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해명산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석모도엔 산이 세개 있다. 해명산 낙가산 상봉산. 유명한 사찰인 보문사는 낙가산에 위치해 있다.

지난 15일 토요일 석모도에 갔다. 해명산에서 낙가산으로 가는 길은 총 9킬로미터. 최고 372미터 정도의 얕으막한 산으로 바다를 보면서 산행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산행코스 중의 하나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연신 기분이 좋은 상태로 산을 올랐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면서 가슴도 확 트였다.

섬으로 향하는 전신주들. 아직 추수를 못한 논의 노란 벼이삭들. 갯벌에 보라색으로 비쳐지는 함초(?-칠면초가 맞지 않을까 싶다)들(안타깝게도 사진으로는 잘 안보이지만) 그리고 바로 옆에는 하얀 색을 드러낸 염전들.(이건 다른 사진에 있는데 날려버렸다 ㅎㅎ-나중에 알고보니 이 염전이 내년에는 사라진다고 한다. 점차 이 땅의 염전은 사라지고 소금은 수입으로만 가득 찰 날이 머지 않았다.) 따가운 햇살 덕분에 아름다운 색들의 잔치를 구경했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곳곳에 억새가 눈에 띤다.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이 슬쩍 간지르고 간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드뎌 찾았다. 사진 왼쪽 위의 하얀 부분이 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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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저녁 11시 SBS 스페셜<유언...>을 보았다.

감당못할 좌절감에 온 몸을 불살러 죽으려 했던 권투선수가 극적으로 살아나, 도장을 꾸려가며 못 다 이룬 세계 챔프의 꿈을 제자들을 통해 이루려 하는 모습은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그의 유언 중에선 자신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진짜 환생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세에도 당신을 만나겠다. 비록 당신이 나를 거절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찾아서 이생에서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소개된 분은 루게릭 병에 걸린 아주머니. 남편은 암 투병중에도 자신을 간호하다 결국 1년전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두 딸이 자신을 거들고 있다. 몸이 점차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숨조차 쉴 수 없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녀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을때 딸들에게 전하고픈 글들을 남겨놓았다. 이렇게 투병에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도 잊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글은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일반 사람들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큰 딸의 모습은 감동이다. 특히 작은 딸에게 해준 것보다 자신이 받은 것이 더 많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되새긴다.

당뇨병에 걸린 아내와 암에 걸린 남편의 유언 등등.

<인생 9단>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매년 한번씩 유언을 쓴다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야겠다는 의지를 일깨운다. 이것이야 말로 아마도 방송 제작진이 의도했던 것이었으리라. 난 유언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가지 더 떠오른게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빚. 한없이 일방적으로 퍼주거나 받는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계 속에서도 채무감은 분명 들게된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 채무감을 깊게 느껴야만 하는 사회적 압력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사회적 압력을 떠나 개인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끝없는 채권채무의 사랑이 오간다. 비록 꼭 갚아야 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을지라도, 그건 빚이다. 빚이라고 생각한 순간 관계는 지속된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철저한 냉혈한이던가 세상을 초월한 도인일 것이다.

물론 내 삶이 빚에 얽매여서는 안될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와의 빚잔치가 끝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사라진 청산의 관계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빚의 부담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준 게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플러스 마이너스에 대한 개념없이 항상 마이너스로 생각하는 삶이라면, 즉 난 언제나 채무자임을 자각한다면, 그리고 그 채무를 꼭 당사자에게만 갚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조금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편안해지려나. 위의 유언을 남긴 사람들도 채무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눈물이 줄어드려나.

