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 하는 아이를 부끄러워 하는 아


 내 아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도 인사를 잘 하지 않고, 예쁜 중학생들이 재잘대며 인사를 건네도 아빠 옷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어 버린다. 아이가 세 살일 때 아이 엄마는 미국에 가 있었다. 혼자서 아이를 보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문화센터에서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등록했던 적이 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둘러 앉아서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노래도 부르고 율동도 따라하는 식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이는 따라하기는커녕 언제나 멀뚱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마칠 때면 앞으로 나가 선생님과 포옹을 하고 작은 과자를 받아와야 했는데 아이는 과자는 먹고 싶었지만 인사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내게 손짓을 하며 아이와 함께 나오라고 했다. 엄마들 중에 아빠는 나 혼자 뿐이었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자리에 일어나서 과자를 받아오는 것이 뭔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부끄러움이 많아 다른 아이들은 다하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럽고, 그래서 과자를 받으러 아이와 함께 나가야 한다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나서는 그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아이의 부끄러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마 전 유치원에서 아이 학급만의 작은 발표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아이는 율동에 거의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도 따라 부르는냥 마는냥 했고, 율동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관객인 것처럼 친구들의 율동을 구경하는 듯 했다. 아이는 무대 위에서 최대한 주목 받고 싶어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그 때문에 가장 도드라졌다. 발표회 내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제 이 무대가 끝날까. 어떻게 아이의 부끄러움을 당장 뜯어고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아이 엄마에게 했더니 내게 “당신도 부끄러움 많이 탔다며?”라고 되물어왔다. 하긴 나도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유치원에서 각자 그린 그림을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 앞에서 소개하는 일이 있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 때 내 그림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웃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보더라도 ‘엄마의 기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런 내게 항상 “지나치게 내성적”이라며,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웅변학원에 등록했다.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목소리 높여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웅변대회에서 받았던 트로피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아이 엄마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유치원 학예회 발표 때 사회를 맡았는데, 학예회가 시작되자마자 얼어붙어 그만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유치원 원장님은 얼마나 황당했겠냐고, 정도가 다를 뿐이지 누구나 다 그런 시기를 겪는다고 했다.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사회학자는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에서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 부각된 자아가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현실의 나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 간극을 누군가가 바라보게 되면 부끄러움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문화센터에서 느꼈던 부끄러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실의 나는 ‘문화센터에 데려오는 육아하는 아빠’이지만 문화센터에서 엄마들과 둘러 앉아 있으며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는 ‘직장에서 일하는 아빠’였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는 많은 엄마들 사이에서 ‘일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보는 아빠’로 나 자신이 부각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가 세 살 때인 당시만 하더라도 아빠가 휴직을 해서 아이를 문화센터에 데리고 나오는 일은 그렇게 일반적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나는 내가 육아하는 남자라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은 물론 내가 ‘육아하는 아빠’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이 엄마와 내가 어릴 적에 겪은 경험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아이 엄마는 ‘무대 위에 선 자신’이 낯설었고, 나는 ‘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는 자신’이 낯설었던 것이다. 아이의 부끄러움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에 처음으로 내 던져진 아이에게는 아마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인사를 하지 않고 뒤로 숨어 버리는 것은 가끔 보는 이웃도 낯설고, 이웃과 인사를 주고 받는 자기 자신도 낯설기 때문이지 않을까? 무대 위에서 몸을 꼬며 지켜보기만 하는 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율동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자기 자신이 낯설게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부끄러움이 많은 것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인사를 시키려 등을 떠밀고, 노래를 부르게 하려고 다그치고, 율동을 따라 시키려고 혼을 내보기도 했다. 나는 왜 아이에게 억지로 인사를 시키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율동을 시켰던 것일까? ‘인사를 잘 하는 아이의 아빠’라는 이상 속의 내가 ‘인사를 하지 않는 아이의 아빠’라는 현실 속의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이가 아니다.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내가 ‘육아하는 아빠’라는 낯선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인사를 하지 않는 아이의 아빠’라는 낯선 나와 익숙해지기 위해서 ‘아빠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웅변학원’보다는 아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그친다고 몸이 빨리 자라나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빨리 자라진 않는다. 아이는 오직 아이의 시간에 자란다. 이청준은 “소설이란 기껏해야 한 사람이 끝없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적는 일”이라고 썼는데, 육아야말로 아이가 처음 만나는 이 낯선 세상에서 끝없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잘 견뎌내도록 응원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고, 아빠도 함께 있다고 말이다.



자책육아, 부끄러움, 짐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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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금지 -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놀공발전소 엮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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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번 주 교통방송에서는 놀공발전소의 <노력금지>를 소개했다. 이 책이 지닌 다채로움과 놀공이 만든 게임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했다는 자신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내 코너를 마친 후 특집 방송이 있어 13분 내에 소개를 마쳐야 했다. 지난 12월에 플레이어스 캠프에서 피터공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나보다 더 무섭게 생기셔서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몇분의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피터공이 직접 소개하는 게임과 놀공발전소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 때 들었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확한 멘션은 기억나지 않지만, 게임은 가상적이지만 게임의 참가자들이 느끼는 경험과 감정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가상현실을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나 자신은 결코 가상적이지 않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나는 그 때 가상현실에서의 체험을 실제현실에서의 체험에 비해 인식론적으로 더 불확실하고, 낮은 질과 등급을 지닌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어왔다는 것을 피터공과 대화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예술-경험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상성'과 불가분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유독 게임에 대해서만큼은 그 가상성을 어떤 혐의를 가진 것으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별로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그런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 한번 한 적이 없고, 화투나 카드놀이, 장기, 바둑, 모든 종류의 보드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굳이 들자면 그냥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건대 나는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면서 내가 갈등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느끼는 그 결코 '가상적이지는 않는 기분과 느낌'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왜 가상현실에서까지 그런 경험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었던 거다. 가상의 갈등에서 진 것은 내가 바둑판에 둔 흰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더하여, <노력금지>를 이번에 소개하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있다. 놀공이 하는 일, 더 본질적으로 게임이라는 것이 현상학적 환원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현상학은 규정하기 어려운 분야지만,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모두 사태 그 자체로 가서 사태를 직시하면서 보이는 것을 기술하려고 했다. 즉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참가자로서 말이다. 놀공이 만드는 게임은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적이다. 게임 참가자들이 사태의 방관자나 관찰자가 아니라 사태 자체에 들어가도록 게임을 고안하고, 어떤 사태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고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놀공클래식의 경우, 우리가 고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에 대해서 판단 중지하고, 고전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듣는 수준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틀'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정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만들고, 게임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 예를 들면 교보문고 강남점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게임에 참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놀공이 유니세프와 협력해서 만드는 교육 게임이나 책에 소개된 어느 그룹에서 진행된 창의성과 관련된 게임도 기존의 구호활동, 창의성 자체를 게임을 통해 새롭게 보고 재정의하도록 유도하는데 이런 과정은 '현상학적인 것' 그 자체이다. 

