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퍼온글] [번역] 제국과 맞서기

제국과 맞서기

아룬다티 로이



나는 “제국과 맞서는 법”에 대해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질문이며 내겐 쉽게 내놓을 답이 없습니다.

“제국”과 맞서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제국”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 정부(와 그것의 유럽 위성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 그리고 다국적기업들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일까요?

많은 나라에서 제국은 기타 종속적 우두머리들과 몇몇 위험한 부산물들 즉 민족주의, 종교적 편협성, 파시즘, 그리고 당연히 테러리즘을 싹틔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업의 세계화 기획과 팔짱을 끼고 나란히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국이라는 인도는 현재 기업의 세계화 기획의 선두에 서있습니다. WTO는 인구 십억의 인도 “시장”을 억지로 개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인도 엘리트 집단은 기업화와 사유화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수상, 내무장관, 해외투자장관, 즉 인도에서 엔론사와의 거래를 승인했던 사람들, 나라의 하부구조를 다국적기업들에게 팔아 넘기고 있는 사람들, 물, 전기, 석유, 철강, 보건, 교육, 원거리통신을 사유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두 RSS의 멤버들이거나 숭배자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RSS는 히틀러와 그의 방법들을 공공연히 숭배해온 힌두교 극우단체입니다.

인도에서 민주주의의 파괴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능률과 속도에 발맞추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세계화 기획이 인도 민중의 삶 속으로 거세게 질주해 들어오는 동안 대규모 사유화와 노동 “개혁들”이 사람들을 자기 땅과 자기 일에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수백명의 피폐해진 농부들이 살충제를 먹고 자살하고 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나라 전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트 집단이 세계 정상 부근의 어딘가에 있는 상상의 목적지로 여행해 가는 동안 땅과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범죄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좌절과 국가적 환멸의 분위기는 역사가 보여주듯 파시즘의 완벽한 온상입니다.

인도 정부의 두 팔은 완벽한 협공 작전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한 팔로는 인도를 통째로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고 다른 팔로는 주의를 딴 데로 돌리며 힌두민족주의와 종교파시즘을 들짐승의 울부짖음 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합창곡으로 배합하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는 핵실험을 실시하고 역사책을 다시 쓰고 교회를 불태우고 이슬람사원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검열, 감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의 정지, (특히 종교적 소수자들인 무슬림 민중과 관련하여) 누구는 인도 시민이고 누구는 아닌지에 대한 규정이 지금 흔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구자라트 주에서 이천명의 무슬림들이 주정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계획적인 학살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무슬림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발가벗겨지고 집단 강간을 당한 후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방화범들이 상점과 가정집, 직물공장, 이슬람사원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십오만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무슬림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이 황폐화되었습니다. 

구자라트가 불타는 동안 인도 수상은 MTV에서 자기의 신작시들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살을 조성한 정부가 올해 1월 충분한 다수표를 얻고 선출되어 정권을 다시 잡았습니다. 아무도 학살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학살의 설계자이자 자랑스런 RSS 멤버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는 구자라트의 주수상으로서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가 사담 후세인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잔학 행위가 CNN에 나왔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담 후세인이 아니며 인도 “시장”은 전지구적 투자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대학살은 난처한 문제거리조차 되지 않습니다. 

인도에는 일억 이상의 무슬림이 삽니다. 우리들의 오래된 땅에 시한폭탄이 째각거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자유 시장이 국가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이 하나의 신화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시장은 국가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빈부격차가 커져갈수록 자원을 매점하려는 싸움이 거세집니다. “결탁에 의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키우는 작물과 우리가 마시는 물과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우리가 꾸는 꿈을 기업화하기 위해서 기업의 세계화는 가난한 나라들에서 인기 없는 개혁들을 강행하고 반란을 진압할 충직한 권위주의적 부패 정부들의 국제 동맹을 필요로 합니다.

기업의 세계화 ― 또는 그것을 제 이름으로 불러볼까요? 제국주의 ― 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정의를 시행하는 척하는 법정을 필요로 합니다. 

한편으로 북반구의 나라들은 자신들의 국경선과 대량 살상용 무기 저장고를 강화합니다. 결국에 그들이 세계화하려는 것은 돈, 재화, 특허, 서비스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시인해야만 할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도 아니고 인권에 대한 존중도 아닙니다. 인종차별이나 화학무기와 핵무기나 온실가스방출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 조약도 아니고 (신이시여 이것만은 예외로 해주시기를!) 정의에 대한 국제 조약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이상이 모두 “제국”인 것입니다. 이 충직한 동맹, 이 외설적인 권력의 축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과 그것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 크게 멀어져 가는 간격.

