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공동체 - 여성, 독립, 운동가
박현정 지음, 윤석남 그림 / 연립서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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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공동체 여성, 독립, 운동가'(연립서가) - 윤석남과 박현정의 빈틈을 채우는 다정한 기록


0. 23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자로 윤석남 선생님이 선정되었고, 대구미술관에서 지난해 말 <윤석남>전이 열렸다. 전시 공간의 절반은 윤석남 선생님이 최근 집중하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가, 나머지 절반 정도는  <핑크룸>, <손이 열개라도> 등 그녀의 초창기 스케치 작품부터  대표작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전시 관람 전 <혼자 가는 미술관>에서 소개된 윤석남 선생님에 대한 글을 다시 읽고 갔는데, 그 때문인지 최근작인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보다 다른 작품들에 더 마음이 갔다. 내게는 초기 스케치 작품들이 참 좋았다.


1.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는 시각적으로 강렬하긴 했지만 어윤희, 차미리사 등 처음 본 인물들에 대해 선뜻 마음이 뺏기진 않았다. 작품 캡션을 꼼꼼하게 읽어 봤지만 A4 반페이지 정도의 글로 그들의 삶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처음 느낀 감각은 뭔가 ‘탱화 같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김천의 직지사까지 갔다. 명부전 주변에 그려진 지옥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딘가 비슷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비슷하게 느꼈던 이유가 뭘까? 내 무딘 감각 탓도 있지만 뭔가 모를 ’무서움’을 지옥도와 윤석남의 초상화 작품들에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모성의 공동체 - 여성, 독립, 운동가>(연립서가)는 윤석남이 그렸고, 그리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에서 윤희순, 김향화, 어윤희, 유관순, 가네코 후미코, 이애라, 최용신, 차미리사 등에 관한 글이다. 이 책은 작품에 관한 글이지만,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전형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다. 이 책을 쓴 박현정의 말대로 “글과 그림은 따로,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윤석남 선생님과 저는 서로 각자의 여행을 떠났고, 길이 다르니 여행지에서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책의 5장은 윤석남의 “이애라 초상”으로 시작하지만, 박현정은 이애라의 딸이 묻혀져 있는, -그러나 지금은 없는- ‘산7번지’를 찾아 나선다. 아현시장에서 버스를 타고 고개를 오르며,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죽게 된 이애라의 딸을 떠올린다. 이어진 아현동 만리동 고개 정거장에서는 이 곳이 왜 애오개로, 아현으로 불렸는지로 생각이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의 발바닥 그림을 보며 러시아로 가고자 서울, 원산, 함경북도까지 갔지만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는 이애라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가파른 비탈길 아래에 놓여 있는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의 책방을 거쳐 만리 배수지 공원까지 걷고 이애라의 삶을 재구성하고 이애라의 딸을 애도한다. 


3.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여성독립운동가의 전기를 기대했다면 크게 잘못된 예상이다. 애초에 ‘여성-독립-운동가’의 전기는 쓰여지기 어렵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녀들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이 없고, 기록이 있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윤석남은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면 상상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 책 역시 한 여성에 대한 아주 작은 기록/기억의 조각에 기대어 그녀들이 걸어갔던 공간을 따라가며 그녀들의 삶을 복원/재생한다. 역사의 큰 이야기들로만은 채울 수 없었던, 그래서 생기게 된 빈틈을 아주 다정하고 섬세한 마음으로 채워나간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글이 아름답다고 느껴진 것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삶 자체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 빈틈을 채워나가는 작가의 솜씨 때문이었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이 책을 읽으며 되살아났다. 작품에 대해 말하지만 작품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여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만 말하는 책이 아니고, 독립에 대해서 말하지만 독립만 말하는 책이 아니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알기 어렵지만, 내게는 서경식의 ‘순례’를 계승하는 글쓰기로 읽혔다.


