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고전의 매력은 그것이 끝없이 변주된다는데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수에 대한 테마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그 절정기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몽테크리스토의 변주일뿐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호학을 밑바탕으로 하고, 역사를 얼개로 해서 그려낸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은 움베프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다빈치 코드>는 여러모로 보나 이 <장미의 이름>의 변주곡이다. 변주가 꼭 질의 낮음을 의미하거나 원본의 복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주는 변주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 될 수 있다. <다빈치 코드>또한 이런 훌륭한 변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진다.

<장미의 이름>이 엄숙함과 권위에 파묻힌 당대의 종교적 독선과 편견을 비극으로 표현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희극으로 나타냈듯이, <다빈치 코드>는 예수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준다. 이것 또한 남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종교적 권력에 대해 여성성을 드러냄으로써 편중된 힘에 대해 균형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여성성의 드러냄이 이 소설의 전체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드러냄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예시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소설을 읽는 도중 정말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작가가 설명한 대로 일까 하는 궁금증에 잠시 책을 접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펴든다. 그리고 찾아보는 다빈치의 그림. 도판의 그림 자체가 워낙 희미해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얼핏 예수 오른편의 인물이 매우 여성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순간 찾아오는 전율.

<다빈치 코드>는 같은 작가의 전작 <천사와 악마>보다는 조금 재미가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남성과 여성, 음과 양의 조화에 대한 추구,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감추어지고 왜곡되어지는가에 대한 관찰은 역사가 왜 승자의 기록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퍼즐맞추기 식의 조롱 비슷한 다빈치의 장난등을 보면서, 다빈치를 그리는 작가의 시선이 정겹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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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5-02-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 같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이제 SF영화계의 '스타워즈'요, 갱스터 영화계의 '대부'가 된 듯 싶습니다. ^_^

하루살이 2005-02-2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도 추리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면 더할나위 없을테지만...
 

1. 사랑할 땐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동사서독>을 지나, 사랑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라는 <중경삼림>을 넘어, 이제는 사랑은 타이밍이라 말하며 왕가위는 <2046>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론 전작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영화였다. 그러나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 너무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음악으로 인해, 초반 넋을 잃고, 이야기를 쫓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이별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채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 온 마음을 뺏기기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얼핏 본다. 이렇게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타이밍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왕가위의 설명은 일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내가 너를 향해 있을 때, 너도 나를 향할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니 사랑을 완성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 도와줬다는 것으로 밖엔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왜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타인을 향해 마음을 줄 수밖에 없을까? 그것 또한 운명이려니.... 그렇다면 이 운명의 가혹함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왕가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답을 내놓는다. 친절하게도. 내가 계속해서 상대를 향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상대도 나에게 얼굴을 돌릴 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순간도 나에게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 상대라면...

2. 이번 영화 또한 화면만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왕가위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주인공들. 도대체 이들은 왜 기울어져 있을까? 생각해보다 이내 그 답을 바로 그 화면들 속에서 찾아본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혼자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상대방이 함께 있을때 나와 상대는 화면의 맞은편에 서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비록 화면 속에서 주인공 혼자 서 있을때조차 그 맞은편엔 항상 상대방이 있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그 화면 속으로 들어왔다가 또 그 화면 밖으로 나간다는 것. 사랑이 오고 감이 그 한구석에 표현되어지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쓸쓸하고 허전한 듯한 느낌도 이내 꽉 채워질 것이라는 조그만 희망을 품고 있어 오히려 따뜻해보이기도 한다. 빈자리, 언젠가는 채워질 그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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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라고 할만한 내용 있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 것일까? 아니면 메트릭스와 같은 사고의 유희?