가슴에 빚을 지고 살아보자. 이미 나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 빚을 세상에 조금씩 조금씩 갚아가보도록 해보자. 한없이 가벼워질 몸과 마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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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부메의 여름>에 흠뻑 반해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이라면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나게 된 <망량의 상자 >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분명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의 재미보다도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인 교고쿠도의 괴설이다.(교고쿠도는 화자의 친구로 나온다) 굉장히 논리적이면서 기존의 생각들을 깨뜨리는 그의 대사를 궂이 괴설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의 말에 100분 동감하며 책을 읽다 가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들은 항상 일상을 살아가는 아주 자그마한 현상 하나하나에서 톡톡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괴이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망량의 상자>는 두 사건을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토막살인사건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가나코라는 소녀의 자살미수건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 넣는다면 망량을 가두는 온바코님 교주 신자들의 불행 정도라고 할까? 이 사건들은 실은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꼭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사건이 사건을 낳아버린 기이한 영향력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천재 과학자 미마사카가 등장하며, 일본의 영화계를 흔들었던 미모의 여배우 요코가 나온다.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자세 콤플렉스를 지닌 요리코라는 소녀, 상자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구보라는 사내까지... 이들은 아무 관계도 없는 듯하다 어느 순간 굉장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각자의 사건에 얽매여 있다 다른 사건의 동력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건을 풀어가는 열쇠는 순서다.  사건 발생 순서대로 순차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다가는 불가능했을 것을 교고쿠도는 해결해낸다. 이 사건들은 순서대로 찾지말고, 사건 그 자체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같은 사건이 아니고,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같은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순서를 저버리고, 우연의 개입을 바라보았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순서보다 중요한 열쇠는 동기다. 작가는 범죄의 동기를 찾지 말라고, 교고코도의 입을 빌려 말한다.

동기란 세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네. 범죄는---- 특히 살인은 대부분 경련적인 거야. 그럴싸하고 있을 법한 것일수록 범죄는 신빙성이 더해지고,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세상 사람들은 납득하지. 그런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네. 세상 사람들은 범죄자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만, 특수한 정신상태에서만 그 무도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어떻게 해서라도 생각하고 싶은 걸세. 다시 말해 범죄를 자신들의 일상에서 분리하고, 범죄자를 비일상의 세계로 내쫓아 버리고 싶은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범죄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증명하고 있을 뿐일세.(하권 175쪽)

범죄를 자신의 일상에서 분리해내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범죄의 동기를 만들고,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범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동기들이 모여서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하지만 교고코도는 범죄라는 것은 마치 지나가던 집이나 만난 사람에게 재앙을 끼치고 나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마물인 도리마처럼, 우리 각자에게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도리모노 같은 것이라고 설파한다. 즉 누구나 갑작스런 살인 충동이나, 파괴 본능을 어느 순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이라는 것은 갑작스레 조성되어지는 환경을 말하며, 바로 그 잠깐 동안의 몇십분의 일초라는 짧은 순간동안 도리모노가 지배했을 때 범죄는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가 발생하고 나서의 사회적 개인적 불이익을 이성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욕구가 일더라도 절대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도리모노의 순간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동기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나서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성적 작용으로 나타나는 설명일뿐인 것이다.

소설 사건의 제일 근간이 되는 것은 망량의 순간이지만, 직접적 사건의 발단이 되는 것은 이 도리모노의 작용때문이다. (망량은 마음의 틈에서 발생하는 유혹정도라고 해야할까, 책 속에서는 망량에 대한 소개, 해설이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진다. 즉, 일정한 형태로 정의되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의 경계선에 있으면서 사람의 조그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유혹정도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겠다.) 따라서, 처참한 살인 사건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심판을 가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며, 심리적 자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이 도리모노라는 것의 습격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망량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양사인 교고쿠도는 소설의 결말부분에 각자의 망량을 떼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자만, 금전욕, 사랑, 이해.... 망량은 개인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 아차 하는 순간 망량의 작용으로 도리모노가 나를 스쳐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해본다. 나의 망량은 무엇인가하고, 내 마음 속에 감추어진 망량의 상자속에는 무엇이 숨어있는가하고. 그리고 다시 생각해본다. 그것을 밝힐순 없을 것 같다고. 다만 얼핏 망량의 그림자를 보았으니 내 마음에 틈을 보여주지 않도록 살아야겠다고. 그런데 틈을 보이지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행복해지는 것은 간단한 일이거든.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하권 501쪽)

결국 불행이 사람의 조건인 것일까? 주저리 주저리 매달린 마음의 찌꺼기를 지녀야만 하는 사람. 언제나 도리모노가 들어올 틈을 지닐수밖에 없는 몸뚱아리.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걸 비워버리면 어떨까? 텅 빈 곳엔 빈 틈도 없지 않을까? 空 속에는 경계도 없으니 망량도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바로 그것은 神人의 경지이기에 또한 다른 방향으로 사람을 그만두어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을 체념하게 만드는 무거운 결말이지만 한편으론 타인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은 있을 수 없다. 말 따윈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이 통할 리 없다.(하권 36쪽)