4. 서간문 형식의 글에서 글쓴이가 마주하는 곤경은 실제 편지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실제 편지라면 송신자인 ‘나’와 수신자인 ‘너’ 사이에는 서로가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는 명확하다. 그러나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이 편지를 보는 제3자(독자)가 존재할 때 ‘수신자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송신자는 '너'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그'(독자)에게도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처럼 수신자들(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세상을 떠난 경우, 송신자는 부재하는 ‘너’에게 글을 쓰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자’(제3자)에게 말해야 한다. 형식과 실질도 분열되는 것이다. 이때 송신자(작가) 입장에서는 송신자의 이야기만이 아닌 수신자 ‘너’의 이야기를 수신자 ‘그’에게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송신자 ‘너’의 이야기를 ‘그’에게 전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한 글이 되면 서간문 형식의 글은 실패하게 된다. 편지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편지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파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서간문 형식의 글이 자주 지루해지게 되는 이유이지만,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편지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5. 이 책이 ‘서간문의 곤경’을 돌파하는 방법은 송신자는 수신자 ‘너’를 수신자 ‘그’보다 더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박현정은 “그동안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목숨을 바친 분들은 결국은 얼마나 많은 시간대를 살아 내고야 마는지요. 여행지 곳곳에서, 그분들과 손을 마주 잡듯 가까이 다가서거나 스쳐 지나가며 눈이 마주쳤기에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수신자가 실존하지 않지만, 송신자인 작가는 그들을 구체적 장소와 기억, 사물과 결합시켜 서사의 축을 구성해 부재하는 수신자를 마치 현존하는 존재로 구성한다. 3번에서 작가가 그녀들이 걸어갔던 공간을 따라 걸어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마치 아감벤의 '부재자의 정치', 데리다의 ‘유령적인 글쓰기’를 떠오르게 하는 전략이다.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문학적으로 호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발화를 수행한다.

송신자는 부재하지만 부재하지 않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살아있지 않지만 살아있는 존재인 수신자들과 깊고 내밀한, 다정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수신자 ‘그’, 우리 독자들이 그 다정한 대화에 귀기울이며/엿보게 만든다. 서간문의 곤경은 송신자가 수신자 ‘너’에 대해 집중할 때만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읽기였다.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닌 1939년생 여성 화가와 1970년대생 여성 작가가 19세기 말에 태어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만나고 엮여서 연대하는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는 느낌은 서간문의 형식 덕분에, 더 나아가 그 형식의 곤경을 넘어서는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다정함의 정치'를 발견했다. 다정한 자세는 연대로, 연대는 정치적 행위로 전환된다.


6. 무서움의 실체 – 자기성찰의 눈

신관빈과 어윤희 초상은 내가 가장 무서울 그림이라고 느꼈던 작품들이었다. 굶주림으로 잠들지 못하는 유관순에게 자신의 밥을 양보했던 어윤희 이야기에서 내가 느낀 무서움의 실체는 내가 그녀들만큼 결기도, 용기도 없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윤석남 작가가 윤두서의 자화상에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느낀 무서움의 정체를 더 명확히 해주었다. “‘불타오르는 얼음’ 같은 눈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추악함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힘에 보는 쪽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윤두서의 눈이 저 역시 꿰뚫어 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191쪽). 

지옥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그런 이유였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가? 정의로운가? 운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와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있는가? ‘모성’을 실천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어느 하나 당당하게 답할 수 없다면 지옥행을 피할 길이 없으리라는 무서움. 이 책이 여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단지 여성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7. 김도균 작가가 이 책의 사진 작업에 참여했다고 해 출간되자 마자 사서 읽었다. 연립서가의 여느 책들처럼 이 책 역시 글뿐 아니라 책의 구성과 형태, 수록된 사진도 뛰어나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용어 해설, 자료, 참고문헌도 충실하게 담겨 있다. 윤석남의 그림, 12인의 독립운동가, 박현정의 글이 섬세한 대위법을 이루는 이 책을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문화일보에서의 소개글처럼 ‘자주 울컥하고 끝내 충일해지는 책이다’.


박현정은 앞서 언급한 <혼자 가는 미술관>의 작가이기도 하다.


