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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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름다움은 마치 높고 날카로운 삶의 비명과 같다. 아름다운 것들은 처음부터 조용히 자신을 묻고 숨어 살 수 없다. (중간생략) 사람이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룸다움 그 자체,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에 족한 절대의 가치.

미실은 <화랑세기>전반부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신라시대의 정치권을 쥐락펴락했던 색공지신(色供之臣ㅡ 임금에게 몸을 바치는 공양을 통해 임금의 신체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신하정도로 해석할수 있지 않을까)이다. 3대에 걸쳐 임금을 공양하면서 실질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통일의 의지를 갖었다기 보다는 그로 인한 정치적 흐름이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여성의 권력에 대한 상위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주체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듯 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오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미실은 경국지색의 미녀.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사랑에 실패(정작 그녀는 한번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하지만)하기도 하고, 권력투쟁에 휘말려들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만 정말로 이것은 오직 아룸다움에 대한 노래다. 그녀가 권력을 얻은 것도 오직 아름다웠기에 가능한 것이요, 힘든 삶을 살았던 것도 오직 아름다움으로 인한 자초다.

박애란 위선이거나 몽매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미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고 살고 죽는 모든 일에서 그러했다. 어쩌면 천지를 주관하는 신명까지도 아름답고 추하고 행복하고 불행한 일에 지극히 편벽되이 권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이 시대의 삶은 아직 지금과 같은 도덕과 금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갖는 힘을 이용해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지언정, 그 아름다움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이다.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사는 삶이 그녀를 권력의 중추자리로 옮겨놓았다. 오직 이것은 아름다움 덕분이다. 아름답지 않은 미실이었다면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다. 즉 아름다움이 바로 힘의 원천이다. 여성으로서라고 단정지어 주체적 삶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팜므파탈과 다르다.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괴한다거나, 권력을 파괴하는 악의 성질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 놓여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몰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황제들의 힘, 꺾이어진 첫사랑, 다시 찾아오는 사랑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실에게 있어서 사랑의 완성이었을 뿐이다. 그 슬픔과 좌절과 희망과 사랑의 모든 감정이 녹녹지 않은 문장 속에서 삭풍에 메마르지 않는 솔과 같은 푸르디푸른 힘을 갖는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미실을 통해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찾아내는지도 모른다. 거리낌 없는 삶을 이루는 그녀의 꿋꿋한 걸음걸음을 찬앙해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도덕률도 싹트지 않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지금의 페미니즘-생태학자들이 주장하는 원시농경사회(우연인지도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도 이런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쟁기와 소를 이용하는 경작법의 발명을 통해 생산량의 증가가 이루어졌다라는 부분은 이제 머지않아 미실과 같은 여성성이 사라지고 남성의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 농경사회와 쟁기를 이용한 경작의 차이는 농사를 짓는데 있어 근력을 필요로 하는 힘의 시대, 즉 남성 호르몬을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 대한 동경을 미실은 한 몸에 지니고 있는듯이 보인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미실이 가지고 있다는 낭만적 생각을 품도록 만든다. 분명 그것은 일정부분 참이며, 여전히 우리가 아름다움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동의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 이상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미실이 여자로서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라는 평가로 내려져서는 안될듯 싶다. (그녀처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바란다는 것은 여전히 황제와 백정의 구분이 있는 사회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전쟁이라는 잔혹한 힘의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실이 돋보인 것은 이러한 신분이라는 깨치지 못할 계급적 상황에서 맨 상위부분을 차지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를 포함해 당시 힘의 원천은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은 好 不好중 호를 뜻하며, 이는 사람에 대한 引力이요, 따라서 권력을 품는다.

그러나 그녀가 나이를 먹어 이내 삶의 의미를 깨닫는 부분에서처럼, 행복은 권력을 쥐었다거나,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통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녀는 죽음직전 해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이 모든 것을 함께 해 줄수 있었던 주위의 사람들, 죽음마저도 초탈한 사랑을 해준 설원, 그녀를 이해해준 황제들과 대비들 등등.

