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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가난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1. 찰스 디킨스가 쓴 <황폐한 집>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조’다. 조는 고아고,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조, 그는 결국 천연두로 죽게 된다. 디킨스는 조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조, 내 말을 따라 할 수 있니?”
‘선생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라 할 거예요. 좋은 말이라는 걸 아니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네, 이거 정말 좋아요, 선생님’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빛이 밤이 되어 어두워진 길로 왔다. 죽음이다! 죽었습니다, 전하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었습니다, 모든 교단의 좋은 목사님과 나쁜 목사님. 죽었습니다, 가슴에 천상의 측은지심을 품은 남녀여. 죽음은 이렇게 매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조가 ‘아버지’란 말을 정말 좋다고 한 데에는 그가 살면서 이 말을 한번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아고, 병이 들었고, 이제 죽은 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조는 ‘가난한 자’다.


2. 조의 죽음을 묘사하는 디킨스의 글을 읽다가 나도 가만히 주기도문 전체를 암송해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기도임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먹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매일 같이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은 아닐 것이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법이 자녀 세대에서 대를 잇거나, 세금과 정치, 호사스런 치장, 관념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쌓아달라는 기도가 어울릴지언정, 매일 매일을 이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내게 닥쳤던 가난은 나를 늘 움츠려들게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 역시 매일 같이 내게 일용할 양식이 있길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학교를 부디 버스타고 갈 수 있도록, 학교에 가져가야 할 교재를 하나님이 예비해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3. 대학을 마치고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부터는 나는 내가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주기도문의 기도가 더 이상 간절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섭섭했다기 보다 내게 승리감을 주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노골적으로 말할 순 없었지만, 가난한 자들은 가난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난에서 벗어난 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의 가치판단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자와 빈자와 같은 ‘위계’는 불가피하고, 가치판단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나는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잘 쓰지 않는 회의와 의심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가난한 자’의 존재에 대해선 철저하리만큼 적용했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가난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가난’과 ‘가짜 가난’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라고 여겼다. 간혹 해외토픽에 나오는 백만장자 앵벌이는 ‘가난’을 이용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기꾼을 판별해야 한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기꾼들과 구분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의 결론은 진짜 가난한 사람을 돕게 되는 결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도 없고, 도와서도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좀 종교적 색채를 가미해 말하자면, 사실 나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회의, 의심, 구분, 분석은 (감히 말하건대) 사탄이 내게 준 생각이었음을 깨닫는다.


4. 디킨스의 작품에서도 ‘가난한 사기꾼’이 등장한다. 조와 대비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스킴폴’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코스프레하고, 어린이를 흉내 내는 어른이다. 악마의 성격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밀하다는 것은 스킴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것과 동시에 교활하다.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디킨스의 묘사에 놀라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킴폴을 친구로 받아주는 잔다이스는 내게 더 큰 놀라움을 줬다. 잔다이스의 미덕은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에는 ‘속을 수 있음’, ‘상처 받을 수 있음’, ‘바보가 될 수 있음’ 등을 각오한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지,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지, 저 사람은 가난한지, 가난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는 묻지 않는다.

어쩌면 잔다이스도 묻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회의, 의심, 분석을 했겠지만 그의 결론은 나와 달랐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 없거나 도와서 안된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보가 될 수 있고, 속을 수도 있고, 상처 받을 수 있지만 도와야 한다’로.


5. 이런 이야기를 파트너와 어제 밤 함께 하면서 나와 내 파트너가 가난으로 힘겨울 때 우리의 ‘가난’이 의심 받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둘은 모두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냈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 아버지가 부도날 때 돈을 많은 숨겨뒀어”, 내 이모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돈을 숨겨뒀을 리 없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의 고모부가 굉장한 부자야”. 교회 장로 중에 한 사람이 한 말이다. 그 고모부는 부자이긴 했지만 나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가난’은 가난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언제나 의심받고, 도전받고, 내 가난을 증명하라는 청구서 앞에서 시달린다. 우리는 그 때의 서러움을 나누면서, 비로서 바로 그 때 우리도 그 때 그 이모와 장로가 한 ‘가난에 대한 의심’을 우리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성범죄 피해자에게 도식적인 ‘피해자상’을 강요하는 법정처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 판단해왔다. 부끄럽지만 가난함에 대한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여태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통과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 정책, 이론을 말할 때 ‘가난한 사람’은 오직 내 생각 속에만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관념에 치우친 것이다.


