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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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엄청난 피해가 일자 미국은 아우성이다. 늑장대응이라는 비난과 함께 인종차별 문제까지 들고 일어났다.  게다가 허리케인 5등급의 리타가 다시 멕시코만을 위협하자, 이번엔 지구온난화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던 부시를 질타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는 공격성 비판으로 보이긴 하지만 일견 무시못할 부분이기도 하다. 온난화로 인해 허리케인의 강도가 거세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문제와는 별도로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면, 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명의 문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듯 싶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 속에 빠져 있다. 배가 터지게 먹고나서 소화제 먹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반면 온난화에 대한 논의에선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자는 식의 해결책이 나오고 있다. 즉 배터지기 전에 조금 덜 먹어보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따뜻해지면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릴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보자는 방식이 아니고서 말이다.  문명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인간의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자는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금 비켜간 겸손한 방식일지도 모른다.(물론 여기에도 선진국이 후진국에 대한 오염수출산업이라는 경제논리가 숨어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바로 이런 근거없는 과학적 낙관론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돋보인다.

갑자기 돌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돌은 서구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결정체가 된다. 계산, 증오, 희망, 공포,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공감보다도 강한 것- 돈을 바라는 욕망.

그러고 보니 이 책이 마치 문명비판서처럼 느껴질련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시계에 의해 자신의 삶을 지탱해간다. 거기에 약간의 변화만 주면 거의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또한 '스밀라...' 는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한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자살로 생각하지만 주인공 스밀라는 절대 자살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것은 옥상 위에 남겨진 아이의 발자국 모양새를 보고서 판단한 것이다. 스밀라는 그린란드인으로서 눈과 얼음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스밀라는 왜 아이가 죽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소설은 아이의 죽음을 발단으로 그 뒤에 감추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지는지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155센티미터의 스밀라가 톡톡 내뱉는 말이나 갑작스런 행동들 하나하나는 그녀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든다.

자신에게 잉여가 있을 때나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초적인 본능들, 굶주림, 잠, 안전에 대한 요구로 환원되고 나면,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라고 이야기하는 스밀라는 그러나 그 밑바탕에 한없는 애정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소년의 죽음으로 치부할 수 있건만 그녀가 그토록 그 죽음의 원인을 캐고자 했던건 아무래도 소년을 사랑했기 ‹š문이리라. 때론 냉소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한듯 보이지만, 그녀는 삶을, 자유를 사랑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현대인의 외로운 사람들을 그대로 비쳐주는 것 같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사람들, 하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한없는 따뜻함. 스밀라는 바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자,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체온이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건의 얼개와 그것을 풀어가는 캐릭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흥미롭기 때문이다. 

스밀라는 이 소설을 통해 삶과 자유는 욕망의 크기를 줄여나갈때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운 이들이여, 스밀라를 사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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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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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잠정중단되고 업무복귀가 이루어지던 다음날. 선배 한 분이 이 책을 선물했다. 나는 항상 선물을 받을 때면 책의 앞장에 아무말이라도 하나 써주라고 요구한다.(선물 받는 것만도 고마운데 참 뻔뻔스럽게도...) 선배는 정말로 쓰고 싶은 말은 책의 앞 표지에 쓰여져 있다고 했다. 그럼 다른 말이라도 써 달라고 했다. 그래서 쓰여진 말은 우보천리(牛步千里). 그리고 여기 책의 앞 장에 쓰여진 머리말을 옮겨본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아마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전해주고픈 글귀였는지 모르겠다. 또한 파업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좌절하지 않고 함께 지켜갔다는 동지애에서 비롯된 말이었는지도. 즉 위의 인용문 중 '글' 대신에 '행동'으로 대치했을때 지난 66일간의 지난한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이번엔 책의 뒤표지에 쓰여진 글귀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비록 내가 지식인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대한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간 파업이라는 고통을 감수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책을 선물한 선배와 나와의 공통점은 파업이 결의되기전 회사를 떠나려했다는 것이다. 각자 인생의 계획대로 걸어나가기 위해서 결단의 순간이 왔다고 여긴 순간, 노조가 파업을 결정했다. 파업이 들어가기까지 3,4일간 고민의 시간이었다. 파업이 그냥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과감이 떠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임금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인의 비도덕성, 무능함을 사원들에게 전가하는 뻔뻔함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냥 떠나버리면 간단히 끝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의 성격이 이러하니 차마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즉, 리영희 교수가 말하는 회피나 기권으로 얼버무리기는 싫었던 탓이리라. 그래서 선배와 함께 힘든 길을 선택했다. 내가 계획했던 인생의 행로가 다소 늦추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값진 일일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다시 업무복귀. 파업은 잠정 중단이다. 실패로 끝났거나 성공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중단은 또다른 문제다. 결정이 어느 쪽으로든 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다. 아마 그런 속내를 알고 있는 선배로서,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선물했을듯 싶기도 하다.