우리의 투쟁, 우리의 목표, 다른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그 간격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국”에 저항해야 할까요?

좋은 소식은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큰 승리들이 있었습니다. 이곳 라틴 아메리카에서 여러분은 매우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볼리비아에는 코참밤바가 있습니다. 페루의 아레퀴파에서 봉기가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아르헨티나 민중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IMF가 야기한 참혹한 파괴의 잿더미에서 나라를 고쳐 짓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기업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이 힘을 모으고 있으며 이는 종교적 파시즘에 반대하는 진정한 유일 정치 세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업의 세계화의 빛나는 저 대사들, 엔론, 벡텔, 월드컴, 아서 앤더슨에 대해 말하자면 지난 해 그들은 어디에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당연히 이곳 브라질에서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누가 대통령이었으며 지금은 누가 대통령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무력하고 절망적인 어두운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차양을 쳐놓고 그 아래에서 양복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폭탄 비가 우리 위로 내리고 크루즈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미끄러져 가는 동안 계약서에 서명이 되고 특허가 등록되며 석유수송관이 설치되고 천연자원이 약탈되고 물이 사유화되고 조지 부시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이 갈등 상태를 “제국”과 그것에 저항하는 우리들 사이의 직접 정면 대결로 본다면 우리가 지고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장 막을 수는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발가벗겼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열린 장소로 끌어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세계를 무대로 그 잔인하고 부정한 나신을 드러낸 채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제국은 분명 전쟁으로 치닫겠지만 그것은 이제 그 그림자를 보는 것마저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자기편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추악한 그 모습을. 오래지 않아 미국 민중 대다수가 우리의 동맹이 될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 워싱턴에서 25만명의 사람들이 이라크전에 반대하며 행진을 했습니다. 매달 그 항의는 힘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미국은 하나의 은밀한 역사였습니다. 특히 자기 민중들에게 비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의 비밀은 역사가 되었으며 미국의 역사는 공개적인 지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거리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모든 주장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깊이 헌신한다는 소리입니다. 독재와 이데올로기적 타락에서 구원하기 위한 민중 죽이기는 물론 미국 정부의 오랜 농담입니다. 이곳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분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살인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최악의 만행들은 미국 정부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지요.) 그가 없어지면 이라크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리란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미스터 부시라는 사람이 없어지면 전 세계가 한결 더 나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사담 후세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백악관의 부시를 폭격해야 할까요?

부시가 사실도 국제 여론도 개의치 않고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음은 더없이 명백합니다. 동맹을 구하는 모병 공세 속에서 미국은 사실들을 날조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기사찰이라는 제스처게임은 국제 에티켓의 어떤 왜곡된 형태에 대해 미국 정부가 내놓는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양보물입니다. 그것은 마치 최종 순간의 “동맹들”이나 어쩌면 국제 연합이 기어 들어갈 수 있게 “애완견용 출입문”을 남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새 이라크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기억의 날을 세울 수 있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귀를 멀게 하는 굉음이 되기 전에 계속해서 여론을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전쟁을 유리어항으로 바꾸어 미국 정부의 만행들을 사방에서 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그리고 그들의 동맹들)를 그들 자신으로 즉 비겁한 아기 살해자들, 물에 독을 푸는 자들, 겁 많은 장거리 폭격수들이라고 폭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불복종을 백만 가지 다른 방법으로 재창안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집단적인 골칫거리가 되는 백만 가지 방법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조지 부시가 “우리와 한편이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양하겠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세계 민중은 심술쟁이 미키마우스와 미친 율법학자들 중에서 한쪽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제국과 맞서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의 숨구멍을 막기. 창피주기. 조롱하기. 우리의 예술과 우리의 음악과 우리의 문학과 우리의 완강함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슬기와 우리의 더없는 가차없음으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세뇌 당해 믿게 된 그런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기업 혁명은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인 그들의 생각, 그들 판 역사, 그들의 전쟁, 그들의 무기, 그들의 불가피성 개념을 우리가 거부할 때 붕괴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많고 그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그들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합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고요한 날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2003년 1월 27일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 제3회 세계사회포럼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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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5-04-05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 시장이 국가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이 하나의 신화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시장은 국가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라는 부분을 주목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들을 둘러싼 우리의 손은 여전히 굳건하게 옆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브루스터 닌 지음, 안진환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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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미국의 곡물 메이저인 카길에 대한 집중해부를 담고 있다. 카길의 비공개된 자료들과 세계 각지의 지사들을 찾아내어 감추어진 모습들을 들춰내는 지난한 작업을 해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계 곡물시장과 비료시장, 벌크제품 등등의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룡으로서의 초국적기업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부분에서 이 책의 장점을 찾을 수 있다.

