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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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라는 이 사람은 솔직히 말해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주간지 기자라는 경력이 그를 이런 완벽주의자로 만들어 놓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리포터를 쓰기 전, 그것에 대한 사전정보를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한다. (이것은 인터뷰의 대상으로보터 보다 상세한 설명을, 또는 감추어진 것들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책꽃이 한 단을 다 차지하고도 넘을 정도의 책(대략 몇 백권 이상의 책)을 읽고나서야 인터뷰를 행하는 자세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배워야 할 자세라고 여겨진다. 심지어 자신의 원고료가 60만원일 때, 준비하는 책 값만으로도 60만원을 훌쩍 넘겨버릴 정도이니 말이다.

다치바나의 이런 책읽기 습관으로 인해 그가 소장하고 있는 책만으로도 한 건물을 다 차지한다. 친구의 도움으로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고양이 건물이라는 것을 짓고, 지하에서 지상 3층까지 온통 책으로 가득찬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간 사람. 그 사람의 책 읽기에 대한 자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개론서를 3권이상 구입한다. 이것은 한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각이 서로 다른 책을 구입해야 한다. 어떤 개론서가 좋은 책인지는 책의 증판, 증쇄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는 세세한 정보까지 주고 있다. 그리고 개론서를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부분이나 궁금증이 확대된 부분에 대한 전문서적을 구입해 읽는다. 만약 이런 책을 읽는 도중 도저히 읽어나갈 수 없을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당장 그만둔다. 그리고 책을 구입할 때는 서점을 한군데만 둘러보지 말고 여러 군데를 둘러본 후 무슨 책을 살 것인지 결정하라.  등등등.

그런데 다치바나의 책은 픽션을 제외한다. 픽션보다 더 흥미로운 일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데 굳이 픽션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물론 다치바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며, 자신은 특히 그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유달리 욕구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기 위한 책읽기가 무척이나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첨가한다. 텔레비젼이나 영화 보는 것보다 책 읽는다는 것 그 자체가 재미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다고 그가 문학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고보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대부분 고전이라고 부르는 문학서적들을 다 읽어버렸다. 남들이 평생 읽어도 다 못읽을 정도의 문학서적을 이미 다 읽고 난 이후이기에 부릴 수 있는 배짱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논픽션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최근 나오는 현대소설들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설명일듯싶다.

아무튼 그의 전방위적 호기심 추구와 철저한 준비라는 태도는 존경하고 싶다. 식지않는 열정을 가지고 대상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에서 사물을 또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부끄럼없이 당당하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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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2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논픽션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최근 나오는 현대소설들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설명일듯싶다. 정말 그게 옳을 설명일 듯 싶네요~ 픽션을 그렇게 일축할 거 까지야 없지 않나 싶더라고요...

저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그거였어요... 어떤 책이든...핵심적인 내용은 5분안에...정리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진부진늘여붙여 리뷰를 급조해내던 저에게 딱 일침이었죠..

하루살이 2005-01-2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짧은 대화로 책의 중심내용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 이영표의 헛다리 짚기처럼 변두리 이야기로 책을 읽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지 말고, 바로 과녁을 꿰뚫을 수 있어야 할텐데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중엔 오토마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오토마톤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무의식적 행동들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전거 타기나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자전거 또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채 페달을 밟거나 핸들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운전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상태없이 몸은 알아서 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체득된 기술들로 인해 이젠 자전거를 타면서 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그 이외의 다른 행동들을 쉽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즉 운전하면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거나 등등.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확대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겨난다고 한다. 즉 학습 등을 통해서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혀가고 배운것이 오토마톤, 즉 무의식에 가깝도록 체득된 후에는 또 다른 것들을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오토마톤이라는 부분을 읽다보니 문득 바로 이 지점이 명상이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마톤의 영역, 즉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말이다. 숨쉬는 것, 걷는 것 등 의식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마음 속에 새기다 보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당연시 여겨지지 않음으로써 주는 그 신비로움이 주는 충격은 참 신선하다. 그리고 바로 그 신선한 충격이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즉 정체성의 확대라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즐거움을 주듯, 명상 또한 확대보다는 기존의 것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듯하다.