6. 성서는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관념이 아니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구절도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바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가 되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제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바보가 되기를 자처했다.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가난’에 대한 메시지이며, 가난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로 교묘하게 해석하지 않는 자세는 우리를 복음의 중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마태복음의 해석을 누가복음의 사실보다 더 선호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교회 뿐 아니라 선량하다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속을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 있고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인기가 없다. 영화 <두 교황>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자, 옆에 있던 브라질 상파울로 명예 대주교인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말을 건넨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교황이 된 이에게 건네기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7. 디킨스의 작품을 읽다가,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고, 가끔은 속기도 했고, 바보처럼 살았던 고 김건호 목사님이 보고 싶었다. 디킨스를 읽으며 떠오른 가난에 대한 생각과 김건호 목사님의 형형한 눈빛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이토록 거친 메모를 남긴다.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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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도 오랜만에 하는 탓일까요, 뭔가 부끄럽고 좀 어색하군요.

음, 볼드저널 15호 부부위기 편에 글을 쓰게 되어, '요즘 부부 공생의 위기'라는 주제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지난 금요일, 헤이그라운드에 다녀왔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시는 이혜민 에디터님과 제가 여러 잡지를 통해 글을 접해 온 장근영 박사님과 함께 스피커가 되었어요. 지난 해는 미술관에서만 주로 강의를 했는데, 올해 처음 강의는 헤이그라운드에서 시작했습니다. 뭔가 생각이 신선하게 되는 것 같은 멋진 장소였어요. 

이혜민 에디터님의 강연에선 '요즘 부부' 의 군상이 이토록 다양한지 놀라웠고, 다양한 '결혼' 모형을 만들어가는 아방가르드 부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제가 왜 '요즘 부부'가 아닌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장근영 박사님의 강의는 부부 생활은 사회 생활과 달리 자신의 돌아이-근성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영역이니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고쳐가려는 노력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정돈된 강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정돈되지 않았기에 좀 더 기분좋은 느낌이 있고, 그럼에도 플로어에 계신 분들이 저희 스피커들의 말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북토크 장소 사진을 못찍어둔 것이 아쉽습니다. 아마도 그날 다녀가신 분들이 또 올려주시겠죠. 저는 강연 원고를 써놓고도, 강연원고에 맞춰 제대로 말을 하고 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말이 좀 많았나 하는 후회도 남았습니다. 그래도 장근영 박사님과의 만남도, 오랜만에 볼드저널의 여러 분들과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기분 좋은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좀 길지만, 제가 말한 내용의 전문을 올려 보려 합니다. 혹시 공유하신다면 댓글 남겨주시면, 제가 잠을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볼드저널20분 스피치/ 헤이그라운드/ 요즘 부부, 공생의 기술/ 부부관계에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


저는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철학의 임무는 ‘보는 것’이라기 보다 ‘잘 보는 것’에 있죠. 철학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결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 이면에서 이 세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를 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잘 아실 ‘이데아’ 같은 것이죠.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것은 ‘가상’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데아 같은 ‘진짜 세계’는 특별하게 훈련된 사람에게나 보인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요, 피직스 physics라는 말에 ‘메타’meta라는 말이 붙은 겁니다. 역시 Physics, 즉 물리적 세계 이면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겁니다. 저는 원래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학도 철학과 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죠. 철학자나 신학자 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도 어쩌면 좀 비슷합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려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겁니다.