카길은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인산비료를 생산한다. 그 비료로 미국과 아르헨티나에서 대두를 생산하고, 이 대두는 식품과 기름으로 가공된다. 가공된 대두상품은 태국으로 충하되어 닭고기 사료로 쓰이고, 이 닭고기는 다시 가공 처리되거나 조리된 후 포장되어 일본과 유럽의 슈퍼마켓으로 출하된다. (51쪽)

카길의 전략은 위의 인용에서 모두 드러난다. 만약 한 국가내에서 고기의 수요가 줄어든다거나, 작물의 흉작 등으로 손실이 예상될 경우라 하더라도 비료 또는 곡물과 기름의 1차 생산품과 가공처리된 고기 제품의 상호보완으로 절대 손해를 보는 일이 없다. 한 국가내에서 보완이 안되더라도 상관이 없다. 전세계적으로 확보된 집하창고와 운반수송의 능력으로 국가간의 이동으로 손실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카길은 절대 자신의 돈을 직접 투자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나 또는 투자 대상국이나 지방정부의 공적 자금을 끌어들여 지원금을 받거나 지분을 확보한다. 그리고 토착 자본과의 합작을 통해 통제권을 행사할 정도로만 투자함으로써 언제나 자신의 몸뚱아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채비를 갖춘 상태에서 투자 대상국에 쳐들어간다.

