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의 기행문이라니 귀가 솔깃하다. 실은 귀가 솔깃한게 아니라 눈이 반짝였다가 맞는 말이려나? 제목도 범상치 않다. 사색기행이라... 여행은 만사를 잊게 만드는 알코올과 같은 힘과 더불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주는 창조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서 드러난 다치바나의 여행은 모든걸 잊고 떠나겠다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다치바나의 여행은 휴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탐사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여행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자.

여행은 결국 만남이다. 만남은 본질적으로 계산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만남을 기대한다면 일정일랑 짜지말고 되어가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26쪽)

여행의 패턴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여행의 본질은 발견에 있다. 일상성이라는 패턴을 벗어났을때 내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데 있다. (79쪽)

이렇게 그의 말을 써놓고 보니, 다치바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이건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다. 만남이라는 것도 그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있지 않고,  그가 여행에서 발견한 것 또한 이미 작정을 하고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수확이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만남들이 우연히 전개되기도 하고, 꾸며진 일정표대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잘 짜여진 여행계획표를 들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탁월한 취재능력에 있다고 보겠다. 그저 눈요기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묻고 탐구하는 일상의 자세가 여전히 여행지에서도 발휘된 탓에 그의 여행기는 르뽀처럼 보여진다.

특히 유럽 반핵 무전여행이나 팔레스타인, 뉴욕에 대한 글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지금이야 원하는 정보를 인터넷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손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겠지만, 다치바나가 여행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인상을 준다. 뉴욕의 경우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미래 예측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더군다나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 뒤에 감춰진 차별의 벽(시오니즘과 유태인, 팔레스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기독교간의,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을 들춰내는 그의 날카로운 눈은 그야말로 그가 말하는 새로운 발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여행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프랑스 여행이었다. 최상급의 포도주를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모두 느껴볼 수 있는 행운, 유럽의 치즈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최상의 사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로 표현될때 느낌은 비로소 인식이 된다. ... 맛있다 좋다 시시하다라고 하는 것은 와인을 마시는 행위가 생리적 행위에 머물뿐 문화적 행위로 승화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할만큼 문화적 승화라는 최고의 특권을 누린 것이다. 이런 여행은 아무나 어느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가 말하는 패턴화되고 계산화된 만남이라는 여행의 본질과 먼 계획을 세우더라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부러움 말고 무엇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가 느낀 문화적 풍요로움을 글로서 조금 맛보는 것으로 만족, 아니 억울해하고 싶다.

그의 여행이 문화적, 정치적 발견이나 충격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인도 경험이나,  개기일식 체험은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는 감성적 충격을 전해온다. 아마도 이런 급진적 체험은 자연의 경이를 통해서 느끼는 경우가 많을것 같다. 인간 또는 자신이라는 존재의 초라함을 발견하거나, 생명의 신성성을 경험한다는 것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극대치가 아닐까 싶다. 개기일식 여행에서 소개된 사람들처럼 인생의 모든 목표가 개기일식 사냥으로 변해버릴 정도의 강렬한 만남, 그런 만남이 기다려진다. 또한 무인도의 경험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도 체험해보고 싶다. 

나그네의 발걸음이 아닌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래서 여행은 충격으로 또는 사색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임을 다치바나를 통해서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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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술술 읽히거든요, 다치바나 책의 이상한 특징 중의 하나같아요.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가끔 그들의 강박관념을 엿보게 된다. 내가 심심해서 보는 영화들이라는 선입관이 강한 탓일까? 재미있으면 됐지 또 뭘 바라나?라는 심리를 그대로 제작쪽으로 돌리면, 재미있게 만들면 됐지 무얼 집어넣으려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는 2002년 [폰 부스]라는 영화와 무척 닮아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목숨을 저당잡히고, 상대방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처지의 긴박감. 한정된 공간만을 비추는 속에서 지루함을 잃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기억나긴 하지만 <폰부스>에서는 저격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리버티>의 경우는 저격자도 대상자도 모두 다 드러낸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집중은 무엇이 이런 무자비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저격자를 이끌었는가에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로 이야기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무척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자신의 딸이 학교 총기 사건으로 죽게 된 전직 CIA요원.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하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단순한 복수로 끝내지 않고 보다 고귀한 무엇인가를 덧씌워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원인을 타당하게 밝혀내고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상에 변화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이 곳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은 그래서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덫이 있다라고 말하며 경고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덫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작용하며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방식. 그저 덫이 놓여있는 곴까지의 풍경을 그려대다 갑작스레 덫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의 충격을 크게 만드는 것이 할리우드식 표현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한대도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도 궂이 도덕적 포장을 하려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리버티의 주인공의 근본적 욕망은 복수심에 있었을 터이다. 직접적인 가해자를 대상으로 했어야 했겠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고 복수를 행하기에는 왠지 쉽지않다. 개별적 존재자로서 마주쳤을때 복수의 칼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그 이유에 대한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체 사회로 퍼져 나간다. 물론 실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사건들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눈덩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 없이 느닷없이 발생한 눈사람만을 이야기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음모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정말로 진중하게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재미로 희석되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러니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고 꼭 계속해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 방식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더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만 하지 않았으면 싶다. 단순히 이런 식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부추기지 않았으면 싶다. 지극히 개인적으론 그냥 대놓고 복수를 행하는 타란티노처럼 스크린 속에서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할리우드는 할리우드로, 마이클 무어는 마이클 무어식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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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티는 안 봤지만... 볼링 포 콜럼바인, 폰 부스는 봤어요..
세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엮일 수 있군요~