 

현상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이어가자면, 하이데거는 '보는 방법'을 배우고자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고 한다. 세잔 역시 생빅투아르산과 사과를 끝도 없이 그렸던 것도 보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세잔을 사랑했던 피카소는 세잔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보는 방법을 개척해 나갔다. 즉 그 방법은 '모방'이었다. 피카소는 습작으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없이 모방했는데 이것은 단지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나'가 되어 보는 연습이었다. 다른 존재가 되어 대상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피카소는 자아를 연성화시키고자 했다. 쉽게 말해 모방은 자아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창의성, 새롭게 보기는 이 말랑말랑한 자아라야 가능하다. 딱딱한, 경화된 자아의 시선은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닫혀 있다. 무엇이든지 '-되기'를 원했던  피카소가 최종적으로 모방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유분방하고 언제든지 다른 나자신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편견이 없다. 어쩌면 놀공은 놀라운 현상학적 직관으로 자신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 고전에 대해서, 학습에 대해서, 창의성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새로운 경험을 담은 게임을 고안하고, 게임 참가자들은 게임 속에서 피카소처럼 '다른 나'가 되는 경험으로 자아를 연성화시키고 사태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자아가 경직되고 굳어있고, 현상학 연구도 포기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몸이 안좋아져서 읽으면서 든 생각, 다이어트도 '노력금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공부보다 살을 빼기 위한 노력의 총량이 더 많았던 것이 그동안 내 삶이었다. 놀듯이 공부하는 것처럼 놀듯이 다이어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놀공발전소를 따라 놀듯이 다이어트하는 놀다이체육관을 만들어보고 싶다. 피터공은 러닝머신을 탈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그 기계를 '노력금지'를 세상에 외치는 놀공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해진다.

 

 

노력금지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는 출판사 이야기나무에서 만들고, 놀공발전소에서 만든 <노력금지>라는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공발전소라는 회사의 구성원들이 함께 쓴 책인데요, 사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노력금지>라는 책의 제목도 독특하고, 책의 구성도 독특하고요, 주제도 독특합니다. 그리고 책을 쓴 이 회사 구성원의 이름도 독특하고, 놀공발전소라는 회사가 하는 일도 독특합니다. 정말 모든 것이 독특한 책을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2. 그렇게 모든 것이 독특할 수 있나요? 어떤 책일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책의 저자가 놀공발전소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곳인가요? 꼭 동아리 이름 같아요.

 

놀공발전소는 ‘놀공’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게임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게임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보드게임 같은 것을 떠올리실텐데요, 이 회사는 좀 다른 종류의 게임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직접 움직이며 체험할 수 있는 빅게임을 만드는데요, 예능 프로그램 중에 “러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죠? 거기에서 출연자들이 미션을 수행하고, 추격전을 펼치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놀공발전소는 이렇게 게임 참가자들이 말을 움직이거나 캐릭터를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게임과는 달리 참가자들이 직접 카드가 되고, 캐릭터가 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고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는 설명만으로는 놀공발전소를 제대로 소개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놀공에서는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의 반경과 생각의 깊이가 게임을 통해 확장되도록”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회사의 이름이 놀이발전소가 아닙니다. 놀이와 공부의 첫 글자가 합쳐진 ‘놀공발전소’죠. ‘놀 듯이 공부하자!’라는 뜻을 품고 있는 회사인 겁니다. 그래서 이 회사는 게임을 만드는 동시에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3. 아, 놀공발전소가 그런 뜻이었군요. 놀 듯이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논다.

 

이 책의 제목 <노력금지>, 부제인 “재미있는 게 이기는 거다!” 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력금지라는 말은 놀공을 창립한 피터공의 좌우명이라고 해요. 피터공은 미국 뉴욕에서 대학을 마치고 19년 동안 생활하면서 ‘Dinner Dash'라는 성공한 게임을 만든 게임회사의 CEO였습니다. 피터공은 게임회사를 세우기 전에 타임지에서도 일을 했고, 제약회사에서도 있었는데 그 때 “내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이 아니라면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이렇게 말하면 꼭 해야 할 일 중에 꼭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닌 것도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피터공의 말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피터공과 놀공발전소는 하기 싫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들을 ’게임‘을 활용해서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공부도 바로 그런 거죠?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싫죠. 사실 학창시절에 공부 참 하기 싫잖아요. 그래도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앉아서, 졸리면 허벅지를 연필로 찔러가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누구나 있죠? 피터공은 공부도 게임을 이용하면 전혀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게임의 문법을 이용하면 지루한 공부도 재미있게, 그리고 더 낫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피터공은 게임을 “플레이어가 규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갈등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하는데요, 어떤 게임이라도 해 보셨던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게임 속의 갈등은 분명히 현실이 아니고 가상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갈등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고, 지면 분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의 특성을 현실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힘들게 느끼는 학습과도 접목시켜 보겠다는 것이 피터공의 생각이었던 거지요.

 

4. 놀공발전소의 대표인 피터공이라는 이름도 특이하네요. 성이 공씨인건가요?

