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정상 상왕봉을 앞두고

 

2005.10.25.(화)

경상도 합천에 있는 가야산에 올랐다. 가야산은 조선 8경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도대체 조선 8경이 어디인지는 알수가 없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모를 뿐더러 또 제각각이라 도무지 어느 곳이 8경에 속한지 나로서는 감도 잡을 수 없다. 다만 그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법보 사찰이다. 물론 8만대장경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한 이유일터다. 해인사라는 절 자체는 그다지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진 않으나 주변의 고목들이 이곳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더군다나 붉은 색을 자랑하는 굵직한 소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왠지모를 청정한 느낌을 준다. 소나무 기둥 하나하나엔 모두 숫자가 쓰여진 조그만 팻말을 붙여놓았다. 아무래도 최근 소나무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하는듯이 보여진다.

가야산은 돌산이다. 흙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돌길을 걸어야만 한다. 마애불상이 놓여있는 산 중턱 900미터 정도까지 올랐을때 언뜻 보여지는 정상은 그야말로 이 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위의 사진은 그 정상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돌더미 위에서 찍은 것이다.  (산 위에 조그마한 점이 바로 나.)900미터 정상에서 다시 뚝 떨어져 600미터까지 내려섰을때 아, 지금부터 치닫고 올라가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최고 1400미터에 가까운 상왕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보자 마음 먹고 가다 밑에서 바라보던 돌산과 다른 분위기에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하루종일 안개에 쌓여 먼 풍경은 그다지 잘 보이진 않았으나 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정상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순간 합천에서 성주로 넘어서는 순간이다. 산은 하나인데 그것을 가르는 인간의 잣대는 산 위에 가상의 선을 그어놓았다. 산은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선은 산을 내려온 순간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주쪽으로 넘어가서 다시 해인사를 가기 위해선 군이 바뀐다는 이유로 택시 값이 엄청 비싸다고 한다. 그 거리에 상관없이) 칠불봉에서 다시 해인사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백운동 쪽으로 떨어질 것인지 고민이 됐다. 백운동 쪽은 대중교통이 불편해 오늘 안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와 산에 오를땐 대부분 같은 길로 내려오지 않았기 떄문에 이번에도 과감히 백운동 쪽을 택했다. 해인사 쪽보다는 단풍이 많이 들어있고 색깔도 곱긴 했지만 올해 전반적으로 단풍은 그다지 예뻐 보이진 않는다.

백운동으로 내려오니 염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버스는 2시간 후에나 있다니 음,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보자.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걱정은 많이 됐다. 대학생이었을땐 차 얻어타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시커먼 남자 2명이서 차를 얻어탄다는 것은 그닥 만만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세상이 그것을 점차 어렵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세상 탓에 나이탓에 얼굴 탓까지 해본다.

그런데 다행히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차가 해인사까지 갈 일이 있어서 그 차를 얻어탔다. 1주일에 한두번 간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그걸 얻어탔으니 운도 좋다. 백운동 쪽에 지어지고 있는 야생화 화원이며, 단풍 이야기며, 성주 참외 이야기 등으로 얻어탄 고마움을 아저씨에게 건넨다. 해인사 가는 중간에 내려 고령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 후 고령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산을 오르면서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겁을 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아마 오늘은 어제 팔공산에 오른 이후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다 보니 다소 다른 생각을 떠올렸나 보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심리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산의 정상은  나에게 언제나 그대로의 감성을 준다. 때가 낀 가슴과 마음을 시원한 바람으로 깨끗이 씻어준듯한 느낌. 이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아마 산에 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바람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난 행복하다. 산의 줄기줄기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사이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집착을 벗어던진다. 깍이고 깍여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주는 산처럼 깍이고 깍여도 아파하지 않을 것임을 마음 속에 다지며...


                                      

 

 

 

 

            가야선 정상에 올라서기 전

            마주치게 되는 불상

            난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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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0-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 가야산 이제보니 돌산이네요~
한번도 안 가봤다지요...
무슨 소원 비셨는지..이제 생각나셨는가요오?

하루살이 2005-10-3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하지 못하는 소원이 더 애틋합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계속 소원을 바라던 그 상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얽매이지 않을 잠깐 동안의 소원. 그것으로 족합니다.
 

지난주 일요일 SBS 스페셜로 방송됐던 고지마 원숭이가 자꾸 떠오른다. 일본의 고지마라는 무인도에 살고 있는 원숭이 집단을 촬영한 기록을 보여준 다큐프로였다. 5년이라는 시간의 공백동안 변한 집단의 권력구조 속에서 제작진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야시'라는 암컷 서열 1위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 몰락의 과정이었던 듯 싶다.  내가 보기엔 서열의 혜택이라는 것이 먹이의 접근도에서 드러나는 것 같고,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먹이를 구한다는 것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졌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바뀌기 전까지 분쟁을 조절하고 외부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해왔던 서열 2위였던 수컷 원숭이가 서열 1위로 오르는 순간 먹이에만 집착하고 모든 제 문제들은 그냥 놓아둬버리는 나태함을 보여준다. 누구도 자신의 권력을 침탈할 수 없다는 안정적인 요소가 그의 게으름을 불러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서열 맨 꼴찌였던 암컷 한마리. 원숭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를 먹기 위해 자신에게 매달린 새끼마저 떼어놓으려 하는 어미를 보는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달려드는 새끼와 그것을 떼어놓으려는 어미, 그리고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새끼를 쥐어패는 모습 속에서 모성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보다 못한 할머니 원숭이가 어미를 새끼에게 보내는 장면, 그리고 새끼를 안으면서도 쥐어박는 모습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온한 생각.