외모적 아름다움이 지고나서 주름살이 늘어나서야 비로서 미실은 참 행복을 깨우쳤다. 아룸다움은 힘이자 죄이므로 결코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 사람은 행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미실이 정녕 아름다움을 잃었을 때 비로서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또 그때 비로서 행복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휘두른 아름다움의 힘에 눈이 멀어 그녀를 동경해서는 안될듯 싶다. 미실이 돋보인것은 금기와 도덕에 휘말리지 않고 권력의 중추에 서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진 말년의 모습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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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3-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제가 욕심이 많은 건가요? 자주라니요!!! 너무나 오랜만이라 언제적 일이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
 

EBS 에서 방영하고 있는 <지금도 마로니에>라는 프로그램은 60년대초 서울대생 3명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학과의 김중태, 불문학과의 김승옥, 미학과의 김영일(김지하).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인들 천상병, 전혜린, 임권택, 신중현 등이 나오는데, 특히 앞의 세 주인공들을 둘러싼 고뇌와 그들간의 관계가 가슴을 저리게 만들곤한다.

항상 <죽고싶다>라고 소원하던 김지하에게 김승옥은 제발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말한다. 어렸을적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대한 강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김승옥은 진심으로 그가 살아있기를 원했다. 지하는 이 단어를 아마도 가슴 깊숙히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 고향 원주. 이곳에서 그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장일순을 만난다. 밥 한그릇에 담긴 우주와 밥 한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장일순을 뒤로 하고 김지하는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공산주의에 발을 담갔던 아버지는 <나는 실패자였다>라고 토로하고, 김지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외친다. 그리고 다시 원주를 떠나려 역에 도착할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일순이 전해주는 서예 한 점. 화선지를 펼치면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다라고 쓰여 있다. 김지하는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천리를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빨리 가려고 길이 아닌 곳을 가지 않는다. 그것이 길임에 바닥을 기어서라도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흙의 냄새를 맡으며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손과 발이 모두 흙과 함께다. 바닥을 김으로써 흘리는 땀방울이 땅을 적시는 것을 본다. 바닥을 김으로써 거친 숨의 의미를 안다. 바닥을 김으로써 삶의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게 한손 한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어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가리라.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리라. 결코 잘났다고 까치발을 하지 않고, 결코 잘났다고 자동차로 씽씽 달리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리라. 남에게, 세상에게 잘난체 말고, 기어 기어 그렇게 천리를 가리라. 온 생명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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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성격을 띤 글입니다.

 

반전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 앞부분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지금까지 전개됐던 이야기들이 반전을 통해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거나, 그 결말로 인해 앞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지면 이내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 영화, 진 핵크만과 모건 프리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언더 서스피션>은 반전으로 인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용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오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륙으로부터 떨어진 섬. 세금 변호사인 진 핵크만은 13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것은 2주전 12살 소녀의 살해에 이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핵크만은 56세때 20살 이었던 모니카 벨루치와 결혼한 사이다. 형사는 2주전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핵크만의 자동차와 또 다시 일어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우연히 겹치는 핵크만을 용의자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에게 심문을 해갈수록, 또 조사를 해갈수록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각방을 쓰고 있는 이들 부부의 불화 원인도 나이 어린 여자 조카에 대한 은근한 눈빛으로 인해 발생했다. 게다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핵크만의 현상실에서 살해된 두 여자아이의 사진까지 발견된다. 심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끝내 핵크만은 살인을 자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은 예상가능한 반전.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핵크만의 범행동기와 증거들로 인해 오히려 불편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통 반전은 그저 하나의 충격일뿐인데, 이 영화 속 반전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가지이나, 그 중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약해지는 자리에, 질투는 자리한다. 그리고 그 질투의 힘은 사랑을 좀먹고, 드디어 파괴시킨다. 영화는 그 파괴성을 드러낸다. 과연 반전으로 드러난 사실로 인해 부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금이 간 사랑을 불량품이 되어버린 믿음이라는 접착제로 부서지지 않게 붙여낼 수 있을까? 산산조각나 버린 사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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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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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승자가 바뀌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변한다면 그 인물의 성격 또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재탄생하는 인물들이 곧바로 교과서 속으로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도권 밖에서 활약하는 학자들이 펼쳐내는 역사서나, 제도권 내에 있더라도 독특한 관점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재미가 솔솔하다.