그리고 그 지역의 곡물시장을 지배하는 방법은 가히 놀랄만하다. 소규모로 들어가 집중공략으로 가격을 떨어뜨리고 파산 직전의 회사들을 인수해 부피를 늘려간다. 농민을 위한다는 종자의 보급은 자신들의 비료를 써야지만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절대로 자가 수정을 통한 세대전달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겉모습으로 보게되는 카길은 생산자는 더 많은 돈을 받고 소비자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곡물을 제공받도록 돕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카길의 이런 부가가치에 대한 생각은 우선적으로 주주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경제신물을 들춰봐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농가의 소득이나 지역 사회의 경제적 안정, 시민의 건강  또는 정의와 평등이 아니다.(30쪽)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비판에 대한 충분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책의 대부분은 어떻게 카길이 세계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독점으로 인한 폐해가 무엇일가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물론 책 중간중간에 이 해답에 대한 힌트를 찾아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집합적 기업농업, 자본집약적 생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여진 글처럼 느껴진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추측해보건대, 카길의 공략은 그 나라 곡물의 단일화 생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날씨나 그 밖의 환경에 의한 흉작이나 가격하락으로 말미암아 그 단일작물로 인한 수입이 줄어들게 된다거나, 경제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종자의 보급이나 비료의 공급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게 될 경우, 식탁은 외부에 종속되어진다. 밥상의 지배란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할 수 있다. 단일화 경작을 위한 땅의 수탈, 그리고 대농장으로 인한 노동력의 상실 등등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또한 맨 첫 인용문에서 보여지듯 최종산물에 대한 수요는 선진국 사람들만의 혜택으로 돌아가고, 맨 처음 생산했던 농민들은 항상 빚더미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더 많은 돈이 생산자로 흘러들어간다는 논리는 생산하는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공장에 돌아가는 것이며, 이 공장 또는 농장은 카길의 소유하에 놓여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튼 책의 수고스러움에 감사해하면서도 카길의 독점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한 접근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이 부분은 책에서 얻은 힌트를 가지고서 세계화의 문제와 맞물려 상상의 힘을 펼쳐 독자 스스로 얻어야만 할련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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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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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이라는 소설가가 떠난 여행의 풍경들을 쫓다보면 사람의 마음을 훔쳐보게 된다. 이 여행에세이는 여행에 대한 정보제공으로서는  10점이고, 풍경이나 사물에 대한 묘사로 바라봐도 10점이다. 그러나 여행이 진정 자기와 만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여행에세이는 진짜 여행서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인 순차를 무시하고 사람의 심리 상태에 따라 글을 써내려간 이 책은 일단 무척 재미있다. 남의 사랑이야기가 재미있고, 비밀을 엿듣는게 즐겁듯이 이 책 또한 그런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심리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너무 모호한 경계로 말미암아 이현령 비현령이 되기도 싶다. 저자도 은연중 고백하듯이 혼자서 여행할 수 있는 심리적 원인은 현실에 대한 회피로도 읽힐 수 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으로서 용기로도 읽힐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을 병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정신분석은 과연 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남기고,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가 건강한 기제이며, 얼마만큼을 넘어서야 병리적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 따라서 저자의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적 여행은 굉장히 모호하면서도 자가당착적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듯 싶다. 모든 정신적 완성은 유아기때 정해져 버린다는 정신분석의 전제는 그야말로 운명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극복해낸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시라는 것이 갖는 힘에 의해(직시는 명상이나 觀으로 해석될 수 있을듯 싶다) 자기실현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크나큰 다행일 것이다. 책은 그런 걸음걸음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책의 목록을 보면 도입부에선 분노 우울 불안 공포 의존 중독 질투 등 병리적 현상에 치중해 있다가 종반부로 접어들수록 '뻔뻔하게' 친절 인정과 지지 공감 용기 변화 자기실현 등 긍정적 방향으로 선회한다. 즉 누구나 병리적 현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을 탐구하고 그 과거의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극복할 수 있는 빛을 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인듯 하다. 여행은 그런 상처를 들여다볼수 있는 자극이 되어준다. 여행중 만나는 사람들, 풍경들, 그리고 박물관서 접하는 예술가들의 작품들, 민박하며 부딪히는 한국인들, 길을 잃는 것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행운, 길거리 예술가들, 소매치기와 구걸하는 사람들, 창녀들 등등. 인간과 작품(특히 카라바조의 작품들과 유딧과 피에타라는 소재에 예착을 보여준 작가의 모습 속에서 그의 내면 속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과의 관계로 인해 울고 웃고 흥분하고, 또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속에서 여행은 저자를 뻔뻔하게 만들어줬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뻔뻔하게는 착한 남자/여자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며, 나르시시트를 극복하는 길이기에 자아실현을 향한 적극적 자세로 표현되어진다. 이타적 또는 이기적 자세라는 극단적 자기에서 벗어나 당당한 자기를 만들어가는 저자의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을련지 책을 읽는 내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자신의 끝없는 방어기제로서 객관화와 지식화의 표현이며, 자기변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너무나도 정신분석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물론 자기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점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가 헛된 노력으로 끝나지 않고 긍정적 자기로의 승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긴 하지만 세상이 어렸을적 기억의 편린들의 영향력하에 놓여져있고, 그것을 벗어나려 몸부림친다는 전제는 왠지 우물안의 개구리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마치 8체질 의학이라는 분야에서 금양체질은 선천적으로 아토피를 가지고 태어난다든가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든가와 같이 원인이 결과인듯 보이고 결과가 원인인듯 여겨지거나, 분류를 통한 이해라는 것에 앞서 생각해야 하는 그 분류 기준의 적합성 여부 등등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저자도 말하듯이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은 심리적 치료보다는 운동이 최고의 방법이 될수 있으며, 아이들의 폭력과 분노성이 음식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연구 등은 정신분석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유쾌하면서도 슬픈 저자의 여행이 진정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이 되었음에 독자로서 함께 기뻐하면서도 이내 불안한 것은 크나큰 무의식의 영역보다 더 넓고도 무궁무진하다고 여겨지는 몸에 대한 사려도 함께 해나가기를 기원해본다. 몸과 정신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임을, 운동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한 저자 자신의 사례에서 찾아지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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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0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이 정신분석 당하는 리뷰군요. 지적하신 말에 공감하기에 추천! ^^

하루살이 2005-04-05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가 왜 이러지 할때는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어보곤 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비대해져 때론 눈을 가릴 때가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암튼 저자가 자신을 찾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나는 물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뻔뻔하게 살아갈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2005-08-25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8-2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화가 많이 나셨나보군요. 그래도 한편으론 읽는 재미도 솔솔하던데 님은 아니였는가봅니다. 모두 나와 같진 않을테니 잘 푸시길...
 

나에게 있어 느와르는 주윤발과 유덕화로 통한다. 유럽의 정통 느와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우상으로 떠오른 이들 덕분에 느와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수도 있다. 홍콩 느와르는 파란색의 조명과 어딘지 모를 우울함, 그리고 허무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이쑤시개를 입에 꼬나문 주윤발의 입가에 담긴 미소 속에 어딘지 모를 슬픔을 느낀다. 느와르는 나에게 있어 허무함이었다.

영화 <달콤한 인생>도 느와르라는 장르를 표방한 영화다. 그리고 나의 이미지에 걸맞게 영화 속에서는 허무감이 잔뜩 배어져 있다. 영화 초반 선우(이병현)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선우의 쉐도우 복싱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초반부 독백은 불교의 선문답이다. 그것이 벽암록의 고승 이야기 였던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선문답은 마지막 부분의 고승의 달콤한 꿈이야기와 겹쳐지면서 허무감을 극도록 끌어낸다.

