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다니엘 코엔 지음, 주명철 옮김 / 시유시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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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월 30일) 프랑스에서는 유로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부결됐다. 프랑스 국민들은 유로헌법이 통과함으로써 유럽이 하나가 되면, 값싼 노동력의 동구권 노동자가 대거 유입됨으로써 그나 저나 높은 실업률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 같다. 즉 세계화로 인한 직격탄이 노동자들에게 쏟아짐으로써 선혈이 낭자할듯 하니 국민이 하나되어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세계화라는 용어의 정의가 다소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화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세계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듯하다.)

저자는 이 책이 쓰여질 당시인 10여년 전부터 이런 생각은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주장해 왔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세계화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당혹감을 안겨준다. 저자의 주장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이해되어지고, 설득력을 지녔다면, 아마도 이 투표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대중이라는 것이 과연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앞으로 계속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국민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사뭇 궁금하다. 

아무튼 저자가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주장과는 정반대로 세상이 향해가고 있긴 하지만, 일단 저자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볼만한 값어치는 있을듯하여 계속 읽어나가 보기로 하겠다.

책의 제목 <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은 마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세계화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화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세계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가, 실제로는 결과가 원인이고, 원인이 결과인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며, 불평등 또한 인과관계의 잘못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예로는 신석기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된 것이 식량부족으로 인한 농경사회로의 진입때문이 아니라, 정착후 종교정신과 맞물려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 학설을 내놓고 있다. 정착촌과 곡식의 흔적중 어는 것이 더 오래되었는가 하는 과학적 증거물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먼저 전 세계에서 가난한 국가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아프리카를 예로 들며, 그곳은 여성에 대한 착취, 농촌에 대한 착취, 엘리트 집단의 부정부패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아시아 4용이 성장한 배경에는 절약의 정신, 투자와 노동을 통한 무역 수출정책이 빛을 발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세계가 아닌 한 국가를 바라보았을 때 10,20년 전 보다 계층간 수입차가 훨씬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세계화와 3차산업의 발달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고, 값싼 노동력이 들어오게 됨으러써 선진국의 경우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진국, 여기에서는 프랑스가, 후진국들과의 무역이 전체 무역량의 3%를 겨우 차지할뿐이며, 노동력의 유입또한 그 수준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만들다거나, 빈부격차를 크게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 일자리수도 없어지는것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기 때문에(물론 조금 못 미치기는 하지만) 실업률이 높아질수밖에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일자리 부족은 <선별적 짝짓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선별적 짝짓기란 예를 들자면, 조용필이 공연을 할 때 최고의 세션과, 최고의 음향, 최고의 무대팀을 이용해 최고의 공연을 만들어내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최고는 최고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일을 만들어가고,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짝을 지어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이다. 최고의 짝들은 나머지 그룹이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며, 점차 그 수익의 차이를 벌려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전처럼 하나의 큰 조직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쪼개진 것들이 하나로 모여 일을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생산조건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근거로는 마이클 크레머의 오-링 이론을 들고 있다. 원과 같은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커다란 생산품을 만드는, 따라서 포드주의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화석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선별적 짝짓기는 단순히 국가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로 향하며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불평등이 공고화 되고, 이것이 세계로 확대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선 대중들이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지도자들 또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견해를 가진 대중들이 정치적 행동을 행하지 않는한, 언젠가는 이런 불평등의 확대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듯 싶다.

저자의 생각들과 근거가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띠워준다는 점에서 책을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성장률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이 실제적인 생산증대로 인한 부의 창출이 아니라, 세계적 투기 집단의 투기를 통한 단순한 화폐의 창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또한 불평등의 완화라는 생각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인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체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없어 보인다. 인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없이 일단 커져가는 불평등과 불신의 추세만을 늦춰보자는 미봉책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미봉책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적 삶을 향한 단계적 실천행위로서, 초입에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양식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자의 주장을 무리없이 받아들을수도 있을듯하다.