 

특이하죠? 저는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피터공의 본래 이름은 피터 리거든요. 근데 왜 피터공이라고 할까,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피터공 뿐만 아니라 놀공발전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호칭에도 지인공, 애련공, 은현공처럼 공이 붙어 있습니다. 피터공은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후 수평적인 대화환경을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멤버가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는데 서로를 부를 마땅한 호칭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씨’라고 하기에는 건방지고, 영어 이름을 만드는 것도 어색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 끝에 ‘씨’를 대신해 ‘공’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뭔가 옛날 유럽 귀족 호칭도 연상되고 나이 차이나 직위 차이도 지워지기도 하고, 구성원들 간의 멤버십도 돈독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놀공만의 특이한 조직 문화인데요, 놀공만이 지닌 독특하고 재밌는 조직문화가 이 책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시 진행자분은 다른 회사 워크샵에 가본 적 있으세요? (대답) 내 회사 워크샵도 가기 싫은데 다른 회사 워크샵을 왜 갑니까? 그런데 놀공멤버들은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워크샵에 초대해서 1박2일간 게임하고, 바비큐하고, 콘서트도 한다고 해요. 놀공에는 놀공싸롱이라는 모임도 있는데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놀공사무실에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를 초대해 자유로운 만남을 갖는다고 해요. 이렇게 창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놀공발전소가 만들어낸 창의적인 결과물이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 책에는 놀공이 만들어지는 과정, 멤버 소개, 놀공만의 문화 뿐 아니라 놀공이 그동안 해온 일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중에서도 놀공클래식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문고판 책이 나오는 펭귄클래식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놀공클래식도 펭귄클래식처럼 고전을 다루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동안 놀공에서는 놀공클래식으로 조지 오웰의 <1984>,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고전을 다뤘다고 합니다.

 

6. 아, 그러면 고전을 게임으로 만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 놀랍죠? 저는 이 책에서 놀공클래식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고전은 읽기 힘들고 어렵잖아요? 고전은 꼭 읽어야 되는 책이기는 한데 정작 읽은 사람은 잘 찾기 어려워요. <로미오와 쥴리엣>도 많은 분들이 영화나 동화로 보았지, 정작 이 책을 원작 그대로 독서한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만 해도 그렇구요. 놀공클래식은 고전을 놀공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게임의 문법을 활용해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전’을 친숙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게임 시리즈입니다.

 

한 예로 <1984>라는 소설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인데요, 놀공은 자체 스터디를 통해서 <1984>라는 작품 안에서 구어를 대신하여 ‘신어’, 그러니까 새로운 말을 빅브라더가 개발해 사회를 통제해 나갑니다. 신어를 개발하는 목적은 글의 구조를 단순하게 만들고, 어휘의 양을 줄여서 사회의 구조를 위협하는 사상 범죄를 차단하는 것에 있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어휘가 단순해지면 사고의 폭이 좁아져 사상 범죄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공은 <1984>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게임 규칙은 이렇습니다. 12개의 부스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각각 서로 다른 단어가 스티커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12개의 부스에는 빅브라더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게임 참가자는 그 얼굴 앞으로는 지나갈 수 없습니다. 참가자는 12개의 부스를 드나들며 그 속에 있는 단어를 기억하고, 방송에서 기습적으로 어떤 단어를 찾으라고 하면 그 단어가 적힌 부스를 찾아서 자신이 가지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가장 많은 단어를 수집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물론 실제 게임에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부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7. 일종의 단어 스티커의 위치를 기억해서 많이 가지면 이기는 게임이군요.

 

네, 단순해보이지만 이 게임에는 <1984>와 관련된 많은 장치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빅브라더의 얼굴 앞으로 지나가지 못하는 규칙은 빅브라더의 통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찾아야 하는 단어는 빅브라더가 없애려고 하는 구어를 상징하구요, 그리고 참가자는 게임에 참여를 하면서 이 소설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적인 통제 사회의 문제점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후기를 보면 사람들이 이 게임을 계기로 <1984>를 직접 읽게 되었다고 해요. 게임을 통해, 놀이를 통해 공부한다는 놀공의 목표대로 말이죠.

 

8. 게임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게 되니까 그냥 고전이 중요하다고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겠네요.

 

저는 이 게임을 직접 해본 적이 없는데도, 책에 소개된 게임 방법을 읽고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놀공클래식에서 다룬 고전작품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터공은 이 책에서 학습에도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해요. 전통적인 관점에서 학습은 무엇에 관해서 배운다라는 목표 하에서 지식 전달이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클릭 한번만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이런 식의 학습은 불필요해졌다고 해요. 피터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활동을 할 때 자신이 가장 즐거운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을 통해 제공해야 한다. 마치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마법사, 요정, 기사 등으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운 과제 앞에서 능수능란하게 전화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즉 놀공이 생각하는 교육 모델은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형태였다”.

 

즉, 게임을 통해서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거죠. 수학을 배워야 한다면 공식을 위한 지식습득이 아니라 직접 수학자가 된 것처럼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게임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1984>라는 게임에 참여한 사람은 직접 전체주의적 통제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고전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징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8. 끝으로 청취자들에게 책을 추천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놀공은 놀공클래식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런칭하기 위해서 박웅현씨와 함께 강독회를 합니다. 박웅현씨는 <책은 도끼다> <여덟단어>와 같은 좋은 인문서를 쓴 유명한 광고디렉터시죠? 그리고 <파우스트>는 독일문화원의 요청으로 만들어져 이미 글로벌한 프로젝트가 되어 성공을 거뒀습니다. 놀공발전소라는 작은 회사가 해내는 일이 놀랍지요? 저 역시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일상과 일에 권태를 느끼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일부만 소개해드렸지만 놀공발전소가 해온 일은 결국 우리가 세계를 조금 다른 방식과 태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틀로 공부, 사회, 세계를 바라보니까 이전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놀공은 놀공 클래식의 하나로 <로미오와 쥴리엣>을 게임으로 만들었는데요, 이 게임은 영업이 끝난 강남 교보문고에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고전만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점이라는 일상적 공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만들어 준거죠. 지루한 일상에서 너무 많은 노력으로 고단해 하시는 분들에게 <노력금지>,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을 새롭게 보는 마법의 방법을 익히게 되실 겁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피터공과 놀공발전소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로, 자신들이 가장 즐거워 하는 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공부는 힘들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는 고민을 ‘노력금지’를 외치면서 더 즐겁게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놀공발전소가 게임으로 일과 놀이와 예술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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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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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비행운, 민폐의 존재론

 