가족은 굴레다. (사랑이 굴레인것 처럼)

원숭이를 통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걸까? 모성이라는 것도 결국 교육을 통해 확장되어지고, 강화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보험금을 위해 아이를 살해하는 어머니, 벌어먹는 게 힘들어 동반 자살을 택하는 어머니,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가 아이들 먼저 강에다 던져버리는 냉정함...

모성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모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 한계를 계속 넓혀왔고, 아예 한계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기야 그래서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핑계를 댈터이니 원숭이를 가지고 모성을 논하지는 말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성은 본능이라고 배워온 터이니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본능도 있을 것인가?

어머니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라지 말자. 어머니의 이름으로 한 여성을 저울질하지 말자. 

아~ 그러니, 나의 사랑스러운 어머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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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 스피노자

홍세화 씨가 자주 인용하는 글.

나도 돌이켜보면 고집불통이다. 나를 부수고 새로운 나를 짓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 누에고치를 뚫어야 하듯, 데미안처럼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새처럼...

더군다나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면 이 고치와 껍질의 두께는 너무나 견고해져 제 아무리 거센 칼끝으로도 깨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하나의 창으로 통해버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창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벽을 허물어 그 자리에 창을 만드는 일. 하지만 두꺼운 벽에 흠집을 내는 것마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창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고마운 책들이 분명 주위에 많을 터인데, 나에게 만들어져 있던 창은 너무나 견고하다. 이 창은 홍세화 씨의 말처럼 강압적인 교육을 통해 형성되었고 현실의 길을 통해 다뎌졌다. 따라서 왠만해선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그 책들마저 이 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창을 내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 간혹 기존의 창을 조금 넓혀주기는 하지만.

나이 마흔은 불혹이라 했다. 아직 마흔까진 시간이 많다. 불혹의 마음을 갖는다는 건 내 주위가 담으로 쌓인 것이 아니라 통유리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니 말이다. 벽으로만 둘러쌓여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미혹될 것인가?

이젠 내 창을 의식해보자. 분명 지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의식의 벽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밀알 한 알이 썩어야 비로소 새로운 밀알들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죽여가는 작업을 해보자. 두렵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아직은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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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젊습니다....
 
부자사전 1
허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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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부자가 되려는게 꿈인 세상이다. 몇 년안에 몇 억을 모을 수 있는가가 화두다. 그야말로 세상엔 온통 재테크 기술로 넘쳐난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부자가 되는 그런 세상이 머지않아 올지도 모르겠다는 환상마저 갖게 만든다. 이렇게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걸까? 만화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부자가 되면 다 행복해지는 걸까? 라고 물었을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작가는 부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또한 생각해볼 문제다. 부가 행복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면 국가의 부 지수가 낮으면서, 그리고 실질적으로 수입이 적은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없다면 왠지 불안하다. 가난하면 절대 행복해질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지금 당장에라도 단 몇 억, 아니 몇 천만원만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훨씬 행복할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부자이고, 또 얼마나 여유가 있어야 행복할수 있을까?

