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밥을 먹다 한가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아무 맛도 못 느끼는-그러나 막 지은 밥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쌀을 왜 사람들은 예전부터 주식으로 삼은 걸까? 물론 맵거나 시다거나 쓴 맛은 매일 먹기 거북할테니 주식으로 쓰일 수 없다지만 단맛이 나는 것을 주식으로 삼을수도 있지 않은가? 곡류가 아닌 사탕수수와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아무 맛이 안난 듯 맛을 내는 곡류가 주식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것도 같다. 자신은 맛을 내지않지만 그 중용의 맛으로 인해 다른 반찬류의 맛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싶다. 날마다 좋은 일이라든가, 날마다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설령 어떤 일이 발생했을때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 일에 따라 급물결을 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도 특정한 맛을 내지 않지만 그렇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의 맛으로 다른 자극적인 희노애락의 반찬을 보다 잘 느끼며 찬찬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 기쁜 일이 없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마음에 평화와 얼굴에 미소가 머금고 있다면.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yrk829 2004-09-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춰볼까요? 당신은 나보다 한살많은-나보다 많은것을 알기때문에 제가 읽은책은 당신보다 적긴적습니다. 왜냐면 난 당신이 읽은 책들을 하나도 모르거든요- 언니 입니다. 제가 맞습니까?
제발 힌트라도 하나 주시지요. 이건 너무 범위가 넓어서 제게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yrk829 2004-09-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를하면 평화가 온다. 맞습니다. 저도 요즘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평안한 마음이되고 정성을 다한 요린 못생겨도 맛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주는 요리는 사랑이란 조미료가 있어 더 맛납니다. 비록 소금을 한통넣었어도.

yrk829 2004-09-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남성의 여부만 알려준다면 제가 100날을 1살부터 늘려가며 맞추지요 ㅋ

yrk829 2004-09-1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쌀(우리나라의 짧은 쌀 종류)이 길러지기 좋은 기후입니다. 문화는 기후에 의해 생성됩니다.

icaru 2004-09-30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은 맛을 내지않지만 그 중용의 맛으로 인해 다른 반찬류의 맛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것.
음...!!

하루살이 2004-10-0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사람 모두가 밥이 될 순 없겠죠. 누군가는 입맛을 자극하는 반찬이 되야 할테고.
아마 반찬은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밥은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 맛있는 밥이 필요한 세상에 죽도 밥도 아닌게 밥상에 올라오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눈과 입과 혀와 코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한바를 위해 쌀을 씻어야 겠습니다.
 
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의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 양문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그의 전작 [생태주의자 예수]와 닮아 있다. 아니 닮아 있기보다는 개정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성경의 인용구가 빠진 대신 최근의 자료들이 첨가된 형태라고 보면 맞다. 그래서 최근 환경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자꾸 혼동이 되던 것이 반복적으로 책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로 인해 점차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지금과 같은 화석원료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발은 한계에 다달렀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데 이 부분이 굉장히 햇갈리게 만든다. 크게 두 줄기로 나눠보면 100여년전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현대의 기술적 진보를 이용해 합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러다이스트로 살아가는 것은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란 책에서 나오는 아미쉬 집단을 보면 된다. 극단적인 모습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문명을 거부하는 것도 그렇게 썩 나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젼, 컴퓨터 없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들처럼 훌륭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어느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고, 그 불편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반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태양열 전기나 풍력 발전, 바이오 매스 같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대중교통, 특히 철도 중심의 교통체계 등을 바탕으로 현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둘의 방법은 마치 양 극단에 있어 절대 그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중심개념이 시간에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닮아있다. 자급자족의 삶은 생산에서 소비까지 온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프란츠 알트가 주장하는 생태적 경제라는 것도 노동의 시간을 줄여 가정의 시간 또는 개인 자아의 시간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즉 노동의 여성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의 시간이 줄고 소득이 줄지라도 소비사회를 지양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를 알고 그 대안도 어느정도 제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현실을 모두 과감히 부정하거나 너무 거시적인 것이라 아직 피부에 와닿진 않는다. 다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소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정말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 또 다시 <즐거운 불편>이라는 책을 집어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인간에게 어떤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야말로 가능한 재앙은 모두 가져온 듯하다. 주먹만한 우박, 갑작스런 빙하기, 엄청난 위력의 토네이도 등등. 실제와 같은 완벽한 CG로 된 화면에 숨이 멈출 듯하다. 그리고 뭉뚱그려진 도덕적 교훈,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그러나 실상을 보라. 우리는 영화가 말하는 온난화의 주범인 차가운 에어컨 바람속에서 영화를 지켜본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보기위해 복사된 필름은 수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가며 공수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밖으로 나오면서 '아 너무 덥다' 하고 하늘을 쏘아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마도 프랑스나 칠레산 포도주라도 한잔 마신다면. 또는 열대 우림을 없애고 들어선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커피 한잔을 마실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에어컨을 빵빵히 틀어논 자가용을 타고서다.