저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목표도 당시 세 살이던 제 아이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는 것’을 돕는 것에 두었죠. 그래서 이 책은 아이가 하는 행동이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하는 행동에는 그냥 드러난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내 마음의 본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아에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찾아보며 공부했죠.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며, 저는 아이를 최대한 이해해보기 위해 저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를 최대한 열심히 관찰하고, 아이 행동의 의미를 섬세하게 이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니체가 한 말 중에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며 제 아이를 해석하고, 저를 해석하려고 했죠. 저는 그것이 철학자들의 임무이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 ‘부부위기’, 공생의 기술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인데요, 저는 부부 관계 전문가도 아니고, 제 파트너와 특별한 위기가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래서 제게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저희는 동갑내기, 문과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철학’과 ‘해석’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요, 저는 부부생활에도 서로를 향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철학이 이런 식으로 ‘원리’를 밝히기 위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해석’에 반대하고, 해석이 부부 관계를 늘 힘들게 한다는 말씀을 이제 드리고자 합니다. 세 살 아이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면, 아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아이와 저, 두 사람 사이의 불행도 지금은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파트너, 그러니까 아내를, 제 아이를 해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선 저는 제 파트너가 하는 행동과 하는 말 이상의 ‘저의’나 ‘의도’에는 가능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서로 하는 농담은 예외죠. 농담은 해석을 해야 재밌습니다만, 제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가능한 한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듣고는 저를 무시하는 건가 하고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제 파트너가 저를 무시할 의도는 없어요. 그런 식으로 파트너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파고 드는 건 같이 사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본의, 저의, 의도 이런 것 묻지 않고, 파트너를 향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제 내면의 해석과 싸우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이를테면 ‘살 좀 빼’라는 말은 제게는 좀 기분 나쁜 말입니다. 이 말과 함께 이 말이 갖는 진의가 동시에 바로 해석되기 때문이죠. ‘살을 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나를 무시하고 있다’, ‘나를 뚱뚱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더 나아가 ‘내가 뚱뚱해서 내 배우자가 나를 부끄러워 하는구나’. 물론 그 반대의 좋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를 사랑해서 염려가 되니까 살을 좀 빼자” 라거나, “네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자” 정도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죠. 살 빼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은 기분이 나쁩니다. 저는 철학 연구자로 정체성을 삼고 있으니 여기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간 해석을 하죠. “내 파트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내 존재로 사랑하지 않고, 내 겉모습을 보고 내 행위를 보고 사랑하는구나” 하고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탁에 앉은 아이에게 손 씻고 다시 오라고 하면 아이가 인상을 쓰지요. 인상을 찌푸리는 건 그냥 귀찮아서 그런 겁니다. 다른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인상 쓴 얼굴에 대한 ‘관상’ 해석에 들어갑니다. 거의 자동적으로 해석이 이뤄지죠. 저 인상은 ‘아이가 아빠인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이죠. 더 나아가 ‘아이는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기본적인 습관조차 형성이 안되었다’로 해석되면 불안이 동반됩니다. 지금 제가 한 해석 중에 사실 그 자체보다 더 나은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까요? 해석은 저와 제 파트너, 아이를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저는 오랫동안 해석을 옹호해왔기 때문에 파트너와 싸울 때마다 항상 제 진심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가 제 말이나 행위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담아 해석해주지 않는 것’에 늘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인터뷰에서 “지금 제 파트너는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 당시 정말로 제 파트는 미국에 있었죠. 그 인터뷰가 출간되고 그걸 읽은 파트너가 미국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파트너가 미국에 있으면 이전 파트너는 어딨어?”.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그러면서 “지금 제 파트너라고 하면 옛날 파트너도 있다는 말이잖아?”라면서 저보고 왜 오해가 생기게 말을 하냐는 거에요. 저는 제 말이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말의 본래 의도가 그게 아니잖아?”라고 했더니, “네가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어. 애초부터 말을 정확히 해야 하는 거지”라는 말이 되돌아왔습니다. “파트너는 지금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였죠.