따라서 우리가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히는 것과 함께 오토마톤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랬을 때 진정한 자아에 대한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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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2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

님의 이런 통찰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게 아니겠죠...
또..감탄하다가...갑니다~

하루살이 2005-01-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또한 무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그래도 명상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의식적 명상은 오토마톤과는 다른 것이겠죠? ^^
 
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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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재미있는 책.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을 예측하면서 순간 당황하게 됩니다. 나의 예측이 맞았노라고 히죽히죽 웃고 있을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아직도 책은 100쪽 가까이 남겨져 있기에 말입니다. 분명 내 예상대로 이야기는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책은 이제 정리할 마지막 몇 쪽만을 남겨놓아야 하는데 말이죠. 정말 거대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숨가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차차 정리된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아직 이야기는 급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거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마치 추리소설마냥,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냥 흥미진진합니다. 베르니니의 예술품 속에 감추어진 암호들, 그리고 갈릴레오 이후의 일루미나티라는 집단에 대한 궁금증, 물질과 반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촘촘하게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까지도 훌륭합니다. 시간 흘러가는 줄 몰랐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이 말하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 또는 통일은 그다지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해부가 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것이라는 의견도 이미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또한 신에 대한 신비성을 없애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항상  존재했었죠. 그리고 진화의 속도차에 대한 문제의식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인간의 과학만큼 빨리 진보하지 못했다. 인류는 자신이 소유한 힘에 걸맞게 정신적으로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을 무기를 창조한 일이 없었다.(350쪽)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것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내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맘껏 해낸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고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질의 대칭에 놓여진 반물질의 생성과정, 그리고 반물질 주위로 형성되는 물질들이 빅뱅의 현상과 무에서 유의 창조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의 무라는 것이 절대 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든 빛이든 이것은 이미 유입니다. 게다가 반물질을 탄생시키기 위해 입자 가속기를 돌린다든가 전자를 벗겨낸다든가 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 또한 어떤 힘의 전제를 필요로 합니다. 즉 절대적인 무에서의 유의 창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죠. 제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끝끝내 해결하지 못할 이 최초의 그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일 수 있으며, 부처일 수도 있으며, 도 일수도 있으며, 스스로 그러한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라 이름붙이든 그것이 절대적인 무일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명칭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지겠죠.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자연이나 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주를,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 나타나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부분이 종교라고 불려질 수도 있을 것이고, 철학이라고도 불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안티노미(이율배반)는 솔직하다고 여겨집니다.

'세계는 시작이 있는가 아니면 시작이 없는가’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한가, 아니면 한계가 있는가’

‘사후에 정신은 존속하는가 아니면 존속하지 않는가’

부처 또한 마찬가집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에 연연하기 보다는 업의 굴레를 벗어날 실천을 중시했죠. 도가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기에 우리는 그저 그 말할 수 없는 도를 말할 필요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과학과 종교의 대립보다는 도덕성이라는 진화의 속도에 저는 촛점이 맞혀집니다. 무감동은 죽음이라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덕성은 의무감이라기 보다는 측은지심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이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테니까요. 두서없이 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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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2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종교의 대립보다는 도덕성의 진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읽으셨네요...
정말 거대한 반전이 숨어 있었지요... 재밌었어요..
물론 그 재미란게 읽을 때 뿐이지만요...