(세계화나 경제 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현실에 대한 구체적 돋보기도 들이대지 않은채 오직 꿈만 거창한 망상가의 지껄임이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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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의 마지막 편. 물론 시간의 순서대로라면 3편이 정답이겠지만, 아무튼 이로써 스타워즈라는 영화의 마지막 문이 닫혔다. 스타워즈를 그렇게 재미있게 본 편은 아니지만, 항상 첨단을 달려가는 그래픽에 대한 동경과, 음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개봉관을 찾아가는 습관이 어느덧 들어있어 또다시 지켜보게 됐다. 이번에도 몇 천가지의 그래픽 기술이 동원되었다는데, 에피소드 2와 별반 다른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어떻게 보면 그래픽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한계점을 넘어서는 영화들이 꼭 나타나긴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3는 이렇다 할 비약이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 것같다. 다만 이야기가 완결됨으로써 갖게 되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전체적인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지켜볼만한 구석이 다소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3편이 갖는 매력은 다스베이더가 어떻게 탄생되는가 였을 것이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악한이 태생적 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선에서 악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다룬다는 점에서 꽤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편의 내용을 다소 잊어먹고, 줄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이미 관객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에 충실한 덕분이라 여겨진다.

아나킨이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모습은 한 순간으로 표현된다. 갈등의 모습이 조금 비쳐지다가 일단 자신이 선택한 길로 접어든 이상 더 이상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스포일러가 될 듯 하여 자세하게 언급할 순 없지만) 즉 악으로의 비등점을 넘어선 순간, 다시는 선에로의 갈등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감을 안겨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동정과 함께, 일단 선택한 순간 자기변명이 됐든 무엇이 됐든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다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다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오히려 생뚱맞게도 영화의 초점인 다스베이더로의 변신보다는 공화국과 분리주의, 그리고 제다이라는 집단과 제국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 얼개가 재미를 더했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장이모우의 <영웅>이 생각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영웅에서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진시황의 암살을 도모했던 자객들이 모두 그 앞에서 칼을 내려놓는다. 천하가 통일이 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과 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던 영웅은, 마치 스타워즈의 시스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제다이는 아무래도 이연걸과 양조위 등과 같은 자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련지 모르겠다. 물론 시스의 최종 목적이 과연 평화였는지, 권력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나킨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적 힘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이에 정면대응한 오비완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라며 아나킨을 비난하는 장면은 <영웅>의 찝찝한 기분을 다소 덜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포스가 애시당초 선의 측면만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힘은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세상이 오직 선과 악으로만 구별된다면야 아무 문제가 없을테지만 선과 악이 섞여 있고, 때론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며, 선과 악의 구분점이 이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포스라는 초자연적 힘 자체가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오히려 힘들듯 하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냐가 그 양면성을 드러내 보일뿐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포스의 힘을 깨우친다는 것은 악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선으로부터서도 한발짝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다스베이더로 변신한 아나킨이 오히려 진정한 포스의 힘에 더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심에 불타고, 탐욕에 대한 집착에 얽매여 있어 한단계 도약을 못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다이들은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즉 자신들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유혹의 선상에 놓여져 있는듯이 보인다. 아나킨 또한 바로 그 유혹의 선상에서 한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일지도.

어찌됐든 운명조차도 거스르고자 하는 힘에 대한 유혹,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흘러가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슬퍼진다. 비극은 바로 운명의 장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스타워즈를 아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는 최초의 3편 즉 루키 쌍둥이들이 어떻게 컸고, 또 아버지인 다스베이더와의 대면이 어떠했는지 다시 한번 보고싶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추억의 힘일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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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5-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으면서도 아직 시간을 내지 못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꼭 봐야쥐..^^ 제다이들과 영웅의 자객들에 대한 비교, 멋지네요. ^0^
 

5월 18일은 또 다시 지나갔다. 1980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광주에 있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무 것도 없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 기간동안의 기억은 백지상태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기간의 기억만을 잃어버린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듣기로는 휴교가 내려진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는 1980년 5월이 없으니...

지금 떠올려보건대 국민학교 내내 5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 친구들끼리 간혹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들이 모험소설 속의 주인공인마냥, 무엇을 보았는지 자랑하느라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어느 정도 5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회 속에서 허용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광주라는 동네는 생각보다 조그맣다. 5.18의 최종 격전지 도청까지 대부분 30분 이내면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주요 건물들과 주택단지가 몰려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목격담은 그것이 아이들만의 과장이 섞여들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함이 전달됐었다. 한 친구는 도로를 점령하고 달려가는 장갑차 얘기를 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선 대학생을 숨겨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리따운 여고생의 잘려진 젖가슴 얘기도 있었으며, 끔찍한 피의 냄새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머리속에서 끄집어낼게 없었다.

