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이기지 못해 2014년 가을에 아이를 데리고 제주 한 달 살이를 떠났습니다. 그 때 이 책이 정말 도움이 되었어요.

 간단히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이 책의 내용처럼 정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고, 저희가 묵은 민박집에 함께 한달 살이 온 가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바로 옆 방에 묵고 있어 함께 여행을 했어요.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구요. 저희는 제주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아, 이번 여름방학에 더 많은 분들이 제주 한달 살이에 도전해보시면 어떨까 하네요. 정리해주시죠.

 아까 디투어링에 대해서, 슬로우 여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요즘 청년들이 많이 하는 여행 중에 ‘내일로’라고 56500원을 내면 5일 간 열차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행이 참 근사한 슬로우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거기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가보고, 길도 잃어버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내일로’ 여행 족보가 돌아다닙니다. 어딜 가서 자야하는지, 뭘 보고, 뭘 먹어야 하는지 매뉴얼에 따라 청년들이 다니는 거에요. 이런 여행은 새로운 곳을 경험한다는 여행의 취지와는 맞지 않습니다. 여행이기보다는 쇼핑에 가깝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아이들과 제주에서 한 달 살기>에도 숙소로 고려할 만한 곳, 꽃님이네가 다닌 맛집과 카페, 좋았던 장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분이라면 부디 이 책을 족보로 생각하고 이 책을 따라하지 마시고 정말 발길 닿는대로, 마음에 드는 곳에서 서고, 조용한 식당에 들어가보고, 낯선 제주를 경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은주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익히되 잊으라”. 계획은 세우고 움직이더라도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는 엄마 계획을 잊으라고 권합니다. 바닷가에 오면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 엄마 생각이고, 아이들은 그냥 모래만 팔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여행의 묘미이고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이 책을 제주 여행 족보가 아니라 ‘슬로우 여행 지침서’로 읽으신다면 ‘제주’와 ‘가족’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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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음표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얼마 전 아이에게 ‘음표의 길이’를 가르치면서 있었던 일이다. 먼저 아이에게 4/4 박자라면 한 마디에 4분음표(♩)가 네 개가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러니까 4분음표 하나는 곧 한 박을 의미한다. 만약 4/4 박자에서 8분음표(♪)를 사용하고 싶다면 한 박은 8분음표 두 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줬다. 4/4박자에서 8분음표는 반 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6/8 박자에서는 한마디에 8분음표가 6개 들어가기 때문에 한 박은 8분음표로 표시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아이는 왜 똑같이 생긴 8분음표(♪)가 어떤 경우에는 ‘반 박’이 되고, 다른 경우에는 ‘한 박’이 되냐고 물어 왔다. “아빠, 숫자 1은 언제나 1이고 알파벳 A는 언제나 A인데, 왜 8분음표는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되는거야?”. 4/4 박자에서는 분모에 4가 있으니까 4분음표가 한 박이 되고, 6/8 박자에서는 분모에 8이 있으니까 8분음표가 한 박이 된다고도 설명해 보았고, 박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8분음표의 길이도 달라진다고 해보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다시 되물어왔다. “아빠, 나는 할아버지와 있어도 나고, 엄마하고 있어도 나잖아. 그런데 왜 8분음표는 바뀌는거야?”.