하루살이 2005-0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종교의 양립구도는 개인적으로 허구의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도덕성의 진화는 미래 우리네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겠죠. 반물질의 무기화는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급진적 유전공학 발전으로 말미암은 배아줄기세포복제, 체세포 복제 등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 우리의 도덕이나 철학이 절실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새로운 인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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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이 리뷰는 전적으로 오독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번역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원서 자체의 난해함이 책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저 개인의 독해 능력이 부족한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소설은 서사적 양식을 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초반부 단어들의 나열은 읽는 속도를 저해합니다. 게다가 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는 곤혹스러움으로 책을 계속 읽어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읽어나간 것은 이 책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터키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점차로 로드무비 형식의 사건 전개가 이뤄짐으로써 어느 정도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기도 하고요.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식은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충돌이라기 보다는 서구 현대화의 물결이 가져다 주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굳이 터키가 아니라 최근 개방되어진 동구유럽이나, 심지어 몇십년 전의 우리나라를 가져다 놓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식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과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책의 주인공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모든 인생이 뒤바뀌는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주인공 아버지의 친구이며, 직장 동료로서, 자신의 집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저씨입니다. 아버지와 이 아저씨는 철도청에서 근무한 사람들로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철도산업보다는 자동차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은 소설 대부분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주인공의 버스 여행에서 드러납니다. 책을 읽고나서 그 책과 연관이 있었던 한 남자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모두 버스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새로운 인생>이라는 사탕을 만든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변화된 버스와 휴게실을 통해 사회의 변동을 보여줍니다. 철도와 버스는 과거와 현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전통과 외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외래란 미국을 의미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미국은 자동차 산업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달리기 위한 도로와 석유의 필요성, 그리고 달리면서 먹어야 하는 휴게실과 패스트푸드 등, 그들의 생활 전반이 모두 자동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요? 따라서 터키의 철도산업이 쇠약해지고 자동차 산업이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한 산업이나 교통수단의 교체가 아니라, 삶의 양식이 미국화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급변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이 문제를 언제 어느때고 마주칠 수 있는 교통사고로 표현하는듯 합니다. 삶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끝내버리는 우연한 사고의 가능성. 문명화되고 발전한다는 세상은 사고의 가능성 또한 키워가는 것 같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얼핏 인간적인 냄새가 사라져버리고 초호화스러운 휴게실을 통해 현대화가 결코 따뜻한 변화는 아니라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또한 소설의 종반부에 사탕을 만든 아저씨를 찾아 떠나는 것은 그 사탕껍찔 속에 그려진 전통에 대한 향수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현재의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로의 회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힘들듯 합니다. 얼핏 주인공이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통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듯 보여지던 이야기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인물의 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과거를 지키고자 하는 집단에 동화되어지는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이 모든 과거로의 벽을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되풀이해서 육필로 옮겨쓴느, 그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통과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사이의 어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관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알고보면 주인공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책이 가져온 변화가 주된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한 눈에 반한 사랑하는 사람의 음모이기도 합니다. 어쨋든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도, 사탕도 그 비밀을 밝혀보니 모두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과거의 짜집기였던 것이죠. 하지만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아니였습니다. 그것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그는 정말 새로운 인생을 터득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이 가장 단순한 일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현명하게 파악하며, 거리에 비추는...(334쪽)

개인적으로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위의 글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로운 무엇은 무엇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새로워져서 일겁니다. 주변의 일상을 은혜로 바라보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자신의 모든 여행의 출발점이 사랑이었으며, 자신의 변화 또한 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누구누구를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작고 단순한 것들을 그저 찬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정은 싹틀 수 있음을 그의 버스여행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죠.

세상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볼 때 인생은 새로워질테지요. 그냥 이렇게 제 마음대로 해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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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5-01-2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가 되는 말이군요.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각자의 해석 또한 분명 중요하지만 그래도 정답 아닌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읽기는 정답에서 한참 벗어나지 않았나 하는 자문을 해보다, 님의 리뷰를 읽고 그 답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가끔이라도 들리는 길이 즐거운 나들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저도 님의 서재에서 신선한 생각들을 많이 얻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전출처 : stella.K > 음식으로 道닦는 일본요리사, 나카히가시 히사오

지난 14일자 주말매거진에 일본의 유명 요리사 나카히가시 히사오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썼습니다.

 

                       * 나카히가시씨

 

200자 원고지로 14장을 썼는데, 지면 사정으로 9매로 줄여야 했습니다. 기사를 '쳐 내는 일'(신문사에서는 원고 줄이는 작업을 이렇게 부릅니다)은 흔하고 또 흔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풀과 동물은 인간에게 먹히려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패스트푸드와 대량생산식품에 밀려 진짜 맛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짜 맛을 보여주는 '키즈 셰프'(Kids' Chef) 프로그램을 작년 말부터 진행 중이다" 등, 그의 말들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사를 줄이려니 키즈 셰프 프로그램과 관련된 부분을 모두 쳐내야 했습니다.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주고 풍부하게 해주던 각종 수식어들도 걷어내야 했구요.

 

그래서 여기 한풀이 하듯 기사 원문을 구름에클럽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구름에

 

 

나카히가시 히사오(中東久雄·53)씨를 찾아갔을 때, 그는 채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는 두릅 하나를 눈높이로 들어 한참을 쳐다봤다. 이어 한무더기 쌓인 돗나물 잎을 하나 떼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눈까지 치켜뜨고 정신을 집중해 씹는 것이었다.