하루살이 2005-11-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다 붙히기 선수입니다...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영화로 보고나서 나름대로 괜찮군 생각했었다. 영화보다 책이 더 낫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긴 했지만 일부러 책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같은 작가의 새책을 손에 쥐게 됐다. (물론 [도쿄 타워]라는 이 책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마 곧 개봉하지 않을까 싶다. ) 손에 꼭 들어가고 두껍지도 않아 주저없이 읽게 됐다. 하루에 다 읽지 못하고 중간 중간 쉬어가며 읽어갔는데 하루가 지나고 밤이 찾아오면 이들 주인공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책은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두 청년과 30대 40대 여인의 사랑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의 방식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크게 나눠보면, 한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다양한 사랑 속에서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방식 정도이지 않을까? 물론 이 사이에는 정말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할터이지만 말이다.

토오루는 한사람만을 향해, 코우지는 마치 바람둥이마냥 사랑을 대한다. 그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을 통해 느끼는 감성이나 심리변화는 비슷해보인다. 책에서 드러나는 사랑에 대한 감정은 연애편지를 쓸 때 꼭 써먹을 그런 밀어들이 아니라 일기장에 꼭꼭 눌러쓸 그런 표현들이라 생각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져드는 거야 (54쪽)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은 시후미로 인하여 존재하고 있다. (58쪽)

시후미가 주는 불행이라면, 다른 행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70쪽)

사랑을 하면 강아지도 시인이 된다 (84쪽)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115쪽)

좋았겠다, 토오루는 그 시절의 코우지 곁에 있을 수 있어서 (147쪽)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때문 (298쪽)

미련, 그말에, 코우지는 흠칫 놀란다. 미련이 남은 듯 키미코에게 연락해버리는 일을, 지산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318쪽) 키미코와 자신이 그토록 서로를 갈망했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든 유리가 있든, 메우지지 않는 고독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319쪽)

누구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상처 입는 것에 저항하는 거야, 여자들은(327쪽)

사랑을 하면 기다려지고, 그 기다림이 오래되더라도 행복하고, 목소리가 듣고싶고, 항상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기와 함께 하지 못한 이전의 시간들이 안타까워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라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쌉싸름하기도 하지만 달콤한 사랑을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그 대부분의 심리가 20살 청년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30대 40대 주부인 시후미와 키미코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정말 이 청년들을 순수하게 사랑했는지, 아니면 불륜의 쾌감을 즐긴건지. 하지만 이런 혼돈도 청년들의 사랑앞에 같이 녹아들어 분명 이들도 사랑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이들을 만나왔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성을 벗어던지고, 소설은 이들의 사랑이 불륜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사랑 앞에선 아무 것도 잃을게 없다. 오직 사랑 그 자체를 잃는 것만이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일탈이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일탈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은 일탈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때문이리라. 내가 순수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따르고자 해도, 그것이 금지된 것이라면 선뜻 행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지금까지 쌓아온 돈이나 명예, 권력이 무너질까 두려운 것이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관계의 망이 끊어질까 겁나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울타리 안에 거주하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경계를 벗어나도 무섭지가 않다. 그러나 일단 가지고 있는 자는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사랑은 그 두려움을 없애준다. 용기를 일으킨다. 사랑 앞에선 일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보면 젊은 이들이 이토록 사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 쌓아놓은 토대가 두텁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면 먼저 사랑에 대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다.

다른 여러 사람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친해지지도 고립되지도 žb으면서 존재하는 기술을 습득해버렸다.(89쪽)라는 토오루의 심정. 코우지에게 유일하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마음을 준다는 행위였다. 묘하게 연상의 여자한테는 마음을 허락해 버린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는 여자에게만, 자기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302쪽)라는 코우지의 심리. 이 둘을 합쳐 놓으면 내 속에 감추어진 그림자가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난 너무 늙어버린건가? 아니면 아직도 어린 애인가?

고슴도치의 사랑 마냥, 가시에 찔릴 각오를 하고, 아름다운 장미를 꺾기 위해 가시에 찔릴 각오를 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슴을 찔릴 각오를 하고....

인간이란 모두 완벽하게 상처 없이 태어나지, 굉장하지 않아? 그런데, 그 다음은 말야, 상처뿐이라고 할까, 죽을때까지, 상처는 늘어날 뿐이잖아, 누구라도(327쪽)

코우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내 마음엔 아직 커다란 생채기 하나 없다. 상처가 생기기 전 이미 항생제를 들이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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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2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0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기에...

2005-11-1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1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께서 드린 걸로 생각할게요^^
 

어라! 오늘은 남산 길이 달라 보인다. 너무 예쁘다.