이번 볼드저널 15호에도 잠깐 썼지만 우리 부부의 갈등 아니면 위기는 가끔은 제 부모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요, 문제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현이 좀 섬세하지 않다는 거에요. 정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시는 스타일, 좋게 말하면 뒤끝 없고 어떻게 들으면 막말에 가까운 말들도 하시죠죠. 그래서 제 파트너가 받는 충격을 완화하려면 저는 자주 제 부모님의 ‘진심’을 강조해야 합니다. 실제로 부모님은 며느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니까요. 하지만 제 파트너는 왜 부모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내 아들은 일하고 있는데, 너는 미국도 가고 참 좋겠다’고 어머니께서 제 파트너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 말을 듣고 속상해하는 파트너에게 제 어머님의 진심을 말해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상처는 상처니까요. ‘진심’을 왜곡하지 말고,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서로의 말을 긍정적으로 잘 해석해서, 가능한 서로의 진정성을 잘 해석해서 받아주면 좋은데, 일단 해석이 들어가면 긍정적 해석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은 다 불완전하고, 상처가 있고, 콤플렉스가 있는 존재들이라 상대의 진심에 초점을 맞춘 해석보다는 자신의 상처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등감과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서로의 말과 행동에 대한 해석을 중지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파트너의 이런 행동에는 ‘이런 이유’가 있고, 언제나 저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 해석하고 나면, 그 해석은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합니다. 저는 파트너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파트너는 제가 늘 자신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죠. 그게 불신이고, 부부위기 자체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사실은 이게 상당히 애매한 말입니다. 자주 쓰는 말인데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에게 제 말이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 진심, 제 진정성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진심, 제 진정성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심, 진정성은 이데아나 신과 비슷한 겁니다. 이데아나 신의 실체가 의심스러운 만큼 진정성과 진심의 존재도 그렇죠. 성서에서는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 진정성을 보실 수 있죠. 하지만 사람은 제 중심을 보기 어려울 겁니다. 신의 영역을 제가 제 파트너에게 강요할 순 없는거죠.

현대철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에 어느정도 합의를 이룬 듯 합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자아란 없다고 합니다. 자아가 있다고 해도 모든 자아는 계속 변하고 있고 운동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여러 겹으로 되어 있고, 끊임 없이 움직입니다. 이걸 애벌레-주체라는 비유로 말하기도 하죠.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우리는 모두 다른 ‘-되기’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현대 철학이 변하지 않는 하나의 본질적인 자아 대신 ‘분열증적 자아’를 내세우는 것은 진심, 진정성이란 말이 더 이상 우리 내면의 있는 내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하죠. 리처드 세넷이란 사람은 심지어 우리에게 “자아란 외양에 있다”, “우리의 진정성은 우리의 겉모습 자체다”라고 말합니다. 상대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해석’을 그만둬야 합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말과 행동 그 자체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말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하고, 행동은 좀 더 절제해야 합니다.

해석은 상대를 길들이기 위한 것,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형욱 씨는 개들의 행동을 보고 해석합니다. 개들은 어느정도는 본능-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니까 해석을 하면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배우자는 아닙니다. 배우자들은 우리가 해석해서 원리를 발견해, 내가 길들일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부부 관계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해석불가능한 대상이란 점에서 개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노동이 됩니다. 상대의 말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죽하면 ‘산은 산이요 물이 물이요’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수행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말을, 해석 없이 들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콤플렉스나 상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상대 말이 ‘의도’가 아니라 ‘말’로 들리게 됩니다. 또 상대가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만든 ‘서늘한 말’이 필요합니다. 말을 섬세하게 다듬고, 표현을 위한 다양한 양식이 필요한 거죠. 나의 진정성과 진심은 내 말과 행위에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오해할 말을 하고, 오해할 행동을 하면 결국 오해를 삽니다. 그러니까 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는 말이 거칠어도 남녀의 비대칭적 권력이 부부관계를 유지시켰지만, 우리 세대는 권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 부부관계는 없습니다.