광주는 나에게 그저 백지였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학교 면접 때부터 이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자네는 집에서 무슨 신문을 보는가? 한겨례를 봅니다. 그래, 어디보자, 음, 광주출신이군. 대화는 마치 정해놓은 답을 그저 읽어나가는 것처럼 진행됐다. 이 때부터 사실은 광주라는 라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의식했기에 내가 바라본 5.18은 조금 삐뚤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동기나 선후배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네가 광주 출신이었냐? 난 광주출신이라면 모두 과격한 줄 알았는데... 라거나 마치 북한사람들을 머리에 뿔난 도깨비로 교육시켰던 반공교육과 똑같이 광주 사람들도 괴물, 도깨비로 생각한(정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후배들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살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도에 살고 계시는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 씨를 빨갱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고, 전라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 5.18은 그래서 민주화의 진보이기 전에, 분단이 가져다주는 슬픔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부닥쳤던 사람들로부터 비껴가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맨 처음 영웅으로 비쳤던 광주의 모습이 점차 나의 가슴 속에서 탈색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이후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고나서는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유격훈련 중엔 동지애를 키운다는 이름하에 편을 갈라서 진흙 웅덩이에서 적을 밀어내는 잠깐의 휴식같은 훈련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놀이 아닌 놀이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좀전까지 옆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가 적으로 편이 갈린 순간 머릿속은 온통 그들을 밀어내야 할 하나의 물건일뿐으로 여긴다. 오직 우리 편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된다. 젖먹던 힘까지 알아서 쥐어짜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진 편에 대한 가혹한 얼차려를 피하기 위한 본능이 작동된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광주시민들의 항거가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총탄아래 쓰러져가는 옆사람을 보면서 점차 이성을 잃고, 오직 적과 아군으로 나뉜 속에서 아군을 지키고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본능만으로 뭉쳐진 집단으로 말이다. 그것을 어떤 숭고함으로 미화시킬 필요는 없는것 아니냐는 자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도 광주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아직도 광주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광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똘똘 뭉쳤을수밖에 없었는가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 우리나라 곳곳의 지식인과 민중들이 함께 호응해 올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생존이나 분노의 본능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렇게 저항했음을 비로소 깨우친다. 마지막 도청에서의 항거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음을, 그리고 그 죽음은 열려진 생의 길을 저버리고 택한 숭고한 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됐다.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오기나, 동지의 죽음을 같이하겠다는 맹목적 동지애를 뛰어넘은 오직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경건함에서 비롯된 죽음이었음을.

그런데 난 왜 그토록 그들이 숭고한 영웅으로 남기보다는 본능에,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으로 보여지길 간절히 원했던가? 그리고 왜 이제서야 내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껍데기를 벗고 그들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게된 걸까? 세상이 변해서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떨쳐버리고 싶었던 광주라는 이름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듯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이 비로소 절절하게 다가온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래서 나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이제 이 부끄러움을 어찌 벗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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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과 치유
시드니 맥도날드 베이커,M.D. 지음, 김광익 옮김, 한만동 감수 / 창조문화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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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일반인들이 있기에는 조금 어려움감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알지도 못하는 용어들을 나열해 괜히 그럴싸하게 치장한다거나, 전문가들끼리만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책은 아니다. 사람의 신체, 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건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진득하게 읽어볼만한 가치있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먼저 이 책이 전제로 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부터 알아보고 나서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이 아직은 서양의료계의 주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과학적이라거나,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라서 보기보다는 기존의 관념들과 상충되는 것들이 있다보니 현재의 위치를 마련해준 의료계의 지적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험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책을 읽으면서 깨우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뇌의 세포는 한번 만들어진 이후 다시 탄생하는 일이 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노화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피부세포나 조직을 이루고 있는 여느 세포들은 몇일에서 몇달 사이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를 생성함으로써 교체되어지지만 유독 뇌세포만은 자기복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린 머리를 소중히 다루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영구적인 모습의 세포는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면역세포 또한 영구적(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에서만)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뇌와 같이 지각하고 인식하고 기억하기 마련이다. 다른 세포들은 유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런 지각과 인식을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삭제되거나 누락되고, 새로운 것은 얻기도 하지만, 뇌와 면역세포는 영구적인 까닭에 사소한 것일지라도 영구적으로 기억하려는 습성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건강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신체의 물리적, 화학적 변화 이상의 정신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어렸을 적 성폭력이나 갑작스러게 다가온 감당못할 슬픈 일과 같은 큰 사건들에 부닥쳤을 때 혹 무의식속으로 사라져 기억못할지라도 면역세포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충격들이 면역에 이상을 초래하고 이것은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통해서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말과 행위가 해악과 치료 모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 있고 말과 행위가 알맞은 균형을 이룰 때 생화학적, 면역학적 치료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83쪽)

그렇다고 해서 생화학적 치료 또한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의 근원이 충격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몸의 면역체계를 망가뜨린 것에 한해 그것을 원상태로 돌리는 일은 생화학적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다.