윤석남 선생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제일 먼저 시작했던 일인 달리기였다고 한다. 1979년 4월 25일. 구반포에서 국립묘지까지. 바로 오늘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4월 25일에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이제야 리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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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사이먼 쿠퍼 지음, 김양욱.최형우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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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0년대 옥스퍼드 대학의 풍경을 주로 묘사한다. 사이먼 쿠퍼에 따르면 80년대 옥스퍼드는 중세적 분위기 속에서 수학과 과학을 경시하는 분위기의 얕은 지식으로 ‘수사학’이 주를 이루고, 이튼 출신의 특권의식에 절어있는 ’교만한 학생들’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었다. 화이트헤드를 배출했고, 9대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슈루즈베리의 교장은 ‘자연과학은 교육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사립학교들이나 옥스퍼드나 자연과학보다는 라틴어와 문학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의 어떤 부분은 ‘황색언론적인 편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건 당시 영국의 분위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얕은 지식으로도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옥스퍼드에서 너무 잘 배웠다”(35쪽)


사이먼 쿠퍼의 이 책은 옥스퍼드를 ‘삐딱하게 보기’를 통해 이튼을 거친 옥스퍼드 출신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모자라고 교활하며,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지’를 그들의 대학생활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폭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주로 보리스 존슨에 관한 것이다. 그가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했던 협잡들, 상대를 비꼬는 데 능숙한 화법들. 이후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리즈 트러스, 리시 슈낙 등 옥스퍼드대학 출신들의 ’별 것 없음‘을 파헤치고, 브렉시트가 어떻게 옥스퍼드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영국을 통치하는 것은 그들의 계급이 가진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럽연합 정부에 있는 외부인이 이러한 특권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보수당의 유럽 회의론은 어떤 면에서는 우버 택시에 맞서 싸우는 개인택시 기사들의 투쟁처럼 일자리 보호를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사립학교 출신 옥스퍼드 학새들은 그들이 통치할 나라를 그들 자신의 계급과 동일시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누군가 영국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132쪽) 


80년대 중반 옥스퍼드의 분위기, 엘리트 집단의 사고가 한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읽고 있노라면, 브렉시트가 유럽연합의 ’분담금‘ 때문이라던가, 난민 수용에 대한 부당한 요구 때문이라던가, 독일과의 경쟁심 때문이라던가, 영국 내 노동계급의 일자리 부족 때문이라던가 하는 분석은 조금은 피상적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브렉시트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은 ‘영국 귀족과 그들이 다닌 학교들에서 그들에게 심겨진 심성’이 만들어 낸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66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작가 존 스칼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은 난도가 ‘쉬움’으로 설정된 현실 세계라는 타이틀의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성인이 되면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보리스 존슨을 위시한 이튼 출신의 옥스퍼드 졸업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자 출신의 작가는 ‘인신공격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옥스퍼드 초엘리트를 비판하지만,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이 책을 오해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이 책의 원제는 ‘Chums'로 번역하자면 ’끼리끼리‘, 혹은 ’계-꾼들“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카르텔’ 같은 것이다. 작가가 옥스포드 카르텔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에는 이들의 카르텔이 단순한 이해관계에 입각한 ‘이익공동체’라기 보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프렙스쿨을 거치고 세컨더리 사립학교를 거치며 만들어진 ’친구들끼리‘, 혹은 귀족 집단의 농담과 말을 이해하는 집단들끼리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정치인들이 치열하게 정책과 이념 등으로 모이고 싸우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더라도 알고 보면 경기고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을 거치면서 이념/정책 따위와는 무관하게 서로 서로 어릴 때부터 친구로서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 그런 관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옥스퍼드 초엘리트’라는 제목으로 읽게 되면 ’chums'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원리보다 보리스 존스나 데이비드 캐머런 같은 인물들의 보잘 것 없음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는 식의 독해를 하게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인물들이 어떻게 그런 ‘끼리 끼리’ 집단에 들어가서 정치 거물로 성장하고, 그 집단이 어떤 위험한 국가적 결정을 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음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이먼 쿠퍼는 옥스퍼드의 개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더이상 옥스퍼드 대학은 수사학적 토론 기술만 가르치는 대학도 아니고, 과학, 수학을 경시하는 얕은 지식인을 만들어 내는 대학도 아니고, 학생에게 직장 생활에 준하는 40시간의 학습을 요구하는 ‘학술적으로 성장한 대학’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립학교 비율을 높이고, 노동계급 출신을 우대한다는 점에서 ’공정한 대학‘으로 변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옥스브릿지대학에서 학부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학부제 폐지 주장은 옥스브릿지가 ’chums'를 형성하는 플랫폼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지, 초엘리트들에 대한 개인적 반감 때문이 아닌 것이다. 1억에 육박하는 이튼 등록금을 내고도 옥스브릿지에 가지 못한다면, 옥스브릿지에 가는 것이 오히려 그 등록금이 방해한다면 'chums'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의 분석과 제안, 서술방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이 이뤄지는 공식적 입장이 아닌 비공식적, 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훔쳐 보는 것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 정말로 재밌는 책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리스 존슨과 이튼, 옥스퍼드의 힘은 비슷한 수준에 라이벌 구도를 그린다고 알려진 리시 슈낙, 해로우, 캠브리지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무서운 것이라 쉽게 해체하기도 힘들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이 쓴 이 책은 ‘끼리끼리’ 문화에 대한 일종의 내부 폭로다. 이 책은 서울대 출신, 검사 출신, 의대 출신의 ‘chums'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내게는 영국 교육에 대해서,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성찰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옥스퍼드 유니언을 연구한 피오나 그레이엄은 ”영국적인 관념에서 괴짜는 사회를 비판하며 사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산이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괴짜는 일반적으로 신념에 순응하며, ‘태도, 옷차림, 언행, 눈치 같은 외형적인 방식’에서만 괴팍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119쪽)