액션을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할 영화다. 두세장면 조금 눈요깃거리가 있을뿐 화려함은 없다. 섬세함도 없다. 더군다나 영화 속 지옥에 대한 묘사는 차라리 기대를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같은 지표면에선 화면만 타오를뿐이지 그곳에 나오는 생명체들은 멀쩡하다. 그리고 도대체 그것들은 지옥의 개도 아니고 무엇을 묘사한 것일까? 기독교에 대해 문외한이다 보니 저것이 과연 성경 속 지옥인지, 불경 속 지옥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겠다. 어찌보면 터미네이터의 미래 모습같기도 하고... 도대체 그 지옥같지 않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아우성대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실망말자?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있으니?

세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데, 갑자기 그 균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현세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되는 악마들이 세상 속으로 튀어나오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퇴마사로 콘스탄틴이 등장한다. 콘스탄틴은 오직 자신의 천당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의 눈밖에 난다. 자기 희생이 없는 한 천당은 절대 갈 수 없다는 협박까지 받는다. 그리고 끝내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악마의 아들을 세상 속에 불러내려 한다.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야 비로서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그려본다.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아무 거동도 않는다. 다만 마지막,  악마 루시퍼가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할 때 나타나 천당으로 이끌려고 한다. 마치 사람을 놓고 쟁탈권을 벌이고 있는듯이... 그러고 보면 선과 악은 이미 균형상태가 아니다. 루시퍼는 힘없이 신에게 자신의 노획물(콘스탄틴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을 빼앗기고 마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만 당할수 없다는 자세로 루시퍼는 감히 '애비도 몰라보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콘스탄틴을 천당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살려두고, '나중에 너 어떻게 되나 보자' 라는 심보를 부린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인 마냥. 지옥도 천당도 현세도 인간의 의지로 선택되기 보다는 신과 악마의 밀고 당기는 놀음에 좌지우지되는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여기에 재미를 더하는 것은 가브리엘의 능청맞음이다. 거봐라, 콘스탄틴. 네가 이렇게 변하고 있지 않는냐? 오직 자신만을 위하던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 희생을 이뤄내지 않는냐? 이건 모두 다 내가 세상을 악마의 지배로 이끌려고 한 나의 덕분이다. 말같지 않은 자기 변명. 아~ 아마도 이것은 지식인들에 대한 비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비겁한 자기 변명입니다. 라는 실미도의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장면이다.

오호 그렇다면 이 영화는 콘스탄틴의 자기희생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런 자기희생이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지만 말이다. 결국 사랑은 위대한것? 영화가 끝나면 바라는 것은 제발 둘이 균형을 이루어 저 세상에서 살아갈뿐 이곳에선 관심도 두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담배를 피워 폐가 시커멓게 된 콘스탄틴이 끝내 담배를 빼어 물든 말든 가만 놔두라. 그리고 그런 후에 어디로 데려가든 신경쓰지 않을련다. 악마를 천당으로 보내니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곳을 따로 염두에 두지말고 살아보자고 말이다. 현세가 이미 천당도 지옥도 모두 갇추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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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2-2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이 영화를 교회홍보, 금연공익광고, 금주공익광고 라고 보죠. ㅋㅋ

하루살이 2005-02-23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트릭스의 네오가 금연홍보대사로 나섰다는 설도..^^
 
짚 한 오라기의 혁명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한살림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한마디로 자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이란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고 해서 숨쉬기조차 거부한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는 인위적인 것을 하지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방임과 구별해야만 한다.

자유와 방임의 차이는 과수 작물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무가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가지치기를 했을 경우, 그 이후 나무에 손을 대지 않게 되는 경우엔 모두 고사해버린다. 반면, 어렸을 적부터 자연그대로 커온 나무는 스스로 잘 자란다. 병충해도 없고, 농약도 비료도 그외 잡다한 작물 기술도 전혀 필요없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교육에도 도입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안다. 새소리와 물소리 등을 음악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에 잡음이 끼어든 순간 어린이의 귀는 혼돈을 일으킨다. 그래서 음계를 배워야 하는등 처음부터 다시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해야만 한다. 진짜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 인위적인 음악이 들어선다.