 교통방송에서 이번 주에 소개한 책은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이다. 이 책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2013년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나도 이 소설집을 좋아해서 이번에 소개하게 되었다.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직접 나와서 이 소설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KBS 1 라디오 '공부가 좋다'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에 들었다. 이렇게 정확히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 방송 이후로 빨간책방을 더 이상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동진을 평론가로서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동진이 작가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마치 자신의 독해를 작가로 끝없이 추인 받으려는 것처럼,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배울 것이 많았던 방송이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그 때의 불편함, 김애란 작가의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와 시적인 화법과 같은 분위기 뿐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김애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간신히' 라는 말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다보면 모욕감을 받는 것도 '간신히' 살아남은 나고, '간신히' 살아남은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는 것도 나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사는 것은 끝없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의 선배의 삶도, <서른>에서 수인의 삶, 수인의 남자 친구의 삶도, <벌레들>에서 임신한 아내의 삶도 끊임 없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소설 속의 어느 누구도 악인은 없다. 갑도 없다. 간신히 살아남은 을이 간신히 살아남은 을에게,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고, 민폐를 끼치고, 모욕을 당하고, 민폐를 떠안으며 살아간다. 마치 내 삶처럼 말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내가 여기 살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울한 기분마저 든다. 카드를 돌려 막듯이 누군가에게 짐을 떠 넘기며, 억지로 지게 하고, 그리고 모른 척 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민폐고, 민폐는 죄다. 이런 생각이 나를 너무 강하게 사로 잡을 때면 예수를 생각한다. 원죄라는 것은 민폐를 끼치는 인간의 숙명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우리는 신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신을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내가 끼치는 민폐를 기꺼이 예수만큼은 져주려고 했던 것이구나 하고 신을 부르게 된다. 물론 <비행운>은 이런 신앙의 세계가 아니다. 민폐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운은 민폐를 떠 넘겨 받은 사람의 비-행운으로만 이뤄진다는 비극의 세계,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은 처절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윤리는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세계의 저 아래에는 세계의 저 위에서부터 떠넘긴 온갖 민폐를 다 떠 맡은 누군가가 허덕이고 있겠지?", "그들은 지금 '간신히' 살아남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는 점 말이다.

 

비행운

- 김애란 소설집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김애란 소설가가 쓴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입니다. 김애란 작가는 강동원씨와 송혜교씨가 나온 영화였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집입니다. 모두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진행자님께서는 ‘비행운’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2. 비행운이라니까 비행기가 날아갈 때 생겨나는 구름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네, 이 책의 제목인 ‘비행운’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말씀하신대로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구름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비-행운, 그러니까 행운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주인공들 대부분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제목이 많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결국에는 비-행운, 행운이 아니었던 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이 8편의 소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 소설 많이들 아시지요? 인력거꾼이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운수 좋은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집에 돌아가보니 아내가 죽어있었던 것이죠.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런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은 기분 좋은 행운과 모든 것이 꼬이고 엉망이 되어 버리는 비-행운의 엮이면서 진행됩니다.

행운에서 불운으로 전개되는 악화 일로의 이야기이지만 분위기가 무겁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재밌어서 조금씩 아껴 읽게 되는 책입니다.

 

3.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돌아 보면 꼭 그렇지 않은 일도 있어요. 비행운이 비행기가 날아간 뒤에 생기는 것처럼, 어떤 일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도 지나봐야 알게 되더라구요.

 

비행운이라는 제목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생긴 비행운이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었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작품을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요, <너의 여름은 어떠니>라는 가장 앞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서미영이라는 여자인데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잠깐 쉬면서 살이 찐 것으로 나옵니다. 서미영은 친구의 장례식 날, 2년 만에 대학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만나자는거죠. 미영은 살이 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가 ‘도와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가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영이 대학 다닐 때 이 선배를 좋아했거든요. 대학 다닐 때 선배는 시 모임에서 미영이 쓴 시를 좋다고 격려해주고, 야구장에도 처음 데려가줬다고 해요. 자기가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지금도 생각하면 설레는 선배를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를 품고 선배가 일하는 방송국으로 갑니다. 더운 여름에 땀이 채이고, 저녁에는 친구 장례식도 가야하지만, 선배를 2년만에 다시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구요.

 

4. 아, 한 때 좋아했던 선배를 만난다는 것은 그런거죠. 뭔가 두근두근대고, 심장이 떨리고..

 

네, 미영도 그런 마음으로 선배를 만나러 나갔는데, “선배는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누군가 펑크를 냈는데 그것을 자기 메꿔야 하는 상황이라고, 일반인 중에 구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입사한지 얼마 안 돼 애를 먹고 있다며” 미영에게 잠깐 출연해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합니다. 미영이는 창피해서 하기 싫었지만 선배가 담당 피디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내키지 않지만 그만 수락하고 맙니다. 미영이 나가기로 한 방송에는 핫도그 먹기 챔피언인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늘씬한 여성과 뚱뚱한 역도선수, 유도선수, 그리고 일반인 여성 중 누가 가장 핫도그를 많이 먹는지를 보여주기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미영은 일반인 뚱보 여성 역할을 맡았고, 뚱뚱한 푸드 파이터가 되어서 날씬하지만 핫도그를 더 많이 먹는 챔피언을 부각시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뚱뚱한 몸매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레슬링복’을 입고 말이죠.

 

5. 갈수록 가관이네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방송에 대타가 되어 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푸드파이터가 되어 달라고 하고, 심지어 레슬링 복장까지 입혀서 핫도그를 마구 먹게 하고..

 

야구장에 가서 소릴 지르고 싶다고 하면 “너는 야구장이 소리 지르는 덴 줄 아니”, “야구장은 신전이야”라고 했던 선배는 “그냥 평소 너 먹는대로만 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방송국을 황급히 빠져나간 미영을 쫓아와서 선배는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너 편할 때..”.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문자로 계좌번호 좀 넣어주라. 주민번호랑...”

6. 아,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요, 미영이가 느낀 모욕감이 엄청 컸겠네요.

 

네, 미영이 받은 선배의 전화는 미영의 마음을 잠깐 설레게 하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모욕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는데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모욕감’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공항의 화장실 청소부, 다단계 판매원, 철거 아파트 주민 등 ‘모욕감’을 경험하는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작품들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우리가 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모욕적인 기분에 대한 상상력이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 때 사랑했던 남자 앞에서 레슬링복을 입고 푸드파이터가 되어 핫도그를 허겁지겁 먹으며 출연료를 달라고 계좌번호를 보내야 할 때 느끼는 그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하는데 이 소설집의 가치가 있습니다.

 

미영의 예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신체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취업이나 결혼에 대해서 종용하거나, 장애를 가진 분들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들도 누군가에게는 모욕이 됩니다. 미영처럼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고,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그 프로에서 뚱뚱하거나 외모가 예쁘지 않은 개그우먼들을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웃고 있지만 사실 그런 역할을 맡은 개그우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7. 소설 속의 주인공은 화도 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냥 무기력하고, 허탈하고, 답답했을 것만 같은데요, 작품을 듣고 말씀을 들어보니, <비행운>이라는 책 제목이 정말 와닿네요. 작가는 왜 이토록 불운이 겹치는 이야기를 쓴 것일까요?