이 책의 이해를 위해.

1) 영국의 세컨더리 스쿨은 우리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건 퍼블릭스쿨, 그래머스쿨, 스테이트스쿨로 분류해서 이해하면 쉽다. 스테이트 스쿨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이다. 퍼블릭스쿨은 공립학교로 번역되지만, 국가가 비용을 내는 학교가 아니다. 그래머스쿨은 스테이트스쿨의 하나이지만 퍼블릭스쿨에 못지 않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교로 우리로 치면 공립 특목고에 해당한다. 퍼블릭스쿨은 이튼, 해로우, 윈체스터 같은 곳들로 우리로 치면 민사고 같은 곳이다. 등록금과 기부 등으로 학교가 운영되는 영국의 사립학교들로 영국 내 수백 곳이 있고, 국내에 있는 덜위치 같은 곳이 이런 학교들의 프랜차이즈 브랜치이다. 퍼블릭은 개인 튜터링 학습과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퍼블릭을 의미하는 것이지, 공공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 책 속에 소개되는 벌링던 클럽은 영화 ’라이엇 클럽‘을 보면 실상을 좀더 실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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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다시 읽기 2 - 회상과 대화 / 최종 강의 서경식 다시 읽기 2
하야오 다카노리.리행리.도베 히데아키 엮음 / 연립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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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다시 읽기2>, 연립서가