통하지 않아도 이해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의 마음 속엔 틈이 있을테니까. 도리모노가 스쳐지나가는 그 자리에 우리 타인의 마음이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장미빛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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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1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는 서평입니다^^

하루살이 2005-10-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막 쓰자마자 읽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아직 제대로 머리속에 정리되지않은 글인데, 과찬이에요 ^^;;;

2005-10-12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0-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비밀을 알았으면... 혹시 습득하시면 저에게도 비법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나서 친구들과 소주 한잔(한병... 두병...)을 마셨다. 도저히 그냥 집으로 들어갈수 없게 만드는 쓸쓸함. 그 쓸쓸함을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났다. 일본 영화라 그런지 이번엔 소주가 아니라 정종을 냅다 들이켰다. 아 그 무어라 표현못할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 가슴이 싸~아 하니 아려오는 고독감.

이 영화는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 사실을 모르고서 보더라도 하루키의 냄새가 지독히도 품어져나오니 금방 알아챌 것이다. 정말 너무나도 하루키적인 영화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아직도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미야자와 리에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영화를 보는 행복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잔잔한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영상은 자꾸만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시간은 그렇게 컷과 컷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 아름다운 시 한편을 보는듯한 감상에 젖어드는 것 같다.

토니 타키타니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게 이름을 묻고나선 항상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곤한다. 그래서 토니는 어려서부터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버지는 재즈 트럼본 연주자로 공연을 하는라 집을 비우니, 모든 것이 혼자다. 특히 혼자서 밥을 먹는 장면은 너무나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는 매끼 그렇게 혼자서 밥을 먹지만 그다지 쓸쓸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오호라, 토니도 그렇단다. 특별히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토니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들 속에 예술성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에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정확한 묘사만이 그의 그림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는 기계를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밥벌이도 당연히 기계에 대한 그림으로 해결한다. 꽤 잘 나가는 일러스트가 된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 온 에이코라는 여성에게 빠져든다. 사랑에.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 것이였는지를 깨닫는다. 과거 자신의 삶은 감옥에 갇혀 산 것과 다를바 없다는, 고독은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이기에... 토니는 15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에이코와 결혼한다. 눈앞에 있는 행복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혼 초기 굉장히 초조했으나 이내 행복이라는 일상을 즐기게 된다.

에이코는 정말 완벽한 여자처럼 느껴진다. 딱 하나만 빼놓고. 바로 쇼핑중독증. 특히 옷에 대한 집착이 크다. 거의 매일 새 옷을 하나씩 사들여야만 한다. 토니의 집 방 한칸은 이 옷들로 가득찬다. 그리고 갑작스레 다가오는 교통사고. 731벌의 옷만 남기고 에이코는 떠난다. 옷들은 에이코의 그림자처럼 다가와 점점 희미해져간다.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토니는 에이코와 똑같은 신체치수를 지닌 여자를 구한다고 신문에 공고한다. 에이코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발견한다. 그 여자에게 에이코의 옷을 입어달라고 요구한다. 여자는 그 옷들로 가득찬 방에서 조용히 흐느낀다. 토니는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채용을 취소한다. 그리고 옷들도 다 팔아버린다. 몇 개월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퓸인 재즈음반이 그 방에 들어가 있다 이내 다 팔아치운다. 그리고 관련된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은 빈방, 토니는 <혼자서> 옆으로 드러누워있다.

아~ 그 상실감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그곳에서 얼핏 나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나의 가슴 한 켠은 차디찬 겨울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토니.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정말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울지마라, 부디.

한 모임에서 에이코와 사귀었다던 남자를 만난다. 에이코의 이상한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었지 않았는냐는 질문에 에이코에 대한 것은 이제 모두 잊어버렸다고 답한다. 하지만 에이코를 그렇게 욕하지 말라고,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고 소리친다. 아, 다 잊어버렸단다.

술을 마시던 친구는 그게 가능하단다. 자기도 실연의 아픔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경험이 있단다. 마음의 벽을 쌓아두면 기억의 통로가 막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 애써 슬퍼하지 않으려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자기 <봄날은 간다>가 떠오른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던 그들이.