 

네, 이 소설집은 정말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벌레들>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세값 너무 올라 내몰리게 되었는데, 간신히 재건축을 앞둔 허름한 빌라에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도 없이 나오는 벌레를 잡으려다 애쓰는 과정에서 임신한 주인공이 전화도 없고, 누구의 도움도 요청할 수 없는 곳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물 속 골리앗>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는 크레인에서 실족사로 죽고, 어머니는 당뇨 쇼크로 죽고 자신만 큰 홍수 속에서 화장실 문을 떼어내 뗏목 삼아 간신히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간신히’,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그리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청년 실업이 12.5%가 넘어 역대 최대라고 하지요? 청년들은 지금 정말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취업을 한 청년들의 경우에도 일자리의 질이 그렇게 높지만은 않아요.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 파트타이머도 상당히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물 속 골리앗’의 주인공처럼 역시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노인 빈곤율이 우리나라가 OECD 최고라고 하지요? 우리 어르신들도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하시고 ‘간신히’ 살아가고 계십니다. 얼마 전 뉴스에 종교 시설에서 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500원 순례길에 대한 보도가 나온 적이 있죠. 하루에 6000원을 벌어 한달을 그렇게 해서 방값을 ‘간신히’ 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김애란 작가는 불운이 끝도 없이 겹치는 상황을 우리 시대의 실존적 상황이라고 본 것 같아요.

 

8. 사실 직장인들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요. 소개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품 속에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쩌면 판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집의 가장 끝에 실린 <서른>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수인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재수 끝에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마땅히 취업할 곳이 없었던 수인은 보습학원에서 60만원을 받는 강사가 됩니다. 꽤나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강사가 되었는데, 그러다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빚이 많아지면서 돈이 급하던 차에 예전 남자 친구의 추천으로 다단계 판매를 시작하게 됩니다. 3만원 짜리 시계를 58만원에 넘기고, 15만원짜리 핸드백은 120만원에 건네고, 아는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인맥을 팔다가 수인은 결국 자기가 빠져 나오기 위해서 학원에서 자기를 좋아해주던 학생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 학생은 자살을 시도한 후 식물인간이 되고, 수인은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작품을 보면,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또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가 없다하더라도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지요. ‘간신히’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용하게 됩니다. 만약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을 할 겁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우리 시대의 처절한 생존기이자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끝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분들게 추천해주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이 책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차갑지 않고, 따뜻합니다. 그래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슬픔에 빠지기 보다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작가가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겪고 있는 모욕감을 알아주고 있고,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삶에 지쳐 있는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주변의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깊은 상상력과 성찰을 줍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 ‘간신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 밟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격려해줄 수 있습니다. <서른>에서 수인은 재수할 때 고시원에서 만난 임용고사를 8번이나 낙방한 언니를 격려합니다. 이번 봄에는 주변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격려해보시면 어떨까 하여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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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 (4) - 손톱 물어 뜯기

                             꽤나 시적인 자해가 아닌가 


나는 뚱뚱하고, 최근에는 건강까지 나빠졌는데 나쁜 습관도 있다. 내 손톱은 언제나 짧고 뭉퉁하다. 손톱 주변의 손가락 마디 곳곳에 상처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겨울철만 되면 아데노이드가 붓는 것도 손톱 밑의 세균이 원인일 것이다. 나는 손도 씻지 않고 손톱이 자라 올라오기 무섭게 물어 뜯는다. 물론 의식적으로 나 자신이 '이제 제법 길었으니 물어 뜯을 때가 되었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손이 입가에 가 있다. 어쩌면 손톱 물어 뜯기는 내게 일종의 기호식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담배 한 대가 주는 안온함처럼 손톱을 물어 뜯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담배는 피지 않기 때문에 손톱 물어 뜯는 것보다 그게 얼마나 더 효과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손톱 물어 뜯기가 담배보다 나은 점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담배만큼 건강에 나쁘지는 않다는 점, 비싼 담배와는 달리 공짜라는 점, 남들이 보기 싫은 것을 제외하면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 무엇보다 점점 담배 태울 곳이 없어지는 상황과 달리 누구도 손톱 물어 뜯기는 금지하지도 않고, 사실상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자라나는 손톱은 내 몸에서 자라는 중독성 물질에 가까웠다. 예전에 나는 어느 일기에, '내 손톱은 내 손에서 자라는 대마'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 기도했다. "주여, 내가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마약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지 않게 하소서".


사실 내가 언제부터 이 '죄 아닌 죄'를 갖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인가 엄지 손톱 주변에 작은 물집 같은 것이 생겨 드라이아이스 소독으로 그 주변을 치료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상처부위가 괴사되면서 딱지가 앉았는데, 학교에서 수업 중에도 촉이 날카로운 '제도1000' 샤프로 딱지 부위를 떼어내고, 다른 손가락에도 짓무른 곳이 있으면 '도루코칼'을 빼내어 도려내느라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시 손가락은 상처 투성이가 되고, 또 다시 딱지가 앉고, 다시 떼어내고, 상처가 생기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업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해도 오래가지 않았다. 책을 보면 책을 잡고 있는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몇 번을 잡고 나면 어느 새 나는 손톱 주변에 있는 죽은 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제법 성적이 나와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배정 받을 수 있었다. 일인당 하나씩 독서실용 책상이 주어졌는데 손톱 물어 뜯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고, 온전히 내 손톱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이 갑자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손톱 물어 뜯기가 불안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답답할 때 담배를 한 대라도 더 태우게 된다면 아마 손톱 물어 뜯기도 그런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시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벌이가 되는 공장 야근일을 하러 가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점심 도시락도 싸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 때 나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마침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에게 고백이라도 하기 전에, 또 기왕 배가 고픈 김에 살을 한번 빼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내가 처음 한 다이어트였는데, 그 때의 다이어트는 '강제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지도 모른다. 그 때 나는 물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친구들의 도시락을 숟가락 하나를 들고 '빈대짓'을 했고, 그리고 내 손톱도 물어 뜯었다. 비록 삼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왼쪽 손등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났는데, 언뜻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 상처가 생긴지는 1년도 지났다. 나는 손톱을 물어 뜯듯이 손등에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딱지를 집요하게 떼어내고, 다시 피가 나는 것이 반복됐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는데,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손이 무려 23년동안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했고, 잘려나갔다가 다시 자랐던 것이구나. 나는 왜 이토록 손에, 아니 손가락에, 아니 손톱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가 손을 빨 때마다 "손이 똥꼬보다 더럽다" 했더니 물끄러미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내게 "아빠 손은 똥꼬보다 더럽지 않아?"라고 물었다. 아이도 보고 있었구나.  내 손이 똥꼬보다 더 더럽지는 않겠지만, 똥꼬보다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손톱은 항상 뭉퉁하고 거치니까.