연립서가 최재혁 선생님으로부터 서경식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의미로 <서경식 다시 읽기>라는 책을 기획하신다는 메일을 처음 받았을 때 솔직한 생각은 ’좀 이르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다. 이제 서경식은 대학에서 은퇴하고, 더 왕성한 글쓰기를 할텐데 움직이는 과녁에 활을 쏘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예상은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예기치 않게 서경식은 일찍 세상과 등졌다. 연립서가에서도 예상한 일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최재혁, 박현정 두 대표의 기획 덕분에 서경식의 사상을 한국과 일본에서 나름대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서경식의 텍스트로만은 다가가기 힘들었던 서경식을 둘러싼 컨텍스트, 이를테면 서경식을 만든 역사적 사건, 사람들,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 서경식이 한국에서 여러 층위에 어떤 컨텍스트가 되었는지 그려낼 수 있었다.
특히 <서경식 다시 읽기2>는 서경식이 일본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대담과 에세이를 실은 우정의 기록이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서경식을 나름 읽어온 나로서도 이 책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정말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70-80년대를 규정지은 형제 구원활동, 90년대 책임 논쟁, 자이니치 그룹을 지배했던 민족 논쟁, 2000년 즈음 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본격화된 프리모 레비에 관한 연구, 고립을 감내한 리버벌의 허위의식에 대한 투쟁 등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나 ‘월경’이 지닌 낭만적 느낌으로 서경식을 읽는 것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정말로 잘 보여준다.
특히 모토하시 데쓰야 선생은 서경식의 재일조선인사를 대략 서기 1000년 경부터 시작된 식민주의에 대한 반식민주의 투쟁의 서사에 기입한다. 시부야 도모미 선생은 서경식이 인간의 추악함, 사실은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고 고백한다. NHK PD였던 가마쿠라 히데야는 서경식과 방송을 만들며 쌓아온 우정을 통해 ‘친절한 서경식’을 보여준다. 사키마 미술관장인 사키마 미치오씨와 서경식의 대화는 서경식이 일본 사회 내에서 소외된, 내부식민지화된 이들과 어떤 연대를 펼치려고 했었는지를 그려낸다. 그밖에도 최덕효, 리행리, 조경희 등 여러 젊은 연구자들과의 대화는 서경식 본인이 그토록 하려고 했던 일, 즉 서경식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저는 에세이를 통해 스스로를 관찰하고 이야기합니다. ’자명한 자신‘ 혹은 ’나란 이런 사람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분절화해서 관찰하며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업 방식을 언젠가부터 갖고 있습니다“(330쪽) 그래서 우리는 <서경식 다시 읽기2>를 통해 역설적으로 서경식은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서경식임을 이해하게 된다.

”나 자신을 규정하고 나누고 있는 여러 개의 구분선을 바라보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왜 이런 상황인지, 그런 맥락을 가능하면 지적으로 분절화해서 자기 이해를 하려고 애써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작정입니다“. (334쪽)

어쩌면 서경식이 일생동안 해오려 했던 일과 이 책의 서술방식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서경식은 이런 이해를 자신에게만 했던 것이 아닌다. 여러 개의 구분선으로 분절하여 민족을, 일본을, 예술을 이해하려고 했다. (분절적이란, 단지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민족이라는 단일선, 젠더라는 단일한 구분선만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항대립적일 수밖에 없음을 조선반도와 일본을 걸쳐서 살아애했던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내부에 침투하는 일본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해부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 전 춘천에 가서 이종찬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어느 단체에서 이종찬 선생께 서경식에 관한 연속 강좌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부탁에 대해 이종찬 선생은 ”서경식을 잘 이해하기 위한 목표라면 제 강의를 들을 필요가 있으실까요? <서경식 다시 읽기2>를 읽어보시면 됩니다“라고 답하셨다고 한다. 그 강의가 성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종찬 선생의 강의라면 물론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서경식을 촘촘하게 읽고 이해하려한다면, 어쩌면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자이니치에 대해서, 우리가 외부화했던 그들에 대해서, 우리 안의 식민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다면, 서경식의 책들과 함께 <서경식 다시 읽기2>는 꼭 읽어봐야 하는 것이라 권한다. 특히 우카이 사토시 선생의 글과 서경식의 응답, 시부야 도모미의 글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서경식을 입문하는 최적의 글이라 생각한다.
[추가]
내가 깜박 놓친 것도 있어서 내용을 좀 더 보태고자 한다. 서경식이 교수직 은퇴 후 집중하려 했던 일 중 하나는 '소설쓰기'였다. 이는 소명출판에서 나온 <대담집>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소설쓰기의 전범으로 여긴 작품은 프리모 레비가 쓴 '아르곤', 또 <릴리트>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인물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만나 함께 귀환했던 이들을 포함해 아우슈비츠라는 독특한 공간, 단적으로 '디아스포라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국제적 유대인 집합소'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을 조형했고, 그 때의 인물 탐구를 자신의 소설 내지 에세이에 담았다. 서경식 역시 그런 인물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서경식은 아사히 신문에서 출판한 <20세기 천 명의 인물>에서 대략 마흔 명의 사람들에 대한 인물전을 썼던 것이(국내에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프리모 레비와 같은 형식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뜻과 만났을 것이다. 특히 <대담집>에서 소개한 자신의 이모부, 서경식은 그야말로 '디아스포라적이죠'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쓰는 것에는 <서경식 다시 읽기2>에서 일종의 인물전이 등장하고, 마치 소설 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인터뷰 '서경식, 저작을 말하다'에 담긴 내용으로 153쪽부터 이후 시작되는 내용은 한편의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야스에 료스케, 고자이 요시시게, 히다카 로쿠로, 이바라키 노리코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대한 선생의 스케치는 그의 표현을 약간 활용해서 말하자면 <선한 일본 혹은 일본인>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에서 네 명에 대한 서경식의 글을 서경식의 소설 초안처럼 읽었다.