<음의 길이를 측정하려면 자가 필요하지 않나요?>

아이의 느린 이해가 답답했지만 ‘음표의 길이’라는 개념은 나도 아이 또래일 때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긴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음표의 길이’를 묻는 문제가 왜 음악 시간에 나오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길이’를 재는 문제라면 응당 수학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는 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기억 나는 문제가 있다. 음표를 길이에 따라 나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온음표 < 2분음표 < 8분음표(♪) < 잇단음표(♬)’ 순으로 적었다. 자로 길이를 쟀을 때 잇단음표가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온음표가 네 박을 표시하기 때문에 이 중 가장 길다는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러니 초등학생 때 나는 8분음표가 한 박인지 반 박인지 몰랐던 것은 물론, 어떤 물체가 아닌 소리인 ‘음’에도 길이라는 것이 있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길이’의 의미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 것이나, 아이가 ‘8분음표’의 의미가 박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 것이나 어찌보면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은 말, 같은 사람, 같은 존재라도 다른 위치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의미,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도 나타난다. 이 대화편에는 ‘파르마콘’이라는 말이 잠깐 언급되는데 이 말은 약국 문 앞에 가면 볼 수 있는 ‘pharmacy’의 어원이다. 그런데 파르마콘은 ‘치료’를 의미하는 동시에 ‘독약’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문맥에 따라 이 말을 때로는 ‘치료’로, 때로는 ‘독약’으로 번역하는데 언뜻 생각해보면 하나의 말에 이렇게 상반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약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8분음표가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될 수 있다는 것은 파르마콘이 약도 되고, 독도 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이의 질문대로 아이는 할아버지와 있을 때와 엄마와 있을 때, 혹은 유치원에 있을 때와 집에 있을 때 항상 똑같은 아이일까? 8분음표의 의미도, 길이의 의미도, 파르마콘의 의미도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면 아이의 존재도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어디에 갔는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다중인격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일관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다중적인 인격을 갖는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더 유리하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 엄마와 있을 때, 아버지와 있을 때, 혹은 동료나 모르는 사람과 있을 때 대화 내용은 물론 행동하는 방식, 말투까지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하나의 나’인 동시에 ‘여러 종류의 나’이기도 하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는 응석을 부리지만, 아빠에게는 잘 그러지 않는다. 8분음표가 반 박이기도 한 박이기도 한 것이 모순이 아닌 것처럼, 할아버지와 아빠의 다른 육아 원칙도 아이에게는 전혀 모순적이지 않을 수 있다. 아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할아버지와 있을 때와 아빠와 있을 때 너는 모두 같은 하나의 너야.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밥도 먹여 달라고 하지만 아빠에게는 그러지 않지?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게 되지? 8분음표도 똑같아. 8분음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박자에 따라서 한 박도 되고 반 박도 되는거야”.

파르마콘에서 독을 빼내고 약만 남기려는 시도, 즉 세상과 사람을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만큼이나 오래된 인간의 습관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정답을 주입시키고, 외우게 하고, 꿈도 하나만 꾸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가치 있는 교육은 그런 사고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가르쳐주자. 장난감 자동차는 실제의 자동차가 아니기에 ‘가짜’라고 믿는 아이에게 실제로 눈 앞에 존재하는 이 장난감이 왜 가짜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키도 크고 생각도 달라졌는데 어째서 ‘같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바로 그 때 “여러 종류의 나”가 서로 섞이면서 아이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리라.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존재로 말이다.


키자니아 7월호에 쓴 글이다.
얼마 전에 파트너가 시킨대로 아이와 음악 이론 책을 공부하다가 생겼던 일을 <키자니아> 7월호에 썼다. 음의 길이를 이해 못하는 것까지 닮은 아이를 보며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생긴다. 음에도 길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그 떄는 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나는 8분 음표의 길이가 박자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 존재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썼지만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타자든 대타자든 아무 것도 잃고 싶지 않고, 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 바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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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배>

테세우스는 하반신은 소이며 상반신은 인간의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모험을 떠났다.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후 그는 이제 고향으로 귀환해야 한다. 편의상 테세우스가 탄 배는 부품(P) 10개로만 만들어진 것이라 하자. 배가 부서지면 파손된 부품을 미리 준비해 둔 새 것으로 교체한다. 테세우스는 T0 시점에 출발했고, T1 시점에서 파손된 P1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했다. T2, T3를 지나 T10 시점에 이르면서 P10 부품까지 완전히 교체했다. 그렇다면, T0에 테세우스가 탄 배와 T10에 테세우스가 탄 배는 같은 배라고 해야 할까, 다른 배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패러독스다.