손톱을 물어 뜯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텐데, 사실 손톱을 뜯으면 손톱만 뜯기는 것이 아니다. 손톱의 깊은 안 쪽에는 손톱이 마치 나무처럼 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손톱을 잡아 뜯으면 살이 뜯어질 때도 가끔 있다. 흡연가들 중에는 끽연가도 있고 입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손톱을 물어 뜯는 것도 사실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다. 내가 아는 J는 손톱 물어 뜯기에서는 끽연가급인데 그 친구의 손톱은 내 손톱의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손가락 끝은 언제나 피가 멍울져 있어서 누군가와 손도 잘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비하자면 나는 보통 수준에 가깝다. 가끔 나도 피가 나지만 대개의 경우는 손톱이 자라 올라와 색깔이 변하는 지점까지를 목표로 삼는다. 다른 친구 K는 손톱만 물어 뜯지 않는다. K는 엄지 손가락 아래 손바닥을 물어 뜯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건 담배도, 대마도 아닌 필로폰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친구도 처음은 엄지 손가락 아래 손바닥에 난 딱지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담배라면 누구라도 끊어보라고 했겠지만 손톱을 물어 뜯는 나의 은밀한 중독에 대해 나더러 그만두라고 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 자신도 '이제는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다짐한 적이 없다. 나는 손톱을 물어 뜯고 뭉퉁해진 내 손을 보면서, 나 자신이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도 별로 생각했던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그걸 강박적 행동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냥 흡연처럼 가벼운 중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톱을 물어 뜯을 때 느끼는 입술의 쾌감, 손톱 아래의 개운함, 탁탁 거리는 소리의 경쾌함까지, 담배를 한 대 물고 있는 것만큼 손톱을 물어 뜯는 것은 누군가에 멋있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공감각적인 쾌감을 주었다. 자기 손바닥을 물어 뜯는 녀석도 아마 살을 뜯을 때 느끼는 아픈 감각이 쾌감이 되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 쾌감을 이해할 수 있다. 손톱을 물어 뜯을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은 살이 뜯어져 나오는 바로 그 순간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는 손톱 물어 뜯기가 심지어 아주 시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살과 손톱을 뜯는 야수적인 본성으로 최소한의 야수적 성향도 남지 않도록 손톱을 없애고 있었다. 내 손으로는 그 누구도 긁히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 내 입도 그 누구도 공격하거나 물어 뜯지 않는다. 오직 내 손과 손톱만 물어 뜯을 뿐이었다. 자해치고는 꽤나 시적인 자해가 아닌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이 시적인 자해로 상한 손을 내 보이는 것은 부끄럽다.


그것도 병이라고, 교조증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글을 읽고서 병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병원에 가는 것이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의사를 좋아하지 않아 (정확히 말해 직업적으로가 아니라 의사가 되는 인간 종류를 싫어해서), 일단 먼저 스스로 한번 사람들이 교조증이라는 병이자 동시에 내게는 흡연과 같은 중독과 한번 싸워 보기로 한지 3주가 되었다. 손등에 난 상처는 이번에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연고를 바르고 기다렸더니 두 주만에 완전히 나았다. 손톱도 제법 자랐고, 손톱 주변에 피부가 갈라지고 상한 부분도 내가 보기에는 80% 정도 회복이 되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손톱이 자라니까 이전에는 없었던 다른 감각 하나가 생긴 것 같이 손톱 아래가 아린 느낌이 들고,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한다.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 끝이 아니라 손톱이 먼저 닿는 것은 정말로 23년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자판을 칠 때 C, N, M 등의 문자열 맨 아래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으로 미끌려지듯이 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들리는 손톱과 키패드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손톱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진다. 


엄마 젖을 덜 빨아서 손톱이나 물어 뜯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명보다는 내가 정확히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살이 급격하게 쪘다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덩치는 컸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도 비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몸이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두워 졌고, 손톱으로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손톱을 물어 뜯은 것이 아니다. 뚱보자아가 나를 물어 뜯기 시작한 것이다. 뚱뚱한 나를, 내 손을, 내 손톱을 말이다.


2016년 3월 16일. 지난 주말은 현미로 된 김밥집을 찾아 떼운 끼니가 많았다. 현미김밥이라면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밥알을 자세히 보니 꼭 백미처럼 보였다. 만일 속이는 것이라도 기분 좋게 속기로 했다. 그래서 진짜 현미인지는 물어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을 먹었고 여주 가루를 먹었다. 여주 가루는 목 뒤로 넘어가면 말도 못하게 쓴 편이라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점심 때 주변 산을 한시간을 걸었고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다. 오후에는 아이와 함께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이제 오리고기도 많이 먹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먹으면서도 뭔가 참울한 기분이 들었다. '오리고기와 혈당'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오리 고기의 기름을 떼어내고 먹으면 괜찮다는 내용이 나왔는데, 제길 오리고기에서 기름을 빼면 그걸 오리고기라 할 수 있나? 그런 식이라면 만두에서 만두 속을 빼면 만두가 되나? 냉면에서 면을 빼고, 잡채에서 당면을 빼고, 비빔밥에서 밥을 빼면 그게 냉면이고 잡채고 비빔밥인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와 목욕탕에 다녀왔다. 요근래한 운동 중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몸에서 때를 벗겨내는 것은 손톱을 물어 뜯을 때 못지 않은 쾌감이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목욕을 마치고 아이가 편의점에 가자고 졸라댔다. 아빠는 먹을 것이 없으니 네 것만 사라고 하니, 아이는 같이 먹자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얼굴 좀 작아졌어. 턱 쪽에 붙어 있던 살이 좀 나갔어". 다음 주에는 용기를 내어 체중을 달아 보리라.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용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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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에서