이덕일 씨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후반부에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 그 이야기의 중심을 두고 있다. 특히 노론이라는 집권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와 그를 보좌해 줄 역량있는 신하로서 남인 정약용과의 관계는 눈물겹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던 해에 태어난 정약용은 그의 향후 행보 또한 사도세자와의 운명적 관계를 유지한다. 화성으로 가기 위한 한강위의 배다리나 화성 축조를 비롯, 처음으로 임금과 접하고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모두 사도세자와 관계가 있다.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것이 권력투쟁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항상 피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노론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인 세력중 실력있는 자들을 궐내에 두려했으나 끝내 그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정조의 모습이 특히 애틋하다. 그의 죽음을 앞둔 장면에서 주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한채 스스로 자신의 병을 고쳐야만 했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다. 또한 이런 왕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항상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정약용의 모습 또한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정약용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 성균관에 있을때 논어 시험에서 전날 슬쩍 문제를 유출했다가 다른 문제를 내본 정조나, 특혜를 받지않고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험범위 전체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답안을 냈던 정약용의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될때 정약용을 감싸주기 위한 정조의 노력과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려고만 하지 않고, 왕과 노론과의 권력관계를 파악해 나아가고 물러남을 조절했던 정약용의 외로운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말리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말년에 귀향지에서 약전형과 나눈 편지의 내용이나, 가족들 특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 그리고 만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동생을 그리워하며 우이도에서 숨진 약전의 모습과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산 위에 서 있던 약용의 모습이 눈에 밟혀 섧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궁금증이 커가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찌 이 책속에선 노론은 절대악이며, 남인과 정조는 절대선으로만 보여지는가? 물론 이런 명확한 구분을 바탕으로 책을 써 나가는 것, 정약용의 입장에서 그를 위한 변명이나, 그의 자전마냥 써내려가는 것이, 독자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노론은 그야말로 절대 악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진다. 저자가 정약용을 대신해 변명한 많은 것들이 어찌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천주교 박해때 끝내 비밀을 지키지않고 발설하는 장면, 지방관리로 있을때 권력서열을 무시하고 직접 왕의 비호를 이용한 정책들, 왕세자의 병환을 구해내지 못한 것 등등 노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정약용과 정조의 거대한 1당 독재에 대항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는 숙명에 슬퍼하면서도, 한편 노론은 왜 그다지도 폐쇄적인 모습으로 끝끝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들었는지에 대한 알고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들이 진정 절대악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사족: 최근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국토의 47%를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땅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주어진 자연이라는 것을 빌려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것 같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투기라는 바람을 일으켜 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돈이라는 화폐를 증식시킨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그래서 차라리 이 시대에도 이익의 균전제나 정약용의 여전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해본다. 땅은 땅을 가는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을 지킬 수 있는 사회. 공산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노자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헛된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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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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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치바나가 도쿄대 교양학부 강의시절에 했던 강의 내용을 새로 고쳐 활자로 내보인 것이다. 책의 주된 테마는 세계 지식의 대충 훑어보기정도가 되겠는데, 특히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지의 스펙트럼을 경험해야 할 것과 그 스펙트럼의 넓이를 보여주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지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근거로 다치바나는 뇌에 대한 연구자료들을 내놓는다. 생명체들은 감수성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대상을 어머니로 인식하듯, 일정시기에 접하는 것들이 평생의 경향을 좌우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예로써 고양이의 눈을 가리고 행하는 실험이 있는데, 어렸을 적 한쪽 눈을 가린 고양이는 그 시력을 통해 이뤄지는 뇌의 작용이 활성화 되지 않게 되는 반면, 다 큰 고양이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이것은 뇌의 작용(지적인 것이든, 성격과 관련된 것이든)이 어떤 일정 시기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며, 이 시기를 감수성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 발달을 좌우하는 뇌의 시기가 바로 20세 전후이며,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다양한 지의 스펙트럼을 만나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스펙트럼의 다양화를 외치면서도, 특히 자연과학 분야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놓여져 있는 사회가 과학분야를 근간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양자역학과 분자생물학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 따라서 세상을 바로 이해하고, 그것에 그치지않고 세상에 주역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연과학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학이 이런 중요한 자연과학에 대한 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의 또다른 책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등에서 이미 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계속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찌된 것이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런 지식, 즉 교양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더 강하게 든다. 분명 신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인간복제나, 환경, 에너지 문제등과 직면해 있고, 그런 기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 대한 밑바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또는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따르던가? 하는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런 자연과학적 지식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는가, 그리고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 그 사람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주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단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듯 보이는 자연과의 합일점을 찾는 삶이 보다 행복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발전하는 것인가나 행복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전제되어야 할 듯 보이지만, 아무튼 교양인의 소양이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 되어줄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저 지적유희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세상을 한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며, 앞으로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재미말이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이 말하듯 뇌를 단련하는 의미는 교양인으로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적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승급쌓기 정도로 이해되어진다.

반쪽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반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마음에 딴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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