"야구에 비유한다면 야스에 선생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몰린 팀의 포수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포수는 팀이 위기에 내몰리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지금은 어떻게 해도 한점 줄 수밖에 없나, 이러다가는 지겠구나."라는 식으로 누구보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아, 괜찮아!"하며 팀원의 용기를 복돋아야 하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함께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야스에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166쪽)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참여한 <서경식 다시 읽기1>이 서경식이 한국 사회에 다소 문화적인 관점에서 수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금은 소프트한 책이라면, <서경식 다시 읽기2>는 일본에서 서경식이 뼈를 깎으며 싸우면 조탁한 운동론, 디아스포라론을 보여준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서경식을 만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서경식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도, 소외된 자들의 싸움에 관심이 있는 이들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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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 재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김용규 외 엮음, 김석범 외 인터뷰이 / 소명출판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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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출판에서 나온 <대담집-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읽었다.
최덕효, 정영환 선생의 대담에서는 오랜만에 정말로 큰 지적 도전을 느꼈다. 책에서 3세대로 분류한 이 역사학자들이 벌이는 ‘대담한 기획’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최덕효 선생의 박사 논문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에 대한 일종의 카운터 내러티브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나는 이 책이 일종의 일본의 자기기만이라고 느꼈는데, 어쩌면 역사상 단 한번도 가난해본 적이 없는 나라의 가난 서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덕효 선생의 논문 작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내가 존 다우어의 책에 느낀 불편함의 이유를 알아챘다. 이 책에는 ‘재일조선인’이 빠져 있었다. 패배가 아니라, 패배의 패배를 껴안고 살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최덕효 선생의 기획은 한편으로 서준식의 ‘옥중서신’에 대한 카운터 내러티브기도 했다. 서준식은 옥중 소감에서 한반도가 본류, 자이니치는 지류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최덕효는 자이니치 중심의 역사 서술을 기획한다. 실로 대담하고 놀라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정영환 선생의 논문에 대해서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는 재일조선인사를 자이니치의 시각에서 새롭게 서술하고자 한다. E.P 톰슨과 에드워드 사이드를 계승하며 제3세계와 재일조선인을 연결하고, 유럽중심주의자인 에릭 홉스봄과 대결하려 한다. 김용규 선생님의 잘 준비된 질문과 풍부한 사전 조사, 이재봉 선생님의 예리한 질문이 돋보였다. 특히 김용규 선생님의 질문은 두 학자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큰 얼개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경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3세대 학자들과의 대담보다는 훨씬 더 어두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2023년에 있었던 두 번째 대담은 선생의 악화된 건강 탓인지 몰라도 다른 인터뷰나 강의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냉소적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리고 인터뷰는 늘 그런 것이라 해도, 서경식의 답변은 질문을 조금씩 빗겨 가기도 하고, 질문의 의도를 되묻는 방식으로 우회하기도 한다. 질문과 답 사이의 묘한 어긋남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불편하기 보다는 흥미로웠던 이유는, 인터뷰어들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선생님의 사적 대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의미가 좀 더 다가왔는데, 다시 읽었을 때 선생님의 발언에 선생님의 억양과 말의 스타일이 비로소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 또 다른 인터뷰어인 서민정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선생님의 발언을 검토하시겠냐는 물음에 서경식 선생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고 한다. 즉 두 편의 대담에 대해서 다시 읽거나 고쳐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님과 대담을 하셨던 <만남>에서 자신의 발언을 되짚고, 혹시나 실수를 하실까봐 나 같은 사람에게 녹취를 맡기자고 제안하셨던 것에 비하면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선생님은 대담해지신 것일까, 아니면 조금은 지쳐계셨던 것일까.
물론 그 때문에 가장 서경식의 목소리에 가까운, 그래서 책의 제목인 재일조선인의 목소리를 실현하고, 또 서경식의 목소리를 귀에서 재생시키는 그런 대담이 되었다. 단, 높은 수준의 주의력이 독해에 요구된다는 것도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22쪽 이후의 서경식 선생이 말하는 ‘조국’-론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론으로 읽힌다. 정말로 흥미롭다. 특히 144쪽.
“그런데 그것만 보면 안 되죠. 이 사람이 서양을, 서양 르네상스를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를 보게 되면, 이 사람의 독창성이라고 할까, 특징을 볼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앞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도 그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연구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재일 조선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서양이 그런 경향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봅니다”
나로서는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서경식이 유럽과 아메리카를 다니며 인문기행과 미술관 다니며 음악회를 다닌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되는 지점이자, 여러 선생님들과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어떤 방향으로 꾸려가야 할지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구절이었다. 서경식 선생님과의 2부 대담은 나로서는 너무나 값진 대화의 기록이었다.
책을 읽으며 발견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남겨둔다. 아무래도 대화를 녹취로 풀다보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맥락상 이상한 것들이 꽤 있다. 내가 가장 이상했던 부분은 90쪽이다.
”아까 얘기했던 귀화 안 해서 반갑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라기보다, 저는 문제적인 발언일 수 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디보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귀화를 거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내가 충분한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나는 인용한 부분의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을 곱씹어 읽었다. 대화의 맥락상, 일본이라는 나라가 재일조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였다면 귀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문제적인 발언을 예고했다면 더더욱이 그렇다. 그런데 이 구절만 보면, 귀화를 거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가 된다. 즉 일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거다. 논리적이지 않은 연결인데, 서경식 선생님이 이렇게 실제로 말씀하신 것이면 앞서 말했듯이 수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편집 과정에서 이런 부분은 확인이 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잘못 독해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271쪽, 김용규 선생님의 발언에도 모호한 점이 있었다.
”디아스포라라든지 ‘제3의 길’, 이런 것은 서경식 선생님도 별로 좋아하시지는 않는 것 같던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2세대, 3세대의 경우, 재일조선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있는 디아스포라의 경험들과의 공통성 등도 함께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특성들을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를 서경식 선생님이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녹취과정의 실수일 수도 있고, 많은 부분이 생략되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서경식 선생님은 9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디아스포라 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셨고, 이 개념을 해체해 서경식이 다시 재발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경험들과 공통성을 중심으로 연대를 추구했는데 그가 이를 싫어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편집 과정에서 좀 더 살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책의 자잘한 실수들.
사실 녹취를 풀어낸 책의 특성상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긴 한데, 몇 가지만.
1) 262쪽 ”정체성을 대신 증명하고나“-> ”정체성을 대신 증명하거나“
2) 263쪽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n"- > "Eric Hobsbawm'
어마어마한 품이 들어간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부록으로 실린 최덕효 선생의 ’월경하는 재일‘은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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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가난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1. 찰스 디킨스가 쓴 <황폐한 집>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조’다. 조는 고아고,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조, 그는 결국 천연두로 죽게 된다. 디킨스는 조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조, 내 말을 따라 할 수 있니?”
‘선생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라 할 거예요. 좋은 말이라는 걸 아니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네, 이거 정말 좋아요, 선생님’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빛이 밤이 되어 어두워진 길로 왔다. 죽음이다! 죽었습니다, 전하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었습니다, 모든 교단의 좋은 목사님과 나쁜 목사님. 죽었습니다, 가슴에 천상의 측은지심을 품은 남녀여. 죽음은 이렇게 매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조가 ‘아버지’란 말을 정말 좋다고 한 데에는 그가 살면서 이 말을 한번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아고, 병이 들었고, 이제 죽은 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조는 ‘가난한 자’다.