1. 프랑스 부모처럼

뚱뚱한 아빠다 보니 뷔페를 좋아한다. 아이도 아빠를 닮아 뷔페를 좋아하는데 이유는 조금 다르다. 많이 먹을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음식을 접시에 담고, 마음대로 이곳 저곳을 다녀도 되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때마다 난처한 일이 생긴다. 먹지 않을 음식까지 접시에 담다가 종업원에게 야단을 맞거나, 식당을 뛰어 다니다 다른 손님과 부딪히는 일은 태반이다. 아이를 다그쳐 봐도 그 때 뿐이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식당을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아이들이라면 부모의 말에 순종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요란스럽게 장난을 치는 일도 없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본 파리의 풍경도 그랬다. 일요일은 조용했고,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은 차분했다. 식당에서 포크를 떨어뜨리고 물을 쏟고 음식 투정을 하는 아이는 내 아이 뿐이었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프랑스 아이들의 유아기는 ‘끝없는 기다림의 시기’라 한다. 아빠가 사주지 않는 장난감을 할아버지에게 졸라 얻고마는 우리 아이의 인내심과는 차이가 클 것이다. 내 아이는 기다림을 모른다. 아빠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때를 쓴다. 아빠, 엄마는 뭐든지 마음대로면서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화를 낸다. 일전에는 아이와 함께 딱지치기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나를 때리려 까지 했다. 내 아이가 프랑스 아이처럼 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 ‘프랑스 부모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부모들은 신생아를 혼자 재울 정도로 엄격하게, 단호하게, ‘부모 중심’으로 육아하는데 반해 우리 집 부부 침실은 아이가 차지한지 벌써 6년째다.

2.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열리는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탔다고 한 후로부터 아이도 상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어린이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적어 놓은 글귀와 그림들이 한쪽 벽면에 가득했다. ‘우리 아이보다’ 글자 모양이 더 예쁜 아이가 많다. 그림 실력도 내 아이는 좋지 않은 것 같다. 놀이터에서 아이의 친구들을 데리고 축구를 했다. 헛발질에, 공이 날아오면 무서워 피하는 내 아이는 축구도 별로인 것 같다. 제법 근사하게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을 축구교실까지 보내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덴마크 학교에서는 9학년이 될 때까지는 등수를 매기는 시험은 일체 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이는 상을 받겠다고, 아빠인 나는 아이가 어떤 것이라도 뒤처질까 벌써부터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핀란드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서 독립적인 아이로 키운다고 하는데, 나는 블록인형을 제대로 조립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게 인내심이 별로 작동하지 않아 내가 만들어 버리기 일쑤다. 얼마 전에는 비정상회담에 출연 중인 니콜라이 욘센을 만날 일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노르웨이 사람인데, 어머니께서는 니콜라이에게 어떤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운동 선수가 되기 보다 음악을 했으면 좋겠고, 공부도 기왕이면 잘했으면 좋겠다. 스칸디 대디,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아이의 감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3.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사이의 한국 아빠

나는 아이를 잘못 키어 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 어느 기준으로 봐도 좋은 육아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제대로 엄격하지도, 제대로 친구 같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육아가 아이에게 규율을 제공하고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에, 북유럽 육아는 아이들의 자율성에 보다 더 초점을 두는 육아로 이해할 때 어느 한 쪽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프랑스 육아 옹호자들이 아이들에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율을 허락한다는 말이 어딘가 모르게 불충분하다고 생각해왔다. ‘규율 속에서의 자율’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부모의 욕망과 가치관 속에서만 허락되는 자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규율이 부모의 가치관과 편의에 따라 정해져 버린 채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따르게 한다면 그 때의 자율을 자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다. 중산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국어 하나와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특별한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는지로 판단하는 사회,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상대적으로 적게 의식하는 프랑스 사회라면 부모의 가치관과 결합된 규율이 아이의 자유를 위협할만큼 위험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급여 500만원 이상, 예금 잔고 1억원이 중산층의 조건이고, 엄격한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보내고 성공하도록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망이 아이에 대한 규율과 결합하면 아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북유럽 육아 옹호자들이 말하는 부모의 권위를 내려 놓고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해주는 육아라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급여 수준이 비슷하고, 또 직업을 가지지 않더라도 한 달에 300만원 내외를 지원 받는 덴마크의 경우라면 아이에게 등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도 고소득직업군이 아니고, 평생을 웨이터로 살면서도 높은 직업적 자존감을 가질 정도로 전체 사회가 매우 강력하게 ‘평등’을 지향한다. 이런 사회에서라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점차 격차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북유럽 국가의 부모들처럼 오직 아이의 자율성만을 존중해주기란 특별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다.

4. 다른 사회, 다른 육아
규율을 너무 강조하면 아이가 창의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을까,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우리 아이만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어느 쪽도 일관되게 밀어 붙이지 못했다. 사실 내가 처한 이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프랑스와 북유럽 사회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육아의 곤경은 우리 사회가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유럽의 경우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 복지 시스템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라도 현실에서 도태되는 것을 막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렇게 잘 구축된 사회적 질서가 자율성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북유럽 육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프랑스의 ‘부모 중심’ 육아는 프랑스 사회의 가족 형태의 변화가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친 국가인데 그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역할로 여겨지던 보육과 교육 비용을 정부가 책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경제적 부양 책임이 없어졌다 해도 좋을만큼 줄어들면서 ‘아이 중심’으로 움직이던 가족이 ‘부모 중심’으로, 특별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시몬느 코르프-소스는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라는 책에서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아버지들이 기능 부전의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육아의 엄격함은 가정 내에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는 아닐지 추론해 볼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권위를 행사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엄격한 육아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말이다. 물론 프랑스 사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한 사회의 육아는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육아는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와 북유럽 육아를 만든 사회는 우리 사회와 아주 다르다. 프랑스 부모처럼, 북유럽 아빠처럼 아이를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겠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우리 육아 현실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5. 정답이 없는 육아