먼저 T0의 배와 T10의 배는 ‘다른 배’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시점의 배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의 부품이 교체되는 T1부터 이미 다른 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지금도 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가 새로 만들어지는 등 구성요소가 계속 바뀌고 있으니 나 역시 계속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인가?”하고 반박하면 이들은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사실 이 문제에서 두 시점의 배가 ‘다른 배’라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배’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같은 부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품 하나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배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T0와 T10의 배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어떤 이들은 이 배의 부품이 달라지긴 했지만 두 시점에서 테세우스의 귀환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같은 배로 볼 수 있는 근거로 든다. 하지만 만약 돌아오는 길에 테세우스가 죽거나 테세우스가 만약 귀환하지 않고 다시 크레타섬으로 갔다면? 이들은 목표가 달라지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 어떤 이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부품은 매 시점마다 바뀌고 있지만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가 모든 시점의 배가 같은 배라는 것을 보증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선원 중 한 사람이 아테네로 도착 후 자기 집 앞마당에서 교체된 낡은 부품을 조립해 배를 건조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와 선원이 만든 배 중 어느 것이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에 더 가까운 배인지 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T0와 T10 시점의 테세우스의 배는 같은 배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왜일까? 현대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서 ‘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에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테세우스의 배는 T1, T2 각각에서 정지된 채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T1에서 T2로 이동하는 과정 혹은 T1에서부터 T10으로 운동하는 과정에 존재한다. 즉, 배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T1에서 T2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그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테세우스의 배’의 자리에 ‘인권’, ‘자유’를 넣어보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권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중동-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권’은 정말 같은 인권일까? 지금 ‘영국의 기득권층이 지지하는 자유’와 ‘난민들이 찾아나선 자유’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에서 봤듯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데아도, 동일한 목표도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동안 유럽 세계는 자신들을 인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난민 문제에 대해 유럽 세계가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인권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영국은 그동안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이번 브렉시트 결정은 그들의 민주주의가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인권,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워 추구한 목표는 제3세계인들이 추구해온 목표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는 낡아버린 부품이 되어 버린걸까?

테세우스의 배가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권, 민주주의 역시 정지해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 없이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낡아버린 부품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이러한 가치들을 지배해온 ‘유럽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듯 낡아빠진 유럽식 보편주의를 변화시켜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 주어져 있다. 즉 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유럽식 보편주의’를 중동-아시아-아프리카-난민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로 대체해야 할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 것인가? 브렉시트는 낡은 부품이 교체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부품을 ‘새로운 보편주의’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로 교체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세계화를 ‘새로운 국제주의’로, 이익 추구의 자유를 ‘새로운 자유’로, 난민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인권’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대구신문에 쓴 글이다.(2016.6.30)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단서로 삼아 브렉시트 이후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소위 '보편적 가치'의 존립에 대해서 써본 글이다. 정교한 글은 못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브렉시트 이후 보편주의를 회의하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무엇보다 유럽식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주의, 요컨대 월러스틴이 말한 바 보편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이뤄가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지금 사이비 보편주의로 가득하지 않은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보통은 '자아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관련해 자주 논의된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베르그송의 관점, 즉 운동성 자체가 동일성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 운동 자체가 존재라면, 그 존재는 뭔가 '흐린 존재', 운동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자아'에 대해서도,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모두 '투명한 개념'이 아니라 '흐린 개념'일 수밖에 없다. 오직 흐린 개념을 불투명하게나마 유지시키려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쓰고 싶었다. 새로운 보편주의라는 흐린 개념을 쓴 것도 그런 이유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글로 옮겨 쓰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지가 않다. 성긴 생각을 거친 글로 표현했지만 섬세하고 눈 밝은 독자들에게는 작은 의미라도 있는 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자,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쓴 <브렉시트 긍정적으로 보기>는 내 논지와 연결된다. 물론 훨씬 더 실증적이라 참고할 점이 많다. 일독을 권하며 링크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304.html

2016.7.1 추가
정의길 기자의 글을 추천한다고 쓰자, 한 선생님께서 이런 글을 남겨주셨다. 이 기사를 읽으실 분을 위해 옮겨 놓는다.
"정의길씨의 글은 미국 프레임을 강조하다보니 오류(영국에 중동난민이 적다니요. 지금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프랑스 칼레로 모여드는 난민들, 도버해협을 건너는 이들의 에피소드가 영국노동자 심정적 공포의 워천인데)가 있어 아쉽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주문하며 왜 시라아 내전의 수백만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뭍는 일은 거론하지않는지. 진정 제삼세계인의 인권이나 난민을 고려하는 제안이라면 이 어려운 문제를 먼저 직시하는 것이 옳다고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 영국, 서유럽의 제국주의자 독일이라는 프레임을 관철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이 기자분 유럽 관련 글 읽을 때 자주 드는 생각."