부부란 정교한 말의 공동체, 둘만의 섬세하고 은밀한 표현을 나누기로 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하지만 해석에 반대한다고 해서 서로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는 말에도 반대합니다. 부부 관계가 고된 노동이라면, 서로의 말을 자기 편에 유리하게 해석하지 않으려는 고된 노력, 자신의 진심 그 자체인 말을 가능한 정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5호 볼드저널에서 한 인터뷰이께서 남편이 카페에만 가면 쓰는 말, “오브제”, “시그니처”라는 말이 정말 싫다고 해요. 저 역시 “러프하다”던가 “되어지는”이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합니다. 왜 싫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싫어요. 파트너는 제가 ‘잃어버렸다’를 ‘잊어버렸다’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다듬고, 코드를 맞춰가고, 둘만이 웃을 수 있고, 서로 더 고양될 수 있는 말을 공유하는 것이 부부 공생의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제 배우자를 ‘파트너’로 부르는데, 이것도 좀 유별나 보이지만 말을 좀 정교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아내란 말은 제게는 평등한 언어로 들리지 않아요. 게다가 거기엔 좀 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파트너라는 말로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연기 파트너로 호명합니다. 저와 제 파트너는 서로의 자아가, 행동이, 말이 일관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일관적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과제를 나 자신과 배우자에게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제 파트너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너 그 때는 이게 좋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또 아니라고 해?’ 같은 질문은 제게 하지 않습니다. ‘왜 책을 사놓고서 읽지는 않아?’ 같은 질문과 비슷한 말이죠. 제 파트너는 제가 책을 살 때는 그 책을 읽기를 희망했고, 지금은 그 책을 읽기를 간절히 희망하지 않는 존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존중합니다. 책을 읽길 원하는 나와 책을 도무지 읽고 싶지 않는 나, 두 명의 다른 남편을 모두 남편으로 받아들여주죠. 친구들 모임에서 좀 목소리가 커지며 거들먹대는 나와 불안이 올라와 아이처럼 행동하는 나, 두 명의 다른 나도 동시에 받아주죠. 그 때마다 제 파트너는 제 연기의 파트너가 됩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이중적으로 행동하나? 왜 이렇게 모순적인가? 이랬다 저랬다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저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냥 모순적이니까요. 그리고 서로가 부부가 되었을 때는 가까운 사이가 된 만큼 서로의 모순을 가장 가까이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지요. 그 모순을 거부할 때 위기는 시작됩니다. 대신 그 모순을 수용하고 부부관계가 성숙하려면 고된 노동이 필요하죠. 제게 그 노동은 제 파트너가 농담할 때 농담 모드가 되기, 고민을 이야기할 때 친구가 되기, 이성적 관계일 때 괜찮은 남자친구가 되기, 감정적으로 힘들 때 아버지 되기 등입니다. 그리고 친구, 남편, 아버지가 된 나 모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나’입니다. 이 중 무엇이 나일지 물을 필요가 없죠.


며칠 전에 파트너가 제게 말하더군요.
“이번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잘생긴 남자와 한번 살아보고 싶다”.
저보고 살을 좀 빼라는 의미로 한 말인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그 말을 해석 없이 받아들였죠.
“기꺼이 지금 죽어 줄 수 있다”고요. 우리 부부만의 농담 코드입니다.
