천재 경제학자로 알려진 스티븐 레빗도 육아하는 아빠다. 그가 쓴 <괴짜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육아법 만큼이나 유행이 빨리 바뀌고 전문가들 간의 견해가 상충되는 분야는 없다”는 불평이 나온다. 아이 키우기와 관련해서는 신체 발달과 관련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의견 일치를 이루는 부분을 찾는 것이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 레빗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아란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어떤 통계보다도 더 복잡하다.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의 차이가 빚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두 육아의 차이는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프랑스 육아를 규율을 강조하는 육아, 북유럽 육아를 자율을 강조하는 육아라고 한다면,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 혹은 구조와 자유의 관계라는 주제 등으로 폭넓게 다뤄져 왔다. 따라서 프랑스 육아와 북유럽 육아가 유행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육아에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서 규율과 자율 중 무엇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오래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앤 핼버트가 쓴 <미국의 자녀 양육:전문가와 부모, 그리고 자녀 양육 조언의 1세기 역사>라는 책을 보면 1세기 동안 미국의 양육 전문가들이 끊임 없이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거나 자기 모순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순들 역시 육아에서 규율과 자율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다. 한 예로 게리 애조의 <베이비 와이즈>라는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혼자 재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아이가 부모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리는 수면 부족이 ‘유아의 중추 신경계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학습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개리가 규율 육아를 강조하는 프랑스 육아와 비슷한 견해라면 ‘부모와 함께 자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북유럽 육아와 비슷한 견해다. 혼자 자는 것은 아이의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아이를 ‘가족 침대’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강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엄마가 수줍게 손을 드셨다. 강연 내내 냉정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계셨지만 진지하게 강의를 들어주셨던 분이셨다. 25개월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였다. 어린이집에서는 잘 지낸다는 아이가 집에만 오면 고집을 부려 감당하기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질문을 주셨다. 다행스럽게도 아빠가 아이를 잘 도닥여주는 편이지만 유독 자신에게만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보며 차라리 자신이 없으면 나을 것만 같아 집을 나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너무 불안합니다” 하고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 밖에서 강연을 마쳐 달라는 스탭의 신호가 이어졌다. 나는 이 엄마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었어야 할까. 질문을 한 엄마는 고민의 무게 만큼이나 여러 강연을 다니며 전문가 선생님들을 찾아가 상담도 받았고, 육아서도 챙겨 가며 읽었다고 했다. 어떤 조언도, 어떤 견해도 통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날 강의의 주제와 연결해서 나는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도 불안합니다. 어머님, 그래도 아이를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 엄마가 되묻고 간 질문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를 관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관찰하란 말인가요?”

나는 가장 좋은 육아는 불안을 떨쳐버리는 ‘믿음의 육아’가 아니라 끊임 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불안의 육아’라고 믿는다.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자신이 좋은 엄마와 아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먼저 그 사실에 안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육아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지만, 아이가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사회도 다르기 때문에 프랑스 육아도, 북유럽 육아도 그 자체로는 답이 될 수 없고, 규율과 자율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애초부터 육아에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6. 믿음의 육아, 불안의 육아

불안할 때, 어떠한 육아서의 조언도 통하지 않을 때, 어떤 전문가의 말도 와 닿지 않을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인문서를 읽어야 할 때이다. 인문서는 지금 내가 읽는 이 육아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쓰여졌는지,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배경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읽도록 도와준다. 즉 인문서는 육아서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문서는 세계를 보는 방법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보는 것’은 쉬워도 ‘제대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문서는 내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훈련시켜준다. 무엇보다 인문서는 우리에게는 ‘정답’이 아니라 상황과 때에 맞는 ‘지혜’를 준다. 정답은 규율 아니면 자율, 프랑스 육아 아니면 북유럽 육아이겠지만 지혜는 지금 내 아이에게 프랑스 부모처럼 엄격하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 북유럽 아빠처럼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한 때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규율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고, 허용만이 필요한 아이도 없다. 또 어떤 사회도 고정적이지 않고, 어떤 아이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기 때문에 육아서를 그대로 믿어 버리기 보다는 지금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이 부모에게 필요하다. 생각하는 힘이 결여된 채 프랑스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면,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부모의 편의에 따른 규율만 엄격하게 적용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기 쉽고, 북유럽 육아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북유럽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아빠와 내 남편을 비교하면서 육아 휴직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아빠와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국가>는 한글 번역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전체의 주제는 하나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음인지, 무엇이 옳음인지 그만큼 말하기 어렵기에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끊임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할 때 프랑스 육아보다, 북유럽 육아보다 나은 ‘나의 육아’에 따라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문서 5권

1. 호모 루덴스, 요한 호위징하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구조가 모두 놀이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이 책은 부모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학습하는 인간’, 성인이 되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 고정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이들의 삶에서 놀이가 왜 필수적인지, 그것이 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줍니다. 무엇보다 규율과 자율을 모두 존중하는 육아는 정말로 어렵지만,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규율을 따르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가면서 자율을 배운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육아의 비밀은 놀이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 철학자와 늑대

제가 쓴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제목을 이 책을 따라 <철학도와 아이>로 붙이려고 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동물권에 대한 옹호자이자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철학자인 작가가 우연히 늑대를 집에서 키우게 되면서 겪게 된 에피스도와 철학적 성찰로 이뤄져 있습니다. 브레닌은 야성이 남아 있고,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는 24개월 이하의 아이와 닮아 있습니다. 늑대를 보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독특한 책입니다. 저자는 늑대 브레닌이 개와는 달리 품위가 있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를 브레닌으로 키우는 지혜를 줄 수 있는 책입니다.

3. 무지한 스승

배운다는 것과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생각해보도록 도와줍니다. 이 책에는 네델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어 교사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기본적인 내용도 가르쳐주지 않고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의 프랑스어 구사 수준은 작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스승이 때로는 학생들의 지적 발달에 더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하자 교사가 모르는 것을 교사가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어쩌면 무지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이의 고유한 지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부모의 좁은 생각이 아이의 생각을 좁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아이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4. 보다

김영하 소설가의 산문집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진심은 그렇게 전달되지 않고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전달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진심만으로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본 책과 영화에 대한 글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김영하의 독서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도 김영하처럼 육아책을 읽고, 내 아이도 관찰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5. 사람 장소 환대

육아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사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처한 온갖 ‘육아의 곤경’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사회가 육아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육아하기 좋은 사회는 이 책의 제목을 이용해 말해보자면 ‘사람을 환대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북유럽 육아의 힘은 어떤 사람도 문전박대하지 않는 사회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환대해주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누구의 바램이 아니라 자신의 바램에 따라 학업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혼자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육아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육아하기 더 좋은 사회를 만들 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맘앤앙팡> 2016년 2월호에 특집기사로 실렸습니다.

맘앤앙팡, 프랑스육아, 북유럽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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