저자는 이런 자연과 방임, 또는 인위적인 것과의 차이를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이며 증명해보인다. 25살 이후 40년간 자연농법을 통해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농법보다 우수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쌀과 보리를 연이어 지으면서 땅을 갈아엎거나, 제초제, 비료 등도 쓰지 않고, 오직 추수할때의 짚만 땅에 흩뿌려 둠으로써 이 모든 작물들을 풍족하게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 농사법에선 잡초도 없다. 잡초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잡초라고 여긴 그 모든 것들이 수확하고자 하는 작물과 공존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즉 천적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거름이 되어주기도 한다. 풀과 벌레가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는 평화적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농기계를 도입하고 비료를 뿌리고 제초를 하며, 농약을 치는 것일까? 증산이라는 목적이었다면 이건 거짓말임이 저자의 40년 농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무엇? 아마도 맛의 질을 높이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때도 마음껏 즐길 수 있고, 보다 맛좋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개량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맛을 즐기기 위해 쌀의 껍질을 벗기고, 하우스를 짓고해서 생겨난 것들이 진짜 맛이 있을까? 영양도 맛도 상실한 그 거짓된 것에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렸을 적 가지치기를 당한 어린 나무와 같다. 그래서 자연스런 맛을 잃고 인위적인 보살핌이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된다. 물론 농기구나 제초제, 비료와 같은 석유관련 사업들의 팽창으로 인한 압력 또한 무시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3인 가족이 1500평이면 자급자족하고도 남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는 목표를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삶은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삶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즐거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개개인 각각은 물론 이런 삶을 영유하고 싶어하고, 또 영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유토피아일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람이 하나 둘 모여 조직이든 공동체든 어떤 모습을 띠는 순간, 개개인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 즉 안주하는 삶보다는 모험을 택하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기생자, 즉 무임승차라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의 땅을 일구면 좋을테지만 착취하는 자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그 착취여부를 떠나서 안주하는 삶을 택하지 않고 돌아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안주하고 싶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실은 불가능한 혁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성스러움에 절절매지 않고, 목표를 향한 절대 의지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도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증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게 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거나 자연과의 합일 등의 묘사 자체도 거추장스럽고, 그 원뜻을 상실케 할 정도라고 생각될만큼 청정한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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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체험 상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중 사후세계만큼 강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에 그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후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현세에 있지 아니하기에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죽음 바로 직전에서 살아난 사람들중 그것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카시는 이런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정말로 이것이 실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이것이 진짜 사후세계라는 가정을 했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다. 문화적 배경이나 사람 개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후세계라는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수만큼의 세계가 각기 존재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공통적으로 한단 말인가? 하나의 설명방법으로서 뇌의 환각을 들고 있다. 저산소로 인한 엔돌핀 증대로 환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터널이나 빛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으로는 인간이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했을 경우 느끼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설명이 임사체험에 가장 근접한 듯 보여지지만 이것 또한 빛과 터널에 대한 설명을 말끔히 해내지 못한다.

이런 임사체험과는 별도로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그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어떤 힘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힘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 반대편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죽음을 통해서 빛으로 분산됨으로써 에너지 불변은 유지하되 사후세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책은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을 공통된 요소와 그렇지 못한 것들로 분류하고, 그것의 신빙성을 얻기 위한 여러가지 실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사후세계가 아닌 뇌의 환각임을 증명하기 위한 갖가지 실험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책을 끝맺음하지만 무모한듯 보이던 임사체험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했다. 게다가 책이 전하고 있는메시지를 들여다보면 더욱 이 책에 끌리게 되는 점이 있다.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밝고 활기찬 것이든 어둡고 공포스러웠던 것이든, 진짜 사후세계라고 믿든, 그저 환각이라고 생각하든, 모두가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위한 삶으로의 경이적인 태도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임사체험을 경험해보기 위해 유사체험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할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카시가 직접 체험했던 캄캄한 탱크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꼭 그것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삶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숨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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