단풍나무의 잎들은 여전히 초록색이다. 간혹 단풍이 든 나무들도 초췌한 색이다. 은행나무가 그나마 예전같은 밝은 노란색을 뽐낸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 자체를 뜯어보면 전혀 예뻐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도 군계일학이란 말을 쓸 수 있으려나. 아름답고 투명한 선홍빛 나뭇잎을 지닌 정말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도 간혹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벚나무의 칙칙한 누르스름한 단풍잎, 언제 단풍이 드었는지도 모르게 땅을 뒹글고 있는 갈색의 잎들. 눈 앞의 나무들은 생명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잠깐 눈을 들면 세상이 달라보인다. 울긋불긋한 숲 전체가 너무 아름답다. 더불어 숲이란 말을 여기에다 인용해도 될까. 더불으니 아름답다. 자꾸 뒤를 돌아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남산의 단풍이 점차 절정에 들어간듯하다. 

혼자서는 아름답지 못한 것들도 모여있으니 이렇게 마음을 빼앗을수가 있단 말인가. 숲을 빠져나와 멀리서 바라보니 산은 또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시내 한 복판에 붉으스름한 언덕배기. 붓 한번 싹 스치고 지나간듯한 모습.

나무만을 보아도, 먼 거리서 숲만을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산 속에 들어가면 있다. 적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절정의 맛을 선사하는 것. 그 거리두기가 어렵다.

부딪혀 아프지도 않고, 떨어져 외롭지도 않을 그 거리를 찾아헤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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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산 근처에 사시는거죠? 아니면 직장이?
암튼... 축복받으신 겁니다!

하루살이 2005-11-0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낙엽비를 맞으며 걸었죠. 부럽죠.
그러고보니 정말 축복받은것 같네요.
 



팔공산 갓바위 앞에서 난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2005. 10. 24(월)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다. 수능을 앞두고 많은 수험생 어머니들이 오르내리는 곳. 분명 효험이 있다고 하는 불상을 찾기 위한 길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건만, 고개는 계속해서 깔딱고개였다.

마침내 보게 된 갓바위. 난 아미타여래나 석가모니 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피커에선 계속해서 약사여래불이라는 염불만이 반복된다. 그 염불에 맞춰 아주머니들의 절은 계속되고, 난 의아심을 가졌다. 분명 약사불이라면 호롱병(약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약사불이 맞다. 왼손의 약병은 바람과 비에 마모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약사불에 대학합격 기원을 그다지도 바라는가? 원래 약사불은 건강을 기원하던 불상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서원들을 들어주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약사불에 유독 대입합격을 기원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소원이 되었든 아마도 이 불상은 그 소원을 들어줄듯이 세상을 지긋이 바라본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내는 것들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을때, 또 그것이 특정한 상징성을 간직한채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다면 이미 그것은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게된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월이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팔공산 갓바위에는 그런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갓바위에 절을 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한다면 불국정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동화사 쪽으로 길을 향한다.

중간에 마주치는 암자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차 있는 불상들. 그런데 이 불상들은 금박으로 화려하다. 동화사가 조계종사중 손에 꼽히는 부자인줄은 알지만 도대체 산 속 암자 불상을 금박을 입혀 놓은 것은 누구의 발상인지 참 안타깝다.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될수 있다는 화두. 추위를 이기고자 불상을 태워버렸던 선종의 고승 등등. 불상이 우상이 되는 순간을 경계했던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크고 화려한, 돈으로 칠해놓은 불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주려 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곧 부처이거늘 왜 부처에게 금옷을 입힌단 말인가? 갓바위 오르는 길이 그렇게 험한 이유 또한 끊임없이 땀 흘리며 오르는 나를 바라바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우상을 만들고 싶어하는가? 내가 스스로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힘으로 운명을 거슬러보겠다는 욕망의 끝이 무섭다.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팔공산은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산이다. 갓바위와 통일약사불이 공존하는 곳. 과연 불토정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 거대한 약사불이 과연 통일의 염원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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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3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저도 산에 오르기 너무 좋아하는 사람 입니다.
기회가 없어서 많은 산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는 일이 무지 행복하답니다.

하루살이 2005-10-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산을 특히 좋아한답니다. 올 겨울은 과연 얼마나 자주 눈꽃을 대할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 시간과 건강이 허락해줄지, 그리고 마음의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을지...

icaru 2005-11-0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이 줄을 읽으면서...너무너무 하루살이 님 답다는 생각을 ^^;;; =3=3=3

그나저나..
와아~ 하루살이 님이시다!!!!

하루살이 2005-11-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하게 남아있어야했는데...^^

icaru 2005-11-0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함의 절반은 남아 있당게요~
아슴프레 하게 보여요...(의도하신 거 같당게...!)

하루살이 2005-11-0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gracina 2005-11-0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게다가 하루살이님을 드러내 주시니 반갑고도 반갑네요^^


하루살이 2005-11-0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갓바위의 세월의 흔적을 잘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속에서 영험함이 힘을 가질텐데...