2. 조의 죽음을 묘사하는 디킨스의 글을 읽다가 나도 가만히 주기도문 전체를 암송해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기도임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먹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매일 같이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은 아닐 것이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법이 자녀 세대에서 대를 잇거나, 세금과 정치, 호사스런 치장, 관념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쌓아달라는 기도가 어울릴지언정, 매일 매일을 이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내게 닥쳤던 가난은 나를 늘 움츠려들게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 역시 매일 같이 내게 일용할 양식이 있길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학교를 부디 버스타고 갈 수 있도록, 학교에 가져가야 할 교재를 하나님이 예비해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3. 대학을 마치고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부터는 나는 내가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주기도문의 기도가 더 이상 간절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섭섭했다기 보다 내게 승리감을 주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노골적으로 말할 순 없었지만, 가난한 자들은 가난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난에서 벗어난 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의 가치판단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자와 빈자와 같은 ‘위계’는 불가피하고, 가치판단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나는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잘 쓰지 않는 회의와 의심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가난한 자’의 존재에 대해선 철저하리만큼 적용했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가난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가난’과 ‘가짜 가난’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라고 여겼다. 간혹 해외토픽에 나오는 백만장자 앵벌이는 ‘가난’을 이용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기꾼을 판별해야 한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기꾼들과 구분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의 결론은 진짜 가난한 사람을 돕게 되는 결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도 없고, 도와서도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좀 종교적 색채를 가미해 말하자면, 사실 나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회의, 의심, 구분, 분석은 (감히 말하건대) 사탄이 내게 준 생각이었음을 깨닫는다.