대구신문 링크
http://www.idaegu.co.kr/news.php?code=op03&mode=view&num=20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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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


책의 서문은 언제나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이 완성된 후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다. 독자는 서문을 가장 먼저 읽게 되지만, 반대로 저자는 서문을 가장 마지막에 쓴다. 그러면 왜 책의 서문은 가장 마지막에 쓰여지는 것일까? 아마도 저자 역시 책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책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은 마치 저자가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 내용을 책을 쓰기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책을 쓴 후 사후적으로 서문을 쓰기에 생겨나는 ‘서문효과’에 불과하다. 자신의 생각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한 미셸 푸코의 말도, 글은 앎과 무지의 경계에서 쓰여진다는 들뢰즈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란 매끄럽고 완벽한 계획 속에서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글쓰기는 우연이 연속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기 전 저자 자신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이 글쓰기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는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점에서는 여행과 같다. 그렇다면 서문은 글쓰기라는 여행을 마친 저자가 남긴 여행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하나의 위험이 된 사회에서 ‘우연의 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검증이 이뤄진 식당에만 가는 것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화된 경로가 아닌 길로 진입해 헤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여행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 우연히 동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뭘 먹고, 뭘 타고, 뭘 보고, 어디가서 자야할지는 여행 전에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매끄럽게 이뤄진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모험’은 사라져 버렸다. 이청준은 “소설이란 기껏해야 한 사람이 끝없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적는 일”이라고 썼는데, 매뉴얼을 따라 다녀 아무런 헤맴도 없었던 여행에서 글이 쓰여지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연성은 낭비를 가져오고, 위험을 가져온다고 믿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배척하는 문화가 생기는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우연적이고 이질적인 것을 견뎌낼 힘이 미약해진 사회는 엄마들을 ‘맘충’으로 부르고, 성 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난민을 위험하다며 추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타자’는 사라져 버렸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인 모든 것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회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문은 한 권의 책이 매끄럽게 보이도록 해주지만, 글로 쓰여질 만한 삶은 계획된 삶이 아니다. 오직 우연에 내맡겨진 삶이다.


<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문에 쓴 글(2016.6.28)이다.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데리다도, 사사키 아타루도 쓴 바 있다. 특히 데리다의 경우는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것을 예로 전미래시제와 관련해 그의 시간관을 개진하기도 한다. (물론 해석학자들에게는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다) 매일신문에 쓰는 글은 분량이 1300자 내로 써야 해 그런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대신 이번에는 '서문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원래 한 편의 글은 글쓴이가 글을 쓰면서 만나는 온갖 우연적인/우발적인 생각들을 조직하는 과정인데, 서문은 그런 우연성을 마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책의 내용 전체가 매끄럽게 쓰여진 것처럼, 책을 쓰기 전부터 저자가 책의 내용을 모두 장악하듯 파악하고 있었고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건 단지 서문이 만들어 내는 환상 내지 효과라 할 수밖에 없다. 말에 도취되면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을 하듯이, 글쓰기 역시 그런 도취의 과정이자 어떤 세계에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는 글쓰기를 하나의 여행에 비유했지만, 동시에 내 생각을 넘어선 생각을 받아쓴다는 점에서 '계시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문은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응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데리다가 글쓰기를 In-scription이라고 할 때, 텍스트 '안'으로 기입'되는 것은 텍스트 밖의 것,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현대 철학이 정치신학으로 돌입하는 동기가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이유로 성서가 계시에 의한 받아쓰기의 결과물이라는 신학적 주장의 의미도 재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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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문지 푸른 문학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엮음, 김종회 책임편집, 황순원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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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얼마 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이야기에 있어서 죽어 가는 자의 권위에 대해 생각했었다. 나는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려고 몇 년만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었고, 그 직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은 탓인지 이번에도 두 책이 겹쳐 보였다. <소나기>는 1952년에 쓰여진 작품인데, 이 시기가 한국전쟁 당시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나라에서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하는 과정" 에서 쓰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디디 위베르만은 우리가 이야기와 멀어진 이유를 벤야민의 말을 빌려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격의일 수 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하는 학자적 책임과 같은 것은 사람이기에) <소나기>에서 소녀가 죽을 때 한 말, "자기가 죽거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한 부분에서 벤야민이 이야기꾼에 대해서 쓰면서 하는 말, "이야기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죽어 가는 자에게서 소통 가능한 형식을 띠게 된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표현과 자신의 시선 속에서 갑자기 잊을 수 없는 것이 솟아 오른다. 이것이 이 사람을 스쳤던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한다"와 겹쳐 보였다. 아마도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는 그래서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나기>의 기원에는 죽어가는 소녀의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소나기>에 대한 아홉편의 오마쥬다. 개인적으로는 전상국의 <가을하다>는읽기 좀 거북했지만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재밌었고, 발상도 흥미로웠다.  특히 '이어쓰기'를 전승이라고 할 때 이어쓰기는 이야기만의 독점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소나기>를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고립된 소설이 아니라 경험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홉 편의 이야기에 모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1.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혹시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 읽어보셨나요? 