어렴풋한 기억으론 만화에서는 부동산을 제외하고 10억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자라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이 만화의 목적인바 그것을 잠깐 소개해보면, 부자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성실성과 실천력이 그 뿌리라고 한다. 무엇인가 비결을 바랐던 사람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줄듯 싶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렇다. 아끼고 아껴쓰는 절약정신으로 종잣돈을 만들고, 그것을 대부분 건물에 투자해 임대수입이나, 부동산 차익을 노려라.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억 속에선 역시 이 땅에서는 부동산이 최고야 라는 느낌만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들이 돈을 모으는 행태를 보면 조금 치졸해보이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 허영만의 아들이 다음에는 베푸는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라고 주문했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모아야만 할 것인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일정한 부의 축적 이후의 그들의 삶은 솔직히 부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양심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으니 만화 속에서도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자본주의에선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순 없다. 조금 전의 부동산을 당장 생각해보더라도 임대업을 한다면 주인과 세를 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땅도 가진 자와 가질 수 없는 자로 나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일정한 부 안에서 누군가가 많이 가진다면 누군가는 그만큼 덜 가질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체 자본의 양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누어 갖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제로섬 게임을 할수밖에 없다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지제도적 측면, 특히 세금을 통해 차이를 줄여나갈 수도 있을텐데, 우리는 오히려 그 차이의 심각성을 말하면서도 실재론 그 차이를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한심스럽다.)내가 가진만큼 누군가는 덜 가지고 있어야지만 하는 사회. 그 속에서 하나라도 더 갖기위해 다들 악다구니를 쓴다면 과연 그 세상은 행복한 곳일까? (우리 사회는 더 갖는 것이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그리고 갖고 있는자가 더 챙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극소수의 특권자가 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다 동원할 수 있도록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는 몇몇 사람만이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 그래서 그 자유로운 소수가 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곳, 그곳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도 행복해지자고, 그러기 위해선 돈을 모아야 한다고, 비책을 찾는 사람들을 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행복으로 가는 유일하고 빠른 길은 먼저 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세상은 가르쳐오지 않았는가? 한번도 그것을 의심해보지 않는 사람들에겐 부자가 되는 것이 일생 일대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로섬으론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아니, 이런식의 자본주의라면 그것을 지탱해줄 사람들을 잃음으로써 끝장날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정말 제로섬으로 움직이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제로섬이 아닌 시너지게임을 할 수 있는 세상은 환상이고 망상일까? 시너지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게 현실일까? 마음 한켠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움크리고 있다. 그 마음을 활짝 피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일단 곳간부터 채워야만 가능한 일일까? 이 책이 말하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그대로 마음의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적용해,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굳은 의지를 갖고 하나하나 방법을 찾아 행동하면 혹시 '행복의 나라'가 가능할까? 의지와 성실성이라는 똑같은 방법을 가지고서도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어디로 갈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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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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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마치 자연 환경 관련 서적이거나 글자 그대로 생태보고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만화라는 것에 놀라고, 책을 읽다가 이것이 자연과는 전혀 관련없는 사람의 감추어진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또한번 놀라게 된다.

이 만화는 경향신문에서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인데,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캐릭터들의 표정과 대사에 감탄하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습지는 가난한 대학생들의 지하 단칸 자취방을 말한다. 작은 방에 4명의 친구와 1마리의 사슴이 동거하는 모양새다. 비록 가난하지만 비참하지는 않는, 아니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이 왠지 감추어진 자신의 속마음을 비추어주는 듯하여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도, 이내 헛웃음과 함께 통쾌한 웃음까지 흘린다.

자신보다 못한 친구 재호가 여자 후배로부터 칭찬을 받고 멋있다는 소리를 듣자, 대뜸 그 친구의 못난 얼굴을 들춰내며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일 뿐이라는, 친구의 아픔을 이해하는 듯한 말을 건넨다. 하지만 속내는 친구가 칭찬받는게 기분 나쁜 것이다는 <칭찬은 고래 친구를 도발한다>라거나, 너무나도 착한 정군이라는 친구,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모습에 주인공 최군과 사슴은 부자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정군이 부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것은 그릇의 차이임을 자각하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다 문득 정군의 일기장을 훔쳐본다. 그 일기장엔 친구들을 난자하는 그림과 욕설이 쓰여져 있다. 최군은 정군을 안으며 친구야 사랑해를 외치는 <친구의 조건>등은 사람간의 관계 속에 감추어진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도덕적 위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방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책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한 컷 속에 담긴 글들이다. 일단 그것들을 조금 나열해보자.

타인의 슬픔을 피해 달아나는 빠른 발걸음이 있다. 혹 내 생활이 더 나아질 일이 없더라도 슬퍼할 일은 없을 것이다고 생각하다 c8 성공하자라고 내뱉고. 쯔쯔 자네 혹시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라는 말에 손을 얹었는가 싶었는데 실은 안 닿았다 라는 한 마디. 꼭 동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사랑한다거나.. 절대 동정이야! 다른 가설은 없어 라거나. 자기보다 부자인 후배에게 월 4만원 용돈 아껴가며 밥 사주다 후배의 정체를 알고 여윳돈 땅에 투자하자 라고 생각하는 등등.

내가 자라면서 배워온 가치관이 산산조각나게 만드는 현실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만화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부자 친구의 옷을 빌려입는 순간, 자신도 왠지 얼짱처럼 느껴지며 마치 상류계급에 속한 듯 행동한다거나, 富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지껄이면서도 실은 먹지 못한 포도는 실 것이다는 것 때문에 나오는 변명거리로 치부하는 등, 위선이라고는 한 자락의 껍데기도 걸치지않고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속말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이내 가슴 한 켠이 시려오는 것은 내가 이미 위선으로 치장되어져 있는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리라.

현실과 이상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지켜내기 힘든 일관된 자아의 정체성. 돈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안 후에도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의 부재. 단 몇 컷의 만화 속에서 크게 깨우친다. 속내와 밖으로 표현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삶이 결코 스카이라인으로 내비쳐지는 불야성이 아니라 배기가스가 온통 진동하는 지하단칸방인 사람들에게 이 만화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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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5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제목보고 진짜 습지생태보고서인 줄 알고 주문헸었지요...ㅋㅋㅋ
"내가 먼저 보고 조카들 공부하라고 주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만화는 거의 다 래핑(비닐포장)되어서 판매가 되니까...
내용은 모르고 그냥 작가의 이름을 보고 구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