깔끔한 외모와 그 외모만큼 깔끔한 일처리를 자랑하는 김실장 선우는 강사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젊은 애인이 혹시 남자가 있는지 감시하고, 만약 그렇다면 조용히 일처리를 해 줄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선우는 강사장의 젊은 애인을 보는 순간 마음의 작은 파장이 인다. 아주 조그만 파장.

스승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제자야,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우의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그녀와 애인 모두를 살려두게 되고, 이것을 강사장은 모욕감으로 받아들여 그를 죽이려 한다. 물론 죽이기 전 선우가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우는 자신의 그 작은 파장을 자신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장은 이내 커다란 파도로 밀어닥쳐와 끝내 강사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한밤중 제자가 잠에서 깨어나 흐느낀다. 이것을 괴이하게 여긴 스승이 왜 우느냐고 묻는다. 제자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는것이냐? 그 달콤한 꿈은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할 달콤한 꿈. 그 꿈을 꾸는 동안의 달콤함은 잠시 일어난 마음의 파장과 같은 것. 버드나무도 아니요 바람도 아닌 너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끊는 방법은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다. 불교의 수행은 바람과 버드나무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움직임의 소멸이 아니며, 움직임 그 자체의 소멸도 아니며,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 모든 움직임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우에게 있어서는 그 자신의 소멸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물 위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르시스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한지를 보여주며, 그 허공을 가르는 주먹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창 밖의 불야성 욕망의 도시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모습 그 자체를 통해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를 모두 표현해내고 있는듯 싶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못하겠어요. 말해봐요.

아마 선우는 평생을 생각하더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7년을 섬겨온 보스가 왜 자신을 내치는지 자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선우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선우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호수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숨진 나르시스처럼 선우 또한 우상화된 자신의 모습에 빠져 끝내 끝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주의로 향해 가는 그 길의 끝을 그는 결말을 알면서도 끝내 되돌아서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 아름다운 선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테니까...

크리스터퍼 래시가 70년대 미국사회를 나르시시트의 사회라고 보았듯이 그 사회는 현재 우리 서울의 모습과 닮아있다.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스타에 광분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영혼을 뺏기는 모습속에서, 나도 우리도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스트임을 인정한다면 선우의 자기애와 그 끝없는 허무에의 질주를 이해할법도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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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우의 자기애와 허무에의 끝없는 질주.. 네 이 영화 참 슬펐었죠. 그렇게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도 나르시스트나 다름 없죠.. 정말 영화를 잘 보시고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휴일 보내셨는지요?

하루살이 2006-06-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휴일은 없답니다. 흑흑.
달력의 빨간 날자에 쉬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래도 주일에 하루 쉴 때는 행복^^.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손영기 지음 / 북라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책은 전반적으로 해석의 문제에 집중되어져 있다고 본다. 한의학이란 것이 고정불변의 진리를 담은 책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들을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것임을 전제로, 한의학은 자연과 인간등 세상만사의 진리를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음양과 오행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되어진 것이 어찌보면 한의학의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임상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일 터이다.

고대 중국의 4가지 의학의 발달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의 종류와 그 대처법도 변해왔음을 보여준 저자는 그것이 우(공간)와 주(시간)라는 시대와 공간이라는 제약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제약을 염두에 둔 해석적 자유를 펼치는데, 현대의 문제를 토의 울로 보는 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마이너스 건강법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공해와 먹거리의 오염, 스트레스의 증가로 오행 중 토가 울되어져 있는 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는한 음양의 변화나 오행의 움직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다른책 먹지마 건강법 등을 통해서 육식의 금지, 인스턴트 식품의 금지, 3백 식품의 금지 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모두 토의 정체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해토를 먼저 해주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녹용, 인삼과 같은 약성이 강한 약재들도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고 보는 것같다. 즉 과잉섭취된 영양과 독소로 말미암아 비위와 장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제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결코 건강해진 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행의 각 요소에 연결되어져 있는 오장과 육부중 토라는 것은 나머지 목화금수의 변화와 움직임을 조절해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순조로운 운행은 어불성설일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 서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영양과잉과 독소로부터의 해방을 먼저 이뤄야만 하며, 그것은 바로 해토라는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독자로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정설인지, 또는 올바른 해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대와 지역적 흐름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변해가는 것이 옳다면 그의 한의학 이론에 대한 재해석도 분명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듯하다. 그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았던 우리네 사유체계를 전제로 어떻게 먹을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려움이나 슬픔 기쁨 등등이 장부와 연결되어져 있다고 본 선조의 생각이 꼭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마음과 몸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 진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한 공부 또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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