2.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라면 국민단편이니 저도 당연히 학교 다닐 때 읽어봤죠.


 그러면, 혹시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소녀의 이름도 아시나요? 혹시 기억하세요?


3. 소설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왔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네, 소설 <소나기>에는 한 소녀와 한 소년이 나옵니다. 소녀는 서울에서 온 윤초시네 증손 딸이구요 분홍색 스웨터에 단정한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5학년 여학생입니다. 소년은 소녀가 온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고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 거리는 부끄러움 많은 동갑내기 친구에요. 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만난 소녀를 좋아해 꽃도 꺾어다 주고, 밭에 들어가 무도 뽑아 나눠 줍니다. 소녀에게 잘 보이려 코뚜레도 뚫지 않는 송아지 등을 타보이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둘은 산너머로 놀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납니다. 소년은 소녀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도록 수수밭으로 달려가 수숫단을 세워주고, 비가 와 물이 불어 있는 도랑을 소녀를 업어 건넙니다. <소나기>의 결말은 아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일로 앓다가 제대로 약도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죠. 소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4. 그 옷은 소년과 함께 소나기가 오는 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죠? 소년의 등에서 진흙물이 베어 버려서 얼룩이 생긴..


 네, 아마 소녀는 소년과 산너머까지 놀러다닌 것이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했는데요, 이 말은 소녀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해요. 


5. 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기 전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소나기>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다니며 국어 시간이었는데요, 교과서에 참 좋은 작품이 많지만 제게는 <소나기>는 소설을 읽은 원-체험이라고 할까요, 소설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 느낀 원초적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도, 또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개울이 흐르고, 갈대 밭이 있고, 수박 밭, 무 밭 사이로 저 멀리 원두막이 보이고, 허수아비를 흔들고, 아름다운 풀꽃 들꽃이 피어있는 공간은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보편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소녀가 남긴 말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죠. 

 지금까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사실 <소나기>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에서 엮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책이에요. 이 책의 부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남는 여운과 마지막 대사가 불러 일으키는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소나기>를 이어쓰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6. 아, 그러니까 <소나기>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작품을 담은 책이군요. 정말 재미있는 기획이네요.


 아까 제가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시냐고 여쭸는데요, 원작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작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법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가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했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나기>를 이어 쓴 서하진 작가의 <다시 소나기>에는 소년의 이름은 ‘환’, 소녀의 이름은 ‘윤희수’로 소개됩니다. 소년, 소녀에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설의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다시 소나기>에서 ‘환’은 윤희수의 사촌인 윤희영과 한 반이 됩니다. 처음에는 희영이 희수의 사촌인 줄 몰랐던 환은 희영이 희수와 많이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우연히 함께 귀가하다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둘이 걷다 다시 소나기를 만나고, 둘은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서하진 작가는 희수와의 기억이 사촌인 희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발휘해본 것이죠.


7. 아, 재밌네요. 마지막에 환과 희영이 다시 소나기를 만나는 것도 원작 <소나기>의 내용이 오마쥬되는 거네요.


 네, 그래서 이 작품 제목이 <다시 소나기>이기도 해요. 이외에도 아홉 편의 단편에서 원작 <소나기>의 여러 내용이 차용되고, 저마다 다른 상징과 의미로 활용됩니다. <소나기>에서 소녀가 개울가에서 소년에게 집어 던진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을 집어 던지며 소녀가 소년에게 한 말 ‘이 바보’라는 말, 또 소녀가 소녀에게 건네 준 ‘대추 한 줌’,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소년이 근동에서 제일 가는 맛이라 서리한 ‘호두’, 소녀가 입고 다녔던 ‘분홍색 스웨터’, 둘이 함께 맞았던 ‘소나기’ 등 소설에 나오는 소품과 소재들이 아홉편의 소설에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책에서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녀가 죽고 나서 소년의 슬픈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헤살>에서는 소녀가 죽고난 후 소년도 며칠 아팠다고 작가는 상상합니다. 소년은 학교도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유급을 피하려 학교에 가는 날 다시 문제의 개울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물 안개가 자욱히 껴 잘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응시하며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제가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소년은 한 발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그리고 다음. 네댓번째, 예닐곱번째를 가볍게 건너뛰어 기어이 그 자리에 섰다. (중략) 소년은 부스러지고 눅눅해져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호두 알맹이를 개울에 뿌렸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춤을 추는 듯 떠내려갔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나오는 대로 뭐든 개울에 떨어뜨렸다.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하며 소녀의 목덜미처럼 흰 조약돌까지”.