눈치 채신 분도 물론 계시겠지만 제가 드린 오늘의 말들은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영감을 얻은 겁니다. 이 철학자는 ‘해석은 비평가가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와 아이에 대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비평가처럼 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파트너와 아이들 모두 예술일 뿐 아니라 예술 이상의 존재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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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오늘은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의 니켈편을 읽었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주기율표>에 나온 등장인물에 비하자면 바르바리쿠에 가까운 김영선씨는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3장까지 읽고 그 이후 3년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거짓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K씨와 같은 바르바리쿠에 가까운 사람, 자신만의 윤리를 토대로 세상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 의사가 되었지만 온갖 종류의 의무와 일정과 마감을 싫어하고, 미국이 단지 시끄럽기 때문에 미국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하간 K씨에 비할 바 아니지만 프리모 레비의 책은 나 역시도 하루에 많은 분량을 읽어내기 어렵다. 기껏해야 두 편 내지 세 편 정도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의 고작이다. 정말 재밌지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니켈편에서 프리모 레비는 대학 졸업 후 석면 광산에서 석면 채굴 후 버려진 암석덩이에서 니켈을 채굴하는 일을 했던 추억을 적고 있다. 암석에서 석면의 양은 고작 2%, 버려지는 양은 98%다. 2%를 위해서 98%는 그저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일까? 프리모 레비의 역할은 2%의 석면을 위한 일이 아니다. 버려진 98%의 돌에서 다시 쓸모 있는 것들을 골라내야 하는 것.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많은 돈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니켈은 98%의 버려진 돌에서 아주 아주 작은 양에 불과했다. 버려진 것들 중에서 쓸만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버려진 것들 중에서 쓸만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 중에 프리모 레비는 '승리였다'고 느꼈고, '나를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선언했던 자들에게 결코 저열하지 않게 복수했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버려진 것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쉽게 버려질 만한 일이, 결코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납과 수은 이야기가 버려지지 않고 이 책에 실리게 된 것 역시 누군가는 이토록 이질적인, 어쩌면 쓸모 없어보이는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보며 가치 있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순수하지 않은 화학 물질의 은유로서 이 책 역시 하나의 화학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니켈편은 인간을 폐기하는 세상에서 겨우 벗어난 한 인간이 암석을 폐기하는 세상에서 폐기된 돌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98%의 암석을 버리기도 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또 그것이 못내 아까워 여러 번 돌아보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하다. 나의 친구, 바르바리쿠 K 씨와 다시 쓸모 없어 보이지만 같이 읽으면 꽤나 재밌는 책들을, 버려진 돌에서 니켈을 찾듯이 함께 찾아 읽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내가 당시 썼던 광물 이야기 두 편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도 내 자신의 운명과 거의 흡사하게 파란 많은 운명을 겪었다. 폭격과 탈출을 겪어낸 것이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최근 수십 년동안 잊고 있었던 문서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찾았다.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주기율표,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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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결정과 결단을 내려야 했다.이런 성숙하고 책임있는 행동은 파시즘이 우리에게 훈련시키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담백하고 깨끗한 좋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에서

지난 일요일 대구의 팀본색에서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반비)의 출간과 관련해 서경식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많은 화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오래 남았던 질문이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부터 반-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즘이 대두하기 전까지 보편적 가치가 승리하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 20년 간의 전후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이 전후 민주주의의 유산이 없다면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생은 "그런데 이런 시기는, 인간의 단편화에 저항하며 인간성의 위대한 가치가 승리하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예외적이었던 것일까" 하고 청중에게 물으셨다.


답하기 역시 어려운 물음이지만, 우리가 결정과 결단을 내리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의 결정과 결단보다 더 나은 결정과 결단을 해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늘-언제나 굴복하고 있다면 이 시기는 예외적이었던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의 대리가 아니라 '결정'의 대리가 된 민주주의는 이런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범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주기율표'에서 나 개인적으로는 잘 와닿지 않았던 장이 '수소' 였다. 물의 전기분해와 그것으로 분리된 수소와 산소, 수소의 작은 폭발, 엔리코, 프리모 레비의 첫번째 실험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몇 년 전에 읽었다가 해결되지 않았던 궁금함을 다시 생각해보려 책을 읽었다가 약간의 실마리를 찾았고, 그렇게 '철'까지 다시 읽어나가다 발견해낸 것이 위의 문구다. 결정의 향기. 결정에서 나는 향기는 자유의 향취라는 말... 파시즘은 우리에게 자유를 훈련시키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내 아이와 학생들에 대해서도 결정을 미루거나 결정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더 편하다면 우리는 조금씩은 파시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결정엔 담백하고 깨끗한 향기가 난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결단이 예외를 예외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결정에는 좋은 냄새가 난다.