영양 생화학의 선구자인 로저 윌리암스는 칼슘 필요량에 있어서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 200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수은의 독성에 관한 최근의 연구느 수은에 대한 민감도가 사람에 따라 100만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58쪽)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생가해보아야 한다. WHO에서 권고하는 일일 권장량이라는 것이 그저 평균치일뿐 자기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는 같은 음식을 먹고도 멀쩡한데 누구는 식중독에 걸리는 이유 또한 위의 설명으로 풀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1미리그램의 수은을 마셔도 끄덕 없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는 그것의 100만분의 1만 들이켜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독특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52쪽)

따라서 현재 우리가 분류하고 있는 병명들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리가 부러졌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붙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화학적 측면에서 인간은 각자가 서로 다른 개인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범위 안에서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겠지만, 치유를 원한다면 그런 평균적 치료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을 찾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단 치유는 이렇게 맞춤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이 병에 걸리는 이유를 살펴보면, 그것은 몸속에 독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독성분자들은 잔여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같이 우리 자신의 신진대사로부터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음식으로 우리 몸에 들어오거나 또는 우리 장 속에 사는 세균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114쪽)

따라서 알러지를 일으키는 음식을 삼가는 것은 기본이고, 장 속 세균의 유익함을 보존하기 위한 철저한 음식관리가 필요하다. 독소를 일으키는 세균이 활성화되도록 만드는 것으론 기생충과 이스트의 과잉성장으로 보고 있다. 항생제는 장 속 세균을 말살시키는 것과 같으므로 세균을 되살리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즉 우리가 피해야 할 것으로는 이스트가 들어간 제품들, 균을 확장시키는 알코올 성분, 글루텐 (밀이나 귀리 보리 등에 들어있는) 성분, 우유 등에 들어있는 카세인과 유당 과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겐 유제품 등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좋은 음식은 무엇일까? 좋은 음식이란 해독성분을 지닌 음식을 말한다. 이것은 식이섬유가 풍부한 것들과 몸의 알칼리화를 가져오는 것들이겠죠. 이런 것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와 레몬, 사과식초 등이 있다. 저자는 특히 폴산(엽산) 성분이 많이 든 것을 먹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또하나 오해가 많은 부분은 지방에 대한 것들이다. 탄수화물과 단백질은 몸에서 여러가지 분해과정을 거치지만 지방은 먹는 것 그대로가 세포의 주요성분을 이루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깊게 먹어야 할 성분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현재 먹고 있는 육류의 포화지방산 계통과 불포화지방산이나 야채, 곡류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오메가 6와 오메가 3 성분의 비율을 중요시하고 있다. 물론 트랜스 지방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될 것중의 하나다. 일반인들이 섭취하는 불포화지방의 대부분은 오메가 6에 치중되어져 있다. 그러나 몸이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메가 6와 오메가 3의 비율이 4대 1정도가 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식탁의 지방비율은 16대 1 가까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오메가 6를 줄이고, 오메가 3지방을 섭취하도록 식단을 바꾸어야 하는데 오메가 3는 아마유, 캐놀라 유 등에 풍부하게 들어있다. 물론 고등어와 같은 등푸른 생선에도 오메가 3가 풍부하지만 바다가 오염되어 있는 관계로 오히려 수은과 같은 중금속 중독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어쨌든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맛있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내 몸을 소중하게 다루듯 음식을 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고나 할까. 내 몸은 말과 행동, 그리고 음식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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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비판적 지식인, 특히 자국인 미국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으로도 필명을 날리고 있다. 단순히 글로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개인적으론 촘스키의 이런 겉모습만 알고 있을뿐 아직까지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이 책 또한 그의 세상에 대한 심층분석이라기 보다는 인터뷰를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그의 주된 생각의 요약본 정도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나와 같이 아직 그의 견해에 대해서 알고싶지만 섣불리 읽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짧은 시간의 인터뷰로 인해 그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논거를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의 주된 생각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않다.