8. 호두 알맹이도, 대추알도, 조약돌도 개울에 떠내려 보내며 슬픔까지 떠내려 보려고 했던 것이군요. 


 네, 그래서 저도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년의 애도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었구요, 특히 <헤살>은 이야기가 이뤄지는 시점도 소녀가 죽고 난 직후고, 문체도 황순원 작가의 것을 최대한 따라 쓰고자 한 점이 있어 마치 <소나기>와 한편의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소나기>에서 호도, 대추알, 조약돌은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고 수줍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지만 <헤살>에서는 슬픔과 애도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겠죠.


9.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모두 다 재밌었는데요, 특히나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작품은 손보미 작가가 쓴 <축복>입니다. 좀 소개를 해드리면요, 손보미 작가는 <소나기>에 소년과 소녀 두 사람 말고 원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제 3자를 개입시킵니다. 그 제 3자는 바로 소녀를 좋아하는 소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녀입니다. 기발한 상상이죠? <축복>에서의 주인공인 이 시골 소녀는 서울서 전학 온 소녀를 부러워 합니다. 얼굴이 ‘햇볕에 타서 시커멨고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자르고 다녔던’ 자신과 ‘분홍색 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양말을 신고서는 얼굴이 아주 하얀’ 서울서 온 소녀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 소년이 서울 소녀에게 갈꽃을 꺽어주고,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하는 걸 모두 숨어서 바라 봅니다. 못났고 예쁘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에 비해 서울 소녀와 소년의 데이트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거죠. 그런 소녀는 서울 소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여자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소녀가 죽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서울에 있는 여대에 진학 후 친구들이 시위를 하며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됩니다. 소년이 서울 소녀가 죽었을 때의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구요.


10. 아,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심지어 이 책에는 소년이 노인이 되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희준 작가가 쓴 <잊을 수 없는>에서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동물원에서 어린 손녀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소년은 치매 초기 증상를 보입니다. 치매를 앓으며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져 이제 노인은 소년일 때의 기억 앞에 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이십대의 가슴앓이와 함께 지나가 버렸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소녀의 기억은 전생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손녀와 함께 있는 동물원에도 소나기가 내립니다. 인생의 끝자락에는, 열정도, 사랑도, 가슴앓이도 사위어가지만 그럼에도 동심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이 작품에서 원작 <소나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소나기는 그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됩니다.


11. <소나기>의 소년이 노인이 된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지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 문학촌에서 여러 작가들이 <소나기>를 오마주한 작품을 묶은 책입니다. 다섯 편은 황순원 작가의 경희대 제자인 다섯 명의 현역 작가들, 네 편은 경희대 출신의 젊은 작가 4명의 작가가 썼습니다. <소나기>는 1952년 작품이구요, 이 소설이 쓰여진지는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엮인 아홉 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고민들도 담고 있습니다. 소년을 노인으로 그린 작품은 기억의 문제, 세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 시골 소녀와 서울 소녀의 대비가 나타나는 작품에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소년이 이제 자라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도시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소녀가 외계인이었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저마다 지금의 문제를 <소나기>의 뒷이야기를 상상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책을 구매하시면, 별책으로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노트를 한 권 받게 되시는데요, 여기에는 독자들 역시 자신만의 <소나기> 이어쓰기를 권유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홉 명의 작가처럼 이번 여름 소나기 오는 날, 마음을 다잡고, <소나기> 이어쓰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그렇게 쓴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시대가 담겨 있는 것이죠. 거기서부터 치유가 일어납니다. 문학의 힘인 것이지요.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읽어보신다면, 청취자분들, 문학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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