아, 부끄럽다. 리영희 선생은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때 북한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며 난리를 피울때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비친 기사 한꼭지를 읽으면서 알게됐다. 70,80년대 사상적 스승이었던 그 분의 책을 한권도 접하지 못하고, 사회 생활로 내처졌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의 표본이다. 말 그대로 사회와 권력집단이 심어준 우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이성으로서 맞선 치열한 삶이었다. 그의 글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 감추어진 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기에, 커다란 힘을 갖는다. 아무리 그를 깎아내리려 하거나 글에 대해 비판하려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은 철저한 탐구에 있다. 단순히 어떤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장들이 허구임을 그들의 자료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의 흐름을 모두 통찰함으로써 이 나라 이 곳의 진실을 건네주려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의 글로 인해 옥고도 3차례나 치른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로 인해 형벌을 견뎌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권력의 폭압과 상황의 분기점에 직면했을때, 자신의 사상적 자기충실을 택해야 하는 것을 보고, 한때 내가 심취했던 사르트르의 이른바 "자유는 형벌이다" 라는 명제가 처음으로 실감나게 와닿더구만(389쪽)

자기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 있는 규율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에 따름으로써 보다 승화된 삶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488쪽)

지금 나는 굉장히 괴롭다. 아직도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갈팡질팡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라는 것이 힘들게 만든다. 참으로 꼿꼿한 지식인의 삶의 표상을 읽어가면서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만 하는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더 우습다.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내가 겨누고 있는 적의 모습은 희미하다. 직접적인 압박이 아니라 일상을 죄어오는 시련에 차라리 기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외부의 문제보다도 내부의 문제가 점차 불거져간다. 사람에 대한 희망의 한편에 절망의 씨앗도 커져간다.

대화라는 책이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에피소드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김소월로부터 시작해서 고은, 조정래, 백낙청 등등, 그리고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중에 수습으로 들어왔던 김대중 주필에 대한 단상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장일순 선생과의 관계 등등,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젊을적 모습을 읽어가는 재미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지금 나의 주변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 사람들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의 씨앗은 과연 무엇을 쥐고자 하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오직 자유를 향해, 그 본질적 삶을 채우기 위해, 진실만을 향했던 리영희 선생의 지난한 삶은 존경스럽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얼버무리면 편안할 것을...

아~, 나는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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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너무 완벽하다면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특히 자신만이 아는, 그래서 도저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비밀일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관심을 갖지 않는 비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비밀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상대방이 필요하다. 나와 상대방만이 아는 그 무엇, 또는 경험한 그 무엇이 다른 누구에게로 퍼져 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때 비로소 비밀은 성립된다. 또한 그렇게 성립된 비밀을 꼭꼭 숨기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서로만의 비밀을 있음을 살짝 내비쳐 타인의 반응을 은근히 즐길때 비밀은 비로소 비밀로서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스릴감이 없는 비밀이라는 것은 또한 이미 비밀이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극히 홀로 개인적인 비밀이라는 것도 그것이 비밀로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글씨로 쓰여지거나 음성으로 녹음되는 등 표현의 한 방법을 택해서 누군가에게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밝혀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 이미 비밀이 아닌지라, 혹시도 모를 폭로의 순간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즐기기 위한 자신만의 표현수단을 갖고자 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일기장이 아닐까싶다.

비밀은 끝내 폭로되어질 때 비로소 비밀이라는 단어의 형체를 갖는다. 누군가 끈덕지게 비밀을 찾아나섬으로써 밝혀지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비밀의 정체는 그 당사자의 발설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비밀은 소수의 독점에서 다수에게로 퍼져갈 때 전혀 예상치 못한 힘을 갖게된다. 물론 그 시기가 길어질수록 폭발력은 거세어진다. 때로는 비밀의 폭로가 자신에게 비수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비밀은 스릴만점이다. 하지만 그 스릴을 즐기다 비수를 맞는 괴로움 또한 자뭇 심각하다. 오히려 그 점이 비밀을 비밀스럽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회하노니, 절대 '너만 알아라' 식의 비밀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만 알라는 그 비밀은 끝내 비밀의 성질을 갖고자 세상에(돌고 돌아 결국 알아서는 안될 사람에게까지 전해진다 ) 퍼져 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뒤돌아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미 비수를 맞고 피를 흘리며 비틀거린다. 내 머리를 쥐어뜯고 벽에 주먹질을 해댄다고 그 아픔이 가셔지지는 않는다. 그 부끄러움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너만 알아" 라고 말하지 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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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진 않았다. 제목이라는 것은 영화의 전체 맥락을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화를 이해하는데 방해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영화보기는 영화를 보기 전과 본 후에만 영화제목을 머릿속에 남겨둘뿐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이 영화는 홍보전략으로서도 연애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의들을 내세웠다. 그러나 영화를 본 느낌은 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나 답을 구하려하기 보다는 도대체 왜 연애가 이렇게도 힘든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영화는 굉장히 노골적인 대화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표현들 때문에 영화의 질이 떨어진다거나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고는 평가될 수 없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연애의 진행과정이 잘 녹아들어가 있으면서 남녀가 서로 끌고 당기는 과정이 담겨 있어 오히려 맛깔스럽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으니 이건 덤이지 않겠는가? 좀 아쉽다면은 그런 반전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사랑과 연애에 대한 신화적 힘에 굴복해버린 결말이라고 할까? 