추억은 누구에게는 기억으로, 누구에겐가는 망각으로 남겨지는가 보다.

외로움을 알아버린 한 사내의 치유되지 않을 상실감이 이내 나를 술의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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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0-0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타키타니,,, 흠...거 심상치 않은 작품일듯...
하루살이 님은 잔뜩 흔들어놓다뉘...

하루살이 2005-10-0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쓰려... 후유증이 크답니다^^

icaru 2005-10-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봐버렸다지요........ 아!!
알고 읽으니.... 다시 보입니다... 퍼갈께요~
그러고 보니..... 거의 1년 동안 하루살이님이 달고 계셨던 이미지 간판을 토니 타키타니로 바꾸셨군요~ 흠...발견!!

하루살이 2005-10-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 사람들에게 하루키 좋아하느냐고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좋아한다면 꼭 보라고 주접좀 떨었죠. 욕먹을 각오하고서. 그런데 이카루 님께서도 괜찮게 보셨다면 다행입니다. 휴~ 살았다. *^ㅇ^* 아마 당분간 간판은 안바뀌겠죠.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엔...

icaru 2005-10-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와 쇼자부로(?토니 아빠)역을 한 사람이 맡고, 에이코와 또 다른 여자(신체 싸이즈가 같은) 역을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면서요... 전혀 눈치 못챘다 아닙니까...동일 인물이 맡았다는 거..

하루살이 2005-10-3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친구와 둘다 1인 2역이지 하면서 극장밖을 나오던 생각이 나네요.^^
 
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소설이나 서스펜스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장르는 대략 3가지로 흘러가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첫째는 사건이 일어난 후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 종반부에 이르러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이 진범임이 드러났을 때 이야기는 극도의 쾌감을 전한다. 두번째는 범인을 미리 밝혀주고, 범인을 잡고자 하는 주인공과 아슬아슬한 추격전.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으며,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가 흥미진진하다. 세째는 범인이나 또는 추격자의 트릭.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는 범인을 어떻게 유인해서 잡아들이는지에 대한 방법 그 자체가 흥미를 끌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소설 <백야행>은 이 세가지 부류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울듯 싶다. 물론 소설의 종반부에야 범인을 확실히 밝힌다는 점에서 첫번째로 볼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책을 읽는다면 아마 첫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범인을 예상할 수 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혹시나 결말 부분에 어떤 반전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지만 그건 그냥 기대로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두번째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범인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은 하지만 정작 본격적인 추격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군다나 새로운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첫번째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세번째 분류에 속해 기상천외한 어떤 트릭을 숨기고 있는냐 하면,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 범죄의 방법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비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 도대체 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는단 말인가? 솔직히 범인도 이미 알아챘고,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으론 책을 읽는 동력이 조금 모자라다. 그래서 중반부의 후반부터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않다. 그럼에도 책의 결말을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도대체 왜 이 사건은 발생한 것인가? 라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 바로 왜라는 측면에 이 소설의 재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오사카의 한 동네. 전당포 가게 주인이 짓다 만 건물의 내부에서 시체로 발견되어진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후 근처 아파트에 살던 주부 한 명이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이유로 죽는 일이 발생한다. 두 사건은 연결된듯 하지만 그 고리를 찾을 순 없고 결국 유야무야된다. 시간은 흘러 전당포 가게 주인의 아들과 주부의 딸이 초등교 5년에서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생이 되고... 이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선 이상하게도 계속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첫번째 사건이 발생한 후 19년간의 행적을 담아낸 소설은 마침내 범인을 밝히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사건의 발단은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리타 컴플렉스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유아에 대한 성의 집착이나,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식도 팔아먹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없는 엄마 등등.

원래 자신에게는 모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야에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료지를 낳은 것도 아이를 원해서였던 것이 아니라 낙태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스케와 결혼한 것도 이것으로 일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답답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가 아닌 늘 여자이고 싶었다.(하권 257쪽)

상처받은 자가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남에게 주고 마는 세상의 섭리가 무서워진다. 그것이 섭리가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의 행태라면 좋을 것을... 세상은 가끔 낮이 찾아오지 않는 끝없는 백야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 백야를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해할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서려있는, 조금은 허탈한 추리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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