차로 다시 선생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가는 길에 선생님께서 내게 조용히 물으셨다. 이념과 종교의 규제 없이, 소위 배운 것이 많지 않아도, 누군가의 일체의 강요 없이도 올바른 것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갖는 '자율적인 윤리'는 어떻게 가능할 것일까? 장애를 가진 유태인 아이를 돌보던 이탈리아인 여성이 그 아이와 함께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함께 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일까? 말 수가 적고, 주변과 관계 맺기 어려워했던 로렌초가 목숨을 걸고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배푼 호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피델리티'(fidelity), 인간이 인간에 대한 충실성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을 다해, 선생님께 그것이 철학자들이 설명하기 어려워 하는 '잔여'고, 현대철학이 잔여의 철학, 반-철학이 되는 본질적인 이유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잔여'로부터 어떻게 자율적인 윤리가 가능한 것인지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레비나스에게도, 데리다에게도 그건 '도약'으로밖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오늘 프리모 레비를 읽으며, 어쩌면 이 문제도 향기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의 향기, 결단의 냄새, 그것을 맡아본 사람만이 목숨을 건 결정을 한다. 파시즘은, 관료주의는 결코 우리가 자율적으로 옳음을 결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결정은 힘들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결단은 고되지만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가..


그 고기 맛이란 강인함과 자유의 맛, 실수도 할 수 있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맛이다".


다시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냄새도, 맛도 오직 자기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냄새도, 맛도, 기쁨도, 그리고 고통까지도 말이다.








사진은 모두 젊은 포토그램퍼 김도균(moolrin) 작가의 허락을 받아 사용한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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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좀' 말려줘


얼마 전 북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카페에 들어서자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호두나무로 만든 두꺼운 탁자 위에는 터키식 램프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쿨렐레 연주도 하시나 봐요?” 헤링본 마룻바닥 위에 놓인 걸 보고 묻자 주인이 말했다. “제가 예전에 언니 ‘좀’ 말려줘라는 우쿨렐레 밴드까지 했어요.” 재밌는 이름이었다. 이후 언제나처럼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터키식 램프가 놓인 탁자에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램프 옆으로 오르한 파묵이 쓴 ‘소설과 소설가’가 보였다. “아, 파묵이 터키 작가라 여기에 둔 거구나.” 책을 펼쳐 읽었다. 이곳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에도 주인이 그어놓은 밑줄과 그녀의 영혼을 스쳐간 편린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카페의 분위기, 책의 선별 등 거의 모든 점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책에 적힌 주인의 깊이 있는 메모를 읽는 것이 좋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가 몰려와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잠시 후 뒤에서 주인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읽던 책을 어디 꽂아두셨어요?” 그 질문을 받고서야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책을 내 가방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이 캄캄했다.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훔친 책 도둑이 되다니. 내가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나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북카페로 향했다. 그 덕에 주인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그제야 이곳은 언론인, 문화기획자 등으로 활약했던 세 명의 비혼 여성들이 세상을 ‘달리’ 보고 싶어 만든 ‘달리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카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도 ‘달리북카페’였다. “책 구성이 너무 좋은 서가예요.”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심정으로 한 말이지만 과장이 아니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마음 아프지만 이제 여기 책을 팔까 생각 중이에요.” 

(달리도서관 인터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8684)


어떤 이유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그 사정을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북카페는 카페 중에서도 회전율이 낮고, 단체 손님이 많지 않아 운영이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세 여성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기세로 의기투합해 자신들의 책을 기증해 여성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고, 지역과 이웃을 위해 별로 돈은 되지 않는 북카페를 열었다. 비즈니스만 생각한다면 가능한 발상이 아니다. 제주뿐 아니라 우리 동네 구석구석에도 이런 언니들의 비경제적 발상으로 만들어진 공공적인 공간들이 있다.

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책은 ‘좀’ 팔지 말라고 말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언니’를 말릴 수 있을까? 나 같은 책 도둑은 할 말 없게 됐지만, 이런 공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싸우는 노력을 더 많은 이들이 ‘달리’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것 외 다른 어떤 방법은 있을까? 그렇다. 언니를 말리고, 영혼과 사회를 끝없는 사유화로부터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관심과 연대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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