그럼,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비애감을 이야기해보자. 이렇다할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으로서 연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조금 낯간지럽다. (아~이런 현실이 오히려 나에겐 비극이다) 남녀가 만나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건(?)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감정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즉 서로 좋아하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면야 좋겠지만 사회라는 것 속에서 그 감정은 항상 주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불륜이라는 것도 결혼제도라는 것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을 사랑의 감정이지 않겠는가?) 둘만 존재한다면 무슨 상관이랴만 남녀는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고, 그 위치가 바로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길어야 2년반 정도라니...(영화 속에서는 3개월이냐 3년 이냐로 다툰다)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실제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하는 것은 항시 한시적이 되고, 또 둘이 똑같이 생겼다 똑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꽤 복잡해지겠다. (사랑의 감정이 한명이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면 어떡하겠는가?) 즉, 둘만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사랑 속에서는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지 않는다. 조교와 학생의 사랑, 선생과 교생의 사랑은 더군다나 사회적 위치에서 어떤 서열감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복잡해진다. 즉, 사랑과 함께 힘이 작용하는 균열의 틈이 보인다는 것이다. 둘만의 사랑에서 보이는 틈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틈으로 인해 결국 힘의 역학관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끝내 힘에 굴복해 아름다운 종말을 고하지 못하고 처참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을 말하기 보다는 연애의 힘듬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그 힘들다는 것으로 인하여 연애의 목적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힘든 연애를 해야만 할 이유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모험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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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귀여운 박해일.. 능글맞은 그 표정이 생각나요..

하루살이 2006-06-0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되는 배우죠.
 

EIDF 프로그램중 사토야마;물의 정원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일본 비와호 근처의 마을을 배경으로 80대 어부로 살아가고 있는 상고로의 1년 간 삶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어 52분 내내 눈이 즐거웠다.

자연의 순환이라고 할 때 대부분 땅을 예로 든다. 똥돼지와 같이 사람의 배설물이나 남은 음식물을 동물이 먹고 그 배설물은 다시 땅에 뿌려져 식물들에게로 돌아가고 사람은 그 식물의 수확을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엔트로피는 증가되지 않은채 사람과 자연이 서로 순환하며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 말이다. 물의 정원은 땅의 순환이 아니라 물의 순환을 보여준다. 각 가정마다 연결된 수로, 그리고 수로 안에 관상용으로 기르는 잉어들. 이 잉어와 망둥이 같은 생물들은 가정에서 버려지는 음식찌꺼기를 처리해주는 자연 정화물이다. 이렇게 깨끗하게 걸러진 물은 비와호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풍족한 수산물을 얻는다. 대량으로 포획하지 않고 적당하게 잡아낸 물고기, 그리고 왜가리나 솔개와 나누어 먹는 풍요로움은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복잡하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도시인이 바라보기에는 다소 무료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미소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카메라는 육지와 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을 아주 가깝게 보여주고 있어 재미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다큐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는 다소 자연과 거리가 먼 인간의 손길이 들어가 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꼭 인간만이 바라보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물위로 올라선 개구리의 눈망을에 비친 불꽃을 보여주는 부분은 환상적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분명 CG가 아닌 실사이지만, 그 불꽃이 사람이 바라본 불꽃과 같지 않음을 시사하고(편집이 갖는 힘이란 여기서 드러나는데, 이 다큐에서는 개구리의 시선과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듯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개구리가 사람의 손에 3개월동안 길러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뱀이 망둥어를 잡아먹는 장면 또한 사람이 키운 뱀을 이용해서 담아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다시 물의 정원을 돌이켜보니 뱀이 나오는 장면은 그다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어지진 않는다. 그저 흥미거리고 내세운 장면을 위해 인공이 가미된다는 점에서 다소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개구리가 바라보는 불꽃놀이 장면은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다큐의 진행상 그리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꼭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히 필요한 부분인듯 싶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다큐에 인공적인 가감이 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간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삶은 인공 그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순수함을 잃는 것은 옳은 일일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인위는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작위성은 실제 자연이나 인간의 삶을 오역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 아름다움이 빠져 혹시라도 재미가 반감되어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아직 그런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존재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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