이 책의 저자가 쓴 프롤로그에서는 촘스키가 전해준 교훈 한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기존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확인하고 심사숙고하라는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기지의 사실에서 해방되라는 것이다. (중략) 자기만의 생각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도전의식을 키우면서 스스로 알아내려 한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내 목적을 어느 정도 성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12쪽)

이것은 세상에 당연시여기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해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줄 것임을 믿는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들과 기존의 가치관들, 그리고 의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한번이라도 의심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때론 삶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진짜 인간답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놓치고, 꼭두각시 마냥, 또는 줄로 조정당하는 마리오네트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마리오네트임을 잊고 운명의 주인처럼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운을 자신은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지도.

개인의 이익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가치로 찬양하는 이데올로기, 특권층과 권력층을 위한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감정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12쪽)

즉 감정의 상실 대신에 소유로 대체되는 현재의 사회에서, 소유만을 확대해 나가려는 삶의 태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마리오네트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젼 등을 운영하는 거대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되어 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29쪽)

물론 촘스키의 이런 말이 과장되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행복감을 어디서 느끼는지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아챌 것이다. 무엇인가를 품에 안는 것, 그것을 위해 무엇을 지불하든 자신의 손에 쥐어질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로 변해가지 않았는가?

교육제도가 선별 작업을 합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71쪽)

사회에서 원하는 생산력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 댓가로 돈을 쥐면서, 그것을 다시 소비할 때 행복감에 젖어든다는 것. 그 것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감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문제이지 않을까? 우리가 그 행복이 전부라고 배워오지 않았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수많은 언론매체들을 통해 공고해져 간다.

지난 20여년 동안 국가 정책은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59쪽)

우리가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소비의 과정 속에서는 수많은 소외가 발생합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의 제 3세계에 대한 횡포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채 그들의 선전된 이미지들만을 우리는 접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기업체들의 문화에 대한 원조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위한 구원의 손길에 감명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손길이 실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훔쳐낸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신문에서 시장경제의 기적과 기업정신을 극찬하는 기사를 읽습니다.(80쪽)

더더군다나 최근의 자본주의는 오직 금융자본주의로 치닫아, 소위 말하는 돈을 가진 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로 굳혀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매일 약 20억 달러가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이빈다. 이런 자본의 압도적 다수가 투기성을 띱니다.(중략)외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대부분이 경영 지배권의 확보를 위한 돈입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109쪽)

최근 이런 경향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론스타라거나 브리즈 증권 등등 뉴스 속에 등장하는 외국계 자본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촘스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신자유주의의 허울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그 변화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것일까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중략)요켠대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169쪽)

즉 내가 앞장선다면 분명 난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을 것임을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이죠. 앞장 선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른뒤에서야 비로소 그 열매를 사람들은 따먹을 수 있다는 것을. 따라서 이런 횡포를 막겠다는 실천적 의지만으론 좀체로 변화의 흐름을 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조직화입니다.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71쪽)

촘스키의 이 말을 듣다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언론에서 다루는 노조에 대한 보도가운데 노조 입장을 보여준 적이 얼마나 될까요? 교통 혼잡을 가져온다거나, 한국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한다거나, 생산력 손실이 몇백억이라던가, 아니면 노조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보도들로 가득합니다. 도대체 왜 파업을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들춰보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노조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노조라는 조직도 그것이 조직의 양태를 띠는 한 어떤 부조리가 개입할 여지가 곳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조의 잘못된 한가지를 마치 노조자체의 문제로 몰아가는 마녀사냥식 보도로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들을 곧이곧대로 흡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잃고 살아가는지, 진정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며, 세상이 어떻게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지 간파할 수 있도록 철저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꿈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서도 안됩니다. 즉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의지와 마주잡은 손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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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5-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의 리뷰를 읽으니... 전에 이 책을 읽을 때... 정수리로 뭔가 차가운 게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살아나네요~
요호...참 기네요... 하지만...구구절절...옳습니다... 촘스키... 그리고 님의 리뷰가말이지요...

하루살이 2005-05-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모르면 잔소리가 많은 법이죠. 제대로 안다면 한마디로 딱 . 마치 요술지팡이처럼. 언제쯤 그런 지팡이 하나 가질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