4. 디킨스의 작품에서도 ‘가난한 사기꾼’이 등장한다. 조와 대비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스킴폴’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코스프레하고, 어린이를 흉내 내는 어른이다. 악마의 성격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밀하다는 것은 스킴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것과 동시에 교활하다.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디킨스의 묘사에 놀라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킴폴을 친구로 받아주는 잔다이스는 내게 더 큰 놀라움을 줬다. 잔다이스의 미덕은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에는 ‘속을 수 있음’, ‘상처 받을 수 있음’, ‘바보가 될 수 있음’ 등을 각오한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지,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지, 저 사람은 가난한지, 가난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는 묻지 않는다.

어쩌면 잔다이스도 묻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회의, 의심, 분석을 했겠지만 그의 결론은 나와 달랐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 없거나 도와서 안된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보가 될 수 있고, 속을 수도 있고, 상처 받을 수 있지만 도와야 한다’로.


5. 이런 이야기를 파트너와 어제 밤 함께 하면서 나와 내 파트너가 가난으로 힘겨울 때 우리의 ‘가난’이 의심 받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둘은 모두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냈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 아버지가 부도날 때 돈을 많은 숨겨뒀어”, 내 이모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돈을 숨겨뒀을 리 없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의 고모부가 굉장한 부자야”. 교회 장로 중에 한 사람이 한 말이다. 그 고모부는 부자이긴 했지만 나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가난’은 가난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언제나 의심받고, 도전받고, 내 가난을 증명하라는 청구서 앞에서 시달린다. 우리는 그 때의 서러움을 나누면서, 비로서 바로 그 때 우리도 그 때 그 이모와 장로가 한 ‘가난에 대한 의심’을 우리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성범죄 피해자에게 도식적인 ‘피해자상’을 강요하는 법정처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 판단해왔다. 부끄럽지만 가난함에 대한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여태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통과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 정책, 이론을 말할 때 ‘가난한 사람’은 오직 내 생각 속에만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관념에 치우친 것이다.


6. 성서는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관념이 아니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구절도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바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가 되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제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바보가 되기를 자처했다.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가난’에 대한 메시지이며, 가난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로 교묘하게 해석하지 않는 자세는 우리를 복음의 중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마태복음의 해석을 누가복음의 사실보다 더 선호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교회 뿐 아니라 선량하다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속을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 있고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인기가 없다. 영화 <두 교황>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자, 옆에 있던 브라질 상파울로 명예 대주교인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말을 건넨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교황이 된 이에게 건네기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7. 디킨스의 작품을 읽다가,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고, 가끔은 속기도 했고, 바보처럼 살았던 고 김건호 목사님이 보고 싶었다. 디킨스를 읽으며 떠오른 가난에 대한 생각과 김건호 목사님의 형형한 눈빛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이토록 거친 메모를 남긴다.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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