그러니 영화속에서 보여진 재앙은 그저 영화속의 재앙일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빈 메아리로만 남는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행동해야 한다며 일회용 제품을 줄이고, 재활용을 생활화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일밖엔 안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화석연료를 대신할 대체 에너지의 생활화다. 그러나 이것은 석유 메이저 회사와 자동차 산업, 군수산업 등 현재의 자본주의를 굴리고 있는 막강한 경제적 파워로 인해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비전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투모로우]가 상상력이 빈곤한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미국 부통령이 말한 경제라는 문제 뒤에 감추어진 실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늦지 않았다는 교훈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실은 당장이라도 디지털화된 이 영화를 필름말고 디지털로 받고, 극장이라는 것은 자신의 집 근처에서, 그리고 움직이는 것은 대중교통을, 먹는 것은 원거리를 이동한 것보다는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먹는 것 만으로도 한발짝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각성과 함께 사회적 조직적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지만 가능하다. 물론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개인적 건강이 화두가 되어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 웰빙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간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속 의미와는 다른 진짜로 늦지않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불인(不仁)이라는 도덕경의 글귀를 새겨들어야 할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스코트 새비지 엮음, 김연수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었다면 지금 여기에 글을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컴퓨터를 비롯한 모든 전기에너지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자급자족을 꿈꾸는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행동을 하나하나 돌아보는 것일뿐이다.

나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중요한 일을 위해 무슨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자각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반성부터 하고  볼 일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녕 그렇게 아이을 위한 돈벌이를 위해 아이 얼굴을 하루에 한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또 멋있는 휴가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한다. 1년에 열흘도 안되는 날을 위해 매일 야근에 술이다. 이미 일 자체에 사람들이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난 노동의 가치를 위해 일한다고는 말하지 말자. 솔직히 왠만하면 최대한 일을 적게하고 싶은게 사실이지 않은가?

그럼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미 대답을 적어 놓았따. 아이나 가족, 또는 멋진 여가, 노동의 참 맛 등등. 그러려면? 이 책은 바로 그것들을 위해 당장 모든 플러그를 뽑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플러그를 뽑음으로써 비로소 사람과의 참다운 관계를 형성한다. 즉 소비자로서 노동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생각하라는 초기 불경의 말씀과도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로의 전환은 결코 쉽지 않다. 소비가 주는 유혹과 쾌락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우리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현대적 도구들에 대한 소유욕 또한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익명성의 유혹이다. 대중소비사회로 진행되어 오면서 우리가 얻는 것중의 하나는 바로 익명성이다. 나를 세상속에 감추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따라가는 것의 편안함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노동의 참맛을 알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참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능동적으로 변해야 하며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며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않는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이름을 감추고 남 뒤에 숨어 있을때는 그저 나 자신만 생각하고 나 자신만 편하면 만사가 좋았다. 그러니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그다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잠깐만 나를 뒤돌아보자. 정말로 난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익명성에 몸을 감추고 편리를 추구하는 삶 속에선 실은 내가 없다. 난 그저 매트릭스의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플러그를 뽑는 것은 알약을 먹는 것이요, 그랬을때 비로소 진정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 난 분명 당장 이 삶의 전환을 이룰 수 없을것임을 안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삶으로의 전환을 위해 지금은 최대한 전기세를 아끼는, 그리고 소비를 줄이는, 그리고 많이 움직이는, 또한 돈에 굶주리지 않는 즉 파란만장한 미스터 이 10억 만들 필요가 없는 소박한 삶을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통 모기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문장군이라는 말대로 정말 용맹스러운 그의 날갯짓에 제 몸은 너무 괴롭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피를 빨러 오는 놈. 잠자리에 눕는게 두려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어젯밤.

자리에 눕는 순간 눈이 먼듯한 느낌이 듭니다. 창문 사이로 둥근 달이 떠 있더군요. 얼른 달력을 들춰봅니다. 내일이 보름이더군요. 원래 잠자리에 들때면 항상 라디오를 켜 놓거나 CD를 들으며 잠을 청했는데 오늘은 그냥 눕습니다. 오직 정적만이 흐릅니다. 다른 때 같으면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기겁을 하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을텐데 왜 이리 조용한지... 보름달은 사람들에게 아는듯 모르는 듯 영향을 끼치는가 봅니다.

시간도 정지하는듯. 그러나 달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점점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달이 이내 건물 뒤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달빛은 아직 제 창가에 남아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주 오래전 오대산서 눈빛을 반사하던 그 달빛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도시에서 느끼는 이런 적막감과 황홀한 빛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추석이나 설때 보는 커다란 달보다도 오히려 더 다정다감합니다. 우수나 외로움, 고독 따위가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마치 득도한 마냥 몰아의 경지에 있는것 마냥 공중부양한 것 마냥 삼매에 들어있는 것 마냥 그런 것 마냥. 이대로 눈이 멀어도 좋을 것 마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