 

              *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무

 

나카히가시씨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식당 ‘소우지키나카히가시(草喰なかひがし)’의 주인이자 요리사다. ‘풀을 씹어 먹는 나카히가시’라는 뜻이다. 넓이가 5평 남짓에 좌석은 12개에 불과하지만 6개월 전 예약해야 겨우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내로라 하는 일본 정계와 재계, 문화계 인사들은 모두 이곳을 방문했다고 할 정도다. NHK방송은 1년 내내 나카히가시씨를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나카히가시씨는 오는 3월 자신의 요리세계를 선보이는 행사에 쓸 한국 봄채소들을 맛보기 위해 지난 5일~6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만든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재료가 지닌 생명력이 먹는 사람 속에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들과 산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잡아먹히려고 태어났나요? 하지만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영양과 기운을 섭취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음식 재료들을 바라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룬다. 이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약이 아닌가. 나카히가시씨는 “내 음식을 먹으면 ‘맛을 떠나 건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몸이 좋아졌다는 손님들도 있다”고 했다. 언젠가 그가 우연히 가부키 공연 팜플렛을 보니 식당 상호와 똑같이 ‘소우지키(草喰)’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알고보니 옛날에는 이 단어가 ‘약 파는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 두릅 튀김

 

나카히가시씨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생산된 채소와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는게 가장 몸에 좋다”고 믿고 있다. 서로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다. “한국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고 하자, 나카히가시씨는 “예전부터 깊이 공감해온 말”이라고 했다. “신토불이란 본래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땅과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라는 의미죠. 그런데 작년 한국에 와 가락동시장에 갔더니 ‘신토불이’라고 적힌 종이상자가 널려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일본에서는 그렇게 알려진 말이 아니거든요.”

 

가락동시장에서 나카히가시씨는 흙이 그대로 묻은 무를 보고 더욱 감동했다. “일본 채소가게에 가 보면 모든 채소가 똑같은 크기에, 깨끗하게 씻어서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에 담겨 있죠. 자연에서 격리된 죽은 채소에요. 가락동에서 흙 묻히고 나뒹구는 무를 보면서 ‘저건 틀림없이 맛이 있는 무’라고 확신했죠. 자연과 연결돼 기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한국 채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모듬 야채튀김

 

그는 요리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재료에게 ‘어떻게 요리하면 되겠니’라고 물어보면 답이 와요. 재료를 쳐다보고 맛보다 보면 요리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뜻이죠. 한번은 길을 가다 버려진 콩깍지를 봤어요. 뭔가 내게 말을 하려는 것 같아 콩깍지를 헤쳐보니 콩 몇 알이 남아 있었어요. 주방으로 가져다 콩들이 말해주는대로 요리했더니 맛있는 음식이 됐어요.”

 

나카히가시씨가 주방에서 두릅을 쳐다보고 돗나물을 맛본 것은 처음 만난 한국의 풀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었다. 그는 일본에는 없다는 돗나물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풀들이라 산에서 자란 것과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살짝 데쳐 드레싱을 곁들이겠다”고 말했다. “봄동(가을 추수가 끝난 밭에 씨를 뿌려 겨울에 나는 배추)은 물에 데쳐 유부와 같이 먹으면 좋겠다” “두릅은 튀김이 어울리겠다” 채소들이 들려준 자기 요리법이 이어졌다.

 

나카히가시씨는 “일본 사람들은 원래 채소를 날로 먹지 않는다”며 한국인들이 생 채소를 먹는 습관에도 큰 호감을 보였다. “한국사람들이 맵고 짜게 먹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날밤이나 날고구마처럼 익히지 않은 채소를 많이 먹어서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인 것 같네요.”

 

그는 무에 묻어 있는 흙을 툭툭 털어 칼로 잘라 맛을 보더니 “달고 맛있어서 날로 먹어도 좋겠지만, 나라면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인체는 1%가 염분이기 때문에 수치상으로만 보면 음식에 1%의 소금을 첨가했을 때 인체와 염분 농도가 같아져 가장 맛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을 존중하는 나의 조리법은 요즘 유행하는 ‘웰빙’ 혹은 ‘슬로우 푸드’와도 통하는게 있다”며 “하지만 나의 요리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30여년전 여관을 운영하며 요리도 했던 내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누구나 나처럼 음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년 11월 ‘키즈 셰프(Kids’ Chef)’를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방문해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껏 만든 먹을거리를 어린이들에게 맛보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유년기 형성되는 입맛이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그는 “지금 입맛을 되돌려놓지 않으면 패스트푸드와 대량 생산식품에 밀려 진짜 맛을 영원히 잃어버릴 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성윤기자 gourme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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